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녹나무제 목관이 발굴 조사된 경남 창녕 송현동 고분군 전경. 아래 사진은 송현동 고분군 7호분에서 나온 녹나무제 목관. 김동하 기자 | |
지난 17일 기자가 경남 창녕군 송현동에 있는 송현동고분군(사적 제81호)을 찾았을 때 6, 7호분과 15, 16, 17호분을 에워싼 울타리가 닫혀 있었다. 그날 발굴을 하지 않는다는 표시였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 2004년부터 2006년까지 6, 7호분 발굴을 마쳤지만 인접해 있는 15, 16, 17호분은 지난해 5월부터 발굴을 시작, 올해 중반까지 진행된다.
고분군 위에는 사적 제65호인 목마산성이 있고, 오른 쪽 뒤로는 사적 제64호인 화왕산성이 있는 화왕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이 고분군 북서쪽으로는 교동고분군(사적 제80호)이 볼록볼록 나타나 있었다. 이들 고분군과 창녕시가지가 자연적인 지형으로 인해 보호를 받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날 고분군과 함께 국보 제34호인 술정리 동삼층석탑과 보물 제520호인 술정리 서삼층석탑 등 창녕 지역 곳곳을 안내해 준 창녕문화원 김영출(78) 향토사연구소장은 송현동고분군 옆의 자하골(일명 잣골)을 가리키며 "내가 어렸을 적에는 계곡 쪽에 있던 고분들이 계곡물에 파여 내부가 들여다 보이고 유물이 곳곳에 드러나 있었다. 이 일대가 모두 무덤 투성이였다"고 과거 기억을 떠올렸다.
송현동고분군은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하기 전인 1917년에 일본 고고학자 이마니시 류가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분포조사를 하면서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송현동고분군에는 수십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으며, 그중 11기가 보고됐다. 이마니시 류가 당시 3, 4호로 명명한 6, 7호분은 표주박 형태의 표형분으로 전체 높이는 6호분이 9.6m, 7호분이 9m로 기록돼 있다. 이는 현재 높이와 큰 차이가 없으나, 7호분은 일제 강점기 조사 이후 경작지로 개간돼 평지화가 많이 진행됐다.
송현동고분군이 세간의 많은 관심을 끌면서 2004년 10월 11일 3차 현장설명회를 할 때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드물게 직접 현장에 내려왔다. 유물의 출토량이 많은 이유도 있었지만, 7호분에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녹나무로 만든 구유형 목관이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기원전 1세기께 경남 창원 다호리 1호분에서 구유처럼 통나무를 파서 시신을 안치한 목관이 출토된 적이 있으나, 송현동 녹나무제 목관과는 형태도 다르고 축조 시기에서도 차이가 났던 것이다. 유 청장은 그날 현장에서 "좋은 유적에 좋은 유물이로군"이라는 말을 연발했다.
길이 3.4m, 너비 1.2m인 녹나무제 목관은 지난해 2월 보존처리 과정이 공개됐는데, 그 결과 바닥 판재 한쪽 면에 밤나무로 만든 부재를 끼운 것으로 드러났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측은 이 목관에 대해 재미있는 해석을 내렸다. 즉 이 목관은 처음부터 시신을 안치하기 위한 목관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배로 사용하다가 나중에 목관으로 재활용됐다는 것. 목관 바닥면이 배 갑판 구조라는 것이다.
6호분은 다소 도굴이 됐으나, 7호분은 무덤 내부가 일부 내려앉는 바람에 유기물이 쌓여 도굴이 되지 않았다. 박종익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은 " 6호분이 먼저 조성되고 연이어 7호분이 6호분에 붙어 표주박 형태로 만들어졌으나, 이들 무덤이 부부묘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말했다.
6, 7호분은 출토된 토기와 무덤의 축조양식으로 볼 때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됐으나, 당시 이미 신라의 직·간접적인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됐다. 다른 지역보다 신라화가 일찍 시작됐다는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6, 7호분을 교동고분군 11호와 31호의 과도기적인 단계로 설정하고 있다.
박 실장은 "이들 무덤에서 나온 금제세환이식, 금동운주 등과 같은 비철금속 유물은 창녕지역에서 자체 생산한 것이 아닌 신라에서 제작·분배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러한 비철금속 유물의 부장은 이 시기 창녕지역 뿐만 아니라 대구, 경북 경산, 부산 동래, 경북 성주·고령 등에서도 이뤄지고 있어 경주세력의 확산 과정과 묶어 생각해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