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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방 풍경과 댕기머리의 서당도령
나는 10여 세가 되기까지 계집아이처럼 머리를 길게 길러 댕기를 드리고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하였다. 머리를 깎는 것은 우선 유교의 중심교리인 효를 어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바로 개나 돼지 같은 왜놈이 되는 것과 같다는 선친의 확고한 신념 때문이다. 이보다 2, 3년 전부터 선친께서는 훈장질로는 조반석죽도 어려워 이를 그만두고 문집이나 족보 등의 편찬과 인쇄출판의 일을 하셨는데 전주(全州)에서는 완산석판인쇄소(完山石版印刷所)라는 이름으로 하셨고 남원에서도 잠시 하시었으며 1940년 경 이후로는 주로 우리 집에서 왜놈들 몰래 은밀하게 하며 호구지책으로 삼았었다.
1940년대 초까지는 문집류나 족보 등의 일거리가 심심치 않게 있어서 글씨를 전문적으로 잘 쓰는 서사를 2~3명씩 두고도 하였는데, 이 분들은 말이 서역사(書役士)이지 학식이 높은 선비들이었다. 정읍 산외면 평사리의 고종주(高宗柱)씨나 보안면 수랑리의 김중환(金仲煥)씨, 김명진(金明振)씨 그리고 내 종형님 건암(健菴) 같은 분들은 한학의 대가요 글씨 또한 잘 썼으며 김제 송유재(宋裕齋:基冕)의 아들도 한때 선친의 인쇄소에서 서역의 일을 하였다고 들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조석으로 이 어른들의 시중을 들며 배우고 듣고 많은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내 나이 여섯살 때부터는 댕기머리의 서당도령으로 형님을 따라서 마을에 있는 서당에 다녔는데 훈장님은 내 어머니와 내외종 되는 분으로 선친과는 간문에서 동문수학 한 사우(師友)요 동종 어른으로 이름은 형익(炯翼), 자는 문경(文卿)이요, 호는 실재(實齋)였다. 깡마르고 왜소한 체구였지만 선비로서의 기품이 있고 약간 비음의 음성이었는데 엄하게 후도 하셨다.
<천자문(千字文)>을 한 달쯤 해서 떼고 선생님 앞에 나아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를 외웠는데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외웠다 하여 칭찬을 받았으며, 어머니께서는 그 어려운 형편에도 닭을 잡고 술과 떡시루를 마련하여 선생님을 대접하고 학동들에게 책거리 턱을 하여주시며 좋아하였는데 이 책거리는 당시 서당방의 한 풍습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재주는 없었으나 송재(誦才 :외우는 재주)는 있었던 것인지 배운 것을 외우는 일이나 선생님 앞에서의 강 받는 일로는 매 맞은 일이 없었으나 마을의 소문난 개구쟁이요 말썽꾸러기로 마을 안의 크고 작은 말썽에는 어김없이 내가 끼곤 하였으므로 집에서는 어머니한테 서당에서는 선생님으로부터 꾸중과 함께 종아리를 자주 맞곤 하였다.
천자문 다음에 <사자소학(四字小學)>을 배웠으며 <동몽선습(童蒙先習)>에 이어 <계몽편(啓蒙篇)> <만물집(萬物集)> <사략(史略)> <소학(小學)> 등의 순으로 배웠다. 학채라 하여 가을에 학부모 몇 분이 집집을 돌며 학동 한 사람 당 벼 한가마 정도를 걷어 선생님 댁에 드리는 것이 수업료였고, 볏 짚단 한짐씩을 서당방 땔감으로 들여 놓았었다.
당시의 서당방생활의 풍속도를 대충 그려보면 이러하다. 정자관을 쓰고 가부좌로 근엄하게 앉아계시는 선생님의 가장 가까이에 방장격인 접장이 앉고, 접장의 옆으로는 차례대로 수준이 높은 교과를 학습하는 고참들이 앉으며, 천자문짜리 갓 신입생은 맨 끝 출입문 옆에 앉는다. 학습은 닭이 세 홰쯤 운 어두운 새벽에 기상하여 찬물로 세수하고 새벽 글을 읽는데 선잠으로 일어난 학동 중에는 꾸벅꾸벅 조는 사람도 있어 첫새벽부터 매를 맞는 학동도 있다. 아침 해가 한발쯤 올라올 때쯤 선생님이 “가서 밥 먹고 오너라!”하면 책을 덮고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오는데 이때 당번 학동은 조금 빨리 와서 서당방의 청소를 하여야 한다. 아침 등교를 하면 곧바로 먹을 갈아 습자공부를 하는데 신문지 반 장 크기로 습자장을 두둑하게 철하여 그 왼쪽 가장에 선생님이 써준 ‘첫줄’을 보면서 정성들여 습자연습을 한다. 당시는 종이가 매우 귀하여서 여유 있는 사람은 하얀 백노지(更紙)를 사다가 쓰기도 하였지만 헌 신문지도 귀했던 시절이라 돈을 주어야 살수 있었다. 칙간에 갈 때 밑지(화장지)는 누구나 볏짚이 아니면 호박잎 등을 사용하였으며 헌 신문지를 사용하는 사람은 고급이었다.
조반 후 선생님이 오시어 좌정 후 한 사람씩 글씨 검열을 하는데 정성들여 쓰지 않은 글씨는 한 자 한 자의 획마다 지적하며 교정도 하여주지만 심한 경우는 매도 맞는다. 습자지도가 끝나면 한 사람씩 어제 배운 일과의 강을 받는데 선생님 앞에 나아가 책을 덮고 어제 배운 일과를 막힘없이 외어야 하고, 그 뜻을 묻는 대로 대답하여야 한다. 이 강이 통과된 사람은 새로운 일과의 학습을 받는다. 만일 잘 외우지 못하거나 뜻풀이가 시원치 못하면 통과가 되지 못함은 물론이요 매를 맞고 하루를 다시 읽어야 한다. 학동의 수가 20명만 되어도 이 강 받는 시간으로 한 나절이 모자라는 철저한 개인지도방식이다.
서당의 학습시간 시종은 선생님이 대충 알아서 행한다. 시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 때나 선생님이 “이만 쉬어라!” 해야 쉰다. 한 참(站)을 읽고 쉰다지만 그 참이라는 것이 일정하지가 않았었다. 원래 참(站)이란 옛 시절 역로(驛路)에 마련된 쉬는 곳 역참(驛站)에서 나온 말로 역과 역의 사이 십리마다에 휴게소 격의 참(站)을 두어 그 십리를 걷는데 소요되는 시간이란 뜻이었다. 그렇다면 약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일 것 같다. 그러나 시계를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 가지고 있었던 그 시절 우리는 선생님만 곁눈질 하면서 지루한 수업시간을 견디어야 했다.
점심 때가 된 것만은 정확히 알 수가 있었다. 읍내 경찰서에서 낮 열두 시면 불어주는 오포(午砲 :싸이렌) 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마을에 시계 있는 집이 한 집이 있었는데 삼백 석 부자의 송상룡(宋相龍)씨 집으로 그 집 큰방 벽에 징짝만한 둥근 괘종시계가 하나 걸려 있었다. 점심을 먹고 오면 또 습자연습을 하였다. 글씨연습을 한시간쯤 하고는 접장의 지시에 따라 해가 질 때까지 그날 배운 일과의 글을 읽는데 <맹자(孟子)> <중용(中庸)> <논어(論語)> <시전(詩傳)> <서전(書傳)> 등 사서삼경을 읽는 고참들은 소화할 일과의 분량이 많아서 더러는 서산(書算 :읽은 횟수를 표시하는 표)이라는 것으로 읽은 횟수를 표시도 하고 지루함도 달랜다. 방안이 어두워지면 책을 덮고 집에 가서 저녁밥을 먹고는 다시 와서 밤공부를 하는 매우 단조롭고 그래서 지루했던 서당방의 공부였다.
서당 아이들이 가장 반기는 일은 선생님이 출타하는 때다. 세수를 하고 망건을 쓰며 갓을 챙기고 두루마기를 입으면 영락없이 출타하는 것이므로 못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어린 나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또 경찰서 순사가 청결검사(淸潔檢査 :봄가을로 두 번씩 집집의 청결 상황을 검사하였음)라도 나오는 날이면 마을의 청결검사를 끝내고 순사가 돌아갈 때까지 우리들은 해방이었다. 당시 왜놈들이 서당을 금지하였으므로 악질적인 순사는 선생님의 상투까지도 잘라버리기 때문에 서당이 쉬거나 선생님이 피신을 하기도 하였다.
나는 서당에 틀어박혀 한문공부만 하는 것이 그렇게도 싫었다. 마을의 내 또래들은 잘해야 한두 해쯤 서당에 다니다가 읍내의 학교에 가곤 하였으며, 서당 선생님까지도 그 아들딸이며 조카들까지도 모두 학교를 보내고 있어서 내가 아침에 서당에 들어서면 그 애들은 책가방 짊어지고 학교로 가곤 하였다. 종내에는 온 마을에서 서당공부를 하는 아이는 나 한 사람뿐이었다. 더욱이 머리 뒤에 촐랑촐랑 달고 있는 댕기머리가 무척 싫고 창피하였으며 그래서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행하게 태어나 불쌍하게 살고 있다고 여기며 한탄하였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 1930년대 말경까지는 우리 고유의 민속들이 비교적 잘 지속되어 왔었다. 해마다 섣달 그믐밤이나 정월 대보름 무렵의 밤이면 이웃 마을 아이들과 횃불싸움을 하였는데, 이웃 역구지(요곶이, 내요리) 마을 아이들과의 횃불싸움은 언제나 역구지 아이들의 패배였다.
한 번은 옹정 아이들이 횃불을 내두르며 그 마을에까지 깊숙이 쳐들어갔다가 그 마을 어른들에게 쫓겨 달아나면서 방아다리 들 도랑에 빠져 솜을 놓은 핫바지와 버선이 몽땅 흙탕물에 젖어 어머니로부터 호되게 매 맞은 일도 있다. 나는 10여 세의 어린 나이에도 언제나 형님을 악착같이 따라다녔다.
또 여름밤에는 동네씨름을 하였는데 비록 풀떼기 죽 한 중발씩
우리집 가족(1956년 아버지 생신일)
을 먹었지만 아이들은 무더운 집안에서 모기와 싸우느니 마을의 공터로 나와서는 큰아이들이 애기씨름부터 시킨다. 차츰 올려서 중씨름으로 이어지고 종내에는 청년씨름으로 커지기도 하는 놀이인데, 서로가 다 알고 있는 같은 마을의 씨름이 시들하여지면 이웃 마을에 씨름을 하자는 신호를 보낸다. 신호 보내는 방법은 간단하다. 이웃 마을 쪽을 향하여 일제히 “씨름이야!” 하고 몇 차례 함성을 지르고 기다리면 씨름을 할 의향이 있으면 미구에 그쪽에서도 “씨름이야!” 하고 응답이 온다. 아무리 함성을 질러 씨름 하자는 신호를 보내도 응답이 없으면 그 마을이 졌다는 뜻이 되므로 마을의 자존심과 명예에 관한 문제여서 웬만하면 응답의 신호가 온다. 그러면 “씨름이야!”의 함성을 지르며 그쪽으로 가거나 오거나 하는데 대개는 우리 마을에서 그쪽 마을로 갔었다. 이렇게 하여 여름밤에 이웃 마을과의 씨름판이 벌어지는데 더러는 구경나온 어른들 씨름으로까지 확대되기도 하고 밤이 으슥하여 돌아올 무렵이면 가끔 싸움도 벌어지므로 씨름판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면 어린 아이들은 미리 보냈었다. 연곡리 마을 뒤 잔등 벌판에서 주로 많이 했었는데 내가 7, 8세 무렵의 어느 땐가는 씨름판이 꽤 커지고 연곡, 행중, 모산까지 합동으로 옹정과 맞붙었는데 막판 무렵 누군가가 갑자기 “지네 나왔다! 지네 밟아라!”라고 소리치는 그것을 신호로 “지네 밟아라!” 소리치며 마구 치고 밟고 싸움이 벌어져 많은 사람들이 다친 일이 발생하였다.
내 어린 시절 우리 마을에서 나와 가장 친했던 친구로 송기철(宋基喆)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나보다 한 살 위였으며 후에 내가 머리 깎고 학교에 들어갈 때 그는 6학년이었다. 마음씨가 너그럽고 온유한 이 친구가 내 생각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복 받고 태어난 사람인 듯 항시 부러웠었다. 삼백 석쯤 받는 부자 집에 태어나 삼시를 쌀밥만 먹으며 양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고, 겨울에는 털이 붙은 속내의도 입고 살며, 운동화를 신고, 비가 오면 그는 우산을 받지만 나는 떨어진 푸대를 뒤집어쓰고, 나막신을 신고 학교에 가는 등 어느 것 하나 나와 같은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부럽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그는 딴 세상 사람 같아 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어울리지 않게 나같은 꾀죄죄한 가난뱅이와 유난히 친했었다. 후에 내가 학교에 들어가게 되니 기철이가 제일 좋아하여 더욱 붙어 살았으며 그 집이 읍내로 이사한 후에도 우리 집에 와서 자주 함께 지냈었다. 이 친구는 신영극, 임방규, 임중래 등과 고창중학교를 다녔는데 좌경적 이념서적을 탐독하고 중앙대학에 다니다가 6·25 때는 서울에서 의용군에 지원입대도 하고 가세가 급속히 기울어 대학을 중단하고 한동안 부안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상경하여 사업을 하였었다.
서당이 개설된 처음 몇 해는 학동의 수가 20여 명이나 되어 방 두개를 사용하였으나 차츰 아이들이 줄어서 4~5년 후에는 3~4명으로 줄어, 1940년 초에는 결국 서당이 파하여 버렸다. 옹정에서 낡은터 우당(藕堂·金炳梓) 선생의 서당만이 1950년대 말 경까지 그 명맥을 이었다. 우당은 간재의 고제 함재의 큰아들이니 벽산의 형님이다. 나는 형님과 둘이서 서당에 다녔는데 형님은 공부도 잘했고 글씨도 썩 잘 써서 아이들 습자의 첫줄은 주로 형님이 써주었다. 서당 방에는 학동들을 대표하고 질서도 바르게 하는 접장이라는 게 있었는데, 이름이 조현섭(趙現燮)으로 내 형님보다 두 살 위였으며 공부도 잘하고 모범생이어서 선생님이 조카사위를 삼았으며 옹정의 부자 조종택씨 집안인데 뒷날 옹정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었다.
세모가 되면 서당이 파하며 정월 대보름 때까지 쉰다. 내가 7~8세쯤의 어느 해 섣달 그믐날 밤 고달팠던 묵은해를 보내고 복된 새해를 맞이하기 위하여 온 마을의 집집마다가 등불을 밝혔고 가난한 우리 집도 집안의 요처에 불을 밝혔는데 선친께서 술을 거나하게 자시고 귀가하시어 나를 부르시더니 먹을 갈게 하시고는 섣달그믐 밤 즉 “제야(除夜)”의 제목을 주시며 시를 지으라 하셨다. 이제 겨우 <童蒙先習>이나 <萬物集> 잡이에게 시를 지으라는 것이다. 선친께서는 모든 문장에 능하셨지만 특히 시를 잘 하시어 문집<拓齋文集>에도 주옥같은 시 110여 수가 실려 있다.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내가 이 갑작스런 돌발 상황에 두렵기도 하고 황망하여 쩔쩔매니 “시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자기 생각이나 느낌을 그대로 글로 적으면 되는 것이니 한 해가 다 가고 또 한 해가 오고 있지 않느냐! 이럴 때 네 한 해를 보내는 심정을 적어보라는 것이야!” 하시며 독촉이 성화같아 두려운 마음으로 끙끙대며 어렵게 얼기설기 적기를
一年歷又一年來하니 一村家家懸燈明이네
一心全力又全力하여 前日不孝今日孝라네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오니 온 동네 집집마다 등불을 밝혔네
일심으로 힘쓰고 또 힘써 지난 날은 불효했으나 이제는 효도 하겠네
대개 이런 뜻의 글이다. 그러나 내 능력으로만 이루어진 글이 아니요 맨 끝 귀는 내가 너무 끙끙대니까 답답하신 선친께서 채운 것이고 다른 글귀도 아마 반은 선친이 옆에서 무슨 자 써라 무슨 자로 해라 하시어서 겨우 이루어진 것이니 부자 합작인 셈인데 시가 완성되고 나니 선친께서 소리 내어 읊으시며 그렇게 좋아 하시며 “우리 형주가 시를 지었으니 술 한잔이 없어서야 되겠느냐” 하시며 어머니께 술상을 보아오라 하시어 또 마셨다. 내 평생 엄하시기만 한 아버지를 모시고 글을 지어보기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 해 그 제야가 선친의 사랑복을 만끽한 밤이었다.
이 무렵의 어느 날 사주를 잘 보기로 유명하여 별명이 ‘심사주’인 봉사 한 분이 과객으로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간 일이 있었는데, 선친의 요청으로 형님과 내 사주를 본 일이 있었다. 이 분은 봉사였지만 학문도 넉넉하고 눈을 감고도 글씨가 달필이었는데, 이 분이 풀이한 내 평생사주는 ‘희상가구(稀上加九)’ 즉 79세라 하였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50세에도 못 미치던 시절이었으니 오복까지는 몰라도 좋은 사주인 셈인데, 겨우 ‘희상가구(稀上加九)’ 외에는 맞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옛날 중국 위(魏)나라의 왕필(王弼 :226~249)은 겨우 23세를 살고 죽었지만 20세 이전에 그 문명(文名)이 중국 학계를 흔들었고, 그가 풀이한 <주역(周易)>과 노자(老子)>는 18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주해(註解)를 뛰어넘는 사람이 없으며, 가까이는 간재(艮齋)선생 같은 이는 약관 이전에 그 학문적 명성이 온 나라 안에 떨쳤는데 내 무슨 글 재주가 있다고 하랴. 다만 79세를 넘긴 수명만이 맞는 셈이지만 이 또한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요즈음 우리나라의 평균 수명일 뿐이니 하나도 맞는 것이 없다고 하겠다.
선친은 자식에 대한 욕심이 많으신 분이라고들 하였다. 내 7촌 숙모 되는 궁골 아주머니가 딸 둘을 데리고 청상이 되어 근근자자 길쌈과 침선으로 사시며 나를 양자로 입양시켜 주기를 어머니께 간곡히 원하여 누구나 그리 될 것으로 여겼었는데 끝내 선친이 승낙을 않하여 결국 종제 형방(炯坊)이를 입양하였다. 그러나 선친은 매우 엄하시어 감히 가까이 앉지도 못하였었다. 외출에서 돌아오시면 우리 형제자매들은 모두 사랑방에 나아가 큰절로 인사를 드려야 하였었다. 아들들은 재배로, 딸들은 4배로 했는데 친부모에게만은 그렇게 하여야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너무 번거롭다 하시며 딸들도 두 번씩만 하라고 하시어 그렇게 하였다. 사랑에 손님이 오시면 형님과 나는 반드시 나아가 인사를 드려야 하였고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술상을 들고 들어가 옆에서 시중을 들었으며 대부분이 학문을 하는 선비들이어서 훈사의 말씀을 주시면 경청하여야 하였다. 또 외출을 하시면 대문 밖까지 나아가 안녕히 다녀오시라 인사를 하였는데 이와 같은 예법은 마을에서도 우리 집에서만 유별나게 그렇게 하였는데 6·25 이후로는 흐지부지 지켜지지 않았다.
그 머리 땋고 서당도령으로 공부하던 시절 나와 동문수학을 한 서당 친구 중에 이름을 ‘동니개(동내의 개(犬))’라 부른 친구가 있었는데 지금 유일하게 그 ‘동니개’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그는 이웃 마을 월리(月里)에 살았으며 실제 이름은 서남석(徐南錫)인데도 마을사람들은 누구나 ‘동니개’로 불렀으며 서당에서도 그랬었다. 아이의 이름을 천하게 불러야 명이 길다는 속신을 따른 별명이었으며 그 부모도 항시 “우리 동니개, 우리 동니개 못봤냐?” 하였다.
‘동니개’는 성품이 좋아 항시 웃고 살았으며 말도 더듬고 셈도 서툴렀으나 몸이 무쇠처럼 튼튼하였다. 글재주는 꽉 막히어 <천자문(千字文)> 한 권을 떼는데도 다른 아이들의 몇 배로 더디었는데 그 부모 또한 가난하고 무식한 농사꾼이었으나 외아들인 ‘동니개’를 가르치려는 데는 그 열의가 대단하였다. ‘동니개’는 몸을 앞뒤로 굽혔다 펼쳤다 하면서 종일토록 글을 읽어대지만 다음 날 강을 받을 때는 도로아미타불이며 거의 매일같이 종아리 매를 맞곤 하였으나 매를 맞으면 눈만 찔끔하면 그뿐으로 눈물이 없었다.
후에 나는 학교를 다녔고 6·25전란 후에는 옹정을 떠났기 때문에 그를 까맣게 잊고 살다가 내가 부안여고 교감일 때 어느 날 그와 한 마을에 사는 내 외숙모님이 어떤 부인 한 분과 같이 우리 집에 오셨는데, 그 부인이 ‘동니개’ 서남석씨의 부인이라 하였다. 딸이 우리학교 입학시험에 낙방하였으니 넣어달라고 온 것이다. 외숙모님의 말씀을 들으니 ‘동니개’는 힘이 좋아 못하는 일이 없고 마을에서 온갖 궂은 일, 험한 일은 도맡아 하면서 모을 줄만 알고 쓸 줄은 모르는 근검절약으로 농토를 많이 사들여 그때 옹정 8리에서 제일 큰 부자라 하였으며, 지금도 농한기면 매일같이 읍내에 나가서 짐꾼노릇으로 돈을 번다고 하였다. 나는 반갑고 감회가 깊어 그 세상 날짜 가는 것도 모르고 일만 하는 순박한 옛 서당동문의 딸을 보결로 입학을 시켜주었는데, 어느 날 퇴근하니 그 ‘동니개’의 부인이 감사하다며 김 십여 톳을 사놓고 갔다 하여 유난히 맛이 있게 먹었었다.
1939년은 가뭄이 들어 큰 흉년이었다. 사람들은 이 흉년을 ‘기묘년 흉년’이라고 하였다. 모내기철이 훨씬 지나도록 쨍쨍한 가뭄이 계속되어 모내기는 고사하고 밭곡식도 모두 타죽었었다. 늦게야 약간의 비를 뿌리니 남녀노소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총동원 되어 말뚝모와 서종(호미로 심는 모내기)을 하였는데, 서당방도 임시로 농번기 휴교를 하였다. 나는 동이물에 모를 적셔 심기 좋게 떼어 던져주는 모쟁이 노릇을 하여주고 들밥을 얻어 먹었다. 이때 들밥은 주먹밥이었는데 소금물에 적신 손으로 밥을 어른 주먹만 하게 뭉쳐서 주었다. 그때 우리 집 논은 건선제 방죽 밑 수문통배미여서 간신히 모내기는 하였으나 곧 말라버려 갈라진 논배미에 괭이 긁이를 하여 간신히 약간의 추수를 하였다.
이때 모든 고을에서 일제히 기우제를 지냈는데 각 마을 주변의 높은 산봉우리나 깊은 물가의 용소에서 하늘과 용신에게 비 내리기를 빌었다. 옹정, 연곡, 모산, 행중, 봉덕마을 등은 석동산 주봉의 정상에 제상을 차리고 큰 모닥불을 피우며 기우제를 지냈는데 모닥불로는 ‘하느님 똥구멍(엉덩이) 태우기’를 한다며 날 새워 불을 피웠다. 하느님 엉덩이를 뜨겁게 달구면 견디기 어려워서 비를 내려 불을 끈다는 유감주술(類感呪術)의 토속적인 민간신앙 행위이다. 이때 나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마을 어른들이 풍물굿을 치며 땔감을 짊어지고 석동산으로 가는 행렬을 따라가서 새벽녘까지 모닥불 피우며 풍물 치고, 기우제 지내는 광경을 구경하였다.
이 무렵 선친께서는 남원에 계시며 남원일가들의 <부안김씨세고(扶安金氏世稿)> 등을 모아 편찬, 출간하는 일로 해를 넘기셨다. 남원에는 부안김씨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사직공파 충경공(忠景公) 김익복(金益福)의 자손들과 직장공파 사헌부감찰(司憲府 監察) 서계공(西溪公) 김협(金鋏)의 자손들이 임진왜란을 전후로 남원으로 이거하여 그곳에서 과환(科宦)과 충절(忠節)이 혁혁한 가문으로 번연하였다. 서계공은 내 12세조 죽계공(竹溪公)의 막내 동생인데, 그 손자 좌망공(坐忘公) 현(暢)은 1627년(仁祖. 5년)의 문과 식년시(式年試)에서 장원급제하였으며, 만경(萬頃) 현령으로 재임시에는 <만경일기(萬頃日記)>를 남겼다.
선친께서 남원에 계시는 동안은 수입이 있어서 식구들이 조반석죽을 면하였다. 그런데 이때 선친께서 잠시 외도를 하신 일로 집안과 마을 사람들이 한때 놀란 일이 있었다. 남원의 친지들이 선친의 오랜 객고를 위로한다는 구실로 현지에서 여인 하나를 측실(側室 :소실 또는 첩)로 얻어주었다는데 일이 끝나 부안으로 돌아오실 무렵 그 여인의 처리문제가 난감하셨던지 어머니께 장문의 편지로 그 경위를 밝히고 여인의 처리를 상의하신 것이다. 이 편지를 내외종간인 서당 선생님이 읽어주시면서 버리고 오라는 답장을 쓰겠다고 하니 어머니께서 한사코 데리고 오도록 하라 하여 그 여인을 데리고 귀가하시었다.
이 일은 마을사람들에게는 경이롭고 흥미로운 볼거리요 아침저녁 마을의 우물가 여인들의 화제거리였을 것이다. 철없는 우리 형제들은 “작은 오매! 작은 오매!” 하면서 그 분의 치마꼬리를 잡고 졸졸 따라다녔는데 한 집에서 4~5개월 쯤 살다가 스스로 가겠다고 하여 어머니께서 어려운 살림에도 새옷을 해주고 여비를 마련하여 읍내까지 함께 가서 차를 태워 보내주셨다. ‘씨앗을 보면 돌부처도 돌아앉는다’ 했는데 어머니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굳이 데리고 오도록 하시고 한 집에서 같이 사셨는지 알 수 없으며 평생 몸가짐을 조신하여 자신에게 엄격하셨던 선친의 외도(外道)는 또 무엇이었을까. 이는 선친의 인간다움의 일면으로 엄격하게만 사신 규범에서 잠시 일탈하신 일면의 표출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무렵 어머니께서는 나를 학교에 보내고자 하여 선친께 간청하셨다가 꾸지람을 들으시고 입학원서는 찢기곤 하였으며, 그때마다 내 절망감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게는 외숙이 여섯 분 계셨는데 그중 다섯째 외숙(林鍾晩)이 어머니와 짜고서 선친이 출타한 틈을 타서 이발기를 빌려와 내 댕기머리를 깎아버렸다. 이때가 1940년의 일이다. 그때는 창동의 큰집 백부님의 손자들도 이미 반란을(?) 일으켜 댕기머리를 모두 깎아버린 후였다. 아무튼지 나는 날아갈 듯이 기뻤고 이로 인하여 옹정 8리에서 마지막 남은 댕기 딴 천연기념물 서당도령은 마침내 이렇게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까까머리로 큰집에 갔었는데 사랑에 들어가 백부님께 절을 올리니 한 번 쳐다보시고는 돌아앉아 버리셨다. 머리 깎은 것이 보기 싫어서 인사를 받지 않으신 것이다.
댕기머리의 서당도령 하니까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떠오른다. 6·25 이전 전주 사람이면 누구나 보아서 아는 전주의 큰 학자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 선생 손자의 댕기머리다. 전주에 가끔 가면 20 전후의 총각이 동저고리 한복에 치렁치렁 댕기머리로 자전거를 타고 전주시내를 유유히 누비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조부의 엄명에 따라서 신학문과 단절하고 한문만 배우고 있지만 발랄하고 왕성한 활동성을 주체할 수 없어서인지 자전거를 타고 시가지를 돌고 있는 그 분을 볼 때면 지난 날 나를 보는 것 같았었다. 후에 이 분은 여순반란사건을 돕다가 구속되기도 하였다는 풍문이 있었는데 금재선생과 선친은 같은 선생의 가르침을 따른 동문으로 평생을 같은 길을 함께 하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금재선생은 왜놈들이 전라선 철길을 내기 위하여 철거하려는 한벽당(寒碧堂)을 지켜냈고, 1917년에는 전주잠업소를 짓는다고 집과 대지를 토지수용령으로 빼앗으매 벌레를 키우기 위하여 사람을 해친다며 죽기로써 단식투쟁을 하여 끝내 총독부를 굴복시켜 왜놈들의 콧대를 꺾었던 이 땅의 기개 높은 항일지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