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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세계
시대정신으로 풀어내는 진정한 인간학
ㅡ임평모 시집 『기러기 타령』
임 노 순(시인 ·문학평론가)
1.
"시는 이 시대에 무엇을 하는가?" 라는 물음에 명쾌한 해답을 이끌어
내기 어려운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많은 문학 이론서들이 있고,
학자들이 있어 그 해답을 밝히고자 했지만 ‘교시적 기능’ 과 ‘ 쾌락적
기능’ 이라는 고전적 정의에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학자
또는 이론가들이 창조된 작품을 두고 그 기능을 밝히려고 노력하는 동
안 창작을 하는 문인들의 작품은 늘 수십보 수백보 그들보다 앞서있
어서 지금은 문학과 비문학, 시와 비시를 가려내기조차 버거운 시대에
와 있다.
시의 기능을 찾는 일은 시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찾은 일과 같다.
시는 본질적으로 아름답고 속성적으로 진실하여 독자들이 좋은 작품을
만나면 웃고 울며, 분노하고 절망한다. 시의 본질적 요소인 심미적 아
다움에 동화되기 때문이며 그러한 과정 속에서 마음을 정화하며, 새
로운 깨달음을 얻거나 삶의 진리를 터득하기도 한다. 시가 존재하는 이
유는 시속에 모든 삶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재현되고 삶의 진정한 가치
를 제시해 주는 ‘인간학’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시인은 현실적 존재이다. 그래서 작품도 현실적인 주제를 다루
고 있어야 한다. 모든 인간도 현실적 존재이다. ‘체험의 해석’ 이라는
점에서는 비문학적 글과 같을 수는 있지만 시인의 작품이 일반적인 글
과 다른 점은 관습적인 태도로 세계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관습적인 태
도로 바라보는 일상적인 인식에 충격을 가하고 있는 개성적인 해석 때
문이다. 결국 "시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의 해답도 일상적
인 인식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으며 시인이 걸어가
는 길도 ‘일상적인 인식에 신선한 충격’을 통한 인간학의 추구라고 할
수 있다.
현실적 존재로서의 시인에게 있어 현실적 주제란 진정한 시대정신이
다. 위기의 시대일수록 인간의 구원은 심미적 아름다움에 동화되어 마
음을 정화하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거나 삶의 진리를 터득시킨 문학의
몫이었다.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종교가 위기를 극복시키지 못한 것은
시대정신의 결여이다. 의학이나 수학, 과학 등 다른 학문에도 인간의
문제가 있지만 시대정신이 없고, 지극히 부분적인데 반해 문학은 시대
성과 사회성에 바탕을 둔 총체적 인간학이다.
임평모 시인은 직업이 의사이다. 전공이 의학이며 평생 환자를 진료
하는 일에 매달려 왔다. 사회적 명성이나 부는 의사란 직업만으로도 충
분했을 터인데 왜 문학을 한 것일까? 인간의 문제 가운데 질병이라는
부분을 감당하는 동안 인류 구원이라는 큰 소망은 의학만으로 해결할
수 없음에 문학적 접근을 시도했으리란 추측이 가능하다.
‘문학은 여러 인간상을 대상으로 하여 사회상을 반영, 전형화를 창출
하는 것이므로 크게 보아 인간학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에도 특히 시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내적 형상화이기에 자신에 대한 인간학인 것이다.’
(임평모,『기러기 타령』머리말 부분)
오늘 우리가 만나는 임평모 시인의 두 번째 시집『기러기 타령』은 정
치나 경제뿐만이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커다란 위기의 시대에 진정한
시대정신을 가진 시인의 면모와 그가 추구하는 인간학을 조망할 수 있
는 의미 있는 작품집으로 첫 시집 『口號以後』를 펴낸 지 10
년이 넘어 다시 만나는 기쁨과 충격을 함께 준다.
2.
『기러기 타령』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 2, 3부 모두 연작시이
며 4부는 산문 장시이다.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1부 「만다라」는 조금
씩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진 것에 대한 명상시이고, 2부 「남해유랑가」
는 한 때 가족을 떠나 경남의 남해에 머무는 동안의 외로움을 노래했
고, 3부「지리산 기러기」는 8.15 이후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겪으며
수난기를 보낸 이 땅의 양심가들 중 이현상 남부군 대장의 시에 감동
받아 그의 입장으로 바라본 시대상이며, 4부는 인류 구원이라는 종교
적 소망에 대한 자신의 우주관과 종교관을 계시록의 형태로 쓴 시’라고
한다.
1부의 만다라 연작 28편은 그의 인식 대상이 발을 딛고 숨쉬며 살
아가는 현재이며 현실이요 사회적 공간에 있다. ‘ 약삭빠른 악귀들은
걸리지 않고 / 잔챙이와 좀팽이만 손발 비비’거나 ‘악신과 악귀들이 약
육강식의 난장을 벌이’(만다라 1-일식日蝕)는 이 땅과 세계의 슬픔,
‘바라는 천지개벽은 어둠 속에서 잠만 자고 / 에이즈의 천하통일 꿈꾸
는 게이들 / 손에 손에 손잡고 호모 세상 외친다 // 참다운 사피엔스
갈 곳이 없고 / 이제는 잡아먹을 사람도 없’(만다라 3-인식人蝕)는
절망을 인식한다.
붉은 바람 푸른 바람 섞어 부는 나날
어쩌다 노랑 회오리바람 되어 건너온 구만리
KA18610이란 암호 같은 명패 하나
잡초의 씨앗처럼 굴러온
알량한 인도주의의 온실
낯설은 대륙의 숨결은 팔딱거리고
팔려온 애완견도 족보가 있는데
향수병에 걸린 뿌리 잃은 영혼
풍요로운 양육에도 시들어 간다
-「만다라 6-해외 입양아」부분
요즈음 수봉산은 봉우리마저 잘리어
정상에 올라가도 시야 가리는 웃자란 수목
바다는 멀리 달아나 자취 감추고
옛 풍경의 고깃배와 기러기는 오간 데 없다
드디어 수봉산은 목만 남아
머리 없는 수봉산首峰山
추억만 되새기는 노인 산이 되어간다
-「만다라 · 25-수봉산」부분
아침이면 빛나는 태양을 토해내고
메아리 은은한 꿈의 산실 전설의 보금자리
지금도 비봉산 기슭 당뫼에는
죽임 당한 왕자의 핏자국
나라 잃은 한 달래며 내접산을 부른다
이제는 허리가 잘려 하체도 물에 잠기고
개발 덕에 산신령은 귀양가고 분단의 아픔뿐
살아남은 고가도로변의 소나무들
남몰래 먼지눈물 흘린다
-「만다라 · 8-내접산(內接山)」 부분
우리 놀음 투전 골패놀이는
갈 곳 잃은 고물 창고 신세
지금은 숫자 판의 로또 놀이로
양코배기 흉내내기 날샌 줄 모른다
신자유주의 탈쓴 도깨비방망이 춤
황금은 만능 금나와라 뚝딱……
돈 나와라 로또 또로또 또 또……
-「만다라 · 27-로또 광풍」부분
「만다라」 연작에서 그가 바라본 세상은 다분히 비관적이며 절망적인
세상이다. 개발로 뭉개진 우리의 산, 황금만능에 물든 한탕주의 세태,
애완견보다 못한 버려지는 아이들 등 사람도 세상도 병든 모습이다. 그
러나 시각이 비관적이며 사회를 비관적으로 그려내 데는 분명한 이
유가 있다. 그가 의사이며 의학자였던 직업관과 무관하지 않다. 의사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모든 사람이 병자라고 한다. 병자는 반드시 치료해
서 회복시키는 것이 의사의 목표이다. 그는 또한 시인이다. 병든 세상
을 따뜻하게, 다정하게, 아름답게 회복시키는 것이 시인의 목표라면 당
연히 비관적인 사회, 병든 세상을 들춰내야 한다. 그가 의사의 직업을
접고 문학의 길을 가는 이유가 인간의 질병치료를 넘어 인류의 구원 내
지 세상의 구원이라는 소망을 꿈꾸기 때문일 것이다. 만다라 연작을 통
해 비관적인 사회나 병든 세상을 들춰내는 일에 그치지 않고 치유의 방
법을 제시하고 있다.
모든 인류가 추구하는 지상 목표는 행복이다. 행복한 사람이 행복하
게 사는 것이다.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구원도 행복이다. 그러나 종교
의 구원은 현실을, 현세를 벗어날 때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시
인은 현실에서도, 현세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삶은 행운유
수行雲流水' 요 ‘작은 행복이 큰 행복' 이니 '마음을 비우는 일' (만다라 ·
17ㅡ 명경지수明鏡止水)이 최선이요, 행복으로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친
다
만다라(mandala)란 우주의 진리를 표현한 불화佛畵로 밀교에서는 깨
달음의 경지를 도형화한 것을 일컫는다. 바퀴 살 낱낱이 속 바퀴 축에
모여 둥근 수레바퀴를 이룬다는 윤원구족輪圓具足으로 변역 되는데 모
든 법을 다 갖 추어 모자람이 없다는 뜻이다 . 삶에 있어 모자람이 없는
것이 행복이다. 불가에서 모자람이 없이 행복을 느끼는 일은 색즉시공
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연작시의 제
목 또한 만다라인 까닭임을 알게 한다.
많은 세월 큰 죄 안 짓고 살았으니
마음 편하다
후손들에게 전설처럼 전해주는
어렵고 굶주리던 나의 과거
비록 이름 날린 일은 못했으나
좋은 아비와 할아비로 불리니 다행이요
별 탈없이 자식 손주가 커가니
큰 걱정 없네
별로 모은 재산 없어
남을 돕지 못함이 마음 걸리지만
내 심정 더불어 살기 원하니
삶은 행운유수行雲流水일세
끼니 굶지 않고
아직도 아내가 따슨 밥 차려주며
거처는 작은 집이나마 춥지 않다
하늘도 보이고 창가에는 두어 평의 대나무 숲
같이 살아가니 이 아니 행복한가
때때로 조용히 명상도 하고
선인들의 시도 읽으며 묵향에 젖으니
작은 행복이 큰 행복일세
ㅡ「만다라 · 12 - 작은 행복」전문
임평모 시인의 대표작을 추천하라면 주저하지 않고 내세울만한 시로
상징성과 은유가 돋보이는 「만다라 · 명경지수明鏡止水」가 있다. 이
시에서의 '거울' 은 이상(李箱 1910-1937)의 '거울' 이 보여주는 '내면
의 자아' 와는 다르다. 이상이 '거울' 을 통해 '자아 분열과 그 갈등' 내
지 '자아의 분열과 자의식' 을 보여 준 것이라면 '명경지수明鏡止水' 의
거울은 '일치와 화해' 라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여기서 '거울'
은 자의식의 상징이 아니라 '세계의식' 이며 '시간의 흐름' 이다. 또한
그 거울은 곧 일치와 화해를 의미하는 물의 은유이다.
'거울' 은 우리가 알고 있듯 '있는 그대로' 를 보여 주거나 '외로 된
것' 을 보여주는 사물로서의 거울이 아니라 물활론物活論에 의해 변용이
되어 '늙어 가는 것' 이며 세월을 보여주는 역활은 하는 것이며 다시 거
울은 '물' 이 되어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것' 으로 재해석을 한다.
내가 아버지가 되고, 아들이 아버지가 되고, 손자가 아비로, 그 아비
가 할아버지가 되는 그 흐름은 거울을 통해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
다. 인간사 모든 것이 하나의 흐름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거울은 좌
절과 절망이 아닌 순응과 순리, 화해의 상징이요 은유이다.
'흐름을 거스르는 일' 이 곧 욕심이며 세월과 순응, 나아가서 세상
과 화해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이 시를 통해 알 수 있으며 시인은
그 길을 '마음 비우기' 로 제시한다.
거울도 오래 보면 늙어 간다
문득 나 아닌 내가 보이고
때때로 나 대신 아버지가 보인다
고인은 가도 거울 속에 남고
내 젊었던 머리칼도
긴 풍화의 흰 깃털로 나부낀다
주름살의 샛강은 얼굴에 흐르고
아들의 모습도 또 아비로 만든다
거울 속의 물은
소리없이 흐르고 흘러
손자를 아비로 아비를 할아비로 만든다
고요한 물 속에도
세월의 거품은 일고
아무리 거울이 맑아도
흐름은 어찌할 수 없다
마음이나 비울 수밖에
말고 맑은 거울과 물도
멈추지 않나니
ㅡ「만다라 · 17ㅡ 명경지수明鏡止水」
3.
제2부 「남해 유랑가」는 외로움을 이기는 방법이 담겨 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갖고있는 속성 중 한가지는 외로움이다. 인간이 사회적인
동 동물이란 말도 따지고 보면 외로움을 극복하려는 화장술에 불과한 말
이다. 개체로 보면 ‘우리’ 속의 ‘나’ 일 뿐이다. 가족 가운데서도 ‘나’ 는
‘나’ 일 뿐이다. 그래서 늘 외롭다. 그러나 외로움이란 병이 아 니라
‘나’ 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한때 임평모 시인은 경남 남해로 내려가 지냈다. 남해는 예로부터 유
배지로 유명한 곳이다. 유배는 죄인을 격리시키는 곳이지만 그때의 죄
인은 지금의 죄인과는 달랐다. 올곧은 정신으로 불의에 맞선 선비들이
많았다. 임평모 시인이 스스로 자신을 유배시킨 곳으로 생각하며 그렇
게 지낸 시간들을 스스로는 유랑기流浪期라고 한다. 그러면서 「남해유
랑가 2-유랑」에서 ‘유랑流浪이란 / 벗어버린 자유’ 라는 정의를 내렸
다. 그는 외로움이란 즐기는 것으로 해석한다. 「남해 유랑가 4-謫仙
놀이」에서 ‘신선神仙이 따로 없다 / 근심걱정 없고 배고프지 않으니 /
어찌 이백 李白을 부러워하랴’ 고 했고 ‘자연을 안다는 것은 신선이 되는
길 / 마음을 비우고 입정入靜에 든다’ 고 노래했다.
흐르는 물결
바다의 큰 파도
모두가 있고도 없는
공허의 몸부림
백일승천白日昇天의 꿈마저 잊고
구름이 가듯
물이 흐르듯
그렇게 놓아 사는 것
ㅡ「남해 유랑가 2-유랑」 부분
태풍이 비껴간 다음날이면
푸른 하늘과 파란 바다
한줌 깨끗한 지조인 듯 티끌 하나 없다
유배는 선비의 통과의례
태풍은 자연의 경고
성숙 위해 풍파 겪는 내 삶이다
ㅡ「남해 유랑가 3-流配地와 颱風」부분
누항을 떠난 지금
자기만의 세계 외롭지 않다
욕심을 버린 이내 몸
육신이 마음 닮으면
하얀 구름 같은 기화선氣化仙
백로로 날으리
ㅡ「남해 유랑가 5-백로」부분
3부 「지리산 기러기」는 임평모 시인의 시대정신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를 확실히 보여주는 시이다. 이현상이라는 지리산 일대에서 활
약했던 빨치산 남부군 대장이 남긴 칠언절구 한시 智異山風雲當鴻動
伏劍千里南走越 一念何時非祖國 胸有萬甲心有血에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먼저 우리는 이 시 제목이 상징하는 기러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현상의 시에 등장하는 기러기 떼는 물론 조국해방을 위해 나선 공산
주의자이며 빨치산이지만 시의 제목이 상징하는 ‘지리산 기러기’ 는 이
시대의 양심이요, 진정으로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주의자요, 나라를 살
려내는 애국자인 동시에 화자 자신으로 표상 된다.
이현상은 누구인가? 조선공산당 핵심인물이었지만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며, 김일성을 거부하고 지리산으로 들
어가 빨치산이 된 인물이다. 그래서 북에서도 남에서도 버림받은 천애
의 고아였고, 어쩌면 이데올로기에 의해 버림받은 고독한 투사였으며,
一念何時非祖國에서처럼 오로지 조국을 사랑한 죄인이다. 임평모 시
인이 이현상이 지은 칠언절구의 시를 보게 된 것은 어쩌면 '운명' 인지
도 모른다.
제5교향악을 곱씹는
야산대의 운명
총소리로 깨어나서
총소리로 해가 진다
어느 때는 우렁차게 울리는
진격의 나팔소리
어느 때는 슬픔 깨무는
메아리의 먼 조포 소리
음악다방에서 싹튼
까까머리 중학생의 꿈은
찢어진 희망의 넝마
피묻은 울분은 아직도 가슴속 쥐어짜고
팔매질하듯 지나간 세월의 총을 쏜다
따다다 다 ㅡ ㅇ
저 멀리 베토벤의 먹은 귀 뚫듯
염라의 총소리 저승사자 부르고
눈앞에는 몸부림치는 단말마의 손짓
기약도 끝도 없는
따다다 다 ㅡ ㅇ
ㅡ「지리산 기러기 · 1 ㅡ 따다다다 ㅡ ㅇ」전문
'따다다 다 ㅡ ㅇ'
짧은 음 세 개와 긴 음 하나로 이루어진 처음의 웅장하고도 유명한
동기는 베토벤이 숲 속을 산책하다가 '삐삐삐 삐……' 하는 귀여운 새
소리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베토벤의 제자인 안톤 신틀러가 쓴 베
토벤의 전기에 "어느 날 베토벤이 제1악장을 가리키면서 '운명은 이와
같이 문을 두드린다' 라고 하였다"라는 대목이 있다 당시 자신의 귓병
을 '운명의 앙갚음' 이라고 생각하던 베토벤이 작곡 노트의 여백에 '나
스스로의 운명의 목을 조르고야 말겠다' 고 썼다는 일화로 인해 일본과
동양에서 《 운명 》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연유야 그렇더
라도 베토벤이 이 곡을 통해 '운명' 을 정복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
는 교향곡이 《운명》이다
'따다다다 ㅡ ㅇ'
베토벤이 숲 속에서 들은 귀여운 새소리를 '문을 두드리며 찾아오는
운명' 이라고 했듯 임평모 시인은 지리산의 정적을 깨며 아침을 열고 하
루를 닫는 기러기의 울부짖음 총성-으로 들었으며 이 땅에 사는 사람들
의 운명으로 재해석했다. 이현상의 글, 넝마처럼 찢어진 중학시절의 꿈
도 운명이다. 그래서일까 화자는 아직도 떠나가지 않고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는 '운명'을 향해 '팔매질하듯 지나간 세월의 총' 을 '기약도 끝
도 없' 이 쏘고 있다. 잔인한 운명과 맞서는 한 위대한 인간 영혼의 투쟁
과 승리가 담겨 있는 교향곡 《운명》처럼, 최고의 성취감은 오히려
고통을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다는 베토벤의 격려처럼 현실의 고통이
미래에 밝은 빛을 비추어 주는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믿음의 소리
가 총성과 기러기 울부짖음 소리 '따다다다 ㅡ ㅇ'으로 들린다.
우산이 필요 없는 산
벗은 가슴 내놓고 몸을 헹군다
죄 없는 산도
때를 벗기는가
하늘의 감로수로 명상에 잠기고 있다
혁명이란 멍에의 쳇바퀴 속
세수 한번 제대로 못한
때묻은 손과 발을 바라본다
부모 형제 처자에게 고통만 안겨준
내 마음의 때는 누가 벗겨주는가
비에 흠뻑 젖고 싶은
외로운 투사 삐에로
산도 젖고
마음도 젖고
ㅡ「지리산 기러기 · 3ㅡ비에 젖은 산」전문
1연과 2연의 시점은 현재이다. 화자가 현재의 지리산을 산에 올라 바
라보고 있는 것이다. 3연은 과거의 회상이다. 기억 저편에 묻혀 있는 경
험적 역사 속의 손과 발을 기억하고 있다. 4연과 5연, 6연은 화자의 자
아인식이다. 일반적인 학문에서의 역사와 경험은 기록과 보존적 가치
를 두지만 인간학으로서의 시에서는 그것이 재해석되고 재생산되는 가
치를 지닌다. 그래서 ‘기러기’ 는 과거의 ‘기러기’이자 현재의 ‘기러
기’ 인 것이다. ‘외로운 투사 삐에로’ 가 스스로 벗길 수 없는 ‘때’ 는 자
신의 죄의식이자 반세기를 훨씬 넘어선 오늘에 이르도록 역사적 ‘때’
를 벗겨주지 못한 우리 모두에게 죄의식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시인이 상
기시키고자 하는 죄의식이 「지리산 기러기 4-산 속 태풍」 에서는 더
강렬한 목소리로 분출된다. ‘아직도 자연과 민초의 힘을 모르는 / 권력
장악에 눈이 먼 위정자들 // 태풍이 지나간 맑은 하늘 보듯 / 우리 민초의
아픔을 볼 수 없는가’라고 준엄하게 꾸짖는다.
4부의 산문장시「신한계시록(新韓啓示錄)」은 시인이 천착하고 있는
‘인류의 구원’ 이라는 과제와 ‘인간학’ 으로서의 시를 완성시키려는 의
도로 쓰여진 실험적 성격의 시로 읽힌다. 그래서 종교인들이 터부시하
는 과학용어를 과감히 도입했다.
그러므로 너희들의 세포 속 원자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야 하느니라. 저 유명
한 독일의 시인 카알 부세의 「산 넘어 저 멀리」란 시속의 파랑새처럼 산 넘어 먼
하늘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집 뜰 나무 위에 파랑새가 있듯 너희들 자신 속
에 하느님이 거함을 알지니라.
그리고 너희들에게 꼭 알릴 일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아니라 모든 인류가 가
지고 있는 지문(指紋)이니라. 이 손가락 끝의 지문은 짐이 인간에 내린 증표이니 잘
간직하고 요긴하게 쓰기 바라노라.
이 지문은 우주 속의 에너지가 감응하는 안테나이며, 지문 속에는 각자의 마
음과 신체의 온갖 정보가 들어 있는 DNA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영적 지도이며
만다라이니라.
ㅡ「신한계시록 · 5. 계시의 마무리」부분
4.
이번 시집이 시인의 첫 시집『구호이후(口號以後)』와 다른 점으로 언
어의 절제나 긴장미가 다소 느슨해져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물
론 이 시집 속에서도 「만다라 · 15 ㅡ 은행잎을 밟으며」 라던가「만다
라 · 26 ㅡ 달」, 「남해유랑가 · 2 ㅡ 유랑」,「남해유랑가 · 10 ㅡ 사모곡」,
「만다라 · 17ㅡ명경지수明鏡止水」, 등 빼어난 서정시들이 있다. 4부의
산문장시「신한계시록新韓啓示錄」은 제목 그대로 기존의 성경 계시록의
형태를 원용한 산문시이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볼 때 이
미지나 비유 등의 시적 기교가 줄어든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시의 품
격이 떨어졌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언어의 절제나 긴장미를 줄이는 대
신 읽힘성을 높이는 장치로 리듬을 택하고 있다. 이 리듬은 남도민요
육자배기를 닮아 있다. 육자배기는 조금 탁하고 거친 느낌을 준다. 전
남 보성이 고향이며 광주서중(현 광주일고) 출신인 시인이 남도가락에
맥이 닿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남도가락은 또한 한恨의 가락이다.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에 나오는
‘사는 것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것이 바로 사는 것’ 이라는 언술
이 아니더라도 일제시대에 태어나 해방이 될 때가 열 다섯 살이었고
6.25 동란을 스무 살에 맞은 시인에게 있어서는 역사의 격동기 에 광주
의 한복판에 있었기에 한을 쌓고 푸는 일에 있어서는 누구 못지 않은
체험을 했을 것이며 그런 시인이 광주서중 시절부터 ‘월요동인’ 으로
시를 써온 터라 남도가락은 자연스레 체득된 것이리라고 짐작할 수 있
다.
산은 자정 넘어
제일 조용할 때만 한번씩 운다
습관처럼 돌아보는
대원들의 취침 경비점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아까운 청춘들
전투의 피곤 속에 잠들어 있고
나는 화두처럼 알송달송한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반문해 본다
우리는 도구인가 주체인가
산 울음소리에
또 한번 우리 겨레를 생각한다.
ㅡ「지리산 기러기 · 8 ㅡ 산울림 소리」
산울림소리를 시인은 산의 울음으로 듣는다. 운다는 것이 한이다. 울
음소리는 한의 소리이다. 그 울음소리를 통하여 ‘이데올로기의 본질’
을 생각하며 우리는 그 이데올로기의 ‘도구인가 주체인가’ 반문하며
괴로워한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우리 민족에게 지울 수 없는 커다란
한을 떠 안겼다. 이런 한이 고도로 정제된 언어의 절제미학으로 쓰여질
수는 없는 일이다. 거기에 가락이 있으면 족하다. 『기러기 타령』에서
언어적 긴장미가 느슨해진 대신 남도가락이 기존의 시들보다 짙게 배
어있는 것은 이번 시집의 시적 대상이 사회상과 시대상에 초점을 맞춘
연유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전통적 순수 서정시에 사회상과 시
대상이라는 서사가 개입되고 리얼리즘이 가미되었기 때문이다.
가락이란 신명이다. 우리의 가락은 기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픔
에도 있다 그 이유는 삶과 관련이 있다. ‘사는 것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쌓이면 풀어야 하고 풀리면
쌓는 이 반복적인 행동이 가락인 탓이다. 위의 시에서 보듯 가락은 음
보율로 나타난다. 2음보 또는 2음보 중첩인 4음보로 읽을 때 신명이 난
다. 그의 시가 대부분 이런 음보율을 가지고 시적 완성도를 높여가고
있는 것이다.
첫 시집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시인의 시적 가능성과 역량을 보여
준 작업이라고 한다면 이번 시집은 안정된 목소리로 세상을 깊게 바라
보며 전통적인 소리의 울림을 더 넓게 펼치는 작업으로 일관했다고 평
가할 수 있다. 다만 임평모 시인에게 믿음이 가는 것은 가락에 의존하
여 외형에 얹어내지 않고 내재시킨다. 걸쭉한 사설 대신 관조의 깊이를
택하고 있다
무릇 시의 길은 종착점이 없다고 한다. 언제나 그 완성을 향한 묵묵
한 고행만 있을 뿐이라고 한다. 임평모 시인은 이 시집 머리말에서 “아
마 이 시집이 내 마지막 시집이 될 것이다.” 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우
리는 아무도 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일상이 ‘한을 쌓
듯이 시를 쌓고, 쌓인 한을 풀어내듯 시를 풀어내는 반복적 일상’ 임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