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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좋아하는 것끼리 서로 끌어당긴다면 그는 과학적인 환경, 예컨대 아버지는 기술자이고 어머니가 전에 수학 선생을 하고 있었다는 식의 가정에 태어났을 것이 아닌가 하고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고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의 가정에 태어난 것이다. 아버지의 가치관은 분명히 사회적·종교적이며 어머니는 내향적이었지만 뜨겁게 사랑하는 남편의 사회봉사 사업에 많이 동조하고 있었다. 소년의 형도 이상주의자이며 삶에서의 그의 주된 관심은 남을 돕는 일이었다.
이 소년이 그런 가정에서 태어난 것은, 여태까지 살펴본 자료로는 엄밀한 의미에서 카르마의 결과라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역시 여기에도 어떤 징벌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바꾸어 말하면 한 쪽으로 치우친 경향의 교정이다. 이 사람은 자신의 가치관이 편협함을 의식하여 보다 인간적인 가치까지를 포용하려고 그 견해를 확대할 수 있는 환경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하고 여겨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소년은, 인생의 첫째 목적은 남들을 돕는데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접촉할 수 있는 환경에 놓였다. 그의 철저한 현실주의는 다른 가족들의 지나친 이상주의를 억제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반대로 가족들의 사고방식은 그에게 그 자신의 가치관 말고도 또 다른 가치가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었다. 이런 경험은 그의 기본적인 가치관, 즉 순수과학의 탐구라는 가치관을 완전히 바꾸어 놓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의 인격을 과거보다는 덜 이기적이고 사회적으로 돌려놓았다는 점에서 효과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양친을 선택했을 때에 의도했던 교정이라는 목적은 부분적으로는 달성된 것 같다.
태어나는 아이는 양친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견해를 케이시 리딩은 상당히 잘 입증해 주고 있다. 아직 충분히 진화하지 못한 영혼은 좁은 범위의 선택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도 여러가지 예에서 나타난다. 아무튼 양친의 선택은 태어나려는 영혼의 특권인 것처럼 여겨진다. 이제부터 태어나려는 영혼이 왜 일부러 빈민굴이나 타락한 부모 또는 불구의 몸, 그 밖의 불리한 환경을 선택하는지 얼른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피상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런 선택은 심리적으로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면밀히 분석해 보면 거기에는 심리적인 모순은 전혀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갑자기 뚱뚱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의 경우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보험회사에서 뭔가 제한조건을 들고 나온다든가, 여성이 결혼신청을 거절한다든가, 옷이 작아져 입을 수 없게 된다든가 하는 일들로 그는 갑자기 자기가 살이 찌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몸무게를 조절하려고 결심하여, 어딘가 적당한 몸무게 조절 전문가를 찾아 가서 지도를 받는다. 6개월 뒤에는 허리가 다시 가늘어지고, 심장의 기능도 정상으로 돌아가 그의 목적이 일단 달성된다. 영혼도 이와 같은 상황에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일부러 고통스러운 환경을 받아들이려고 결심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생각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사람은 많은 경우에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겨지면 고통스러운 길도 선택하는 것이다.
기묘하게도 이 선택의 자유는 아이가 어려서 죽는 경우와도 뭔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리딩에 따르면 보통 영혼은 태어날 때 자기가 선택하는 양친에 따라 자기가 이제부터 놓여질 지상의 환경이 어떤 것인가를 예견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인간의지의 자유에 따라 미래의 일들 모두를 예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어떤 영혼은 태어난 후에,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가졌던 기대에 양친이 따라줄 것 같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런 때에는 영혼은 자기가 태어난 내적 목적이 예상과는 다른 환경 때문에 달성되지 못할 것임을 깨닫고 물러가 버리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뒷받침해주는 좋은 예는, 전생에서 아주 일찍이 죽었다는 한 소녀의 경우이다. 그녀가 현생에서 지금의 양친을 선택하여 태어난 것은 주로 어머니에 끌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어나고 얼마 안 되고부터 아버지가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자포자기가 되어 가족들을 학대하기에 이르렀다. 어린 영혼은 실망하여 더 이상 살지 말자고 결심하고, 잠시 병들어 앓다가 지상을 떠나 돌아온 것이다. 어려서 죽는 경우는 말하자면 영화를 보러 갔다가 그 영화가 기대한 것과는 달리 재미가 없어서 조금 보다가 영화관을 나오고 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 이것은 케이시 리딩이 단순히 암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몇 번씩 분명한 말로 표현하고 있는 사실이다. - 임신의 순간과 영혼이 들어오는 순간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리딩은 많은 경우에서 임신 중의 마음가짐이 끌려오는 영혼의 유형을 어는 정도 결정한다고 말하면서 임신 중에는 특히 마음가짐과 생각에 조심하도록 조언해 준다. 다음의 인용은 이런 견해를 잘 나타내고 있다.
물음 : 이제부터 몇 달 동안 저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지내야 할까요?
대답 : 당신이 어떤 아이를 바라고 있는지에 다릅니다. 만약 음악적 재능이 있는 예술적인 아이를 바란다면 음악이나 미술·아름다움에 대하여 생각하십시오. 또한 기술자가 될 아이를 바란다면 기계를 생각하고 기계를 만지시오. 그런 것이 무슨 효과가 있을까 하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모든 어머니들이 알아야만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임신 중의 태도는 그 양친을 거쳐 태어나는 영혼의 성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케이시의 데이터로 미루어 볼 때, 영혼이 육체로 들어오는 것은 탄생 직전이나 탄생 직후 또는 탄생과 동시인 것 같다. 또한 탄생은 겉으로 보기처럼 우연한 사건이 아닌 것이다.
부모에게 닥치는 슬픔 가운데 가장 딱하고 가엾은 것은 불구의 자식을 낳는 슬픔일 것이다. 불구의 아이는 물질적으로는 특별한 배려와 보살핌을 필요로 하고 사회적으로는 일종의 무언의 치욕이며, 영적으로는 사랑의 신에 대한 의심의 씨가 된다.
윤회론은 그런 부모에게 안심과 용기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첫째로, 윤회론에 따르면 이상한 사건은 어떤 것이든 대개 카르마에 원인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대개 타고난 불구는 무언가 전생의 죄를 강하게 암시한다. 몽고성 백치(蒙古性白痴)·귀머거리·뇌수종(腦水腫) 기타 가련하게 불행에 시달리는 아이들에 대한 리딩은 거듭거듭 “이것은 아이와 양친 쌍방의 카르마이다.”라고 말해 준다.
이런 종류의 카르마의 유대를 보여 주는 가장 눈에 띄는 예는 어릴 때부터 간질을 앓고 있는 12세의 유태계 소녀에서 볼 수 있다. 간질은 발작이 일어났을 때 다루기가 어려울뿐더러, 앓는 사람에게 어두운 그늘을 드리워 주게 마련이다. 리딩은 “이 부모와 딸은 미국 혁명 시대에 역시 미국에서 지금처럼 부모자식 간이었다. 그 때 양친은 식민지 개척자들보다는 영국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 하에 영국군에게 도움이 될 정보를 수집하여 제공하고 있었다. 딸은 미인이고 대담하며 영리했다. 그런 장점은 양친이 하는 일에 안성맞춤이었기에 양친은 그녀를 부추겨 정보를 얻을 만한 사람을 유혹하게 하면서 딸을 이용했다.”고 밝혀 주었다.
리딩은 이 흥미진진한 드라마의 시말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었지만, 그것이 현생에 나타난 결과는 지적해 주고 있다. “이 사람의 양친은 딸에 대하여 무엇을 해줘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려면 그들 자신의 라이프 리딩을 받아 과거의 경험을 비교해 보아야 한다. 이 사람들이 현생에 겪고 있는 고통은 누가 보거나 자신이 한 행위의 보상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신을 속일 수는 없다. 사람은 자기가 씨 뿌린 것은 자기가 거두어 들여야 한다. 과거의 횡포나 자기중심적인 행위의 결과가 지금 자기가 뿌린 씨를 거두어들이고 있는 사람의 육체에 나타나 있다. 이 아이를 낳은 사람들은 그녀가 당연히 했어야 할 자제(自制)를 하지 못했던 과거에 대하여 크게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물질적으로 보다 많은 이익을 얻으려고 그녀가 하는대로 내버려 두었으니까. 그러므로 그들도 현재 이런 경험을 함으로써 많은 빚을 갚고 있는 것이다.”
이 딸아이는 현재의 육체적 불행 속에서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성적 과잉을 보상하고 있는 것이다. 양친이 이 딸아이를 돌보게 된 것은 그 책임의 대부분이 그들에게 있으므로 아주 적절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예는, 타고난 소경인 뉴욕의 한 소녀의 경우이다. 사진을 보면 아주 귀엽게 생긴 이 소녀는 빛에 대하여 조금 감각은 있지만 물체의 모양은 식별할 수가 없었다. 소녀의 어머니가 의뢰한 것은 피지컬 리딩이며 라이프 리딩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불행이 어떤 카르마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신의 라이프 리딩을 받았기 때문에 이 아이에 대한 그녀의 의무가 밝혀진 것이다.
이 어머니는 전생에서 교사를 한 것 같다. 리딩의 말을 인용하면, “이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한아이의 어머니에게 큰 문제를 일으켜 결과적으로 이 사람 자신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인간은 겉모양으로 본다. 그러나 신은 마음속을 보신다. 당신과 당신의 남편은 현생에서 이런 불행을 짊어짐으로써 자기 자신의 죄를 보상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과거에 신의 법칙을 가지고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극적인 음모의 내용에 대해서 다만 추측을 할 수밖에 없지만, 거기에는 지금의 부친도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리딩의 말로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한 교사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떤 학생의 어머니를 이용했고, 더구나 그 때문에 그 어머니의 마음을 혼란시켰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닥의 명백한 운명의 흐름이 있는 것 같다. 이용된 여성은 그녀 자신이 아마도 전생에서 소경이라는 형태로 보상할 육체적 카르마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현재의 생활은 그 죄를 보상하기 위해 선택된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모친은 그녀 자신의 개인적 카르마의 부채를 보상하기 위한 기회를 얻기 위하여, 이 세상에 그 아이를 낳아놓은 경로로써 선택된 것이다.
세 번째의 예는 몽고형 백치의 경우인데, 이것도 자세한 것은 아주 조금밖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사람의 어머니가 팔레스타인에서의 전생에서 불행한 사람들을 비웃었던 것이 현생에서 불구의 자식을 낳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예는 뇌수종(腦水腫)이라는 희귀한 병을 타고난 조산아의 경우이다. 모친은 산후 며칠 만에 죽었다. 젊어서 홀아비가 된 부친은 가톨릭의 육아원에 그 여자 아이를 맡겼다. 아이가 4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는 그녀의 피지컬 리딩을 케이시에게 의뢰했다. 그의 편지에 의하면, 그 아이는 매우 영리하고 무엇이나 잘 알아들으며 주변의 사람들 이름도 잘 외우고 말도 제법 잘할 줄 알았다. 그러나 걷지를 못했다. 그것은 머리가 너무 무거워서였는데 어떻게 하면 머리를 똑바로 지탱할 수 있는지 항상 조심해야만 했다.
아이의 라이프 리딩은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불행의 카르마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기와 아이와의 전생에서의 관계를 알려고 자신의 라이프 리딩을 의뢰했다. 리딩이 말해 준 대답은 짧고 날카로웠다. “현생보다 더 전의 삶에서 당신은 자기 자신을 바로잡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태만의 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말은 리딩에 없다. 그의 전생에서 알려진 것은, 그가 포트 디어본에서 장사를 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정신적·물질적으로는 이익을 얻었지만 영적으로는 잃은 것이 많다는 것뿐이다.
이런 경우를 볼 때 우리는 하나의 강력한 추정을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남들의 괴로움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면 운명은 뒤에 그런 괴로움을 우리에게 지우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남에게 적극적으로 잔인한 행위를 할 만큼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중에는 단테가 그의 시에서 노래했듯이, 연옥에 던져지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진하여 나쁜 짓을 하지도 않거니와 또한 자진하여 좋은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남의 괴로움을 눈앞에 보면서도 냉담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아마도 미래에 자기 자신이 육체적 불구가 될 만큼의 죄는 아닐지 모르나, 그러나 그는 어떻든 보다 더 민감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는 지상의 불행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기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동정심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신이 괴로움을 받을 만큼의 죄는 아니기 때문에 불행한 아이의 어버이가 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자기가 만든 아이의 참으로 볼 수 없는 몰골을 보아야 하는 괴로움을 통하여 불행한 어버이들의 고뇌와 인간고의 의미를 이해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만약 이 사람이 사랑의 행위를 배우기 위해 지금보다도 더 적당한 기회가 앞으로 두 번의 삶에서 연속적으로 주어져도 여전히 냉담하다면, 그런 태만의 죄는 다음번에는 그 자신의 육체에 어떤 재난을 가져올 만큼 큰 것이 되리라. 그리고 다시 태어날 때는 뭔가 구체적인 모양의 불행을 그 자신이 짊어지고 나올 것이다. 이러한 인과의 연쇄에 대해서는 리딩의 어디에서도 분명한 말은 없다. 그러나 이 경우뿐만 아니라 다른 경우에서도 이런 원리는 강하게 암시되어 있다. 이와 같은 경우는 부모 자식 사이에 카르마의 부채가 얽혀 있음을 보여 준다.
한 집안의 아이들끼리 사이에도 카르마의 유대가 이어져 있는 일도 있다. 케이시 파일에는 자매가 서로 반목하고 있는 기묘한 케이스에서 이런 상황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 있다. 그 어린 자매는 어릴 때부터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미워한다는 것이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아주 사소한 일로도 둘은 끊임없이 싸웠다. 그런 적의는 다섯씩이나 되는 아이들 가운데서 다른 형제자매 사이에는 보이지 않았다. 프로이드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이 자매 사이의 적의는 아버지를 독점하려는 유아의 질투에서 생긴 것이라고 설명될지도 모르지만, 케이시가 투시한 바에 의하면 이 자매의 한쪽에 성문제에 얽힌 완강한 질투가 있었음은 사실이나, 그것은 현생의 부친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언니 쪽의 전생의 남편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이 복잡한 인간관계를 이해하기 쉽도록 현생에서의 세 사람에게 이름을 붙여본다. 가령 동생을 로우, 언니를 에리스, 로우의 남편을 톰이라고 하자. 로우가 라이프 리딩에서 자기와 남편 및 자신의 언니와의 전생 관계를 묻자, “로우는 이 두 사람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대답과 함께 다음과 같은 드라마를 리딩은 말해 주었다. 이 세 사람은 버지니아의 식민지 시대 후기의 전생에서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톰은 당시 에리스의 남편이었다. 마을에서 수녀로서 마을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던 로우는 톰이 병에 걸리자 그를 간호하여 건강을 되찾게 해준다. 톰의 아내가 당시 어떤 이유 - 리딩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다. - 때문에 톰과 별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우의 동기는 순수한 이웃 사랑에서였지만, 그녀의 친절이 톰 사이에 이해의 유대를 만들어 놓았다.
에리스는 그것을 알고 로우를 매우 원망했다. 그 근거 없는 원망과 질투는 오래지 않아 증오로 자라났다. 이런 감정의 어둠이 에리스의 마음 속 깊이 박혀 몇 세기를 지난 후에도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도리로 말하면 에리스는 현재의 동생을 싫어하거나 학대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 무의식의 밑바닥에는 증오의 원형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로우 속에도 방어 본능과 복수의 온갖 요소가 역시 무의식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카르마가 얽힌 남매의 관계를 보여주는 다음의 예는 영국 태생인 남매의 경우이다. 그 아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어떤 미국 부인이 맡아서 키워 주었다. 그 부인은 당시 뉴잉글랜드에서 진보적인 학교를 경영하고 있었다. 두 아이를 양자로 보내게 되었을 때, 사내아이는 10세, 여자아이는5세였다. 그들을 보호해 준 부인은 이론적으로도, 또한 실재 아동교육의 실재 경험에 있어서도 아동심리에 밝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남매 사이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적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무래도 오빠 쪽이 먼저 싸움을 거는 것 같았다. “그는 매우 영리한 아이입니다. 그러나 아주 감상적이고 마치 궁지에 몰린 개처럼 폭력을 휘두르는 것입니다.” 그녀는 이런 사연과 함께 아이들의 라이프 리딩을 의뢰했다.
리딩에 따라 밝혀진 것은, 전생에서 이 두 아이들은 각각 조상 대대로 격렬한 적대관계에 있었던 스코틀랜드의 영주들의 가족이었다. 여기에서부터 원한이 무의식 속에서 계속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너무나 강한 원한이었기에 몇 세기를 지난 현생에서도 10세의 소년과 5세의 소녀 사이에 반목을 일으켜 놓았던 것이다.
물론 적의나 갈등에 대한 전생의 원인이 밝혀진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만약 증오의 사슬에 묶인 사람끼리 그 사슬에 묶인 채로 여러 번 환생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그들은 미움 대신 사랑을, 원망 대신에 친절을 지니도록 의식적으로 참을성 있게 노력해야 한다. 이런 노력은 가족 내에서 생긴 반목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잇는 모든 환경적 유대, 모든 적대관계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갖는 역할의 변화에는 궁극에 있어서는 단순히 한 가정의 일원이 아니라 인류라는 대가족의 일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끊임없이 되새기면서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미 많은 리딩 속에서 연속의 원리가 개인의 태도, 흥미, 성격의 특성 등에 영향을 미치는 양상을 보아 왔다. 이 연속의 원리는 인간의 능력에도 작용하고 있어 인간의 직업생활에 있어 중요한 인자가 되고 있음이 명백하다.
그 대표적인 예를 뉴욕의 일류 미용사의 전생에서의 경험에서 볼 수 있다. 그녀의 거처는 호화로운 살롱이었다. 그녀는 거기서 얼굴과 몸과 머리모양을 곱게 가꾸고 꾸며주고 또 성격을 개선하는 방법까지 지도해주고 있었으며, 그녀 자신도 매우 매력적이고 우아한 여성이었다. 그녀에 대한 라이프 리딩을 통해 3회에 걸친 전생이 밝혀졌는데, 그 중 2회의 전생에서의 경험만이 현재의 직업적 능력과 직접 연관되는 것 같다.
전생은 루이 15세 시대의 프랑스 왕궁에서 살면서 왕과 그 측근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그녀는 그때 외교술과 미태(媚態)·기민성·몸놀림·화장술과 멋 부리기 따위를 배웠다. 전전생은 로마에서 그리스도교를 믿는 귀족들의 앞장을 섰다. 그리고 그보다 앞의 삶에서는 기원전 1만 3천년 경 이집트의 신전(神殿)에서 공부하고 일했다는 것이다. 그 때에 그녀는 무용과 음악·예술을 통해 아름다운 지체(肢體)를 다듬어 내는 방법을 배웠고, 또 몸에 바르는 화장수·연고·분 같은 것을 만드는 방법도 익혔다. 프랑스 궁전의 생활은 여기에 일맥상통하는 효과를 주었다. 즉, 대체로 저속한 사고방식과 사회생활에서 낌새를 살피는 능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된 것이다.
이집트 신전에서의 경험에 대해서는 조금 설명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 시대에는 주된 ‘신전’이 둘 있었던 것 같다. 하나는 ‘미(美)의 신전’이라 부르고 또 하나는 ‘희생의 신전’이라고 불렀다. ‘미의 신전’은 일종의 학교 내지 대학과 같은 곳이다. 그러나 지성의 함양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적인 대학과는 달리 이것은 인간의 인격을 연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예술과 과학이 모두 학생들의 정신과 육체의 미를 가꾸어내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희생의 신전’이란 말하자면 병원과 같은 기관이다. 이것을 신전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모든 교육과 치료가 종교적 및 영적 원칙에 바탕을 두고 운영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다음으로, 어떤 매우 인기 있는 마사지 치료사의 전생에서의 직업경력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의 4회의 과거생이 밝혀졌는데, 그 중 3회의 생애에서의 직업이 현생의 그것과 관련이 있다. 전생에서 그는 미국 초기의 의사였고 인디언들과 친밀한 교류가 있었다. 그런 교류를 통해 그는 자연요법과 약초요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리딩에 자주 나타나는 설명을 보면, 전생에 아메리카 인디언과 친했거나 인디언이었던 사람은 현생에서도 자연을 사랑하고, 손으로 물건 만들기를 좋아하며, 자연적인 생활법과 치료법에 강한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
전전생에서는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로마에서 목욕장과 마사지의 감독노릇을 했으며, 그 전의 삶은 페르시아에서였는데, 그 때의 직업에 대해서는 리딩이 말해 주지 않았다. 다시 그 전의 인생은 기원전 1만 3천년 전의 이집트에서 살았고, 그 때의 직업은 미이라사였다. 이 때의 경험이 그에게 인체의 내부구조, 여러 가지 약초, 향료, 갖가지 화장품의 효과에 관한 지식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예는 할리우드의 영화 색체감독이고 화가인 사나이이다. 이 사람에 대한 리딩은 그가 과거생에서 3번이나 예술적인 일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전생은 후기 식민지 시대의 미국에서 실내 장식가였고, 전전생은 러시아의 코사크 기병장교였으며, 그 전의 삶에서는 인도차이나 여왕의 의상담당자, 다시 그 전의 인생에서는 이집트의 ‘미의 신전’에서 실내장식가로 활약했다는 것이다. 현재의 그는 매우 활기에 넘치고 민첩하며 관찰력이 예민한데, 이것은 아마도 코사크 기병장교로서의 전생의 경험에서 온 것 같다. 그리고 3번의 과거생에서 예술가였으니, 현재의 그의 재능은 그런 전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뉴욕에서 성공한 작곡 및 편곡자인 사람도 역시 다채롭고 현재의 직업과 관계가 있는 과거생을 가지고 있다. 전생에서 그는 뉴욕의 교사였고, 학교의 교과과정에 음악을 포함시켰다. 전전생은 독일에서 목조각(木彫刻)을 업으로 삼았으며, 이때 여러 가지 악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전의 인생은 가르디아의 네브카드네자 왕의 희극 배우였고, 그 전의 삶은 아틀란티스인 이었는데, 이집트로 가서 신전의 예배음악을 연주하는 악사로 일했다. 그가 현생에서 악기의 모양이나 끝마무리 손질, 음질과 음정의 완벽성에 대해 까다로운 것은 분명 독일에서 악기를 만들었던 경험에서 유래된 것이다. 익살을 잘 떨고 유머 감각이 있는 것은 궁중 희극 배우로서의 경험에서 온 것이고, 그 밖의 2번의 음악가로서의 경험은 현재의 음악적 재능에 직접 이어지는 것이다.
때로는 취미가 전생에서 유래되었음이 밝혀진 예도 있다. 어떤 은행장의 경우인데, 그는 어릴 때부터 모든 종류의 운동경기에 열광하는 성질이 있었으며 특히 야구를 좋아했다. 그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가 일요일에는 야구를 하는 것에 맹렬히 반대하고 나서자 그는 당장 그 교회에서 나오고 말았을 정도이다. 은행업이 그의 직업이고 돈을 많이 벌었지만, 여가는 야구클럽 경영에 바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과거생에서의 직업 경력이다.
전생에서는 초기 개척자로서 무역업을 했고, 전전생에서는 원형 경기장에서 국제적 경기를 감독하는 사람이었으며, 그 전의 삶에서는 페르시아의 유목민 우두머리로서 여러 곳에 물자교역소를 세웠고, 그 전의 인생에서는 이집트의 회계관 이었다. 이들 과거생 가운데 3번의 경험은 현재의 은행가로서의 직업에 직접 이어지며, 로마 경기장 감독으로서의 경험은 분명히 은행장으로서의 경영능력의 기초가 되어있고, 아울러 지금의 그 열화 같은 운동 취미에 이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개인의 직업에 관한 능력은 대개 전생이나 전전생 또는 그보다 먼 과거생에서 같은 종류의 직업이나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직업에 종사한 사실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케이시 파일에서 볼 수 있는 직업의 역사는 주의 깊은 연구자들의 마음에 많은 의문을 일으킨다. 첫째로 발단(發端)의 문제가 있다. 이것은 윤회론이 영혼은 처음에 신에게서 나왔다고 할 때 그들을 당혹시키는 문제이다. 애당초 무엇이 어떤 영혼은 어떤 직업 쪽으로 향하게 하고, 다른 영혼은 또 다른 직업 방면으로 향하게 하는 것일까? 만약 인간의 영혼이 원래 신에게서 차별 없이 평등하게 방사되어 나온 것이라면, 어찌하여 한 사람은 농업 방면으로 향하고, 또 다른 사람은 상업 방면으로, 공업 분야로, 음악 분야로, 수학 분야로 향하게 되는 것일까? 인간 각자 속에는 뭔가 개별적인 미묘한 요소가 있어 그것이 개인마다 다른 직업을 골라잡게 하는 것일까?
케이시 파일은 이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분명한 말도 하고 있지 않지만, 또 다른 하나의 문제 곧 ‘영혼이 인생을 거듭하면서 하나의 직업에서 다른 직업으로 바꾸어 나가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에는 상당히 납득이 가는 자세한 설명을 해 준다. 케이시 파일에는 이와 같은 전직(轉職)의 예가 많이 있으며, 그 중의 적당한 예를 분석해 보면, 이런 직업의 변화는 ‘욕망’과 ‘카르마의 법칙’이라는 두 가지 근본적 인자로서 설명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미 살펴본 두세 가지의 예에서도 명백하듯이, 욕망은 그 강도에 있어 카르마와 동등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어떤 능력이나 성질을 지니고 있는 사람과 접촉하다보면 그런 능력이나 성질을 원하게 되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고 병자나 고민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 감화를 받아 예수님과 같은 일을 하고 싶다는 일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일으킨 사람이 많이 있었다고 케이시 리딩은 말한다. 이런 욕망의 힘은 그 후 연속적으로 여러 번의 삶을 통하여 설교를 하고 병을 고치고 하는 능력을 획득하도록 그 사람의 마음을 몰아세운다.
때로는 이런 욕망이 어떤 사람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자신은 갖지 못했다는 불쾌한 열등감에서 나오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어떤 원인에서 그런 욕망이 나오든, 욕망이란 영혼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인자이다. 그것은 온갖 계기를 이용하여 차츰 차츰 특정의 모양과 방향을 취하면서, 마침내 그것을 실현하기에 알맞은 양친과 환경을 선택하여 그 새로운 성질과 상태를 완성하려고 활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향성·외향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욕망의 충동에 따라 하나의 직업적 숙련에서 다른 직업으로 옮겨가는 데는 아마도 몇 번의 환생을 필요로 할 것이다. 만약 이 추론이 옳다면, 지금 자신이 종사하고 있는 직업에서 평범한 능력밖에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도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다른 뛰어난 사람들과 비교하여 그가 평범한 것은 아마도 그 직업에 종사한 것이 처음이거나 또는 두 번째쯤이기 대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욕망 이외에 카르마 또한 직업의 변화를 결정하는 중요한 인자인 것 같다. 리딩중 요추 카리에스인 소녀가 이런 예에 해당된다. 그 소녀는 병에 걸리고부터 오랫동안 사회에 쓸모가 있는 삶이 되려면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하고 생각해 왔다. 리딩은 그녀에게 하프를 배우라고 했다. 그리고 초기 이집트에 태어났을 때는 현악기를 전공했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그런 재능이 있다고도 했다. 소녀는 리딩의 권고에 따랐다. 그러자 정말로 그 악기를 다루는 놀라운 재능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 때까지는 어떤 악기도 배워 보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그녀는 동생과 함께 음악회를 몇 번씩 열게 되었다. 그다지 명성을 날리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 직업을 가짐으로써 행복하고 바빠진 것만은 사실이다. 바로 그 전의 삶에서 그녀는 다른 직업을 가졌었다. 그러므로 육체적 카르마가 하나의 직업을 지속하는 것을 방해하여 어쩔 수 없이 다른 직업을 선택하는 결과가 된 것이다.
또 하나의 의문은, 영혼이 완전히 진화되기 까지는 이 지구상에서 몇 가지의 직업을 경험해야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완전 원만한 인격이 되기 위해서 영혼은 갖가지 다른 직업을 가져 보아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술에서는 완성의 경지에 도달했지만, 공업이나 의학, 사회학 따위의 면에서는 잘 알지 못하는 채로 이 태양계를 졸업할 수는 결코 없다고 여겨진다.
그야 어떻든 적어도 이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즉, 직업의 문제와 영적인 문제 사이에는 많은 경우 밀접한 상호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직업상의 어려움은 많은 경우 교정되어야 할 어떤 성격상의 결함에서 온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한 예는 48세인 독신 남성에게서 볼 수 있는데, 이 사람은 어떤 성격상의 결함 때문에 부동산 중개인이라는 자신의 직업이 점점 싫어져서, 어떤 직업으로 바꾸면 좋을지를 판단하려고 케이시에게 리딩을 받았다. 리딩에 따르면 그의 전생은 권위적이고 오만한 교사였다. 그런 엄격한 성격이 현생에까지 이어져 사회적 적응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설령 지금의 직업이 맞지 않더라도 필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으니, 당분간 그대로 계속하라고 리딩은 권한다.
케이시의 파일에는 이와 같은 경우가 많이 있다. 그것들을 살펴나가노라면 톨스토이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생활환경이란 건축을 할 때 세우는 발판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한 사람의 생활환경은 그가 안으로 건축을 하기 위한 외곽적 골격의 구실을 할 뿐이다. 밖의 틀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절대적 중요성도 없고 영구한 것도 아니어서 건물이 완성되면 곧 철거되고 마는 것이다. 아마도 직업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며, 어떤 면에서의 인간의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기 위한 거푸집이라고 본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한편 직업은 어떤 덕성(德性)을 가꾸는 데 있어 반드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각 직업분야에 종사함으로써 사람은 그 분야에 독특한 것들을 이해하고 배우며, 나아가서 우주의 많은 동심원(同心圓) 중의 어떤 하나의 원에 나타나 있는 생활 원리를 알고 거기에 따라 활동하기를 배우는 것이다. 아마도 의학이나 음악·농업·예술 등등을 배우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결국 자기 자신이 신과 더불어 창조자가 되는 일일 것이다. 균형 잡힌 순수한 영(靈)으로서의 신, 사랑에 넘치는 빛나는 창조적 표현의 중심인 영으로서의 신, 스스로 온갖 형태와 생명과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영으로서의 신과 하나 되는 것이다.
출처-우주네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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