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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탁돌이와 탁순이 원문보기 글쓴이: 아르스(ARS)
기묘사화 삭풍에 꺾인 왕도정치의 주체 (신재 최산두, 新齋 崔山斗)
봄날 진달래, 벚꽃 길을 따라 15세기의 큰 선비를 만나러 전남 <광양>으로 간다.
기묘사화로 인해 조광조등과 함께 숙청되었으나 그 후 기묘명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은 당대 의 경세가요, 큰 학자이며 교육자였던 신재 최산두(1488~1536) 선생.
신재는 1483년 지금의 전남 광양시 백운산 기슭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그를 낳을 떄 북두칠 성의 광채가 백운산에 내렸다 하여 이름을 산두(山斗)라 지었다고 한다.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정치가 어지러워 민심이 흉흉해 과감한 개혁이 필요했던 시대에 태어나 <바른 말>을 하고 <바른 행동>을 했다고 해서 화를 당했던 인물이다.
<기묘사화>란 도대체 어떤 사건이었을까.
당시 조선왕조는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이 연산군대의 정치를 개혁하고 해이된 풍속을 바로 잡기 위해 성리학을 장려하고 있는 중이었다.
따라서 충효와 같은 윤리도덕을 강조하고 청렴과 절의를 숭상하며 도학(道學)이 있는 인재를 널리 등용하였고 스스로 치도(治道)에 몰두하였다.
이런 중종의 뜻을 받들어 평화로운 세상을 꿈꾼 인물들이 신재 최산두 선생을 포함하여 조광 조, 김정, 박상, 기준, 김안국, 양팽손 등 일군의 신진사류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조선조의 성리학자이자 사림파의 사종(師宗)으로 추앙 받는 길재, 김종직, 김굉 필의 학통을 이어받은 성리학도들로 경학에 전념하며 도학적 이상주의에 불탔던 20~30대의 젊은 신진들이었다.
이들 신진사류들은 중종의 두터운 신임에 힘입어 승진가도를 달리며 사헌부, 사간헌, 홍문관 에 포진하여 임금을 측근에서 보필하며 경학을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고 왕도정치를 실현하 는데 주력했다. 또 도덕과 절의를 숭상하며 인심을 바르게 하고 도를 기본으로 한 급진적인 정 치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특히 소학(小學)을 장려하며 남아가 8세가 되면 소학에 들어가 ‘나아가고 물러남’의 절(蕝)과 부모사랑, 어른공경, 친구의 의리를 배우게 하는 한편 전국에 향약을 실시하여 덕업상권하는 미풍양속을 길러 정치와 사회기풍을 바로 하고자 했으며 소인과 군자를 구분하고 청렴을 귀하 게 여겼다.
따라서 이들의 눈으로는 중종 반정시 아무 공도 없이 공신이 된 자들, 예컨대 당시 반정에 가 담하지도 않고 그 주동인물 유자광에게 뇌물을 주어 공신에 책록된 자나, 공신의 자제로 아무 한 일도 없이 공신에게 오른 자등에 대한 불쾌감과 울분을 품어왔다.
마침내 중종 14년 조광조 등 신진 사류들은 훈신들의 제거를 주장하고 나서 이들이 과분하게 받고 있는 토지와 노비를 뺴앗아 부당한 부의 편중을 막고 사대부의 기강을 바로 잡아야 한다 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훈신의 문제가 논의 되었고 가짜 공신 1백7명 가운데 76명이 가려져 그 공적이 소각되었다.
이에 격분한 심정, 홍경주 등 훈구파 핵심세력들은 신진사류를 일망타진할 계교를 꾸미고 이 들이 붕당을 만들어 조정을 교란시키고 있다고 무고, “조광조가 왕이 되려한다”며 왕에게 참소 케 했다.
한편 중종도 자신의 뜻을 거슬러 가면서까지 반정공신에 대한 공적소각 등 과격한 개혁정치를 강행한데 대해 불만, 이들의 지나친 도학적 언행에 대해 염증을 느껴오던 터였고 현량과(과거 제도)를 실시하여 신진사류들이 대거 등용됨으로써 이들의 커다란 세력이 왕권을 제약하기에 이르자 내심 견제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이떄 훈구세력이 신진사류 제거 움직임을 보이자 이에 동조하여 <기묘사화>가 빚어진 것이다.
신재는 이 기묘사화로 화순 동복에 유배돼 14년을 적거하다 기묘사류 중 가장 늦게 풀려났으 나 다시 재기를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신재 최산두는 어려서부터 영특해 글 읽기에 몰두하여 늘 경서를 가까이 하고 성현들의 삶을 법으로 삼아 수행하기를 독실히 했다고 한다.
벌써 6살 떄부터 험준한 재를 넘어 서당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지금도 전하는 일화가 있다.
하루는 밤에 서당을 가는 도중 갑자기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져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초가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귀신이 ‘사인 선생 행차가 있어 호위해야 하니 집 을 떠나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는 것 이였다. 이 소리를 들은 뒤부터 자신이 벼슬길에 오를 것 을 예견하고 더욱 분발했다.
또 서당에 갔다가 밤늦게 이 재를 넘는데 예쁜 처녀가 유혹하며 입 맞추기를 요구했다. 선생은 이를 뿌리치고 재를 넘었는데 매일 밤 이 처녀가 나타나 유혹하자 궁리 끝에 훈장에게 대책을 여쭈니 요구에 응하고 혀에 있는 구슬을 뺴앗아 버리라 했다. 그렇게 하자 처녀는 여우가 되어 도망치고 선생은 구슬의 효험으로 높은 벼슬에 올랐다는 전설이 지금도 광양에 전해지고 있다.
열다섯이 되자 공부를 더욱 독실히 할 뜻을 품고 <주자강목> 80권을 안고 석굴에 들어가 2년 동안 기거하면서 천 번을 통독. 춘추대의를 밝게 해석한 뒤 석굴의 문을 나왔다 한다.
이떄 석굴 절벽에 ‘학사대(學士臺)’라 크게 새겼는데 지금까지 광양군 옥룡면 동곡리 이곳을 학사대라 부르고 있다.
22세 되던 1504년 진사에 올랐고 이를 계기로 성균관에 들어간 이후 그의 정치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학자들과 교유한 것으로 보인다.
1518년 1월 14일 밤.
왕이 신재에게 물었다. “정승을 어떻게 뽑아야겠는가?”
“금전을 보고 천거해서는 안 됩니다. 정승을 뽑는 일은 중대합니다. 한 세대에 삼공(三公)의 인재가 많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지요. 삼공에 결원이 있을 경우 후보 자 가운데서 보직하는 것은 옛날의 방법이 아닙니다. 옛날의 경우를 말하면 정승을 택하는 방 법은 사람에게 있고 위계에 있지 않습니다. 비록 산속에 숨어있는 사람이라도 뽑아서 쓸 수가 있습니다.
고구려 떄 을파소를 그렇게 등용했습니다. 정승을 뽑는 데에는 바른 선비와 속된 선비를 잘 진 정시키는 사람만으로는 부당합니다. 모름지기 위로는 임금의 덕을 돕고 아래로는 백관을 거느 릴만한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신재는 일찍이 정몽주, 길재, 김숙현, 김종직, 김굉필로 이어지는 조선초 사림파 성리학의 학통 을 이었고 당시 조광조 등 사림파 신진사류들과 함께 도학정치를 통해 해이된 풍속을 개혁하려 는 의지를 가졌다.
중종 13년 성리대전 감독관으로 발탁돼 경연에서 이를 진장하는 영예를 얻었다. 이는 조정이 선생의 성리학에 대한 학문적 명망을 인정했던 것이다.
<기묘록>에 따르면 당시 중종은 유학을 숭상하고 문치(文治)에 뜻을 두어 조광조 등 여러 현 인들을 사랑했는데 이들은 매번 경연에 나가 한 장(章)을 강독할 때마다 ‘의리’를 이끌어 비유 하고 경전 깊이 파고들어 미묘한 곳까지 관철하였으며, 강사가 기준, 박세희, 양팽손, 최산두 에 이르게 되면 대화가 끝난 줄도 모르고 해가 기울어야 일어서곤 했다고 한다.
불행히도 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상세히 알아볼만한 저술들이 다 인멸돼 그 진수를 상고할 길 이 없지만 당대의 대 학자요, 호남도학의 원조요, 사종이었음은 분명하다.
조선 선비 중에는 글 못 짓는 선비가 없었지만 신재의 시는 극찬하는 이가 많다. 특히 시문이 뛰어나 호남 3걸로 일컬어질 정도다.
그러나 문집이 실종돼 당시 교유했던 知友(지우)들의 문집이나 <대동야승>과 같은 문헌. 구전 설화나 정자의 제영 가운데 전해지는 것들을 모아 확실하게 해독할 수 있는 한시 18수. 서간 11편으로 신재의 작품을 살펴볼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신재는 여러가지 정황이나 기록들로 보아 많은 시문작품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당대의 호남선비 임억령, 유성춘, 양팽손, 박상, 기준, 안처순 등과 같은 지기들과 술과 노래 를 즐기며 시를 주고받았다. 여기저기 전하는 기록들을 보아도 남겨진 시보다 없어진 시가 훨 씬 많음을 알 수 있다.
백로 고기 엿는 모습 노란 꾀꼬리 나비 쫒는 양은 강물이 백옥을 품는 듯하고 산이 황금을 토함 같네.
<물염정>이라는 시(詩)다.
물염은 세속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세계. 이 정자와 마주한 산과 강. 산속에 노니는 꾀꼬리는 한 폭의 산수화 같다. 더욱이 백로가 고기를 쪼으려 물속을 기웃거리는 모습과 꾀꼬리가 나비를 쫓는 모양의 비유 는 절묘하기 까지 하다.
신재의 시는 비유가 절묘하고 정경묘사에 있어 회화미가 뛰어나다. 그런가 하면 자연친화적 경향의 서경시와, 마을을 가다듬고 임금과 친구를 사랑하는 인생론적 경향의 시 ,술과 풍류를 읊조린 시들이 고아하고 품격 높은 시(詩)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1519년, 37세의 신재는 운명의 기로에 놓였다.
의정부 사인으로 기묘사화에 연루돼 삭탈관직, 화순 동복에 유배되었다. 이곳에 칩거하는 동 안 신재는 세상사의 득실 따윈 마음에 두지 않았다. 물염, 적벽 간을 소요하며 시와 술로 소일 하는 한편 인근 유생들을 모아 강학에 열중했다.
하서 김인후, 미암 유희춘 등이 이떄 신재의 명망을 듣고 찾아와 수학했던 제자들이다. 신재의 유배생활은 퍽 낭만적이고 관조적이었던 듯하다. 이곳에 머물면서 그가 이름 지었다는 화순 옹성산 <적벽>의 빼어난 절경은 동복수원지에 일부가 잠기긴 했으나 지금도 여전하다.
유배 15년만인 1533년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그 기간 중 양친과 부인을 잃었다. 한 많던 그도 어머니를 잃은 두 해 뒤인 1536년 4월 14일 54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정치개혁이 강력히 요구되던 15세기. 미천한 출신 최산두가 살았던 시대는 훈구세력과 신진사 류가 상반된 학통, 정치론으로 피를 쏟던 상황.
훈구세력의 극심한 탄압으로 정치적 열세를 면치 못했던 신진사류에 편승한 신재의 인생은 오 늘날 양심있는 지식인의 외로움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개혁정치를 펴 보려다 실패해 좌천된 후 고향에 내려와 넉넉한 시와 학문 탁마를 계속했던 선 비...
어릴 적 공부를 했던 광양군 옥룡면 동곡리 학사골은 고로쇠가 펑펑 쏟아져 명소가 되었지만 <학사대>의 의미를 아는 이는 몇이나 될까.
후인들이 그를 추모해 바위에 ‘학사대 백류동’이라고 글씨를 새긴 자연 암굴의 내부는 사람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넓이의 굴로 되어있고 한사람이 먹을 수 있는 자연 우물이 있는가 하 면 암굴 밖의 기암괴석이 노송과 아울러 소금강을 이루고 있다.
왕에게 아부 할 줄 모르고 직언을 할 수 있었던 용기. 지금도 학사대 입구에 들어서면 신재 선생의 꼿꼿한 바른 말이 들리는 듯하다.
‘나라를 다스리는데 중요한 것은 인재를 얻는 것인데, 인재를 옳게 얻으려면 먼저 왕께서 인재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시비가 명확하고 행동에 지조가 있었던 옛 선비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 참고 장소 및 문헌 0 장지 - 광양군 풍강면 부저리 화전봉 0 위폐 - 광양군 우상리 <봉양사>, 화순 동복 <도원서원> 0 기타 - 광양군 옥룡면 동곡리 <학사대>, 화순 옹성산 <적벽> 0 작품 - <한시 18수> <서간 1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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