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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What is Caste (Varṇa & Jāti)?
인도 사회를 연구한 초기의 학자들은 대부분이 인도 사회는 정체되어 있고 그 중심에 불변의 카스트 구조가 자리잡고 있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막스 베버(Marx Weber)는 “카스트 질서의 불변성이 재산 분화를 지연시키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최소한 기술 변화와 직업 이동에 대해서는 방해할 수 있었으니 이들은 카스트의 관점에서 볼 때 있어서는 안되는 것들이거나 의례적으로 위험한 것들이었다. 오늘날, 신기술이 새로운 카스트 혹은 준카스트의 형성을 가져오지만 개혁에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1958) 이에 관한 한은 역사를 물질 중심의 변화로 해석하고 있는 유물론주의자들의 상당수에게도 마찬가지였으니 그것은 마르크스가 설정해 놓은 동양사회 정체론이라는 잘못된 가설 때문이었다. 이러한 마르크스와 베버의 분석은 많은 편견과 왜곡의 결과일 뿐 인도사회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이후로 많은 서양인들은 인도는 근대 경제 체계로 발전할 수 없는 나라이고, 그 이유는 불변의 카스트 구조라는 견해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인도의 카스트 체계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고대로부터 심한 변화를 겪어 왔고, 그것이 경제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한 적은 결코 없다.
인도사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카스트’ 에 대한 정확한 용어 사용부터 출발한다. 인도 전통사회의 신분을 의미하는 용어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카스트(caste)라는 어휘는,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인도 고유의 사회조직을 설명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한 것이다. 그것은 이 용어가 17세기 경 포르투갈인이 인도 땅에 처음 들어와 그들의 시각으로 인도 사회를 판단하고 그에 맞는 자기 나라 말을 사용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무역상인 그들과 접촉한 인도인들을 통해 인도 전통사회의 기본 단위가 균질적이고 순수 혈통적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그에 해당하는 포르투갈어 까스따(casta)를 채택해 그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그 단위의 실제는 그들이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사실이다.
인도인들은 인도 전통사회의 구성을 바르나(Varṇa)와 자띠(jāti)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 가운데 Varṇa는 어원적으로는 색(色)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사회 구성 범주로서는 브라흐만(brāhman), 끄샤뜨리야(kṣatriya), 바이샤(vaiṣa), 슈드라(śudra)의 넷을 가리키는데 사회학적 의미로는 계급에 해당한다. 그리고 jāti는 출생(出生)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결혼이나 음식에 있어서 배타적인 관계의 기준이 되는 사회의 실제 기능 단위이다. 전자는 그 수가 넷으로 정해져 있는 반면에, 후자는 대개 시간과 장소에 따라 따로 정해져 그 수가 통상 2,000개가 넘는 것으로 되어있다.
신화에 의하면 뿌루샤(Puruṣa)라는 원인(原人)이 스스로를 제사 지내 그 몸에서 네 개의 Varṇa를 출생시킨 것으로 되어있다. 그의 입으로부터 brāhman이, 그의 팔에서 kṣatriya가, 그의 다리에서 vaiṣa가, 그리고 그의 발에서 śudra가 태어났다. 이 몸의 각 부분에 관한 상징은 각 Varṇa의 의례적 지위 및 그 집단의 사회적 기능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리고 카스트의 기원과 구조가 의례에 존재기반을 둔다는 사실은 곧 각 카스트의 성격과 그 순위가 종교 이데올로기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네 계급 가운데 상위 세 계급은 드위자(dvija : 두 번 탄생한 者)라고 하는데 그들은 입문 의례를 통해 사회적으로 정상인으로 인정을 받는 반면에 하위계급 슈드라는 의례를 통한 사회적 정당성을 받지 못하여 사회적으로 불구인으로 규정된다.
실제 역사상 Varṇa의 기원은 아리아인과 토착민들이 서로 동화되면서 갠지즈강 상류 유역에 진출해 농경사회를 성립시킨 후기 베다 시대(B.C. 1,000~600)로 올라간다. 유목시대를 청산하고 정착 농경사회가 이루어지면서 정기적인 생산체계와 함께 계급으로서 Varṇa가 발생하였다. 브라흐만은 우주적 정수(精髓)를 의미하는 절대적 존재인 브라흐만(brāhman)에서 끄샤뜨리야는 권력을 의미하는 끄샤뜨라(kṣatra)에서 바이샤는 평민을 의미하는 비슈(viṣ)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나 인도에서의 고대 사회는 경제의 발달과 이로 인한 산업의 분업화, 그리고 정치권력의 난립으로 인해 이상적인 네 개의 Varṇa 체제로만 유지될 수는 없었다. 특히 마우리야 왕조 이후의 시대에는 중부와 남부 인도의 많은 부족민들이 카스트 체계로 흡수되면서 카스트가 양산되기 시작하였고 그 와중에 많은 위치 변동이 있었다. 특히 기원 초기에는 많은 도시가 발달하면서 경제력을 확보한 낮은 카스트들이 실질 권력자로 등장하고 견제적으로 몰락한 브라흐만들은 단순한 고용인으로 전락하는 등 사회의 실질 구조가 의례상의 구조와 큰 괴리를 나타내었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인도-그리스인(Indo-Greeks), 샤까족(Shakas), 꾸샤나족(Kushanas) 등 외래 이민족들이 통치자로 자리잡으면서 카스트의 이동이 심했는데 이로부터 라즈뿌뜨(Rajputs)라는 계급이 발생하면서 끄샤뜨리야의 주요 분파로 자리를 잡는다. 더불어 5세기 경부터 시작된 도시의 몰락과 봉건사회의 정착 등으로 인하여 많은 카스트의 이동이 있었다. 슈두라는 농경민으로 정착하면서 바이샤와의 격차를 좁히기 시작하였고, 슈드라의 상승에 반해 사회의 최하층에서 불가촉민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이로써 ‘Varṇa Hindu’ 대 ‘불가촉민(out-caste)'이라는 차별의 구조가 점점 확실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토지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면서 토지의 기록을 전담하는 계급인 까야스타(Kayastha)가 브라흐만과 끄샤뜨리야의 중간 계급으로 자리잡았다.
‘정(淨)’과 ‘오염(汚染)’의 개념을 토대로 하고 신화에 근거한 ‘성(聖)스러운’ 네 Varṇa 구조의 사회는 실제 역사에서는 자리잡지 못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브라흐만들은 신화 속에서 깔리 유가(Kali yuga : 암흑시대)라 폄하하여 부름으로써 Varṇa 구조의 유지를 통한 사회의 안정을 꾀하고자 하였다. 고대 사회에서는 상위의 Varṇa가 곧 지배층이 되는 현상이 주를 이루었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었으나 중세에 접어들면서 토지 하사가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그에 따라 많은 非브라흐만 지주층이 양산되면서 Varṇa가 계급과 동일시되는 현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인도사회에서도 권력이 반드시 한 계급에 고정되어 있지는 않았다. 다시 말하면, 고대 인도에서도 여느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이동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인도에서는 실질적인 사회이동은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하였고 반드시 거기에 카스트의 의례적 지위 이동이 추가되어야만 사회적 의미가 부여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곧 인도사회가 그 내부에서 실제로 잦은 이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동의 방향이 보수적인 구조로 흐를 수 밖에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Ⅱ. Untouchables(Out-caste) of Ancient India
1. 챤다라 chandāla(out-caste)와 그 생활
종교적인 정(淨), 부정(不淨)의 관념이 극도로 발달하여 인간과 직업을 귀천의 서열 속에 위치시키는 일이 일반적으로 행해진 고대 인도에 있어서 천민제도는 복잡하게 발달하였었다. 불교의 경전이나 힌두교 법전은 몇 종류의 천민이 바르나 사회(4바르나에 속한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의 주변에 혈연집단을 형성하여 살고, 각기 독자적인 생업에 종사하고 있던 일을 전하고 있다.
이들 천민은 안띠야(antya), 안띠야자(antyāja), 안띠야와사인(antyāvasāyin), 바아히야(bāhya), - 이상은 말단, 최하 또는 외부인의 뜻 - 아스쁘리슈야(asprsya : 불가촉천민) 등의 명칭으로 불려지는 일이 있었으나 그들간에는 부정성의 대소에 따라 상하의 차별이 존재하고 있었다. 상하 각종의 천민 중 챤다라에 관한 기록이 가장 많은데 그 기록은 천민 가운데 챤다라가 제일 천하게 여겨져 불가촉성을 본질로 하는 존재였다고 전하고 있다.
업보(業報, karma)와 윤회(輪廻, saṁsāra)의 교리를 믿은 고대 인도인들은 전생의 죄업 때문에 사람은 챤다라 등의 천민으로서의 생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예를 들면 힌두법전에는 브라흐만을 죽인 자, 브라흐만의 황금을 훔친 자, 수드라에게 구걸하여 제사에 필요한 물건을 구한 자, 수라주(酒)를 마신 자, 카스트 추방에 상당하는 대소의 죄를 짓고 속죄하지 않은 자 등이 챤다라로 태어난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일부 문헌에는 챤다라 등의 천민은 동족끼리만 결혼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챤다라의 대부분은 자기들의 혈연집단 속에서 출생하고 있음은 물론이나, 한편에서는 바르나 사회의 성원이 챤다라와 마찬가지라 하여 사회에서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챤다라는 도시나 촌락 밖에 무리를 지어 살고 있다. 예를들어, 힌두법전에서는 챤다라의 주거지는 촌락 밖이 아니면 안된다고 정하고 그들이 야간에 도시나 촌락에 들어오는 것을 금하고 있으며 <아르타 샤스트라 artha sastra> 는 도시를 건설할 때 챤다라와 이교도의 거주구역을 묘지 곁에 설치하도록 정하고 있다.
또한 <마누법전 Manu smrti>은 챤다라에 대해서 개나 당나귀를 재산으로 하고, 죽은 사람의 옷을 입게 하며 깨어진 식기를 사용하게 했다. 또 철제 장신구를 몸에 달고 항상 여기저기를 돌아다녀야 한다고 정했으며, 낮에는 왕명에 의하여 정해진 표지를 몸에 달고 일하러 나가도록 명령하고 있다. 챤다라는 바르나 사회의 정식 성원은 아니나 생계를 얻기 위해서 바르나 사회와 어떠한 형태로든지 결부되는 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 한편 바르나 사회의 성원은 자기들이 가장 부정하다고 여기는 일을 이들에게 강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것은 시체처리, 체형(體刑) 집행, 오물청소 등이다. 그러나 챤다라는 바르나 사회와 접촉한 후에도 예로부터 내려온 생활수단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이것은 그들이 수렵과 활촉 만들기를 업으로 한 것을 전하는 불교경전 속의 기록이나, 삼림지대의 방위에 챤다라를 이용한 <아르타 샤스트라 artha sastra>의 기록 등에서 알 수 있다. 또 챤다라가 죽인 짐승의 고기를 정(淨)이라고 규정한 인도법전의 기록에서 챤다라는 수렵, 채집을 통해서 얻은 것을 자기들이 소비할 뿐만 아니라, 바르나 성원 사이의 교환에도 사용하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2. 정화의례(淨化儀禮)
바르나 사회의 성원, 특히 브라흐만을 위시한 상위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정성(淨性)을 유지하기 위해 부정한 일을 멀리하려 하고, 또 챤다라 등의 천민과 접촉하는 일을 극력 피하였다. 불교경전에는 그러한 실태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으며, 또 챤다라가 남긴 음료를 마신 브라흐만은 동료들로부터 브라흐만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있다.
한편, 바르나 사회의 성원의 영역을 침범한 챤다라에게는 엄한 제재가 가해졌다. 하지만 바르나 사회의 성원이 사회생활에 불가결한 노동을 분담하고 있는 챤다라와의 접촉을 완전히 단절하는 일은 불가능하였다. 브라흐만들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의례적 정성(淨性)을 확보할 필요에 쫓겨 정화의례를 극도로 발달시켰다. 한 예를 든다면, <마누법전 Manu smrti>은 “재생족이 브리샬라의 여자(챤다라의 여자 따위)를 하룻밤 안고 잔 죄는 3년간 탁발(집집으로 돌아다니며 쌀이나 밥을 얻는 행위)한 것을 먹고 가야뜨리(Gāyatri : 태양신 사비뜨리에 바치는 유명한 聖句)를 입으로 읊음으로써 속죄된다”고 씌어 있다. 또 다른 법전에는 “챤다라의 여자인줄 알고 그 여자와 통정한 자는 그 여자와 동일한 신분으로 만든다. 모르고 통정한 자는 챤드라야나 속죄(단식 고행의 일종으로, 달이 안 뜨는 반달 간은 매일 한숟갈 씩 음식을 줄여서 먹고, 달이 뜨는 반달 간은 매일 한 숟갈 씩 음식을 늘려서 먹고, 매일 세 번씩 목욕해야 함)를 2회 행하여야 한다”고 정해져 있다.
초기의 불교 교단은 챤다라를 위시한 천민에 대하여, 그들이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도덕적인 생활을 하거나 출가(불교에 입문)하여 수행에 힘쓰면, 그들과 브라흐만을 위시한 바르나 사회의 성원 사이에는 하등의 차별이 없고, 종교적 행복(천국이나 상류 계급에 태어나는 것, 혹은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도 같다는 자세를 취하였다. 또 몇몇 경전은 천민을 멸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스승이나 덕이 높은 사람에게는 그가 비록 챤다라일지라도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초기의 불교교단은 천민층도 포교의 대상으로 하여 교단의 문을 개방하였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종교, 윤리상의 문제이고 천민제도 그 자체를 부정하는 사회운동은 아니었다.
Ⅲ. Organization of Out-caste System
브라흐만이 예로부터 주장해 온 바에 따르면 불가촉민은 바르나간의 혼혈(混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즉, 부당한 pratiloma婚(逆毛婚) 중에서도 가장 혐오받는, 수드라 남자와 브라흐만 여자의 통정으로 출생한 것이 챤다라라고 주장되고 있다. 이것은 물론 현실사회에 존재하는 챤다라의 기원을 브라흐만의 바르나관에 의해서 설명한 것이어서 역사적인 사실이라고는 확신할 수가 없다.
불가촉성(不可觸性)의 관념은 애초에 인도 선주민의 것이었다는 설이 있다. 예를 들면 인도의 역사학자 두뜨(Dutt)는 아리아인이 들어와 살기 이전에 선진문화를 가진 드라비다인과 이들보다 더 오랜 주민으로 미개한 단계의 오스트로아시아(Austro-asia)계 인종 사이에 큰 문화적 차이가 있어서 전자에 의해 후자는 부정한 천민이라고 생각되고 또한 이러한 종족적, 문화적인 차이에 기원하는 천민관은 드라비다․先드라비다 양 민족이 아리아인에게 정복당한 뒤에도 유지되어 결국 아리아인도 그 관념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설의 논거의 하나는 인도 근․현대의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차별이 北인도에 비하여 드라비다인이 거주하는 南인도에서 한층 더 엄격하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공통의 신들을 숭배하고 서로 비슷한 유목생활을 하면서 이동한 아리안계 여러 부족 중, 인도에 들어간 사람들만이 천민제를 극도로 발달시키고 있다.
따라서 인도에서의 불가촉천민제의 성립과 발달에 드라비다계, 선드라비다계의 선주민이 이룬 역할이 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아직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료는 얻을 수 없다.
아리아인이 인도를 정복한 시점에서 불가촉천민제의 기원을 찾는 설도 있다. 아리아인이 남긴 최고(最古)의 문헌 <리그 베다 Ṛgveda>에서 선주민 다사는 아리아인에 적대하여 정복당한 열등종족으로 멸시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부정과 관계되어 있지는 않고, 아리아인과 선주민의 인종적, 문화적 혼합이 상당히 넓게 행해졌다. 초기 베다시대의 아리아인이 정․부정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것은 불가촉천민제의 명칭에 상당할 만큼의 사회관습을 성립시킬 정도로 발달한 것은 아니었다.
허튼은 불가촉천민의 기원은 종족적․종교적․사회관습적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⑴ 불가촉천민 사상은 틀림없이 죽음과 월경 등에 대한 ‘금기’에 기원한다. ⑵ 금기에 기원하는 불가촉 사상은 인종의 상위 및 인종간의 반감에 의하여 강해졌다. ⑶ 성전(聖典), 성스러운 짐승, 신성한 사제를 수반한 종교와, 부정하게 보이는 직업을 싫어하는 사회 일반이 불가촉천민제를 발달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불가촉천민제의 기원이 원시적 금기사상, 부정의 사상과 관계있음은 알 수 있으나, 허튼의 설에서는 이러한 원시사상이 인도에서 극히 발달하여 하나의 제도로까지 성립된 과정에 대해서 간단하게 혹은 추상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한편, 아리안 사회와 비교하여 선주민 부족이 물질문명 면에서 후진적이었다는 사실에서 불가촉민제의 기원을 찾는 설이 있다. 이 설을 주장하는 샤르마 Sharma 는 금속도구와 농경지식을 가지고 도시를 발전시킨 브라흐만 사회의 풍요도와 수렵․채집 단계에 있는 선주민의 빈곤성에 주목하고, 이 물질적 우열과 더욱이 제 1차 산업으로부터 이탈한 브라흐만과 크샤뜨리야 양 계급 사이에 현저해진, 손으로 하는 일에 대한 멸시 및 원시적인 금기 사상과 정․부정의 관념이 작용하여 불가촉천민제가 성립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물질문화의 차이를 천민제 발달의 한 가지 원인으로 본 이 설에서도 역시 이러한 원시사상이 인도에서 극히 발달하여 하나의 제도로까지 성립된 과정에 대해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리그 베다 Ṛgveda>기의 인도 아리안 사회에 불가촉천민 제도라고 할 수 있는 제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후기 베다시대에 성립된 <야주르 베다 Yajurveda>나 <우빠니샤드 Upaniṣad>문헌에는 챤다라, 니샤다, 빠울로까샤 와 같은 부족명이 보인다. 이들 미개부족은 아리아인으로부터 멸시받고 있었으나 반드시 불가촉한 존재로만 여겨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B.C. 600~300년 경에 쓰여진 문헌에는 불가촉성을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챤다라에 관한 내용이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불가촉천민제는 후기 베다시대의 말기(B.C. 600년)까지에는 대략 성립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수 세기 동안은 펀자브 지방에 정착한 아리아인이 선주민과 인종적, 문화적 혼합을 더해가면서 갠지스강 유역에 거주권을 확대하여 나가고 있던 시대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 아리아인의 생활은 주목종농(主牧從農)의 단계에서 주농종목(主農從牧)의 단계로 변화하였다. 또 사상면에서는 윤회사상이 확립되어 일부에서는 살생을 하지 않고 육식을 금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었다. 동물의 도살이나 거기에 관계되는 행위는 부정이라 하고, 이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을 천민시하는 관념은 목축생활자 사이에서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특정의 사람을 불가촉시하는 사상이 선주민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인지, 아니면 아리아인이 가지고 있던 원시적인 부정의 관념에서 발달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리아인 사회 속에 불가촉천민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아리아인이 정착농경사회를 발달시킨 이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한편, B.C. 1,000~600년이라는 시대는 브라흐만이 사제자로서의 지위를 독점하고 바르나 사회의 최고 지배자가 된 시대이기도 하다. 인도사회에서 브라흐만과 불가촉민이라는 양극분해(兩極分解)가 서로 관계가 없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브라흐만에 의해서, 원시적이고 소박한 정․부정의 관념은 한층 고도로 발달되어 그들의 정성(淨性)과 불가침성을 강조하는 도구로서 이용되었다. 이 정성(淨性)의 강조는 브라흐만을 포함하는 바르나 사회의 성원(특히 상위 3바르나)에게 부정물과의 접촉을 피할 것을 요구하게 하고, 그 결과로 부정한 행위를 하도록 강요당한 자를 천민으로서 사회의 말단에 위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브라흐만을 최정(最淨), 천민을 최부정(最不淨)으로 하고, 그 사이에 바르나 사회의 성원을 정․부정의 정도에 의해서 배열한 인도의 독자적․의례적인 사회기구가 성립되었다. 천민은 부정성의 정도에 따라 세분화되었는데, 그 맨 밑바닥에 놓여진 것이 불가촉민이다.
이 시대는 또 갠지스강 상류~중류 유역을 중심으로 종래의 부족국가 범위를 넘어선 영역국가가 성립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이 영역국가의 지배층인 크샤뜨리야는 자기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브라흐만의 사상을 이용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정치적인 면에서 천민제, 특히 그 가장 극단적인 면인 불가촉천민제의 발달에 일익을 담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불가촉천민의 존재는 바르나 사회의 생산계급인 바이샤․슈드라 층의 불만을 딴 데로 돌려 바르나의 안정과 유지에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바이샤․슈드라 이 두 계층은 불가촉천민제를 받아들임으로써 바르나의 사회성원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요컨대 불가촉천민제는 바르나 사회를 외부와 분리시킴으로써 바르나 사회에서의 계급관계를 의례적 신분질서로 고정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Ⅳ. What is Out-caste (Untouchable)? 1)
이와같은 불가촉천민의 그룹에 속하는 것은 과연 어떠한 사람들이었던 것일까? 아마도 불가촉천민들은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1. 아리안 농경사회의 주변에 거주하는 미개의 부족민․원주민 : 이들은 독자적인 언어와 관습, 풍속을 가지고 아마도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였을 것이나, 아리안 사회의 확대에 따른 수렵․채집지역의 협소화로 인하여 또는 농경사회와의 교환이라는 경제상의 목적 때문에 또는 보다 안이한 생활수단을 얻기 위하여 혈연관계와 옛날부터 내려온 풍속, 관습을 유지하면서 아리안 사회의 주변에서 살게 되었을 것이다. 아리안 사회의 성원은 자기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불가결한 노동 제공자로서 그들의 존재 의의를 인정하여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당시에 이미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각종 천업(賤業)을 할당하였다. 이렇게 하여 의례적으로 바르나 사회로부터 배제당하고 있으면서도 사회적․경제적으로 바르나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천민층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모든 미개 부족이 천민의 지위로 떨어진 것은 아니다. 인도 역사의 발전 전체에서 보았을 때, 아리안 농경문화를 흡수하여, 바르나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한 선주민 부족도 많았었다. 맨 아래에 있는 불가촉민의 호칭이 된 챤다라라는 이름은 한 지방의 - 아마도 벵갈의 - 특정한 부락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의 불가촉성이 확립됨에 따라 이와 비슷한 생활을 하던 선주민 부족도 역시 챤다라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을 것이다.
2. 일찍이 농경사회․목축사회의 성원이었으나, 부정하다고 보여지는 일에 세습적으로 종사하거나 부정하게 보여지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존재 그 자체가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 사람들, 또는 본래 아리안 사회의 구성원이었으나 어떠한 특정한 이유 - 흉작․약탈․전쟁 등의 재난, 불법결혼이나 상위의 바르나를 해(害)하였다든지, 강간을 하였다든지 하는 큰 죄를 범함으로써 추방되는 등의 이유 - 로 자기가 속해 있던 집단을 떠나서 기성(旣成)촌락사회의 주변에서 비천하다고 여겨지는 일에 종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 (그러나 이렇게 발생한 천민은 (1)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그 수가 적었다).
Ⅴ. Development of Out-caste System
고대와 근대의 불가촉민제의 상이점을 든다면, 그 하나는 근대에는 불가촉천민의 종류와 수가 많다는 점과, 또 하나는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전통적인 천업(賤業) 이외에 농업노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 즉 불가촉천민의 발달에 대해서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양상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2)
① 농경사회가 더욱 발달함에 따라 수렵․채집의 장소를 잃은 부족민 중에서 농경민이 되기에 늦은 사람들은 부족조직을 유지하면서 농경사회의 주변에서 농경사회에 필요한 보조적 노동 을 제공하면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② 지방분권적인 봉건지배체제가 성립되어 도시 상업이 쇠퇴한 후기 굽타왕조 이후에 촌락은 생산활동을 유지하도록 서서히 재편성되어 자급자족적인 경제구조가 강화되었다. 촌락사회 의 주변에 존재한 불가촉민 집단도 이러한 촌락 재편성의 진행에 따라 부족조직을 카스트 조직으로 바꾸어 유지하면서, 각 촌락에 분산․정주하였다. 강우(降雨)에 의존하는 비교적 생산성이 낮은 농업에 있어서 토지를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최대의 수확을 올리기 위해서는 한정된 시기에 대량의 노동력을 투입할 필요가 있었다. 또 토지를 소유한 농민과 지주에게 는 농번기에 농업노동 제공자의 일정 수를 확보해 둘 필요가 있었다. 이리하여 새로 들어 오는 불가촉민은 천업으로 여겨지는 노동을 하면서 농업노동도 하게 되었다.
③ 촌락사회의 종교를 지도하는 브라흐만에 의해서 정․부정관은 더욱 발달되어 종래에는 별 로 불가촉시되지 않던 부류의 천민과 일부의 직공층까지도 불가촉시되는 경향이 일반화 되었 다. 또 여러 신구(新舊) 불가촉민 카스트 사이에 부정도의 강약에 따른 상하귀천의 구별을 가져오게 되어, 불가촉민 카스트 상호간의 배타성이 강화․유지 되었다.
④ 촌락의 주변부에서의 불가촉민의 존재는 촌락사회 내부의 불평등에 기인하는 긴장관계를 완화
하고, 촌락의 생산을 원활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 그러므로 불가촉성의 관념의 확대와 강화는 봉건 영주층과 지주, 토지소유농민층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Ⅴ. Bibliography
* The Indian Way, John M. Coller(허우성 譯), 1995, 세계사.
* The Hindu View of Life, RadhaKrishnan(김석진 譯), 1985, 탐구당.
* Hinduismus und Buddhismus, Max Weber(홍윤기 譯), 한국신학연구소, 1986.
* Journal of Indian Studies Volume 2, The Korean Society for Indian Studies, 1997, 글BANK. :『인도의 근대사회 변화와 카스트 성격의 전환: 카스트의 ‘민족블럭’으로의 전환』(이광수, 김경학, 백좌흠)
* 인도사회와 신불교 운동, 山埼元一 (全在星․許祐盛 譯), 한길사, 1983.
* 카스트의 세계, 小西正捷 (印度社會硏究會 譯), 圖書出版 如來, 1992.
Ⅰ. 古代印度의 不可觸賤民
1. 챤다라 chandāla 와 그 생활
업보(業報, karma)와 윤회(輪廻, saṁsāra)의 교리를 믿은 고대 인도인들은 전생의 죄업 때문에 사람은 챤다라 등의 천민으로서의 생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예를 들면 힌두법전에는 브라흐만을 죽인 자, 브라흐만의 황금을 훔친 자, 수드라에게 구걸하여 제사에 필요한 물건을 구한 자, 수라주(酒)를 마신 자, 카스트 추방에 상당하는 대소의 죄를 짓고 속죄하지 않은 자 등이 챤다라로 태어난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일부 문헌에는 챤다라 등의 천민은 동족끼리만 결혼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챤다라의 대부분은 자기들의 혈연집단 속에서 출생하고 있음은 물론이나, 한편에서는 바르나 사회의 성원이 챤다라와 마찬가지라 하여 사회에서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챤다라는 도시나 촌락 밖에 무리를 지어 살고 있다. 예를들어, 힌두법전에서는 챤다라의 주거지는 촌락 밖이 아니면 안된다고 정하고 그들이 야간에 도시나 촌락에 들어오는 것을 금하고 있으며 <아르타 샤스트라 artha sastra> 는 도시를 건설할 때 챤다라와 이교도의 거주구역을 묘지 곁에 설치하도록 정하고 있다.
또한 <마누법전 Manu smrti>은 챤다라에 대해서 개나 당나귀를 재산으로 하고, 죽은 사람의 옷을 입게 하며 깨어진 식기를 사용하게 했다. 또 철제 장신구를 몸에 달고 항상 여기저기를 돌아다녀야 한다고 정했으며, 낮에는 왕명에 의하여 정해진 표지를 몸에 달고 일하러 나가도록 명령하고 있다. 챤다라는 바르나 사회의 정식 성원은 아니나 생계를 얻기 위해서 바르나 사회와 어떠한 형태로든지 결부되는 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 한편 바르나 사회의 성원은 자기들이 가장 부정하다고 여기는 일을 이들에게 강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것은 시체처리, 체형(體刑) 집행, 오물청소 등이다. 그러나 챤다라는 바르나 사회와 접촉한 후에도 예로부터 내려온 생활수단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이것은 그들이 수렵과 활촉 만들기를 업으로 한 것을 전하는 불교경전 속의 기록이나, 삼림지대의 방위에 챤다라를 이용한 <아르타 샤스트라 artha sastra>의 기록 등에서 알 수 있다. 또 챤다라가 죽인 짐승의 고기를 정(淨)이라고 규정한 인도법전의 기록에서 챤다라는 수렵, 채집을 통해서 얻은 것을 자기들이 소비할 뿐만 아니라, 바르나 성원 사이의 교환에도 사용하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Ⅱ. 不可觸賤民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이와같은 불가촉천민의 그룹에 속하는 것은 과연 어떠한 사람들이었던 것일까? 아마도 불가촉천민들은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1. 아리안 농경사회의 주변에 거주하는 미개의 부족민․원주민 : 이들은 독자적인 언어와 관습, 풍속을 가지고 아마도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였을 것이나, 아리안 사회의 확대에 따른 수렵․채집지역의 협소화로 인하여 또는 농경사회와의 교환이라는 경제상의 목적 때문에 또는 보다 안이한 생활수단을 얻기 위하여 혈연관계와 옛날부터 내려온 풍속, 관습을 유지하면서 아리안 사회의 주변에서 살게 되었을 것이다. 아리안 사회의 성원은 자기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불가결한 노동 제공자로서 그들의 존재 의의를 인정하여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당시에 이미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각종 천업(賤業)을 할당하였다. 이렇게 하여 의례적으로 바르나 사회로부터 배제당하고 있으면서도 사회적․경제적으로 바르나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천민층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모든 미개 부족이 천민의 지위로 떨어진 것은 아니다. 인도 역사의 발전 전체에서 보았을 때, 아리안 농경문화를 흡수하여, 바르나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한 선주민 부족도 많았었다. 맨 아래에 있는 불가촉민의 호칭이 된 챤다라라는 이름은 한 지방의 - 아마도 벵갈의 - 특정한 부락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의 불가촉성이 확립됨에 따라 이와 비슷한 생활을 하던 선주민 부족도 역시 챤다라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을 것이다.
2. 일찍이 농경사회․목축사회의 성원이었으나, 부정하다고 보여지는 일에 세습적으로 종사하거나 부정하게 보여지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존재 그 자체가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 사람들, 또는 본래 아리안 사회의 구성원이었으나 어떠한 특정한 이유 - 흉작․약탈․전쟁 등의 재난, 불법결혼이나 상위의 바르나를 해(害)하였다든지, 강간을 하였다든지 하는 큰 죄를 범함으로써 추방되는 등의 이유 - 로 자기가 속해 있던 집단을 떠나서 기성(旣成)촌락사회의 주변에서 비천하다고 여겨지는 일에 종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 (그러나 이렇게 발생한 천민은 (1)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그 수가 적었다).
Ⅲ. 不可觸賤民 制度의 발달
고대와 근대의 불가촉민제의 상이점을 든다면, 그 하나는 근대에는 불가촉천민의 종류와 수가 많다는 점과, 또 하나는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전통적인 천업(賤業) 이외에 농업노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 즉 불가촉천민의 발달에 대해서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양상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① 농경사회가 더욱 발달함에 따라 수렵․채집의 장소를 잃은 부족민 중에서 농경민이 되기에 늦은 사람들은 부족조직을 유지하면서 농경사회의 주변에서 농경사회에 필요한 보조적 노동을 제공하면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② 지방분권적인 봉건지배체제가 성립되어 도시 상업이 쇠퇴한 후기 굽타왕조 이후에 촌락은 생산활동을 유지하도록 서서히 재편성되어 자급자족적인 경제구조가 강화되었다. 촌락사회의 주변에 존재한 불가촉민 집단도 이러한 촌락 재편성의 진행에 따라 부족조직을 카스트 조직으로 바꾸어 유지하면서, 각 촌락에 분산․정주하였다. 강우(降雨)에 의존하는 비교적 생산성이 낮은 농업에 있어서 토지를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최대의 수확을 올리기 위해서는 한정된 시기에 대량의 노동력을 투입할 필요가 있었다. 또 토지를 소유한 농민과 지주에게는 농번기에 농업노동 제공자의 일정 수를 확보해 둘 필요가 있었다. 이리하여 새로 들어오는 불가촉민은 천업으로 여겨지는 노동을 하면서 농업노동도 하게 되었다.
③ 촌락사회의 종교를 지도하는 브라흐만에 의해서 정․부정관은 더욱 발달되어 종래에는 별로 불가촉시되지 않던 부류의 천민과 일부의 직공층까지도 불가촉시되는 경향이 일반화 되었다. 또 여러 신구(新舊) 불가촉민 카스트 사이에 부정도의 강약에 따른 상하귀천의 구별을 가져오게 되어, 불가촉민 카스트 상호간의 배타성이 강화․유지 되었다.
④ 촌락의 주변부에서의 불가촉민의 존재는 촌락사회 내부의 불평등에 기인하는 긴장관계를 완화하고, 촌락의 생산을 원활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 그러므로 불가촉성의 관념의 확대와 강화는 봉건 영주층과 지주, 토지소유농민층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