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 지음, 『단(單)』,문학동네, 2018 (1판 9쇄)(2015 1판).
◇ 지은이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를 거쳐 한양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일보 경제부 금융팀장, 증권팀장, 경제부장을 거쳐 ‘위클리비스(WEEKLY BIS’의 편집장과 조선경제i, 위비경영연구소장을 맡았다. 현재 세종대학교 경영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상을 완성했을 교황이 물었다.
“어떻게 그런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었습니까?”
미켈란젤로가 대답했다.
“간단합니다. 다비드와 관련 없는 것은 다 버렸습니다.”
이 짧은 대화는 이 책이 말하려는 바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57쪽)
베스터셀러 작가 로버트 그린은 『마스터리의 법칙』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당신이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씨앗 하나가 심어진다. 그 씨앗은 바로 당신만의 독특한 고유성이다. 그 씨앗은 자라고, 스스로의 모양을 바꾸고, 최대한 아름다움으로 피어나기를 원한다. 씨앗은 그 안에 본래적이고 적극적인 에너지를 품고 있다. 당신 인생의 과업은 그 씨앗을 피워 꽃으로 피우는 것, 일을 통해 당신만의 고유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당신은 잠재력을 발휘하고 꽃을 피워낼 운명을 갖고 있다.”(67쪽)
-로버트 그린, 『마스크리의 법칙 Mastery』, 이수경 옮김, 살림Biz, 2013.
『서양미술사』를 쓴 곰브리치는 미술가의 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이 역시 로버트 그린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훌륭한 진주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진주조개 속에 작은 핵이 필요하다. 모래알맹이라든가 작은 뼛조각을 둘러싸고 그 위에 진주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한 단한한 핵이 없으면 진주가 제대로 모양을 갖추지 못한다. 만약 형태와 색채에 대한 미술가의 감각이 완벽한 작품 속에 결정되려면 그 역시 견고한 핵을 필요로 한다.”
이때의 핵이 바로 우리가 ‘세워야’할 그 무엇이다.(67쪽)
니체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는 너희 자신”이라고 말했다. 가장 위해단 예술 작품은 바로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남과 다른, 자신만의 정체성에 대해 좀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자신만의 정체성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나만의 가치를 고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세움’이다. (70쪽)
진정 희소한 자본은 ‘자연자본’
우리는 자연자본을 쉽게 간과한다. 공기가 없으면 살지 못하는데 우리는 공기의 소중함을 모른다. 우리는 자연자본이라는 연못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데도, 물고기가 그렇듯이 스스로가 물속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즉 우리는 생태계가 우리 삶에 갖는 가치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앞서 언급한 에드워드 윌슨 교수는 나와의 인터뷰에서 그 가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는 생물 다양성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자연보호론자이기도 하다. 지면 사정상 신문에 다 싣지 못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우리는 생물 다양+성을 파괴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생태계는 수백만 년 동안 이 세계의 평형 상태를 유지하는 여러 메커니즘을 만들어냈는데, 우리는 이제야 그중 일부를 연구하게 됐을 따름이다.
사실 우리는 현재 지구의 생물 다양성이 어느 수준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우리는 지난 250년간 지구의 190만여 종種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지만, 전체 생물 다양성의 규모에 대해서는 대강의 크기조차 잘 모르는데, 최근의 한 연구는 약 800만 종의 동식물이 존재할 것이라고 추정한다. 미생물까지 아우르면 말문이 막힐 정도로 많다. 지구의 대부분의 산소 생산은 해양과 수중 생태계를 통해 이뤄지는데, 이는 대부분 1차 조류藻類의 하나인 프로클로로코커스prochlorococcus가 담당하고 있다. 일반 현미경으로는 안 보이는 이 미생물은(길이가 0.6아미크로미터다)은 1988년 전까지는 우리가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수효로 해양에서 광합성을 하는 생물종이다.
요컨대 우리는 아직 대부분 조사도 못한 생물권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중략)
이런 비유가 와닿을지 모르겠다. 만약 우리를 집도하는 외과의사가 우리의 생체기관의 10만분의 1밖에 모르면서 몸을 헤집는다고 생각해봐라. 그러므로 우리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동양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도교(道敎)라고 할까, 이 세계의 합일, 부분을 넘어 전체의 조화를 중시하는 사고 말이다. 바로 이것이 생물 다양성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냥 내벼려둬라 Leave them alone’! 이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새를 좋아하고 야생에서 평화를 느끼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좋지만, 더 중요하게는 우리가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빠르게 세상을 변화시키고 파괴하고 있다.”(337-339쪽)
그는 인터뷰 당시 세 권의 책을 집필중이라고 했는데, 그 중에는 『인류세의 종언The End of the Anthropocene』이라는 책도 포함돼 있었다. ‘인류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되는 말이지만, 앞으로 많이 듣게 될 말이며, 점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말”이라고 했다. ‘Anthropo’sms 그리스어로 ‘인류’를 말하며, ‘cene’은 지질학적 시대를 가키킨다. 이 개념은 인류가 현재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서 지금의 지질학적 시대(홀로세, 현세)를 넘어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가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는 이해로부터 비롯됐다고 그는 설명한다.
“만약 인류가 종말을 고하고 나서 수백만 년 후에 다른 행성에서 생명체가 와 고고학적‧지질학적 조사를 한다면 우리가 만들어낸 지층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쓰레기, 그리고 명종된 생물들의 화석 같은 것을 지질학적 지층으로 보게 될 것이다. 그만큼 우리 인류가 지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류세, 즉 인류가 지구를 지배하는 시기에 접어들면서, 우리가 지구를 완전히 소유할 수 있다고 믿고, 그것이 곧 우리의 운명이라고 믿는 사람이 주변에 많다. 지구, 이 행성은, 인류의, 인류에 의한, 인류를 위한 곳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 우리가 자연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자연은 이미 죽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가 오해라는 것이 지금 준비하는 책의 주제다. 나는 이 책에서 인류세의 종말을 주장할 것이다. 인류의 진보를 끝내자는 것이 아니다. 내가 끝내자고 주장하는 것은, 이 지구라는 행성이 진정으로 인류의 것이라는 생각을 끝내자는 것이다. 인류 외에 모든 것들을 배제하고 오로지 인류만을 위해 써야 한다는 생각, 모든 것은 인류를 위해 복속되어야 한다는 생각말이다.”(339~340쪽)
윌슨 교수는 생태계가 교란되었을 때의 미래상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우리가 지금처럼 계속 자연을 파괴하고 나면 우리는 우주선에 사는 것과 다름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인류는 우주선의 선장이 될 것이다. 그럼 우리는 자연 생태계가 대기와 토양, 물의 대순환을 유지하는 상황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그 다양한 상태들을 통제하고 측정하고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처럼 끔찍한 상황이 어디 있는가? 인류가 끊임없이 논쟁하고 계획하면서 이 행성의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상해보라. 벌서 기후변화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340쪽)
윌슨 교수가 연구해온 진화생물학은 우울한 과학이다. 흔히 우울한 과악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경제학보다 훨씬 우울하다. 진화론은 사람이 단순히 유전자의 운반기계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화론을 접한 많은 사람이 허무주의에 빠진다. ‘그럼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모든 것이 유전자가 계획한 대로 움직일 뿐인데……나는 지금까지 알던 내가 아니구나. 내 안의 유전자가 이렇게 하는 거구나.’ 나 역시 윌슨 교수를 만나기 전후에 공부한답시고 진호론 책을 몇 권 정독했는데,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하이데거가 말한 대로 그야말로 세상에 내팽겨쳐진 느낌이었다. 존재의 의미도, 관계의 의미도 하찮게 느껴졌다. 그리고 심각하게 우울해졌다. 결국 진호론 책들을 모든 책장 아래 깊숙이 감춰버렸다.(그래도 버리기엔 아까웠다.)
그렇다면 윌슨 교수는 그 우울한 학문을 하면서 어떻게 우울해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을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평생 가까이한 자연의 힘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340~341쪽)
-자본주의의 핵심은 ‘자원 분배’가 아닌 ‘창조’에 있다.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인류의 번영에 크게 기여해왔다. 19세기와 20세기에 서구를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시켰으며, 이어 개도국에서 수억 auadml 인구를 기아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럼에도 자본주의가 오늘날철머 거세게 공격받았던 적은 업었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인 빈부격차 심화와 중산층의 정체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시스템의 모순에 눈을 둘리게 되었다.(341쪽)
①번영의 재정의
우리는 사람들이 돈을 많이 가질수록 사회가 번영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미국 가계의 평균 가치분소득은 2013년 3만 8001달러인데, 캐나다는 2만 8194달러이다. 이 수치를 보고 사람들은 미국이 캐나다보다 더 번영을 누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이 오류임은 간단하게 논박할 수 있다. 만일 소득이 3만 8001달러인 전형적인 미국인이 브라질 열대우림 고립지역에서 수렵과 채취를 하는 원주민들과 같이 생활한다고 하자. 당연히 그는 그 지역의 최고의 부자가 될 것이다. 아무리 오두막집을 멋있게 수리하고, 마을에서 가장 좋은 바구니를 구입하고, 마을에서 가장 좋은 음식을 먹더라도 그는 항생제와 에어컨, 안락한 침대를 가질 수 없다. 요컨대 인간 사회에서 번영이란 소득이나 자산처럼 화폐적으로 측정되어서는 부정확하고, 인간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의 총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344쪽)
②성장의 재정의
측정이 되어야만 관리할 수 있다. 현대 GDP 회계가 세계 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것 역시 분명하다.(중략)
GDP라는 개념을 처음 만든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 Simon Kuznets도 우리의 실제 삶과 GDP의 괴리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GDP 개념을 처음 알린 「국민소득, 1929~1932」라는 눈몬의 서론 7쪽에 이렇게 썼다. “따라서 한 국가의 복지는 앞서 정의한 대로의 국민소득 측정으론는 거의 유추될 수 없다.” 경제학자다운 조심스로운 말로 포장돼 있지만, 그 메시지는 뚜렷하다. GDP는 경제적 성과 측정을 도와주는 도구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복지를 측정하는 수단은 아니다. 따라서 그것이 모든 의사결정의 지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현 경제학의 정의에 따르면, 산업, 환경, 사회적 낭비의 대부분이 GDP로 집계된다. 사회에 도움을 주는 지출이냐, 손해를 보는 지출이냐는 전혀 따지지 않는다. 그저 모든 지출을 더한 것을 경제성장으로 정의한다. 이를테면 GDP는 폭탄과 감옥도 성장으로 계산한다. 새로운 지표는 그런 점을 개선해야 한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대안은 ‘삶의 질’ 또는 ‘삶의 만족도’를 측정하는 것이다. 여기엔 대인관계, 공동체, 치안, 건강처럼 GDP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 포함될 수 있다. 또한 GDP에는 기술이 주는 혜택이 반영되지 않는다. 우리는 구글이나 네이버, 페이스북 같은 인터넷 서비스를 사용해 예전보다 훨씬 쉽게 일할 수 있게 됐지만, 이에 대한 사용 요금을 지불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는GDP에 포함되지 않는다. 에릭 부린욜프슨 교수와 MIT 박사후과정 연구원인 오주희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인터넷 공짜 상품의 가치가 반영될 경우 미국의 성장률은 2,3퍼센트 포인트 더 높아질 것으로 추정된다.(344~345쪽)
에릭 베인호커와 닉 하나우어는 앞서의 주장의 연장선에서 새로운 지표가 ‘인간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의 질과 이용 가능성’을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도서관에 가서 정보를 찾던 사람이 인터넷으로 세계의 정보를 순식간에 얻으면 성장이다. 이처럼 성장을 재정의한다면, 우리 삶은 ‘더 많이’의 맹목에서 벗어나 보다 심플해지고 행복해질 것이다.
③자본주의의 재정의
경제학의 전통적인 견해는 자본주의는 ‘효율적 effficient’이기 때문에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자본주의의 강점은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능력과 ‘효과성effectiveness’에 있다고 에릭 베인호커와 닉 하나우어는 주장한다. 효율성은 더 싸게 더 많이 만드는데 가치를 두는 것으로 앞서 설명한 제조업자적 사고방식이 중시하는 미덕이다. 반면 효과성은 다른 사람에게 의미 있는 기여를 하는 데 가치를 두는 것으로 마케팅적 사고방식이 중시하는 미덕이다.
자본주의의 효과성은 효율성과 때로 상충한다. 이를테면 자본주의는 매일 수백만 명에게 새로운 문제 해결을 찾는 실험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그중 가낭 나은 것을 선택하는 경쟁을 제공하는데, 그 과정에서 덜 성공적인 것은 도태된다. 생태계를 닮은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낭비를 초해한다. 매일 수많은 기업이 새로 생겨나지만, 그게 못지않게 많은 기업이 사라진다. 성공적인 자본주의는 그런 의미에서 ‘슘페터적 낭비’의 측면을 갖는다.(3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