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공원(自由公園)
● 응봉산(鷹峯山)
● 홍예문(虹霓門)
인천을 대표하는 자유공원은 1888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
응봉산(鷹峯山) 자락에 자리 잡은 이 공원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만국공원(萬國公園)’이라 불렸다. 인천항 개항 이후 인천으로 몰려든 서양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살던 ‘만국지계(萬國地界)’ 안에 만들어진 공원이기 때문이었다.
만국지계는 ‘각국지계(各國地界)’라고도 불렸기에 이 공원 또한 ‘각국공원’이라고도 불렸다.
‘지계(地界)’는 개항(開港)한 도시 안에 만든 외국인들의 집단 주거지를 이르는 말로, ‘조계(租界)’라고도 한다.
이곳에 조계가 생기게 된 첫 출발은 1876년 조선 정부가 일본의 강압 아래 개항을 하면서 불평등한 조건을 많이 받아들이며 맺은 「강화도 조약」이다. 이 조약 가운데는 “개항장 안에 조계를 설정하여 그곳에서 일본 상인의 자유로운 무역과 건물을 짓는 일 등 거주의 편의를 제공한다”는 규정이 들어있다.
이어 1884년 10월에는 조선 정부와 영국·미국·청나라·일본 사이에 「인천 제물포 각국조계 장정(仁川濟物湳各國租界章程)」이라는 조약을 맺어 조계에 대한 내용을 구체화했다. 이에 따라 일본조계와 청국(淸國)조계가 생기고, 그 다음으로 각국조계가 생 겼다. 그 이듬해인 1885년 9월에는 독일이 추가로 이 조약에 가입했다.
14만 평이나 되는 넓은 면적의 이곳 만국지계에는 서양의 영사관원과 상인, 세관원 등이 살았다. 하지만 실제로 이곳 주민 중에는 땅을 사거나 임대를 해서 사는 일본인들의 숫자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그 위치는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모여 살던 일본조계와 청국조계의 바로 위쪽이었다. 일본지계가 7000 평, 청국지계가 5000 평 정도였던 것에 비하면 만국지계는 무척 넓었던 셈인데, 이곳을 여러 개의 구획으로 나눠 구획정리사업을 하면서 이 공원을 만든 것이다.
이곳에서 벌어진 구획정리사업은 물론 서양인들의 생활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서구적 의미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행된 도시계획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당시 세관에서 토목기사로 일하던 러시아 사람 사바틴(A.L Scredin Sabatin)이 이곳의 택지를 설계하면서 공원을 만들고, ‘공용정원(Public Garden)’이라 이름 지은 것이 이 공원의 출발이 됐다고 한다.
하지만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병합시킨 뒤 이들 조계는 일본의 압력으로 없어지게 된다. 1913년 4월에 만국조계가 먼저 없어지고, 같은 해 11월에는 청국조계도 없어지고 만다.
그 뒤 일제(日帝)는 지금의 중구 신생동에 있는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자리에 자신들의 신(神)이나 조상을 모시는 신사(神社)를 세웠다. 그리고 그곳을 ‘동공원(東公園)’이라 부르면서, 그 맞은 편에 있는 만국공원은 ‘서공원(西公園)’이라 이름 붙였다. 이 때문에 광복이 될 때까지 이 공원은 공식적으로는 ‘서공원’이라 불렸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서공원은 ‘만국공원’이라는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그런데 6·25 전쟁을 겪고 난 뒤인 1957년 자유당 정부가 이 공원의 이름을 ‘자유공원’이라고 바꿈으로써 오늘의 이름을 갖게 됐다.
그 해에 정부논 우리의 건국 기념일인 개천절에 이곳에서 맥아더 장군의 동상 제막식을 가지면서 공원 이름을 자유공원으로 바꿨다. 이는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 장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어도 1970년대까지는 나이가 드신 분들 중에 여전히 ‘만국공원’이라고 부르는 인천 시민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게 불렀던 세대(世代)가 대부분 세상을 떠난 오늘날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은 역사책 속으로 점점 더 깊숙이 몸을 슴겨가고 있다.
응봉산
앞에서 이 자유공원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응봉산이라고 했다.
제물포고등학교의 뒷산인데, 높이가 69m로 산이라기보다는 언덕에 가깝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과 우리나라 최초의 기상대인 인천기상대,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하나뿐인 중국인 마을 등이 있어 우리의 근·현대사와 많은 인연을 맺고 있는 곳이다.
‘鷹峯(응봉)’ 이란 ‘매〈鷹〉 봉우리〈峯〉’라는 뜻이다.
이름이 이러니까 흔히 “이 산의 모양이 매의 부리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라는 해석이 따라 다닌다. 이 산이 우리말로 ‘매부리산’이라 불려왔는데 이를 한자로 읊긴 것이 ‘응봉산’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산의 모양이 실제로 매의 부리를 닮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 ‘응봉’이라는 산 이름은 우리나라 여러 곳에 있는 것으로, 그 모두가 매의 부리를 닮아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보기는 더욱 곤란하다. 이들 가운데 실제로 매와 관계가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곳은 거의 없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들은 ‘응봉’이라는 한자로 바뀌기 전에 대부분이 ‘매봉, 매부리, 수리봉’ 등의 순 우리말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이름에 쓰인 ‘매’는 날아다니는 새가 아니라, 산(山)을 뜻하는 순 우리말 ‘뫼’의 발음이 바뀐 경우가 대부분이다. ‘봉’은 물론 봉우리를 말한다.
또 ‘부리’는 일반적으로 ‘뾰족한 것’을 뜻하는 우리말이고, 땅 이름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뜻하는 경우도 많다. ‘수리’는 ‘높은 곳’을 뜻하는 우리말이다.(→‘수리’에 대해서는 중구 ‘싸리재’ 편 참고)
이렇게 보면 우선 ‘매봉’은 ‘뫼 + 봉’의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산(山)을 뜻하는 ‘뫼’가 시간이 가면서 발음이 바뀌어 ‘매’가 됨에 따라 산이라는 뜻을 잘 전달할 수 없게 됐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 산봉우리를 뜻하는 말 ‘봉’을 붙여 ‘매봉’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따라서 그 뜻은 그냥 산(뫼)이다.
또 ‘매부리’는 ‘뫼 + 부리(뾰족한 산)’의 구조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역시 ‘뫼’가 ‘매’로 발음이 바뀌자 ‘산’이라는 느낌이 없어졌다. 이에 사람들이 ‘산’을 덧붙임으로써 ‘매부리산’ 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니면 원래는 그냥 ‘뫼’였는데, 이 말이 시간이 지나면서 ‘매’로 발음이 바뀌자 사람들이 여기에 “매의 부리처럼 생겼다”는 상상을 덧붙여 ‘매부리산’이라는 이름을 만들어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 뜻은 역시 그냥 ‘산’이다.
그렇다면 ‘응봉산’은 이 ‘매봉’을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산을 뜻하는 우리말 ‘매(뫼)’를 날아다니는 새 매로 잘못 알아 ‘鷹(매 응)’으로 받고, 여기에 ‘峯(봉우리 봉)’자를 붙인 뒤, 다시 ‘산(山)’까지 덧붙인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한자 ‘峯’은 우리말 봉우리의 ‘봉’과 소리나 뜻이 같아 일찍부터 순 우리말처럼 쓰인 골자다. 결국 ‘응봉산’은 그저 ‘산(뫼)’이라는 뜻이 세 번 반복된 이름일 뿐이다.
홍예문
자유공원이 갗고 있는 어러 가지 역사적 유적과 관광지 중에 홍예문도 있다.
공원에서 송학로(松鶴路)를 따라 동인천 방향으로 내려오다 보면 응봉산의 동쪽에서 산줄기를 뚫어 만든 홍예문을 만난다.
오랫동안 그 양쪽의 돌벽을 고색창연(古色蒼然)한 담쟁이덩굴이 뒤덮고 있어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고, 요즘은 영화 촬영 장소로도 심심찮게 활용되는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홍예문’이라는 이름이 이곳 하나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라 알고 있다. 하지딴 홍예문은 ‘홍예(虹蜺:무지개)’라는 말 그대로 ‘위쪽을 무지개 같이 반원형(半圓形)이 되게 만든 문’ 이라는 뜻의 건축용어이고, 보통명사다. 영어 ‘아치(arch)’의 한자식 표현인 셈이다.
홍예문은 그냥 ‘홍예’라고도 하며, 문(門) 같은 것을 홍예 모양으로 만드는 일을 가리켜 “홍예를 틀다”라고 한다.
이곳 홍예문은 1905년 착공해 1908년에 완공한 것이다.
화강암을 쪼아서 수십 m 높이로 쌓았는데, 이 문 위에 오르면 인천 앞바다와 항구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이 문을 만든 것은 인천항과 그 주변 조계(租界)에 살던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조계에서 당시 경인철도 축현역 (동인천역의 옛 이름)과 만석동 등지로 편하고 빠르게 물건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 였다.
이 문이 생기기 전에는 그 위쪽에 작은 비탈길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이 길을 따라 무거운 지게를 지고 힘들게 양쪽을 오가야 했던 것이다. 지금의 전동(錢洞)에 새로운 돈을 만들던 전환국(典圓局)이 있던 시절(1892~1900년), 동전의 재료가 되는 금속이 일본으로부터 인천항으로 들어오면 지게꾼들이 이것이 들어있는 나무상자를 지게에 싣고 전환국까지 운반해 왔는데
그때 오가딘 갈도 이 비탈길 이었다고 한다.
이런 번거로움과 어려움을 줄이기 위해 새 길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처음에는 바닷가를 따라 길을 새로 만들어 보려 했지만 해변이 험해 공사가 어렵고,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문제가 결렸다.
이 때문에 비교적 공사 규모가 작고, 짧은 시간에 끝낼 수 있는 방법으로 이곳의 산줄기를 뚫어 문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공사 도중에 바위로 이루어진 암반(巖盤)이 나와 공사에 큰 어려움을 겪었고, 예산도 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홍예문은 이처럼 응봉산이 가로막아 그 너머 사이에 교통이 불편했던 것을 해결하려고 산에 구멍을 낸 것이라 하여 ‘혈문(穴門:구멍 문)’ 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이 문의 건설비는 우리 정부와 일본 거류민단(居留民團)이 대략 반씩 낸 것으로 나와 있다.
일부에서 제기하는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인천의 땅 모양이 ‘날아가는 용(龍)의 형상’으로 홍예문 옅대가 그 허리쯤이고, 거기서 멀지 않은 애관극장 위 경동 싸리재 일대가 목 부분이라고 한다. 그런데 조선을 침략할 욕심을 가진 일본인들이 이곳에 홍예문을 만들어 허리를 꼲고, 싸리재에 길을 내서 목을 끊었다고도 한다.
한편 고일(高逸) 선생의 책 「인천석금」에 보면, 일제 강점기에 송건영(宋健榮)이라는 열혈 청년이 영화에서 본 대로 우산을 펴고 이 홍예문 위에서 땅으로 용감하게 뛰어내렸는데, 어느 한 군데도 다치지 않고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