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 선생의 용돈 타령
피천득 선생 같은 고매한 시인도 가끔은 용돈이 궁할 때가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사랑는 생활’이라는 수필에서 이렇게 돈타령을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나는 우선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지금 돈으로 한 5만 원쯤 생기기도 하는
생활을 사랑한다. 그러면은 그돈으로 청량리 위생병원에 낡은 몸을 입원시키고 싶다.
나는 깨끗한 침대에 누웠다가 하루에 한두 번씩 덥고 깨끗한 물로 목욕을 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 딸에게 제 생일날 사 주지 못한 비로드 바지를 사 주고, 아내에게는
비하이브 털실 한 폰드 반을 사 주고 싶다. 그리고 내 것으로 점잖고 산뜻한 넥타이를 몇 개 사고 싶다.
돈이 없어서 적조하여진 친구들을 우리 집에 청해 오고 싶다. 아내는 신이 나서 도마질을 할 것이다.
나는 5만 원, 아니 10만 원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생기는 생활을 가장 사랑한다.”
어쩌다 한번씩이지만 내게는 아들과 함께 낚시를 가는 것이 피천득 선생 문자로 내가 제일 사랑하는 생활이다.
서해 어느 외딴섬쯤 가서 햇볕에 잘 달궈진 방파제 위에 등을 대고 나란히 누워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저녁을 사랑한다.
동이 터 오는 새벽에 한 자 반쯤 되는 도미 한 마리 끌어 올리다가 낚싯대를 부러뜨려
고기를 놓치는 그런 추억을 나는 사랑한다.
이 좋은 봄날, 남해의 욕지도 양판구미쯤 가서 햇빛 반짝이는 마당바위 포인트에 서서 날물에 막대찌가 곤두박질치는 것을 기다리며 한나절 가슴을 설레는 그런 꿈을 사랑한다.
바위틈에 버너를 피우고 아내가 챙겨 준 김치찌개도 끓여 먹고, 텃밭에서 무농약으로 키워 지난가을 직접 담근 포도즙한 잔씩 나누는 멋을 사랑한다.
얼마 전 일요일에 아들과 함께 일산 킨텍스에서 열리는 낚시 박람회에 다녀왔다.
맘에 쏙 드는 낚싯대가 있긴 있었다.
그 휨새 좋은 낚싯대 두 개쯤 살 수 있는 돈이 생긴다면 아들과 한 개씩 나눠 들고 이번에는 여수 금오도쯤 가서 바닷바람을 실컷 맞고 오는 길에 여수 해양 박람회도 볼 수 있는 그런 여가(餘暇)야말로 내가 정말 사랑하는 생활이다.
그러나 사람 욕심은 끝이 없고 낚시 도구라는 게 비싸도 너무 비싸다. 꾼들이면 못내 침을 흘리는 다이와 정품릴대 하나에 백만 원이 넘는다니 용돈으로 살 범위가 아니다.
내친김에 낚시 보트를 전시하는 코너가 있어서 들렀더니 어지간한 시골집 한 채 값이란다.
돌아오는 길에 근처의 산채 식당에 들러 비빔밥 한 그릇씩 먹으며 살 돈도 없으면서
괜히 눈만 버렸다고 푸념을 하는 아들에게 왜였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라스베이거스의
전설을 들려주었다.
멈출 줄 알아야 한다
도박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 꽤 오래전에 한 신혼부부가 딱 1,000달러만 쓰기로 약속하고 카지노에 갔던 모양이다. 두어 시간 만에 돈이 바닥나서 방으로 돌아왔다.
신부가 샤워를 하는 동안 신랑이 무심코 화장대 위에 놓인5달러짜리 카지노 칩
하나를 보게 되었다.
조금 전 기념품으로 남겨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칩 위에 ‘17’이라는 숫자가
마치 홀로그램처럼 어른거리는 것이 아닌가? 신랑은 길조(吉兆)라고 생각하고
다시 카지노로 향했다
.
룰렛 게임에서 숫자 ‘17’에다 5달러를 걸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공은 놀랍게도 17에 들어갔고, 단번에 35배 배당을 받아서 175달러를 챙기게 되었다.
신랑은 또다시 ‘17’에 걸었고 몇 번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750만 달러라는 까무러칠
만큼의 돈을 따게 되었다.
그때 카지노 매니저가 다가와서 “죄송합니다만 현재 저희 카지노에는 현금이 부족하니
그만두셨으면 합니다.”라고 정중히 말했다.
여기서 그만두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택시를 타고 더 큰 카지노로 향했다. 거기서 다시 17에 ‘올인’을 했다.
룰렛 공은 17에 멈췄고 신랑은 2억 6천 2백 5십만 달러라는 엄청난 돈을 거머쥐게 되었다. 아아, 인간의 욕심은 어디쯤이 끝이란 말인가?
행운의 여신이라 해도 인간의 다함이 없는 욕망을 끝까지 채워 주는 데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모든돈을 다시 걸었을 때 볼은 결국 ‘18’에 떨어졌고, 그는 지금껏 벌었
던 천문학적인 돈을 한순간에 다 잃고 말았다.
한꺼번에 2억 6천 2백 5십만 달러를 잃고 호텔로 돌아온 신랑이 신부에게 “카지노에서
룰렛 게임을 했는데 그냥 5달러만 잃고돌아왔어.”라고 묻지도 않은 대답을 했다.
만족할 줄 알면 수치를 당하지 않으며, 멈출 줄 알면 위험에 처하지 않고, 오래 복을 누릴 수 있다(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 노자의 도덕경 44장)고 했던가! 적당한 곳에서 멈출 줄 알았더라면!
그것이 어디 돈뿐이겠는가? 권력도 명예도 쾌락도 과도하게 욕심내면 땅을 치고 후회하거
나 신세를 망치게 되는 것이 세상에 어디 한두 가지뿐이랴.돈이 웬수여
우리나라처럼 공돈에 너무 과한 욕심부리다가 시끄러운 나라도 세상에 별로 없는 것 같다.
전직 대통령 중 돈 욕심 너무 내다가 이름에 먹칠을 한 분이 한둘이 아니고, 친인척들이 늘 돈 때문에 말거리가 되고 있다. 여기저기 정치권에 뿌린 돈이 들통이 나서온 나라에 구린 데가 한두 곳이 아니다. 대중의 우상인 국가 대표급 운동선수들이 돈 때문에 승부 조작을 했다는 혐의로 영영 운동장을 떠나는 모습은 너무도 안타까운 광경이다.
공돈 몇 푼 때문에 고위직에 있는 분들이 있는 대로 창피를 당하는 꼴을 보면서
정말 나도 돈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에이, 더러운 놈의 돈.”이라는 욕설이 저절로 나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사도 바울은 그런 오늘의 우리를 향해 이렇게 경계하고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시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의 구렁텅
이에 떨어지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가다가 길을 잃고 신앙을 떠나서 결국 격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도 있습니다”(디모데전서 6장 7~10절 공동번역).
월척(越尺) 물고기도 콩알만 한 떡밥을 너무 욕심내다가 목숨잃는다는 것을 생생하게
가르치는 것이 낚시질이다. 정직하게열심히 사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뭔가 위험하고 잘못된 길이다 싶으면 과한 욕심을 당장 멈추는 것이 가진 것을 잃지 않는길이다.
싸구려 낚싯대일지라도 아들과 함께 그저 배낭 하나 메고 바윗등에 동백꽃 피는 남쪽 바다를 한 바퀴 돌아오는 것보다 더 나은행복이 어디 있으랴. 애써 잡은 작은 물고기 한 마리 놓아주며 마주 보고 껄껄 웃는 웃음을 건져 오는 뱃길에 고운 추억이 쌓이는유월이다.
전정권 editor@sijosa.com ----------------------------------------
시조사 편집국장으로 다수의 책을 낸 저술가이자 수필가이다.
희망을 담은 그의 글에는 늘 고향의 정취와 사람 사는 냄새가 배어난다.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