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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꿈-몽유도원 무계정사 문화축제
- 학술세미나 -
초대일시 : 2013년 5월 25일 (토) 14:00 - 16:00
장 소 :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무계정사지
(서울시 사적지 제22호)
주 최 : (사)안견기념사업회
주 관 : (사)안견기념사업회 서울지회
부암동 자치위원회 및 주민. 부암동 사랑모임
후 원 : 문화체육관광부, 종로구. 종로구의회. 서산시. 서산시의회.
한국미술협회. 재경서산 향우회. 자하골 친구들
제 4회
꿈-몽유도원 무계정사 문화축제
학술세미나를 열며
사단법인 안견기념사업회와 부암동 자치위원회, 부암동 사랑모임, 재경서산시 향우회는 몽유도원도 탄생 무대가 된 안평대군의 유적지 서울 종로구 부암동 무계정사지에서 현동자 안견선생과 안평대군의 예술혼을 기리고 유적지 보존 및 복원운동을 전개하고자 지역 주민들과 함께 힘을 모아 제4회 꿈-몽유도원 무계정사문화축제 행사를 개최하고자 합니다.
이 행사는 안평대군이 몽유도원을 꿈꾼 날(음력 4월20일)을 기리어 진행되는 추모 축제로 조선시대 선비문화의 풍류사상을 되새겨보고 학술세미나와 함께 함으로써 21세기 풍류문화를 선도하는 멋진 행사로 거듭날 수 있도록 자리를 빛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3년 5월 25일
사단법인 안견기념사업회 서울지회장 김 문 식
◎ 목차/프로그램
<식전행사>
아코디언과 함께 하는 민요 & 동요 (박희순 선생)
<1부 개막식> 사회자 : 정현희 기획이사
개회사
인사 및 내빈소개 (서울지회 김문식 회장)
감사패 증정 (안견기념사업회 신응식 회장)
종로구의회 안재홍 의원
인사말씀 신응식 안견기념사업회장
김병애 부암동 사랑모임대표
축사 정세균 종로구 국회의원
김영종 종로구청장
김종규 문화재신탁 이사장
최종만 안견기념사업회 고문
안휘준 전 문화재위원장
이종상 안견기념사업회 고문
<2부 공연행사>
흥겨운 노래 한마당 (장세룡 화가)
가야금 연주 - 히사이시조 : summer & 아리랑 (박준형 경복고 2년)
<3부 학술세미나> 사회자 : 서수영 학술이사
세종조의 미술 (안휘준 박사) · · · · · · · · · 4
안견의 수묵과 이병직의 화실복원을 계기로 본 水墨畵와 筆墨論
(이종상 박사) · · · · · · · · · 8
폐회사(김문식 서울지회장)
<안견기념사업회 사업내용> · · · · · · · · · 14
<조직표> · · · · · · · · · 16
세종조의 미술
안 휘 준 박사 (전 문화재위원)
문화적 배경
1) 고전주의적 성향과 풍류
조선왕조시대의 문화가 처음으로 활짝 피어났던 것은 주지되어 있는 바와 같이 세종연간이다. 조선왕조의 영토가 현재의 상태로 확정되고, 국가 체제와 제도가 확고하게 이루어졌으며, 문물이 융성하고 우리 고유의 자랑스러운 문자인 한글이 창제되어 반포되는 등 일련의 문화적 업적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빛을 발하던 때가 바로 이 시대였다. 이 시대의 문화를 분석하고 평가함에 있어서는 다른 시대 문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논자(論者)에 따라 견해가 다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로서는 이 시대 문화의 성격이나 발전의 동기를, 특히 회화와 관련지어서, ① 유교적 문치주의(文治主義)의 융성, ② 고전주의적 경향의 팽배, ③ 문화적 자주성의 확립, ④ 풍류의 적극적인 향유 등을 대표적인 것으로 들고 싶다.
조선왕조가 건국 기부터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을 채택했음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 정책은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정신적 혁명이며 사상적 변혁이라 하겠다. 이 때문에 삼국시대 고구려에서 4세기에 공인되어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까지 천년 이상 전통을 이으며 우리나라의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불교가 쇠퇴하고 위축되게 되었으며, 그 대신 주자학 또는 성리학이 국가의 통치이념이 되고 국민의 생활을 지배하는 도덕적 규범이 되었다. 세종과 세조의 재위 연간에 잠시 숭불(崇佛)의 낌새가 있었으나 조선 초기에는 이내 유교이념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제도가 다양하게 마련되고 시행되었다. 조선시대는 이러한 사상적 배경을 바탕에 깔고 유학에 조예가 깊은 사대부를 중심으로 하여 왕권과 균형을 이루면서 문치주의적인 정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세종연간은 이러한 문치가 탄탄한 기반을 이루었던 시대이다. 학문을 사랑하고 다방면에 걸친 독서를 끊임없이 하던 세종대왕의 업적이라 하겠다. 이러한 문치는 집현전의 설치나 인재양성을 통하여 그 구체적인 실현을 볼 수 있었다. 세종대왕은 1420년에 집현전을 설립하여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소속시켜 학문연구에 전념토록 하고 이들의 연구 결과를 정책에 반영하곤 하였다.
세종대왕은 재능과 능력이 있는 인재를 광범하게 찾아서 기르고 적재적소에 등용하여 활용하였다. 이를 위해 나이가 어리고 머리가 뛰어난 이른바 ‘연소유재자(年少有才者)’ 또는 ‘연소총민자(年少聰敏者)’들을 뽑아서 공부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이를 어느 정도 제도화한 것이 여가를 주어 독서하게 하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인데 이 제도는 후에 독서당(讀書堂)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세종연간에는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이들이 당시의 문화와 예술의 발전에 직접적인 활력소가 되었다. 뒤에 보듯이 <몽유도원도>를 비롯한 안견의 작품들에 시문을 짓고 쓰고 했던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다름 아닌 바로 이렇게 양성된 인재들이었다. 이처럼 당시의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한 대표적인 인물들은 회화와도 직접 간접으로 깊이 관련이 되어 있었다. 당시의 인재들은 이렇듯 예술을 깊이 이해하고 향유하였다.
집현전 학사들은 옛날의 고전과 제도를 열심히 연구하여 세종대왕의 통치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였다. 이 때문에 중국의 주(周)·한(漢)·당(唐)·송(宋)대의 문물에 대한 이해가 깊었으며, 이것이 다각적으로 참고 되었다. 물론 원(元)·명(明)대의 제도나 문물이 참조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보다 고대에 속하는 당·송대 또는 그 이전의 것이 보다 자주 논의되었음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곳곳에서 산견된다. 이러한 시대적 추이에 힘입어 세종조에는 고전주의적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 듯하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보이는 고전주의적인 경향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연관 지어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주의적 경향과 함께 원말명초(元末明初)의 영향도 간취된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원대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를 수용하여 독자적인 서체를 창출한 점, 그리고 강희안(姜希顔)이 명대 초기의 원체화풍(院體畵風)과 절파화풍(浙派畵風)을 수용했던 사실 등은 그 점을 입증해 준다. 말하자면 세종대에는 고전주의적인 경향이 주를 이루고 이에 수반하여 새롭게 수용된 문화를 소화하고 그것을 토대로 좀더 참신한 것을 창출하는 경향이 함께 병존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사실상 이러한 경향은 수준 높은 문화에서는 흔히 엿볼 수 있는 현상이다.
세종조에 고제(古制)를 열심히 연구하는 고전주의적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나 이것은 중국문화를 모방하고 추종하는 데 치중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그 반대로 독자적인 문화의 형성 또는 문화적 자주성의 확립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세종조에는 문화적 자주성이 강하게 형성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에 나타나 있는 한글 창제의 민주적이고도 자주적인 정신이 그 단적인 예가 되겠다. 이 밖에 회화 분야에서도 그러한 예가 종종 보인다. 일례로 세종 15년(1433)에 대왕은 경연(經筵)에서 자손들이 깊은 궁궐에서 자라 농사의 어려움을 모르게 됨을 한스럽게 여겨 빈풍(豳風)을 방(倣)하여 우리나라 풍속을 뽑아 그림으로 그리고 찬시를 지어 상하귀천이 모두 농사일의 중요함을 알게 하고 후손들에게 전하여 영세토록 감관(監觀)케 하였던 것이다. 세종대왕은 집현전이 우리나라의 공부(貢賦), 요역(徭役), 농상(農桑)의 일을 널리 채집하여 그 형상을 그림으로 그리고 시가(詩歌)로 찬을 하게 하였으며 이것을 「아국칠월시(我國七月詩)」라 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고전에 보이는 사례들을 자기화하는 자주성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뒤에서 논할 이 시대의 활발한 실경산수(實景山水)의 제작도 이러한 문화적 자주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믿어진다.
세종조의 문화와 예술에서 간취되는 또 하나의 두드러진 경향은 풍류와 예술 애호정신이라고 하겠다. 물론 이것이 비단 세종조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특히 이 시대에 두드러졌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뒤에 소개할 안견과 안평대군, 집현전 학사들이 어울려 제작한 <임강완월도(臨江翫月圖)>, <이사마산수도(李司馬山水圖)>, <비해당 소상팔경도(匪懈堂 瀟湘八景圖)> 그리고 <몽유도원도> 등의 경우에서 이를 잘 엿볼 수 있다. 자연을 사랑하고 음악과 시서화를 즐기며 애호하는 성향이 세종조에 팽배해 있었다. <몽유도원도>가 이와 직접 연관이 되어 있음은 뒤에서 살펴보듯이 분명하다.
2) 후대의 귀감이 된 서화
이러한 여러 가지 세종조 문화의 훌륭한 전통과 특징은 세조의 집권과 사육신을 비롯한 인재들의 대량 희생 때문에 다소 위축되었다가 성종조에 약간 회복되는 기미를 보였으나 그 후로는 세종조 문화의 높은 수준을 오랫동안 회복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한 세기 뒤인 16세기 중종(1506~1544) 때에는 세종조의 문화를 본받아야 할 가장 훌륭한 것으로 보게 되기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중종실록(中宗實錄)」에는 다음과 같은 논의가 보인다.
세종조에는 정치를 도모하는 이외에 비록 백공기예(百工技藝)라도 장려하고 권장하지 않음이 없어서 무릇 백공장(百工匠)이 지극히 정교하였습니다. 서화소기(書畵小技)에 이르러서도 조금이라도 유능하고 이름 있는 자가 있으면 포상하고 장려하고 권면하여 사람들이 모두 모효(慕効)하고 각기 정교함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능서(能書), 능화자(能畵者)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이제는) 천사[天使, 명의 대사(大使)]가 (우리나라의) 그림을 구하고자 할 때에도 그림을 잘 그리는 자가 한 사람도 없어서 때맞추어 그림을 증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백공기예가 대체로 이와 같으니 심상하게 볼 수가 없나이다.
이와 대동소이한 내용의 언급이 「중종실록」의 그 다음해(1538) 기록에도 나타나 있다.
세종의 착실하고 근면한 통치 기간에는 예악과 문물이 갖추어져 있었고 백공기예가 모두 그 능력을 다했습니다. …… 비록 잡학이라고 해도 각기 그 맡은 바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습니다. 화공(畵工)에 관한 일을 보아도 세종조의 도화(圖畵)는 이제 보아도 가지런하고 뛰어납니다. 서책(書冊)이나 인지(印紙)도 역시 모두 아름답습니다. 비록 작은 일이라도 오히려 느슨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단편적인 기록들만 보아도 세종조의 서화를 비롯한 예술과 문화가 후대에 얼마나 높이 평가되고 귀감이 되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회화에 있어서 세종조의 안견이나 강희안 등의 화풍이 조선 초기와 중기의 화단에 지속적이고도 괄목할 만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연유도 이러한 배경에서 찾아진다.
저서 『안견과 몽유도원도』중 pp.26~31 발췌
안견의 수묵과 이병직의 화실복원을 계기로 본
수묵화(水墨畵)와 필묵화(筆墨論)
일랑 이 종 상 박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종로구문화비전 위원)
“동양화”하면 곧 “수묵화”를 생각하게 되고 “수묵화”하면 또 “골법용필(骨法用筆)”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만큼 동양화에 있어서는 수묵화의 비중이 큰 것이며 재료나 기법적인 의미로서의 필묵(筆墨)을 벗어나서 동양화의 높은 회화정신을 표현하는데 필연적으로 충족될 수 있었던 표현양식으로서 중심적 위치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동양화를 여백의 미술이니 선의 미술이라고 표현들 합니다. 또 동양화의 대물관(對物觀)은 존재자체를 고정태(固定態)로 보기보다는 運動態의 현상으로 파악하고자 하며, 안견의 『몽유도원도』처럼 자연에 대한 바라보는 方式 또한 고정시위(固定視位)를 거부하고 자유로운 이동시위(移動視位)를 갖음으로 해서 자연과의 합일을 꾀했으며 그 결과 작가의 위치가 전화면에 확산되는 진폭(振幅)을 갖게 됐습니다. 동양화가 근본적으로 서양화와 달랐던 점은 대상의 존재성을 분석확인하는데 있지 않고 존재의 전후를 종합하여 근원적 형상성을 하나의 운동태로서 통일취상(統一取象)하는데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고요함(靜)속에 움직임(動), 선(線)속에 면(面), 묵(墨)속에 색(色), 필(筆)속에 골(骨), 공간속에 시간, 비논리속에 논리, 종합속에 분석을 앎으로 해서 서구문명이 갖지 못하는 서도예술(書道藝術)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공을 동시에 조화시킬 수 있고 극도로 간역(簡易)된 수묵화의 높은 예술정신을 발전시켰으며 사군자라는 독특한 회화양식을 향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양화의 전통에는 우연성의 형성을 존중하는 정신과 경향성의 형성을 존중하는 정신이 있습니다. 이러한 두 개의 전통적 정신은 특히 동양화의 수묵화발전에 내용과 양식 면에서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세상 모든 회화기법 중에서도 시간과 공간의 관계가 가장 민감한 지필묵(紙筆墨)끼리의 충돌 속에서 긴장된 수훈묵장(水暈墨章)의 조화율을 창출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지필묵이 의미하는 수묵화는 비존재의 존재성을, 또한 존재의 비존재성을 암시하게 되고 이로 인해서 화면은 사의(寫意)에 의해 극도로 형사성(形似性)이 배제됨으로서 필연적으로 붓의 감필화(減筆畵)현상과 색의 종합화현상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자연 붓의 골법화(骨法化)와 묵(墨)의 생동화(生動化)를 요구하게 되며 결국 일점일화(一點一畵)로서 천기(天機)에 접하고자하게 되니 이 지경에 이르면 임의도지(任意到至)하여 유소불위(有所不爲)하게 되고 무필무묵(無筆無墨)에 화자화(畵者畵)의 경지에 이를 것입니다.
수묵화에서 존재성향의 면과 색이 경향성을 나타내는 선과 무채(無彩)로 집약되고 이것은 다시 필과 묵으로 대치되는 현상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수묵화에서 말하는 필이란 것은 안료를 화면에 호도(糊塗)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로서의 붓이 아니라 필봉(筆鋒)의 끝을 봉망(鋒芒) 혹은 예인(銳刃)이라 하여 일도양단(一刀兩斷)할 수 있는 칼날과 같은 의미를 지님으로 해서 결국은 힘(氣)을 요구하게 되고 그 힘은 도력 즉 필력(刀力 卽 筆力_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힘이란 현시적(顯示的) 외력(外力)이 아니라 잠세적(潛勢的)인 우주의 충기(充氣)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 여기서 말하는 묵(墨)이란 것은 우리가 보통으로 쓰고 있는 안료 중의 한 색인 흑색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계(現象界)의 모든 가시색상(可視色相)을 전부 종합하고 흡수한 비유채(非有彩)의 공색 즉 진색(空色 卽 眞色)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묵색은 태허간(太虛間)의 표표묘묘(縹縹緲緲)한 “현색(玄色)”인 것이지 결코 불투명하게 발라지는 까만 색일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墨이 動하여 변화를 일으키면 五色을 갖추게 되고 이러한 것을 일러 득의(得意)라고 했습니다. 또 墨은 스스로 五色을 다 갖출 수 있는 것이며, 묵기(墨氣)가 조화를 이루어 윤택해지면 신기(神氣)가 생기고 묘리(妙理)가 저절로 그 속에서 생동하는 법입니다. 그러니 墨色은 곧 五色으로 이루어져 있고 용필의 조화에 따라서 다시 六色으로 나타나니 흑(黑), 백(白), 건(乾), 습(濕), 농(濃), 담(淡)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묵색을 육채(六彩)로 분석한 속에 흑채가 일부분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수묵을 다뤄왔던 옛날의 선배화가들도 묵색이 단순한 흑색으로서가 아니라 더 깊은 뜻을 암시하고 있는 색의 종합화로서 우주의 空色으로 보고 진기(眞氣)에 이르고자 했던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묵즙(墨汁)은 화가의 흉중이나 화면위에서는 존재자로서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정수(劉靜脩)는 그의 시구(詩句)에서 “이제야 알겠구려. 흉중에 없는 먹물, 화가의 가슴속엔 다만 말술뿐…”이라는 뜻도 달관된 경지의 非有의 有로서 無法 無筆 無墨과 통하는 얘기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심판인지 수묵화를 그저 黑色(까만색)으로 그리는 그림이려니 만 생각하고 묵즙(墨汁)을 쏟아 붓고 쳐 바르기에만 급급한 사람들이 더러는 있는 것 같습니다. 한때는 동란 통에 값비싼 화구(繪具)를 구하기 힘들어 온통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먹그림만 그려댄 적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채색을 못 구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색채감각(色彩感覺)이 아둔한 색치(色癡)이기 때문이거나 혹은 맹목적인 수묵지상주의에 빠져 채색기피증에 걸렸기 때문에 수묵화를 그리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진정한 우리 회화의 정신적 맥락 속에 자랑삼았던 수묵화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묵색은 먹을 가는 화가의 마음에 따라 똑같은 먹일지라도 천차만별의 조화를 낳고 또 수직(水質)과 연질(硯質)에 따라 각기 별다른 성질을 나타내는 법입니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묵즙은 또 다른 종이의 질(紙質)과 용필(用筆)의 운용에 따라 천변만화(千變萬化)로 나타나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래서 붓 빨고 먹 가는 것부터가 그림의 일부분일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지필묵연(紙筆墨硯)을 대하는 자세를 마치 한 나라의 국운을 좌우하는 전장에 비유했습니다. 화선지는 진자(陣者)와 같고 필봉(筆鋒)은 도삭(刀槊)과 같으며 묵은 병갑(兵甲)과 같고 수연(水硯)은 성지(城池)와 같고 마음과 뜻은 장군(將軍)과 같다는 말입니다. 심의(心意)는 곧 화가의 흉중에 있는 것이니 결국 화가는 장군과 같은 용기와 지략으로서 필묵을 운용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수묵화 이외에도 동양화는 그 이전부터 그 양식을 달리하는 그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양화의 사상적 체계는 사실상 수묵에 대한 이론의 확립에 따라 같이 발전됐다고 보입니다.
역대화론이 거의 전부가 필묵에 대하여 언급한 것을 보면 역시 동양화의 중심사상은 수묵정신으로 집약되며 이러한 정신을 표현하거나 이해하는데 필묵의 운용을 알아야 되기 때문에 용필용묵(用筆用墨)에 대한 사상적 배경은 동양의 모든 학문과도 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일농묵(單一濃墨)을 사용하는 서예 속에서도 용필의 조화에 따라 육채(六彩)의 묵기(墨氣)가 신채(神采)를 발휘하는 것을 보면 묵기의 오색육채(五色六彩)라는 것이 외화적 변용(外華的 變用)에 있기 보다는 운필의 묘에 있으며 그 묘는 곧 사의(寫意)에 좌우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흉중 일기는 필세를 통해서 묵기(墨氣)에 머무름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림에 육요(六要)라는 것이 있는데 기, 운, 사, 경, 필, 묵(氣, 韻, 思, 景, 筆, 墨)이 그것입니다. 여기서도 墨에 우선해서 筆을 내세운 것은 바로 그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筆에는 사세(四勢)가 있는데 근, 골 혈, 육(筋, 骨, 血(氣), 肉)이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무생체의 필묵에 생명을 불어넣는 마술사와 같은 얘기입니다. 원래 筆이란 비록 법칙에 따라 운전되고 변통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질(太質)해지거나 형사에 매이지 않고 무위자연(無爲自然) 해야 되며 묵은 높낮음과 깊고 얕음이 있어 문채(文采)가 자연스러우며 인쇄한 것처럼 붓자국에 한정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림의 품등(品等)에 신묘기묘품(神妙奇巧品)이 있는데 신품의 경지라는 것은 붓 가는데 마다 유소불위 해야 되며 붓 가는 대로 임수운필(任手運筆)하여서 취상(取象)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형호의 화륙법(荊浩의 筆法論)에서도 필과 묵의 경향성과 우연성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古來로 필묵위상론(筆墨爲上論)은 동양화가 기운을 제일로 삼아 왔던 때문이며 이러한 사상은 필연적으로 수묵화의 발전을 가져왔고 수묵화의 발전은 사의제일주의(寫意第一主義)의 남종화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필묵은 형으로 감지할 수 있으나 천기는 감각으로 알 수 없으며 화법은 수련으로 습득할 수 있으나 기운은 수련으로 습득되지 못하니 감지할 수 있고 습득할 수 있는 필묵과 화법으로서 천기와 기운을 구하는 것이 필묵의 근본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수묵화는 필과 묵의 조화를 터득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홍곡자(洪谷子)는 필골묵육(筆骨墨肉)를 내세워 골육의 조화를 꾀했으며 그는 오도자(吳道子)의 유필무묵(有筆無墨)을 골승육(骨勝肉)이라 했고 반대로 항용(項容)의 유묵무필(有墨無筆)을 육승골(肉勝骨)이라 하여 둘을 모두 취함으로서 완전하게 했다고 합니다.
일찍이 오도자가 오대상풍(吳帶當風)의 선조법(線條法)으로 면과 색을 배제하는 수묵화풍을 보였고 이어 왕유(王維)가 필적경리(筆迹勁利)한 線條의 파묵법(破墨法)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파묵법은 선담후농(先淡後濃)의 묵법으로 후에 왕흡(王洽)의 발묵법(潑墨法)인 선농후담(先濃後淡)의 묵법과 함께 수묵화의 량대기법이 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파묵은 형사(形似)를 초월하고 색채를 배제함으로서 수묵선조(水墨線條)의 백묘법을 발전시키게 되고 필묵의 간소화경향은 이성(李成)의 석묵법(惜墨法)으로 나타납니다.
李成은 먹을 금과 같이 아껴 썼고 王洽은 먹물 휘둘러 그렸으니 李成의 석묵법과 王洽의 발묵법의 묘리(妙理)를 알게 되면 사혁(謝赫)의 畵六法과 三品의 반 이상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고 동기창(董其昌)은 그의 화선실수필(畵禪室隨筆)에서 쓰고 있습니다. 수묵화에서는 운동태로서의 비존재형태 즉 경향성을 取象하게 됨으로서 낙필전(落筆前)의 입의(立意:意在筆先)와 운필중의 간필(簡易:減筆惜墨)와 수필시(收筆時)의 미완을 형성상의 전통으로 삼아 온 것입니다. 그래서 수묵화는 형모와 색채가 지나치게 뚜렷하고 완벽하게 갖추어져 너무 근세(謹細)하고 교밀(巧密)함이 노출되는 것을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해서 필묵의 미완성을 염려하기보다 오히려 형사의 완료됨을 걱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묵화는 형식으로 감지되고 습득될 수 있는 필묵과 기법을 통해서 감지할 수도 습득할 수도 없는 우주의 眞氣에 合一하고자 하며 미완성의 완성이라는 사의적 양식에 도달하는 높은 회화정신을 터득하게 됩니다.
오늘날 일부의 수묵화가 그 정신은 증발되고 형식적 잔해만 남아서 한낱 검정물감의 그림으로 전락하여 서양화의 Drawing과 구분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더구나 서양화의 조형론으로 우리의 수묵화를 분석평가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물론 아주 불가능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얼마나 그 정곡을 찌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차제에 우리의 수묵화가 처해있는 현주소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오늘의 미술양식으로 미흡한 점을 보완하고 버릴 점은 용기 있게 버리고 좋은 전통은 더욱 발전시켜야 될 과제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 안평대군과 안견의 숨결이 서려있고, 조선 마지막 궁정화가로 국전 초대작가였던 수묵화가 이병직 화백의 화실로 지어고 70년대 최초 요정으로 서울시에 등록된 인구에 회자되었던 ‘오진암’의 부암동 복원공사가 준공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가 이루어진 이상향의 땅 부암동에서 오늘에 현대미술로서의 수묵예술의 무한한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기회를 가져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서울 안견기념사업회 사업내용
2007. 04.10 21세기 안견회화의 정신전 (주최: 경향신문사, 경향갤러리)
학술세미나: 안견의 예술세계강사: 안휘준 박사
2009. 04.25 제1회 도원을 걷다 -상왕산, 개심사
학술세미나: 안견기념관
안견과 그의 화풍: 강사 -안휘준 박사
한국문화의 정체성과 예술교육의 방향: 강사-이종상 박사
10.07 안견몽유도원도 한국특별전(국립중앙박물관)
몽유도원도 진작설명회: 강사- 안휘준 박사
11.04 현동자 안견 몽유도원도 한국특별전기념
제2회 안견회화 정신전(갤러리도올)
학술세미나: 안견이후 한국회화의 어제와 오늘: 강사- 김상철
21세기 한국미술의 세계화를 위하여: 강사- 이종상 박사
* 무계정사지 대형주차장 설립반대 예술인 1,000명 서명운동
(문화체육부, 서울시청, 종로구청 진정서 제출)
학술조사 및 유적발굴 후 무계정사지 보존하겠다는 답신 받음
(종로구청)
-전통한옥(오진암) 이전공사 -
2010. 02.04 서울 도성문화재 훼손 불법건축막사 반대운동 참여
04.17 제1회 꿈-몽유도원 무계정사문화축제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무계정사지(서울시 사적지 제 22호)
안평대군 진혼 살풀이(이애주 교수)
몽유도원도 찬시 낭독, 퍼포먼스
04.18 제2회 도원을 걷다: 도비산 부석사 벚꽃길, 천수만, 간월도
학술세미나: 우리문화의 국제화 전략(안견기념관):강사- 이종상
10.06 현동자 안견선생 추모제(서산안견기념과)
서울지회 임원단 참석(서울지회장 종헌관)
12.01 제3회 안견회화정신전(갤러리도올)
2011. 05.22 제2회 꿈-몽유도원 무계정사 문화축제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무계정사지(서울시 사적지 제 22호)
06.11 제3회 도원을 걷다 -해미읍성, 개심사
안견회화 깃발전, 학술세미나(강사: 안휘준, 이종상, 고연희)
세계기네스북도전 안견회화 수묵난장 퍼포먼스: 1,000명
(해미읍성 광장)
10.30 제4회 안견회화정신전(세종문화회관미술관)
청년작가 특별기획전_ 대상: 서수영, 우수상: 류숙영
학술세미나(강사: 안휘준)
11.05 안견추모제-안견기념관
안견창작스튜디오 개관기념전
2012. 06.09 제3회 꿈-몽유도원 무계정사 문화축제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무계정사지(서울시 사적지 제 22호)
제1회 꿈-몽유도원전(자하미술관)
06.13-07.01 안견 청년작가 대상수상 서수영 초대전; 갤러리 도올
10.06 제4회 도원을 걷다
해미읍성축제 참여-시민과 함께하는 한국화와 부채그리기
태극건무와 함께하는 안견회화퍼포먼스: 1,000명 휘호,
(해미읍성 광장)
10.10 제4회 안견회화정신전(세종문화회관)
청년작가 특별기획전- 대상: 박경민, 우수상: 진민욱
학술세미나: 한국화, 처음에는 비극으로 그다음 희극으로:
(강사-김백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교수)
11.13 안견추모제- 안견기념관
2013. 05.25 제4회 꿈-몽유도원 무계정사 문화축제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무계정사지(서울시 사적지 제 22호)
06.05-06.16 안견 청년작가 대상수상 박경민 초대전: 갤러리 도올
조직표
직 책 |
성 명 |
비 고 | |
고 문 |
안휘준 이종상 최종만 |
서울대 명예교수. 전 문화재 위원장 서울대 명예교수. 예술원 회원 (주)고암그룹 회장 | |
자 문 위 원 |
김종규 이철주 임송희 임희영 김영근 채수영 이관순 이창의 경교수 신동은 강종권 |
문화재신탁 이사장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덕성여대 명예교수 재경서산 향우회장 재경서산 향우회 명예회장 김&장 변호사 한미약품 사장 조선미디어 사장 세무사 협회 회장 갤러리 도올 대표 자하미술관 관장 | |
후 원 언 론 사 |
김달진 백용현 최광열 이홍연 이종순 김태신 |
서울 아트가이드 대표 월간미술세계 대표 미술신문-월간서예 대표 월간 서예문인화 대표 월간 미술문화 편집국장 서산 타임즈 서울지사장 | |
회 장 |
김문식 |
수원대학교 미술대학원 겸임교수 | |
부회장 |
정군태 |
한국화가 | |
감 사 |
홍기윤 이명숙 |
한국화가 한국화가 | |
이 사 |
사업 기획 학술 전시 보도 홍보 |
정옥임 정현희 서수영 이용석 이현직 김명재 |
안견미술대전 운영위원(성서중학교 교사) 미술학 박사 조형예술학 박사 미술학 박사 한국화가 서산 타임즈 기자 |
운 영 위 원 |
위원장 위원 위원 위원 위원 위원 위원 위원 |
이성영 곽자애 허명숙 백예선 박창구 이춘택 장세룡 박성환 |
미술학 박사 한국미협 문인화 초대작가 한국미협 문인화 초대작가 문인화가 한국화가 한국화가 한국화가 서울창극단 대표 |
현창 후원회 사무총장 |
류영환 |
(주)범신사 대표 | |
사 무 국 장 |
최진옥 |
한국화가 | |
일 반 회 원 |
150명 |
안견회화정신전 초대작가 & 안견미술대전 수상작가 외 150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