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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고시 수기집(2 누구라도 삶을 소중하다 않으리)
바람을 가르며 달린다.
홍 대 유 먼저 망설임이 앞서는 것은 부족한 나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 놓고 싶지 않다는 솔직한 마음이 어느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음일까요. 꿋꿋이 자신의 역경을 이겨낸 많은 선배님들께는 진심으로 송구스러운 일이지만 이러한 기회를 마련해주신 여러분에게 깊이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또 이제 시작하는 후배에게 조그만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으로 이 글을 적습니다.
나는 경기도 한성의 조그만 부락에서 여느 집에서처럼 축복 속에 태어났다. 하지만 부모님은 사이가 좋지 못하셔서 내가 채 3살이 되기도 전에 이혼하셨고 나는 할머님께 맡겨져 주름잡힌 할머니의 손길 아래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렇게 4년여를 할머니와 살다가 7살 되던 해 재혼하신 아버님의 낯선 품속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지금 기억하기로는,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것이 일면 기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서울이라는 곳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시골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과 할머니를 무척 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어떤 까닭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제 나이에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10살이 되어서야 사당 동에 위치한 남성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우리 집은 물질적으로 부유하여 별 걱정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님은 가정보다도 이웃과 마을을 위하여 태어나신 분처럼 마을의 일이라면 잠도 못 주무시고 뛰어다니셨다. 당시의 사당3동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으며 수도와 전기가 설치되지 않은 무허가 주택들이 늘어선 그야말로 달동네였다. 아버님께서는 수도와 전기를 설치하고 가난한 집에 밀가루를 나누어주시는 등 이웃에게는 존경의 대상이었지만 새어머니와의 불협화음이 그치질 아니하였고 가세는 점점 기울어졌다. 부모님께서 다투실 때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구석에서 불안해하며 쪼그리고 앉아 있곤 하던 기억이 난다. 그런 와중에서도 나는 큰 탈 없이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교복을 입고 중학생이 되었다는 기쁨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나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2기분 등록금을 내지 못했던 나는 매일 등교와 동시에 담임선생님의 호출을 받고 교무실로 불려가야 했고 친구들도 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미움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느니 차라리 학교를 그만두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입학 4개월 만에 학교생활을 청산할 수밖에 없었다. 자퇴를 하고 나소 하루 종일 혼자 있는 것이 답답하여 학교에 다니지 않는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우리 또래의 친구들이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공을 차고 있는 동안 우리는 국립묘지 뒷산에 모여 담배꽁초를 주워 피우고 술도 나누어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서로 말은 안했지만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부럽기도 하고 밉기도 했으며, 막연하게나마 비록 학교는 다니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한 분 뿐인 형님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나를 이끌어내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그대로 방탕한 생활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을 것이다. 그 당시 형은 직장에서 숙식을 하며 기술을 배우고 있었는데 나와 함께 자취생활을 하기로 하고, 처음으로 집을 떠나는 나를 데리고 우리 둘이 누우면 꽉 차는 사글셋방을 얻었다. 나의 자취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처음 형님을 따라 집을 떠나올 때는 당장에라도 돈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부딪쳐보니 어린 나이로 돈과 공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일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우선 나이 어린 내가 돈 벌이를 할 만한 자리가 없었다. 그때 아는 분이 신문을 팔면 시간이 많이 있으니까 신문팔이를 해보라고 하였다. 내가 과연 신문을 팔고 다니며 돈을 벌 수 있을까 두렵고 무섭기도 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집을 떠난 후 바로 실감할 수 있었다. 우선은 시작해야만 했다. 신문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지금은 가판점이 거리 요소요소에 있어서 신문을 들고 다니며 파는 사람은 전철이나 타야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석간신문을 옆에 끼고 “신문이요, 신문!”하며 외치고 다니는 일명 가판소년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정오가 지나면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동아일보사에서 금방 나온 석간을 받아들고 다른 가판보다 빨리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을 뛰어다니며 팔아야만 했다. 조금만 늦어도 판매량에 큰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일차로 거리에서 신문을 팔고 나면 광화문에서 종로3가까지 식당, 다방 등을 찾아다니며 나머지를 팔아야 했다. 하루에도 종로통을 몇 번이고 돌아다녀야만 받아온 신문을 다 소화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쑥스러워 사람이 많은 곳을 오히려 피하기까지 했지만 신문팔이에도 요령이 있는 법이어서 점차 어디로 가야 잘 팔리는지를 알게 되었고 “신문이요”소리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신문 외에도 눈치 빠르게 부지런히 움직이면 뜻밖의 수입도 얻을 수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비닐우산 장사였다. 갑자기 비가 내리면 누구보다 먼저 우산을 받아다가 빗속을 뛰어다니며 우산을 팔았다. 사람들은 갑자기 내리는 비를 싫어하지만 이 시절 나는 소나기 오기를 기다렸고, 일기예보가 자주 틀려주기를 바랐다. 내가 이처럼 열심히 신문을 팔고 우산까지 남보다 먼저 받아다가 팔기 시작하면서 광화문과 종로통에서 먼저 신문을 팔기 시작한 선배가 판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말없이 성실하게 내 할 일을 계속하자 주위의 가판들도 나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오히려 다른 가판소년들보다 나를 더 따뜻하게 대해주고, 여러 가지 편의도 보아주었다. 그때 신문팔이는 대개 두 가지 부류가 있어서 자기 집에서 다니는 아이들과 오야 밑에서 모여 사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고아였다. 그들의 생활은 보기에도 딱한 것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부모님께 응석을 부릴 나이의 아이들이 차고 매정한 거리에서 신문을 팔고 다니다보니 이들은 늘 외롭고 마음 붙일 곳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떤 아이들은 습관적으로 본드를 비닐봉지에 담아 흡입하기도 했다. 지금은 본드라는 것이 환각제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아주 은밀하고도 드러나지 않던 환각제였다. 냄새가 지독한 본드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흡입하는 친구에게 도대체 그 독한 것을 왜 그렇게 좋아하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친구 말이 그것을 미시면 기분도 좋아지고 목소리도 크게 잘 나오며 무엇보다 외롭다는 생각이 나지 않아 좋다는 것이었다. 말려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들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아는 나로서 는 안타까울 뿐이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신문팔이로 돈을 좀 모을 수 있었다. 돈이 마련되자마자 나는 내가 집을 나왔던 목표를 찾아 나섰다. 1978년 9월 나는 설레는 마음을 감추고 조용히 학원 문을 두드렸다. 신문이나 팔던 내가 과연 공부를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 속에서 들어선 강의실은 너무나 놀라웠다. 나이 많은 형, 아저씨, 아주머니는 각양 각층의 사람들이 한 교실에서 중학교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것 아닌가.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배우려는 열기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후 ‘나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동안 막연히 공부하고 싶었던 꿈을 구체적으로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어렵게 찾은 꿈이었고 오랜만에 가져본 자신감이었지만 매일의 생활은 그러한 꿈만으로 좋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매달 마련해야하는 학원수강료는 여전히 나에겐 벅찬 것이어서 먹는 것을 비롯한 최소한의 지출 이외에는 모두 줄였지만 수강료를 낼 때마다 어떻게 마련했는지 모를 지경으로 빠듯하게 살아야 했다. 수입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새벽에 조간배달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간배달이 끝나면 급히 아침 겸 점심을 먹고 12시 전후에 석간을 돌리기 시작하면 오후5시나 되어야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신문을 돌리고 남들보다 5분이라도 일찍 신문을 들고나가기 위해 늘 뛰어서 보급소로 나갔고, 다른 가판이 지나가기 전에 광화문, 종로를 정신없이 뛰어 다니는 나였기에 때문에 학원으로 향할 즈음 몸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그러나 신기하기까지 한 것은 쫓기듯 뛰어다니며 몸은 피곤하고 괴로웠지만 학원으로 가는 시간이 어떤 시간보다 즐거웠다는 점이다. 강의를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졸음이 쏟아져서 졸기도 많이 졸았다. 같이 공부하는 형들이 핀으로 졸음을 쫓는다는 얘기를 듣고 나도 나중에는 핀을 가지고 다니며 졸릴 때마다 살을 찌르며 수업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79년 4월에 있은 고입검정고시에서 수학 때문에 좀 불안하였지만 신문팔이 세 명의 친구와 함께 합격하였다. “합격이야, 합격!” 울음이 터질 듯이 벅차고 어디에서인지 용기가 솟는 순간이었다. 매일 신문을 들고 뛰어다니던 종로 한복판에서 우리는 크게 외쳤다. “나는 합격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신기한 듯 우리를 쳐다보았다. 기쁨을 함께한 순간도 잠시, 나는 또다시 외로운 고민에 빠졌다. 같이 신문을 팔면서 합격한 친구들이 이제는 고등학교 간다고 들떠 있었지만 나는 교복을 입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어려움을 함께 나누던 친구들이 고등학생이 되어, 이젠 나만이 남게 된다고 생각하니 더없이 외롭고 자신의 처지가 비관스러웠다. 그러나 언제까지 슬퍼하고만 있을 형편이 아니었다. 신문을 들고 거리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공부할 수 있다는 즐거움으로 신문을 팔던 날들에 비하면 이 상황을 과연 벗어날 날이 올까 하는 어두운 마음으로 일하는 이 시절은 몹시 힘들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열심히 뛰는 것만이 살아가는 길임을 깨닫고 묵묵히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에서 아는 형을 만났는데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구두닦이를 해보자는 제의를 받았다. 선뜻 그러마고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무래도 안 해본 일인데다가 구두를 닦는 일이 썩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신문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결국 시작해보기로 했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서대문경찰서 후문에서의 구두닦이 생활이었다. 보기에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이지만 구두에 광을 내는 일도 나름대로의 기술이 있는 일이어서 처음에는 구두는 닦아보지도 못하고 다방이나 사무실에 가서 닦을 구두를 가져오는 일부터 시작했다. 구두를 닦는 사람들끼리 하는 말로 닦는 사람을 닦세, 가져오는 사람을 찍새라 하는데 찍새의 경험은 한손에 얼마나 많은 구두를 들 수 있느냐로 가려지는 것이다. 나도 나중에는 양손에 구두 15켤레 정도는 들고 다니는 요령도 터득하게 되었고 차츰 구두에 광을 내는 기술도 배웠다. 새로운 일이라 긴장감으로 잠시 책을 놓고 일에만 열중했었는데 온종일 일하다보면 육체적 피로가 쌓이게 되어 다시 책을 잡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지냈다. 학원에 다닐 시간을 낼 수가 없으니 고등학교 참고서라도 틈틈이 보려고 했지만 생각뿐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책망하며 지내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이때 나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동안 열심히 일하며 준비해둔 덕분에 이제는 독립해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내가 자리를 잡은 곳은 치안본부 의주로 청사였는데 쉽게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아니었다. 혼자 일하다보니 수입도 좋았고 무엇보다 시간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어 규칙적인 생활이 가능하게 되어 좋았다. 직원들이 출근하는 8시 30분경부터 오후4시까지 부지런히 일하면 청사내에서 근무하는 사환보다 오히려 수입이 3배 정도 높았다. 차츰 생활이 안정을 찾게 되었고 다시 학원에 다릴 여유도 생겼다. 80년 9월에 검정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학원등록을 했다. 고입검정고시를 준비할 때보다 시험일까지 기간이 많이 남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교실 분위기가 한결 여유가 있었다. 하는 일과 나이, 형편을 모두 달랐지만 어려운 일 하면서 공부한다는 비슷한 처지에서 우리는 서로 위로하고 때로 용기를 북돋아주며 형제처럼 지냈다. 누구보다 서로의 처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어려울 땐 돕고, 기쁜 일은 함께 기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도 이 시절 사귄 친구들과는 형제처럼 따뜻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경찰청사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경제적인 어려움은 많이 해결되었고 일을 마치고 나면 자유롭게 학원수업을 듣고 밤에는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었다. 내가 성실히 구두를 닦고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을 지켜보던 경찰아저씨들이 청사내 사환자리를 마련해주시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환으로 근무를 하면 깨끗하고 남 보기에 구두닦이보다야 낫겠지만 학원 비를 대면서 생활하기에는 아무래도 수입이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지켜보아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듯 관심을 가지고 따뜻한 말씀으로 격려해주신, 그분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지금도 고급경찰로 근무하고 계실 송씨 아저씨는 여러모로 나를 살펴주신 분이시다. 또한 지금은 30년 여경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임 하셨지만 정 여사님은 나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신 잊지 못할 분이시다. 경찰청사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범죄를 저지르고 잡혀온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견디기 어렵더라도 남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그곳에서 여러 번 하게 됐다. 그러면서도 잡혀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또래의 아이들을 보면 왠지 그 아이가 안쓰러워보였다. 아마 무언가 혼자 힘으로 견디기 힘든 상황에 놓인 상태는 아니었을까, 함께 신문 팔던 친구들 중 본드를 흡입하던 친구들처럼 저 아이도 몹시 외롭고 자신만 버려진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대입검정고시 준비를 하고 있던 때 오래도록 잊지 못할 알이 하나 있다. 시험이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6월의 어느 날, 교실로 들어서시는 선생님을 따라 한 형이 들어왔다. 선생님은 그 형이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지만 고검, 대검을 거쳐서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선배라고 소개하셨다. “박영립입니다”라고 입을 뗀 그 형이, “어려울수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꼭 결실이 있으니 용기를 잃지 말고 끝까지 열심히 하라”고 말을 마칠 때까지 나는 왠지 마음이 설레었고, 지금의 어려움도 꼭 극복되리라는 확신을 가직 되었다. 그 후 어려울 때마다 그날 본 형의 당당한 모습을 기억하면서 나에게도 그런 날이 오리라 믿으며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시간은 쉼 없이 흘러 87년 7월 31일과 8월 1일에 대입검정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8월 25일 합격자 명단에는 내 이름이 분명히 적혀 있었다. 신문팔이로, 구두닦이로 어렵게 얻은 결실이었기에 누구보다 기쁘게 합격증을 받을 수 있었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급하게 대학입시를 준비했지만 아무래도 시간적으로 부족했다. 대학입시에서 실패하고 실망감에 빠져 있을 때 군 소집영장이 나왔다. 내가 군대에 가면 형 혼자 생활해야 할 것이고 그것은 형에게 갑자기 너무 큰 부담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면제를 받기 위해 체중을 줄이기로 했다. 끝내 체중미달로 군대를 면제받았는데 떳떳하지 못한 그 행위는 얼마 살아오지 않은 과거사 중 가장 마음에 걸리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나의 처지가 오히려 안타깝게 여겨지기도 하였다. 일단 군대문제가 해결되자 이제는 공부를 해야 했는데 대학입학은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선 취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무원 시험이냐 대학 입시냐 망설이고 있을 때 이후의 나의 모든 것을 변화시킨 기수 모집광고를 접했다. 처음엔 무심코 공고문을 읽어 내려갔는데 이것이야말로 나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작은 키와 왜소한 체격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나였는데 지원자격이 신장 160센티미터 이하, 체중48킬로그램인 사람이라고 되어있었다. 나는 나의 신체조건을 원하는 곳이 있다는 것만도 기뻐서 한국마사회 부설기관인 기수양성소에 지원하였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당당히 합격해서 동기생 12명과 함께 정규 11기 기수 훈련생이 되었다. 18개월간의 교육수료 후 기수면허시험을 통과하고 나서는 자신보다 몇 배나 크고 체중이 나가는 말 위에서 말과 호흡을 일치시키고 스피드를 겨루는 스릴을 맛볼 수 있었다. 말을 타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동안 나의 어려움은 오늘 이러한 순간이 오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물을 만난 고기라는 말이 아마 이때의 내기 분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열광하는 관중의 함성 속에서 말과 호흡을 일치시키고 질주할 때의 짜릿한 느낌. 나는 이것이 나를 기다리던 삶이었구나 하고 느꼈다. 나는 수많은 경기에 참가했다. 매 경기마다 새롭고 또 잊을 수 없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 그것은 87년 11월15일에 개최됐던 일간스포츠 대상 경주이다. 그 경기에서 나는 데뷔2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2만여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상대에 올라 트로피를 받고 쉴 새 없이 터지는 기자들의 플래시 속에서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나는 우승을 실감할 수 없었다. 다만 눈앞에 달리던 말들을 제치고 1등으로 골인하는 순간의 희열만이 오랫동안 생생하게 기억될 뿐이었다. 그 경기를 치르고 나서 나는 88년 스포츠서울 대상 경주에서 우승을 했으며, 89년에는 한해 8개의 대상 경주 중 4개의 타이틀을 획득하여 한국경마사상 최초로 대상 경주 4관왕이라는 전무한 기록을 세웠다. 신화적인 기록이라 하여 스포츠신문을 비롯한 매스컴에 연일 나의 기사가 보도되어 신문에 실린 내 사진과 기사를 스크랩하면서 기쁨을 느낄 수도 있었다. 4개의 타이틀 중 가장 권위가 있는 89년 그랑프리 대상 경주는 여러 가지로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경기인데 이 날의 경기에 대해서는 조금 이야기해두고 싶다. 경기가 있기 하루 전날인 12월 10일. 경기마다 항상 조심스럽게 경주를 하는 편인 나였는데 호사다마라더니 이날따라 앞서가던 기수의 반칙으로 경주 도중 시속 60킬로미터로 달리던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몸이 말에서 떨어져서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경기장에 처박히듯 떨어진 이후, 그 다음 상황은 기억을 하지 못했다. 디시 어렴풋이 정신이 들었을 때는 앰뷸런스에 실려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안심이 되며 맥이 풀렸다. 그때 내일이 시합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조심스럽게 팔 다리에 힘을 주어보았다. 다행히 골절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옆에 있던 간호사에게 앰뷸런스를 기수대기실로 돌려달라고 말했다. 온몸이 쑤시고 아팠지만 경기를 포기하라는 주위사람들의 말을 뿌리치기 위해 내색하지 않고 경기에 임했다. 애마 차돌에 기승한 순간부터 나는 속으로 외쳤다. ‘나는 반드시 우승한다.’ 차돌이 에게도 마음속으로 당부했다. ‘우리는 승리한다. 우승은 우리 것이다.’ 마음속으로 수없이 소리치며 출발 게이트가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출발 신호와 함께 12마리의 준마들이 결승선을 향해 치달리기 시작했다. 4코너를 돌아 직선 주로에 들어설 때까지도 내 앞에서는 서너 마리의 말들이 지축을 흔들 듯한 기세로 달리고 있었다. ‘지금부터 추격이다’라고 생각하고 말에 채찍을 가했고 차돌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질주해나갔다.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우승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온몸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지만 이때처럼 기쁘고도 감격스럽게 시상대에 오른 적도 없다. 시상대에서 트로피를 받아들고 관중들에게 답례인사를 할 때는 눈물을 가누지 못했다. 여러 차례의 우승으로 신문에 나의 사진과 기사가 실렸고 텔레비전에도 출연해보았으며 스타가 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자만하지 않고 더욱 훈련에 열중하여 새로운 기록에 도전하는 것이 부끄러움 없는 기수의 길을 가는 진정한 스타라는 것을 안다. 내 나이 벌써 서른이 넘었다. 이미 아내와 두 아이(요람, 비아)를 둔 가장이다. 내가 겪었던 시련이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누구도 그런 길을 가게하고 싶지는 않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 아이들은 가정이 주는 평화 속에서 자라서 이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이 되도록 도와주고 싶다. 끝으로 지금도 어려운 역경 속에서 굴하지 않고 설정된 목표를 향하여 정진하는 후배에게 당부하고 싶다. 아무리 사회가 각박하고 이기적일지라도 자신이 하고자 한다는 신념으로 일관한다면 사회는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을 깊이 새겨 주었으면 한다. 남들처럼 부모님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공부만 하는 것에 비하면 일찍부터 생계를 위해 혹은 학비를 위해 일해야 하고,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검정고시를 치러야 하는 것이 결코 행복한 일은 아니지만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얻은 것은 쉽게 얻은 행복보다 몇 배의 보람과 자신감을 주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도 말해두고 싶다. 내가 어려울 때 나를 도와주셨던 많은 분들, 기수로서 영예를 누릴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주신 박원선 조교사님, 친형처럼 나의 어려움을 함께 해주신 지용철 형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검정고시를 통해 만난 필우회 회원들의 안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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