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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녕하 르포기사 옴니버스 엮음작업 4.****
***권녕하 르포 옴니버스 4.***********
□아쉬운 역사(歷史)/ 서남해안의 성읍 마을
-전북 고창 모양성, 충남 서산 해미읍성, 전남 순천 낙안읍성-
▶취재협조/고창문화원,낙안향토전통문화연구소,해미읍성관리소.
■ 오후 늦은 시간. 빠뜻한 일정에 쫒기며 모양성(牟陽城)이 있는 전북 고창으로 달려간다. 사진촬영관계로 기후변화에 민감해진 신경은 잔영(殘影)과 대기상태를 수시로 살핀다.
사진 한 컷, 괜찮은 그림 한 장 얻기 위해 몇 십리나 되는 산길 덤불을 헤치고 올라갔어도, 끝내 안개가 걷히지 않아 툴툴대며 되돌아 선적이 어디 한 두 번일까… 마는, 오늘도 석양(夕陽)을 바라보며 열심히(?) 달려간다. 취재기자는 유관기관의 관련자를 만나 자료를 획득하고 현지 분위기를 체득한 후 이-슈를 잡아내는 비평적 안목이 중요하다. 따라서 우천불구, 주야장철 목적을 향해 강행군을 시도하기 십상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역시 떨어지는 햇살을 따라가며, 전북 고창읍을 향해 달려간다.
고창읍 시가지로 진입하면서 관공서가 밀집해 있는 지역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윽고 찾아낸 모양성은 읍내리에 고창읍성(高敞邑城)이란 명칭으로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성벽아래 경사면에 서서 눈을 치켜 떠 올려야, 다 보이는 옹성(壅城)의 위용. 평지가 아닌 얕은 산자락에 얹혀 읍내리 마을을 내려다 보는 모양성의 당당함. 커다란 암석으로 기초를 다지고 상층부로 갈수록 점차 작은 암석으로 석축을 쌓아올려 상층부를 구성해 전체적으로 안정된 축성방식의 모양성. 1453년(단종즉위년) 왜침을 막기위해 쌓은 성곽으로 호남의 내륙을 방어하기위해 남서해안의 물길이 가까운 곡창지대를 끼고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 중에서도 군사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적 145호로 지정된 모양성의 둘레는 1684m, 높이는 4~6m. 면적은 5만여평으로 동, 서, 북문과 3개의 옹성(壅城), 6개소의 치성(雉城)과 해자(垓字)등을 두루 갖춘 전략적 요충이었다. 윤달에 돌을 머리에 이고 성곽을 세 번 돌면 무병장수, 극락 승천한다는 전설(?)이 전해져 지금도 부녀자들의 답성(踏城)풍속이 남아있다.
성벽을 답성놀이 하듯 종종걸음으로 이곳저곳 부지런히 촬영하면서 떠오른 생각. 왜구(倭寇)의 노략질과 관의 극성스런 수탈이란 이중고에 시달리던 백성들. 잘 먹지도 못해 허약한 백의민족을 무시로 끌고 가 노예로 팔아넘기던 왜구들. 제 백성조차 지켜주지 못하고 강토마져 수시로 유린당하는 나라에서 흔해빠지고 힘 못쓰는 우리백성은 동남아 해상에서도 제일 싼 값으로 매매됐다는 역사적 사실이 엄존하는데, 이를 사료부족이라는 이유로 덮어버리는 작금 사학자들의 몰염치한 자가당착.
어이없는 역사왜곡은 결코 왜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고려 중기부터 무수히 침략을 당한 끝에 쌓아올린 우람한 바위덩어리는 차라리 한(恨)을 이고 답성을 하던 그 옛날 아낙네들의 절규이며 남정네들의 목숨인 것이다. 지금에 와서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문화재로, 관광자원으로, 인쇄물을 만들어 홍보하며 답성놀이로 전승되는 문화유산을 역사적 사실로 기꺼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남에게 내보이기 부끄러운 일은 되도록 감추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지사라지만, 처연해지는 심사는 어쩔 수 없다. 떨어지는 햇살이 아쉬워질 때쯤 성 밖 민가에서 ‘세월을 붙잡았다는 사람은 없다…’며 시니컬한 음색(音色)이 해자를 건너 성벽을 타넘고 있었다. 무상한 세월에 인생도 무상이라… 시간에 쫒기는 것은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풍상에 찌든 성벽도, 돌 틈마다 스며있을 민족의 염원도, 일세를 풍미했던 판소리도 시간에 쫒겨간다.
모양성 바로 옆, 보존관리가 잘돼있는 성벽 바로 옆에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의 생가(민속자료제39호)와 석조건물 국악당이 번듯하다. 동리선생은 민초의 소리인 판소리 12마당 중 6마당을 발굴, 복원하여 무형문화재의 수준까지 끌어올린 공로자이지만 이 고장사람들의 문화수준은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이제부터 이 고장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前고창문화원장을 역임했던 詩人김정웅선생을 만나본다. 저녁시간 급작스런 연락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응해주는 김선생. 현재 한국문협서울노원문협회장과 세계시연구회 회장으로 우리의 詩를 국제문화교류 형식으로 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 애쓰는 분으로 미당(未堂) 서정주님의 藝風을 이어받은 분이다. 근황을 물어보자 거두절미하면서…
“고창에 왔으면… 우선 고창삼미를 맛봐야제”(고창삼미는 풍천장어, 복분자주, 작설차이다)
선운사(禪雲寺) 가는 길옆으로 흘러내리는 풍천(풍천). 민물과 비닷물이 회유하는 곳에서 잡아 올린 장어가 금세 양념구이로 변해 맛갈스런 산나물과 함께 상에 올라온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베푸는 품격 높은 상차림과 젊은 청년의 공손한 시중드는 태도가 묘하게 어울려 사뭇 싱그럽게 보인다.
복분자(장미과)열매로 담근 복분주(覆盆酒)가 곁들인 정갈한 상차림. 강장에 특효라면서 극구만류에도 불구하고 풍천장어, 복분주로 보신(?)을 시키고야마는 인심. 넉넉한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지만 격조와 풍류는 결코 재물로 살 수 없는 것. 일설에, 요강이 엎어진다는 복분자주를 음미한 후 서해안 동호(冬湖)로 발길을 재촉한다. 낙조(落照)가 일품인 광활한 바닷가에서 천천히 석양 속으로 다가오는 고깃배의 회항(回港)을 음미하면서…
“남서해안은 왜구의 침략이 잦았고, 때론 점령당한 기간이 지역에 따라 몇 년씩 되는 곳도 있었기에 異민족과의 문화혼재가 전혀 없지는 않다”면서 “어느氏 가계에는 귀화를 희망한 왜구가 姓을 따간 기록까지 있다”고 한다.
우리 민족이 쇄락한 것은 바다를 등한이 여긴 때부터가 아닐까. 그 옛날, 고구려의 세력이 커지자 분가(分家)하여 한강 유역으로 이동해 앞선 문물로 토착세력을 정복하고, 점차 커지는 대륙세력에 밀려 사비(부여)에 도읍했던 百濟國.
해양 정복에 있어선 인근 동남해를 제패하며, 한동안 만주 요동의 서쪽과 중국 서해안 일대까지 지배, 경영하고 일본열도를 속국으로 삼았던 사실(史實)이 중국 측의 사서에 엄연히 있거늘 우리네 사서에는 인정하기를 꺼려하는 듯한 기가막힌 사대주의가 지금도 엄존해 있는지--- 걱정스럽다.
통일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張保皐)가, 청해(靑海․완도)에 진(鎭)을 설치하고 서해와 남해를 우리나라의 내해(內海)로 삼아 당(唐)과 왜(倭), 동지나해의 해상권을 장악했던 것도 서남해안의 물길을 손바닥 보듯 잘 알고 있던 백제의 후예들이 다시 일어난 것 아니겠는가.
자연을 정복하고 바다를 다스리던 우리민족의 진취적 기상의 발현은 그래도, 조선조 4대 세종대왕 때 까지만 해도 대마도(쓰시마)를 정벌하고 왜를 다스렸다는 사실(史實)로 나타나거늘…
■ 해미읍성(海美邑城)의 텅 빈 풀밭에서 느꼈던 아쉬움이 다시 되살아나고 있었다. 예산을 확보치 못해 아직 복원 ․ 발굴치 못한 유적을 필자에게 구술해야만 하는 관리소장의 안쓰런 표정에서, 무성한 여름날, 잡초와의 전쟁(?)만으로도 힘겨운 인력과 예산 -단순비교했을 때, 63년 부터 사적으로 지정된 해미읍성의 올 해 총사업비는 15억원, 83년에 사적으로 지정된 낙안읍성의 올 해 총사업비는 123억원- 으로, 그 옛날 서해안의 물길을 따라 침략해오던 왜구들을 방어하던 장졸들의 형편이, 상황을 알면서도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는 지금의 해미읍성 관리소장 보다 더 나을 것도 없었을 것 아니겠는가.
미온적인 대응으로 한양(漢陽)만 바라보던 관리들. 힘없는 백성들은 죽고 끌려가고 노예로 팔려가면서--- 백성들의 사무친 한(恨)이 해미읍 성벽에 담쟁이 덩쿨로 얽히었나. 치성(雉城)에 세워진 번듯한 누각(樓閣)의 대리석 주춧돌이 벌-건 핏빛으로 귀 떨어진 채 놓여있는 것조차 예사롭게 보이질 않는다.
임진왜란(조선조 14대 선조25년, 1592년부터 1598년, 선조 31년에 걸쳐 전후 7년간의 왜구의 침략전쟁)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성웅 이순신(李舜臣)장군이 그 당시 해미읍성 들판아래(지금은 논으로 변해버린)까지 들어온 바다물길을 통해 충청도의 요충인 해미읍성에서 한동안 거(?)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곳 엮시 왜구의 침탈에 시달리던 대표적인 고장 중의 하나였으리라.
조선조의 전형적인 읍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해미읍성은 조선조말(고종 3년,1866년) 천주교도들을 집단 학살한 장소로 다시 이름을 드날린다. 성벽 높이 5m. 성벽길이 1800m. 61500 여평의 해미읍성은 태종 7년(1407년)에 쌓았던 것을 성종 22년(1491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축성한 것으로 2개의 치성과 망루, 성벽 밖으로 해자를 팠던 뚜렷한 자국을 품은 채 민족의 애환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었다.
■ 밤길을 더듬어 국도를 따라 내장산을 타 넘는다. 구절양장처럼 구비진 한밤중 산길에 차량행렬이 끊이질 않는다. 잠 안자고 필자처럼 밤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 반가움과 시샘이 교차하는 가운데 동이 뿌옇게 터오는 새벽녘, 도착한 곳은 조계산(曹溪山) 선암사(仙巖寺) 입구의 깊은 숲 내음이 번지는 도로변이었다. 맑은 산새소리,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계류소리, 잎새를 스치는 바람소리 등이 어울린 새벽 숲은 한껏 생명의 환희를 드러내놓은채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지금부터 가얄 곳은 낙안읍성(樂安邑城). 토성(土城)이었던 것을 임경업(林慶業)장군이 군수로 있을 때 석성(石城)으로 중수(重修․조선조 인조6년, 1628년)했으며, 사적 제302호. 성곽길이 1410m. 높이 4~5m. 41000평의 면적으로 성내에는 문화재와 중요민속가옥으로 지정된 초가집이 보존돼 있다. 따라서 낙안읍성은 경주 양동마을, 안동 하회마을, 온양 외암리 마을과 함께 민속마을로서의 보전가치와 성가가 높은 곳이다.
부족국가시대부터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듯 낙안읍성 동문밖에는 고인돌이 산재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등의 전적(典籍)에 의하면 마한(馬韓)의 옛터로 기록돼 있다.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면 천혜의 자연조건을 두루 갖춘 명당 아니겠는가. 풍수지리에서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의 명당이며 도선국사도 ‘하늘이 감추어 두고 땅이 숨겨놓은 곳’으로 사방에 버릴 것이 없는 작은 혈맥이 무수하게 있다는 낙안. 고려태조 왕건의 황후 장화황후(莊和皇后 ․ 고려 2대 혜종의 어머니 ․ 樂安吳氏)가 태어난 고장이기도하다.
오공치(蜈蚣峙)를 넘어 낙안읍성(樂安邑城)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산비탈에 올라서니 밤새워 들달렸던 고단함과 시름이 한순간에 날아간다. 멀-리 남쪽으로 바라보이는 제석산 뒷편 뾰족봉우리(尖山)가 옷자락이 걸릴정도로 가깝게 보이고, 어쩌면 이렇게도 산속 깊은 곳 한복판에, 안락한 평야가 펼쳐있을까.
평양, 청주, 무주, 공주, 안동과 함께 행주형(行舟形)에 해당된다는 낙안읍성. 안온하면서도 풍성해 보이는 낙안읍성의 풍광에 찬탄하면서 송상수氏를 찿아 나선다. 그는 향토전통문화연구소장이며 낙안민속문화축제 제전위원장이고 축제기간(매년 5월,가정의 달)중 행사로 민속혼례식(2백여쌍)을 무료로 치러주는 등 우리민족의 전통문화와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낙안을 전국 제1의 관광민속문화마을로 일궈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토종(?) 일꾼이다.
그것도 사재를 털어가면서 불우이웃돕기, 고아원, 경로당, 결손가정 어린이돕기 등 봉사활동을 통해 이웃과 기쁨을 나누며 보람을 찿는 성실한 사람이다.
생활한복을 보급하는 그의 집으로 찿아들자 흙을 만지다 말고 화들짝 놀란 것처럼 반긴다. 전남 곡성의 석곡(石谷)에서 짠 품질좋은 삼베로 지은 ‘돌실나이’ 한복. 색감이 부드럽고 실용적으로 보인다. 마당 한 옆에는 털빛깔이 깨끗한 말과 망아지. 전통혼례식때와 관광객을 위해 키우는 말(馬)이다.
1994년도 부터 낙안민속문화축제가 있었다던데…
“제1회였지요. 우리민족의 전통문화를 축제형식을 빌어 부활시키고 낙안읍성을 관광자원화하여 조상들의 호국정신과 또한 전래농촌의 모습과 풍속, 행사기간 중 실제로 전통혼례식을 보여줌으로서 잊혀져가는 우리문화와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함이지요”
그는 이 행사를 위해 5천만원 이상의 사재를 쏱아부었다. 혼례식을 치루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18쌍의 신랑신부들. 지체장애로 집안의 반대에 부딪쳐 올리지 못한 결혼식을 낙안읍성에서 올리고 울음을 터뜨리는 2쌍의 부부. 경상도에서도 찿아 온 2쌍 등 매년 20쌍 정도 무료혼례식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그는 이제는, '앞서 혼례를 올렸던 사람들이 자원봉사자로 변해 매년 전통혼례식을 도우러 찿아와 커다란 보람'을 느낀단다.
그늘지고 소외받는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아픔을 나누어지고 기뻐하는 사람 송상수씨. 이런 사람이 도시마다 열사람씩만 있어도… 하는 생각 끝에 “義人 열사람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던 성경구절이 떠올라 저절로 탄식이 새어나온다. 언행일치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임경업장군의 호국정신을 사모하고, 3 ․ 1 독립만세운동의 현장에서 그날의 감격을 실제 재현해 보고자하는 송상수씨의 정신은 낙안읍성을 외세의 물결속에서 필히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마다 초가지붕에 박넝쿨이 넘실대고 어머니 품속같은 옛 고향 정취가 물씬 풍겨나는 곳. 우리 것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열의가 살아 숨쉬는 곳. 먹는 것, 입는 것, 생각하는 것조차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외래문화에 색바랜 지금, 송상수씨는 160㎝정도의 체구에서 장사의 용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우리의 것들이 살아야 우리가 살 수 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