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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2코스-4(20210123)
깡깡이예술마을-영도대교-유라리광장-남포역
1.깡깡이마을로의 시간 여행
(3부에서 이어짐)
‘남항서로’로 나갔다. 오후 4시 11분, 영도대교 건너 목적지가 눈앞에 보이니 오후 5시 제한시각에 충분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제한시각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졌다. 그러나 남은 거리에 어떤 관심을 보이느냐에 따라 걸리는 시간은 달라진다. 관심을 줄이더라도 들를 곳은 찾아갈 마음을 먹으며 발걸음에 속도를 붙인다. 남항서로는 곧장 뻗어서 그 끝에서 태종로와 만난다. 남파랑 2코스는 그 중간쯤에서 대평로를 따라 깡깡이예술마을로 이어진다.
국제 선용품 유통센터 빌딩 동쪽 물양장(物揚場, 소형선 부두)에 소형 선박들이 정박해 있는 풍경이 아늑하다. 그 풍경에 녹아들어 나도 저곳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평동에는 2개의 소형선 부두가 있다고 하는데 그 하나는 깡깡이마을 앞에 있다고 한다. 국제선용품 유통센터를 지나 잠시 헷갈렸다. 깡깡이예술마을 방향 표지가 서쪽으로 되어 있다. ‘어라, 이게 아니지.’ 그래도 확인을 위해 남항배수펌프장과 한국전력 방향으로 달려가, 위치를 물으니, 진행 방향에 깡깡이마을이 있다고 알려준다. 실수한 일이 떠올라 소심해진 것인지 신중하려고 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대평로 갈림길에 세워진 깡깡이예술마을0.5km 이정목을 확인하면서 방금 위치 확인을 위해 뒤돌아갔다가 온 일에 화가 났다. ‘참, 멍청한 짓을 했구나.’
대평로에 들어서 대평로를 따라 무엇을 살필 겨를도 없이 앞서가는 두 여성 회원 뒤를 맹목적으로 따라 걸었다. 맹목은 자신의 의지가 결여된 더 큰 잘못을 저지르거나 엉뚱한 짓을 하게 될 수 있다. 내 의지를 발동하여 걸어갔더라면 대평로에서 45번 길로 들어설 때 깡깡이예술마을의 중심축을 살폈을 것이다. 그러나 의지 없이 맹목으로 45번 길을 좇아가면서 중심축을 살피지 못했다. 아마도 제한시각의 압박감에 쫓겨 허둥댄 것이 가장 큰 탓일 것이다.
대평남로 골목으로 돌아들어 사천고물상을 지나 해동마린 써비스 표지판 옆의, 벽에 남파랑길 붉은 표지가 붙은 대평로 53번 길로 들어섰다. 이 골목길 끝 지점 사거리에서 대평로와 교차하여 대평북로로 들어서면, 위에 가림막이 설치된 ‘우리조선(주)’ 담벽에 ‘대평동 깡깡이예술마을 거리박물관’이라고 쓰인 곳이 나온다. 가장 먼저, 배의 수리과정 설명도와 한눈에 보는 배의 구조가 묘사된 그림과 만난다. 뒤이어, 작가 심점환의 ‘깡깡이마을 수리조선소의 변천사’ 작품을 만나 시대를 거슬러 오르는 깡깡이마을의 시간여행을 시작한다.
‘1945년 이후’-미군에 의해 접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관되어 민간에 불하됨.
‘1930년대’-조선총독부 ‘전시계획조선(戰時計劃造船)’에 참가하여 전쟁 물자 운송과 병력 동원을 위한 선박 건조.
‘1920년대’-대풍포 매축 공사 후 현 우리조선(주) 위치에 자리 잡음. 연간 약 30척 건조, 70척 수리. 선박용 엔진 개발에 착수하여 1925년경 중유(重油)를 사용하는 엔진 개발 성공.
‘1910년대’-현재 영도 대평초등학교 자리에서 목선을 만드는 ‘다나카 조선소’ 설립.
‘1887년 이후’-일본 고베 출신 다나카 와카지로가 자갈치 해안에서 목선 제조업 시작
이 작품은 시대별로 이렇게 설명글을 달고, 사진 그림을 제시한 전시 작품이다. 설명안내판에 이 작품에 대한 설명이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1890년대 나룻배가 다니던 시절부터 해방 후 현재까지 깡깡이마을 조선소의 변천사를 알기 쉽게 표현하였다. 레이저커팅이 된 스테인레스 철판 이미지 위에 우레탄 페인트로 세부적인 형상을 그렸다. 그림에 사용된 이미지들은 신문이나 관련 매체 등에 실린 당시의 사진들로, 너무 흐릿해 형상을 알 수 없는 부분들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보충되었다. 과거의 흑백 톤으로부터 현대로 올수록 칼라를 가미하여 전체적인 분위기에 시간성을 부여하였다.”(설명안내판에서)
이 작품을 통해 1890년대 나룻배가 다니던 시절부터 해방 후까지 깡깡이마을의 수리조선소 변천 역사를 그림으로 한눈에 살필 수 있다. 뒤이어 작가 우정의 ‘철로 소리를 만들다’ 작품, 다양한 모습을 한 8개의 망치들이 걸려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깡깡이마을의 기억을 되살려 봅니다. 그 기억의 모습들은 사라져 가지만 깡깡이 망치 소리로 긴 여운을 남기려 합니다. 그 여운을 철에 담아 봅니다.”
이 작품을 보면 소리가 들려온다. 깡~깡~깡~ 수리조선소에서 아주머니들이 배 표면에 슨 녹과 조개 같은 이물질들이 달라붙은 것을 떼어내기 위해 망치질하던 그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 어려운 시대를 살던 아주머니들의 모습도 떠오른다. 깡깡이마을의 시간여행은, 예술작품을 통한 상상의 세계에서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 기록으로 마무리된다. <대평동 깡깡이예술마을 거리박물관> 설명안내판 ‘대한민국 최초로 엔진을 장착한 목선을 만든 ‘다나카 조선소’가 세워진 곳‘을 읽으며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한다.
“1876년 부산항 개항 이후 일본 어선들은 조선(朝鮮)의 해안까지 진출해 고기를 잡았고, 영도는 어업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특히 일본인들이 바람을 피하거나 기다리기 적합했던 대풍포(待風浦, 깡깡이마을의 옛 이름)를 어선을 수리하고 식수를 공급 받는 곳으로 이용하면서 깡깡이마을에는 조선소나 선박수리관련업체들이 집중적으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1887년 고베 출신 일본인 조선(操船)사업자인 다나카 와카지로(田中若次郞)는 자갈치 해안에서 목선 제조업으로 출발하여 1912년 현재 영도 대평초등학교 자리에 목선을 만드는 ‘다나카 조선소’를 설립했고, 대풍포 일대가 매축된 후 현 우리조선(주) 자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다나카 조선소’를 대한민국 근대 조선(操船)산업의 발상지로 보는 이유는 바람이나 증기로 추진력을 얻는 방식이 아닌 엔진으로 동력을 얻는 선박을 최초로 개발하고 보급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다나카 조선소’ 자리는 ‘대양조선철공’, ‘구일조선’, ‘남양조선’, ‘유진조선’, ‘에스엔케이조선’으로 사업자에 따라 이름이 바뀌었다가 현재는 ‘우리조선’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다나카 조선소’를 비롯해 대평동에 있던 조선소를 불하받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체적인 기술개발을 통해 깡깡이마을을 7~80년대 수리조선업의 메카로 성장시켰습니다.“
(참고) 다나카 와카지로(田中若次郞)의 아들 다나카 키요시(田中淸)가 1897년 부산으로 건너와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지금의 대평초등학교 자리를 거치지 않고 1912년 현 우리조선(주) 자리에 ‘다나카조선철공소’를 설립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자세한 내용은 <부산대관>, 469pg, 다나카조선철공소 부분 참고)
-‘대한민국 최초로 엔진을 장착한 목선을 만든 ‘다나카 조선소’가 세워진 곳‘ 설명안내판
‘깡깡이예술마을 거리박물관’의 마을풍경과 마을역사를 담은 작품 그리고 깡깡이마을의 기록을 읽은 뒤 깡깡이마을의 시간여행은 ‘우리조선(주)’ 옆 물양장(物揚場, 소형선 부두)과 깡깡이안내센터, 대동대교맨션, 남항서로와 만나는 대평북로 입구의 ‘근대수리조선 1번지 대평동 깡깡이예술마을’ 이정목이 세워진 곳까지 이어진다. 지금 걸어온 이곳은 본래 영도와 떨어져 있던 섬(島)으로 대풍포구(待風浦口)라고 불리던 포구였는데, 일제강점기 때 1916년부터 1926년까지 포구를 매축하여 수리조선소들이 들어서면서 깡깡이마을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남파랑길은 ‘근대수리조선 1번지 대평동 깡깡이예술마을’ 이정목 직전에 대평북로에서 왼쪽 대평로 6번 길로 꺾어 들어간다. 이 길 끝에 깡깡이예술마을 조형물, ‘영도 대풍포 매축지 기념비’, ‘영도 근대역사 흔적길 종합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1983년 2월 부산시에서 세운 매축지 기념비에 “이 지역은 1926년까지는 포구였으며 일본인이 매축권을 얻어 현 조선공사와 영도대교 사이의 입구를 포함한 대평동 남항동 일대의 포구를 메워 시가지를 만든 곳이다. 매축면적 132066평방미터, 매축기간 1916년부터 1926년, 매축범위 영도구 대평동 남항동 일대”라고 적혀 있다. 이곳 지명의 유래를 알아보니 이렇다. “영도구 대평동은 본래 바람이 이는 것처럼 기운차게 일어나는 뜻인 풍발포(風發浦) 혹은 거센 풍랑을 피하는 어선들이 머물던 장소라는 대풍포(待風浦)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후 파도와 바람이 잔잔해지기를 바라는 뜻을 담아 풍(風)을 평(平)으로 바꾸어 대평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대풍포 매축지 기념비’에서 왼쪽으로 꺾어 대평로 50번 길로 들어가 조금 걸으면 오른쪽으로 꺾이는 곳에 ‘대평동물양장’ 이정목이 있고, 오른쪽으로 돌아나가면 남항 아래쪽 천마산, 건너편의 자갈치시장 갈매기 조형물, 그 뒤 오른쪽 시약산과 구덕산, 오른쪽으로 용두산의 부산타워, 남항 위쪽 영도대교와 광복동 롯데몰 풍경이 활짝 펼쳐진다. 부산남항의 아름다움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 영도대교를 건너면 목적지에 이른다. 오후 4시 40분, ‘휴~ 제한시각 5시 이전에 목적지에 도착하겠군. 좀 더 침착했어도 되는데 너무 불안감에 떨었어. 아니지, 그 상황에서는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겠지.“
태종로 영도대교로 올라섰다. 오른쪽 영도대교 남단 입구에 ‘굳세어라 금순아’ 현인 노래비와 현인 동상, 현인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굳세어라, 금순아’, 6.25 전쟁 흥남철수 때 이북에서 부산으로 내려온 실향민의 슬픔과 소망을 담은 이 노래는 가슴을 울리는 절창이다. 분단의 불행과 아픔을 딛고 대한민국은 이 시대에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대한민국은 지금도 분단국이다.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줄기차게 노력해야 한다. 1951년 전쟁과 빈곤의 불행한 시대로부터 현재의 발전과 번영의 시대로의 시간여행을 감동적으로 영상화한 영화 ‘국제시장’은 현인의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국제시장과 영도대교가 내려다보이는, 국제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성공한 어느 실향민의 집이 현재 배경이다.
영도대교를 걸어간다. 영화의 장면, 장면들이 생각난다.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를 불러본다. 1.4후퇴 때 월남한, 일가친척 없는 실향민이 고향을 그리워한다. 그는 그때 헤어진 여동생 금순이를 애타게 찾고 있다. 초저녁 영도다리 난간 위로 떠오른 초승달은 그의 외로움을 한없이 아프게 자극한다. 노래와 영화가 합쳐져 슬픔과 희망이 교차한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분단과 전쟁의 비극 속에서 실향민의 이별과 망향(望鄕)을 노래한다. 이제 이 노래를 통일과 화합의 노래로 바꾸어 부를 시대가 어서 와야 한다. 영도대교에서 이 환희의 노래를 부를 그날을 꿈꾸며 영도대교를 건넜다.
영도대교 아래, 이 꿈의 실현을 소망한 유라리 광장으로 내려가면서 영도대교 북단 입구 표석 아래에 붙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6호 영도대교 연혁과 설명을 살폈다.
“영도대교는 1934년 11월 23일 개통되었다. 다리 전체 길이는 214.63m, 폭은 18m, 도개부 길이는 31.3m, 폭 18m였다. 개통 당시에는 부산대교라고 불렀다. 이 다리의 개통으로 영도와 부산이 찻길과 전찻길로 연결되었다. 영도대교는 부산뿐 아니라 전국에서도 이름난 장소였다. 한국전쟁 때에는 부산에 피난온 실향민들이 잃어버린 혈육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로 이용하면서 전쟁의 아름과 만남의 장소라는 이미지가 겹쳐졌다.
1980년 1월 30일 새로운 교량이 건설되자 거기를 부산대교라고 부르면서 그때부터 영도대교라고 바꾸어 불렀다. 2006년 11월 25일 부산광역시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교량의 노후화와 교통량의 증가로 철거하고 2013년 11월 27일 예전과 같은 도개교로 복원 개통하였다.
새로운 영도대교는 길이 214.63m, 폭 25.3m이며, 도개부 길이 31.3m이다. 도개부의 무게는 590톤이며 4분 30여초에 58도로 도개한다.“
유라리 광장으로 내려간다. 꿈은 실현된다. 꿈, 통일과 화합과 평화의 꿈, 이 꿈의 실현을 표현한 광장이 영도대교 아래 조성되어 있다. 이름은 유라리 광장이다. 유라리 광장은 공사 중이었다. 공사 자재로 인하여 피난민 가족을 형상한 조형물을 전체적으로 감상할 수 없다. ‘영도다리! 거~서 꼭 만나재이~’ 대화와 그 아래 기록 사진들이 붙어있고, 2남 2녀를 데리고 떠나는 피난가족의 조형물이 이별의 아픔과 함께 가족 상봉의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 엄마는 큰 보따리를 이고서 작은아들을 업고 울고 있는 작은딸 손을 잡고 있다. 맏딸과 큰아들은 작은 보퉁이를 안고 있는데 아버지는 큰아들 뒤에서 아이를 보내는 듯 오른손을 아이 어깨 쪽으로 내밀고 있다. 보건데 엄마와 자식 네 아이들은 떠나고 아버지는 남아 있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집안 뒷정리를 끝내고 곧이어 아버지도 뒤따라 떠날 테니 영도다리에서 꼭 만나자고 약속하는 모습 같다.
유라리광장 표석은 건축자재가 쌓여 기단돌이 가려져 있다. 표석 아래 기단돌에 유라리 광장을 조성한 이유를 설명하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그 글을 볼 수 없다. “유라시아 대륙의 국도 7호선의 시점과 종점인 이곳을 유럽의 ‘유’와 아시아의 ‘라(아)’, 그리고 사람, 마을, 모여 즐겨 노는 소리를 뜻하는 ‘리(이)’의 조합으로 유럽과 아시아인이 함께 어울려 찾고 즐기는 장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2015년 11월 21일 부산광역시 중구청장” 평화와 화합을 펼치는 장소 유라리 광장,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국도 7호선(부산~함경북도 온성군 유덕면, 부산~온성선이라고도 함) 시점과 종점인 이곳에 광장을 조성한다고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7호선 국도의 유라시아의 시작점과 종점이 유라리 광장이라면, 철도의 유라시아의 시점과 종점은 부산역이다. 부산역 광장에 제2의 유라리 광장을 조성하면 그 의미가 더욱 빛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라리 광장을 떠나 영도대교 위로 올라섰다. 영도대교 버스정류장 옆에 남파랑길 3코스 안내도가 있다. 이곳이 남파랑길 2코스의 종점이요, 3코스의 시작점이다. 숨이 가쁘게 절영마처럼 달려왔다. 해안과 바다의 아름다운 풍경에 홈빡 취했다. 민족이 겪은 삶의 애환, 고통과 비극을 극복해 온 역사의 시간여행에서 꿈의 소망과 그 꿈의 실현을 위한 노력에 가슴이 벅찼다.
(4부 끝)
2. 걸은 과정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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