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오사카 출신인 미이케 다카시는 이제 막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중견감독이다. 하지만 비디오 영화인 V시네마를 포함해 본격적인 연출을 맡기 시작한 것은 1991년, 그러니까 불과 10년 남짓이다. 짧다면 짧을 수 있는 그 기간동안 미이케 다카시의 영화는 비디오 영화를 포함해 50편에 다다르고 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가공할 편수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는 언제나 장르적 쾌감과 영화적 재미를 놓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세상사에 흔들리지 않는 불혹의 나이라지만 그의 영화는 언제나 새로운 상상력과 에너지로 가득하다. 1995년 <신주쿠 흑사회>로 극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그는 <극도 흑사회>(97) <일본 흑사회>(1999) 등 이른바 ‘흑사회 3부작’과 <중국의 조인>(1998) <데드 오어 얼라이브> 3부작 등의 화제작들을 만들어 왔다. 야쿠자 이야기를 엽기적인 상상력과 판타스틱한 감각으로 풀어가는 그는 영화는 특히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1998년 타임지에서 선정한 ‘장래가 주목되는 감독’ 10위엔 오우삼과 함께 선정되기도 했다.
이번에 부천에서 상영되는 작품은 1995년작 <레이니 독>과 1998년작 <블루스 하프>, <중국의 조인>, 1999년작 <데드 오어 얼라이브>, 2001년 <이치 더 킬러> <아지테이터> 그리고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을 리메이크한 <카타쿠리가(家)의 행복> 등 총 7편이다. 이중 <레이니 독>은 ‘흑사회 3부작’의 중간에 해당하는 <극도 흑사회>의 영문 제목이다. 50편에 육박하는 영화 중 7편만으로 그의 전부를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비교적 최근작인 이 영화들에서 최근의 그의 행보를 직접 확인할 수는 있을 것이다.
장르의 파괴, 과잉의 미학
<데드 오어 얼라이브>는 <일본 흑사회> <오디션> 등과 함께 미이케 다카시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일본에서 개봉돼 컬트적인 인기를 누렸던 이 영화는 특히 그의 재능과 성향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영화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놀라운 속도감으로 시작한다. 뒤를 돌아보고 하나, 둘 숫자를 세는 두 남자. 이윽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들을 카메라는 정신없이 따라간다. 강렬한 하드록과 현란한 신주쿠의 풍경, 여인의 스트립쇼, 무서운 속도로 라면을 먹는 중국 마피아와 마약을 먹어치우는 야쿠자의 모습이 교차된다. 수십 그릇의 라면을 먹어치우다 마치 폭발하듯 총을 맞고 면가락을 뿜어내는 남자. 이렇게 시작된 영화는 마침내 지구마저 날려버린다. 이렇듯 지독한 과잉과 파괴적인 상상력, 그리고 모든 것을 탕진하고 소비하는데서 오는 쾌감이야말로 미이케 다카시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일 것이다.
<오디션>이 그랬듯이 그의 영화는 대부분 하나의 장르로 한정지어 말하기가 어렵다. 이 영화 <데드 오어 얼라이브>나 <표류가> <이치, 더 킬러> 등도 마찬가지다. 전형적인 야쿠자 영화나 범죄물로 출발하는 이 영화들은 어느 순간 코미디와 멜로, 로드 무비 등 온갖 장르가 뒤섞이게 된다. <이치, 더 킬러>에서 이치는 평소에는 나약한 울보지만 일종의 작업복인 고무 옷을 입는 순간 무시무시한 킬러로 변신한다. 예의 미이케 다카시 영화답게 이치의 공격에 사람의 몸이 두 토막으로 쫙 갈라지며 내장이 와르륵 쏟아져 내린다. 그런데, 그는 킬러다운 비정한 모습이 아니라 말 그대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사람을 반으로 가르는 것이다.(절대 <크라잉 프리맨>류의 비정함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을 접하는 순간 관객들은 피칠갑한 화면에 소리를 질러야 할까, 아니면 이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 실소를 머금어야 할까? 미이케 다카시의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런 점이다. 그의 영화는 분명 사람의 오감을 자극하고 불쾌하게 만들지만 어느 순간 비실비실 베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웃음과 공포의 경계가 모호한 그의 영화는 대부분 저예산 영화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천국에서 온 사람들> 같은 경우는 해외 로케까지 감행한 대규모 제작블록버스터다. 하지만 저예산이든 블록버스터든, 장르 영화든 아니든, 혹은 작가영화든 아니든, 미이케 다카시는 고의적으로 영화를 가볍고 혐오스러우며 싸구려처럼 보이게 만든다. <표류가>의 그 유명한 닭 매트릭스 장면을 떠올려 보자. <매트릭스>에서 네오와 요원이 인류의 미래를 걸고 싸우던 장면에 쓰인 그 특수효과가 이 영화에 이르면 고작 닭싸움에 사용된다. 일부러 황당무계하게 사용하는 특수효과의 황망한 효과는 총을 맞고 면가락을 뿜어내는 엽기적인 장면에 사용된 <데드 오어 얼라이브>의 특수효과를 떠올린다면 더 이상 할말이 없어질 정도다.
무국적의 세계, 일본 밖의 아시아
그의 영화는 순수한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이나 혼혈을 주인공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대부분 일본계 중국인이거나 일본과 혼혈인 다른 외국인이다(반대로 <레이니 독>처럼 대만으로 이주한 야쿠자가 주인공인 경우도 있다). 그들은 동경에서 살아가지만 그곳은 아시아인이 넘실거리는 무국적의 공간이며 중국어, 일본어, 포르투갈어, 영어 등 다양한 언어들과 함께 일본이라는 단일한 민족, 언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이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일본인도 그렇다고 중국인도 아닌,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중간자에 다름 아니다.
이들은 대부분 일본을 탈출하고자 하지만 탈출 직전 허무하게 죽어버린다. 일본도 브라질도 그 어느 곳도 아닌 배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일본 흑사회>의 주인공들처럼, 일본을 떠나 브라질로 향하기 직전 바닷가에서 죽는 <표류가>의 주인공들처럼, 그의 영화는 끝도 한도 없을 정도로 무한한 속도감으로 치닫다 어느 순간 허무하게 끝을 맺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해결점을 찾을 수 없는 일본사회에 대한 자조 섞인 풍자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일본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질주하다 황량한 황야에서 서로의 심장을 빼 던지는 <데드 오어 얼라이브>의 주인공들처럼 그렇게 탕진하고 자폭하는 길밖에 없다는 자조 말이다. 하지만, 최근작 <이치, 더 킬러> 이르면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감각은 더 이상 발견하기 어려운 듯하다. 그 어느 영화보다 엽기적인 상황과 유머가 넘실대고 만화적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저 그것뿐이다. 일본의 평론가 하마노 치히로의 말처럼 “이 영화에는 <데드 오어 얼라이브>에서처럼 모든 상황을 원점으로 돌릴 것 같은 쾌감이 없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 속에 스며든 독을 토해 낼 공간도 없이, 그저 웃어 버리라는 차가운 목소리만이 들려 오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세기, 일본영화를 대표하는 새로운 기운으로 각광받으며 숨가쁘게 달려온 미이케 다카시. 이제 그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