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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의 애장품. ① 1966년 당시 일본에서 영화 ‘고완’(국내 미개봉)을 제작하던 남편 최무룡이 김지미씨에게 선물한 억대 가격의 기모노. 김씨가 이기웅 감독의 영화 ‘요화 배정자’에 출연하게 된 것을 기념해 최씨가 일본 최고 장인에게 주문했다. ② 오래 신어 밑바닥이 닳아 벗겨진 찰스 주르당 하이힐. ③ 손때 묻은 미용 도구들. ④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선물받은 손목시계. ⑤ 그녀의 담배 케이스와 라이터. |
익히 알려진 대로 김지미는 네 번 결혼, 네 번 이혼했다. 첫 결혼은 57년 데뷔한 이듬해인 58년, 출세작 ‘별아 내 가슴에’의 홍성기 감독과였다. 당시 김지미의 나이는 18살. 홍 감독은 12살 연상이었다. 홍 감독은 연기 경험이 일천한 김지미를 연기자로 다듬고 스타성과 매력을 극대화했다. 두 콤비의 작품이 흥행가도를 달리며 자연스레 결혼으로 이어졌으나 결혼생활은 4년 만에 파국을 맞았다. 어린 아내의 치솟는 인기에 비해 남편의 활동은 주춤했던 게 큰 이유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 홍 감독은 “하루벌이를 하는 지게꾼 신세”, 김지미는 “어차피 맞을 소나기”라고 기억했다. 편당 30만원의 출연료를 받던 김지미는 집 두 채 값인 600만원을 남편의 제작비로 대주었으나 재기를 돕진 못했다. 게다가 김지미는 바쁜 스케줄로 일주일에 한두 번 집에 들어가는 상황이었다.
63년 재혼한 상대는 동료배우인 최무룡. 두 사람은 홍 감독의 영화 ‘길은 멀어도’(1960)에서 처음 만났다. 김지미는 이혼한 상태였으나 최무룡은 기혼남이라 간통죄로 고소되는 등 스캔들이 터졌다. 김지미가 집을 팔아 위자료를 마련해 강효실에게 건네주며 소 취하에 이른 것으로 알려진다. 최무룡은 결혼 이후 감독으로 변신해 김지미를 위한 영화를 여러 편 만들었다. 비비언 리 주연의 ‘애수’를 번안한 ‘애수’에서는 원작의 극중 이름 마이라까지 배역 이름으로 따올 정도였다.
두 번째 결혼은 6년간 지속됐다. 김지미는 최무룡과의 사이에 1남1녀를 낳았으나 어려서 아들을 잃었다. 최무룡이 한·일 합작영화 ‘고안’의 개봉 불발로 빚더미에 앉는 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69년 두사람은 갈라섰다. 그 유명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을 남기고서다.
다음 상대는 톱가수 나훈아. 당시로서는 연하남과의 스캔들은 쇼킹 그 자체였다. 기자회견을 열어 열애를 인정한 두 사람은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김지미가 오랜 공백을 깨고 79년 ‘을화’로 컴백한 이듬해 4년간의 결혼생활을 마무리했다.
마지막 남편은 91년 결혼한 심장전문의 이종구 박사다. 김지미 어머니의 강력한 권유 때문이다. 김지미는 네 번째 이혼 후 도미해 첫 번째,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두 딸 홍경임(49), 최영숙(42)씨와 살고 있다.
예쁘기만 한게 아니라 독하고 강해서 살아 남았어"
●너무 오랜만에 한국을 찾으셨습니다. 미국 생활은 어떠셨어요(2002년 도미한 그녀는 홍성기·최무룡 두 남편 사이에서 얻은 두 딸, 손자들과 함께 LA에 거주해 왔다). “그동안 개인적으로는 몇 차례 한국을 다녀갔지. 영화계에 나선 것은 8년 만이고. 미국 생활은 행복해요. 17세 때 데뷔해 700편이라는 말도 안 되는 다작을 하다 보니 진정한 의미의 가정생활이 없었어요. 생애 전부를 영화랑 더불어 살았지. 번번한 가족여행 가본 적 없고, 자식을 무릎 위에 앉히고 어르는 즐거움도 몰랐고. 이제야 가족과 사는 평범한 기쁨을, 내 자식이 아니라 손자·손녀를 통해서 느껴요.” ●한국을 떠나실 때, 이른바 영화계 신구세력 갈등의 결과로, 퇴출되다시피 쫓겨간 측면이 있지요. “김대중 시대부터 우리 영화계가 갑자기 정치적 소용돌이에 말렸지. 우스운 얘기예요. 난 지금도 이해가 안 가. 왜 영화인들이 정권 바뀔 때마다 휘둘려야 하는지. 국가가 중요하고 영화인도 국민인 건 맞지만, 영화에 대한 마음 하나는 다 똑같은 거 아녜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나나 선배들을 그냥 보수로 밀어붙여 버렸어. 보수다 진보다 하는데, 실체 없이 한순간 후배들이 ‘헷가닥’한 거라고 봐.” ●부산영화제 회고전을 계기로 원로 영화인들이 부산을 찾은 것은 영화계 신구세대의 화해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글쎄,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까. 이번에도 난 똑같은 얘기만 했어. 영화예술이라는 본연의 자세에서 훌륭한 작품을 남기는 게, 그게 제일 좋은 거 아니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다, 감독이다, 이런 게 중요하지. 대표 정치꾼, 운동가 이런 타이틀을 원하는 거냐고. 그래도 후배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주는 것 같아. 다 마음을 털고 자기가 추구하는 완성도 있는 영화 만들면서 살아가기를 바라요.” ●명예의 전당에 ‘화려한 여배우’라는 타이틀로 헌액되셨습니다(고 신상옥 감독, 고 유현목 감독, 배우 황정순에 이어 네 번째다. 황정순에게는 ‘위대한 배우’라는 타이틀이 주어졌다).
●회고전은 관객 반응이 아주 뜨거웠습니다. “회고전이란 게 보통 썰렁하게 마련인데 전회 매진이라 깜짝 놀랐어. ‘을화’ ‘길소뜸’ ‘티켓’은 직접 참석해 ‘관객과의 대화’도 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아직도 김지미가 한국 관객들 속에 살아있구나, 했지. 하루는 파라다이스호텔 근처 커피숍에 앉아 있는데 여학생 둘이 ‘어머 선생님’ 이러면서 몸둘 바를 몰라 해. 기특해서 ‘학생, 나 알아?’ 했더니 ‘불나비’를 봤다는 거야. 22세, 23세라기에 ‘내 손녀딸 같구나’ 하면서 같이 사진을 찍어줬지. 고전영화가 평가받는 것, 그게 한국영화의 희망이에요.” ●회고전을 통해 새롭게 느껴진 작품이 있습니까.
●‘티켓’의 민 마담은 걸걸한 목소리, 인생의 풍파를 다 겪은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가 딱 김지미라는 평이 있습니다. “글쎄, 내가 좀 세지. 그러니까 살아남았고. 그런 점은 닮은 거 같기도 해.” ●데뷔 얘기를 해볼까요. 당시 최은희·황정순·문정숙·도금봉 등 대부분의 여배우가 연극이나 악극단 출신인 것과 달리, 덕성여고생 때 명동에서 캐스팅되셨죠? 길거리 캐스팅의 원조랄까요. “우리 집안이 좀 학력이 좋았어. 내가 8남매 중 일곱째인데 언니·오빠가 서울대 다니고 이화고녀 다니는 언니도 있고. 김기영 감독이 하도 쫓아다녀서 배우가 됐지만. 오빠랑 미국 유학 가려고 했었어. 우리 가족이 나 때문에 고생 많이 했지. 스캔들 날 때마다 온 집안이 다 뒤집히고, 그건 참 미안해요. 내 배우 생활 때문에 가족들 희생시킨 거.” ●데뷔작 ‘황혼열차’도 인기였지만 역시 스타덤에 오른 영화는 홍성기 감독의 ‘별아 내 가슴에’ 아닌가요. “‘황혼열차’도 인기는 많았는데, 김기영 감독이 작품만큼 연기 지도도 까다롭게 해. 구체적인 디렉션을 잘 안 주고. 반면 홍 감독은 내가 ‘언더스탠’할 때까지 20번이나 얘기하고, 불편해 할까봐 배려해 주고. 배우로서 김지미를 안정시겨 주고, 확고한 배우가 될 발판을 마련해 준 감독이지.” ●두 번째 남편이셨던 최무룡 감독은요. “거기야 제대로 작품 고민하면서 날 쓴 게 아니고, 그냥 나를 써야 하니까 날 출연시킨 거니까(웃음). 아무튼 배우는 철저히 감독의 소재야. 이 재료가 좋으냐, 저 재료가 좋으냐 선택당하는. 배우가 아무리 잘난 척해도 감독 앞에서는 꼼짝마라지.” ●모두 네 번의 결혼. 사랑도 일만큼 격정적으로 하셨습니다. “글쎄 격정적으로 했다기보다는 등 떠밀려 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인데. 물론 그땐 사랑이었고, 사랑이 절실했을지 몰라도, 점점 상대를 알게 되고, 사랑이 희생이 돼가니, 사랑 참 별거 아니다, 사랑 별 볼일 없다, 그런 생각이 들어. 그땐 그랬어. 내가 누구랑 차 한잔만 마셔도 그게 이슈가 되고, 아니라고 부정할수록 더 의심하고, 결국 세상의 시선 앞에 우리 두 사람만 딱 남게 되는 거야. 그럼, 나도 아 진짜 사랑하나 보다, 결혼해야겠다, 이렇게 되고. 거기에 내가 내숭을 못 떨고 거짓말을 못해. 까발리는 대로 다 까발려지는 거지. 내가 내숭 못 떨어서 손해본 게 한둘이 아녜요.” ●한 인터뷰에서 ‘살아보니 남자 별것 아니더라’ 이런 말씀도 하셨는데요. “(기자를 가리키며) 결혼했지? 만족해요? (기자가 웃으며 아니요라고 하자) 그래, 남자는 다 어린애야. 불안하고 부족한 존재지. 여자들이 모성애로 감싸니까 사는 거지. 내가 어린 남자, 나이든 남자 다 살아봤지만 남자는 다 똑같아. 어린애야.” ●흔히 여배우들과 얽히는 정치가나 재벌들과는 염문이 없으셨어요. “아, 재벌 뭐 필요 있어. 우린 자기 몸뚱아리가 재산이고 재벌인데. 큰소리치고 당당하게, 자기 재능 이루면서 사는 게 좋지. 부 때문에 남 눈치 보고 기죽어서 사는 거 치사하잖아. 옛날에 서울대·연세대 촬영 가면 남학생들이 둘러싸고 있다가 한 명이 뛰어나와 날 확 껴안고 ‘죄송합니다’ 이러고 가곤 했어. 그러던 시절인데 내가 원하면 다른 쪽 사람들하고 얽힐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난 그냥 영화계 테두리 안에서만 살았어. 그게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황혼열차’ 때 한 신문 영화평이 ‘한국영화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배우가 출연했다는 사실이 놀랍다’였습니다. “하하, 그때 미인들이 없었던 게 아니라 길거리에 미인들이 없었지. 다 집안에 들어앉아 있었으니까. 난 외모 때문에 손해 많이 봤어요. 그저 김지미는 예쁜 걸로 버티는 배우로만 봤으니까. 그런데 예쁜 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보면 질리잖아. 내가 예쁜 거에 만족하고 노력 안 했으면 절대 이 자리에 못 왔어요. 워낙 다작이라 20대에 60대 분장하고 연기할 정도로, 연기 폭이 넓었어. 그 덕을 봤달까.” ●‘김지미를 보면 세 가지 이유로 깜짝 놀란다. 첫째, 스크린에서보다 더 예뻐서다. 둘째, 걸걸한 목소리다. 셋째, 생각보다 키가 작다(1m60㎝)’는 옛 글이 있더군요(그녀는 지금도 전성기 때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70년대까지 걸걸한 목소리는 후시 녹음이니 낭랑한 성우가 대신했다). “키는 좀 더 컸으면 좋았겠다 싶기는 한데 스크린에 안 작아 보이니 된 거고. 탁성은 어려서부터 이 목소리였어. 근데 난 이 목소리가 좋아. 내가 이 외모에 옥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꾀꼬리 목소리였어봐. 얼마나 잔망스러워 보였겠어.” ●청순가련형부터 다양한 캐릭터를 하셨습니다. 한국영화 사상 가장 매혹적인 이미지, 치명적인 팜므 파탈이라는 평도 받으시고요. “역할은 꽤나 다양하게 했는데, 세고 강한 역할을 관객들이 더 좋아하고 더 기억하는 거 같아. 그때 여자들이 못 그랬으니까. 일종의 대리만족이지.” ●담배도 공개적으로 피우셨는데, 처음엔 눈총 받지 않으셨나요. “내가 21세 때부터 담배를 피웠는데, 이게 영화에서 기지촌 여성 이런 거 연기하다 배우게 된 거거든. 내가 술은 한 모금도 못 먹어. 근데 담배는 잘 맞아. 뭐 신경쓰나. 그냥 피웠지. 그런데 영화 속에서 담배 피우는 내 모습이 멋져 보인다고, 따라 피운 여자들 많았어요.” ●배우로서 회의를 느꼈던 순간은 없으셨나요. “60~70년대 한 번에 30편 겹치기 출연하고 1년에 100여 편 작품에 관계되고 하면, 정말 이게 배우랄 수 있나, 영화 찍어내는 기능공이지, 회의가 안 들 수 없지. 사고 나서 죽을 고비도 넘기고 감독과 생각이 달라 항의해도 안 받아주면 내 안의 갈등 때문에 제대로 연기가 안 나와. 어떨 땐, 내가 이렇게 작품을 많이 하는데 하나 정도는 대충 해도 모르겠지, 포기하는 맘이 들기도 했고. 그보다 더 힘들었던 건 영화계가 진보·보수로 갈린 80년대 중반 이후야. 영화 제작 방식이 바뀌고, 진보·보수 틀이 생기고 보수쪽 사람들이 능력과 상관없이 갑자기 일자리를 다 잃었지. 자존심 많이 상했어. 그래 날 더 이상 배우로 안 쓴다면 좋다, 배우만 영화인이냐, 내가 제작해서 영화계에 파워를 계속 행사하겠다, 그래서 제작에 손대게 됐어요. 난 내가 제작한 영화에 자부심이 있어요. 흥행과 무관하게 정말 좋은 영화라는…”(김지미는 국내 여배우 출신 제작자 1호다. 제작자에서 영화 행정가로 변신하면서 50년 넘게 영화 현장을 지켰다). ●그때 어려움을 이긴 동력은 뭐였습니까. “나는 데뷔 때부터 줄곧 내가 대한민국 최고 배우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 속에 살았어요. 내가 원래 그래. 자존심 강하고, 성격도 강하고, 독하고. 천부적으로 지고는 못 사는 성미야. 그러니까 인생이 계속 나와의 싸움이지. 남들이 나 일할 때 보면 신들린 사람 같다고 해. 신기가 있는 건지, 힘든 순간에 나도 모르는 집중력이 터져나오고 무서운 인내심이 생기고. 어쨌든 난 독하고 강해서 살아남았지. 약했다면 예전에 부러졌을 거야.” ●드라마틱한 인생이라 자서전을 기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휴, 그딴 걸 뭐 하러 써. 내가 정치가·예술가들 자서전 많이 봤는데 다 거짓말이야. 난 그짓 안 해. 내가 평생 제일 싫어하고 못하는 게 내숭하고 거짓말이라고, 아까 말했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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