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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우종과 함께하는 문학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雪城 김우종
백주년
시인 이설주는 새해가 되면 탄생 100주년이 된다. 그는 따님
그런데 3대가 문학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나 작고한 시인이 탄생 100주년이 된다는 것자체는 엄격히 말해서 문학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3이나 100은 모두 숫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이설주의 문학사적 자리 매김이 애매하다면 적어도 100주년이라는 시기를 그냥 넘길 수는 없다. 그리고 100주년을 맞으며 그의 시인으로서의 삶을 되새겨 본다면 그의 2세와 3세로 이어지는 남다른 문학 사랑의 가문적 전통의 의미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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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광수에 대한 재평가>를 지난 호(휴먼메신저 가을 호)에 발표했다. 시인 이설주에 대한 이 글도 같은 동기에서 집필한 연속 발표물이 된다.
최근에 간행된 <들국화 외>( 법우비평판 한국문학, 2007년 범우사)에서 해설자 오양호 비평가는 우리 나라 문학사에서 이설주에 대한 언급이 단 한 줄도 없다고 지적했다.
문학사적 저술 속에서의 언급 여하가 그에 대한 비평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만큼 이설주에 대한 문학사적 자리매김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문학사적 자리매김의 부재는 그 가치의 비중여하에 의해서 결정되기도 하지만 잘못된 판단이나 비평가들의 책임감 미비가 그같은 오류를 범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광수의 친일 문제에 대한 재평가도 그같은 무책임과 오류 때문에 필요했던 것이다.
이설주는 1908년 4월 12일에 대구 수송동에서 태어나 1929년에 대구 고보를 졸업하고 곧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었다. 그리고 1932년에 일본문단에서 시인으로 등단한 후 2001년 4월 20일에 작고했다. 그는 이 때가지 긴 세월 동안 시인으로서의 발걸음을 멈춘 일이 없었다. 등단 후 65년간 쉬지 않고 시인의 길을 걸어 가며 90세가 넘어서 그 길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이렇게 그가 시인으로서 걸어 간 길은 우리에게 특별한 가르침이 되어 준다.
그는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가장 오랫동안 현역으로서 창작활동을 계속한 시인으로 기록될 수 있다. 물론 그는 만 93세까지 장수했으니 생존기간도 남다르지만 오래 사는 것과 창작활동 기간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문인은 글을 쓰는 사람이므로 작품을 구상하고 쓰는 활동을 멈췄다면 그는 이미 폐업한 시인이며 문인으로서는 작고시인과 다름없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는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시인의 길을 걸어 간 사람이다. 1932년에 일본 도쿄에서 ‘신일본 민요’지에 <
그런데 이렇게 30년대 일본문단에서 시작하여 우리 문학사상 가장 긴 세월 동안 시인으로 살아 간 사람에 대하여 비평가나 국문학자들이 문학사적 저술 속에서 그에 대하여 아무 언급이 없다면 그 이유를 확실히 밝혀야 할 것이다.
*문단을 멀리 한 그의 창작생활
그는 우리 문학사상 최장기간의 창작생활을 기록한 시인이며 시집도 많았다. 그런데도 지금까지의 문학사 저술에서 특기할만한 평가가 거의 없다는 것은 그만큼 국문학 연구가나 평론가의 관심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이며 그 이유는 한국문단의 특수한 모순에 기인한다.
우리 문학사에서 언급된 문인은 거의 백 프로가 문예지를 통해서 활동한 사람이다.
1970년대 이후 발표지면이 다변화되기 전까지 문예지는 일반 문인들이 창작물을 발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문학사를 기술해 나가는 평론가나 국문학자들도 거의 모두 문예지에서 텍스트를 구했다. 시집 등이 있더라도 원작은 거의 모두 문예지에 발표된 것이고 발표 연대 측정도 그것이 정확하기 때문에 문예지를 유일한 원본으로 삼는 것이 편리했다.
이설주의 작품도 일제시대의 것은 해방 후에 간행된 시집<들국화>(1947년), <방랑기> (1948년)에 수록되었는데 각 작품의 해방전 발표연대 또는 미발표작일 때는 그 창작연대가 언제인지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문예지는 그 발행인이나 편집인 또는 주간가 편집장이 투고된 작품에 대한 발표와 거부의 선택권을 갖는다. 또 그들은 특정 문인에 대한 평가를 편집방법에 의해서 조정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문화계 전체에서 각종 문단행사도 대개 문예지 아니면 단체가 주도해 나간다.
여기서 소위 문단권력이라는 것이 형성되고 권력의 서열이 매겨진다. 따라서 일반 문인은 그런 문예지에서 활동하려면 그 질서에 길들여져야 하며 그것이 싫다면 떠나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설주는 이런 문단 풍토에 의해서 길들여지지 않고 자기 자존심과 주체성을 완강하게 지켜 나간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밝힌 바가 있다.
해방 전까지는 방랑생활로 문단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는데 해방 직후 한번 <영남일보>에 <순이의 가족>이라는 시 한 편을 보내 본 것이다.
열흘, 스무날 ,한달이 지나도 영 감감 소식이 아닌가?... <중략)....
그래서 나는 치사하고 째째해서 아예 작품을 발표 안 하기로 했는데 ...(하략)...
이 글 다음에는 소설가 박영준이 편집하던 <민성>에서 같은 냉대를 당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문단의 아득한 선배라 해도 문예지 중심의 문단권력 사회에서는 독불장군은 용납되기 어려웠음을 이 글에서 알 수 있다.
필자가 실제로 본 이설주의 모습도 그렇다. 필자가 처음으로 이 시인을 만난 것은 1957년 명동의 갈채 다방에서였던 것 같다. 그 무렵엔 대부분의 문인들이 저녁이 되면 다방에 나왔는데 갈채다방에 가장 많은 문인들이 모였었다. 그분의 모습도 종종 거기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선배 시인으로서 후배들의 인사는 받고 있었지만 그는 특별히 함께 어울리는 문인이 적었다.
갈채다방에는 현대문학사 주간인 조연현을 비롯해서 김동리 서정주등 한국문학가협회 사람들이 많이 모였고 그들은 대개 이승만의 정치활동에 간접적으로 가담하고 있을 때부터 한국문단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설주는 한국문학가협회라는 단체나 현대문학지에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은 분이었다. 그 무렵에는 4.19 혁명 직전까지 중견급 이상 문인들 다수가 이승만 정권을 위한 문필에 가끔 동원 되었고 강연회에도 나갔기 때문에 그 문단 풍토에 어울렸으면 이설주도 비슷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고한 선비의 모습을 지키고 있던 그는 물론 선배로서 예우는 받았더라도 문단권력의 실세들이 경원하는 자리에 있었던 것같다.
그에게는 후배들을 등단 시킬 추천 심사권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남들처럼 아무개 사단등 자기 추종세력이 형성되지 않았다. 서정주가 일제하의 가장 대표적인 친일 시인이며 광복 후에는 가장 잔혹한 광주 학살자 전두한을 비호하고 최고의 찬사를 바치고도 최고의 문화 훈장을 받고 지금도 그의 고향이 가을이면 황금빛 국화꽃으로 장식되고 있는 까닭은 그가 문예지 추천권과 교수직으로 키운 다수의 추종세력 때문이다.
문예지 또는 신문 문화부등과 친밀한 개인적 유대관계가 없었던 그는 독자의 주목을 받도록 매스컴의 조명을 받기도 어려웠다.
또 그는 무슨 협회의 감투를 쓰기 위해서 추잡해진 문단선거운동도 한 일이 없다. 우리 나라는 협회 회장등의 임원들이 곧 문인으로서의 실력을 말해주는 서열 순위로 착각하는 바보들이 많아서 감투를 안 쓴 문인은 실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문인으로 평가되기가 쉽다. 세미나가 있는 단체 행사장에서도 특별석이 따로 있고 그 자리의 문인들이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나머지 문인들은 눈에 띄지 못하기 쉽다. 그만큼 그런 모임에 나가면 모멸을 받는 셈이 된다.
창작 발표가 문예지 중심이 되고 문단에서는 문단권력을 지닌 실세들이 늘 조명을 받기 쉽기 때문에 이설주 같은 시인은 다분히 소외된 문인일 수 밖에 없었다.
다작이면서 시집을 많이 낸 점에서는 이설주는 조병화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삶의 자세는 전혀 그와는 다르며 또 다른 문인들도 거의 모두 그와는 다르다.
문인은 글 쓰는 사람이며 집필은 방에서 혼자 하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다수가 모이는 자리에 나가서 함께 어울릴 필요가 없다. 문인 다수의 집합은 지면을 통해서도 가능하고 그것이 곧 문단이 되지만 그와 달리 지면을 떠나서 함께 직접 만나는 자리를 특히 문단이라고 부른다면 그런 문단에서 이설주는 다분히 이탈해 있었다.
이것이 문인의 정위치다. 함께 만나서 차 마시고 술마시고 잡담하는 자리에서는 누구도 원고 한 줄 쓸 수가 없다. 그러므로 문단 출입이 너무 심해지면 글은 부실해지며 인간적 타락과 문학적 배반지수가 높은 문인도 모두 그 속에 있다.
*격동기를 살아 간 이 설주
이설주는 1968년에 시선집 <삼십육년>을 펴냈다. ‘36년’은 일제 식민지기간을 연상시는 숫자지만 여기에는 분단시대의 역사적 배경도 나타나 있다. 분단 후의 가혹한 현실까지 모두 36년이 지니는 가혹한 문족현실의 상징적 언어 속에 담은 것이다.
식민지 시대는 문인들에게는 문학적 양심의 시련기가 된다. 그리고 해방 후도 마찬가지다.
문인은 글을 통해서 자신의 인격을 공표하는 사람이다. 그 인격에는 정치적 현실에 대한 사상적 표현도 포함된다. 물론 사상적 표현을 들어내지 않는 문학도 얼마든지 좋은 문학이 될 수 있지만 침묵 행위 역시 자기 고백의 일종이다. 그러므로 일제의 억압 속에서 친일문학을 거부하는 것은 힘드는 시련이 된다.
이설주는 긴 세월 동안 지조를 지켜 나갔다. 침묵으로 지켜 나간 것이 아니라 그는 도쿄 유학시절에 시인이 된 후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며 대학도 중퇴했었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 오자 더 지독한 고문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 동족이면서 어쩌면 그렇게도 포악하고 잔인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튼 몇 번이고 까무라쳤으니까. 20 여일 만에 집에 나와서 그대로 누워 모두 죽는다고 했으니 지금은 덤으로 사는 셈이다.
여기에는 그를 고문하던 고등계형사
일제시대의 그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나라를 잃은
임종국의 친일문학연구에 의하면 일제 시대에 친일 문학을 한 사람은 100명이 넘는다. 이는 당시의 시인들중 지극히 소수를 제외한 다수에 해당된다.
이설주는 일본에서 옥고를 치르고 고향에 돌아와서 다시 지옥의 고통을 겪고도 순수하고 아름다운 시인의 삶을 지속했으며 이것은 해방 뒤에도 이어졌다.
해방후에는 친일문인들이 다시 득세하고 교과서에 작품이 실려서 명성을 유지하고 독재권력의 어용시인이 되어서 최고의 문화훈장까지 받는다.
그런데 이설주는 그같은 지조를 고고하게 지켜 나가다가 미친개들이 많이 날뛰던 6.25당시에 또 억울하게 좌익의 혐의로 견디기 힘든 고문을 당했는데 죄가 없어도 고고하게 양심을 지키면 빨갱이로 의심받기 쉬운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맑은 시인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조국이 없는 가난한 아들 딸아
솟아나는 구름에 나래를 치고
벅차게 날으랴는 너들 앞에는
구원의 이상이 꽃이 피여라
(<강남학교 낙성>에서)
이것은 만주 지방에 있을 때 어는 우리 민족이 자식들을 위한 학교의 낙성식에서 쓴 시같다. 같은 지역인 강남촌에서 쓴 <이앙>에는 ‘만주 살이가 좋다해서 고향도 버리고/하라버지를 따라 온 먼 어린 날의 압록강/ 눈물로 새운 날이 많았드라오’라는 구절도 나온다.
이설주는 자기도 고향을 떠난 사람이지만 가난한 목숨을 살리려고 조국을 잃고 만주 땅에 와서 여전히 눈물로 아픈 세월을 보내는 민족을 생각하며 시인의 삶을 이렇게 이어 나가고 있었다. 일제의 표독한 눈초리들이 응시하고 있는 자리에서 남들은 친일을 하며 지조를 버리지만 그는 이렇게 고통 받는 가난한 민족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이를 증어하는 시인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후 광복을 맞고 고국으로 돌아 왔지만 조국은 여전히 일제 36년간의 고통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때 많은 문인들이 정치판에 뛰어 들고 권력에 빌붙어 안일을 꾀하기도 하지만 그는 한심한 나라꼴을 보며 슬픔과 분노를 토해낸다.
자주 독립은 말뿐이요
풀리운 조국은 또다시
무서운 사슬로 매려한다.
그는 여운형이 암살되자 <
눈이 함박으로 쏟아지는 밤
어느 하늘가로 헤매는지도 모를
그 억울한 혼백들을 위하여
우리 모두 손을 모아 촛불을 켜자
미래를 상실한
학살로 애국애족하던 원흉이
반역한 부정축재자들이 다시
주문을 외우고 있는 슬픈 공화국!
이제는
4월의 피보다도 진한 데모가
또 한번 남아 있다.
이것은 4.19과 관계된 <올해는 편지를 쓰자>다. ‘ 4월의 피보다도 진한 데모가 또 한 번 남아 있다‘라는 표현으로 보면 시인은 4.19 혁명의 피를 보고 슬퍼하고 민주화의 희망을 본 다음에 다시 용서할 수 없는 무리들의 준동을 보고 ;’또 한번의 혁명‘을 생각했던 것같다.
이같은 현실 참여적 시인의 관심은 <낙동강>에서는 민족상잔의 비극을 나타내고 있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피와 피 소리쳐 뿌린
동족상잔의 처절한 역사를 안은
비극의 강
칠백리 낙동강아!
혁명의 불씨를 들고
절망을 넘어 파도처럼 밀려 온
젊은 깃발이 소용돌이 친
분노의 강
칠백리 낙동강아!
그리고 그는 <석방>에서 국가보안법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착하고 어린 백성을 그 죄로 투옥하는 대한민국의 검찰과 독재정권을 비판하고 있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서 보면 이설주는 결고 편안한 걸음으로 시인의 길을 걸어 간 사람이 아니다.
그가 가던 길에는 돌부리가 있고 매우 가파른 고개가 있고 절벽이 있고 함정이 있었다. 이 나라의 역사적 현장에서 양심적인 비판의 목청을 높이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고통도 겪었지만 그래도 그는 역사적 시련 앞에서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물론 그의 시가 이런 현실 참여적 역사의식으로만 충만해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삶의 의미를 캐나가는 서정시를 많이 쓰면서 사회적 역사적 배경은 그 저변에 깊이 깔아 나갔다. 그래서 작품은 더 무게가 실리고 우리들의 가슴에 공감을 일으켜 나갔다. 그리고 노년기에 이르러 그의 시는 더욱 인생의 깊은 내면으로부터의 울림을 더해 나가고 잔잔한
<만년의 노래>는 아마도 노년기에 쓴 것으로서 그의 높은 문학적 수준을 말해주는 수작에 속한다.
이상 몇 가지 작품과 삶을 통해서 살펴 본 이설주는 우리 문학사에서 매우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죽는 날까지 시를 사랑하고 쉼 없이 창작의 손을 놓지 않은 치열한 프로 정신과 함께 기나긴 시련의 시기를 항상 맑게 당당하게 살아간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다.
그는 문단과의 세속적 인연이 멀었기 때문에 문학상도 별로 받지 않은 편이지만 말년에 대한민국 정부는 은관문화훈장을 그에게 수여했다.
그가 생존하고 있을 때 따님 이일향이 우수한 시인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다시 손녀 주연아가 현대문학을 통해서 우수한 수필가로 활동하기 시작하며 남달리 문학의 열정을 보이는 가문이 된 것도 조금은 이설주의 아름다운 향기가 영향을 미쳤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마지하게 되면서 참된 시인으로 살아 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장 바른 답을 여기서 찾아 보게 된다.
그기 그렇게 힘든 길을 걸어 갔는데 그의 따님과 손녀가 또 문학의 길을 가고 있는 것도 이같은 선친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문학 미술 음악등 예술분야는 다분히 유전적으로 타고나야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돈이 따르고 명예와 권세가 따르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길을 걷게 되면 가던 길을 멈추고 다른 길을 찾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가 60년 이상을 쉬지 않고 자나 깨나 그 길을 걸었다면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일 수 밖에 없다.
시인은 그것으로 부자가 될 수 없다. 권력도 다를 수 없다. 얻는다면 명예 뿐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특수한 풍토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박수를 보내는 명예도 쉽지 않다.
나는 그를 1957년에 서울의 명동 갈채다방에서 처음으로 만났었다. 그런데 그는 만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 다방에는 주로 조연현 김동리 서정주등 한국문학가협회간부들이 모엿는데 이설주 시인은 그런 단체에는 관심이 없는 분이었다. 그래서 혼자일 때가 많았고, 따르는 후배들도 많은 것 같지 않았다. 현대문학등의 문예지를 통해서 등단했거나 등단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이설주시인과는 별로 만날 일이 없었기 때문인 것같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는 문단권력을 쥐고 매스컴과 신문등을 통해서 유명해지고 있는 사람들에 비하여 세속적 명예가 별로 따르지 않았던 세이다. 그리고 문단권력도 권력이라고 한다면 그에게 그런 권력이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물론 시를 팔아서 돈이 되기도 어렵다.
한국의 대다수 문인들이 일찍이 집필 활동을 끝내고 문단에 이름만 남기고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런데 이 설주 시인은 그같은 돈과 명예와 권세등 모든 것을 초월하고 만 84세 87세 89세까지 계속 시집을 펴내며 활동을 계속했다. 우리 문단에 이렇게까지 순수하게 시를 사랑하며 살아간 분이 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또 하나 이례적인 일이 있다. 그의 문학 활동은 다음 세대로 이어졌고 또 그 다음 세대로 이어져서 3대까지 이어진 문단가문의 역사를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어졌다는 것은 릴레이식 바톤 이어 받기는 아니다. 따님이신 이일향 시인이 등단한 것이 1983년이고 손녀이신 주연아가 수필가로 등단한 것이 1993년이니까 할아버지와 손녀까지 3대가 나란히 현역으로 우리 문단에서 활동해 나간 것이다. 그리고 조부 이설주 시인이 새 천년을 마지하고 이듬 해에 작고해서 지금은 모녀가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2대가 현역문인인 예도 드물지만 3대가 이어지고 더구나 그들이 다 같이 현역으로 활동해 나가는일은 정말로 드문 일이다.
다른 분야에 비해서 문학을 가업처럼 계승하는 예는 많지 않다.
문학이나 미술이나 음악등 예술적 재능은 유전적으로 어느 정도 이어 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결코 노력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려운 분야다. 그리고 재능이 따르게 되면 그 분야에 대한 꿈도 따르게 되고 또 성취감과 함께 기쁨도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예술가 가문에선 예술가가 다시 태어날 가능성이 많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가난이 발목을 잡아 버린다. 문학만이 아니라 미술 음악 연극 등이 모두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식에게 가난을 물려 주어야 했다. 그래서 예술가 아비들은 자식들에게 대개 다른 길을 권했다. 그래서 2대째 이어진 예가 많지 않다.
소설가 황순원의 아들 황동규가 시인이 되고 서정주의 아들 서승해가 소설가가 되고 시조작가 조종현의 아들 조정래가 소설가가 되고 박화성의 아들 천승준이 평론가로, 천승세가 소설가로 어머니 뒤를 이었지만 이런 예는 많지 않다.
그런데 주연아의 가문은 외가 쪽으로 딸들이 3대를 이어 오고 있으며 조부 못지않게 매우 왕성한 활동력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