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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
해남으로 보냈던 정탐 4명이 이레 만에 돌아왔다. 육로로 갔던 그들은 백성들이 버린 어선을 타고 돌아왔다. 보고는 길고 소상했고, 근접도가 좋았다. 명량에서 깨진 적의 잔당들이 퇴로에 다시 해남반도에 상륙해 백성들의 집을 모조리 불지르고 마을과 산속을 샅샅이 뒤져 숨어 있던 백성들을 씨가 마르도록 도륙했다는 것이었다. 해남에 상륙한 적들은 이틀 밤 이틀 낮을 불지르고 죽인 뒤 다시 바다로 나아가 경상 해안 쪽으로 이동했다. 그 대열은 50척 정도였다.
마을의 향리와 접장들이 진작부터 적과 내통했다. 백성들이 숨어 있는 곳을 밀고했으며 백성들이 감추어놓은 곡식과 소금을 적에게 인도했다. 흩어진 백성들은 적들이 물러간 뒤에도 마을로 돌아오지 못했다. 밀고자들 중 일부는 적과 함께 떠났다. 적의 시체와 백성의 시체가 연안과 마을을 뒤덮고 벌레가 들끓어 역질이 번졌다. 지방 관아는 모두 달아나서 살아남은 백성들은 다만 울부짖고 있었다. 녹도 군관 이철에게 군사 30명을 딸려 해남으로 보내, 백성의 뒷일을 수습토록 했다. 이철은 배로 떠났다. 이철의 배에 군량 30가마를 실어주어 우선 죽을 쑤어 먹이도록 했다. 군량은 명량에서 깨어진 적선에 올라가 빼앗은 쌀이었다. 모두가 적들에게 빼앗긴 연안 백성들의 쌀이었다. 내가 적을 죽이면 적은 백성을 죽였고 적이 나를 죽인다면 백성들은 더욱 죽어나갈 것이었는데, 그 백성들의 쌀을 뺏고 빼앗아 적과 내가 나누어 먹고 있었다. 나의 적은 백성의 적이었고, 나는 적의 적이었는데, 백성들의 곡식을 나와 나의 적이 먹고 있었다.
대낮에 오한이 오면서 임진년에 총 맞은 왼쪽 어깨가 쑤셨다. 바람이 없는데도 먼바다에서 물결이 일었다. 내일, 바다에는 비가 내릴 것이었다.
이철을 보내고 나서 장졸들을 모아놓고 무기를 점검했다. 썩은 창자루를 갈아 끼우고 쇠갈고리의 낡은 줄을 바꾸도록 했다. 명량에서 돌아온 배들은 이음새가 어긋났고, 틈새에 벌레가 먹었다. 노 구멍이 문드러진 배들도 있었다. 배들을 묶어놓고 선실 안에서 연기를 피워 벌레를 잡았다. 벌어진 틈새에 나무 심을 넣었다. 개먹은 노 구멍 둘레에 쇠를 박았고 이 빠진 노 끝에 구리 버선을 씌웠다. 저녁때 백성들이 버린 밭에 월동 무씨 다섯 되를 뿌렸다.
명량 전투가 끝난 뒤 임준영은 이틀 동안 작전 해역을 수색했다. 나는 임준영에게 전선 2척과 어선 5척, 그리고 군사 50명을 맡겼다. 임준영은 이틀 후 군사를 인솔하고 암태도로 돌아와 보고했다. 임준영은 떠다니는 적의 시체 2천여 구를 건져서 묻었다. 연안 갯벌 쪽으로 다가오는 시체만을 정리했고 원양으로 떠내려가는 시체는 수습하지 못했다. 작전 해역에 역질이 돌았고, 물고기가 떼죽음을 했다. 명량 물길이 하루에 네 번씩 거꾸로 바다를 쓸어내려서, 깨어진 적선의 쓰레기는 멀리 떠밀려갔다. 임준영은 반파된 적선의 내부를 수색해서 적의 군량 5백 석을 노획했다. 임준영은 적의 군량과 조총, 창검, 화포, 피복을 두 배 가득히 싣고 돌아왔다. 흘수선이 내려앉도록 노획품은 많았다. 돌아온 임준영과 그의 부하들은 적의 투구를 뒤집어쓰고 들떠 있었다.
임준영은 전선 뒤에 작은 어선 한 척을 줄로 묶어서 끌고 왔다. 그 어선 위에 조선 여자의 시체 다섯 구가 실려 있었다. 죽은 여자들은 철 지난 여름 치마저고리를 걸쳤다. 살아서 실려온 여자도 한 명 타고 있었다. 산 여자는 뱃전에 쪼그리고 앉아서 실성한 듯 벌려진 입으로 침을 흘리고 있었다.
웬 송장이냐?
적장들의 선실에서 죽어 있었습니다.
임준영의 부하들이 시체를 들어올려 선착장에 벌여놓았다.
가마니 위로 드러난 머리카락들이 불에 그을려 있었다. 죽은 여자들의 머리카락이 해풍에 날렸다. 이미 썩기 시작한 송장의 비린내가 훅 끼쳤다.
어찌된 부녀들인가?
적에게 끌려가서 여러 적장들의 계집 노릇을 하던 부녀들입니다. 저 여인네를 심문하시면 아실 것입니다.
살아서 끌려온 여자에게 더운 죽을 먹이고, 수군의 옷으로 갈아입혔다. 정신이 돌아온 여자는 진술했다. 해남 두륜산 심마니의 딸이었고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다. 가족은 흩어졌고 여자 혼자서 적에게 잡혔다. 조선 여자 세명이서 적장 구루지마의 몸시중을 들었는데, 한 명은 해남에서 출항할 때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고 했다.
나머지 한 명은 누구냐?
여자는 두 번째 시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열어라.
군사들이 가마니를 걷어냈다. 키가 작고 어깨가 둥근 여자였다. ……나으리, 밝는 날 저를 베어주시어요…… 아득한 밤들과 달빛에 어른거리던 칼 무늬가 내 마음에 떠올랐다. 죽은 여자는 고개를 저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얼굴을 돌려라.
군사들이 죽은 여자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고개를 돌려놓았다.
여진의 얼굴이었다.
옷을 벗겨라.
식칼을 든 군사가 죽은 여자의 옷을 찢어내렸다. 여자의 나신이 드러났다. 젖가슴은 말라붙어 있었고 메말라 보이는 음부가 이를 악물듯 닫혀 있었다. 빗장뼈 아래로 구렁이 같은 상처자욱이 이제 푸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나는 살아서 끌려온 여자에게 물었다.
저 여자 이름이 뭐라 하더냐?
여진이라 하더이다.
내력을 말하더냐?
구례 관아의 창기였다는데, 함평에서 순천으로 가는 산속에서 잡혔다 하더이다.
죽은 여자는 여진이었다.
덮어라.
군사들이 가마니로 죽은 여진의 몸을 덮었다. 나는 임준영에게 물었다.
이 송장들을 대체 왜 끌고 왔느냐?
임준영은 머쓱해졌다.
조선 백성들이기에 혹시라도 연고를 찾아서 시신이라도 보내줄 수 있을는지……
부질없다. 근본을 모르니 어찌 이 난리통에 임자를 찾겠느냐?
그래도 혹시나……
내다 버려라.
수졸들이 여자들의 시체를 들어서 밭둑 위로 옮겼다. 굶어 죽고 병들어 죽은 피난민들의 시체 20여 구가 밭둑에 쌓여 있었다. 수졸들은 묵은 밭 가운데 커다란 구덩이를 파놓았다. 역질이 돌고 있었으므로 구덩이는 깊었다. 수졸들이 시체를 하나씩 구덩이 안으로 던졌다. 수졸들은 시체의 팔다리를 마주잡고 흔들다가 공중으로 휙 날렸다. 시체는 구덩이 안으로 떨어져 쌓였다. 여진의 시체가 공중으로 떴다가 구덩이 안으로 떨어졌다. 여진의 시체는 구덩이 한 구석에서 엎어졌다. 다른 여자들의 시체가 그 위에 포개졌다. 수졸 수십 명이 달려들어 삽으로 구덩이를 메웠다.
임준영이 살아서 끌려온 여자를 심문해서 결과를 보고했다. 해남 어란진의 적진에 끌려온 조선 여자는 30명이었다. 적장 구루지마가 세 명을 차지했고 나머지는 적의 장수들에게 나누어주었거나 죽였다. 구루지마는 3명의 여자를 번갈아가며 선실 안으로 불러들였다. 대낮에도 옷을 벗겼다. 여자 한 명이 물에 빠져 죽자 구루지마는 한 명을 보충했다. 명량에서 밀릴 때도 구루지마의 선실에는 여자 세 명이 다다미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배에서 구루지마는 차를 자주 마셨다. 여진의 고향은 밀양이라고 했다. 밀양은 임진년 초장에 무너졌다. 여진이 경상도 밀양에서 전라도 구례까지 흘러들어온 경위는 알 수 없었다. 적장의 씨가 몸에 붙은 것 같다고 말하면서 여진은 적장 몰래 울었다고 한다.
살아서 끌려온 여자는 일례라고 했다. 일례를 수영 주변 백성의 집에 얹혀주도록 군관에게 일렀다. 해남 어란진 포구 주변 후미진 바위 그늘에서 적이 실어내지 못한 군량 3백 석이 발견되었다. 다시 임준영과 군사들을 해남으로 보내 적의 군량을 실어오게 했다.
저녁때 나는 여진이 묻힌 밭둑에 나갔다. 시체가 묻힌 구덩이 위에 군사들이 모닥불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여진의 몸 속에서 꼴깍거리던 구루지마의 몸을 생각했다. ……나으리, 밝는 날 저를 베어주시어요…… 구루지마의 몸도 그때 여진의 몸 속에서 아늑했을까. 나는 치가 떨렸다. 여진의 몸 속 깊은 곳에서, 이 전쟁을 끝낼 수는 없을 것인가.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이었다. 군사들은 모닥불에 생선을 구워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군사들은 구덩이 위에 술과 안주를 벌여놓고 절을 했다. 군사들은 상여소리를 불렀다. 내가 다가가자 군관이 술잔을 내밀었다.
-과음하지 말라.
나는 겨우 말했다. 나는 개별적인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온 바다를 송장이 뒤덮어도, 그 많은 죽음들이 개별적인 죽음을 설명하거나 위로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나는 여자가 죽으면 어디가 먼저 썩을 것인지를 생각했다. 나는 그 썩음에 손댈 수 없을 것 같았다. 죽은 자는 나의 편도 아니고 적도 아니었다. 모든 죽은 자는 모든 산 자의 적인 듯도 싶었다. 내 몸은 여진의 죽은 몸 앞에서 작게 움츠러들었다.
나는 죽은 여진에게 울음 같은 성욕을 느꼈다. 세상은 칼로써 막아낼 수 없고 칼로써 헤쳐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칼이 닿지 않고 화살이 미치지 못하는 저쪽에서, 세상은 뒤채이며 무너져갔고, 죽어서 돌아서는 자들 앞에서 칼은 속수무책이었다. 목숨을 벨 수는 있지만 죽음을 벨 수는 없었다. 물러간 적들은 또 올 것이고, 남쪽 물가를 내려다보는 임금의 꿈자리는 밤마다 흉흉할 것이었다.
그날 밤, 해남의 민촌으로 보냈던 녹도 군관 이철이 돌아왔다. 백성을 먹이고 시체를 묻고, 역질에 걸린 자들을 격리했고 무너진 백성들의 집을 일으켜 세웠다고 보고했다. 이철이 적과 내통해서 백성들을 밀고했던 접장과 향리 세 명을 붙잡아왔다. 이철은 조서를 제출했다. 그들의 죄는 명백했다. 새벽에 모두 목 베었다. 머리는 마을에 걸었고 몸통은 낮에 여진을 묻었던 구덩이에 함께 묻었다. 새벽에 종을 시켜 탕약을 끓여 마셨다. 초겨울의 물소리가 날카로웠다.
바람 속의 무 싹
북서풍이 몰고 가는 눈보라가 바다를 덮었다. 먼바다에서 바람이 방향을 바꾸어 부딪힐 때마다 눈보라는 뒤엉키며 회오리쳤고, 잿빛 섬들이 회오리 속으로 불려갔다. 수면을 훑는 바람이 밀물로 달려드는 물결을 거꾸로 때리면 뒤집히는 물결이 곤두서면서 흰 칼날들이 일어섰다. 포구에 묶인 배들이 서로 뱃전을 부딪히면서 비꺽거렸고, 배를 끌어올린 장졸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언 몸을 녹였다.
종사관 김수철이 보름 동안 연안의 읍진과 내륙의 관아를 돌아왔다. 김수철은 서면으로 보고했다. 보고서를 살피는 일에 하루가 걸렸다. 마루 너머에서 겨울 바다는 길길이 뛰었고, 댓돌 앞에서 창을 든 위병은 바다 쪽으로 돌아서 있었다. 김수철의 보고서는 마른 붓을 휘둘러 급히 쓴 글씨였다.
녹진 만호가 시체 230구를 거두어 묻었다. 피난민과 적병의 시체가 섞여 있었다. 녹진 수영 뒷담이 10자쯤 무너졌다. 녹진 군량은 닷새분 남았다. 색리 2명이 달아났다. 만호가 달아난 색리를 잡지 못했다.
벽파진에서 시체 50구를 태웠다. 시체가 탈 때 중이 염불을 했다. 벽파진 군량이 끝났다. 수졸과 군관 2명이 섬의 안쪽으로 달아났다.
금갑진에 역질이 돌았다. 백성들이 토하고 쌌다. 시체 100여 구를 묻었다. 모두가 백성들이었다. 금갑진 둔전에 겨울 배추 싹이 올랐다. 둔전에 배속된 백성들이 역질로 죽었다. 금갑 무당이 굿을 했다.
용장산 봉수대가 무너졌다. 용장산에서 벽파진으로 오는 통신 축선이 끊겼다. 수졸들은 달아났다.
삼지원 선착장이 무너졌다. 여름에 개울이 넘쳐 수영 뒷담이 무너졌다. 삼지원 뒷산 옥매봉 봉수대가 무너졌다. 수졸들이 달아났다.
옥도에서 피난민의 계집들과 수군 장졸들이 뒤엉켜 음란한 짓을 했다. 전라도 계집과 경상도 계집이 제 고장 노래를 불렀다. 옥도 군관들이 백성의 개를 빼앗아 잡아먹었다.
해남 어란진 선착장이 무너졌다. 적들이 해남을 떠난 뒤에도 백성들은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다. 적들이 마을을 불질렀다. 개울물이 시커맸다. 해남 백성들 사이에 '이순신은 서해로 갔다. 적들은 다시 올 것이다'는 유언이 돌았다.
수의도 수졸 30명이 작당해서 배를 타고 달아났다. 군관이 뒤쫓아갔으나 잡지 못했다. 만호가 군관을 매질했다. 매 맞은 군관이 달아났다. 배도 찾지 못했다.
광양에 적들이 상륙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조선 임금이 이미 항복했고 가토의 군대가 서울을 접수했으며, 서울의 미인들은 가토의 첩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은 경상 연안에서 전라 연안 쪽으로 번져왔다.
도양 백성들이 수영을 습격해서 군량 30가마를 실어냈다. 백성과 군관이 함께 달아났다. 달아나던 백성들 12명이 죽은 염소를 끓여 먹고 설사 끝에 죽었다.
당포진 둔전에 겨울 대파 싹이 올랐다. 둔전을 맡은 백성들이 역질로 죽어서 묻었다. 당포 군관이 선비 집 유부녀를 강간했고 여자는 자살했다. 무당이 굿을 했다.
매포 군관들이 밤마다 여염의 계집들을 수영 안으로 불러들였다. 계집들은 머리에 술과 안주를 이고 있었고 아전들이 계집들을 뒤따라갔다.
방포진 해자가 무너졌고, 포작선 2척이 뻘밭에 얹혔다. 방포진 백성들이 죽은 적병의 옷을 벗겨서 입었다.
영암, 나주, 곡성, 함평에 도적이 끓어 백성들의 가을 곡식을 빼앗아갔다. 피난민들이 빈 논의 벼를 거두었는데, 반 이상을 참새가 먹었다.
함평에서 수군에 배속된 장정 50명을 육군이 몰아갔다. 도원수가 보낸 군사가 열흘 동안 함평을 뒤졌다. 함평 관아 동헌 객사가 무너졌다. 현감이 매일 밤 관기를 끼고 술을 마셨다.
나주에 역질이 돌았다. 백성들이 역질에 걸린 자들을 움막에 모아놓고 불질렀다. 죽은 시체와 목숨이 붙어 있는 자들을 함께 태웠다. 나주의 여러 고을들이 일손이 없어 추수하지 못했다. 피난민들이 곡식을 걷어갔다.
가리포 군량이 3백 석이라고 보고되었으나 곳간은 비어 있었다. 빈 곳간에 쥐떼들이 끓었다.
사대포 현감이 달아났다. 색리가 소달구지에 군량을 싣고 현감을 따라갔다.
조도에 피난민 3백이 뗏목을 타고 들어왔다. 피난민과 원주민들이 어장을 놓고 다투다가 배가 뒤집혀 피난민 5명이 죽었다.
월명포 무기고 문짝이 떨어졌고, 서까래가 내려앉았다. 돌쩌귀가 썩어서 주저앉았고 쥐가 갈고리 끈을 쏠았다.
강포의 고기잡는 백성들이 밤마다 수군 경계수역 안으로 넘어들어 갔는데 수군들이 막지 않았다. 강포 수군들이 군량으로 밥을 지어 끼니때마다 마을 백성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는데 반찬은 백성들이 잡아온 물고기였다. 강포 계집들이 함께 먹었다.
달모산 아래 벽진 마을 백성들이 적과 밀통했던 선비 2명을 붙잡아 낫으로 찍어 죽이고 선비의 딸을 강간했다.
벽진에 경상 연안 쪽 피난민 50여 명이 들어왔다. 벽진 백성의 딸과 피난민의 아들이 무너진 향교 마당에서 혼인했다.
몽포 백성들이 보리를 심고 무씨를 뿌렸다. 흘레가 순조로워 염소떼가 크게 늘었다.
금진포 백성들이 적선의 파목을 끌어모아 뗏목을 만들어 고기잡이를 시작했다. 뗏목이 뒤집혀 백성 5명이 마을로 돌아오다가 죽었다.
군내에서 3년 만에 5일장이 섰는데, 겨울 미나리, 좁쌀, 겉보리, 찐 쌀, 묵은 된장, 미역, 매생이, 감자가 나왔다. 닭 2마리와 강아지 1마리를 바꾸어갔고 달걀 1개에 감자 3알씩 바꿔갔다.
용장 봉수대가 무너져 현감이 백성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저녁에 현감이 내려오지 않자, 마을에 남은 백성들이 주먹밥을 싸가지고 산으로 올라갔다.
옥수 무당들이 시체 50구를 묻은 자리에서 씻김굿을 했다. 수졸들이 굿판으로 몰려가 국밥을 얻어먹었다. 굿이 끝나는 새벽에 죽은 자들의 귀신이 빨랫줄에 붙어서 끽끽 울었다.
영암에서 군량 2백 석을 수영으로 보내려고 마차에 실었다. 군수가 도적이 무서워서 군사 10명을 마차에 딸려 보냈다.
화도진에서 포구에 묶인 포작선 5척이 바람에 쓸리다가 부딪혀 깨졌다. 화도진에 겨울 땔나무가 없어서 만호가 옥도로 배를 보내 나무와 볏짚을 실어왔다. 화도진 수졸들이 볏짚을 엮어서 백성들의 집을 덮어주었다.
미호 군관 셋이 탈영했다. 만호가 군사를 풀었으나 잡지 못했다. '이순신이 다시 조정으로 잡혀갔다'는 유언이 미호 백성들 사이에 떠돌았다. 탈영한 군관이 그렇게 말했다고, 백성들이 말했다고, 향리가 말했다.
하루 종일 물의 칼들이 일어섰다. 저녁 바다는 거칠었다. 인광의 칼날들이 어둠 속에서 곤두서고 쓰러졌다. 캄캄한 바다에서 칼의 떼들이 부딪혔다. 물보라가 수영 안마당까지 날아들었다. 섬도 수평선도 보이지 않았다. 연안의 읍진들이 어둠 속으로 불려가서 닿을 수 없이 멀어 보였다. 밝는 날 녹진, 금갑진, 벽파진, 남포, 가리포가 그 오목하고 잘룩한 포구에 그렇게 남아 있을 것인지 믿기 어려웠다.
배를 끌어올려 놓고 종일 종사관 김수철의 복명 보고서를 읽었다. 김수철이 출장에서 돌아오면서 진도 구기자술 한 되와 마른 가자미를 가져왔다. 김수철과 늦게까지 마셨다.
김수철은 곡성의 문관이었는데 임진년에는 의병장 김성일의 막하에 들어가 금오산에서 이겼다. 예민하고 담대한 청년이었다. 문장이 반듯하고 행동이 민첩했다. 입이 무겁고 눈썰미가 매서웠으며, 움직임에 소리가 나지 않았다. 김수철은 졸음을 참고 반듯이 앉아서 핥듯이 마셨다.
수철아, 읍진이 다 무너지는 것이냐?
본래 무너져 있던 세상입니다.
수철아, 죽지 마라. 명령이다.
네 나으리, 읍진에 무 싹이 올라오고 있으니…… 이제 주무실 시간입니다.
김수철을 내 방에 재웠다. 보름 만에 귀임한 김수철은 눕자마자 코를 골았다. 새벽에 김수철이 이불을 걷어찼다. 나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동틀 무렵에 코피를 쏟았다. 뒷골이 당기면서 더운 피가 쏟아졌다. 종을 불러 피를 닦게 했다. 구들이 식어 불을 더 때게 했다. 바다는 새벽까지 길길이 뛰었다.
내 안의 죽음
명량에서, 나는 이긴 것인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들이 명량으로 몰려왔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들이 명량에서 죽었다. 남동 썰물에 밀려갔던 적의 시체들이 다시 북서 밀물에 밀려 명량을 뒤덮었다.
죽을 때, 적들은 다들 각자 죽었을 것이다. 적선이 깨어지고 불타서 기울 때 물로 뛰어든 적병들이 모두 적의 깃발 아래에서 익명의 죽음을 죽었다 하더라도, 죽어서 물 위에 뜬 그들의 죽음은 저마다의 죽음처럼 보였다. 적어도, 널빤지에 매달려서 덤벼들다가 내 부하들의 창검과 화살을 받는 순간부터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들의 살아 있는 몸의 고통과 무서움은 각자의 몫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각자의 몫들은 똑같은 고통과 똑같은 무서움이었다 하더라도, 서로 소통될 수 없는 저마다의 몫이었을 것이다. 저마다의 끝은 적막했고, 적막한 끝들이 끝나서 쓰레기로 바다를 덮었다. 그 소통되지 않는 고통과 무서움의 운명 위에서, 혹시라도 칼을 버리고 적과 화해할 수도 있을 테지만 죽음은 끝내 소통되지 않는 각자의 몫이었고 나는 여전히 적의 적이었으며 이 쓰레기의 바다 위에서 나는 칼을 차고 있어야 했다. 죽이되, 죽음을 벨 수 있는 칼이 나에게는 없었다. 나의 연안은 이승의 바다였다.
명량에서의 일들을 적은 장계를 조정에 보냈으나 한 달이 넘도록 유시가 없었다. 종사관 김수철이 나에게 제출한 장계 초안은 정직했고, 정직한 만큼 어리숙했다.
김수철의 초안은 사실에 입각하려고 애썼고, 확인된 것과 확인되지 않은 것들을 분명히 구분했다. 10만쯤으로 되어 보이는 적병들이 몰려왔다가 8만쯤으로 되어 보이는 적병들이 죽었고 적선 1백여 척을 깨뜨렸다고 김수철은 썼다. 적의 시체가 바다에 가득 떴으나 전투 상황이 급박하여 다만 머리 여덟 통을 수습해서 도원수부로 보냈다고 김수철은 글을 끝맺었다. 나는 김수철의 초안을 대폭 수정했다. 적병의 숫자를 모두 지웠고, 포격과 불화살로 깨뜨린 적선은 30척이며, 적의 수급 여덟을 얻었다고 고쳤다. 그것도 모두 사실이었다. 깨어진 적선이 얼마인지 헤아릴 길은 없었으나 아군의 공격으로 깨드린 적선은 30척이었고 나머지는 물살에 휘말리면서 적선들끼리 부딪혀 깨어졌다.
깨어지고 불타면서 경상 해안 쪽으로 밀려난 적선의 적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따라가보지 않아서 알 수 없었다. 전투 상황이 급박하여 죽어서 뜬 적병들의 머리를 일일이 벨 수 없었고, 수급 챙기기에 부지런했던 원균도 이미 죽고 없었다. 죽은 적병의 머리 여덟을 챙겼는데, 그것들은 모두 아군의 배로 넘어들어 왔다가 갑판 위에서 칼을 맞아 죽은 자들이었다.
임진년에 여러 포구에서 이겼을 때, 매번 적병의 숫자를 장계에 써 보낸 것이 5년이 지난 정유년에 조정에서 문제가 되었다. 전공을 허위로 보고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조정을 능멸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죽어야 할 죄목의 하나였다. 견내량에서 이겼을 때부터 나는 장계에 적병의 숫자를 적지 않았다. 그날 견내량 싸움을 끝내고 한산 통제영으로 돌아와 장계를 쓸 때, 나는 그 숫자가 어느 날 나를 죽이게 되리라는 예감에 몸을 떨었다. 그날 밤 나는 종사관을 물리치고 밤새도록 혼자 장계를 썼다. 한산 통제영에서 장계를 쓰던 임진년의 여름밤은 달이 밝았다. 나는 내 무인된 운명을 깊이 시름하였다. 한 자루의 칼과 더불어 나는 포위되어 있었고 세상의 덫에 걸려 있었지만, 이 세상의 칼로 이 세상의 보이지 않는 덫을 칠 수는 없었다. 한산 통제영에서 그리고 그 후의 여러 포구와 수영에서 나는 자주 식은땀을 흘렸고, 때때로 가엾고 안쓰러워서 칼을 버리고 싶었다.
명량 전투에 관한 소문은 내가 보낸 장계의 범위를 넘는 것이었다. 그 소문은 명나라 총병부의 정탐들이 퍼뜨리는 것 같았다. 나는 등골이 으스스했다.
명량의 장계를 보낸 지 두 달 만에 논공행상이 내려왔다. 선전관은 오지 않고, 조정의 명을 받들어 도원수부가 시행했다. 거제 현령 안위가 정삼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고 전투에 참가했던 여러 읍진 수령과 군관들이 승진했다. 나에게는 상금으로 은전 스무 냥을 보내왔다. 스무 냥의 무게와 질감은 섬뜩했다. 그 스무 냥 속에서 남쪽 바다를 들여다보는 임금의 눈은 가늘게 번뜩이고 있었다.
스무 냥이 내려온 지 이틀 뒤에, 임금이 보낸 선전관 이원길이 목포 앞바다 고하도 수영에 도착했다. 이원길은 수하를 거느리고 병영 막사 공사장까지 나를 찾아왔다. 서울 출신 문관인데, 바다를 평생 처음 본다고 했다. 몸매가 가냘팠고 흰 손가락이 길었다. 먼 길을 온 사람 같지 않게 그는 의관이 반듯했고 여독의 기색이 없었다. 수군 병영의 온갖 너저분한 풍경에 그는 자주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공사장 천막에서 그를 맞았다. 나는 인사했다.
객고가 크시겠소. 전하께서 수군을 이처럼 염려하여 주시니 감읍할 뿐이오.
전하의 근심이 실로 깊소이다. 달아난 배설 말이오.
명량 전투 직전에 탈영 도주한 경상 우수사 배설을 체포해서 끌고가는 것이 임무라고 그는 밝혔다. 그가 데리고 온 부하들 중에는 무관들이 섞여 있었다. 배설은 이미 수군에서 도망쳤는데, 배설을 체포하는 일로 선전관이 남해의 수군 수영에까지 온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배설은 이미 달아났지 않소? 배설을 잡으려면 이리로 오실 게 아니라 그의 본가 마을로 가셔야 하지 않겠소? 경상도 성주 말이오.
통제공, 그게 그리 간단치가 않소이다. 성주에도 군사들을 보냈으나 잡지 못했소. 배설이 성주에 들어온 흔적도 찾지 못했소. 배설이 비록 달아났다 하나 본래 담력 있는 무장이었소. 따르던 장졸들도 많았던 것으로 아오. 이자가 달아나서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전하의 근심이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오.
나는 겨우 알았다. 임금은 수군 통제사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명량 싸움의 결과가 임금은 두려운 것이다. 수영 안에 혹시라도 배설을 감추어놓고 역모의 군사라도 기르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그것이 임금의 조바심이었다.
이원길은 열흘 동안 수영에 머물렀다. 이원길은 데리고 온 수하들을 풀어 병영 안을 모두 뒤졌고 수영 인근 백성들의 마을 헛간까지 뒤졌다. 이원길은 명량 전투 이전과 이후의 장졸들의 숫자를 점검했고 각 읍진의 탈영자 숫자를 확인했다. 이원길의 수하들이 수영의 모든 군관들을 불러서 배설의 탈영 경위와 탈영 직전 상황을 수사했다. 이원길의 수사의 초점은 배설이 수영에서 탈영했느냐 아니냐에 맞추어져 있었다. 이원길은 귀로에 우수영, 벽파진, 삼지원까지 뒤지고 돌아갔다.
나는 돌아가는 이원길을 전송하지 않았다. 이원길이 돌아가는 날짜를 나는 알지 못했다. 그날 나는 목수들을 데리고 앞 섬의 산속으로 들어가 신축 막사에 쓸 목재를 실어내고 있었다. 산속 가파른 비탈에서 목수 한 명이 굴러내리는 나무에 깔려 죽었다. 내 종사관 김수철이 돌아가는 이원길 일행에게 점심을 차려내고 건어물을 싸주어 보냈다.
이원길이 돌아간 지 보름 뒤에 임금이 보낸 면사첩을 받았다. 도원수부의 행정관이 면사첩을 들고 왔다. '면사' 두 글자뿐이었다. 다른 아무 문구도 없었다.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했으며 임금의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은 죄에 대하여 죽음을 면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면사첩을 받던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나는 '면사' 두 글자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죄를 사면해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죽이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너를 죽여 마땅하지만 죽이지는 않겠다,고 임금은 멀리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면사' 두 글자 속에서, 뒤척이며 돌아눕는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글자 밑의 옥새는 인주가 묻어날 듯이 새빨갰다. 칼을 올려놓은 시렁 아래 면사첩을 걸었다. 저 칼이 나의 칼인가 임금의 칼인가. 면사첩 위 시렁에서 내 환도 두 자루는 나를 베는 임금의 칼처럼 보였다. 그러하더라도 내가 임금의 칼에 죽으면 적은 임금에게도 갈 것이었고 내가 적의 칼에 죽어도 적은 임금에게도 갈 것이었다. 적의 칼과 임금의 칼 사이에서 바다는 아득히 넓었고 나는 몸 둘 곳 없었다.
면사첩을 받던 날, 적은 오지 않았다. 명량에서 흩어진 적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경상 해안의 여러 포구에서 다시 분산된 중심들을 도모하고 있다는 소문만이 흘러들어 왔다. 소문은 비 오는 바다 위의 안개와도 같았다.
종사관 김수철이 저녁때 막사 신축 공정과 수군 징모 실적을 보고하는 일로 내 숙소에 들었다. 서안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김수철은 실눈을 뜨고 담벽에 걸린 면사첩을 들여다보았다. 김수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었을 때 김수철은 내 함거의 뒤를 따라 서울까지 걸어서 올라왔었다. 내가 하옥되었을 때, 김수철은 임금을 대면했다. 일개 지방 수영의 종사관에 불과한 그가 어떻게 임금을 대면할 수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아마 영의정 류성용이 길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김수철은 임금 앞에서 이마로 대전 마루를 찧으며 울었다. 나를 심문하던 위관들이 김수철의 일들을 말해주었다. 그때 김수철은 울면서 말했다고 한다.
전하, 통제공의 죄를 물으시더라도 그 몸을 부수지 마소서. 전하께서 통제공을 죽이시면 사직을 잃으실까 염려되옵니다.
임금이 대답했다.
너희들이 남쪽 바다에서 사직을 염려했느냐?
김수철은 수영을 이탈한 죄로 곤장 50대를 맞고 풀려났다.
김수철의 시선은 오랫동안 면사첩에 박혀 있었다. 그가 눈물을 떨구었는데, 그의 얼굴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환갑연의 덕담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으리, 오래오래 사십시오.
알았다. 내 그럴 작정이다.
보고는 내일로 미루리다. 편히 주무십시오.
그래라. 피곤하니 물러가라.
김수철은 들고 왔던 문서 두루마리를 펼치지 않은 채 그대로 들고 갔다.
젖냄새
내 셋째 아들 이면은 나보다 먼저 적의 칼에 죽었다. 적의 칼이 아비 자식의 순서를 따라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정유년 명량 싸움이 끝나고 내가 다시 우수영으로 수군진을 옮긴 가을에, 면은 아산 고향에서 죽었다. 면은 어깨로 적의 칼을 받았다. 적의 칼이 면의 몸을 세로로 갈랐다. 죽을 때, 면은 스물한 살이었다. 혼인하지 않았다.
아내가 면을 낳을 때 나는 함경도 북쪽 끝 두만강가 삼수에서 여진족과 마주치고 있었다. 거기는 허천강이 두만강으로 합쳐지는 어귀의 산속이었다. 산굽이마다 작은 보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나는 육군의 종팔품 권관이었다. 저녁이면 눈 덮인 봉우리들이 보라색으로 타올랐고 눈보라 속에 출렁거리는 산들의 능선 위로 백두산은 차갑고 높았다. 그때 나는 서른세 살의 젊음이었다. 노루를 계곡으로 몰아내리고, 눈에 빠진 노루를 쏘아 병영으로 끌고 와서 구워먹었다. 노루고기는 향기로웠고 허파 가득히 밀려드는 찬바람은 달았다. 그때, 베어야 할 것들 앞에서 종팔품 젊은 권관의 칼은 날래고 순결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칼로써 지켜내야 하고 칼로써 막아내야 할 세상의 의미를 돌이켜볼 수 없었고, 그 하찮음들은 끝끝내 베어지지 않는다는 운명을 알지 못했다.
여진족들은 정규 편성이 없었다. 그것들은 군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족속 전체가 군대였다. 군대라기보다는 산짐승에 가까웠다. 언제나 열두어 명씩 무리를 지어 달려들어 치고 빠졌다. 아군의 진과 보가 물러서면 그것들은 백여 명씩 들이닥쳐 백성을 죽이고 작물과 가축과 부녀들을 끌고 갔다.
그것들의 싸움은 그것들의 생업이었다. 그것들은 빠르고 예민했으며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것들은 삽시간에 모이고 흩어졌다. 소굴을 알 수 없었으므로 사냥을 하듯이 추격해서 하나씩 없애야 했다. 삼수갑산의 눈 속을 나는 산짐승처럼 뛰어다녔다.
밤이면 전나무의 우듬지들이 쌓인 눈을 이기지 못해 쩍쩍 부러져나가면서 비명을 질렀다. 군막 안 노루가죽 안에서 잠드는 저녁의 피로는 몸에 뿌듯했고, 밤마다 깊이 잠들어 아침이면 내가 알지 못하던 낯설고 새로운 힘이 내 팔다리에 가득 차 있었다.
거기서, 면의 출생을 알지 못한 채 나는 다시 젊은 아버지였다. 삼수갑산에서 임기를 마치고 고향 아산으로 돌아왔을 때 면은 옹아리를 하면서 첫돌을 넘기고 있었다. 그 아이는 돌이 지나도록 젖을 토했고 푸른 똥을 쌌다. 젖이 덜 삭았는지 똥에서도 젖냄새가 났다. 아내는 변방에서 돌아온 남편을 첫날밤보다도 더 수줍어했다. 아내의 가슴에서는 젊은 어머니의 비린 몸냄새가 났고 어린 면은 입 속이 맑아서 그랬는지 미음을 먹이면 쌀냄새가 났고 보리차를 먹이면 보리 냄새가 났다.
내가 보기에도 면은 나를 닮았다. 눈썹이 짙고 머리 숱이 많았고 이마가 넓었다. 사물을 아래서부터 위로 훑어올리며 빨아당기듯이 들여다보는 눈매까지도 나를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 눈매는 내 어머니의 것이기도 했다. 시선의 방향과 눈길을 던지는 각도까지도 아비를 닮고 태어나는 그 씨내림이 나에게는 무서웠다. 작고 따스한 면을 처음 안았을 때, 그 비린 젖냄새 속에서 내가 느낀 슬픔은 아마도 그 닮음의 운명에 대한 슬픔이었을 것이다.
면이 태어난 후에도 종팔품 권관인 나는 함경도 국경과 남해안의 수군진들을 2,3년 도리로 옮겨다녔다. 면은 제 어미와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개구쟁이 때부터 면은 날이 예리한 연장으로 나무나 기왓장을 저미고 자르고 깨뜨려서 모양을 바꾸어놓는 장난을 좋아했다. 그 아이는 연장의 날에 부딪혀오는 사물의 저항을 신기해하는 듯했다. 면의 장난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저것도 별 수 없이 사내로구나' 싶어서 속으로 눈물겨웠다.
무과에 응시하기도 전에 면은 죽었지만, 면의 칼 솜씨는 크고도 섬세했다. 면은 상대의 공세를 극한에까지 유도해 놓고, 그 극한이 주저앉는 순간의 허를 치고 들어가서 살(殺)했다. 적의 칼이 오른편 위에서 내려올 때 면의 칼은 적의 칼을 받아내기보다는 적의 왼편 허를 향해 나아갔다. 발이 늘 먼저 나아가 칼의 자리를 예비하고 있었다. 칼을 낮추고 있을 때도, 면의 칼은 머리 위로 보이지 않는 공세의 기운을 광배처럼 거느렸다. 면의 칼은 수세 안에 공세를 포함하고 있었고, 수세와 공세 사이에 간격이 없었다. 둥글게 말아나가는 부드러움 안에 찌르고 달려드는 격세가 살아 있었고 찌르고 나면 곧 둥글어졌다. 아름다운 솜씨였다.
명량 싸움을 끝내고 암태도로 돌아가는 물길 위에서 나는 문득 고향 아산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적장 구루지마의 머리를 돛대에 걸었으므로, 적들은 내 아들의 머리라도 얻으려 할 것이었다. 그때 면은 고향에서 제 어미와 할머니 그리고 어린 조카들을 건사하고 있었다.
육지의 적들이 진로를 돌연 아산 쪽으로 돌려, 아산의 고향집과 인근 마을들을 불질렀다는 소식을 나는 암태도에서 들었다. 병조의 공문서를 들고 온 군관이 고향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산에는 관군이나 의병이 주둔하고 있지 않았다. 적들은 이순신의 고향을 노린 것이 분명했다. 가토의 특공대 50여 명이었다. 적들은 마을을 불지른 후 곧 본대로 돌아갔다. 밤중에 기습을 당한 면은 가족들을 데리고 어라산 위로 달아났다. 산 위에서 면과 어린 조카들은 불타서 무너져내리는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적이 면을 죽이지 못했으므로 적들은 또 올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면이 혼자서 감당해야 할 외로운 몫이었다. 그때 나는 다시 함대를 우수영으로 옮겼다. 면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는 우수영으로 왔다. 큰형님 집안의 종 치수가 왔다. 치수는 말더듬이에 애꾸였는데, 몸이 다부지고 날랬다. 면이 적의 칼에 죽을 때 곡괭이를 들고 함께 싸웠다고 했다. 치수는 싸움의 경위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 나는 말더듬이 치수에게서 들었다.
적들은 다시 아산 고향 마을로 들이닥쳤다. 면은 가족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와 불타다 남은 사랑채를 고쳐서 기거하고 있었다. 읍내에서 사람이 달려와 적들이 마을로 향했다고 알렸다. 면은 가족들을 다시 산 위로 대피시켰다. 면은 사노 5명을 데리고 마을 어귀 개울가로 나아갔다. 적은 말 탄 장수가 지휘하는 30여 명이었다. 조선인 포로를 끌고 와서 면을 찾고 있었다. 면과 사노들은 개울 이쪽편 둑방에 몸을 숨기고 활을 쏘았다. 개울 건너편에서 적병 10명이 거꾸러졌다. 적들은 무릎까지 빠지는 개울물로 뛰어들었다. 화살이 날았고 적병 다섯이 개울물 속에서 쓰러졌다. 개울을 건넌 적들은 둑방을 넘어서 달려들었다. 사노 셋이 적의 칼에 쓰러졌고 칼을 빼든 적들이 면을 둘러쌌다.
면은 정면 상방에서 달려드는 적의 칼을 왼쪽으로 피했다. 적의 칼이 땅바닥을 내리쳤다. 면은 다가서면서 적의 오른쪽 허를 찔렀다. 찔린 적이 쓰러지기도 전에 면은 다시 세를 수습해서 뒤로 돌아섰다. 돌아서면서, 달려드는 적의 칼을 맞받아쳤다. 적의 칼이 옆으로 밀렸다. 면은 다가서면서 적의 허리를 찌르고 다시 물러서면서 돌아섰다.
허공을 가르던 면의 칼이 갑자기 세의 방향을 바꾸어 왼편의 적을 거슬러 찔렀다. 다시, 면은 돌아서서 칼끝을 낮추었다. 좌우를 노리던 면의 칼이 허공으로 치솟아 돌면서 뒤쪽의 적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면은 돌아서지 못했다. 다시 돌아서려는 순간, 적의 칼이 면의 오른쪽 허벅지를 찔렀다. 면은 왼쪽 다리로 버티고 서서 자세를 낮추었다. 살아남은 적은 셋이었다. 3명의 적을 앞에 두기 위하여, 면은 거듭 뒤로 물러섰다. 허벅지에서 피가 흘러 신발이 미끈거렸다. 면의 자세는 점점 낮아졌다. 면은 뒤쪽으로 퇴로를 뚫지 못했다. 반쯤 구부러진 면은 칼을 높이 치켜들어 머리 위를 막아냈다. 위로 뛰어오른 적이 내려오면서 면의 머리 위를 갈랐다. 면은 비틀거리면서 피했다. 적의 칼이 땅바닥을 쳤을 때 면의 칼은 다시 나아가 적의 허리를 베었다. 그리고 나서 면의 오른편 다리가 꺾여졌다. 면이 다시 세를 수습하려고 몸을 뒤트는 순간, 적의 칼이 면의 오른쪽 어깨를 갈라내렸다. 면은 칼을 놓치고 제 피 위에 쓰러졌다. 스물한 살이었고, 혼인하지 않았다.
마님과 조카들은 어떠하더냐?
적들이 물러간 뒤 산에서 내려오셔서 막내 아드님 시신을 붙잡고 통곡하시다 실신하셨습니다. 큰댁 어르신께서 모시고 갔습니다.
시신은 거두었느냐?
큰댁에서 거두시어 종택 뒷산에 모셨습니다. 묏자리에 흙이 곱고 돌멩이나 풀뿌리가 없었습니다. 오늘이 삼우라고 들었습니다.
알았다. 가거라.
면의 부고를 받던 날, 나는 군무를 폐하고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환도 두 자루와 면사첩이 걸린 내 숙사 도배지 아래 나는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 바람이 잠들어 바다는 고요했다. 덜 삭은 젖내가 나던 면의 푸른 똥과 면이 돌을 지날 무렵의 아내의 몸냄새를 생각했다. 쌀냄새가 나고 보리 냄새가 나던 면의 작은 입과 그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아리를 생각했다. 날이 선 연장을 신기해하던 면의 장난을 생각했다. 허벅지와 어깨에 적의 칼을 받고 혼자서 죽어갈 때의 면의 무서움을 생각했고, 산 위에서 불타는 집을 내려다보던 면의 분노를 생각했다. 쓰러져 뒹굴며 통곡하는 늙은 아내를 생각했다. 나를 닮아서, 사물을 아래에서 위로 빨아당기듯 훑어내는 면의 눈동자를 생각했고, 또 내가 닮은 내 죽은 어머니의 이마와 눈썹과 시선을 생각했다. 젊은날, 국경에서 돌아와 면을 처음 안았을 때, 그 따스한 젖비린내 속에서 뭉클거리며 솟아오르던 슬픔을 생각했다. 탯줄에 붙어서 여자의 배로 태어나는 인간이 혈육의 이마와 눈썹을 닮고, 시선까지도 닮는다는 씨내림의 운명을 나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송장으로 뒤덮인 이 쓰레기의 바다 위에서 그 씨내림의 운명을 힘들어하는 내 슬픔의 하찮음이 나는 진실로 슬펐다.
몸 깊은 곳에서 치솟는 울음을 이를 악물어 참았다. 밀려내려갔던 울음은 다시 잇새로 새어나오려 했다.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면의 죽음을 알아챈 종사관과 군관들은 내 앞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옆방에는 종사관 김수철이 보고 서류를 부시럭거리고 있었고 마루 밖 댓돌 앞에는 창을 쥔 위병이 번을 서고 있었다. 저녁때 나는 숙사를 내와 갯가 염전으로 갔다. 종사관과 당번 군관을 물리치고 나는 혼자서 갔다. 낡은 소금 창고들이 노을에 잠겨 있었다. 나는 소금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마니 위에 엎드려 나는 겨우 숨죽여 울었다. 적들은 오지 않았다.
생선, 배, 무기, 연장
정유년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전선 7척을 새로 만들었다. 적들이 한동안 오지 않아서, 배 만들기에 좋았다. 내륙 관아에서 모아 온 목수 30명을 우수영으로 데려왔고, 경계 병력을 제외한 전 장졸들을 벌목과 목재 운반에 투입했다. 여러 읍진에 분산되어 있는 조선소들은 목재의 비축량과 목수의 숫자가 고르지 않아서 조선소마다 공정이 들쭉날쭉했고 목수들의 솜씨도 차이가 났다. 발진포에서는 대팻날이 뭉그러지고 톱날에 이가 빠졌는데, 갈아 끼울 날이 없어서 일손을 놓고 있다고 보고해 왔다. 발진포 만호는 대팻날과 톱날을 보내달라고 사람을 보냈다. 울포에서는 갑판 밑에 까는 삼베와 나무못을 요청했다. 수군 통제사가 주머니 속에 대팻날을 넣고 있는 것도 아니고, 조정에서 나무못을 보내줄 것도 아니었다.
여러 읍진에 흩어져 있던 조선소들을 모두 우수영으로 불러들였다. 목재와 연장과 목수들을 나누어 쓰도록 했고 권관 2명과 만호 1명을 배속시켜 감독하게 했다. 통합된 조선소는 우수영 왼쪽, 진도 망금산을 마주보는 물가에 들어섰다. 진입로가 넓고 평탄해서 목재를 실은 소달구지가 드나들기 편했고 작업장 뒤쪽이 산으로 막히고 언덕이 양지발라서 겨울에도 찬바람을 맞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 조선소 쪽에서는 늘 목도를 지어 통나무를 나르는 군사들이 발을 맞추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뒤로 주저앉는 소를 때리고 당기는 군관들의 고함 소리도 들려왔다. 제주 목사가 보낸 돼지 5마리를 조선소로 내려보내 먹게 했다. 돼지를 잡던 날 조선소 군사들이 우수영 연안 백성들을 영내로 불러들여 함께 먹었으며 백성들이 술과 반찬을 가져왔다고 종사관이 보고했다. 나는 모른 척해두었다. 어두운 수평선 너머에서, 사각 사각 사각, 적의 함대가 노 저어 다가오는 환청에 시달리는 저녁이나, 환도 두 자루와 면사첩이 걸린 숙사 방에서 요를 적시는 식은땀의 한기에 깨어나는 새벽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주 조선소를 돌아보았다.
배는 살아 있는 생선과 같다. 전선과 어선이 같고, 판옥선과 협선이 매한가지다. 생선의 몸이 물을 읽듯이 배는 물을 읽고, 물을 받아내면서 나아간다. 여울을 거스를 때 생선이 때때로 몸통 전체를 뒤틀며 물에 저항하듯이, 배도 몸통 전체를 뒤틀며 파도와 파도 사이를 빠져나간다. 물에 맞서는 배의 저항은 물에 순응하기 위한 저항이다. 배는 생선과 같다. 배가 물을 거스르지만, 배는 물에 오래 맞설 수 없고, 물을 끝끝내 거절하지 못한다. 명량의 역류를 거슬러 나아갈 때도, 배를 띄워주는 것은 물이었고 배를 나아가게 하는 것도 물이었다. 생선의 지느러미가 물살의 힘과 각도를 감지하듯이 노를 잡은 격군들의 팔이 물살의 힘과 속도와 방향을 감지한다. 장수의 몸이 격군의 몸을 느끼고, 노 잡은 격군의 몸이 물을 느껴서, 배는 사람의 몸의 일부로써 역류를 헤치고 나아간다. 배는 생선과도 같고 사람의 몸과도 같다. 물 속을 긁어서 밀쳐내야 나아갈 수 있지만, 물이 밀어주어야만 물을 따라 나아갈 수 있다. 싸움은 세상과 맞서는 몸의 일이다. 몸이 물에 포개져야만 나아가고 물러서고 돌아서고 펼치고 오므릴 수가 있고, 몸이 칼에 포개져야만 베고 찌를 수가 있다. 배와 몸과 칼과 생선이 다르지 않다.
함경도 국경 근무를 마치고 나서도 나는 승진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종팔품이었다. 종팔품 수군 만호가 되어 남해안 발포진에 부임했을 때, 처음 보는 바다는 외면하고 싶도록 두려웠다. 나는 바다와 맞선다는 일을 상상할 수 없었고, 그 위에서 적과 싸운다는 일도 내용과 질감이 떠오르지 않았다. 바다는 다만 건널 수 없고, 손댈 수 없는 아득함으로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때 발포진은 남루하고 쇠락한 포구였다. 갯가였지만 낡은 고기잡이배 두어 척이 뻘밭에 처박혀 있을 뿐, 밭농사로 연명하는 백성들은 야위어서 눈이 커 보였다. 다만 물과 뻘과 하늘뿐이어서, 사직의 그림자는 자취도 없었다. 거기는 아무의 나라도 아닌 것처럼 차고 스산했다. 백성들은 가렴주구의 혈세를 소잔등의 짐처럼 짊어지고 낮게 엎드려 있었다. 만호진은 석축이 무너져내렸고, 석축이 끝나는 물가에 양쪽 노가 모두 부러져버린 판옥선 2척과 구멍 뚫린 협선 10척이 시퍼런 물이끼를 뒤집어쓴 채 묶여 있었다. 그것이 만호진 수군의 전부였다.
그때 발포 만호진의 배들은 싸움의 도구라 하기에는 눈물겨웠으나 나는 그 깨어진 판옥전선을 들여다보면서 처음으로 배의 몸과 나의 몸을 동일한 조건의 목숨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물 위에서 나아가고 물러서는 일은 모두 다 몸의 일이었고, 배와 몸이 다르지 않았다. 임진년의 옥포, 한산도, 안골포에서도, 정유년의 명량에서도 배와 몸은 다르지 않았다.
명량 싸움에서 돌아온 판옥전선들 중 3척을 우수영 조선소에 끌어다 놓고 해체했다. 이음새가 삐걱거렸고 밑창이 썩어 있었다. 해체된 목재들 중 쓸 만한 것들을 골라서 작은 협선을 만들게 했다. 섬의 나무들은 키가 작고 구부러져서 목재로 쓸 수가 없었다. 송진만을 뜯어오게 했다. 거제도에 높고 곧은 소나무숲이 좋았으나 거제도 소나무는 적의 배에 쓰일 것이었다. 연안의 해송을 베어냈고 안면도에 군사를 보내 홍송을 베어 뗏목으로 끌고오게 했다.
조선소에서 나는 때때로 목수들의 일을 눈여겨 들여다보았다. 목수들은 둥근 고임목을 괴고 그 위에 선체를 만들어나갔다. 고임목은 선체를 진수시킬 때 바퀴 구실을 했다. 배 밑창에 목재를 댈 때 이음새에 송진을 처발랐다. 목재를 포개서 붙일 때는 나무못을 박았다. 목을 수직으로 박지 않고 비스듬히 박아 위아래를 관통시켰고 남은 못대가리를 대패로 밀어냈다. 이물과 고물을 얹을 때는 나무못을 쓰지 않고 목재의 접합부를 파내서 사개를 물렸다. 갑판은 대청마루를 깔듯이 장귀틀에 잇대서 목재를 물려나갔고 갑판 밑에 두꺼운 삼베를 깔았다. 대나무 속을 긁어내서 죽처럼 만든 뱃밥을 모든 틈새마다 이겨넣었다. 송진기가 많은 목재는 늘 물에 닿는 아래쪽에 썼고 결이 촘촘하고 단단한 박달나무로 멍에를 박았다. 참죽나무 가운데 토막을 다듬어서 노를 깎았다.
목수들이 배를 만들어내는 일은 사람의 몸을 빚어내는 일과 흡사했다. 싸우는 바닷가에서 싸움배를 만들 때도, 목수들의 대패와 톱은 연장으로서 평화로워 보였다. 우수영 통합 조선소에서 연장과 무기 사이의 거리가 먼 것인지 혹은 가까운 것인지 나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전선 7척을 진수시키던 날도 나는 그 거리를 가늠하지 못했다. 진수하던 날 새 배에서는 송진 향기가 났다. 목수들이 뱃전에서 시루떡을 바다에 던졌다. 군관들이 새 배를 끌고 나가 연안을 한 바퀴 돌며 총통을 쏘아댔고, 장졸들이 배 위에서 함성을 질렀다. 나는 우수영 쪽 물가에 앉아 있었다.
사지(死地)에서
정유년 가을에, 내륙에서 적의 육군은 밀리고 있었다. 적의 수군은 명량 수로에서 깨어졌다. 서해를 북상해서 한강으로 진공하려던 적의 수군 주력은 명량 수로를 통과하지 못했다. 명량에서 적은 섬멸적 타격을 입고 흩어졌다. 그때, 가토가 지휘하는 적의 육군 주력은 충청, 경기를 압박했고 관군의 방어선은 한강 유역으로 밀려나 있었다. 한강을 멱통으로 삼아 수륙합동작전으로 서울을 다시 빼앗으려던 적의 전략은 일단 분쇄되었다. 해로를 통한 보급이 끊기고 겨울이 닥쳐오자 적의 육군 주력은 더 이상 북상하지 못했다.
한강 이북에서 주춤거리던 명의 육군이 공세로 전환하자 적의 육군 부대들은 방면별로 후퇴했다. 경상 내륙까지 깊이 진출했던 가토의 부대는 창녕을 지나 남쪽을 향했고, 금강을 넘어 경기 접경까지 올라갔던 고니시의 부대는 순천까지 내려왔다. 명군은 접전하지 않았다. 명군은 전투를 피해가면서 달아나는 적들을 남해안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적은 신속히 이동했고, 온전히 이동했다. 포로로 잡힌 조선 백성들이 적장의 가마를 메었고 총포와 말먹이를 실은 수레를 끌었다.
붙잡힌 조선 계집들이 적장들의 가마에 일신을 바쳤고 조선 백성 풍물패들이 이동하는 적의 대열 맨 앞에서 풍악을 울렸다. 적들은 이기고 돌아가는 개선의 대열처럼 풍악을 앞세우고 후퇴했다.
길에서 쓰러진 조선 계집과 포로들을 마차바퀴로 뭉개버리고 적들은 또 다른 고을의 조선 백성들을 끌어갔다. 적들이 지나간 마을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적의 말똥에 섞여나온 곡식 낟알을 꼬챙이로 찍어 먹었다. 아이들이 말똥에 몰려들었는데, 힘없는 아이들은 뒤로 밀쳐져서 울었다. 사직은 종묘 제단 위에 있었고 조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적의 육군 주력은 그렇게 남하했다. 적은 경상도 울산에서 전라도 순천에 이르는 남해안 8백 리 연안포구마다 성을 쌓고 장기 농성 태세로 들어갔다. 명군은 더 이상 적을 압박하지 않았다. 명량 수로에서 무너진 적의 수군은 경상 해안으로 물러가 적의 육군에 가세했다. 일본에서 새로 건조한 전선들이 바다를 건너와 부산포와 울산으로 들어왔다.
적은 남해안에 수륙연합의 총병력을 집중시켰다. 집중된 중심은 부산포나 울산인 듯했고, 연안의 포구마다 분산된 중심들이 들어서 있었다. 적은 육군의 지상 거점들과 수군의 기동력을 다시 접속시키고 있었고, 그 서쪽 전진기지는 순천이었다. 순천에서 부산에 이르는 적의 포구들은 봉화와 경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순천은 우수영에서 한나절 물길이었다. 승주 조계산 방면에 박아둔 승군 정탐들이 산줄기를 넘어 우수영에까지 와서 적의 동태를 알렸다. 경상 해안 쪽 적의 군비는 순천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북상 육로가 막힌 적들은 다시 남해를 돌아서 한강을 겨누는 수로에 전투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우수영에서 순천은 너무나 가까웠다.
적의 수류합동군이 물길을 따라 서진한다면, 다음번에 내가 죽어야 할 자리는 명량은 아닐 것이었다. 나의 사지는 훨씬 더 뒤로 물러선 자리라야 마땅했다. 적은 이미 명량 수로를 겪었다. 순천에서 발진하는 적의 함대는 명량으로 들어오지 않고 진도 남쪽을 우회할 것이었다. 적의 주력이 다시 명량으로 들어온다 해도 적은 모든 화력을 선두 대열에 배치할 것이었다. 적의 주력이 명량으로 들어오고 동시에 별동함대가 전도 남단을 우회한다면, 명량은 적을 맞을 자리가 아니었다.
정유년 겨울에, 적은 가까이 다가와 있었고, 가까운 자리에서 점점 커지고 있었다. 임진년처럼, 함대를 몰고 포구마다 적을 찾아다니면서 걷어낼 수도 없었다. 적은 이미 연안에 육상 기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해 가을이 다 가도록 적은 오지 않았고, 나는 우수영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제 다시 적이 온다면 우수영 앞 명량 수로는 죽기에 편한 자리였다. 나는 명량 수로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나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아무런 은총도 없는 자리에서 죽고 싶었다. 내가 죽어야 할 자리는 우수영보다 훨씬 더 뒤쪽이라야 마땅했다. 정유년 겨울에, 다가오는 적의 기척은 밤마다 내 몸에 느껴졌다. 승군 정탐들이 이틀 도리로 산을 넘어와 수군거리는 적정을 보고했다. 적의 육군이 순천에 집결했으므로 우수영은 육지 쪽 뒤통수가 위태로웠다. 우수영에서 머뭇거리다가, 어느 날 밤, 육지와 바다에서 협공하는 적의 야간 기습을 받고 발진하기도 전에 전멸하는 악몽에 나는 오랫동안 시달렸다. 우수영을 버려야 한다…… 버려야 한다…… 나는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지만, 우수영은 칼로 베듯이 잘라지지 않았다.
우수영을 버리고 수군진을 서해 쪽으로 옮기는 일에 관하여 나는 읍진 수령들과 의논하지 않았다. 종사관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때 장졸들은 모두 배 만드는 일에 내몰려 밤잠을 못 자고 있었고, 말이 새어나가면 수군이 움직이기 전에 수영 주변 민가의 백성들과 피난민들이 동요할 것이었다. 경상 해안이 완전히 적에게 점령당한 후 경상 연안 백성들은 전라도 서쪽 연안으로 넘어왔다. 그들은 연안과 섬에 흩어졌다. 이제 수영이 옮겨간다면 백성들은 또다시 통곡하면서 수군을 따라올 것이 분명했다. 백성들을 들여앉힐 땅이 나에게는 없었다. 우수영을 버려야 한다는 절박한 울림에 귀 기울이면서 나는 죽어야 할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답답함에 조바심쳤다.
내가 물러서야 할 자리는 전라도 서북부 연안이거나 충청도 서해안의 어느 섬이나 포구일 것이었다. 나는 충청 물길을 알지 못했다. 충청 해역에서는 한 번도 교전이 없었다. 충청 수군은 개전 이후 줄곧 전라 수군에 배속되었고 독자적인 작전 경험이 없었다. 충청 해역 수로에 관한 정보를 충청 수군에게 기대할 수 없었다.
정유년 동짓달, 바람이 순한 날을 가려 나는 전선 한 척을 내서 서해로 올라갔다. 종사관과 군관 5명을 대동했다. 나는 위도를 거쳐 고군산군도까지 나아갔다. 멀고도 낯선 뱃길이었다. 고군산군도에까지 육지에서 건너온 피난민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전선을 타고 나타난 수군들이 무서워서 게처럼 옆으로 피했다. 난데없는 수군의 출현으로 피난민들은 겁에 질렸다. 그들은 어느 나라 백성 같지도 않았다. 그들은 연안에서 연안으로 이동하는 철새의 무리들처럼 보였다. 썰물의 갯벌에 겨울 철새들이 부리를 박고 있었다.
고군산군도와 위도는 수군 기지를 풀 만한 곳은 아니었다. 섬 앞바다가 막힌 데 없이 넓어서, 죽기에 편한 자리였다. 죽을 자리가 아니었고 싸울 자리도 아니었다. 나는 배를 육지 쪽으로 돌려 연안을 돌아보았다. 섬으로 가려는 피난민들이 포구마다 모여 있었다. 봉두난발의 부녀들이 양지쪽에서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서해는 크게 밀리고 크게 썰었다. 작은 강들이 밀물로 달려드는 바다를 내륙 깊숙이 받아들였다. 썰물의 갯벌이 아득히 넓어서 함대가 드나들기는 불가능해보였다.
어디로 물러서야 할 것인지 나는 막막했다. 위도와 연안 사이의 바다에서 내가 죽는다면, 거기에서 한강 어귀까지는 하룻밤 하루 낮의 물길이었다. 거기는 무인지경의 바다였다. 나의 사지는 아무래도 남해 바다의 맨 서쪽 끝 언저리의 어느 바다일 것 같았다. 그 뒤로는 물러설 자리가 없었다.
군관들이 항해의 목적을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나는 다만 '연안 시찰'이라고만 대답해 주었다. 물러설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나는 다시 우수영으로 돌아왔다. 엿새간의 뱃길이었다. 돌아오는 배 위에서 나는 우수영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서해에는 물러설 자리가 없었다. 나는 우수영을 버리고 남해의 서쪽 끝 언저리로 가기로 했다. 거기가 나의 자리였다. 거기서 다시 경상 해안 쪽으로 밀고 나갈 수 있을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거기가 나의 자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마침내 적의 전체를 맞아야 하는 날은 정확하고 분명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우수영으로 돌아온 날 밤에 나는 모처럼 깊이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