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화제가 되는 영화가 개봉됐다. 볼만하다. 영화 ‘자산어보(玆山魚譜)’다. 배우 설경구가 주인공 정약전(丁若銓, 1758~1816) 역(役)으로, 그의 형제 다산 정약용(丁若鏞) 역에 류승룡이, 그리고 변요한이 흑산도 청년 장창대(張昌大) 역(役)으로, 이들이 깊게 받아들인 서학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밑바탕에 깔고, 정약전의 생애를 이야기했다. 영화 ‘동주(東柱)’를 예전에 찍은 이준익 감독이 흑백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그림같은 풍경에 사람냄새와 바닷냄새가 물씬나는 볼수록 진한 여운이 묻어나는 영화다. 칼라 시대를 넘어 3D/4D 시대에 다시 흑백영화를 본다는 것이 조금은 이상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흑백 사진이나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아날로그 감성(感性)을 되살린 참 좋은 영화다.
조선 후기를 살았던 정약전의 책 이름을 영화 제목으로 삼았다. 작품은 약전과 그의 형제 약용, 그리고 이들이 깊게 받아들인 서학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밑바탕에 깔고, 흑산도 청년 창대의 이야기를 접목했다. 성리학을 더럽히고 백성을 현혹하는 학문을 했다는 이유로 흑산도로 유배 간 약전, 그리고 그와 함께 훗날 백성을 이롭게 하는 실용서를 쓴 창대와의 우정이 영화 '자산어보'의 주요 골격이다.
자산어보의 집필자는 정약전(丁若銓)이다. 정약전은 조선후기의 유명한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의 형이다. 정약용은 위로 3명의 형이 있는데, 제일 큰 형인 정약현은 이복(異腹) 형이고, 둘째 형인 정약전과 셋째 형인 정약종은 정약용의 동복(同腹) 형이다. 이 집안은 천주실의(天主實義)를 통해 일명 서학(西學)이라 불리는 기독교(天主敎)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그 집안과 관련된 인사들은 이승훈, 이벽, 황사영 등이 모두 매형, 처남, 사위 등으로 연결된다.
정약전은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서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가, 정조(正祖)가 사망한 직후인 순조(純祖) 원년(1801)에 탄압을 위한 신유박해, 그리고 황사영백서사건 등이 터지자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정약전(1758~1816)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차남으로, 조선후기의 유명한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의 형이다. 일찍이 ‘성호사설(星湖僿說)’의 성호 이익(李瀷)에게 지도를 받으며 서양의 신(新)학문을 익혔고 이 집안은 천주실의(天主實義)를 통해 일명 서학(西學)이라 불리는 기독교(天主敎)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그 집안과 관련된 인사들은 이승훈, 이벽, 황사영 등이 모두 매형, 처남, 사위 등으로 연결된다. 정조 7년(1783) 생원시, 정조 14년 증광별시에 합격하여 승문원 부정자(종9품)에 제수되었다. 정조는 정약전의 직급이 먼저 급제한 동생보다 낮은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재위 21년 정약용을 곡산부사에 제수하면서 정약전을 특진시켜 사관(정6품)에 제수했다. 약전‧약용 형제의 인품과 탁월한 능력을 잘 알고 있는 정조의 애정 어린 배려였다.
그러나 재위 24년(1800) 정조가 독살당하면서 약전‧약용 형제의 관운도, 조선의 명운도 함께 끝났다. 1800년은 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해였다. 순조(純祖) 원년(1801)에 탄압을 위한 신유박해, 그리고 황사영백서사건 등이 터지자 수많은 명신들과 함께 약전‧약용 형제도 서학과 신앙을 받아들인 죄목으로 기약 없는 유배길에 올랐다. 이 때 전라도까지 함께 내려간 형제는 나주에서 길이 갈려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갔다. 흑산도(黑山島)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정약전은 이곳 주민 문순득(文淳得)이 해상에서 표류하다가 오키나와, 필리핀, 마카오와 중국을 거쳐서, 만 3년만인 순조(純祖) 5년(1805)에 조선으로 돌아오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를 찾아갔다. 문순득에게서 표류의 전말을 듣고 조선시대 홍어장수 표류기인 『표해시말(漂海始末)』을 저술(著述)했는데 이는 조선시대판 ‘하멜표류기’다.
순조(純祖) 원년(1801) 제주도(濟州島)에 낯선 배 한 척이 표류해 왔다. 배에는 외국인 5명이 타고 있었는데, 나라이름을 쓰라하니 막가외(莫可外)라고만하여 몰라서 중국 요녕성 성경으로 보냈다. 1802년(임술년, 순조 2년) 10월. 중국 성경의 예부에서 어느 나라사람이 알 길이 없다며 조선으로 다시 보냈다. 그 와중에 5명 중 1명 병사했다. 관청의 건물과 먹거리를 내주고 조선의 풍토와 언어를 익히라 하였다. 그러면서 4명 중 1명 또 사망하게 된다. 1807년(순조7년) 8월 10일. 제주 목사 한정운이 표류인들이 ‘여송인(呂宋人, Luzon(현재 필리핀의 루손섬)’임을 알고, 본국 송환을 상계한다. 이들 표류인을 제주에 표류해온 ‘유구인(琉球人(현재 일본 오키나와)‘들과 만나게 하니 유구인 궁평(宮平)이 여송인임을 알아차렸다. 유구사람 통사 경필진이 궁평에게 물으니, 문순득의 표류이야기를 하며 문순득 일행에게 들은 이야기를 회상하며 알려주었다. 여송국과의 외교 소통이 없고, 중국에서 이들을 송출한 예가 있어서 유구인에게 부탁하여 보내라 명하였으나, 유구인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1809년(순조 9년) 6월 26일. 통역관 문순득을 만나게 하여 여송국 방언으로 문답하니 딱 들어맞았다. 비로소 여송국의 표류인을 송환시켰다.
정약전의 유배생활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순조(純祖) 14년(1814) 그는 각종 물고기와 해조류를 포함해서 수중생물 226종(種)의 명칭, 크기, 형태, 외형의 특징, 생태, 맛, 어획 시기와 방법 등이 자세히 기록한『자산어보(玆山魚譜)』를 펴낸다.
『자산어보(玆山魚譜)』는 간단히 말해서 해양생물 백과사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정약전은 책의 서문(序文)에서 장덕순(張德順) 또는 장창대(張昌大)로 불리는 사람과 함께 연구해 이 책을 완성했다고 밝혔다.
정약전은 유배생활 16년 만인 순조(純祖) 16년(1816)에 끝내 유배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우이도에서 자신의 생(生)을 마감한다. 그런데 동생인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중이라 형의 장례(葬禮)에 참석할 수 없었다. 이때 정약전의 장례를 대신 치러준 사람이 바로『표해시말(漂海始末)』의 주인공 문순득(文淳得)이다.
조선후기는 실학의 영향으로 백과사전류의 책이 저술된다. 건축, 의학, 과학, 수학, 천문학, 생물학, 음악,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19세기 조선의 지식을 집대성한 서유구(徐有榘)의『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로 대표된다. 서유구가 순조(純祖) 6년(1806)부터 헌종(憲宗) 8년(1842)까지 36년에 걸쳐 임원(林園)에 사는 선비로서 가족을 건사하고 덕을 함양하는 데 필요한 전반적인 실용지식을 집대성했다. 이를 위해 조선과 중국, 일본의 온갖 서적을 섭렵하여 체계적으로 모은 실생활에 필요한 각종 지식과, 직접 경험해보고 듣고 관찰한 내용을 16분야로 분류, 엄밀하게 편찬 저술하기 시작했다. 관직에 복귀한 뒤 호남 지방에 기근이 들자, 굶주린 백성을 위해『종저보』를 지어 고구마 보급에 힘쓰기도 했던 풍석은, 재야나 한직에 머물렀던 당시의 여느 실학자와 달랐다. 실현 가능한 개혁을 추구하는 조정의 최고위 관료였고, 농부이자 어부, 집 짓는 목수이자 원예가, 술의 장인이자 요리사, 악보를 채록하고 거문고를 타는 풍류 선비이자 전적과 골동품의 대가, 전국 시장과 물목을 꿰고 있는 가문 경영자이자 한의학과 농학의 대가였다. 늙어 벼슬에서 물러나, 그동안 모으고 다듬고 덧붙인 엄청난 분량의 『임원경제지』를 완결한 그는 경기도 남양주 두릉에서 82세의 일기를 다했다.
이렇게 명작들이 나오자 그동안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매달려 있던 조선의 유학자들에겐 충격이었다. 실학의 영향으로『자산어보』나『임원경제지』처럼 손에 잡히는 실질적인 내용의 책을 저술했던 것은 근대화를 위한 조선 나름의 최선의 노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조선은 이후 쇠락의 길을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망국에 이르게 되면서 아쉽게도 이러한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조선시대 유배지에서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자산어보’를, 동생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집필했으리라, 고난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던 그들과 함께, 순창 군수와 전라감사를 지낸 서유구도 순조(純祖) 6년(1806)부터 헌종(憲宗) 8년(1842)까지 36년에 걸쳐 일평생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길을 열어갔다. 나와 다름을 거부하는 시대가 조선시대였다면, 아직도 이런 조선시대적 사고방식으로 사는 이들이 간혹 있다. 어느 시대든 시대 문화발전과 성숙은 다양성의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받아들이고 이를 즐길 줄 아는 수용의 마음과 태도를 가지는데서 시작된다. 이는 창의성의 근원이자 새로운 도약을 위한 출발점이다. 서로 다른 생각과 표현의 차이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 그렇게 다양함이 공존하는 풍요로운 사회를 함께 이루려는 것이 건강한 시민들의 꿈이야 한다.
글쓴이 이효상 원장 (시인, 칼럼니스트, 서지학자, 다산문화예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