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싸커코리아 원문보기 글쓴이: 싸커코리아
그러나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맛본 축구인생의 달콤함이었다. 이후 찾아온 쓰라린 시련은 유망주의 날개를 완전히 꺾어 버렸다. 축구는 더 이상 희망과 목표가 아니었고 자신의 모든 것과 같았던 축구공이 쳐다보기도 싫었을 정도로 지독한 실패였다.
구리주니어클럽에서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며 새로운 축구인생을 시작하고 있는 김창오 수석코치의 이야기다. 더 이상 축구와 인연을 맺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지만, 공교롭게도 다시 새로운 희망을 안겨준 것 역시 축구였다. 방황했던 시절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지금은 다시 축구에 푹 빠진 모습이다. 선수로서 꿈을 이루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던 것을 뒤늦게 깨우쳤다는 그의 축구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 같다.
“상심이 컸죠. 큰 뜻을 품고 벨기에까지 날아갔는데 제 뜻대로 되지 않았으니까요.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잠시 주목받다 결국 실패한 것과 다름없고, 이후 축구가 싫었습니다. 축구공도 쳐다보기 싫었어요. 다른 팀에 갈 수도 있었지만, 한 번 좌절을 맛보니 축구에서 점점 멀어지더라고요.”
현역 시절 이야기를 들려달라 하니 김창오 수석코치는 멋쩍고 씁쓸한 미소와 함께 과거를 되돌아봤다. 선수 김창오는 연세대 시절 팀의 주포로 활약하며 대학무대를 주름잡았던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0년 벨기에 주필러리그의 로얄 안트워프에서 화려한 미래를 꿈꾸기도 했다. 그와 함께 수학했던 이가 지금의 설기현(풀햄)이다. 하지만 벨기에 생활은 바람처럼 되지 않았고 머잖아 국내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주저앉지는 않았다. 2003시즌 K리그 부산아이파크에 입단하면서 선수 김창오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고 그대로 썩히기에 아까울 재능은 그렇게 다시 살아나는 듯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선수 김창오가 필드를 떠나게 된 것은 특정한 하나의 계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알게 모르게 쌓여왔던 축구에 대한 말 못할 고민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또래 선수들보다 빛났던 유망주였지만, 그 시절의 고통과 아픔이 너무나도 컸다고 한다.
“벨기에 시절요? 겉보기에는 해외진출이니까 그럴듯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돈이 없어서 밥도 굶어가며 축구했던 시절입니다. 그래도 참으면서 제 꿈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한국에서는 허황된 꿈처럼 느껴지지만, 그곳 벨기에에서는 바다건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가 눈앞에 보이니까요. 그래서 버틸 수 있었죠. 하지만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결국 월급은 고사하고 제대로 밥도 못 먹는데 어찌 축구를 하냐고 팀에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안트워프 구단 측에서, 돌아갈 테면 돌아가라고, 냉정하게 그러더군요(웃음).”
벨기에 시절의 경험이 훈장이 아닌 고통의 시간이 됐던 것에는 억울한 속사정이 숨어있다.
“계약상의 문제가 있었죠. 잘 몰랐던 제 잘못도 있지만, 중간에 에이전트가 장난을 친 것 같습니다. 일종의 사기였죠. 안트워프에서는 분명 20만불을 줬다고 하는데 정작 저는 받은 돈이 없어서 밥까지 굶었으니 어리둥절했습니다. (한국으로)돌아가라 해서 돌아온 건데, 결국 부산에 어렵게 새 출발한 뒤에도 뒷수습을 하기 위해 벨기에를 다시 찾아야하는 일까지 벌어졌으니 축구에 정이 떨어질 수밖에요.”
2003시즌 부산에서 연습생 신분으로 어렵게 새 출발을 했건만 이후 FIFA에 제소가 돼 국제미아가 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김창호는 당시 4연패의 수렁에 빠져있던 부산의 팀 사정과 맞물려 출전의 기회를 잡았는데, 그 찬스에서 2골을 터뜨리는 맹활약을 펼치면서 시즌 첫 승을 이끈 주역이 됐다. 이른바 일약 ‘연습생 스타’로 주목을 받은 게 된 것인데, 오히려 이것이 화근이었다. 그 소식이 멀리 벨기에까지 전해졌고, 이를 접한 안트워프가 소속 선수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김창오 수석코치는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위약금을 물어주고서야 겨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지켜보는 이들의 생각과는 딴판으로, 김창오 수석코치에게 있어 벨기에에서의 기억은 전혀 유쾌할 수가 없었다.
국내 무대 복귀를 위한 ‘액땜’이었으면 좋으련만, 시련은 K리그에서도 끊이지 않았다. 일단 연습생이던 2003시즌의 좋은 활약을 인정받아 소속팀과 5년 정식계약을 맺었고 비로소 빛이 드는 듯 했다. 하지만, 그는 고작 한 시즌만 더 치르고 팀에서 나와야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퇴출이다.
“포터필드 감독님이 지휘봉을 잡고 있었는데, 저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주위의 얘기를 들어보니 저를 내보내지 않으면 감독님께서 팀을 떠나시겠다며 구단 관계자들에게 으름장을 놓았을 정도였다 네요. 네, 사이가 안 좋았죠. 결국 제가 짐을 싸고 나와야 했습니다. 안트워프에서 그랬던 것처럼, 결과적으로 부산에서도 실패했죠.”
멋진 출발을 하고도 여세를 이어가지 못해 조기 퇴출당한 셈이다. 김창오 수석코치는 당시에는 억울하기도 했지만, 지금에서야 되돌아보니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었다고 인정한다. 선수가 감독에게 맞추는 것이 어느 정도는 당연한 일인데 그렇지 못했고, 앞선 고생을 잊은 채 스포트라이트 조금 받았다고 모든 면에서 나태해진 게 문제였다고 책망했다. 설상가상으로 이어진 일도 꼬였다.
“부산에서 나오면서 한 에이전트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 말로는 2~3개 구단에서 저를 원하고 있으니 도와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믿고 기다렸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에이전트와 연락이 끊겼어요. 시간이 그냥 흘러갔고 어느새 K리그 선수등록이 끝났다고 하더군요(웃음). 일이 그 지경까지 되니까, 정말 축구가 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막다른 궁지에 몰린 것과 다름없었고 그는 미련 없이 축구를 포기했다. 꿈을 품고 도전했던 벨기에 및 K리그에서의 실패도 물론 가슴이 아프지만, 믿었던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것이 더욱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전부와 다름없었던 축구가 싫어졌던 것이다.
이제 어쩔 수 없이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다. 축구라는 잎만을 먹고 살아왔던 송충이였지만,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이 남은 만큼 그는 이제 다른 잎을 먹고서라도 살아가는 게 더욱 절실했던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