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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살 손자의 북경여행길 동행
임진년 2012 여름은 수십 년이래로 폭염이라 사람이나 생물이 살아가는데 큰 불편과 견디기 힘든 고통까지 주었다. 연일 전력수급에 비상이 걸리고 가축이 백만여 마리나 폐사하고 4대강의 물은 녹조현상으로 수돗물의 적합성 여부까지 염려할 수준이란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기 불과 1개월 전에는 백년만의 한발로 온 천지의 초목이 타들어가고 식수가 부족하기까지 하여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한 가를 보여 주기도 하였다.
학생들은 여름방학을 맞이하였고 학부모들은 폭염에 아이들까지 집안에서 북적거리니 더 고달프고 바쁜 일상이다. 우리 손자 호수도 여름방학이라며 매일 마음껏 놀 궁리만 하면서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자고 주문한다. 일본 대마도를 이야기 했다가 미국의 나이아가라폭포를 말하면서도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이니 갔으면 한단다.
우리 부부는 궁리 끝에 멋 뒷날 우리 손자가 사회인이 되어 살아갈 때, 중국이 세계에 끼칠 경제, 정치 및 사회적 영향력을 생각하여 중국을 보여 주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기왕 중국을 가려한다면 그 나라의 수도(首都)를 돌아보는 것이 순서라 여기고 북경을 가기로 하였다. 손자도 대 찬성이다. 우리 세 식구는 배낭을 꾸리고 중국 북경시가지 지도를 마련하고 만리장성, 자금성, 천안문 등에 대한 사전지식을 조사하느라 분잡을 떨었다.
중국 입국비자를 받고 인천공항 하늘을 2시간 남짓 날아 북경공항 땅에 내리니 2012년 8월 3일 오후 4시다. 중국말을 한마디도 할 수 없었으니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북경공항에 내려 서툰 영어로 몇 마디 물었으나 중국인은 자국어를 매우 사랑하는지 영어로 물어도 중국말로 답해줘서 답답하던 차 마침 어느 항공사 기장이지나기에 물었더니 시원하게 알려주었다. 짐을 찾고 다소 이른 시간이었지만 저녁을 먼저 해결하려고 현지식당을 찾아들었다. 우리나라 중화요리 전문점에 가면 볼 수 있는 돌림판 식탁에 10여 가지의 튀김 요리와 볶음요리가 가득이다. 손자는 탕수육을 좋아하므로 다행히 탕수육과 닮은 것을 즐겨 먹는다. 채소도 기름에 볶아서 입맛에 맞지는 않았지만 채소볶음이 그 중 나았다. 중국차를 여러 잔 마셨다. 차(茶) 이름이 보이차라고 한다. 중국인은 기름기 많은 음식을 먹은 뒤에 차를 즐겨 마신다고 한다. 식탁에 물은 없었고 물을 달래니 사먹어야 한단다. 물 인심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일등으로 좋다. 지난해 유럽에서 15일 동안 지불한 물 값이 지금 생각해도 속상한다. 중국이 내세우는 서커스구경을 하기로 하였다.
1.북경천지서커스는 인권의 사각지대인가?
출발 때 1시간 지연되어 관광하는 순서를 조정하여 인터넷에서 봤던 중국의 서커스를 손자에게 보여주려고 베이징(北京) 둥청취(東城區/동성구)에 있는 티엔티쮜창(天地劇場/천지극장)에 입장하였다. 내가 어렸을 적인 60년대에 우리나라에도 서커스 공연이 있는 날이면 어른아이 모두 관람하는 재미가 있었다. 우리의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새로운 문화가 복합적으로 진화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져가는 서커스가 중국에서는 관광객에게는 큰 볼거리 상품으로 각광받는 뒷면에는 어두운 모습이 있다고 한다. 중국은 인구 억제책으로 한 가족 한아이만 두게 되어있는데 한아이 외에 태어난 아이는 호적에 등재할 수 없기에 20세가 될 때까지 서커스단에서 봉사하면 호적을 부여한다는 제도 때문에 중국의 서커스가 그 맥을 이어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가혹하고 비인권적 훈련으로 단련된 그들의 묘기는 감탄을 받을 만하지만 한창 자랄 나이에 맘껏 먹지도 놀지도 못하는 배우들이 안쓰럽다. 천지보장(天地寶藏)이라고 적힌 무대막이 걷히더니만 여러 명의 배우가 자전거타기, 외줄타기, 장애물 넘기, 기둥에 오르내리기, 발로 우산 돌리기, 탱탱볼 연기, 그림자공연 등 정말 깜작 놀랄만한 공연이었다. 공연을 마치고 나왔는데도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고, 천지극장을 뒤로하고 북경의 방물시장, 먹자골목으로 잘 알려진 왕부정으로 갔다.
2.왕부징(王府井/왕부정)거리는 몬도가네였다.
베이징은 우리나라 서울의 약26배정도의 크기란다. 우리나라 명동시장거리와 같은 곳이 왕부징다제(王府井大街), 즉 왕부정거리이다. 북경시의 동쪽의 동창안지에(東長安街/동장안가)에서 우스타지에(五四大街/54대가)에 걸쳐 동서로 약 1.1km, 남북으로 약 1.6km에 걸쳐 760여개의 가계들이 길 양편으로 늘어선 상점거리이다.
이곳은 일찍이 왕으로 책봉은 되었으나 권위만 있고 권력이 없는 왕들이 모여 살았던 곳에 왕실 공동우물이 있었다는 연유에서 그 이름을 왕부정이라 하였단다. 황족출신들이 있던 곳이어서인지 화려하고 호화스러운 건물과 빌딩이 많다. 거리의 서쪽으로는 중국에서도 가장 유명한 북경백화점이 있다. 상업의 요충거리라 할만하다. 중국에서 생산되는 모든 물건이 모두 모여 있어 관광객들의 쇼핑거리로도 더 많이 알려져 있는 곳이다.
중국의 음식문화는 그 역사가 깊고 요리방법도 가지각색이라 가히 음식천국이라 불릴 만하다. 중국 전통의 느낌이 물씬 나는 좁은 골목, 없는 것이 없는 잡화상거리, 기상천외한 전갈튀김, 개구리요리, 바퀴벌레튀김, 굼벵이요리, 지네튀김, 불가사리튀김, 이름모를 갖가지 생물 등을 모두 꼬치구이로 만들어 내는 중국인들의 먹거리 문화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특히 냄새만 맡아도 만년을 간다는 삭힌 두부인 초 뚜우 푸(臭豆府/취두부)는 우리가 김치를 즐겨 먹듯 중국인들로부터 사랑받는 음식이다. 신선한 과일까지 튀김으로 해먹는 중국인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나라 민족은 여러 가지 김치제조기술을 가지고 있어 ‘김치민족’이라고 한다면 중국인은 다양한 두부 만드는 방법을 한나라(漢代)때부터 사용해온 ‘또우 푸(豆腐/두부)민족’, 즉 두부민족이라 할만하다.
중국정부는 이곳 왕부정거리를 1999년 9월 9일에 중국국가문물로 지정하여 특별한 관리와 지원으로 관광객의 주머니를 열게 하고 있다. 거리의 모든 가계에서 물건을 구입할 때에는 흥정을 잘 하여야한다. 부르는 값대로 구입하면 왕 바가지를 쓰게 된다. 손자가 해외여행 때부터 모으고 있는 각국의 마그네틱을 구입하려고 값을 물었더니 1개에 20위안이라 한다. 그래서 바디랭귀지로 5개에 10위안에 달라고 했더니 거절하자 발길을 돌려가려하자 좋다며 팔겠단다. 10개에 20위안을 주고 구입했다. 손자 녀석이 할아버지 “짱”이란다. 어때요 한국의 용감한 할아버지가 확실하지요!
왕부징샤오츠지에(王府井小吃街/왕부정소흘가/왕부정먹자골목)의 밤풍경에 취하고 목을 축이려 항아리 요구르트 한 병 씩 마셨다. 색다른 맛이었다. 밤이 점점 깊어간다. 손자는 연신 피곤하다며 숙소로 가잔다. 북경의 북부지역에 위치한 5성급호텔 북경룽팰리스호텔(北京龍城麗宮酒店) 3층 숙소에 샤워하고 물기 묻은 채 호수는 잠이 들었다. 나는 낮에 준비한 고량주(45도) 한 병 비우고 늦게 아내 옆에 잠을 청했다. 북경도 매우 덮다. 에어콘 켜고 문 열어둔 채 잠을 잤다.
3.룽칭샤(龍慶峽,용경협)의 비경에 심취하다.
여행을 할 때마다 늘 갖는 느낌이지만 산이 있고 물이 있는 곳이 즐겁고 재미가 솔솔했다. 손자도 경치가 좋은 곳에서는 감탄하며 연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부르며 자신의 즐거운 감정을 함께하려는 모습에 항상 손자가 귀엽고 예쁘다. 오늘은 북경 외곽 연경(延慶)에 있는 인공호수 룽칭샤(龍慶峽,용경협)로 정하고 4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1시간 걸려 도착하였다. 중국의 고속도로에도 헬 수 없을 만큼의 차량 행렬이다. 그런데도 차는 멈추지 않고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고 있어 놀라웠다. 국내에서 듣던 이야기와는 딴판이다. 끼어드는 차가 있어도 경적한번 울리지 않았고 바쁜 것도 없었다. ‘빨리빨리’ 생활에 익숙한 나는 중국인들의 “만만디(慢慢的) ” 생활태도가 답답하였다.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였다.
용경협은 중국과 홍콩이 합작하여 1973년도에 만든 댐으로 북경의 16명소 중의 한 곳이다. 전체 면적은 119㎢이고 콘크리트 댐의 높이는 70여m로 중국의 북방 지역에서는 최대 규모로서 작은 계림(小桂林) 또는 작은 삼협(小三峽)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중국의 前 주석 장쩌민(江澤民)이 쓴 ‘龍慶峽’의 붉은 색 행서체 휘호가 입구 오른쪽 산등성을 온통 차지하고 있어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거대한 누런색의 용모양 이 댐의 왼쪽에 설치해두고 있었으나 왼지 어색하였으며 조각상 왼쪽의 거대한 높이의 수문에서 떨어지는 물의 양이 적어서 별것이었으나 많은 양의 물이 떨어진다면 장관이겠다. 용의 목구멍에서 꼬리까지 258m의 에스컬레이터가 1996년에 건설되었고 세계에서 제일 긴 길이의 에스컬레이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움직이는 계단 덕분에 쉽게 댐의 정상에 올랐다.
용경협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7km지점까지의 절경을 둘러보았다. 인공댐에 담긴 수억 톤의 물위를 유람선이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절벽을 끼고 돌아 흐르는 맑은 강물은 시시각각 그 모습을 달리한다. 만약 여기에 댐을 조성하지 않았다면 자연이 주는 순수한 감동은 어떠했을까? 그냥두지 왜 이렇게 지신(地神)의 심기를 뒤틀어 놓았는고!
유람선에서 펼쳐지는 경관은 여러 모습이다. 우리의 투박한 질그릇 공기를 엎어 놓은 형상의 봉우리, 필(붓)봉모양의 바위기둥, 큰 새(鳥)를 올려놓은 뜻한 기괴한 경관, 입을 벌린 악어형상, 코끼리가 코를 박고 있는 모양 등 거대한 기암괴석들이 펼치는 파노라마에 관광객은 자연과 일치가 된다. 댐의 중간기점에 설치된 번지점프대에서 젊은이들이 동아줄 하나에 목숨을 걸고 고공낙하를 즐기는 모습이 아찔하였으나 탄성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다.
선상관광을 마치고 선착장에서 댐 아랫길은 긴 터널로 조성하였는데 내려가는 길이 약간의 경사가 있어 걷기가 매우 편했다. 오르는 길은 기계력으로, 내려오는 길은 자연력으로 쉽게 다니게 하였으니 중국인들의 관광지 조성능력에 큰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아쉽다면 댐의 입구에 새겨놓은 장쩌민의 휘호를 호수 중간 중간에도 새겨놓은 것이 아쉬웠다.
4.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 만리장성에 오르다.
인간이 해낼 수 없는 것이 없다고는 하지만 중국의 완리창청(萬里長城/만리장성/the Great Wall of China)이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축조되었는지 경이롭기만 하다. 장성을 건설하면서 수억 명의 노동인구가 동원되었을 것이고 성을 쌓기 위해서는 거대한 석재를 높은 산등성이까지 운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 수많은 사람이 돌에 깔리거나 기타의 사고로 인하여 죽어갔을 것이다.
장성(長城)은 발해만(渤海灣)에서 시작하여 북경의 북쪽을 지나 남으로 황하를 건너고 실크로드 북측 전 구간을 지나 멀리 중앙아시아까지의 총길이가 6352km에 이르는 인류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인 것이다. 장성은 세계 7대 건축물이고 10대 불가사의이며 유네스코에서는 세계최고 군사시설로 등재하였으며 1987년도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고 중국 당국은 중국의 10대 관광명소로 지정하여 관광객 유치에 힘쓰고 있다.
장성이 달에서도 보인다고 하니 가히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성을 축조하면서 돌에 깔려죽거나 고된 노역을 견디지 못하여 죽거나 매맛아 죽은 숫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을 것이고 그때마다 죽은 자를 그 자리에 묻어 성을 쌓았기 때문에 만리장성의 또 다른 이름이 무덤장성, 즉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중국인들도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 만리장성이라고 한다. 일찍이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은 “만리장성을 올라가보지 않은 사람은 대장부라 할 수 없다.<不到長城非好漢>”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만리장성은 중국인들에게도 주요한 문화유산인 것이다.
이 성은 북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족(몽고족), 거란족, 중앙아시아 크루즈족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기원전 춘추전국시대의 제나라가 처음 쌓기 시작으로 조나라, 연나라 등이 제각기 성을 쌓았는데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성을 연결함으로써 장성의 형태를 갖게 되었고 그 후 성곽증축공사는 명나라 후기까지 계속되어 오늘날의 장성이 된 것이다.
용경협을 출발한 작은 버스는 중국에서도 장성의 보존이 가장 잘되어 있는 북경 서북쪽 팔달령 구간 성곽까지 40분간 달려왔다. 다행히 관광객이 적어 10분쯤 기다리니 케이블카가 해발 1020m지점에 내려준다. 케이블카는 4명이 타는 삭도수준이었으며 속도가 다소 빠르고 사방이 개방되어 있고 가림막대 하나에 온 몸을 의지한 채 별도의 안전장치 없이 운행하고 있어 매우 위험한 케이블카였다. 겁먹고 올라왔으나 내려 갈 걱정이 앞섰다.
장성을 올라 성벽끝단에서 올라온 방향을 조망하니 산등성을 따라 구불구불 기어가는 성벽이 산등성이를 돌아 보였다 숨었다 하기를 반복하며 멀리까지 뻗어있어 가히 명승(名勝)이고 시원시원하지만 가슴이 저며지는 연유는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초한지에 제나라 절세가인 ‘상아’는 장성공사장 돌에 깔려죽은 약혼자의 원수를 갚으려 진시황과 동침하여서는 비방사약(秘方死藥)으로 시황을 50살에 죽게 하는 내용이 있다. 성의 맨 밑바닥에 묻힌 고혼(孤魂)들이여 이제 안식을 찾으소서.
손자를 가만가만 살펴보니 힘들어하지만 만리장성에 오른 것에 감동인 모양이다. “내가 만리장성에 오다니. 꿈만 같다.”라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사진기 셧터를 연신 만지작거린다. 날씨가 더워 계속 물을 찾는다. 오를 때는 케이블카를 떨어져 탔어나 내려갈 때는 세 식구가 함께 했다. 1km높이에 매달린 삭도에 나는 무척 어지럽고 무서웠는데 손자는 신난다며 가마득한 저 아래 돌산을 가리키고 머리위로 지나는 장성들을 가리키며 중국 만리장성 구경에 빠져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손자는 아쉬운 모양이다. 손자는 방학이 끝나면 친구들에게 만리장성에 대한 경험담을 이야기할 것이고 고공 케이블카에서 즐긴 모험도 재미있게 설명하겠지.
5.북경올림픽주경기장과 인력거투어
만리장성 관광을 끝내니 해가 지려면 아직은 몇 시간 남았다. 북경으로 입성하여 "냐오차오(鳥巢, Bird's nest/새둥지)란 별칭을 가진 올림픽주경기장이 있는 올림픽공원에 도착하였다. 중국은 땅이 넓어서 인지 올림픽스타디움 주위의 건물들의 높이는 낮았으나 넓이를 크게 지은 것이 특징이었다. 2008년 8월 8일에 제29회 하계올림픽이 이곳 북경에서 열렸다. 주경기장 공식 명칭은 ‘북경국가체육장(北京國家體育場, The National Stadium)’ 이다. 이곳은 중국정부가 무려 1억 달러를 투자하고 장이머우(張藝謀/장예모) 감독이 연출해낸 웅장하고 화려하게 펼쳐진 올림픽 개막식과 폐막식, 육상경기와 축구경기가 열려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곳이다. 메인스타디움과 나란한 사각형 건물 모양의 수영장이 있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박태환선수가 200m자유형에서 중국선수를 따돌리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곳이다. 그런데 현재 중국당국이 메인스타디움의 존폐를 논한다니 아이러니하다.
그 옛날 북경시민이 시내로 나들락하는 시간을 알리는 종루(鐘樓)와 북루(鼓樓/고루)를 끼고 스차하이(什刹海/십찰해)지역에서 인력거투어를 하였다. 십찰해는 본래 인공호수를 끼고 열 개의 절이 있었으나 홍등가가 들어서면서 환락가로 변한 곳이란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부이)’가 아버지 순친왕의 섭정 꼭두각시노릇에 싫증나 이곳 홍등가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였다고 한다. 인력거를 타고 스차하이 뒷골목에서 기기묘묘한 노천카페와 가계, 술집과 호프집, 라이브 노래방 등이 우리나라 라이브 카페거리를 보는 듯하였다.
이곳에 인력거가 등장한 것은 1870년경 일본인이 도입하였다고 하며 지금은 그 운영을 관에서 직영한다고 하니 중국 공산주의 정책의 일면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스차하이 관광의 뒷맛은 개운하지가 않았다. 한말 우리나라 인력거에 대한 불쾌한 이미지를 지울 수가 없어서일까? 호텔로 돌아왔으나 스산한 심사(心思)를 어쩔 수 없어 고량주 한 병에 출국 때 가져간 땅콩을 안주삼아 위로하고는 내일을 위해 또 머리를 눕혔다.
6.중국 민주화 발상지 천안문장은 살벌하였다.
아침부터 무덥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어 걱정이다. 텐안먼(天安門/천안문)과 자금성에는 그늘이 없어 종일 햇빛에 노출될 수밖에 없을 것을 걱정하며 길을 재촉하였다. 천안문 광장에는 이미 수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광장에는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었던 공안(公安)이라는 완장을 찬 사람들이 여기저기 즐비하게 보였다. 우리나라의 경찰과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천안문의 뜻은 “명(命)을 따르고 하늘을 섬겨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백성을 다스린다<愛命于天安邦治民>”라고 한다. 천안문은 본래 1420년에 명나라 영락황제가 승천문(承天門)을 건설하였으나 명나라 멸망 때 소실되었다가 1651년 청나라가 다시 세우면서 천안문이라 명한 문이다. 명나라와 청나라 때 국가의 법률공포, 황제의 군대 열병 등 국가주요행사를 이 광장에서 행하였다고 하며 1949년 10월 1일에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선포를 이곳 천안문에서 하였다.
문(門)의 정중앙에는 모택동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1945년 이전에는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고 한다. 전 세계인에게는 6·4천안문사건으로 더 잘 알려진 이곳을 둘러보면 정면에 영웅기념비와 모택동기념관, 왼쪽에 국가박물관, 오른쪽에 인민대회당(우리나라의 국회의사당)이 있고 뒤쪽으로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午門)이 있다. 천안문 넓은광장과 수많은 인파를 빼면 황량한 건축물로 둘러싸인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란 느낌이 든다.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보이지 않았다. 천안문을 들어서니 명·청(明·淸)대 황궁인 황금색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이 그 위용을 자랑을 한다.
7.자금성 주인 황제는 정말 행복했을까?
우리나라 사람들도 경복궁이나 창경궁 창덕궁 등을 고궁(古宮)이라고 하듯 중국인들도 자금성을 고궁이라고 한다. 쯔진청(紫禁城/자금성)은 “천제가 사는 자궁(紫宮)에 접근을 금(禁)하는 곳(地)”이라는 뜻에서 자금성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명나라 때인 1407부터 1420년까지 25만여평에 9999개의 방으로 된 세계에서 가장 큰 건축물로 축조 이래 560여년 동안 명황제 15명, 청황제 9명이 살았다고 한다. 황제는 모두 행복 했을까? “마직막 황제 푸이(溥儀/부의/선통제)”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푸이는 일반 백성들보다 불행한 황제였다. 푸이가 5년간 재임한 청나라가 망하고 일본이 세운 만주국 황제를 11년간을 끝으로 공산정권하에서 그가 황제로 중국을 호령했던 자금성 정원사로 일하다 죽었는데 그가 죽기 전에 “내가 지금까지 가장 행복했던 때는 정원사로 일한 때였다.”고 했다한다.
자금성은 크게 전조(前朝), 내정(內廷), 외동로(外東路) 세 곳으로 나눈다. 정문인 오문을 들어서 내금수교(內金水橋) 하얀색 옥돌다리 5개를 건너 궁의 전조(前朝)인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 등 세 대전과 양쪽에 중국이 개방하지 않은 문화전과 무영전 두 전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전조의 정문인 태화문을 불쑥 들어섰다. 광장 저 편으로 태화전이 우뚝하다. 태화전은 황제가 여러 의식을 거행하는 곳으로 하얀 옥돌로 5m높이의 기초위에 가로64m 세로37m 높이30m의 궁을 얹었다.
손자 녀석은 여기저기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다. 혹 수많은 인파에 묻힐까 뒤를 졸졸 따라다니려니 더운 여름이 더 덥다. 옥돌로 된 기단의 기둥에는 용머리 조각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비가 오면 용의 입에서 물이 나와 배수구로 간다고 한다. 이러한 용머리가 1142개나 있다한다. 태화전 공간에서 구리학, 구리거북, 해시계, 계량기, 소방용 구리물항아리 등과 태화전 내부를 건듯 보고는 중화전으로 넘어갔다.
중화전은 황제가 태화전 행사전후에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란다. 내부에는 큰 의자가 높이 놓여있을 뿐이다. 전조의 마지막 전(殿)인 보화전은 황제가 의식을 하기전후에 예복을 입거나 벗는 곳이었으나 청나라 때에는 연회장으로도 사용하였고 1800년 이후에는 한때 과거시험장으로도 사용하였단다. 자금성 전조를 모두 관람하고 보화전 뒤쪽에 자금성 내에서는 하얀색 옥돌로 만든 7m에 달하는 어도(御道)가 있었고 그 어도에는 9만여 마리의 반용(半龍)과 구름(雲)이 새겨져 있어 가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도를 지나 좌우에 융종문(隆宗門)과 경운문(景運門)을 거느리고 있는 내정의 정문인 건청문(乾淸門)을 큰 기침하고 들어섰다.
내정의 첫 궁전인 건청궁이 우뚝하다. 이 궁은 황제의 침실이면서 황제가 일상적인 정무를 처리하는 전당이다. 건천궁 내부에는 “正大光明(정대광명)”이라는 액자가 걸려있었고 황제는 액자 뒤에 차기황제를 내정한 밀지(密旨)를 반으로 나누어 넣어두었다가 황제 사후에 이 밀지와 황제가 가지고 있었던 반쪽 밀지를 맞추어 새 황제를 세웠다고 한다. 건천궁 외부의 좌우에는 황권(皇權)을 상징하는 하얀 옥돌 기단위에 금으로 도금한 소형 궁전인 강산정(江山亭)과 사직정(社稷亭)이 배치되어 있었다. 건천궁을 나서니 황제의 옥새(玉璽)를 보관하는 교태전 내부에는 시각을 알리는 자명종, 구리 물시계가 좌우에 배치되어 있고 정중앙에 “無爲(무위)"라는 현판 아래 크고 작은 옥새가 전시되어 있었다.
황제도 황후도 사람이다. 이들도 자고 먹고 입고 움직이는데 그 중에서도 이들의 침실인 곤녕궁(坤寧宮) 앞에 도착하니 가슴이 둥둥거리고 야릇한 감정이 든다. 곤녕궁에서 황제가 황후와 신혼 첫 밤을 시작으로 열흘간 머물며 후계자식들이 많이 태어나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황제가 대신들을 만나 정무를 처리하는 양심전(養心殿)을 구경하였다. 양심전의 본전인 정전(正殿)에서 황제가 정무를 보았는데 자희태후인 서태후(西太后)가 수렴청정하던 동난각(東暖閣)이 있고 황제가 군사에 관한 정무를 전담했다는 서난각(西暖閣), 황제의 서재인 삼희당(三希堂)에 놓여있는 문방사우(文房四友)도 감상하였다. 특이한 장소 침궁(寢宮)을 보았더니 안쪽은 침실이고 바깥쪽은 거실로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아름답고 화려함에 역시 황제는 지존이었나 보다.
황제의 후비들이 생활하고 서태후가 오랫동안 살았다는 저수궁(貯秀宮) 옆을 지나 구슬을 가지고 노는 구리용, 황제의 수라상 식기류, 옥돌 노리개 등을 구경하고 자금성내 불당인 우화각(雨花閣)의 지붕 누각에 금으로 만든 네 마리 용(龍)장식이 이채롭다. 너무 덥다. 자금성에서도 나무가 있었던가. 어화원(御花園) 마당에 드리운 그늘에 잠시 휴식을 가졌다. 어화원은 황제가 제후와 비빈들을 데리고 산책을 하면서 괴상하고 기이한 돌로 쌓아 만든 모형 산(山)인 퇴수산(堆秀山) 정상 어경정(御景亭)에 올라 풍경을 구경하는 장소라 한다.
자금성 관람의 마지막 부분인 흠안전(欽安殿)의 정문은 천일문(天一門)이고 불교, 도교, 중국 각 지역의 토속신앙의 신상(神像)을 모신 신당이다. 어화원 경내에서 경극무대인 수방재(漱芳齋), 구리기린, 구리코끼리, 부벽정(浮碧亭), 만춘정(萬春亭), 천추정(千秋亭) 등의 볼거리를 구경하였다. 자금성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을 나서니 번잡한 북경시가지이다. 도로변으로 잡다한 잡상인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며 서투른 한국어로 판촉을 한다.
길을 따라 걸으며 자금성의 성벽과 성벽을 에워싸고 있는 운하(運河)로 성은 가히 난공불락(難攻不落)지다. 자금성 성벽의 높이가 7.9m이고 둘레가 무려 3428m이며 자금성을 둘러싸고 있는 운하를 호성하(護城河) 또는 통자하(筒子河)라고 부른다. 1987년도에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자금성을 모택동 정권 때에 한때 헐어버리려고 했다고 하니 끔찍하다. 천안문광장과 자금성을 4시간 정도 관람하였으나 오전 11시라 인근의 황제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단(天壇)이 있는 천단공원으로 발길을 틀었다.
8.천단에서 황제는 누구를 위해 빌었는가?
천단은 "하늘"을 상징하는 사당으로 천자(天子)라고 불렀던 명·청나라 황제들이 매년 제사를 지내고 풍년을 기원했던 곳으로, 1406년부터 1420년까지 지은 건축물이다. 천단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내벽과 외벽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북쪽의 벽은 둥근 하늘(天)을 상징하는 원형이면서 남쪽벽보다 높고, 남쪽의 벽은 땅(地)을 상징하는 사각형으로 북쪽벽보다 약간 낮게 설계되어 축조되었다한다.
천단은 북쪽에 기년전(祈年殿)과 황건전(皇乾殿)있고 남쪽에는 원구단(圓丘壇)과 황궁우(皇穹宇)가 있는데 기년전이 그 중심 건축물이다. 기년전은 3층 건물로 푸른색 유리기와를 입혔으며 내부에는 용무늬로 된 네 기둥(柱)은 사계절을 의미하고, 용기둥 주위의 가운데 12개 기둥은 1년 12달이고, 바깥 12개 기둥은 12간지(時間)를 의미하며, 처마를 바치고 있는 24기둥은 24절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나무 한그루 없이 대리석이 깔린 광장 한가운데 우뚝한 천단은 일반적인 웅장한 건물 정도다. 천단 밖 공원이 대단했다. 공원에는 500년 이상 된 측백나무에는 노란색 이름표를 붙였고 300백년에서 500년 된 측벽나무에는 초록색 명찰을 붙여 놓았다. 미국의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여 중국 주석에게 “미국은 이렇게 오래된 나무를 가질 수 없다”며 멋진 공원을 부러워하였다는데 미국역사가 고작 3백년이다.
천단공원에는 관광객 보다는 많은 중국인이 몰려와 큰 소리로 노래도 부르고 중국고유의 태극무로 운동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나라 관광지에서 큰소리로 노래하면 어떨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오후 2시경이다. 1층에 삼성전자점이 있는 3층 한국식당에서 삼겹살을 시켰는데 왼지 어설프다. 비게 투성이 이고, 야채삼은 물기 가득이며, 된장국이라고는 허어머얼건 장국이라 먹는 둥 마는 둥 식당을 나와 햄버거로 남은 배를 채우고 요구르트를 마셨다. 중국 젊은이들이 거리공연을 하기에 그늘하나 없는 계단에 앉아 1시간 넘게 구경하였다. 구경꾼이 상당히 많았다. 젊은이답게 열정적이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거리공연 보고 하니 때가 오후 4시가 넘었다. 점심식사가 부실하여 손자도 아내도 배가 고프단다. 그리고 나도 배가 고팠지만 안내 잘못한 죄로 숨죽이고 있었더니 손자가 저녁을 맛나게 먹자고 한다. 잘되었다 하고는 중국음식점을 찾아 들었다. 손자가 좋아하는 튀김류가 많았고 아내가 좋아하는 야채도 있었으며 내가 좋아하는 마파두부까지 다양했다. 각자 식성대로 저녁음식에 모두가 만족이다. 출국 때 가지고 온 맥심커피로 후식까지 챙겼다. 연극을 보기로 하고 북경에서 가장 규모가 큰 놀이공원인 해피베리테마파크로(우리 말로 하면 ‘행복골짜기 랜드’쯤) 이동하였다. 놀이공원에는 입장하지 않았다. 외부에서 보니 우리의 롯데월드나 과천랜드, 에버랜드에서도 흔히 있는 것들이라 손자가 하는 말이 걸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탄 것을 뭘 또 타요.”
9.남·녀간 사랑의 힘을 보여준 뮤지컬 금면왕조
금면왕조(金面王朝)란 연극을 보기위해 테마파크에 있는 극장에 VIP석 인당 120위안을 들여 A구역 중간에 자리를 잡았다. 금면왕조는 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전쟁, 남녀 간의 사랑, 고통과 환희 등을 연극화한 뮤지컬이다. 금빛가면을 쓴 여왕이 다스리는 나라인 여성국 금면왕조가 이웃의 남성국인 남면왕국의 침략을 받았으나 여성국의 승리로 남성국 왕과 병사들이 포로로 잡혔다. 포로가 된 남면왕은 금면왕의 착하고 어진정치에 감명받아 석방되고 금면왕과 남면왕은 서로 사랑에 빠져 행복한 날을 보내는데 금면국이 하늘로부터 미움을 사 큰 홍수가 발생하는 재앙이 발생하자 여왕은 신의 뜻대로 스스로 몸을 하늘에 맡기고 죽자 재앙이 끝치고 또한 죽은 여왕은 태양조(太陽鳥)가 되어 남면왕과 사랑을 이어가며 금면왕국의 하늘을 맴돌며 그녀가 사랑했던 나라를 지켜준다는 내용의 뮤지컬 연극이다.
공연시간은 1시간으로 무용수들의 뛰어난 연기, 무대미술과 움직이는 무대장치, 무대조명, 무대의상의 화려함, 무대음악 등이 잘 조화를 이룬 뛰어난 예술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극장 내에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손자는 어느 틈에 2장면의 사진을 확보하는 기지(奇智)까지 보였다. 1시간공연 위해 동원된 무용수가 무려 200명이라 한다. 가히 중국 땅덩이나 인구수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공연을 마치니 저녁 8시에 가까웠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천국의 계단이라는 별칭을 가진 곳 세무천계(世貿天階)를 지나쳤다. 이곳은 대형 백화점과 고급명품점이 즐비한 북경 최대 고급쇼핑구역이다. 중국이 자랑하는 천정에 대형LED로 설치한 전광판에 비치는 화면이 이채롭다. 우리 가족은 감탄할 것이 못되었다. 지난 6월에 여수엑스포에서 본 대형LED전광판과는 규모면에서나 선명도면에서나 한참 뒤떨어졌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하늘에서 펼쳐지는 환상 쇼라지만 우리나라의 시청광장에 설치한 대형천막스크린에 지나지 않았다. 번화한 거리의 휘황찬란한 조명과 네온사인은 화려하였다. 늦은 시간에 호텔에 찾아드니 밤11시다.
10.이화원 곤명호에 인민의 고혼(孤魂)이 잠겼도다.
어제 늦게 잤더니 손자 녀석이 늦잠이다. 다행이다. 오늘 이화원 구경하고 오후에 귀국하는 날이다. 이화원도 공항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걱정이 반감이다. 느긋하게 아침식사하고 9시에 소형 버스를 타고 50여분 걸려 이화원에 도착하였다. 입구에서 부터 큰 호수가 펼쳐진다. 이곳이 1998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중국 내에서 원형을 완전한 형태로 잘 보존유지하고 있는 황실정원이라고 불리는 이허위안(頤和園/이화원)이다. 이화원은 황실정원이면서 궁전까지 갖추어진 곳으로 영어로 The Summer Palace라고 하는데 서태후가 여름별장으로 이용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이화원은 본래 1153년 금나라가 황제의 행궁을 처음 건설하였고 징기스칸의 원(元)나라 때에 만수산과 곤명호가 만들어 졌다. 1750년도에 확장공사를 시작하여 15여년 동안에 일으킨 역사로 초기의 이름은 청의원(清漪園)이었다. 총면적은 2.9㎢이고 이중 2.2㎢에 달하는 인공호수 쿤밍호(昆明湖/곤명호)가 펼쳐있고, 호수를 만들기 위해 파낸 흙으로 쌓아올린 60m 높이의 흙무덤 완서우산(萬壽山/만수산)이 호수를 빙 둘러 싸여있는 형상이다. 흙이 쌓인 만수산은 중국인민의 무덤이고 곤명호에 고인 물은 중국인민의 땀과 피눈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도다.
1860년 아편전쟁으로 청의원은 모조리 불타고 영국군과 프랑스군들의 무자비한 약탈로 폐허가 되었으나 1886년 서태후가 중국 해군의 군비(軍費)를 전용하여 오늘날의 크기로 확장하였으나 또다시 1900년도에 일어난 외세배척운동인 의화단운동으로 의화단을 공격한 8개연합군(美英佛獨 러시아일본 이태리오스트리아)으로부터 파괴되었다. 의화단 사건 후 1902년에 서태후가 파괴된 부분을 복구하였다. 서태후는 1888년도에 청의원(清漪園)에서 이화원(頤和園)으로 개칭하였다. 서태후는 의화단사건 이후부터 1908년 죽을 때까지 이화원에서 살았다.
자금성보다 4배가 크고 천안문광장보다 6배나 큰 이화원의 정문 동궁문 앞 호수변 지춘정이라는 정자에서 앞을 내다보면 오른쪽으로 수많은 전각과 만수산이 압권이고, 정자 앞으로 펼쳐지는 광활한 곤명호의 잔잔한 물결이 호수에 뜬 배들을 희롱하고 있고, 왼편으로 17공교로 이어진 거대한 인공섬의 누각들이 서태후 그림자를 깔고 있다. 나이든 현지 노인들이 빗자루만한 붓으로 길바닥 대리석에 물로 휘호를 하고 있기에 나도 한번 해보자며 이백(李白)의 시(詩) 한수를 행서로 휘호했더니 그 노인이 놀라 누구냐고 하기에 대한국인(大韓國人)이라고 썼더니 엄지를 치켜세우며 한국인니 최고라고 한다.
만수산에는 불교건축물인 불향각이 우뚝하고, 서태후와 황제가 정치를 논하고 외빈을 맞이하였다는 인수전과 서태후가 경극을 구경하는 덕화원이 화려하다. 서태후의 조카인 황제 광서제 내외가 서태후에 의해 유폐되어 지낸 옥란당은 건물 앞은 창살이 촘촘하고 뒤쪽 벽은 밀폐되어있어 서태후의 침실인 화려한 낙수당과는 비교된다.
서태후가 불향각 쪽으로 움직일 때 눈비를 피하기 위해 건설한 718m의 긴 산책로인 장랑(長廊)에는 중구고전의 여러 장면을 회화한 각기 다른 그림 1만5천여점이 그려져 있어 서태후의 사치와 허황(虛荒)을 엿 볼 수 있는 단면이기도 하다. 곤명호를 가로질러 운행하는 용선(龍船)을 타려고 하니 앞쪽에 묵직한 돌로 된 3층 누각이 보인다. 저 누각을 지으려고 얼마만의 인민이 죽었을까. 용선을 탔더니 손자는 마냥 즐겁다. 곤명호의 잔잔한 물결은 이곳을 떠도는 헬 수 없는 고혼의 피눈물이 흐르는 소리인 것을 모르니 말이다.
넓은 곳을 걷고 또 배를 타고 다니다 보니 공항으로 갈 시간이 빠듯하다. 15시 20분 이륙이니 14시 30분까지는 도착해야한다. 현재시간 13시를 조금 지났다. 식사하고 차 한 잔 하면 딱 맞출 수 있는 시간이다.
공항에 도착하여 큰 가방 처리하고 배낭만 가지고 출국수속하고 로딩브릿지를 지나 아시아나 기내에 올라 비행기 이륙시간 때만 기다리고 있는데 이륙시간보다 20분이나 지나 북경공항 하늘 길 정리관계로 1시간 지연이란다. 몇 일전 출국 때도 1시간 지연 출발하더니만 또 그러니 북경공항의 관제능력에 의문이 간다. 아시아나 승무원도 그 때까지 영문을 몰라 하더니만 방송이후부터 바빠졌다. 승객들이 지루하게 기다리는 시간에 작은 편의 제공 서비스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한국출신 승무원들의 친절도가 세계최고란 이야기가 그냥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독일에서도 로마에서도 승무원들의 서비스를 경험하였던 기억이 난다.
정확히 1시간 지연 이륙한 아시아기는 구름 위를 미끄러지듯 발해만 남쪽과 우리의 서해바다를 깔고 우리땅 인천공항에 내리니 저녁 7시다. 기내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출국 때나 입국 때나 우리공항의 수속이 신속하다. 북경공항에서 입출국 수속 때 마다 4∼5십분 이상 기다렸던 기억은 오래갈 것 같다. 때마침 런던올림픽 기간이라 입국장 대형TV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동탄행 리무진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밤10시쯤이다. 지난해 유럽에서 귀국했을 때에는 모두 피곤해 그냥 잤는데 이번에는 샤워하고 런던올림픽 경기중계를 보는 등 여유를 부리다 잠을 청했으나 쉬이 잠이 오지를 않았다. 우리 세 식구 무사하게 중국여행 마친 것에 감사하고 특히 손자 ‘호수’야 수고 했다. 그리고 ‘말다’ 당신도 고생 많이 했지. 호수야 그리고 여보 사랑해.
겨울방학 때 앙코르 왓드를 기약하면서,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