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수필
내 삶의 흔적을 남기고파
임 재 문
금년으로 60회 회갑을 맞았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지나온 세월들이 파노라마처럼 밀려오고 밀려간다. 내 삶의 시작은 6.25동란을 전후해서 시작되었다. 엄마등에 엎혀 피난을 가던 일 등 인생 역정의 시작이라고나 할까?
그 후유증으로 초등학교 시절에는 천막교실과 가교사라고 하는 곳의 애환도 경험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6.25가 주고간 상처일 터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반공의식이 투철하다. 그리고 국가에 대한 충성은 아니지만,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국가를 위한 마음이 어느 누구보다도 더 강하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국가공무원인 교정직을 선택한 것이었을까? 교도관 생활 30여년을 마치고 이제는 아들도 결혼시켜 분가했으니 내 할 본분은 다 하지 않았는가 홀가분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제부터다! 하는 마음이 불끈 솟아오를 때가 있다. 내 인생이 여기서 끝나서야 되겠는가 하는 물음이다. 수필을 쓰는 것은 내 인생에 있어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86년 봄 한국수필 천료로 문단에 등단했다. 문단 등단 전에는 우리 교정직 공무원의 기관지 월간 "교정"에 투고 형식으로 쓴 글들이 최초로 한정된 독자들에게 선보인 글이다. 그때 좋은 호평을 받은 것이 계기가되어 한국수필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고 결국 작가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작가다!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작가라면 그래도 어느정도 자신이 쓴 글로 생활을 유지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등단 20여년이 되었는데도 나 자신이 그렇게 왜소한 글쟁이로 남아 있다는 것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제 부터라도 좋은 소재를 찾아서 또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서 내 자리를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감동과 문학적 호평을 받는 글을 써야하겠다고 마음에 다짐을 하지만, 남가일몽에 불과할 뿐이니 마음아픈 일이다.
내가 교도관 생활을 할 때는 아무래도 수필의 소재가 담안의 생활에 대한 애환과 수형자에 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정년퇴임을 했으니 더욱 더 소재가 다양하게 펼쳐질 것이요. 또 한정된 소재가 아닌 자유로운 소재로 더욱 더 알찬 글들이 태어나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한가지 작은 꿈을 이루었다고 스스로 마음의 위안을 받는 일이 있다면, 우리 한국수필작가회의 최초 발기인이 되어 감사 이사를 거쳐 부회장 회장을 역임하고, 또 우리 한국수필작가회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처음에 8명이 "뿌리를 내리는 사람들" 이라는 8인 수필집 출간을 기반으로 시작한 모임이 150여명의 회원수를 돌파했고 이제는 어느 곳에 내어 놓아도 손색이 없는 작가회 모임이 되었다는데 마음의 위안을 받는다.
첫 시작은 아주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시작이 되었는데, 이제는 하나의 커다란 단체를 구성하게 되었으니 23년동안 23권의 동인지를 엮으며 해마다 갖는 수많은 모임속에 정감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도 나는 이 모임을 계속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내가 시작한 모임이기 때문이다. 내가 시작한 모임을 내가 스스로 탈퇴하면 나 자신을 탈퇴하는 것과 같다. 이모임을 통해서 내 인생의 모든 보람을 찾아야한다.
어느 누가 너는 어디로 가느냐 묻는 다면 나는 세월따라 바람따라 그렇게 가고 있고, 우리 한국수필작가회와 운명을 같이 할 것이라고 힘있게 설파 하리라. 그리고 내 삶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그렇게 남기고 가야만 하리라.
필자 약력
전남 해남 출생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수필작가회 회장 역임
강릉교도소 복지과장 정년퇴임
저서 "담너머 부는 바람" "사형수의 발을 씻기며"
현재 의왕 삼동 거주
첫댓글 설봉님의 일생 흔적을 본 것 같아 반갑고 따스한 정으로 다가옵니다.
네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