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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과 아스다롯(삿2:11-13)
2006/12/17
지난 주일에 우리는 이스라엘이 첫 세대의 신앙을 다음 세대들이 이어가지 못했던 원인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원인을 다음 세대에 대한 첫 세대의 교육 부족에서 찾기도 하지만, 저는 옛 세대 계시의 불완전한 성격이 근본적인 원인이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교육은 성령 안에서 행하여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가르치는 방식에는 교육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의 방식으로서의 교육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실패하는 다음 세대들이 걸려서 넘어진 근본이 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사시대 가나안 사람들이 섬겼고, 또 이스라엘이 섬기게 되었던 우상들을 거명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본문은 바알과 아스다롯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대 사사시대 팔레스틴의 종교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언약의 하나님 없는 인류가 지지하고 있는 정신적인 기틀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인류가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인류의 공통적 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종교에서 바알은 남성적인 자연의 원리이며, 아스다롯은 여성적인 자연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긴 것은 우상숭배를 했다는 뜻이며, 아스다롯을 섬긴 것은 언약적으로 간음을 한 것과 같습니다. 이 두 가지는 결국 하나의 종교였기 때문에 우리는 통틀어 이것을 바알숭배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 바알숭배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바알을 섬기는 자세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알을 섬길 때는 사람들은 그 앞에서 엎드려 절했습니다. 오늘날도 다른 많은 종교에서 섬기는 행위로 엎드려 절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처 앞에 엎드려 절하고, 이슬람교도들이 정신이 없을 만큼 하루에 몇 번이고 엎드려 절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도 없이 그저 코가 땅에 닫도록 엎드리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엎드리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엎드리는 것은 완전한 굴복과 경외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옛날의 바알을 숭배할 때도 이렇게 했었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바알에게 완전하게 굴복하며 경외하는 것을 뜻했습니다. 여기에는 항거가 있을 수 없습니다. 대등하게 좀 생각해 보자는 태도가 있을 수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복종이요, 굴복입니다. 죽어라고 해도 죽겠다는 태도입니다. 그러니 죽어가면서도 신의 뜻이라고 하면서 죽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엎드리는 것에는 이와 같은 절대적인 굴복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만큼 신은 위대하며 절대적인 대상입니다. 절대적인 경외를 신에게 바칩니다. 바알 숭배도 이런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바알에게 이와 같은 절대적인 경배를 바쳤습니다. 그들은 코가 땅에 닿도록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온전한 굴복과 경외를 바쳤던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를 경배하는 것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신자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를 반성하게 해 줍니다. 오늘날 기독신자들은 하나님을 이와 같이 경배하는 마음으로 섬길까? 과연 절대적인 굴복의 정신을 오늘날 기독신자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절대적인 복종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왜 하나님 앞에 그냥 부복하지 못하며, 엎드려지지 못할까? 진실로 경외가 없는 것은 아닐까? 이런 물음을 묻게 됩니다. 저는 현대 교회에 많은 문제들이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마음이 사람들에게 없는 데서 비롯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분에게 절대적으로 굴복하는 정신인데 이런 정신이 오늘날 기독신자들에게 결핍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가 엎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따지며, 자기의 감정이 엎드리기는 싫어하기 때문에 엎드리지는 않겠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자존심을 가지고 대등하게 논의해 보고자 하는 듯한 태도를 가진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반성해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만약 우리가 복음에 부복하는 정신을 가졌다면 예배 때에 실제로 엎드려서 절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또 이런 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대 사람들에게는 종교 활동의 핵심이 숭모, 예배, 부복, 성례였습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의 종교 활동이 그러했고, 이스라엘의 예배 또한 그러했습니다. 이렇다면 오늘날도 말씀이 선포되면 그 말씀을 받아서 숭모와 성례와 부복하는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은 예배의 핵심을 위로와 즐거움에 둡니다. 그러니 웃고 즐거워하는 행사들로 예배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말씀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배 모임은 하나의 위락 행사(entertainments)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라 인간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부복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맞추어 오도록 요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학자라는 사람들은 굴복하는 자세 없이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며, 책을 쓰고 설교하며 가르치기도 합니다. 요즈음 세계 신학의 주류가 이렇기도 합니다. 믿지는 않으면서 하나의 종교적 학문으로서 신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신자들이 종교적인 학문을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이 하는 신학적 활동은 불신자의 눈과 방법론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고대 사람들은 자기 신을 예배했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의 신을 연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은 경배 받으실 분이 아니라 연구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연구 대상이 아닙니다. 경배 받으실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말씀은 청종하는 것이지 연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바알숭배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바알숭배의 핵심은 본질적으로 능력을 자연에 돌리는 것입니다. 즉 ‘자연은 그 자체 안에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알은 남자 신이고 아스다롯은 여자 신인데 이 둘이 교접하여 다산을 가져다준다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즉 이것은 태양신이 원시진흙과 교접하여 사람과 동물들이 생겨났다고 하는 생각을 뿌리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태양의 신 바알이 아스다롯과 교접하여 다산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지금도 자연 과학에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원시의 대양에 태양이 빛을 비추자 거기서 유기적인 분자 생명체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태양은 남성적 원리요, 원시 대양은 여성과 같습니다. 동양에서는 이것을 음양의 조화라고 합니다. 음양의 조화로 이 세상이 나왔다고 합니다. 결국 이런 생각은 자연 자체 안에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자연 자체 안에서 발생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고금동서에 이런 생각은 동일합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은 바로 이러한 생각을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도 사람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믿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생명발생에 대한 생각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화론으로 발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연 속에서 발생한 생명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발전은 생명 스스로의 발전입니다. 외부의 개입 없이 생명이 발생했으니 그 생명이 또한 스스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서 생명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진화론이라고 부릅니다. 진화론은 이미 자연 속에서 생명이 발생하였다고 하는 생각 속에 배태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진화론은 이미 고대 바알과 아스다롯을 믿는 신앙 속에 배태되어 있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진화론 속에는 다산도 자연 속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더 많이 낳기 위해서는 자연 남성적 또는 여성적 원리가 조화가 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화가 잘 되게 하기 위하여 인간들이 자연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드리는 것이 제사요 또 이어지는 것이 성적인 광란의 축제였습니다. 사람들은 제사장과 신전 신녀들과 더불어 성적 광란 상태에 빠지므로 자연을 자극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신전 제사장과 신녀들은 자연 신 즉 자연의 원리를 대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성적으로 자극하는 것은 또한 자연 신을 자극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서 고대인들은 자연으로부터 다산을 가져오도록 노력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가르침을 배격하고 있습니다. 자연이 그 자체 안에서 생명을 발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 생명이 시작될 때 하나님이 생명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살면서 생명 활동을 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게 하시기 때문에 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 새가 땅에 떨어져 죽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해야 되는 일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생명이 살고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명을 주관하고 다스리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러니 생명이 발전하는 것이 스스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것이 없습니다. 스스로 진화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생명은 스스로의 힘으로 진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살다가 하나님이 오라고 하면 가는 것입니다. 인간과 동물의 생명이 다 이렇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의 간섭 속에서 생명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 저기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 동물 곧 대소 생물이 무수하니이다. 선척이 거기 다니며 주께서 지으신 악어가 그 속에서 노나이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104:24-30)라고 말합니다. 신약에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자연 안에서 생명이 스스로 발생하고, 스스로 살며 진화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발생과 삶과 죽음을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두고 있습니다. 자연이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다스리고 유지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능력 있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연 자체는 인격이 아니라 참 인격의 존재와 다스림을 보여주는 사물들에 불과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은 자연 자체에 생명을 발생시키는 힘이 있고 그 생명력이 진화하고 발전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바알숭배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대체로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진화론은 옛날의 바알숭배가 모양을 다르게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연은 궁극적인 실제가 아닙니다. 궁극적인 실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연은 궁극적인 실제이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존재와 임재를 보여주는 놀라운 도구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핑계치 못할지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안 기독신자는 당연이 자연이 스스로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참 생명 하나님을 보여주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자연에서 하나님과 그의 충만한 임재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신앙은 이신론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신론은 18세기 계몽주의시대에 등장한 신학이론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 인간에게 양도했으며 자연은 스스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즉, 이신론은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 후 인간 역사 속에서 더 이상 일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게 특징으로, 계몽주의처럼 이성을 강조한 사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하느님은 자연의 하느님일 뿐, 역사속의 하느님은 아닙니다. 또한, 그들의 이성에 맞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기적,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했습니다. 이신론은 교회역사에도 영향을 주어서,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단일신론(유니테리언)이 서구 교회에 등장한다. 대표적인 이신론자들은 미국 건국의 주역들인 토머스 제퍼슨 , 벤저민 프랭클린 등이 있는데, 실례로 제퍼슨은 그리스도의 기적설화를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사학자들 중에는 독립선언서에 나오는 하느님을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아닌, 이신론자들이 생각한 하느님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런 이신론적인 생각을 성경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창조적인 진화론 역시 용납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신자들과 기독교 대학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임재와 통치를 믿지 않는 경향에 빠져 있는 것을 봅니다. 자연 자체가 스스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거나, 혹은 적어도 하나님이 창조는 하셨지만 그 다음에는 자연의 운행 원리대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 세계 속에 하나님의 임재와 다스림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알 숭배적인 생각이거나 이신론적인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어중간은 생각을 명백하게 배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점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믿고 따르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