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氏族의 연원 |
시조 노해(盧垓)의 자(字)는 유광(由曠)이다.
중국 당(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신라조에 벼슬길에 올라 나라에 공이 있어, 유양척지공(有壤斥之功)으로 광산백(光山伯)에 봉해져 후손들이 광주(光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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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지 연혁 |
광주(光州)는 본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인데, 신라 경덕왕 16년에 무주(武州)로 고치고, 진성왕 6년에는 견훤(甄萱)이 후백제의 도읍으로 삼았다가 전주(全�)로 옮겼으며, 고려조 태조 23년에 광주라 개칭하였다.
성종 15년에 자사(刺史)로 강등하였고, 고종 4년에 익주지사(翼州知事)로 올렸고 후에 또 무진주로 승격하였으며, 충선왕 2년ㆍ공민왕 23년에는 광주라 다시 개칭하여 목(牧)으로 삼았다.
세종 12년에 무진군으로 강등하였다가 문종 1년에 복구하고, 성종 20년에 광산현(光山縣)으로 강등, 연산군 7년에 다시 광주로 개칭하였다.
1875년 23개의 행정구로 구분할 때 나주부에 속하였다가, 1935년 10월 1일 광주읍이 부로 승격되어 군과 분리되었으며, 군은 광산군(光山郡)이라 부르게 되었다.
1949년 7월 4일 지방자치제 실시에 따라 시(市)로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주요 성씨로는 노(盧)ㆍ김(金)ㆍ가(李)ㆍ강(姜)ㆍ반(潘)ㆍ승(承)ㆍ정(鄭)ㆍ채(蔡)씨 등이 있었다. |
파명록 |
규정공파(糾正公派)―동악(東岳)공파, 헌납(獻納)공파―절효(節孝)공파, 정평(貞平)공파―현감(縣監)공파, 경평(敬平)공파―양근(楊根)공파ㆍ참의(參議)공파ㆍ사간(司諫)공파ㆍ경력(經歷)ㆍ판관(判官)공파, 삼사(三司)공파 |
주요 세거지 |
노해(盧垓)의 자손들 가운데 광주군(光州君) 노만(盧蔓)의 자손들은, 노만(盧蔓)이 고려초에 광주(光州)에 터를 잡은 이래로 광주에 세거했던 것 같다.
이 무렵부터 영남(嶺南)에도 자손들이 살게 되었다고 믿어진다.
14세 동악공(東岳公) 노선경(盧善卿)의 자손들은, 노선경(盧善卿)의 맏아들 노필의 후계(後系)가 합천(陜川)의 초계(草溪)를 중심으로 의령(宜寧)ㆍ거제(巨濟)ㆍ거창(居昌)ㆍ산청(山淸) 등지에 산거(山居)했고, 둘째 아들 노탁(盧琢)의 후계(後系)는 영천(永川)ㆍ청도(靑道)ㆍ월성(月城)에 많이 살았다.
또한 21세 노극창(盧克昌)의 후계(後系)가 전남 영암(靈岩)ㆍ함평(咸平)ㆍ나주(羅州)에 살았으며, 노길상(盧吉祥)의 후계(後系)는 함평(咸平)ㆍ영광(靈光)에, 19세 노체인(盧軆仁)의 후계(後系)는 광주(光州)ㆍ광산(光山)ㆍ나주(羅州)의 남평(南平)ㆍ담양(潭陽)ㆍ고흥(高興)ㆍ무안(務安), 화순(和順)의 동복(同福) 등지에, 17세 노흥준(盧興峻)의 후계(後系)는 담양(潭陽)의 창평(昌平)ㆍ광주(光州)ㆍ고흥(高興) 등지에 정착ㆍ세거하였다.
그밖에 17세 노흥수(盧興壽)의 자손들은 전남 나주(羅州)ㆍ담양(潭陽)과 대구(大邱)등지를 세거의 터로 삼았으며, 노흥수(盧興壽)의 동생 노흥동(盧興仝)의 후계(後系)는 광주(光州)ㆍ정읍(井邑)의 고부(高阜), 평남 강서(江西)에, 16세 노광(盧曠)의 8세손 노몽남(盧夢楠)ㆍ노득서(盧得瑞)ㆍ노득열(盧得悅)의 후계(後系)가 광주(光州)ㆍ하동(河東)에 많이 살았다.
14세 노영방(盧永邦)의 자손들은 전남 함평(咸平)ㆍ나주(羅州)ㆍ진도(珍島)ㆍ목포(木浦)ㆍ영암(靈岩)과 경남 합천(陜川)에 세거했으며, 13세 노식(盧湜)의 자손들은 경남 산청(山淸)에 살았다.
한편 대호군(大護軍) 노서(盧恕)의 자손들 가운데 5세 노상인(盧尙仁)의 자손들은 노상인(盧尙仁)이 조선초에 경북 상주(尙州)로 낙향한 이래로 상주(尙州)ㆍ문경(聞慶)ㆍ예천(醴泉)ㆍ양주(楊州) 등지에 세거해왔다.
그러다가 15세 노준명(盧峻命)의 후계(後系)가 울산(蔚山)으로 옮겨갔으며,12세 노극신(盧克愼)의 후계(後系)는 상주(尙州)와 장호원(長湖院)에, 9세 노명장(盧命長)의 후계(後系)는 성주(星州)에 터를 잡았다.
또한 9세 노한보(盧漢輔)의 후계(後系)가 황해도 해주(海州)와 평북 정주(定州)에 세거했고, 노한보(盧漢輔)의 동생 노한우(盧漢佑)의 후계(後系)는 화순(和順)ㆍ김제(金堤)에 살았다.
노상인(盧尙仁)의 동생인 참의공(參議公) 노상의(盧尙義)의 자손들은 9세 노자원(盧自元)의 후계(後系)가 전남 나주(羅州)ㆍ함평(咸平)에 살았고, 노자정(盧自亭)의 후계(後系)가 장흥(長興)ㆍ영암(靈岩)ㆍ정읍(井邑)에, 노자정(盧自貞)의 후계(後系)가 장흥(長興)에 정착하는 등 대체로 전라도 일원에 산거(散居)했다. 그리고 5세 노상례(盧尙禮)의 자손들은 함남 함주(咸州), 함북 길주(吉州) 등지에 많이 살았으며, 노상례(盧尙禮)의 동생 노상지(盧尙智)의 자손들은 노상지(盧尙智)의 6세손 노안정(盧安鼎)의 대에 강원도 양양(襄陽)에 자리잡은 뒤에 그곳을 세거의 터로 삼아왔다.
5세 노상신(盧尙信)의 자손들은 광주(廣州)ㆍ파주(坡州)ㆍ제천(堤川)ㆍ충주(忠州)ㆍ예천(醴泉)ㆍ평남 용강(龍岡)ㆍ함남 삼수(三水)ㆍ갑산(甲山) 등지에 나뉘어 살았다.
삼사공(三司公) 노전(盧腆)의 자손들은 강원도 영월(寧越)과 경북 상주(尙州) 등지를 세장지지(世葬之地)로 삼았으므로 일찍이 이들 지역에 나뉘어 살았다고 믿어지며 일부는 경남 함양(咸陽)으로 가 살았던 것 같다.
그리하여 1930년경 광주노씨(光州盧氏)는 전남 광주시(光州市), 장흥군(長興郡) 일원, 함평군(咸平郡) 일원, 화순군(和順郡) 일원, 경북 상주군(尙州郡) 일원, 경남 창녕군(昌寧郡) 일원, 거제군(巨濟郡) 일운면(一運面), 하동군(河東郡) 청암면(淸岩面), 합천군(陜川郡) 적중면(赤中面),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해룡면(海龍面), 평남 용강군(龍岡郡) 용강면(龍岡面), 강서군(江西郡) 증산면(甑山面), 평북 정주군(定州郡) 마산면(馬山面), 함남 갑산군(甲山郡)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오늘날에는 경기도 이천군(利川郡) 장호원읍(長湖院邑), 파주군(坡州郡) 천현면(泉峴面),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양양읍(襄陽邑), 영월군(寧越郡) 하동면(下東面), 전북 정읍군(井邑郡) 고부군(古阜郡) 전남 광주시(光州市), 나주군(羅州郡) 노안면(老安面)ㆍ공산면(公山面), 장흥군(長興郡) 안량면(安良面), 경북 영천군(永川郡) 대창면(大昌面), 상주군(尙州郡) 화북면(化北面)ㆍ화서면(化西面), 문경군(聞慶郡) 호계면(虎溪面), 예천군(醴泉郡) 호명면(虎鳴面), 울진군(蔚珍郡) 울진면(蔚珍面), 경남 합천군(陜川郡) 적중면(赤中面), 창녕군(昌寧郡) 이방면(梨房面), 의령군(宜寧郡) 의령읍(宜寧邑), 하동군(河東郡) 청암면(靑岩面), 충남 천원군(天原郡) 성거면(聖居面) 등지에 자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
씨족史 | ||||||||||||||||||||||||||||||||
시조 노해(盧垓)가 우리나라 노씨(盧氏)의 도시조(都始祖) 노수(盧穗)의 아들임은 씨족(氏族)의 연원편에서 소개한 바 있다.
그가 광주백(光州伯)에 봉해짐으로써 광주노씨(光州盧氏)가 확고한 터를 굳혔기에 득관조(得貫祖)라고 부르기도 한다. 광주노씨(光州盧氏)는 노만(盧蔓)이 광주군(光州君)에 봉해져 그를 1세조로 하는 계통, 노서(盧恕)를 1세조로 하는 계통, 노전(盧腆)을 1세(世)로 하는 계통이 있다.
그리하여 노만(盧蔓)의 후손은 고려 때 규정(糾正)어사를 지낸 노승조(盧承肇)의 규정공파(糾正公派)와 헌납(獻納)을 한 승관(勝綰)이 헌납공파로 파조(派祖)가 되어 영호남(嶺湖南)에 번성해왔다.
그런가 하면 노서(盧恕)의 후손은 경평공(敬平公) 노숭(盧嵩)의 큰아들로 도사(都事)를 지낸 노상인(盧尙仁)의 후예는 양근공파(楊根公派)로, 둘째 아들 노상의(盧尙義)는 참의공파(參議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으며 노상례(盧尙禮)는 사간공파(司諫公派)를 이루었고 노상지(盧尙智)는 경력공파(經歷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막내아들 노상신(盧尙信)은 조선조에 상의원판관(尙衣院判官)을 지낸 판관공파(判官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어 광산노씨(光山盧氏)가 발전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광주노씨(光州盧氏)의 역대인물로 첫째로 소개되어야 할 분은 노숭(盧嵩)이다. 그의 자(字)는 중보(中甫), 호(號)는 상촌(桑村), 시호(諡號)는 경평(敬平)이었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지신사(知申事)가 되고 우왕 때는 왕의 그릇된 행실을 직간(直諫)하다가 미움을 사기도 했다.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어 익산(益山)에 득성창(得成倉)과 영산포(榮山浦)에 영산창(榮山倉)을 세워 조세(租稅)수납에 공헌했고, 축성(築城)ㆍ조운(漕運)ㆍ의창(義倉)을 설치해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 뒤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녹훈되고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노수신(盧守愼)의 자(字)는 과회(寡悔), 호(號)는 소재(蘇齋)였다.
중종 38년에 문과(文科)에 장원, 뒤에 영의정(領議政)에까지 오른 광산노씨(光山盧氏)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대윤파(大尹派)에 속해 인종즉위 초에 정언(正言)에 되어 이기(李芑)를 탄핵, 그를 파직케하였으나 얼마 뒤 명종이 즉위하자 소윤파(小尹派)가 일으킨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화를 입어 파직되기도 했다. 그대 그는 이조정랑(吏曹正郞)이었다.
진도(珍島)로 유배되어 19년을 지내면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등과 편지로 학문을 토론,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辯)’을 지었고, ‘대학장구(大學章句)’ㆍ ‘동몽수지(童蒙須知)’ 등에 주(註)를 달기도 했다.
선조가 즉위하자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그는 교리(校理)에 기용되었고 뒤이어 대사간(大司諫)과 부제학(副提學)ㆍ대사헌(大司憲)ㆍ이조판서(吏曹判書)ㆍ대제학(大提學) 등을 지냈고 우의정(右議政), 5년 뒤에 좌의정(左議政), 7년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노수(盧遂)는 유명한 학자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門人)이었다. 자(字)는 여성(汝成), 호(號)는 소암(小菴)이다. 뒤늦게 48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할 만큼 학문에 열의를 쏟았고 출사(出仕)하지 않고 영천(永川)에서 후학(後學)을 기르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그는 명종 8년 김응생(金應生)ㆍ정윤량(鄭允良) 등과 함께 정몽주(鄭夢周)를 제향(祭享)한 임고서원(臨臯서원)을 영천(永川)의 부래산(浮來山) 아래에 창건했고 이황(李滉)이 하사받은 성리학(性理學)책을 그로부터 기증받을 만큼 퇴계(退溪)의 사랑을 두텁게 받은 분이다.
노흠(盧欽)의 자(字)는 공신(公愼), 호(號)는 현재(玄齋)로 벼슬은 별제(別提)를 지냈다.
광주노씨(光州盧氏)로 성리학(性理學)에 밝았던 인물로 노극홍(盧克弘)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자(字)는 의보(毅甫), 호(號)는 옥촌(沃村)이었다.
선조 때 보일(補逸)로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 들어가 창녕(昌寧)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끝까지 지켜냈다.
월화당(月華堂) 노극복(盧克復)은 정경세(鄭經世)의 문인(門人)으로 역시 성리학(性理學)의 대가였다. 인조반정 뒤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으나 얼마있지 않아 사퇴하였다.
노준명(盧峻命)은 목사(牧使)를 지낸 분이다. 인조 12년에 문과(文科)에 급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왕을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호종(扈從)했으며 강화(講和) 뒤에는 정언(正言)이 되어 김류(金瑬)ㆍ윤방(尹昉)등을 탄핵하다가 파직되기도 했다. 그 뒤 홍원목사(洪原牧使)로 나아갔다가 윤방(尹昉)의 아들이 관찰사로 부임해 오자 사직하고 말았다. 그 뒤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광주노씨(光州盧氏)의 인물로 노계광(盧啓光)은 학자(學者)로 이름이 알려진 분이다.
숙종 45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학행(學行)으로 참봉에 천시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대학장구의견(大學章句疑見)’ ‘오행설(五行說)’ 등 여러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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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주요 인물 |
▲ 고려조 노 륜(盧倫)(좌간의(左諫議)) 노 창(盧昶)(시중(侍中))) 노 제(盧濟)(정언(正言)) 노 준경(盧俊卿)(지평(持平))
노 자형(盧自亨)(감사(監司)) 노 영국(盧永國)(병참(兵參)) 노 전(정언(正言)) 노 삼석(盧三錫)(예좌(禮佐)) 노 경복(盧景福)(참의(參議)) 노 태관(盧泰觀)(사성(司成)) 노 언방(盧彦邦)(도사(都事)) 노 윤중(盧允中)(지평(持平)) 노 수국(盧秀菊)(도사(都事)) 노 상익(盧相益)(교리(校理)) 노 태연(盧泰淵)(지평(持平))
노 득신(盧得信)(부사(府使)) 진해(晋海)(세종(世宗) 18년·중시(重試)·을과이(乙科二)) 자형(自亨)(문종즉위(文宗卽位)·추장(秋場)·병과(丙科)) 윤창(允昌)(연산(燕山) 3년·별시(別試)·병과(丙科)) 극창(克昌)(중종(中宗) 9년·별시(別試)·병과(丙科)) 세준(世俊)(중종(中宗) 17년·식년시(式年試)·갑과(甲科)) 한문(漢文)(중종(中宗) 2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대축(大畜)(중종(中宗) 30년·별시(別試)·병과(丙科)) 수신(守愼)(중종(中宗) 38년·식년시(式年試)·갑과(甲科)) 준(埈)(명종(明宗) 21년·별시(別試)·병과(丙科)) 전(선조(宣祖) 3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경복(景福)(선조(宣祖) 12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준명(俊命)(인조(仁祖) 12년·별시(別試)·병과(丙科)) 삼석(三錫)(현종(顯宗) 7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석빈(碩賓)(숙종(肅宗) 5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이형(以亨)(영조(英祖) 1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태관(泰觀)(영조(英祖) 14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언방(彦邦)(영조(英祖) 17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성중(聖中)(영조(英祖) 29년·정시(庭試)·갑과(甲科)) 천우(天祐)(영조(英祖) 47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중경(重慶)(순조(純祖) 5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응길(應吉)(고종(高宗) 5년·정시(庭試)·병과(丙科)) 영경(泳敬)(고종(高宗) 14년·정시(庭試)·병과(丙科)) 상익(相益)(고종(高宗) 19년·별시(別試)·을과(乙科)) 태연(泰淵)(고종(高宗) 25년·별시(別試)·병과(丙科)) 오행설(五行說)(노 계원(盧啓元)) 정성서의(定性書義)(노 계원(盧啓元)) 심의설(深衣說)(노 계원(盧啓元)) 경신잠(敬身箴)(노 수(盧遂)) 삼성물(三省勿)(노 수(盧遂)) 시강록(侍講錄)(노 수신(盧守愼)) 소재문집(蘇齋文集)(노 수신(盧守愼)) 입재집(立齋集)(노 흠(盧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