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십팔계(十八界), 세상의 근거
- 오철수 「동백」
십이입처가 욕탐에 의해 주관과 객관으로 취해지면 객관에 대한 주관의 인식이 발생합니다. 이것이 6식(六識)입니다. 이때 발생한 6식은 십이처를 조건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발생한 새로운 의식상태, 분별 의식입니다.
“내가 인식하지 않은 것은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듯이, ‘나에게 드러난 것’이라는 말은 벌써 나의 인식 활동 속에 드러난 것입니다. 따라서 인식 현상인 ‘법’이 생겨나려면 ‘인식하는 주체’가 있어야 하고 ‘인식하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식하는 주체가 인식하는 대상을 상대하여 ‘인식하는 작용’이 있어야 합니다. 인식하는 주체는 안계, 이계, 비계, 설계, 신계, 의계로서 인식 기관인 내육근계(內六根界)를 말하고, 인식 대상은 색계, 성계, 향계, 미계, 촉계, 법계로서 외육경계(外六境界)를 말하고, 인식 작용은 안식계, 이식계, 비식계, 설식계, 신식계, 의식계로서 육식계(六識界)를 말합니다. 이 열여덟 가지를 십팔계(十八界)라고 합니다.”(목경찬 『연기법으로 읽는 불교』 107쪽)
그런데 이렇게 분별 의식에 따른 6식이 생기면 사람들은 생각하길, 우리 안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식(識)이 있어(이것을 자아라고 생각한다!) 눈을 통해 색을 보고, 귀를 통해 소리를 듣는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식(識)은 십이처를 인연으로 발생하는 의식 현상일 뿐입니다. 식은 인연이 있으면 생겼다 인연이 없어지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식이 십이입처와 함께 쌓여 마음속에 십팔계를 형성합니다.
“십팔계는 각각 육근과 육경과 육식이 일어나는 근거, 씨앗, 원인입니다. 또는 육근과 육경과 육식이 법을 드러나게 하는 근거, 씨앗, 원인입니다. 이러한 근거, 원인, 씨앗으로부터 육근과 육경과 육식이 자신의 모습을 가지면서 일어나 화합하여 법(세상)이 나에게 드러납니다. 이러한 근거, 씨앗, 원인은 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습니다. 수건이 필요한 나는 그것을 보는 순간, 그것에 수건이라는 대상[색경(色境)]으로 덧칠하고, 긴 세월 어리석음 등 업에 오염된 안근(眼根)은 안식(眼識)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안근과 색경과 안식이 함께 하여 나에게 ‘수건’이라는 법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수건’은 저 밖에 있는 그 ‘수건’이 아니라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씨앗이 드러나서 파악된 ‘수건’입니다.”(목경찬 『연기법으로 읽는 불교』 108쪽)
그렇다면 나에게 펼쳐진 세상은 세상 그 자체가 아니라 마음 작용에 의해 드러난 세상이고 그 근거 역시 마음 작용으로 이루어진 십팔계인 셈입니다. 그렇기에 무상이고 무아이고 공한 것입니다. 멸해야 할 것은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생겨난 허망한 분별심입니다.
예로 다음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동백
- 오철수
동백, 아름답다고 한다
붉은 입술에 백치 같은 노란 웃음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지러질 것 같다 한다
한데 나는 시든 동백만 봐나서 영 이해가 안 간다
보길도에 갔을 때는 얼어 죽은, 얼음이 반쯤 든 동백만 보았고
승주 농협 앞에선 이미 땅에 떨어져 반쯤 뭉그러진
젖은 색지(色紙) 같은 동백만 봤다
제 아름다움으로 접어낸 몰락
그것은 처연하다
하지만 나동그라져 있는 동백에겐
어떤 후회도 부끄러움도 없어 보였다
누렇게 뭉그러져 가면서도 꿈꾸듯 미동도 않는 동백
아무것도 감출 것 없이 시들어간다는 것으로부터 나는
그의 젊은 날을 생각할 뿐이다
후회 없는 사랑이었을 거라고
시든 꽃을 보고 ‘예쁘다’고 할 분은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활짝 피었을 때의 모습을 ‘예쁘다’로 기억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든 꽃을 보자마자 ‘추하다’는 분별식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시든 꽃은 삶의 과정 중에서 시든 꽃일 뿐 예쁜 것도 추한 것도 아닙니다. ‘예쁘다/추하다’고 한 것은 마음입니다. 욕탐하는 마음에 십이입처가 일어나고, 분별하는 인식 작용이 생겨, 십팔계를 근거로 ‘시든 꽃은 추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인식은 다 마음 작용의 연기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근거라는 것도 역시 마음 작용으로 이루어진 십팔계입니다.
그런데 제 체험이 조금 달랐던 것은 제 안에 동백꽃이 예쁘게 핀 모습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데 나는 시든 동백만 봐나서 영 이해가 안 간다/ 보길도에 갔을 때는 얼어 죽은, 얼음이 반쯤 든 동백만 보았고/ 승주 농협 앞에선 이미 땅에 떨어져 반쯤 뭉그러진/ 젖은 색지(色紙) 같은 동백만 봤다”.동백꽃의 아름다움을 본 적이 없고 이미 형성된 상도 없었습니다. 물론 ‘시든 꽃’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가 있으니 여전히 유추하여 비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분별식이 즉각 작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편견 없이 시든 동백꽃을 조금 더 관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쯤 뭉그러진 상태입니다. 정말이지 “제 아름다움으로 접어낸 몰락/ 그것은 처연”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조금 보고 있으니 다른 느낌도 생겼습니다. 처연하지만 왠지 모르게 당당함 같은 것도 느껴집니다. 아마도 제가 “하지만 나동그라져 있는 동백에겐/ 어떤 후회도 부끄러움도 없어 보였다/ 누렇게 뭉그러져 가면서도 꿈꾸듯 미동도 않는 동백”에 주목한 것 같습니다. 떨어진 동백은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다 보여줍니다. 나였으면 어땠을까? 검게 뭉그러지는 모습을 감추려고 했을 것인데 동백은 당당했습니다. 어떤 후회도 없어 보였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은 지는 꽃의 처참한 모습을 근거로 ‘꽃피지도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곤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도덕적으로 읽으며, ‘봐라. 너의 욕망은 저렇게 끝난다. 그런데도 너는 욕망할 것이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더욱 감추고 싶습니다. 하지만 시든 동백꽃에겐 그런 것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냥 시든 모습일 뿐입니다. 그것이 제게 “아무것도 감출 것 없이” 시들어 가는 동백의 모습으로 강렬하게 새겨졌습니다. 시든 꽃에 대해 고정관념처럼 작동하던 분별식 대신에 새로운 생각이 열린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무것도 감출 게 없습니다. 떳떳합니다. 살아온 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입니다. 더하고 뺄 것이 없기에 후회도 없고 감출 것도 없는 것입니다. 최선의 삶이었고 “후회 없는 사랑”이었을 겁니다. 다했다면 아무것도 감출 게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습이야말로 후회 없는 꽃 피움과 후회를 남길 수 없는 꽃 짐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생각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 십이입처와 육식이 이룬 십팔계 역시 마음으로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다른 인연에서 다른 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오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