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교육의 여명 5>
민족 사학 보성, 중앙
김붕래
1. 보성고교
<휘호 : 여초 김응현 선생>
1906년 보성중학교를 설립한 이용익 선생은 가히 전설적인 인물이라 할 만합니다.
젊은 나이에 손 댄 금광이 성공하자 커다란 금 덩어리를 고종 임금께 바치는가 하면, 임오군란 때 장호원에 숨어 지낸 명성황후의 안부를 시시각각으로 고종에게 전한 괴력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서울에서 장호원까지 100km를 하루에 왕복했다하여 축지법을 쓴다는 둥 신통력을 지녔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민족의식이 강한 그는 을사늑약을 끝까지 반대하다가 일본으로 유폐 당하는데, 그곳에서도 민족 교육의 장래를 내다보고 일본의 선진 교육제도를 관찰하면서 안목을 넓히다가 유폐가 풀리자 사비 10여 만 원을 들여 600여권의 서적과 인쇄 장비를 구입해 귀국했습니다.
귀국하여 보성소학교, 보성중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세웠습니다. 학교를 세워 나라를 떠받친다(興學校以 扶國家)는 우국충정의 발로입니다. 보성(普成)이라는 학교명은 고종이 내린 것으로 ‘사람다움을 열어 널리 이루게 한다.’는 뜻입니다. 보성학원과 함께 입수한 책을 번역 보관할 ‘보성관’, 보성학원의 교재를 만들 인쇄소 ‘보성사’도 함께 세웠는데 이 보성사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보성중학교가 처음 세워진 위치는 현재 조계사 자리인 종로구 수송동 44번지입니다. 1927년 성북구 혜화동 1번지로 새 교사를 지어 이전하면서, 보성 옛터에는 조계사가 들어섰습니다. 조계사 옆 ‘수송공원’에는 ‘보성사 옛터’란 표지석이 있습니다. 1987년 송파구 방이동으로 이전하고 혜화동 그 자리에는 현재 서울과학고등학교가 세워져 있습니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면서 이용익 선생의 망명 등으로 인해 학교 재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천도교를 운영하던 손병희 선생이 재단을 맡고, 최린 선생이 4대 교장으로 취임했습니다. 31운동 전후 이면사를 들쳐보면 보성학원 인맥이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3.1 운동의 도화선이 된 도쿄 ‘2.8 독립 선언’ 대표 중 한 사람이 보성 6회인 김도연이었으며, ‘2.8 독립선언서’를 국내에 들여온 사람은 보성 5회인 송계백이었습니다. 그는 보성 4회인 현상윤 중앙고 교사(후일 고려대 초대 총장이 됨)와 보성 교장이었던 최린 선생 등을 만나 도쿄의 움직임을 상세히 전합니다. 시기가 도래한 것을 확신한 당시 천도교 대표이자 보성의 경영주인 손병희 선생은 기독교계의 이승훈 선생, 불교계 한용운 스님의 참가 동의를 얻어내어 독립 선언을 구체화 합니다. 최린 선생은 최남선 선생을 추천하여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게 했는데, 일설에는 최린 교장 사택에서 그것을 썼다고도 합니다.
1919년 2월 27일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 3만5천매(혹은 2만1천매라는 자료도 있음)가 보성중학교 구내에 있는 보성사에서 인쇄됩니다. 현재 조계사 대설법전 옆에 ‘수송공원’이란 작은 공터가 있는데 거기에 ‘보성사 표지석’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증언해 줍니다.
보성 10 회인 장채극, 전옥 영 등 보성학생들은'독립선언 서'와 '조선독립신문'을 곳곳 에 배포하고, 시위를 주도하 는 등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개교 80주년 을 맞이해, 1986년 9월 5일 교우들이 뜻을 모아 만든 <보성종>에 새겨져 전해 내 려옵니다.
3.1 만세 운동은 우리 민족사로 볼 때는 위대한 도전이고 혁명이었지만 천도교나 보성학교 입장에서는 손병희란 큰 그늘을 잃어야 했습니다. 손병희 선생은 옥중에서 병을 얻어 1922년 타계하고 정신적 지주를 잃은 천도교는 내분에 휩싸이고 보성학원은 재정적 타격을 입게 됩니다. 그리하여 1924년에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서 보성중학교를 인수하여 혜화동에 현대식 새 교사를 지었고, 1932년에 보성전문학교는 김성수 선생이 인수하여 고려대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또 보성중학은 1940년에 동성학원을 세운 전형필 선생이 인수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전형필 선생은 사재를 털어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국보급 문화재를 수집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위대한 분입니다.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68호) 같은 그 분의 흔적이 현재 성북동 간송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보성고교 교정에는 <보성종> <이상시비> <김기림시비>가 있으며 1911년에는 주시경 선생이 <조선어강습원>을 열고 한글 보급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만 해도 5대 공립, 5대 사립이라 하여 학생들의 자존심이 대단했고 애교심도 평준화 시절보다 강했습니다. 경기, 서울, 경복, 용산, 경동을 사람들은 5대 공립이라 했고, 배재, 양정, 보성, 휘문, 중앙을 5대 사립이라 했습니다. 지금도 이라 하여 5대 사립이라 불리는 학교끼리 체육대회나 음악회 등을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휘전(휘보전)> 이라 하여 보성 휘문 두 학교는 정기적으로 친선축구대회도 있습니다.
2. 중앙고교
<인촌 김성수 선생 친필 휘호, 교지 웅원, 용견, 성신>
중앙고등학교는 1908년 기호지방 유자들이 종로구 소격동(昭格洞)(경복궁 동쪽)에 세운 기호학교(畿湖學校)가 그 시발점입니다. 제2대 교장 박승봉(朴勝鳳) 선생이 종로구 화동에 교사를 마련하여 이전하고 제1회 졸업생 61명을 배출하였습니다. 1910년 9월 유길준 선생이 교장으로 있는 융희학교(隆熙學校)를 합병하면서 학교 이름도 사립중앙학교(私立中央學校)로 고쳐집니다.
1915년 4월 김성수 선생이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하고 양아버지 김기중(金祺中)과 생부 김경중(金暻中)을 설립자로 추대하였습니다. 두 분은 모두 유명한 호남 거부들이었습니다. 교명을 백두산을 상징하는 ‘백산학교‘로 바꾸려고 하였으나 총독부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학교의 건학이념을 진작하기 위하여 민족이념이 투철한 송진우(宋鎭禹)·현상윤(玄相允)·최두선(崔斗善) 등 유능한 인사들을 교사로 초빙하고, 1917년 계산(桂山) 언덕(지금의 서울 종로구 계동 1번지)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습니다. 1917년에 지은 구 본관이 1934년 화재로 소실되어 고딕식 석조 본관이 1937년에 완공되었고 그 양 옆의 서관은 1921년, 동관은 23년에 적벽돌로 지어진 2층 건물로 모두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사적史蹟 218, 282, 283호)
3.1 운동의 시발점으로 중앙고보 숙직실이 많이 거론 됩니다. 동경 유학생 송계백이 중앙고보 숙직실로 현상윤을 찾아와 2,8 독립선언문을 전하고 중앙 교장 송진우 보성교장 최린과 접촉한 장소로 새로 아담하게 재건축되어 ‘3.1 기념관’이란 현판을 달아 놓았습니다. 보성의 ‘보성종’과 중앙의 ‘숙직실’은 두 학교의 자랑이자 자존심이기도 합니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중앙학교의 1910년 11월에 만들어진 모표는 무궁화 복판에 중앙학교의 '中'자를 넣어 도안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불순하게 여긴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1938년부터는 무궁화 모표를 사용할 수 없게 되어. 1939년의 새 학기부터는 무궁화를 대신한 월계관 모표를 사용하다가 광복 후 원래의 무궁화 모표로 복귀하여 오늘날까지 사용해오고 있습니다. 1951년 6년제 중학교 과정이 3년제 중고교로 분리되면서 "中"자를 새겨 넣은 중앙학교의 모표는 현재 중앙중학교에서 사용하고, 중앙고등학교는 "髙"자를 새겨 넣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1937년 완공된 본관(사적 218)과 교정을 굽어보는 인촌 김성수 선생 동상>
교정에는 이상화 서정주의 시비, 채만식의 문학비가 있고 본관 앞에 인촌 동상이 교정을 굽어보고 있습니다, 중앙을 인수한 인촌 김성수 선생이 1화,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이 2회 음악가 나운영, 탈랜트 최불암도 중앙 출신입니다. 교정이 아름다워 <겨울연가> <도깨비> 같은 유명한 드라마를 중앙고교 교정에서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중앙고교는 2009년부터 자율형사립고교로 변하여 계산(桂山) 언덕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 북촌에 남아 있는 학교는 중앙, 덕성, 그리고 인력거꾼들의 조합원이 세운 대동상고(대동세무고등학교)의 세 학교뿐입니다.
첫댓글 멍석을 깔아 주셨으니 저도 이 교수님 모교 소개로 화답해 봅니다.
잘못된 부분, 추가할 부분도 있을 것 같으니 叱正을 아끼지 마십시요
감사감사합니다.
더욱 감사합니다
매일 매일 좋은 날
오늘도 웃고 웃으며!
설날 인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