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의 이중성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토론회에서 극명하게 들어난다.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되는 자들은 그들의 경력이나 행위에 문제가 있음에도 일치단결하여 극복하는 대단한 용기를 보여줬다.
그 예로 지난 3.1절을 기해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서훈된 여운형을 들 수 있다.
여운형의 좌익 활동을 이유로 국민들의 거센 서훈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마이동풍으로 일관하더니 급기야 서훈을 결정 하였고, 여운형의 유일한 혈육인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 중앙위 의장인 여운구는‘애국인사를 암살한 미국의 죄악부터 밝혀내야 한다’는 題下의 글에서 몽양에 대한 한국정부의 훈장수여 결정에 대해 훈장수여를 거부하며 미국의 죄악부터 밝히라는 맹비난을 퍼부어도 속수무책으로 대응 한번 하지 못하는 망신살만 뻗치기도 했다.
받기 싫다는 훈장을 억지로 받으라는 정부의 행위도 웃기지만 급기야 훈격이 낮다는 이유로 서훈을 거부한다는 또 한번 웃기는 작태를 연출한 유족들의 오만방자함에 그저 국민은 하릴없이 멍든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 사전에 과연 누구를 넣을 것인가 지켜본다고 했는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한 이번 서훈은 대한민국이 역사의 진실에 한발짝 더 접근하는 것으로 의미가 적지 않다"는 자화자찬을 늘어놓은 자는 국가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 위원장 신용하다. 신용하는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으로 코드 맞는 자들끼리 짜고치는 고스톱판을 연출하여 사회계열 운동가들의 서훈 길을 활짝 열어 놓았고 김희선, 김삼웅 등이 제도적 장치를 마련함으로 앞으로도 수 많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탄생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동안 민족문제연구소의 무소불위 횡포를 열거하자면 끝이 없겠으나 굵직한 사건만 열거해도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 반대투쟁, 문래동 박정희 동상 철거, 광화문 현판 교체론, 윤봉길 사당인 충의사에 걸린 박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 철거, 국회내 이승만 동상 건립 반대운동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불법 행동을 자행해 왔음에도 정부에서는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고 오히려 부추긴다는 의혹을 떨칠 수 없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취임 첫 일성으로 박정희 친필 광화문 현판 철거를 거론하다 국민의 호된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다. 정부 인사들의 이런 거침없는 발상 역시 서로 교감이 있었을 것이라고 예상하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명예와 인권도 무시하고 목적 수행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철저히 제거해 나갔다.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된 김창룡 무덤도 이장해야 한다며 백범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목하는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사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친일파라는 구실로 국민의 존경을 받는 건국 공신인 초대 대통령 이승만, 경제개발의 주역 박정희 죽이기에 모든 노력을 경주하며 대한민국 국민의 구심점을 철저히 분쇄하려는 음모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운형은 독립유공자로 서훈되기에 아무런 흠이 없는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여운형이 좌익 활동을 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나 여운형의 친일 행위에 대해서는 왜 언급을 회피하는가. 박정희의 경우 그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로서 삶의 방편으로 만주군에 복무한 기록만을 가지고 극악한 친일파로 매도하던 것과는 그 양상이 사뭇 다르다.
-친일진상규명 특별법 관련 토론 중-
정근식 : 젊었을 때와 나이 들어서의 행위가 다른 것을 어떻게 고려하는가? 장치가 필요하다.
조세열 : 4항에 규정하고 있다. 선 독립운동, 후 친일의 경우는 독립운동 공훈심사에서도 용서 안된다.
김민철 : 사소하게 파악된 경우는 포함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전향 후 중심적으로 활동한 경우가 포함될 것이다.
조세열 : 병이 들어 전향한 경우도 있다. 이를 친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 사전의 인물 수록범위와 서술방식 토론 중-
(발제 : 김승태, 허영란)
김승태 : 사전을 접하는 일반인은 어떤 교훈보다 누가 친일파냐 이런 질문을 하고 있다. 궁금하면 찾아 볼 수 있는 사전을 필요로 한다. 특위에 미루지 말고 보다 폭넓게 정보를 제공하자는 것이다. 사전에 교훈적 요소를 넣는 것은 사전에 이름이 수록된 것으로 만족된다.
박한용 : 그렇게 할 경우 부일협력자 사전의 의미로 기우는 것으로 보인다. 보훈처의 "공훈록"과 "독립운동가사전" 두 가지 경우에 비추어 보면 공훈록은 범위가 넓지만 독립운동 가사전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람을 등급을 나눠 포함하고 있다. 공훈록은 특위에서 가는 형태고, 독립운동가사전은 편찬위의 사전에 가까운 것은 아닌가?
김승태 : 두 번 이상의 친일행위가 있는 경우 모두 포함하고(안재홍, 여운형) 독립운동의 경우도 모두 수록한다.
김민철 : 그 작업을 편찬위에서 굳이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국민성금이 상당히 부담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위에 연구소의 인력이나 자료, 성과를 지원하게 될 것이다. 순서가 바뀌게 되었지만 특위 보고서에 준하는 자료를 압축해서 사전이 만들어지는 것이 바른 방향일 것이다.
위에서 살펴 본 바로 여운형 역시 두 번 이상의 친일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민족문제연구소에서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여운형의 친일행위에 관해서 민족문제연구소측은 단 한번도 언급을 하지 않았다.여기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중성이 적나라하게 들어난다.
여운형의 친일행위는 저들이 주장하는 박정희의 친일행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박정희는 식민지 시대에 출생하여 조국의 독립을 기약할 수 없는 암울한 시대에 20대를 맞았고, 식민지 국가의 젊은이로서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도 보장되지 않던 시대에 만주 군관을 직업으로 택했다. 만일 박정희가 만주 군관학교에 입학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징병의 그물을 피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여운형의 경우는 그야말로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친일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묵계하에 독립유공자라는 명예를 부여했던 것이다. 저들의 주장대로 만주 군관이 된 것이 친일행위라면 일개 하급 장교인 박정희의 친일행위는 여운형의 친일행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가벼운 것이다.
자유시 사변 당시 독립군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여운형이 독립운동가라니 참으로 기가 찬 노릇이다. 1921년 6월22일 이르크츠크파 고려 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인터내셔날 오뜨라드(원동 혁명군)의 헤게모니 쟁탈을 위해 빚어진 갈등으로 민족진영 독립군 7~8백여명이 흑룡강의 고혼으로 참살당한 자유시 사변때는 이르크츠크 공산당으로 당적을 옮겨 적군에 포로된 민족진영 독립군 재판에서 기소배심원이 되어 민족진영 독립군을 처형하는데 앞장 섰는데 당시 처형된 독립군들은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한 김좌진, 홍범도, 지청천, 안무 등 쟁쟁한 장군 휘하 병력들 이었다.
그 후 1933년 여운형과 이광수, 장덕수는 일본의 회유에 넘어가 귀순하고 일본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귀국했다. 이것은 여운형의 투항에 의한 첫번째 친일행위였다.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 측은 이광수의 친일행위는 맹렬히 비난하며 같이 투항한 여운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오히려 은폐하고 있다.
1943년에는 유언비어 유포죄목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으면서 이때 전향서를 썼는데 그 내실은 KGB요원 혐의 때문이었다. 전향서 내용은 앞으로 공산당 활동을 하지 않겠으며 일본에 전적으로 협조하겠다는 내용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야 KGB요원 혐의자를 집행유예로 내놓지는 않았을테니 말이다.
친일인명사전에 과연 여운형이 등재가 될지는 지켜볼 일이다만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중적 행태에는 분노를 금할 수 없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금년에도 교육부 예산을 국사편찬위원회를 경유해 집행하는 형식으로 반민족행위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4억원을 지원 받았다. 이것이 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의 결탁이 아니고 무엇인가. 정부의 지원은 곧 국민의 혈세가 지원되는 것이다. 국민의 혈세로 친북세력의 김일성 부자를 위한 선전-선동을 지원하는 정부의 정책에 국민들은 분노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