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을 보면, 시를 “풍경이나 人事 따위 일체에 관하여 일어나는 감흥이나 사상 따위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으로 표현한 글”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에서 풍경은 자연, 인사는 인생, 감흥은 감정, 사상은 상상으로 바꿀 수도 있는 바, 동양시학에 나오는 ‘先景後精이란 말도 먼저 풍경을 묘사하고 나중에 그에 상응하는 인간의 감정을 진술한다는 것으로 시의 기본원리를 논하고 있는 셈이다.
풍경은 대상이다. 이를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은 주체다. 이 대상과 주체간의 교감은 생생한 시적 표현을 위한 명제다. 이런 교감은 열린 시정신에서만 가능하다. 신학자 라인훌드 니버의 말을 빌리자면 열린 시정신이란 닫혀 있는 單子들의 세계에 창문을 마련하는 일과 같다. 오늘날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대상인 풍경은 사라지고 주체의 무의식이나 여타 심리에 대한 진술만 난무하는 경우를 흔히 대하게 된다. 어떤 경우엔 그 주체의 죽음까지 운위하며 시를 그야말로 지리멸렬의 지경으로 빠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풍경을 벗어나 살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나 자신의 주체성을 해체해버리거나 나 자신의 주체성만을 고집하면서 살 수도 없다.
풍경과 주체간의 교감 곧 너나들이는 우주와 세계의 비의를 캐고 그 속에서 삶의 위의를 세우려고 하는 모든 시인들의 한결같은 꿈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 풍경이 부서지고 일그러지고 참혹한 파괴를 겪고 있다. 자본과 욕망이 이 풍경을 왜곡시키고 겁탈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곡된 풍경을 바로 세우는 일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싱싱한 풍경과의 교감을 이루겠는가. 그런데 풍경을 바로 세우는 일은 그 풍경을 훼손한 주체를 먼저 바로 세워야 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소설가 김훈은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라는 명제를 세우며 풍경은 상처를 경유해서만 해석되고 인지된다고 했다.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속에서 살아간다. 상처를 통해서 풍경으로 건너갈 때, 이 세계는 내 상처 속에서 재편성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데, 그때 새로워진 풍경은 상처의 현존을 가열하게 확인시킨다. 그러므로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다.”이라는 것이다. 이는 결국 주체에 대한 철저한 확인이자 성찰을 말하는 것이지만 주체 과잉의 혐의를 벗을 수 없다
이에 반해 오규원은 그런 싱싱한 풍경에다 인간이 문화라는 명목으로 덧칠해놓은 지배적 관념이나 허구를 벗기고, 세계의 실체인 ‘頭頭物物’의 말, 곧 현상적 사실을 날 것(‘날이미지’) 그대로 옮기자고 말한다. 이는 시에 있어서 주체의 관념을 표현하는 진술을 가급적 억제하고 풍경을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게 한다. 唐詩의 빼어난 것들은 대개 이런 묘사형의 시라고 한다.
얼마 전 고은 시인은 한 잡지의 대담에서 시인들이 환경 생태문제를 노래하는 과정에서 풍경의 철학, 풍경의 미학을 꿈꾸는 일 또한 중요시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그동안 풍경을 제대로 완성해본 적이 없었는데 다행히 18세기의 진경산수화 같은 것에서 비로소 우리 자신의 풍경을 찾았다며 풍경의 주체성을 강조했다. 사실 풍경을 보러 다니는 ‘관광’이란 말도 본래는 "빛을 본다"는 것으로 사물의 핵심, 본질과 만난다는 뜻인데 요사이는 이동의 오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떨어져 버린 것을 또한 개탄했다.
이제 이런 풍경과 상처, 곧 대상과 주체가 시 속에서 어떻게 길항하고 어떻게 교감하는가 구체적인 시들을 통해 살펴보자.
<교감> - 보들레르
대자연은 하나의 사원이니 거기에서 산 기둥들이 때로 혼돈한 말을 새어 보내니, 사람은 친밀한 눈으로 자기를 지켜보는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그리로 들어간다.
어둠처럼 광명처럼 광활하며 컴컴하고도 깊은 통일 속에 멀리서 혼합되는 긴 메아리들처럼 향과 색과 음향이 서로 응답한다.
어린이 살처럼 싱싱한 향기, 木笛처럼 아늑한 향기, 목장처럼 초록의 향기가 있고, ―그밖에도 썩은 풍성하고 기승한 냄새들,
정신과 육감의 앙양을 노래하는 용연향,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무한한 것의 확산력 지닌 향기도 있다.
<눈 내리는 밤 숲가에 멈춰 서서> - 프로스트
이게 누구의 숲인지 나는 알 것도 같다. 하기야 그의 집은 마을에 있지만― 눈 덮인 그의 숲을 보느라고 내가 여기 멈춰 서 있는 걸 그는 모를 것이다
내 조랑말은 농가 하나 안 보이는 곳에 일년 중 가장 어두운 밤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 이렇게 멈춰 서 있는 걸 이상히 여길 것이다.
무슨 착오라도 일으킨 게 아니냐는 듯 말은 목 방울을 흔들어 본다. 방울소리 외에는 솔솔 부는 바람과 부드럽게 눈 내리는 소리뿐
숲은 어둡고 깊고 아름답다, 그러나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으며 잠자기 전에 몇십 리를 더 가야 한다 잠자기 전에 몇십 리를 더 가야 한다
우선 보들레르의 시 ‘교감’은 흔히 ‘상응’이라고도 하는데, 학자들이 연구에 의하면 천상계(정신, 이데)와 지상계(물질, 감각)의 상응, 인간과 자연과의 상응, 인간과 천상계의 상응을 통틀어 의미한다고 한다. 먼저 시인은 대자연을 살아있는 기둥으로 된 사원이라고 한다. 거기에서 말은 나타나 사라지고, 사람은 언제나 친밀한 눈으로 자기를 지켜보는 그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그리로 들어간다고 한다. 속인들에게는 숲의 숲, 화초목석이 한갓 자연물에 불과하지만 오직 ‘어떤 心魂의 상태 속에 도달한’ 행복한 순간에 놓여있는 사람에겐 친밀한 시선으로 그를 지켜보는 상징의 숲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사원’은 속인들의 종교 전당으로서의 사원이 아니고, 그 높은 ‘심혼의 상태’에 도달한 진정한 시인만이 들어갈 수 있는 사원이다.
속인에겐 ‘어둠처럼’ ‘컴컴하고’ 시인에게는 ‘광명처럼’ ‘깊은’ 통일 속에서 향기와 색깔과 음향이 마치 긴 메아리처럼 서로 응답하는 장관을 보라. 정신과 육감의 공존 대립은 보들레르에게 있어선 한 시적 원천으로 자리하는데, 3연 4연에 이어지는 썩은 냄새 ․ 용연향 ․ 사향은 육감을 앙양하고, 싱싱한 ․ 아늑한 ․ 초록의 향기들과 안식향 ․ 훈향은 정신을 앙양하며, 풍성하고 기승한 향기는 양자 어느 쪽에도 해당될 수 있다. 이러한 향기들이 무한한 확산력을 지니고 서로 상응하며 널리 퍼지는 것이다. 시인은 이처럼 보통의 사람들과는 달리 신성한 숲의 사원에 들 수 있는 교감에 매우 능한 사람이다.
프로스트의 시는 시적화자가 조랑말을 타고 일년 중 가장 어두운 밤에 눈 덮인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 멈춰 서 있다. 방울소리와 바람소리와 부드럽게 눈 내리는 소리뿐인 “숲은 어둡고 깊고 아름답다”. 문학평론가 도정일은 이렇게 어둡고 깊고 아름다운 숲은 이제 이 지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산성비와 공해로 얼룩진 바람에 이제 더는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고 비탄한다. 어쨌건 시적 화자는 그렇게 어둡고 깊고 아름다운 눈 내리는 숲을 경이에 찬 눈길로 바라보지만, 이윽고 지켜야 할 약속 때문에 잠자기 전에 몇 십리를 더 가야 한다고 재차 다짐을 한다. 이는 풍경에 몰입되어 버린 나머지 인간의 의무를 방기하는 시인들에 대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보들레르처럼 풍경에의 몰입보다는 풍경에 취하면서도 주체의 성찰을 중시하는 게 프로스트인 것이다.
대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상징의 숲을 가로지르고 여기에 온갖 향기가 넘쳐나는 시의 사원 혹은 높은 심혼의 상태에 든 보들레르나, 어둡고 깊고 아름다운 숲에서의 평온한 잠을 꿈꾸지만 아직 삶의 의무가 남아 있어서 몇 십리를 더 가겠다는 다짐을 하는 프로스트는 각기 개성대로 풍경을 바라본다.
이런 두 시인의 풍경을 대하는 방식은 다음 천양희와 고은의 시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추월산> - 천양희
바람이 먼저 능선을 넘었습니다 능선 아래 계곡 깊고 바위들은 오래 묵묵합니다 속 깊은 저것이 모성일까요 온갖 잡새들, 잡풀들, 피라미떼들 몰려 있습니다. 어린 꽃들 함께 깔깔거리고 버들치들 여울 타고 찰랑댑니다 회화나무 그늘에 잠시 머뭅니다 누구나 머물다 떠나갑니다 사람들은 자꾸 올라가고 물소리는 자꾸 내려갑니다 내려가는 것이 저렇게 태연합니다 無等한 것이 저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누가 세울 수 있을까요 저 무량수궁 오늘은 물소리가 더 절창입니다 응달쪽에서 자란 나무들이 큰 재목 된다고, 우선 한소절 불러젖힙니다 자연처럼 자연스런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나는 저물기 전에 해탈교를 건너야 합니다 그걸 건넌다고 해탈할까요 바람새 날아가다 길을 바꿉니다 도리천 가는 길 너무 멀고 하늘은 넓으나 공터가 아닙니다 무심코 하늘 한번 올려다봅니다 마음이 또 구름을 잡았다 놓습니다 산이 험한 듯 내가 가파릅니다 雉俗고개 다 넘고서야 겨우 추월산에 듭니다
천양희의 <추월산>은 풍경과 주체의 절절한 화응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화자보다 먼저 능선을 넘는 바람, 능선 아래의 깊은 계곡과 묵묵한 바위, 거기에 몰려서 깔깔거리고 찰랑대는 잡새들, 잡풀들, 피라미떼들, 어린 꽃들, 버들치들을 묘사하다간 회화나무 그늘에 잠시 머물면서 ‘누구나 머물다 떠나가는’ 지상의 留宿에 대한 사유를 해대고, 사람들은 자꾸 올라가는데 무등한 물소리는 자꾸 내려간다며 이야말로 절창이라고 말함으로써 사람의 교만을 비판하고, 응달쪽에서 자란 나무들이 큰 재목이 된다는 깨달음을 하며, 결국엔 자연처럼 자연스런 세상에서 살고 싶은 마음을 자연스레 진술해내는 그 유려함이 너무 진정스럽다. 한마디로 자연학교의 모범생만이 쓸 수 있는 시이다.
그런데 이 시는 보들레르처럼 자연을 살아있는 기둥으로 된 신전으로 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시인 까닭에 후반부에 나오는 주체의 저물고, 너무 멀고, 험하고, 가파른 심적 상태는 사실 핍진성이 별로 없는 허사 같은 것이 흠이다. 자연의 완전성에 대한 맹목적 믿음은 그 믿음만큼이나 위험한 것이다.
<자작나무 숲으로 가서> - 고은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 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 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 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 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오래오래 우리나라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온 울음이었다 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 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 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
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우쭐해서 나뭇짐 지게 무겁게 지고 싶었다 아니 이런 추운 곳의 적막으로 태어나는 눈엽이나 삼거리 술집의 삶은 고기처럼 순하고 싶었다. 너무나 교조적인 삶이었으므로 미풍에 대해서도 사나웠으므로
얼마만이냐 이런 곳이야말로 우리에게 십여 년만에 강렬한 곳이다 강렬한 이 경건성! 이것은 나 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말하는 것을 내 벅찬 가슴은 벌써 알고 있다 사람들도 자기가 모든 낱낱 중의 하나임을 깨달을 때가 온다 나는 어린 시절에 이미 늙어버렸다 여기 와서 나는 또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자작나무의 천부적인 겨울과 함께 깨물어먹고 싶은 어여쁨에 들떠 남의 어린 외동으로 자라난다
나는 광혜원으로 내려가는 길을 등지고 삭풍의 칠현산 험한 길로 서슴없이 지향했다
고은의 <‘자작나무 숲으로 가서> 라는 시는 1984년 시집『조국의 별』에 발표된 시이다. 우선 이 시의 의미구조를 좇아가 보면, 그것은 시적화자가 자작나무 숲에 들어와 그 겨울나무들을 통하여 타락하지 않는 것 곧 정직한 것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1연), 그리고 자신과 자연 그리고 세상 전체가 일체되는 것을 느낀다. 물론 거짓이 없는 슬픔을 오래 울어온 우리나라 여자들이야말로 당연히 이 일체 속에 맨 먼저 끼게 된다(2연). 이어서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 지금까지 미풍에 대해서도 사나웠던 너무나 교조적인 삶을 반성하고 삼거리 술집의 삶은 고기처럼 순하고 싶어진다(3연). 그와 동시에 마침내 발견한 삶의 강렬한 경건성으로 나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다시 태어났으면 하는 바람을 하고(4연), 그리하여 험한 길로 지향하는 새로운 출발을 한다(5연).
따라서 이 시도 일단 자연과의 교감을 통하여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어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신생과 도약을 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시가 나게 된 것은 더 큰 배경이 있다. 고은은 스스로 자신의 스승으로 효봉선사와 전태일 두 사람을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꼽는다. 1970년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자살사건은 절에서 환속한 후 그때까지 허무주의적 음주와 황음과 탐미의 삶에 빠진 고은의 삶을 거듭나게 하여 민족에 대한 사랑과 민주회복의 투쟁에 나서게 한다. 그리하여 각종 시국사건에 관여하는 바람에 여러 차례의 구금, 투옥, 폭행당하는 고초를 겪는다. 하지만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며 전위를 자처하는 그런 교조적인 삶에 대한 자기비판은 당시 문단에 대두된 ‘리얼리즘 재생의 모색’을 위해서도 필요했고, 동시에 나무의 떨림을 통해 생명의 충만 속에 깃들인 삶의 경건성을 발견하고 마침내 순해지고 싶다는 성찰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 또한 자기 개인적 삶의 변증법적 통일을 위해서도 필요했던 것이다. 자연과 인생, 혹은 풍경과 주체는 어느 한쪽만으로 치울 땐 삶과 세계의 총체성을 놓치기 쉬운 것이다. 결국 이 시는 풍경을 통해 신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역시 삶의 갱신 쪽에 무게가 더 있는 것이다.
천양희와 고은의 풍경에 대한 주체의 대응은 정현종과 김명인에게서도 계속된다.
<그 꽃다발> - 정현종
마추피추 山頂 갔다 오는 길에 무슨 일인지 기차가 산중에서 한참 서 있었습니다. 나는 내렸습니다. 너덧 살 되었는지 (저렇게 작은 사람이 있다니!) 잉카의 소녀 하나가 저녁 어스름 속에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항상 씨앗의 숨소리가 들리는 어스름 속에, 저 견딜 수 없는 박명 속에, 꽃다발을 들고, 붙박인 듯이. 나는 가까이 가서 (어스름의 장막 속에서 그 아이의 오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보았습니다. 이럴 때 눈은 우주입니다. 그 미소의 보석으로 지구는 빛나고 그 미소의 天眞 속에 시냇물 흘러갑니다. 그 미소 멀리멀리 퍼져나갑니다. 어스름의 光度 속에 퍼져나갑니다.)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2솔을 주고 꽃다발을 받아들었습니다. 허공의 심장이 팽창하고 있었습니다.
<바다의 아코디언> - 김명인
노래라면 내가 부를 차례라도 너조차 순서를 기다리지 않는다 다리 절며 혼자 부안 격포로 돌 때 갈매기 울음으로 친다면 수수억 톤 파도소리 긁어대던 아코디언이 갯벌 위에 떨어져 있다. 파도는 몇 겁쯤 건반에 얹히더라도 지치거나 병들거나 늙는 법이 없어서 소리로 파이는 시간의 헛된 주름만 수시로 저의 生滅을 거듭할 뿐. 접혔다 펼쳐지는 한순간이라면 이미 한생애의 내력일 것이니. 추억과 고집 중 어느 것으로 저 영원을 다 켜댈 수 있겠느냐. 채석에 스몄다 빠져나가는 썰물이 오늘도 석양에 반짝거린다. 고요해지거라. 고요해지거라. 쓰려고 작정하면 어느새 바닥 드러내는 삶과 같아서 뻘밭 위 무수한 겹주름들. 저물더라도 나머지의 음자리까지 천천히, 천천히 파도 소리가 씻어 내리니, 지워진 자취가 비로소 아득해지는 어스름 속으로 누군가 끝없이 아코디언을 펼치고 있다.
정현종의 시는, 시인이 페루 마추피추 갔다가 내려오는 석양의 박명 속에 꽃다발을 들고 선 조그마한 잉카 소녀 하나를 발견하고, 경이와 환희에 차서, 그 꽃다발을 사주는 동안 그 소녀의 미소에 완전히 몰입해버린 과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 미소의 보석으로 지구가 빛나고, 그 미소의 천진 속에 시냇물이 흘러간다니! 풍경의 원래 말은 ‘風光’이었다던가. 빛과 바람. 만약에 자그마한 잉카소녀가 ‘저 견딜 수 없는 박명 속에’, 그러니까 석양의 그 희미한 빛 속에 서 있지 않았더라면 어쨌을까.
정현종의 다른 시<밀려오는 게 무엇이냐>를 보자. “바람을 일으키며/ 모든 걸 뒤바꾸며/ 밀려오는 게 무엇이냐./ 집들은 물렁물렁해지고/ 티끌은 반짝이며/ 천지사방 구멍이 숭숭/ 온갖 것 숨쉬기 좋은/ 개벽./ 돌연 한없는 꽃밭/ 코를 지르는 향기/ 큰 숨결 한바탕/ 밀려오는 게 무엇이냐/ 막힌 것들을 뚫으며/ 길이란 길은 다 열어놓으며/ 무한 變身을 춤추며/ 밀려오는 게 무엇이냐/ 오 詩야 너 아니냐.”
이 시는 바람의 이미지와 숨결의 가치를 의미있게 부각시킨 작품이다. 정현종의 중요한 시론인 「시의 자기동일성」은 풍경과 주체의 황홀한 합일 가운데 터져나오는 자유의 숨결, 생명의 숨결, 자연의 숨결에 대한 논리를 담고 있다. 그의 시쓰기는 그러므로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고, 우리의 의식과 정신을 마비시키는 모든 죽음의 세력에 대한 저항의 시도이며, 또한 문명과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되고 쭈그러든 인간의 원초적 자아를 회생시켜 우리를 우주적인 운동과 생기 속에 열어놓으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그것을 숨결의 시학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데 위의 시는 바로 그것이 육화된 시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무엇보다 모든 것을 뒤바꾸는 힘이 있다. 집처럼 고정된 건물이나 인간 사회의 잘못된 제도와 고정관념의 경직성을 물렁물렁하게 만들 수 잇고, 티끌처럼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그것을 소중하게 관찰하는 시인의 시선에서 반짝이게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천지사방의 숨구멍을 차단하는 모든 장애요소들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창조의 개벽이 도래하게 하여 길이란 길은 다 열어놓는 열림의 체험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바람과 숨결은 하나가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을 감싸고, 그것들의 소통과 화해를 방해하는 것들을 물리치거나 넘어서서 우주적인 숨결의 흐름을 열어놓는 바람과 호흡을 함께 하는 시가 그의 시인 것이다.
정현종의 시가 풍경과 주체의 황홀을 지향한다면 김명인은 풍경을 통해 주체의 상처를 더욱 확연하게 깨닫는 김훈에 가까이 있다. 그에게 풍경은 언제나 인생을 유추하게 하는 배경일 뿐 전경이 되지 못한다. 위에 든 시에서 바다의 아코디언은 갈매기울음으로 친다면 수수억톤을 넘을 파도소리와 함께 모래밭을 적셨다가 물러나는 파도의 모양, 곧 접혔다 펼쳐지곤 하는 파도의 모양을 은유한 것이다. 바다와 모래가 있는 한 파도는 계속 칠 것이므로 이 아코디언은 지치거나 병들지 않는다. 소리로 파이는 시간의 헛된 주름만 저의 生滅을 거듭할 뿐, 그것도 영원토록 그렇게 켜댈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은 속절없이 늙어간다. 무언가 쓰려고 하면 어느새 바닥 드러내는 삶은 뻘밭 위의 무수한 겹주름 같은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파도의 영원을 바라보는 유한한 시인의 고독은 얼마나 깊겠는가. 풍경을 통해 상처를 더욱 확인해야만 하는 시인은 결국 비극주의자인가.
그 상처가 다음의 송재학이나 기형도에게선 더욱 더 심화된다.
<격포> - 송재학
격포에 간다는 것은 사소한 나만의 일몰을 가진다는 것! 머리통만한 물거품과 폭설이 서쪽 바다를 죄다 세로로 앞장세웠다가 가로로 눕히곤 한다 나에 속한 죄를 끄집어내어 바다에 헹구어본다 아귀가 맞지 앉는 날의 오물이 자주 막히는 몸이 싫다 구석바닥에 쪼그려 울어보기도 한다 갈라터진 마음마저 염전으로 맡기고픈 격포에선 무엇이든 다 눈동자가 있어 그리 많은 눈이 내리는가 보다 무엇도 용서할 수 없었던 내가 아무에게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시선을 받아들였던 격포 아직 날은 어둡지 않은데 벌써 눈뜨는 불빛은 무어냐 거기 옹이처럼 박히자
<기억할만한 지나침> - 기형도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송재학은 격포에 간다. “무엇도 용서할 수 없었던 내가/ 아무에게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시선을” 간직한 채 갔던 언젠가의 격포는 그를 그냥 받아주었다. 그러기 때문에 사소한 나만의 일몰을 가지러 격포에 간다는 것은 실은 시인이 죄 닦으러 가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나에게 속한 죄를 끄집어내어 바닷물에 헹구어보기도 하고, 거기 어디 구석바닥에 쪼그려 울어보기도 하고, 갈라터져 그렇지 않아도 쓰라린 마음을 거기 염전에 맡기고 싶기도 한다. 거기에는 눈동자가 많고 눈뜨는 불빛들도 있는데 아마도 그 삶의 신산이 펼쳐지는 서해 바닷가의 흐린 물을 생계 삼아 사는 사람들이 모두 눈동자일 수 있고, 어둡지 않은데도 벌써 눈뜨는 불빛은 그런 격포를 좋아하는 시인의 마음이 하나둘 생생한 불빛이 되어 빛나는 것 아니겠는가. 송재학은 어떤 경이로운 풍경을 통해 삶의 구원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신산한 풍경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되찾는 타입이다.
기형도의 <기억할만한 지나침> 은 자연풍경이 아니라 사람의 공간이 있는 풍경이다. 눈 퍼붓고 캄캄한 밤,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관공서의 춥고 큰방에서 한 서기가 혼자 울고 있는 그 처절한 격절의 고독! 눈은 계속 퍼붓고 아무도 오지 않는데 숨 죽여 그를 바라보느라 괴롭지만, 난데없이 뛰어들어 그의 울음을 중지시킬 수도 없고, 또 그 울음 우는 이를 혼자 남겨두고 떠날 수도 없어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기억! 그 기억이 오늘 우연히 떠오른다. 그때와 같이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 지금 그를 떠올린다. 아니 그러고 보니 기억 속의 그는 사실 현재의 화자가 아닌가. 그가 지금 기억 속의 사내처럼 똑같은 조건 속에서 혼자 울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 기억 속의 그 사내를 결코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아니 기억 속의 사내는 현재의 화자이기도 하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모든 인간이 아니던가. 근원적인 고독을 어찌할 수 없어 홀로 우는 인간이 아니던가. 결국 기형도는 스스로가 너무 참람한 고독한 풍경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그런 풍경들은 곧 공간일진대 이런 공간이 시간의식과 만나게 되면 더욱 암울하고 쓸쓸한 풍경이 될 수도 있으니 다음 최하림과 나희덕의 시가 그 예가 된다.
<빈 집>- 최하림
초저녁, 눈발 뿌리는 소리가 들려 유리창으로 갔더니 비봉산 소나무들이 어둡게 손을 흔들고 강물소리도 숨을 죽인다 나도 숨을 죽이고 본다 검은 새들이 강심에서 올라와 북쪽으로 날아가고 한두 마리는 처져 두리번거리다가 빈집을 찾아 들어간다 마을에는 빈집들이 늘어서 있다 올해도 벌써 몇 번째 사람들이 집을 버리고 떠났다 집들이 지붕이 기울고 담장이 무너져내렸다 새들은 지붕으로 곳간으로 담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검은 새들은 빈집에서 꿈을 꾸었다 검은 새들은 어떤 시간을 보았다 새들은 시간 속으로 시간의 새가 되어 날개를 들고 들어갔다 새들은 은빛 가지 위에 앉고 가지 위로 날아 하늘을 무한 공간으로 만들며 해빙기 같은 변화의 소리로 울었다 아아 해빙기 같은 소리 들으며 나는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있다 검은 새들이 은빛 가지 위에서 날고 눈이 내리고 달도 별도 멀어져간다 밤이 숨쉬는 소리만이 눈발처럼 크게 울린다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 나희덕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최하림의 <빈집>은 새의 귀소과정을 통해 흐르는 풍경 속에 담긴 시간의 의미를 탐색하는 시이다. 폐가가 늘어선 시골 마을, 시간은 자연물조차도 활기가 잦아드는 저녁 무렵이다. 시인은 눈발 뿌리는 소리가 들려 유리창으로 가서 보니, 강물소리가 숨을 죽이고 불길함에 젖은 적막한 풍경 속으로 검은 새들이 강심에서 올라와 북쪽으로 가고 한두 마리는 뒤처져서 빈집으로 들어간다. 새는 왜 감심에서 올라오는가. 그들은 흐름과 변화 속에 지속되는 자연의 섭리를 구현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검은 새는 소멸과 죽음을 상징한다. 검은 새는 더 이상 삶의 공간이 아닌 빈집에 가장 어울리는 존재이다. 아마도 검은 새들은 폐허의 빈집을 완성하기 위해 죽음의 상징적 존재로 빈집으로 들어간 것이리라. 그런데 다음 순간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빈집의 완성은 빈집의 완전한 무너짐이 아니라 검은 새들이 꾸는 ‘빈집 속에서의 꿈’을 통해 이루어진다. 소멸이 소멸의 공간에서, 죽음이 죽음의 공간에서 꿈을 꾸고 있는 상황이다. 그 꿈을 통해 검은 새들은 그들이 지금껏 흘러온 시간과는 다른 시간을 본다. 소멸과 폐허 속에서 자라나는 시간, 소멸과 죽음의 폐허를 살며 그 사라짐의 힘으로 결국은 사라져갈 시간들을 거슬러 오르는 시간, 시간의 속성을 껴안음과 동시에 넘어서는 시간 속의 시간! 이는 결코 사라짐과 죽음을 초월한 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검은 새들이 꿈속에서 본 시간은 사라짐과 죽음의 능동성을 체득한 시간이다. 그래서 새들은 스스로 ‘시간 속으로 시간의 새가 되어 날개를 들고 들어갔던’ 것이다.
이제 그 때문에 모든 것은 바뀐다. 결국 빈집은 무너질 것이지만 집의 무너짐은 단지 하나의 시간이 끝나는 것이며 사라진 시간 뒤에는 다음의 시간이 있어 또다른 삶을 꽃피울 것이 때문에, 빈집이 은빛가지의 땅으로 바뀌고 새들은 해빙기 같은 변화의 소리로 운다. 그러므로 시간 속의 시간은 시간에 대한 의식의 전환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시간이다. 죽음의 시간을 아름다운 생성의 시간으로 바꾸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눈과 마음이다. 황폐화된 빈집에서 은빛가지와 새들의 눈부신 날개짓을 볼 수 있는 강인한 정신의 힘이다. 이 시간은 하이데거의 존재의 시간과 일맥상통한다. 결국 최하림은 소멸과 죽음의 풍경 속에서 시간 속의 시간을 발견함으로 신생의 풍경을 세우는 낭만주의자가 된다.
다음.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대상에서 은근하면서도 생명력 있는 삶의 지혜를 이끌어 내는 나희덕의 장기를 보라. 화자는 그간 왠지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인 복숭아나무를 보며 그것이 숨기고 있는 ‘수천의 빛깔’을 통해 외로운 존재들이 지니고 있는 ‘여러 겹의 마음’을 발견해낸다. 아니, 사실은 아마 정반대일지도 모른다. 화자의 외로움이 복숭아나무의 ‘흰 꽃과 분홍 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을 것이다. 지혜는 참으로 더디게 오고 시간은 참으로 빠르게 화자 곁을 스치고 지나간다. 꽃잎들 다 떨군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벌써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시간을 수긍하며 어떤 한 풍경을 통해 자기의 삶을 완성하려는 사람들이 다음 황동규와 정호승이다.
<방파제 끝> - 황동규
언젠가 마음 더 챙기지 말고 꺼내놓을 자리는 방파제 끝이 되리. 앞에 노는 섬도 없고 헤픈 구름장도 없는 곳. 오가는 배 두어 척 제 갈 데로 가고 물 자국만 잠시 눈 깜박이며 출렁이다 지워지는 곳. 동해안 어느 조그만 어항 소금기 질척한 골목을 지나 생선들 함께 모로 누워 잠든 어둑한 어물전들을 지나 바다로 나가다 걸음 멈춘 방파제 환한 그 끝
<하늘의 그물> - 정호승
하늘의 그물은 성글지만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다만 가을밤에 보름달 뜨면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기러기들만 하나 둘 떼지어 빠져나갑니다
황동규의 <방파제 끝>을 언뜻 보면 너무 무미건조한 시 같다. 실제로 그렇다. 모든 수사를 떨어버린 어떤 무심한 한 풍경을 제시할 뿐이다. 그리고는 “언젠가 마음 더 챙기지 말고 꺼내놓을 자리”가 그곳이라 한다. 그곳은 어디인가. 방파제 끝이다. 앞에 노는 섬도 없고, 그러니까 더 이상 섬으로 상징되는 고독이나 그리움도 없고, 헤푼 구름장도 없고, 그러니까 그토록 헤프게 꿈꾸었던 자유에 대한 갈망 같은 것도 없고, 다만 오가는 배가 아무 일없이 제 갈 데로 가고, 그냥 언제 배 지났느냐싶게 물 자국만 잠시 눈 깜박이며 출렁이다 지워지는 그곳! 나의 삶도 그처럼 그곳에서 지워졌으면 하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닿으려면 소금기 질척한 골목 곧 삶의 신산이나 애환도 지나고, 어물전 같은 비리고 비린 삶의 냄새도 다 지나야 한다. 그래야만 바다로 나가다 걸음 멈춘 방파제, ‘환한 그 끝’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무심한 환함! 결코 화려하지도 생생한 것도 없으나 무심하게 환한 그곳을 꿈꾸는 시인이야말로 모든 욕망과 일상을 초탈한 자유자재의 영혼을 가졌으리라.
정호승의 <하늘의 그물>은 소품 같지만 풍경과 인사가 잘 교직된 풍경의 철학, 풍경의 미학을 완성시킨 하나의 좋은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의 첫구절은 노자『도덕경』73장에 나오는 “天網恢恢 疎而不失”(하늘의 그물을 넓고 넓어, 성글어 보여도 빠져나기지 못한다)이라는 구절에서 왔다. 일반적으로 이 문장은 하늘이 태연히 침묵을 지키는 것 같지만 인간의 잘못은 모두 가려진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하늘의 그물은 눈에 보이지 않고 인간이 만들어낸 법의 그물은 눈에 보인다. 그래서 법의 그물만 피하여 자신의 욕망을 뒤쫓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의 죄는 언젠가는 하늘의 그물에 걸리게 된다. 그런데 그 하늘의 그물을 빠져나가는 존재들이 있다. 가을밤에 보름달 뜨면 날아가는 기러기떼다. 그 기러기들은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하나 둘 떼지어’ 빠져나간다. 말하자면 기러기라는 대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하나둘 떼지어 날아가는 그 것이 중요한 것이다. 여기에는 어린 새끼를 보살피는 어미 새의 연민 어린 사랑, 하나 둘 작게 떼지어 날아가는 소박하고 평화롭고 단란한 정경이 의미를 지닌다. 그렇게 작고 소박한 단란함을 비춰주는 데에는 환한 보름달이 제격이다. 어설픈 초승달이나 싸늘한 그믐달은 어울리지 않는다.
<구룡사시편․겨울노래> - 오세영
산자락 덮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그늘 지고 산들 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아침마다 우짖던 산까치도 간데 없고 저녁마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온 데 없다. 길 끝나 산에 들어섰기로 그들은 또 어디 갔단 말이냐,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 오늘은 하루종일 내리는 暴雪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인데 어제는 온종일 蘭대을 치고 오늘은 하루종일 물소리를 들었다.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墨竹>- 손택수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숫눈 위로 소쿠리장수 할머니가 담양 오일장을 가면
할머니가 걸어간 길만 녹아 읍내 장터까지 긴 墨竹을 친다
아침해가 나자 질척이는 먹물이 눈 속으로 스며들어 짙은 농담을 이루고
눈 속에 잠들어 있던 댓이파리 발자국들도 무리지어 얇은 종이 위로 돋아나고
어린 나는 창틀에 베껴 그린 그림 한 장 끼워놓고 싸륵싸륵 눈 녹는 소리를 듣는다
나무 허리가 우지끈 부러지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씩만, 눈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오세영의 <구룡사시편․겨울노래>는 그의 서정시학이 모범적으로 형상을 입은 예가 될뿐더러 동양적 세계관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또한 길 끝나 산에 들어섰어도 끊임없이 외로움에 시달리는 시적주체와 그러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어 천연하게 자연 속에 동화되고 싶어하는 시인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이런 이론, 저런 이론 갔다 붙이며 도사인 척하는 자들보다 아침저녁으로 외로움을 달래주던 산까치와 다람쥐의 행방을 궁금해하고, 진눈깨비와 폭설 등 얄궂은 날씨에 빈 하늘 빈 가지의 홍시 같이 마음이 떨려도, 난을 치고 물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그러하게 잔잔해지려는 것은 마치 어느 고승의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다’라는 법어처럼 산이 산일지라도 그것이 얽매이지 않겠다는 생각을 잘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풍경 속에서의 천연덕스런 일상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 시인 손택수의 <墨竹>은 무척 아름다운 작품이다.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흰 눈”과 같은 표현이나 “할머니가 걸어간 길만 녹아/ 읍내 장터까지 긴 墨竹을 친다”와 같은 묘사는 그가 마음속의 풍경을 언어로 그리는 데 얼마나 뛰어난 시인인가를 금방 확인하게 한다. 그리고 할머니가 읍내 장터까지 긴 묵죽을 쳐 놓은 뒤 잠시 후에는 “눈 속에 잠들어 있는 댓이파리/ 발자국들도 무리지어 얇은 종이 위로 돋아나고” 아침해가 나자 질척이는 먹물은 눈속으로 스며들면서 짙은 농담을 그린다. 그림은 눈이 녹으면서 묵죽에서, 한 폭의 수묵화로 조용히 풍경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어린 나는 싸륵싸륵 눈소리를 듣거나 “대나무허리가 우지끈 부러지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씩만, 눈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눈앞에서 여러 번 풍경이 바뀌는 긴 시간동안 소년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어쩌면 손택수에겐 “원초적 풍경‘이 되었을 그 영원히 정지된 시간 동안 그는 외로웠을 것인가. 아니면 그 풍경에 매혹되어, 눈 녹는 소리에 취해서 이미 세상의 저편을 보아버렸을까. 혹, 그 순간 그에게 시인으로서의 운명이 점지돼버린 것이 아닐까. 시인의 눈동자가 덧씌워졌을지도 모르는 그날의 길고 외로운 슬픔 속에서 도대체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이제 오규원을 보자. 서두에 얘기한 대로 오규원은 요사이 ‘날이미지’에 심취해 있다. 그는『가슴이 붉은 딱새』라는 산문집에서 “세계를 읽는 데는 사실을 사실로 읽을 수 있는 시각이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실들이 서로 어울려 세계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느낄 때, 우리는 어떤 현상에서 눈에 보이는 사실보다 더 무겁고 충격적인 심리적 총량으로서의 사실감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세계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라고 한 적이 있다. 앞에서 얘기했다시피 우리는 지금까지 모든 사물에 관념의 더께를 덧씌워왔다. 그러니 그 모든 사물은 인간의 관념의 종속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것을 거두어내고 사실을 사실로 읽을 수 있는, 사물과의 행복한 조응을 기도하는 ‘날이미지’를 표현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나아가 그런 사실들이 서로 어울려 실제로는 이미 세계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관념으로 살거나 종속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세계도 전체와 부분 또는 상하의 수직구조로 되어 있지는 않다. 세계는 개체와 집합 또는 상호 수평적 연관 관계의 구조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날이미지의 최후의, 아니 새로운 최초의 목표는 어떤 현상에서 보이는 사실보다도 이제 더 나아가 더 무겁고 심리적인 총량으로서의 사실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미지의 풍경은 시적 동일성의 순간, 보다 정확하게는 무심히 던져져 있는 타자들에게서 ‘나’의 어떤 것을 문득 마주치는 타자체험의 순간을 뜻할 것이다”(최현식) 여기서의 타자체험은 세계에 대한 처음의 앎을 말하고 세계가 건네는 말을 알아듣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날이미지의 시학으로 관념적 진술이 배제되고 이미지의 묘사로만 일관한 시를 보자.
<새와 집> - 오규원
딱새 한 마리가 잡목림의 산뽕나무 가지에 앉아 허공에서 무엇인가 찾고 있다 딱새의 그림자도 산뽕나무에서 내려오지 않고 가지에 그냥 붙어 있다 박새 한 마리도 산뽕나무 뒤편 붉나무 가지를 두 발로 잡고 있다 그러나 산뽕나무 저편 팥배나무에서 문득 날아오른 새 한 마리는 남쪽의 푸른 하늘에 몸을 숨기더니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새가 몸을 숨긴 그 하늘 아래는 집을 짓고 사람들이 산다
<生> - 이시영
찬 여물목을 은빛 피라미떼 새끼들이 분주히 거슬러 오르고 있다. 자세히 보니 등에 아픈 반점들이 찍혀 있다.
겨울처럼 짙푸른 오후.
딱새가 있고 박새가 있고, 이름 모를 새가 있다. 숲과 나무와 하늘은 이들의 나라이다. 그 세상은 얼마나 크고, 얼마나 오묘한지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이 그냥 ‘붙어 있다’ ‘잡고 있다’에서 보듯 ‘있다’라고 말해야 좋으리라. 그런 나라 아래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아간다. 그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하늘에서 보면 사람들과 그들의 집은 하나의 고요한 풍경처럼 그냥 있을 뿐이다. 오규원 시인은 이처럼 의미의 세계를 넘어가기 위해 언어로 풍경화를 그리는 데 몰두하고 있다.
다음의 이시영의 <생>은 싱그럽고 치열한 시이다. 여울목은 물살이 세다. 그것을 거슬러 오르기 위해서 은피라미떼들은 발딱발딱 배를 뒤집으며 은백의 유탄처럼 차오를 때도 있다. 특히 산란을 하려는 6-8월에 그러는데 그렇게 싱싱하게, 그렇게 치열하게 튀어오르려니 등에 아픈 반점이 찍힐 수밖에 없다. 그것도 겨울처럼 짙푸른 이 냉엄하고 차고, 혹은 맑고 투명한 세상에서 말이다. 어디 은피라미떼 뿐이겠는가. 사람의 삶이 이렇지 않는가.
이시영의 짧은 시들은 풍경을 순간적으로 직관해내고 거기에 주체의 철학을 예리하게 투사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겸손하다. “이 도도한 의미 과잉의 시대에 나는 내 시가 그것에 편승하지 않고 그냥 잔잔한 무늬이기를 바랐다. 내 마음의 결이 그대에게 닿아 낮은 잎새처럼 조금 살랑거리다가 마는. 참다운 노래는 그것을 가장 자연스럽게 받아적는 일.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느냐고 묻지 말라. 바람은 내 속에서도 오늘 소리없이 뜨겁게 불어온다.” 이는 풍경 속의 바람과 주체 속의 바람을 동일시하며, 내 마음이 결이 그대에게 닿는 낮은 잎새가 되어 조금 살랑거리다 마는 것을 꿈꾼다.
마지막으로 최하림과 김진경의 시를 보자.
<아침 詩> - 최하림
굴참나무는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해만 뜨면 솟아오르는 일을 한다 늘 새롭게 솟아오르므로 우리는 굴참나무가 새로운 줄 모른다 굴참나무는 아침 일찍 눈을 뜨고 일어나자마자 대문을 열고 안 보이는 나라로 간다 네거리 지나고 시장통과 철길을 건너 천관산 입구에 이르면 굴참나무의 마음은 벌써 달이 떠올라 해의 심장을 쫓는 예감에 싸인다
그때쯤이면 아이들도 산란한 꿈에서 깨어나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검은 숲 위로 오른다 볼이 붉은 막내까지도 큼큼큼 기침을 하며 이파리들이 쏟아지듯 빛을 토하는 잡목숲 옆구리를 빠져나가 공중으로 오른다 나무들이 일제히 손을 벌리고 아이들이 일제히 손을 벌리고 아이들은 용케도 피해간다 아이들의 길과 영토는 하늘에 있다 그곳에서는 새들과 무리지어 비행할 수가 있다 그들은 종다리처럼 혹은 꽁지 붉은 비둘기처럼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포르릉포르릉 날며 흘러 내리는 햇빛을 굴참나무처럼 느낄 수 있다
<첫눈> - 김진경
길바닥에까지 전을 벌여놓은 마포 돼지껍데기집 빨갛게 달아오른 연탄 화덕을 끼고 앉아 눈을 맞는다 어허 눈이 오네 머리칼 위에 희긋희끗 눈을 얹은 윤가가 큰 눈을 뜬다 대장간에 말굽 갈아끼러 왔다가 눈을 만난 짐말들처럼 술청 안의 사내들이 술렁댄다 푸르륵 푸르륵 김을 뿜어대기도 하고 갈기 위에 얹힌 눈을 털어내기도 하고 나는 화덕에 쇠를 달구는 대장장이처럼 묵묵히 화덕에 고기를 얹어 굽는다 길가의 플라타너스가 쇠의 녹슨 혓바닥처럼 남아 있던 나뭇잎을 떨어뜨린다 풀무질을 세게 해서 저것들을 달구어야겠다 말랑말랑해진 혓바닥을 두드려 쇠발굽을 만들어야겠다 저 갈기 푸른 말들에 새 발굽을 달아주어야겠다 오늘 밤 눈쌓인 재를 넘어 다음 장으로 가기도하고 딸랑딸랑 말방울을 울리며 사랑하는 이는 집 앞에 멈춰 서기도 하리라 붉게 단 쇠발굽을 물에 담금질할 때처럼 연탄 화덕에서 푸르게 연기가 솟는다
위 두 시는 다음에 강의할 <경계- 꿈과 현실> 편의 冒頭 시이다. 물론 최하림의 시는 아침 햇빛이 비추고, 굴참나무가 싱싱하게 솟자,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나와, 우리 일상인의 눈으론 안 보이는 나라에서 새와 나무와 함께 빛 속에서 어울려 노는 환상적인 풍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아이들의 길과 영토는 하늘에 있으므로 이들은 이 아침, 천사와 같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진경의 시는 첫눈 오는 날 마포돼지껍데기집 풍경을 그린 작품인데, 이 시도 그런 허술한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사내들이 첫눈이 오는 것과 함께 푸른 말과 싱싱한 대장장이로 변하는 환상이 펼쳐진다. 그 푸르고 싱싱하기가 마치 방금 바다에서 건져 올린 생선처럼만 같은 삶의 풍경의 시이다.
풍경과의 교감은 주체의 상처를 더욱 확인할 수도 있고 또 그것을 치유하여 신생으로 나아갈 수 있게도 한다. 시인은 어쨌거나 꿈과 현실의 경계선상에 놓인 존재임으로 그 경계를 확인함과 동시에 그 경계를 지우는 일도 병행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풍경과 주체간의 교감이 필요한데 그 교감이란 역시 경계를 지우며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일인 것이다. 그것이 서정시의 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