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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 신춘문예 응모 낙선작품
단편소설 : 원고 85매
제목 : 벙어리장갑
- 동 영 철(필명) (본명 : 동구리 김영철)
반세기도 지났고, 고희도 지난 1950년, 그때 그 6.25를 되짚어 본다.
어머니! 아, 그리운 어머니!
이제 눈물의 잔치는 끝났습니다. 저도 부러운 눈으로 지난 번 남북 이산가족 교환 방문 때 남의 사연을 시청하며 함께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서울과 평양에서 첫이산가족 상봉!)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북의 그들도 다 돌아갔고 여기 친구들도 벌써 돌아와 제자리를 찾은 듯합니다.
어머니! 전 얼마나 부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내 어머니를 만난 듯 얼마나 함께 울었는지 모릅니다.
다른 이들이 연사흘 동안 어머니를 비롯한 그리운 가족들의 손목을 잡고 울고불고 하는 동안 저도 어머니를 뵙기 위해 매일같이 어머니가 이 아들의 목에 걸어주신 벙어리장갑을 부여잡고 어머니를 대한 듯 울었답니다.
북에서 피란 나올 때 목에 걸어주신 70년 전 그 옛 날의 두툼한 쑥색 벙어리장갑 말입니다. 나는 그 때 어린아이 장갑처럼 줄까지 달린 벙어리장갑을 남세스러워 어머니 앞에서 마지못해 끼고 나와서는 내내 끼지 않고 가다가 너무도 혹독한 추위에 그만 손을 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보기는 멋없이 두툼한 솜 장갑이 얼마나 따신지 그제야 어머니의 정성어린 그 마음을 알았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지금도 잊지 못해합니다.
‘야!이게 뵈기 싫어도 손가락 장갑보다 얼마나 따신지 모른다. 동상 예방에는 소캐(솜)장갑이 제일이야.’ 하시며 손수 내 손을 잡고 끼워주시던 그 손길과 어머니의 그 부드러운 음성이 지금도 귓전에 맴돌고 있습니다.
어머니! 아, 그리운 어머니! 그 음성을 거두어들이지 말고 녹음기처럼 계속 들려주세요.
어머니, 저도 남들처럼 어머니를 뵈러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었답니다. 그러나 이 불효자는 그런 복도 없나봅니다.
아, 어머니! 벙어리장갑을 손수 만들어 그 추운 1.4후퇴 때 남으로 피란 떠나는 내 목에 걸어주신 어머니! 유별나게 춥고 눈도 많았던 1950년, 그 해겨울 혹독한 추위에 흥남부두에 까지 튕겨나온 바닷물이 얼어붙었던 그 해, 저는 어머니의 체온이 밴 이 벙어리장갑 때문에 동상에 걸리지도 않고 지금까지 이렇게 건강하답니다. 저에게는 어머니의 빛바랜 사진 한 장 없이, 오직 어머니의 분신인 이 벙어리장갑 뿐입니다.
장갑은 기어코 눈물로 얼룩지고 급기야는 촉촉이 다 젖어버렸답니다. 이 기구한 운명의 벙어리장갑은 제사 때는 물론 아무 때든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어머니를 대하 듯 끌어안고 울어대 노상 찝찔한 소금기 머금은 눈물로 얼룩져버렸답니다. 눅눅한 벙어리장갑을 껴본 저는 어머니의 몸이 축축해지기나 한 느낌이어서 빨고 빨고 또 세탁하여 반세기가 지나고 보니 이젠 거의 너덜너덜해져 정말 TV에서 본 다른 이산가족 어머니의 주름살 마냥 주글주글해졌답니다. 그래도 이 벙어리장갑만은 버릴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소중하고도 소중한 생명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참, 어머니 제사상의 음식이 다 식겠습니다. 어서 식기 전에 어서 잡수세요. 얼굴도 뵌 적이 없는 당신의 며느리가 정성껏 차린 음식입니다. 어머니께서 생전에 좋아하시던 인절미는 매번 빠짐없이 올렸답니다. 어머니께서 생전 생각도 못한 햄버거 피자도 올리고요. 생전 보지도 못한 키위 레몬이란 열대과일도 올렸습니다. 당신의 며느리의 정성을 받아주세요. 예 어머니, 맛있게 드세요.
나는 지난 8월 이산가족 상봉단들이 가고 오고 다 잔치가 끝났어도 아직 나의 눈물의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 나이 칠십을 넘어 어머니와 두 누이동생 상봉을 신청한 내가 일 순위임에는 틀림없는데 왜 내가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죄 많은 이 불효자는 너무너무 죄가 많아 하느님이 외면했거나 정작 북에는 내가 찾는 가족이 없거나 아니면 죽었거나 했으니 내가 빠졌겠지. 어찌 내가 탈락이란 말인가? 생사 확인도 없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열아홉 살이던 해 6.25가 터졌다. 그 때 나는 고급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 노동자로 누이 둘과 어머니의 호구를 짊어진 가장이었다. 때가 되어 거기도 국방의 의무가 있어 누구나 다 가는 나이에 난들 그것을 벗어날 여지가 없었다. 다른 장정들과 섞여 그리운 어머니의 품을 떠난 나는 어머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노상 어린애였다. 인민군에 징집돼 떠날 때도 어머니께선 밤새도록 자지 않고 이건 이렇게 하고, 요건 요렇게 해야 한다. 냉수도 체하지 않게 천천히 마셔라. 이 건 비상금이니 속주머니에 잘 간수하고, 잘 때는 배를 잘 덮어라. 심지어는 발싸개(양말)까지 자주 빨아서 갈아 싸라고 까지 일러주셨다.
이렇게 어르고 타이르며 맘을 놓지 못 해하는 어머니의 어린애였던 것이다. 그렇게 걱정과 근심을 떠안고 동구 밖에서 손을 흔드는 어머니를 뒤로한 채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총 한방 쏴 보지도 못한 우리 인민군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며 북으로 퇴각했다. 그렇게 쫓기고 쫓기는 동안 우리 패잔병들은 각기 자기 부대 소속도 잃어버린 채 너 나 할 것 없이 마구 흩어져 갔던 것이다. 누가 먼저 머리를 짜냈던지, 어디서 구해 입었는지 하나 둘 민간복으로 갈아입은 우리들은 서로의 소속도 모른 채 뒤섞여 우왕좌왕 하다가 결국 국방군에 잡히고 말았다.
우린 아주 죽은 목숨이라고 체념하고 마지막 기도하는 심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 우린 국방군의 처사에 매우 놀랐던 것이다. 전향하면 고향에 보내 준다. 전향할 사람은 이 쪽 줄로 옮겨 앉으라는 말에 귀를 의심한 패잔병들은 너도나도 전향한다는 줄로 옮겨 앉았고 그래도 지조 있는 패잔병들은지금은 붙잡힌 몸이지만 언젠가 다시 원수를 갚는다고 용기 있게 전향을 거부하는 전사들도 있었다. 물론 그들은 끝까지 인민군 복장을 한 그대로였다. 그들을 어딘가의 포로수용소로 넘긴다고 해 트럭을 타고 떠나는 것을 보고 우리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화차에 실려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북에선 전쟁 중인데도 이상하게 기차가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다행히 인민군 패잔병들은 기차 화물칸에 실려 고향으로 향할 수 있었다.
우선은 그리운 가족을 만났다는 기쁨과 전쟁의 도가니 속에서 살아왔다는 데에 안도했고 그 후 뒤바뀐 이승만 정권하의 자유 세상을 맛보았던 나와 북한의 주민들은 ‘아, 이것이 진짜 사람 사는 세상이로구나.’ 하고 느꼈던 것이다.
나는 그 때 패잔병으로 고향에 돌아와 새 세상을 만난 기쁨을 안고 친구들을 따라 빨갱이 사냥에 나섰던 것이다.치안대 대원으로 들떠 동분서주하던 한 달 동안은 정말로 흥분해 꿈같은 세상이 어떻게 벌써 날이 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가고 그 후 피란길에 올랐던 것이다.
어마이, 조금만 기대리오. 한 달이면 국방군이 다시 수복 한답네.
어머니와 여동생들을 붙들고 달래고는 이렇게 생이별이 될 줄이야.
그리고 반세기! 그리고 고희도 넘어, 검은머리 파뿌리가 되고 홍안소년이 주글주글한 주름투성이 영감이되도록...
아버님, 이 더위에 어디 다녀오세요?
으응, 공연히 마음이 울적해 느티나무 정자에서 바둑 한판 들고 오는 길이야. 며느리와의 대화다.
아버님, 군민회에서 전화 왔어요. 요번 이산가족으로 북에 갔다 온 분들과 모임이 있다는군요.
북의 가족 상봉하고 온 사람들 말이냐?
네, 그렇대요. 그 분들을 축하하고 고향 얘기 듣는다는 군요.
뭐이! 축하? 어이구 배 아파.... 김정일이 소화제라도 보냈다던? 고작 100명이 만나 쇼나 하고 왔는데 남 배아픈 것도 모르고 무슨 잔치?... 난, 안가! 저네들끼리 잔치 잘 하라해!
아버님, 그러지 마시고 머리도 식힐 겸 다녀오세요.
며느리는 하도 안쓰러워 시아버지 몰래 혀를 끌끌 찼다. 며느리 맞은 지도 벌써 십 년도 더 지났다. 그 속에서 나온 손자 남매가 초, 중학생이니.... 며느리 맞을 때도 어머니께 자세한 보고를 올렸다.
어머니! 어머니, 기뻐해 주세요. 이 불효자가 낳은 당신의 손자가 커서 벌써 장가를 간답니다. 어머니께서 본 적이 없는 손자의 손부를 보게 되면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손자 내외가 올리는 폐백 절을 받으실 할머니를 생각하면 벌써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손부 될 아이는 용인 사는 여흥 민 씨 댁의 태미라고 합니다. 나이는 스물 셋이고 서울에서 미술 대학을 갓 나왔답니다. 오늘 결혼식의 주례는 우리 고향 선배 (황경복) 선생께서 맡으셨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잘 아시지요? 우리 동네에서 제일 큰 집, 옛 (황 진사) 댁 아드님 말입니다. 그는 피란 나와 성공한 기업인으로 벌써 북한에 투자도한 일꾼이랍니다.
어머니!
예정했던 결혼식이 끝났습니다. 어머니 몫으로 폐백 상을 따로 차렸습니다. 어서 잔을 받으세요. 손자가 잔을 올리고 새 색시 손부가 약주를 따릅니다.
얘야, 조금만 따라라. 할머니께선 본래 입에 잔을 대지도 않으시지만 오늘은 너무 기뻐 드실는지 모르니 조금만... 고만큼만 그래, 됐다. 자, 어서 올려라.
자, 어머니! 어서 드셔요. 그리고 안주로 닭고기... 그리고 여기 대추...
얘, 아가! 어서 치마를 들고 앉으렴.
나는 며느리 치마폭에 어머니 대신 대추를 한 움큼 집어 던졌다.
이건 시 조모님께서 주시는 복이니라.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 낳고... 그리고 이건 내가 주는 대추니라. 이건 백설 공주 같은 딸 낳으려무나.
어머니, 우리 집 잔치가 끝났습니다. 어떻습니까? 기쁘시죠?
이렇게 하여 며느리를 보고 난 후부터는 날마다 어머니 진지상도 함께 차리게 했다. 특별히 따로 상을 차리진 않았으나 어머니 진지와 수저를 내 상에 겸상해 함께 올리도록 했다.
아침에 밥상을 물린 나는 저도 모르는 새 이북 5도청 군민회 연회장으로 향했다. 모두들 고향에 간 기분으로 달려들 왔는지 실내에는 벌써 고향 얘기로 화기에 차있었다.
어, 어서옵세, 장 선배! 아이 온다더니 어쩐 걸음이오?
뭐이? 내가 아이 오구 이 모임이 잘 되겠슈?
아니, 장 형! 그런데... 이 더운 여름에 웬 벙어리장갑을 걸고?
일동의 눈이 내 목에 걸린 벙어리장갑에 쏠렸다.
고향에도 못간 불효자가 어머니께서 피란 나올 때 목에 걸어주신 이 벙어리장갑을 어머니대신...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겨우 이렇게 토로했다.
암, 알만하오. 이건창군민회장의 대꾸에 모두들 숙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돌아가며 악수를 교환하고 이번에 고향에 다녀온 이송지와는 TV에서 본대로 얼싸안고 포옹을 했다.
그래, 아우는 잘 댕겨왔소?
형님, 고맙습네. 염려 덕에 무사히 댕겨 왔습네다만, 아이 감만 못 합네. 여기 형님네들 보기도 민망하구.”
뭐이, 그런 소리 말게나. 거기를 아무나 가는 게 아이래두. 그 짝에서 오라는 사람만 가는 게야, 아무나 가문 못 갈 사람이 어디 있겠소? 아이 그렇소?
군민회장 말이 맞소. 여기 이 아우가 나이로 보나 우리보다 우선순위도 아인데, 상봉 가족도 누님이구... 부모가 우선이 아이오? 그리구 탈락한 장 선배는 아마도 치안대원이었던 경력이 문제였을는지도 모르겠소.
글쎄, 그것도 일리가 있군... 그 짝 생사 여부가 딸려 있으니...
이북 5도청 군민회에 모였던 그 날은 이러쿵저러쿵 말도 많았다. 이산 일 세대는 거의 세상 떴고, 산 사람도 늙고 병들어서 이제야 만났다는 것이 결코 반가움이나 자랑거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도 북에서 온 이들은 선택받은 인사들로 구성된 일종의 특권층의 금의환향이었고 남에서 올라가 평양에 가 만난 이산가족들은 제비뽑기로 잡은 행운아들이었다는 대조적인 만남이었다. 게다가 남북이 각각 100명씩 1대 1의 맞교환 상봉 식이라면 이산 1세대만 7만 여명이라는데 어느 결에나? 북이 100명이면 남은 1000명씩이라면 몰라도...?
북에서는 이 만남이 양 정상의 약속으로 이루어지긴 했으나, 공화국 정부가 싫다고 떠난 반동들이 이제 무슨 낯짝으로 그 가족을 만나겠다고 왔는지 비아냥거리며 그 비싼 고려호텔에 무료로 묵히면서 반동의 가족들까지 데려다 고급 음식으로 대접한다고 못 마땅해 했으리라.
그런 반면에 서울로 부모 형제자매를 만나러 온 북의 인사들은 또 뭐냐? 북에서 상당히 성공한 면면들이 수령님 뱃지와 훈장들을 버젓이 달고 당당히 내려와 만난 것을 뭐라고 표현해야할지?서로 욕을 하려들면 한이 없다. 다는 아니겠지만 이들도 따지고 보면 남쪽이 싫다고 북으로 자진해 올라간 좌익이 아닌가? 그 뿐이 아니다. 공화국 정부가 싫다고 남으로 피난 내려온 반동이나 대한민국이 싫다고 의용군에 지원했거나 자진해서 북으로 올라간 빨갱이들이 그 가족을 만나러 온 것이나 무엇이 다른가?
한 편 그 가족들은 가족들대로 연좌제에 묶여 알게 모르게 정신적인 고통과 불이익을 당한 것을 생각하면 정말 민족적인 비극이라 아니라 할 수 없다. 북에서는 6ㆍ25 이후 주민들을 3개 계층으로 분류했다던가? 1급에는 소위 혁명가 가족이라 하여 과거 독립운동 유가족이나 남파 간첩 가족, 인민군으로 참전하여 전사한 유공자 가족과 중앙당 간부급 가족이고, 최하위층인 3급은 친일파나 치안대 가족, 간첩으로 나갔다가 배반해 전향한 가족, 남으로 피난 떠난 월남 가족과 남으로 도주한 탈북자 가족도 여기에 들며 이들을 적대계층으로 분류하여 감시하거나 일정한 곳에 집단으로 수용하여 불이익을 받고 죽지 못 해 겨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남한은 남한대로 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위 연좌제라 하여 북으로 올라간 월북자 가족이나 빨치산 가족 및 간첩으로 내려온 자의 가족들은 과거 중앙정보부나 안기부로부터 늘 감시당하고 불려 다니며 그 후의 동태를 추궁 당하기도 하고 취직이나 공직 취임에 불이익을 당하고 이사를 가도 블랙리스트가 늘 따라 붙어 감시를 당해야만 했지 않았던가?
지금은 연좌제 자체가 폐지되고 이번 남북 이산가족의 상호 교환 방문에서 보았듯이 아무런 장애도 없이, 좌익운동을 했던 북의 인사도 당당히 그 가족을 만나고 갔고 우린 같은 동포로서 연민의 정으로 똑 같이 눈물을 흘리며 환대해 보냈던 것이다.
나는 그 때 군민회 모임에서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의 생사가 가장 궁금했다. 군민회 모임이 끝나고 헤어질 때 고향 후배 친구 송지와 나는 별도로 조용히 만나 고향소식을 들었다.
형님, 형님에게는 별도로 선물이라면 어폐가 있지만 특별히 소식을 전할 게 있어 이렇게 불렀습네. 송지는 한참 뜸을 들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일이 한 10년 전에만 이루어 졌어도...
송지는 진정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또 이렇게 뜸을 들이고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형님 섭섭해 마오. 내 이번에 우리 누이더러 형님네 어마이 안부를 물었지비?
내 얼굴이 실룩거리더니 긴장되는 느낌이다. 나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벙어리장갑을 만지작거리며 그의 입 가까이로 바싹 다가섰다.
그래, 우리 어마이 소식을 들었다고?
예, 그러오다. 집의 어마이는 벌써 10년 전에 작고 하셨답네.
이미 각오가 되었던 터라 나는 더 이상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눈물을 감출 수 없어 또 어머니의 벙어리장갑으로 눈두덩을 닦곤 다시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가 다시 조용히 말을 이었다.
막연한 얘기지만 제사라도 지내게 돌아가신 날을 물었더니 우리 누이 말이 돌아가신 날은 몰라도 그 집 어마이 생신 날 돌아가셨다고 했으니... 형님, 어마이 생신날이 언젠지 아시오?"
아, 그래? 그렇다면 생일이자 제삿날이라? 암, 아다마다. 생일이자 제삿날!
생신 날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답네.
으응, 그랬었구만. 어마이가 돌아가 섭섭하긴 해도 제삿날을 바로 알아 다행이오. 아우님 고맙소.
나는 오늘 군민회에 나가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특별히 얻은 것은 없어도 여태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으로 생각하고 제사를 지내왔지만. 이제 제삿날을 바로 알았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는 해마다 어머니 생신만은 꼭 차려 올렸지만 아마도 연만하신 어머니께서 살아 계시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아 10년 전부터 집 떠나오던 날인 12월 19일을 제삿날로 잡아 제사까지 지내왔었다. 송지의 말에 의하면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도 10년 전이라니 내가 정한 운명시기와 거의 맞아떨어졌고 제삿날만 틀렸지 제사는 제대로 지내온 셈이다. 어머니 생일은 이 불효자가 기억하기 좋게 팔월 추석 지나 중양절인 음력 9월 9일이었으니 아침엔 생신상을 차리고, 저녁엔 제사상을 차리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기다리던 추석이 돌아왔다. 추석을 기다린 이유는 이산가족 상봉단으로 평양에도 못간 이 불효자가 참회하며 제사 때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다.
나는 매번 제사 때 어머니를 만난다. 어머니께선 제사 때만 되면 하얀 소복으로 나타나곤 했다. 얼마나 자식 사랑이 간절했으면 제사 때마다 어머니께서 아들 앞에 나타났을까?
드디어 제사상을 차리고 온 식구들이 제사상 앞에 모여 섰다. 어머니의 사진도 없는 이 불효자는 어머니 사진 대신 어머니의 체온이 스민 벙어리장갑을 병풍 앞에 걸고 제사를 지낸다.
지난 초여름 나는 칠순을 맞이하여 환갑잔치도 안 했는데 칠순 잔치만은 해야 한다는 걸 굳이마다 했더니 기어코 생전 처음 아들 며느리가 보내주는 외국 여행을 다녀왔다.
그 때도 우리 내외는 어머니를 살아생전과 같이 모시고 가기 위해 남들이 웃건 말건 여름철에 그 헐어빠진 벙어리장갑을 자랑스레 목에 걸고 다녀왔다. 태국, 말레이시아, 홍콩을 둘러오는 4박 5일 코스를 돌면서
어머니, 여긴 태국의 파타야 해변이랍니다. 바다가 아름답지요? 다음엔 말레시아로 갑니다. 이렇게 중얼거리자 곁의 일행이 눈이 둥그래 쳐다보기도 했다.
제사상에는 어머니께서 생전에 즐겨하시던 인절미는 물론 요즈음 새로 난 별미 피자나 햄버거도 올리고 외국서 들어온 이름도 생소한 키위, 레몬 같은 열대 과일도 올렸다.
원래 제사상에는 홍동백서(紅東白西), 어동육서(魚東肉西)라 하여 붉은 과일은 동쪽 흰 것은 서쪽, 생선은 동쪽 고기는 서쪽에 진설(陳設)하고, 두동미서(頭東尾西), 생동숙서(生東熟西)라 하여 생선머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 날 것은 동쪽 익힌 것은 서쪽에 차린다는 원칙에 따라 진설하고 제수(祭需)도 전통음식으로 차리는 것이 법도이나 이런 귀한 음식을 구경도 못한 어머니를 위해 일부러 올렸다. 나를 위시하여 아들 며느리, 그리고 손자들까지 차례로 정성껏 절을 두 번씩 올렸다. 향을 다시 피워 꽂은 나는 제사상 앞에 꿇어앉았다.
어머니, 이 불효자의 잔을 받으시고 이 불효를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 손자의 잔도 받으시고, 또 어린 증손자의 잔도 받으시고 기뻐해 주세요. 어머니 올해는 다른 이산가족들은 꿈에 그리던 고향 땅 평양으로 제 부모를 뵈러 갔다 왔답니다. 그러나 이 불효자는 하도 죄가 많아 하느님께서 그런 행운을 허락하지 아니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동향 친구를통해 어머니께서 생신 날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삿날을 알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올해부터는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 정식으로 어머니 제사를 올리겠습니다. 어머니, 살아생전 효도 한 번 못한 이 불효자를 용서하시고 제수를 흠향(歆饗) 하옵소서.
그러나 아들의 제사에 희미하게 나타난 어머니께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울한 모습으로 앉아있기만 했지 제수엔 손도 대지 않고 우두커니 마냥 앉아있기만 했다.
오늘뿐이 아니라 십 여 년의 제사 때마다 어머니의 모습은 늘 오늘과 다를 바 없었다. 시간이 되어 어머니께선 돌아가시고 제사상을 물렸다.
추석 제사는 이렇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운한 제사로 끝나고 나는 우울한 기분으로 담배만 빨아댔다. 다른 때와 달리 고향소식도 전하고 정성을 다해 새로운 음식과 이국의 귀한 과일도 올렸건만 어머니께선 입에 대지도 않고 하늘로 올라가고 말았다. 나는 어느 때보다 더 마음이 아팠다. 다른 가족이 고향에 다녀오고 그들만이 부모를 상봉한 올해는 더 더욱 마음이 아팠다.
아, 불쌍한 우리 어머니! 매번 오셨지만 한 번도 제수를 잡수시지 않으니 어인 일일까? 귀한 음식으로 정성을 다해 올렸는데도...
아, 불쌍한 우리 어머니! 생전 맛난 것을 먹어보지도 못하고 자식 입에 먼저 넣기 바빴던 어머니. 이웃집에서 고사떡이 들어와도 자식 입에 먼저 넣었지 당신은 언제나 떨어진 고물이나 먹다만 음식 찌꺼기만 차지. 언제든지 이 아들이 먹기 전에는 한사코 당신이 먼저 들어본 적이 없었던 어머니. 이렇게 자식 사랑이 신앙이 되듯 지극하셨던 우리 어머니! 아, 불쌍한 우리 어머니!
자식 사랑이 신주가 돼버린 어머니. 이 자식이 장성해 아들을 낳고 손자를 보도록 지켜보지도 못한 어머니. 당신의 자식이 이토록 늙은이가 되었어도 아직까지 어린애같이 못 미더워 하시던 그 사랑.
아, 어이 할꼬? 불쌍한 우리 어머니!
추석이 지나 드디어 정식 어머니의 제삿날인 중양절이 다가왔다. 우리 식구들은 큰 명절이나 맞이한 것처럼 아침부터 들뜬 가운데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할머니 제사를 정식으로 드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햅쌀로 만든 인절미는 물론 한우 고기와 햇과일 그리고 이번에도 어머니께서 생전 자셔보지도 못했던 양식과 이국 과일까지도...
우리 식구들은 정말 정성껏 제수를 차리고 목욕재계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제사상 앞에 나란히 섰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병풍에 걸린 벙어리장갑을 향해 절을 올렸다. 몇 해를 거듭한 제사라 이젠 어린 손자들도 이 할애비의 유서 깊은 벙어리장갑의 내력을 알고 그들도 정말 할머니를 대한 듯 정성을 다해 예를 올렸다.
어머니,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올해는 더욱 정성을 다해 제수를 올립니다. 어머니께서 생전에 좋아하시던 인절미는 맨 앞에 올렸습니다. 귀한 음식이 생기면 언제나 당신의 아들인 내 입에 먼저 넣기 바쁘셨던 어머니, 내가 먼저 한 입이라도 먹기 전에는 절대로 입에 대지도 않던 어머니. 그러나 오늘은 만사를 제쳐놓고 맛있게 잡수세요. 어머니 오늘은 정말 저희들의 정성을 보시고 조금이라도 흠향 하옵소서, 하고 고유(告由)했다.
그런데 여느 때와 같이 희미하니 소복으로 나타난 어머니께선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식구들을 빙 둘러보기만 했지 제수에는 젓가락 하나 대지 않고 마냥 앉아 있기만 했다. 나는 그만 눈물이 앞을 가리며 그 옛날로 돌아가 어릴 적 고향 이북 방언을 내뱉으며 어머니께 떼를 쓰듯 마구 울부짖었다.
어이구우 어마이! 우리 어마이, 어떻게 된 겝네? 왜, 맛이 없어 아이 자시는 게오? 어디가 편찮으십네까? 아니면 이 못난 불효자가 무시기 잘 못한 게라도 있는지 말씀 좀 해 보우. 어이구우, 불쌍한 우리 어마이. 이잉...엉 엉...
이렇게 소리내 엎드려 울고 있던 나는 불현듯 생각이 떠올라 벌떡 일어났다!
'옳지?!'
뭔가에 얻어맞은 듯 생각이 난 나는 퍼뜩 정신이 들어 일어나 제사상에 올린 음식을, 어머니도 손대지 않은 제수 중 인절미를 필두로 한입씩 베어먹기 시작했다. 고기 한 입, 멜론한 입, 배 한 입... 이렇게 정신없이 이것저것 한 입씩 베어먹고 다시 제사상에 도로 올리는 나의 모습은 분명 정신 나간 미친 사람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를 지켜 본 손부를 비롯 식구들은 할아버지가 갑자기 치매에 걸렸다고 단정을 했는지 멍하니 나의 하는 행동을 지켜보며 머리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이윽고 먹기를 끝낸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제사상 앞에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아 이렇게 읊조렸다.
어머니, 어서 잡수어 보세요. 어떻습니까, 맛이?
이 소리를 들은 어머니께선 더 선명하고 환한 얼굴로 빙그레 웃으시더니 수저도 마다하고 내가 한 입 베어 먹었던 인절미부터 집으시더니 흡족한 표정으로 먹기 시작했다.
아, 어머니!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너무너무 기뻐 머리를 조아리곤 또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며 몸 둘 바를 몰라 눈물을 주룩 흘렸다.
아, 어떻게 된 노릇인가? 여태 제사 때마다 오신 어머니 모습은 비몽사몽간에 희미하니 나타나셨는데. 오늘의 어머니 모습은 머리가 허연 할머니 모습이긴 하지만 매직아이 보다 더 또렷하고 선명한 진짜 어머니 모습이었으니, 참말로 감탄할 일이다.
어머니께선 빙그레 입맛을 다시며 서양 빈대떡 피자도, 이국 과일 키위도 맛을 보시더니 이렇게 입을 열었다.
얘야, 이제야 제 맛 나는 구나. 이건 이름이 뭔지 꼭 모양도 다래 같고 맛도 다래 맛이구나.
네, 어머니. 그건 키위라고 하는 일종의 서양 다래입니다. 크기만 다르지 꼭 다래 맛이랍니다.
안식구는 나와 어머니와의 대화가 너무도 자연스러워 ‘이건 분명 가식이 아니다.’ 는 생각이 들어 정신을 가다듬어 벙어리장갑을 뚫어져라 다시 바라보고 있다.
앗! 어머님!
그 때, 분명 내자(內子)의 눈에 비친 병풍에 걸린 한쪽 벙어리장갑은 장갑이 아니라, 틀림없는 시어머니의 모습이 아닌가? 생전 뵌 적도 없지만, 그 인자한 모습에 미소로 반기시는 시어머니의 모습을 본 내자는 그만 감읍(感泣)하여 얼른 일어나 시어머니께 정식으로 큰절을 올렸다.
“어머님, 반갑습니다. 이 불초한 며느리가 반세기가 지나서 이제야 인사 올립니다. 내자(內子)는 이렇게 공손히 인사말까지 했다.
인사를 마친 어머니의 며느리는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아 지금까지 건성으로 제사만 드렸던 과거를 참회하며 용서를 빌었다.
어머님, 지난날의 불효를 용서해주세요.
이를 지켜보고 섰던 아들, 손부도 증손들의 눈에도 분명 살아 계신 할머니의 모습을 대하곤 얼른 큰절을 올렸다.
시 조모님, 반갑습니다. 불초한 손부가 이제야 인사 올립니다. 손주 며느리도 큰절을 올렸다.
엄마! 이 할머니, 누구야? 할머니의 증손이 물었다.
분명, 증손자의 눈에도 벙러리 장갑이 아니라, 할머니의 모습이 산사람같이 보였던 것이다.
응, 이 분은 으음... 할아버지의 엄마, 음... 너 한 테는 증조할머님이시다. 어서 공손히 인사올려라.
이렇게 어린 아들의 인사까지 시킨 손부는 무슨 생각을 했던지, 부리나케 자기방 화실로 가더니 화판과 목탄을 갖고나와 털석 앉더니, 벙어리장갑을 쳐다보며 정신없이 목탄을 휘둘러댔다.
온 식구들은 ‘이 며느리가 혹시...정신이...? ’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섰다. 새며느리의 이마에선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손은 사시나무 떨 듯 정신없이 흔들어댔다.
'앗! 저런!'
나는 그만 내 눈을 의심했다. 생전 뵌 적도 없는 손주며느리의 화판엔 차차 내 어머니의 늙으신 모습 윤곽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내가 집 떠나오던 그 날의 어머니 모습에서 조금 머리가 센 반백의 할머니 모습으로...
아, 이럴 수가! 이것은 정말 신앙이 아니고선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가 없다. 아 정말 기이하다.
온 식구들이 마지막으로 벙어리장갑에서 눈을 뗐을 때 화판엔 정말로 생생한 할머니의 모습으로 빙그레 웃고 계셨다.
아, 이럴 수가! 어쩌면 살아생전 고향의 내 어머니의 모습을 뵌 적도 없는 손부가 벙어리장갑만 보고 시조모의 모습을 꼭 고대로 담아냈을까? 정말 신앙이 아니고선...
아, 기이하다! 얼마나 그리움이 사무치면, 이런 현상이...?
아, 애통하도다! 이산의 고통! 이 어찌 민족적인 비극이 아닌가?
이토록 눈물로 범벅이 된 쓰라린 민족사를 품은 민족이 세계 도처, 어느 나라에 또 있을까?
이렇게 실향민과 이산가족은 오늘도 북녘하늘을 애절하게 바라보며 마냥 눈물 짓고 있다. 아 ~ 더 이상 말이 막히는구나... 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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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 11포인트 10매 ----- 원고지 85장 /2006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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