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 일죽 나들목을 나서 안성시청 방향으로 달린다. 38번 도로는 잘 뚫린 도로이다. 한참을 달리다 보면 삼죽, 죽산, 일죽을 지나 안성 중심부에 들어서기 전에 공설운동장으로 들어서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공설 운동장 앞으로 지나 계속 가면 곧 금광면 소재지에 닿는다. 이 마을에서 좌측으로 향하면 곧 금광저수지가 나타난다. 이 금광저수지는 V자 모양으로 이루어진 저수지로 좌측이 오홍리이다. 오홍리를 따라 들어가면 저수지 상류에 해당하는 곳 가까운 곳에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三韓國大夫人 順興安氏)의 묘역이 있다.
묘역의 주인은 안효공(安孝公) 심온의 배위(配位)로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은 순흥안씨(順興安氏)로서 소의공(昭懿公:安天保이며 領敦寧府事)의 딸이다. 조부(祖父)인 순성군(順城君) 양정공(良定公:安千善)은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으며 증조부(曾祖父)인 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 문의공(文懿公:安文凱)은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한 분으로서 고려말엽의 명문대가였다.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三韓國大夫人 順興安氏)는 안효공(安孝公)과 결혼하시어 삼남육녀를 낳아 기르셨는데 맏따님(후의 소헌왕후)이 1408년(太宗8年 戊子) 2월16일 충녕대군(忠寧大君:후의 세종대왕)에게 출가하시자 순흥군부인(順興郡夫人)의 직첩을 받으셨다.
1418년(태종18년 戊戌)8월8일 세종이 왕위를 물려받아 즉위(卽位)하자 안효공께서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의 봉호를 받고, 순흥군부인은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의 직첩(職牒)을 받았다.
그런데 그해 안효공께서 무술옥사(戊戌獄事)에 연루되시어 억울하게도 화를 입게 되자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께서는 직첩을 삭탈당하시고 천안(賤案)에 등록되시어 천민(賤民)으로서 나이어린 자녀들과 함께 허다한 수모를 겪으시게 되었다.
처음에는 천안(天安)고을의 관비(官婢)로 되셨다가 의정부(議政府)다모(茶母)로 옮겨졌는데 사실상 실무에는 종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8년후인 1426년(世宗8年 丙午)에 우의정(右議政)이직(李稷)을 비롯하여 여러분들이 왕비의 어머니가 천안(賤案)에 올라있는 것은 나라 체면이 아니니 직첩(職牒)을 돌려드려야 옳다.」고 상계(上啓:왕에게 건의하는 일)하였다.
이때 세종대왕께서는 「돌아가신 상왕께서도 생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하시며 도승지(都承旨)곽존중(郭存中)에게 영(令)을 내려 그해 5월17일에 면천(免賤)되는 동시에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의 직첩을 돌려 받으시어 명예를 회복 하셨다.
또한 세종대왕의 배려로 소헌왕후(昭憲王后)께서는 친정에 가셔서 8년만에 모녀간의 눈물겨운 상봉을 하게 되었으며 이후에는 삼한국대부인께서 궁중에 자유로이 출입하며 소헌왕후와 자주 만나 혈육의 정을 나눌수 있었다.
1444년(世宗26年 甲子) 삼한국대부인께서 병환이 위독하시자 소헌왕후께서는 문병(問病)하시고 전의(典醫:궁중의 의사)를 파견하여 치료케하고, 한편으로는 승려(僧侶)로 하여금 불공을 드리도록 하는등 지극한 효성(孝誠)을 다하였다고 전한다. 그러함에도 삼한국대부인께서는 그해 11월24일에 별세하셨는데 이때에도 소헌왕후께서는 왕세자(王世子)들과 함께 거동하시어 치제(治祭) 하셨으며, 조정에서는 예조판서(禮曹判書)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예장도감(禮葬都監)으로 임명하여 다음해 2월28일에 水原市 二儀洞 산의실의 안효공 묘역에 예장으로 장례를 모셨다. 삼한국대부인께서는 44세에 세상을 뜨신 안효공보다 26년을 더 오래 사셨으니 70세이상 장수 하신 것으로 판단할수 있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1467년(世祖13年 丁亥)5월3일에 세조의 왕명에 의해 삼한국대부인의 묘소는 산의실에서 안성군 금광면 오흥리(安城郡 金光面 五興里)능말에 천장(遷葬)모시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성의 삼한국대부인 묘소는 향토문화재(鄕土文化財)로 지정되어 관청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안효공종회(安孝公 宗會)주관아래 1988년에 현대식 건물로 재실(齋室)경모재(敬慕齋)를 건립하였고, 1992년에는 둘레석을 설치하고 사초를 드리며 묘역주변을 석축하고 성묘로(省墓路)를 단장하는등 대대적인 묘역정화 공사를 완성하였다.
매년 묘제(墓祭)는 음 3월14일과 9월14일에 후손들이 모여 절사(節祀)를 받들고, 기제(忌祭)는 음 11월24일에 산의실의 사당에서 봉행하고 있다.
그 옛날에는 예조(禮曹)의 건의에 따른 세조(世祖)의 영(令)에 의해 매년 한식과 추석에 조정에서 향(香)과 축문(祝文)이 내려지고 안성군수(安城郡守)로 하여금 관청에서 마련한 제물로 제향을 받들도록 한 제도가 지켜져 왔었다. [출처]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三韓國大夫人 順興安氏) (순흥안씨 문숙공파 종회)
첫댓글 안교수님. 안녕하세요?
올려주신 답사자료로 공부합니다.
즐겁고 행복한 토요일 되십시오^^
안교수님, 잘 봤읍니다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