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천일야화 자동선(紫洞仙) <제8話>
청교방 거리에 낙엽이 떨어지자 겨울이 성큼 왔다. 거리 이곳저곳엔 가을꽃들이 아직도 제 세상인 냥 불어오는 바람에 얼굴을 드러내고 팔랑이는데 이따금씩 눈발이 날리기도 한다. 개성의 늦가을은 초겨울과 맞물려있다. 이런 계절이 화화는 제일 싫다. 봄이면 봄, 여름이면 여름, 그런 계절을 좋아하여 조선에 왔을지도 모른다.
사계절이 뚜렷한 삼천리금수강산이 마음에 맞춤처럼 딱 들어맞았던 것이다. 장녕을 떠나보낸 지 어느새 보름이 지났다. 그의 넓은 품으로 돌아가 알뜰히 사랑을 해주었던 노모와 “새엄마, 새엄마...” 하며 따랐던 두 자매도 보고 싶다.
화화는 찬바람이 세차게 문풍지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그들이 더욱 그리웠다. 날이 저물어 새로운 손님을 맞을 때면 더욱 장녕이 아쉬웠다. 남녀가 성(性)을 공유(共有)할 때 진정한 사랑이다. 그런데 한때 화화는 장녕과 성을 공유했었다. 상대방이 나의 성을 제 것인 냥 필요할 때 쓰며 나 역시 상대방의 성으로 욕망을 채울 수 있을 때 남녀 간의 진정한 사랑의 동반자라 할 수 있을 터다. 화화는 동정호 악앙루 사건 이후 장녕과 일 년간은 밤마다 그러하였다.
장녕이 다녀간 후 화화는 월궁생활이 짜증나기 시작하였다. 장녕과 몇 년 만에 성을 공유했을 때 부부 때의 감정이 되살아나 하룻밤일망정 즐기고 난 후 여타 사내들에게 자진의 성을 주는 것이 싫어졌다.
노모와 두 자매에 대해 아니 사실혼이었을망정 장녕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 방사(房事)에 소극적 자세가 돼서다. 사내들은 줄을 서가면서 화화에게 거액의 화대를 내고 밤을 즐기려는 것은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고 싶어서일 게다.
그런데 장녕이 다녀 간 이후 화화는 죽부인(竹夫人)이 되었다. 화화가 죽부인이 되자 손님이 하나 둘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입소문이 한양에까지 퍼져 나갔던 것이다. “화화 그년 콧대만 세지 잠자리는 별거 아니야!” 란 소문이다.
세월은 화화의 마음도 싣고 갔다. 겨울이 가고 새봄은 어김없이 왔다. 넓은 정원엔 영산홍·목련·유채·복수초 등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화화는 특히 영산홍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올 봄의 영산홍은 보기도 싫어졌다. 장녕과 일 년 동안 알콩달콩 뜨겁게 살았던 집 정원에 영산홍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화화의 마음은 화사한 봄이 아닌 혹한의 겨울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다.
온 정성을 다 쏟아 키운 월궁을 정리하려 한다. 화화는 마음이 떠난 월궁에 하루도 더 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동기 화월(花月)에게 넘기려 한다. 화화는 몸만 빠져 나가고 월궁을 몽땅 화월에게 주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녀는 금강산 유람 길을 떠나려 하고 있다.
‘물은 유연하여 그릇 따라 일정한 모양이 없고 /
구름은 무심코 생겼다가 쉽게 다시 사라지네 /
봄바람 슬프고 초강에 날이 저무는데 /
원앙새 한 마리 무리 잃고 날아가네’ 이야의 《이별》이다.
사람이 서로 좋아서 만나고 만나면 또 헤어지게 된다. 하지만 성을 공유했던 남녀는 부득이 문제가 생겨 헤어지면 영혼까지 상처를 입는다.
지금 화화가 딱 그러하다. 동정호에서 전격적으로 사랑을 맺어 사실혼에 들어가 노모에겐 새 며느리로 두 자매한테는 새엄마로, 그리고 장녕에겐 새 아내로 성을 공유하며 살았다. 그 후 헤어졌다 극적으로 월궁에서 몇 년 만에 성을 공유한 방사를 즐겼다. 너무 애틋하였다. 화화는 그 애틋한 추억의 방사를 영원히 사랑의 역사에 남겨두려 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화월에게 월궁을 몽땅 주고 떠나가려 한다.
월궁 정원은 넓다. 어젯밤부터 화월이 화화대신 방으로 들어갔다. 화월을 맞은 손님은 횡재를 하였다. 한양에서 온 사대부가 지난겨울에 신청하여 두 달 만에 월궁에 주인공이 되었다. 훤칠한 키에 옥골선풍의 자태에 화화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하여 현기증까지 느꼈다. 화화가 장녕을 처음 봤을 때 느꼈었던 감정이다.
화화는 그런 마음을 안고 오늘 월궁을 떠나려 한다. 정원의 꽃들이 오늘따라 화려하고 더 아름다웠다. 때 아닌 소나기가 갑자기 쏟아져 화초들의 생기가 더 발랄해졌다.
정오가 지나서야 화월이 손님방에서 나왔다. “손님을 잘 모셨느냐? 그 손님이 너에게 처음이자 좋은 후원자가 될 것이다. 앞으로 너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내가 될 것이니라...” 화화는 애처로운 듯 화월을 쳐다보았다. 화월은 제대로 걷지를 못하고 어기적거린다. “여사님, 소녀 죽겠어요!” “호호, 혼이 난 모양이구나... 처음엔 다 그런 것이니라. 차차 좋아질 것이다.” 화월의 표정과는 다르게 헌헌장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나온다. “손님께서 엊저녁에 기분이 좋으셨던 것 같습니다.” “허허 그러했소이다. 내가 횡재를 했소이다.” “그러셨군요! 선비께선 그 아이를 책임지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몇 달 전에 모월 모일에 올 선비는 귀하신 몸이니 특별한 여인을 넣으란 부탁을 듣고 화월이를 소첩대신 화촉동방을 치르도록 했던 것이옵니다.” 선비는 그때서야 밤낮으로 붙어 다니는 친구를 떠올렸다. “허허, 그렇게 되었나? 내 그러 하리다. 머리를 올려주란 말이군! 내 다음에 올 때 꼭 그리할 걸세...”말을 마친 옥골선풍의 선비는 대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백마를 타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해가 뉘엿뉘엿 송악산에 걸쳐 월궁 추녀에 땅 그림자가 드리울 때 화화는 괴나리봇짐 하나를 달랑 메고 금강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원래는 조국 중국의 오악(五岳:태산·화산·형산·항산·숭산)으로 가려했으나 장녕이 다시 떠오를까 포기하고 금강산으로 정했던 것이다.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 /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구태어 /
보내고 그리는 정을 나도 몰라 하노라’
정한(情限)이 가득 담긴 황진이 시를 속으로 읊조리며 금강산을 향해 화화는 발걸음을 옮긴다. 그녀의 두 눈엔 어느새 알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화장기 없는 두 볼을 타고 내려오고 있다.
화화는 월궁에서 기생생활을 끝내고 평양성 칠성문 밖 선연동에 있는 황진이가 묻혀있는 공동묘지에 들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그 꿈이 여의치 않을 듯 하여 금강산으로 들어가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를 유람하며 여생을 보내려 마음 굳혔다. 지금 화화는 그 꿈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화화 없는 월궁은 한때 변함없는 성업을 했다. 화월이 화화에게서 보고 들은 것을 그림자처럼 행동해서다. 복장·화장·말투에 노래와 춤, 심지어 방사기술까지 화화에게 전수 받았다. 하지만 월궁에서 화화의 존재는 지울 수 없는 대상이었다. 화월의 월궁은 3년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화화가 없는 월궁은 달 없는 밤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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