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을 읽기 전에....
이 설은 통신상으로 떠돌던
황유석이란 분이 쓴 색다른 소설 입니다
물론 작가는 황유석이란 분이구요
현재 이설은 책으로 출판되었다구 하는데
그에 대한 자세한 것은 잘모르겠습니다...
제가 이설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것은
우연히 어느 분이 추천해 놓은것을 보고
이 설을 찿을려구 백방으로 수소문한결과
황유석 이란 팬페이지에서 찿게 되었습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세요
그러므로 그분에 메일주소도 모르고
정확한 출처도 모른다는점 이해해 주시기를...
프롤로그...
비가 참 많이 왔어 그렇지?아마 세상에 조금은 깨끗해을 거야...
난 지금 집으로 가는 길이야.
우리집은 번화가에서 멀리 떨어진 주택가에 있어
다 가정집뿐이라 가는길이 좀 무섭지.
가로등도 망가져서 흐린 날 늦은 시간엔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어쨋거나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골목이 하나 있어.
어...얘기하는 동안 다 왔네.
여기야 우리집이...별로 깨끗하진 않지만
나한텐 무척 편안한 곳이지. 들어가볼래? 따라와.
내 방은 이층에 있어.
계단이 따로 있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들키지 않고 들어갈 수가 있어서 편해.
조심해. 빗물 때문에 계단이 미끄러우니까...
조금만 기다려. 현관문이 잠겨서 열쇠로 열어야 해.
제길...이게 어딨더라. 아 찾았다. 자...여기야. 들어와.
저쪽은 우리 형 방이고 이쪽이 내방이야.
쉿! 조용히해. 형이 깨면 시끄러워진단 말이야.
어서 방으로 들어가자.
소리나지 않게 조심해서 내 방문을 열고...
짜잔..어때? 밖에서 볼 때하고는 전혀 딴 판이지?
이래뵈도 청소는 항상 열심히 하니까...그냥 평범한 방이야.
책상이 있고, 침대가 있고.
그리고 텔레비전. 오디오.
네 방이랑 별다른거 없잖아, 뭘 그렇게 봐?
아...컴퓨터...안돼. 컴퓨터 안에는
내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그만두라니까...켜지마. 하지 말라니까...
미안해. 나도 모르게 그만...기분 상했니?
사실..나 ... 컴퓨터 키기가 무서워.
왜 그러냐고? 그게..실은...휴우...어쩔 수 없구나,
그럼 잠깐 기다려봐. 우선 통신에 접속하고...
자 다 됐어. 잠깐...
보기전에 나하고 한 가지 약속할 것이 있어.
절대로 더 이상은 호기심은 갖지 않겠다고 약속해.
약속하는 거지? 정말이다. 그럼...이리 와서 모니터를 봐.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어때? 무슨 기분이 느껴져?
무엇에 대한 환영의 글이냐고?
이 글이 환영의 의미로 보이니?
너에 눈엔 이 빌어먹을 글이 환영의 뜻으로 보인단 말이야?
난 요즘 이것 때문에 미칠 것 같아.
이해할 수 없다고? 그래.
넌 당해보지 않았으니까...
네가 부러워.더 이상 호기심 같은 거 갖지마.
그냥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있는 게 너에겐 좋을 거야.
난 어차피 여기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벗어날 수 없지만...
넌...넌 아직 기회가 있어. 왜...왜 그래?
뭐 하려는 거야? 하지 말란 말이야.
그만둬. 더 이상 들어가게 된다면
다음엔 너한테 일어나게 될 일을 난 막을 수 없다고...
하지마..내 말 들으란 말이야!
제길...빌어먹을..난 모르겠다.
네 멋대로 한 짓이니까 날 원망하지 마.
그래...어쩌면 나 혼자 이 미칠 것 같은
공포의 늪 속에 빠져 있는 것보다
너랑 같이 있는게 그래도 덜 무서울지 몰라.
그래...같이 해보자.
너와 나 둘이서 같이해보는 거야.
하지만..이걸 명심해.
우리가 지금 하려는 일은
우리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짓이란 걸...
마음 단단히 먹어.
그리고 결과가 어떻게 되더라도
그 모든 것은 너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마.
난 분명히 말렸다.
이제부터 너에게 일어나게 될 일은...
어쩌면 너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너의 호기심 때문이야...동의하지?
그래..그럼 시작해보자. 어쨌거나 축하한다.
첫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을...
1.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월요일 마지막 수업인 '성의 이해'라는 강의가 끝나기 무섭게 한 남학생이 강의실 밖으로 뛰어나간다.
'오늘은 절대 안 놓친다.'
난 책을 가방에 넣을 틈도 없이 그대로 손에 들고 그를 뒤쫓아 뛰어나갔다.
"아무리 제가 시간 강사라지만 저렇게 인사도 않고 나가서야 되겠습니까?"
강의실을 채 바져나오기 전에 들리는 강사의 말이 뒤통수를 따갑게 했다. 그 분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가 없다. 난 오늘 저 놈을 꼭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난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하지만 쉽게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결국 그를 향해 소리를 지른다.
"야! 강천규, 거기 서. 거기 서라니까...."
내가 부르는 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리고는 달리는 것을 멈추었다. 겨우 그의 앞까지 뛰어온 나는 허리를 숙이고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그가 나의 뒤를 두리번거리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는다.
"왜 그래? 기현아! 귀신이라도 본 거야?"
"대낮에 귀신은 무슨 귀신이야? 너 잡으로 뛰어온 거지."
"날 잡으러?"
"그래. 임마. 천구 너 말이야!"
난 굽혔던 허리를 일으키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 스타일. 작지만 날카로운 눈매...그의 이름은 강천규다.
'컴퓨터 좋아해요?'
그게 나에게 처음으로 했던 말...
가을 학기 편입으로 학교에 들어왔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내가 학교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것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갈 때쯤. 그는 작은 눈가에 장난기 많은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다가왔다.
내가 불쌍해 보여서였을까? 아니면 나에게 호감이 가서였을까? 어쨌거나 그와의 만남은 나에게 두 가지의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그 중 하나가 [HACKING FANATIC]이라는 대학 내. 해킹 서클에 가입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컴퓨터라면 워드프로세서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내가 해킹이라니...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천규는?
그는 컴퓨터에 관한 한 천재적인 실력을 가지고 있다. 구리 서클실에는 총5대의 컴퓨터가 있는데. 각기 16기가 바이트짜리 하드디스크를 장착하고 있다. 그리고 그 디스크들 속에는 중요 기관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해킹해 온 어마어마한 정보가 꽉꽉 하 있다. 그 자료들의 3분의 2정도가 모두 천규의 작품이다.
언제나 장난기 많은 눈웃음을 보이며 사람들을 대하는 천규...하지만 일단 컴퓨터 앞에 앉으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꾹 다문 입술은 몇 시간이고 열리지 않으며, 날카롭게 빛나는 눈동자는 모니터에서 단 한시도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천규의 모습에서 약간의 두려움마저 느낀다.
우리 서클의 이름에 들어가 있는 'FANATIC'이라는 단어... 광신자...
천규는 그 단어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일 것이다. 내가 여태까지 본 사람들 중에서...
그는 언제나 새로운 사이트를 해킹하는 것에 행복해한다. 해킹을 하고 있는 사이트가 어려우면 어려운 것일수록 더욱 더 열의를 보였고, 그러한 노력 끝에 해킹에 성공했을 땐. 나에게 제일 먼저 달려와 들뜬 표정으로 자랑을 하며 성공 과정을 몇 시간이고 늘어놓았다. 비록 그의 말을 다 알아듣는 것은 아니었지만 난 배우는 입장에서 그 설명들을 차분히 들으며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인지 나의 실력도 이제는 초보티를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중이다. 천규는 나에게 친구이자 선생인 셈이다. 컴퓨터 선생...
그런데 요즘 들어 천규의 행동이 많이 이상해진 것을 느낀다. 학교에 안 나오기 일쑤였고, 나온다 하더라도 수업이 끝나면 오늘처럼 어딘가로 급하게 사라져버렸다. 수업시간에도 그는 창가쪽 구석 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며 가끔 바보처럼 히죽거리기까지 한다. 난 그의 변화가 너무도 궁금했기에 오늘은 아예 마음을 먹고 그를 붙잡았던 것이다.
"도대체 요즘 뭐가 그렇게 바쁜거야? 벌써 2주 동안이나 서클실에도 나오지 않고...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아...그래서 이렇게 죽어라고 내 뒤를 쫓아온 거구나. 킥킥..."
"웃지만 말고 빨리 말해봐. 궁금해 죽겠다고!"
"그게 말이지..."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가 갑자기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가르쳐 줄께. 난 급해서 이만..."
미처 잡을 사이도 없이 도망가 버리는 천규...뛰어가던 그가 저만치 앞에서 뒤돌아서며 소리친다.
"선배들에겐 나 죽었다고 말해두라고!"
"야...임마! 천규야!"
천규는 나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뒷걸음질치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무릎을 손으로 마구 비비고는 부리나케 교문을 빠져나가 버린다. 난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천규가 저렇게 신나하는 것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는데...맞아! 유명한 컴퓨터 회사의 해킹 방지 보안 프로그램을 뚫었을 때였지. 그럼 이번에도 역시?'
난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그의 지금 상태로 보아선 무언가 엄청난 사이트를 해킹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시원한 가을 바람이 나의 머리칼을 흔든다. 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높은 가을 하늘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려 대지에 파랗게 물들일 것만 같다. 11월의 포근한 가을 햇살이 나의 뺨을 살며시 쓰다듬었을 때. 난 두 눈을 감고 나에게 일어난 두번째 변화를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에 젖어든다. 저절로 나의 입가에 미소가 그러졌다.
"뭘 그렇게 혼자 웃고 있어? 바보처럼..."
가을 바람만큼이나 상큼한 목소리...난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차분하게 빗어 내린 곱고 긴 머리칼과 고운 얼굴선을 가진 사과향기의 소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가 마치 내가 웃고 있는 이유를 찾아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나의 내면으로 스며들었을 때, 난 당황하며 말했다.
"어...지...지애구나."
최지애...[HACKING FANATIC]의 홍일점...
차갑고 이지적인 눈동자...그러면서도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하고 따스한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소녀...
그녀는 언제나 검정색 면바지와 마이를 즐겨 입는다. 그녀의 멋진 체형은 몸매에 어느 정도 자신 있는 사람도 쉽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검정색 계통의 옷들을 정말로 완벽하게 소화해내고 있다.
난 그녀를 사랑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두 번째 변화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이런 나의 마음을 보인 적은 없다. 그럴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 천규와 공인된 캠퍼스 커플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녀가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 전에 난 화제를 바꾸는 말을 꺼냈다.
"요즘 천규가 많이 바쁘지?"
"가끔 그렇잖아. 이젠 뭐 익숙해져서..."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왠지 힘이 없어 보인다. 어떤 일에 한번 빠지면 다른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천규의 성격...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지애 역시 천규의 그런 면을 좋아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모습 때문에 서운함을 느끼는 것이 바로 연인들의 아이러니 아닐까?
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금처럼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아랫입술을 깨물며 한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그녀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 나오는 버릇이다. 내가 좋아하는 지애의 모습 중 하나...
난 그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단지 이렇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
잠시 후.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했고 나는 당황하여 얼른 고개를 숙였다. 지애가 갸웃이 고개를 기울이며 나의 눈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오른쪽 어깨 너머로 스르륵 내려온다. 난 도둑질하려다 들킨 것처럼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여전히 나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너 꼭 이럴 때 보면 화분 깨뜨리고 엄마한테 들킨 어린애 같아."
"아...아니야. 나 화분 안 깼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엉뚱한 말에 지애가 소리 내어 웃는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바보같은 놈...
"웃어서 미안...하지만 가끔 기현이 넌 내가 상상도 못하는 대꾸를 해."
"그러니?"
"응...그래서 네 옆에 있으면 언제나 즐거워."
난 그녀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그녀를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기뻤던 것이다.
"우리 커피 한잔 마시러 갈래?"
별다른 뜻은 없었다. 단지 그녀와 같이 있고 싶었던 것일 뿐...지애가 시계를 본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러자. 시험 기간이라 서클실에 사람도 없을 테고. 집에 가기는 너무 이른 시간이고..."
"아무래도 좀 그렇지?"
"가자. 천규 몰래, 기현이랑 바람 피워야지."
지애는 그렇게 말하며 나의 팔짱을 꼈다. 난 별 의미 없는 그녀의 이러한 행동에도 가끔 혼자만의 혼란을 일으키곤 한다. 지애도 혹시 나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며...
하지만 그것은 내 마음 속의 바라지 않는 바람일 뿐이겠지.
바라지 않는 바람...그녀의 사랑이 되길 바라면서도 정말로 그렇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모순적인 생각...
그렇다. 지애를 좋아하면서도 그만큼 천규는 나에게 소중한 친구였던 것이다.
나는 그녀와 함께 학교 정문 앞에 있는 '하바나'라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모든 인테리어가 나무로 되어 있어 무척이나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이곳은 평상시에 연인들이 자주 오는 장소지만. 지금은 시험 기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학교 정문이 보이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후 깨끗한 앞치마를 입은 아르바이트생이 주문을 받고 지애는 헤즐넛 향기를 커피를. 난 콜라를 시켰다. 이런 곳에 들어오면 난 항상 콜라밖에 시킬 줄 모른다. 좀 더 근사한 것을 시킬 수는 없는 걸까?
"지애야! 요즘 천규가 뭐에 그렇게 빠져 있는지 알고는 있어?"
"지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언젠가 천규에게서 '기가 막힌 사이트를 찾아냈어!'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게 언젠데?"
"2주 전쯤?"
"2라고? 와아! 그렇데 천규가 아직도 해킹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야?"
"응...좀 어려운가 봐. 자체 방어 시스템을 뚫고 사이트 내부로 들어가긴 한 것 같은데..이상하게 그때부터 정신없이 행동하기 시작했어. 자취방에 들어가 앉아서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아예 안 해. 전화도 불통이고..."
전화가 불통인 것은 아마 통신에 컴퓨터가 접속되어 있었기 때문이겠지...
그녀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지애가 저렇게 걱정하는 게 나였으면...'
"무슨 생각해?"
"아...아니야. 아우...조금 있으면 시험이구나."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 그녀와의 대화가 끊기자 그제서야 커피숍에서 흐르는 조용한 음악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처음 들어본 득한 그 멜로디의 진행에 점점 빠져들 때쯤..지애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시인의 숲'이라는 피아노 연주곡이야. 음반으로 나오진 않았지만 소수 마니아들에겐 잘 알려진 곡이지. 참 좋지 않니? 누가 만들었을까? 궁금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는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천규 때문에 많이 속상한가 보다. 무언가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머리 속에서 맴돌 뿐 끝내 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말없이 창 밖을 바라보던 그녀가 시계를 보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만 나가자."
"그...그래."
아쉬웠다. 조금만 더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는데...조금만 더..
우리는 버스정류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걷는 속도에 맞추어 걸으며 나만의 상상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지금 난 지애의 연인으로서 그녀의 옆을 걷고 있는 것이다. 나만을 향한 그녀의 미소...난 바람에 흩어진 지애의 머리칼을 부드러운 손길로 넘겨주며 웃음 짓는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신촌의 밤 거리를 이처럼 행복한 모습으로 걷고 있는 우리들에게 사람들은 부러움의 시선을 보낸다. 그녀로 인해 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하지만 지애의 발걸음이 멈추었을 때. 동시에 나의 상상도 멈춰버린다. 눈앞에 보이는 버스정류장 팻말. 그리고 그녀의 어두운 표정...
'아..이게 현실이지...'
나도 ㅁ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녀에게 오로조 친구일 수 밖에 없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도 싫다. 하지만...어쩔 수 없잖아...
"버스 왔다. 기현아. 나 먼저 갈께."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음성은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지만...저 소리 만큼은 언제나 커다란 아쉬움만을 남긴다.
그녀가 버스에 오르며 자리에 앉는 모습이 보였다. 나를 향해 흔들어 보이는 그녀의 하얗고 긴 손가락의 섬세한 움직임은 내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는다. 왜 이렇게 가슴이 아려오는 걸까? 왜...?
그녀를 태운 버스가 출발한다. 난 그 버스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천규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천규는 이해할 수 있을까? 나의 이런 마음을...'
외사랑의 안타까움이 지하철 역을 향한 나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든다. 시간은 상대적으로 흐른다? 그래...정말 맞는 말이야. 그녀와 함께 걸을 땐 그렇게 짧았던 시간들이 지금은 한없이 길게만 느껴지니...난 잠시 맘춰서서 쇼 윈도으에 비친 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깨가 쳐저 있는 그 모양새가 무헉이나 초라해 보인다.
'기현인 머리칼이 참 예쁘다. 가르마가 가운데 있나 보지? 내가 보기엔 옆 가르마를 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던 나에게 다가온 지애가내 머리칼을 만지며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난 손으로 머리칼을쓸어 넘겨 옆 가르마를 타보았다. 힘이 없는 머리칼이 스르륵 다시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왠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때 길 건너편 건물 위에 있는 커다란 광고용 전광팜에 나타난 문구가 나의 시선을 끌었다.
[11월 13일 신촌역 앞 K백화점 불바다...사망 27명. 오늘밤 10시 30분 자세한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뭔 소리야? K 백화점이 불바다라니...'
난 그 건물 바로 옆에 보이는 K백화점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화려한 조명과 입구에서 북적대는 사람들...
'도대체 뭐가 불바다라는 거야? 말도 안돼...'
내가 다시 전광판을 바라보았을 때, 그 문구는 이미 사라지고 승용차 광고로 바뀌어 있었다.
'이상하네...잘못 본 것은 아닐텐데...'
난 어이가 어뵤어 고개를 젓고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역 안으로 들어가려다 한 남자가 나처럼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짧은 스포츠혈 머리를 한 그의 모습이 무척 낯이 익다.
천규?
"천규야!"
분명 천구였다. 그러나 그는 내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는지, 이내 골목 쪽으로 사라져버린다. 저 골목으로 들어가면 천규가 사는 자취방으로 가는 길...난 내가 본 것을 그도 봤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피곤해서 그냥 역으로 내려갔다.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 뿐이다.
"다음 역은 사당, 사당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인간들이 파 놓은 땅 속에서 오랜 시간 이리저리 시달리던 나는 파김치가 된 몸으로 출구를 빠져나와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집으로 가는 길에도 높은 건물 위에 커다란 광고용 판이 하나 있다. 그것을 바라보자 아까 신촌에서 보았던 그 말도 안되는 문구들이 떠 올라 어의없는 웃음이 나왔다.
"엄마. 저 왔어요."
집에 도착한 나는 현관문을 열며 습관적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평상시와는 달리, 다정하게 반겨주시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다들 시골에 가셨지!'
편찮으신 아버지가 잠시 시골로 요양을 가셨기 때문에 집엔 회사를 다니는 형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 난 물을 마시기 위해 냉장고로 가서 문을 열었다. 내 생일 날 형이 사온 생크림 케이크 한 조각을 손으로 집어 입에 넣고는 음료수 통을 꺼내 들고 내 방으로 갔다.
방문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나의 컴퓨터이다.
"심심했지? 키티야!"
키티...내가 커뮾터에 붙여준 이름..별다른 뜻은 없다. 단지 발음이 예뻐서 붙여준 이름이니까...
난 키티를 무척 좋아한다. 그녀가 비록 감정 없는 기계이지만 사람들처럼 나를 속상하게 하거나 배신을 하지는 않는다. 언제나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를 대하며 내 고민이나 슬픔을 말없이 들어준다. 물론 키티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툭하면 에러 메세지를 내보냈고, 아예 반응 자체를 보이지 않으며 나를 외면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서로가 앙숙이었던 우리를 화해시켜준 사람이 바로 천규다. 난 천규를 통해서 키티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고 또한 키티의 사랑을 받는 방법을 배웠다. 그 후로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버렸다. 키티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알고 있으리라...나의 비밀을 털어놓았으니까., 지애에 대한 애절한 마음까지도...
그러나 이런 이유만으로 키티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난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자고 있는 키티를 깨우기 위해 부팅 스위치를 누른다. 기지개를 켜며 일어날 ㅜㄴ비를 한 키티는 잠시 후 예쁜 시작 음과 함께 눈을 떴다.
'아...!'
지애의 눈부신 미소를 담은 사진이 배경화면 가득히 나타났다. 내가 키티를 사랑하는 이유... 그것은 바로 나에게 있어 키티는 또 하나의 지애이기 때문이다. 처뉵와 상관없는 오직 나만의 지애...
난 의자에 몸을 기대며 리모콘으로 오디오를 켰다. '비와 바람의 이야기'라는 언더그라운드 그룹의 감미로운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지애가 직접 녹음하여 나에게 생일 선물로 준 저 테이프...이 세상 누구도. 천규조차 가지고 있지않은 오직 나만을 위한 지애의 선물...
난 음악에 취해 눈을 감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본다.
"지애야..."
************************
잠이 들었던 것일까?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키티가 혼자서 화면 보호기를 띄우며 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벌써 12시네...
전화를 받기 위해 의자에 파묻혀 있던 몸을 일어켰다. 너무 오래 불편한 상태로 있었는지 머리가 무척 아팠다.
"여보세요?"
"......"
대꾸가 없었다, 누구야? 장난전화인가?
"여보세요?"
"......"
신경질이 났다. 지애의 꿈을 꾸고 있었는데...
"장난 전화할 시간 있으면 잠이나 자!"
그렇게 말하며 수화기를 내려놓으려 할 때.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기현아!"
뭐...뭐야...이 따위 목소리...
소름이 꽉 끼쳤다. 그 음성은 마치 굶주린 육식동물이 탐욕스럽게 사냥감의 지방덩어리를 씹을 때 나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여...여보세요?"
"기...기현아...나야...천규!"
난 끊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으면서 천규라는 말에 다급하게 물었다.
"너...목소리가 왜 그래?"
"더...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어. 제발...당장 우리집으로 와줘. 나...나 좀 살려줘...제발...커어억!"
뭔가가 천규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천규야! 천규야!"
대답이 없다. 전화를 끊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난 수화기를 내려 놓은 뒤. 손질하려고 꺼내 놓았던 두꺼운 코트를 걸치며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다가 현관으로 들어오는 형과 마주친다.
"야! 너 이 밤에 어딜 가는 거야? 문 안 열어 준다. 미친 놈! 아직 가을인데 겨울 코트는 또 왜 꺼내 입고... 임마! 어디가는 거야?"
난 대꾸하지 않고 형을 뒤로한 채 집 밖으로 뛰어나왔다. 천규에게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다. 형의 말처럼 겨울 코트를 입기는 아직 날씨가 덥지만 천규의 목소리가 너무도 소름끼쳤기 때문에 입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아직도 소름이 돋아. 빌어먹을...도대체 무슨 일이야...천규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고.
2.
"아저씨! 신촌이요."
난 정신없이 택시를 잡아 타고 신촌으로 향했다. 겨울 코트픞 걸쳐 입은 나의 모습이 이상했는지 택시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흘끔거리며 나를 보고 있다. 무언가에 놀란 듯한 나의 표정은 더욱 궁금증을 자극했을 것이다. 자꾸만 추워졌다. 등골에 느껴지는 오싹함이 더욱 심해졌기에 난 코트의 옷깃을 잡고 몸을 감쌌다. 천규의 끔찍함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다. 공포감으로 다리가 떨리고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리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진정시키려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죄송합니다. 금연이라서요..."
"예?"
"금연이거든요...."
기사 아저씨의 말에 물었던 담배를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고는 심호흡이라도 하기 위해 차장을 열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차가운 밤 공기가 가슴 속으로 들어왔지만 불안한 마음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는다. 난 두 손으로 몸을 감싸며 코트깃에 얼굴을 파묻고 잔뜩 웅크렸다.
'그 목소리...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천규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는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음성으로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 다급한 요청에 그가 사는 곳으로 향하기는 했지만, 신촌에 가까워질수록 두려운 마음은 점점 더 심해졌다.
"신촌입니다. 어디서 내리실 건가요?"
기사 아저씨의 말에 난 고개를 들었다. 신촌의 번화가...거리엔 아직도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웃고 있는 사람도. 술에 취한 사람도 있다. 일에 지쳐 피곤한 모습으로 길을 걷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나처럼 공포에 질려 떠는 사람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세상에 혼자 버려진 듯한 착각에 빠진다.
"손님?"
난 고개를 돌려 기사 아저씨를 보았다. 약간 짜증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아...예...저기 저 두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 주세요."
택시는 번화가를 빠져 나와 조용한 주택가로 향했고, 천규의 집으로 가까워질수록 그나마 있던 사람들마저도 현저히 둘어간다. 결국 그의 집이 있는 골목 어귀에 도착했을 땐. 아무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단지 길가에 세워져 있는 검은색 승용차 한 대를 제외하고는...
"여...여기서 세워 주세요."
난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요즘을 내고 택시에서 내렸다. 천규의 자취방이 있는 다세대 주택이 정면으로 보인다.
"여기 잔돈이요."
택시기사가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어 잔돈을 주려하지만 난 받을 생각도 않고 멍하게 천규의 집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더니 차를 출발시켰다.
택시가가고 나자 내가 서 있는 이곳은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해졌다. 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 같다.
전에 왔을 땐 이런 기분이 아니었는데...
내가 처음 천규의 집에 왔을 때, 새로 지어서인지 반 지하에 있는 그의 자취방은 무척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곳이 음침해 보일 뿐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공포감마저 일으키게 한다. 가만히 그의 집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가 마치 먹이를 노리는 징그러운 동물의 입처럼 느껴진다. 섬뜩한 느낌이 들어 나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섰다.
'당장 우리 집으로 와줘. 나...나 좀 살려줘...제발...'
천규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다시 한번 등골이 오싹해졌다.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그냥 도망가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나의 도움을 간절히 바랬고, 내가 이곳까지 온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공포감으로 몸을 떨며 입구를 바라보고만 있는 나...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천규를 도울 수 있는 시간을 놓쳐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한 가지 밖에 없다. 안으로 들어가는 것....
'천규가 날 찾았어. 들어가야 해. 들어가자. 들어가자고...'
마음을 굳게 먹고는 계단 아래로 한 걸음 내딛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느껴졌다. 마른침을 힘겹게 삼키고는 한 발짝 한 발짝 천천히 내려갔다. 겨우 그의 집 현관문까지 내려온 나는 조심스럽게 벨을 눌렀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문손잡이를 돌려보았지만, 잠겨 있었다.
' 이 화분에 항상 보조키를 놓아 둘테니까 찾아오면 초인종 누르지 말고 열쇠로 들어와. 난 초인종 소리가 신경에 거슬리거든...'
천규가 예전에 했던 말이 생각난다. 문 옆에 놓인 화분을 들어 바닥을 살펴보니 그의 말대로 열쇠가 있었다. 그것으로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불이 꺼져 있는 방안...단지 천규의 컴퓨터 모니터가 발하는 희미한 빛이 주위를 간간이 비추고 있을 뿐이다. 그 컴퓨터 앞에 엎으려 있는 천규의 모습이 보였을 때,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빛을 등지고 있어 그의 얼굴 표정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내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가만히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
"천규야!"
대답이 없다. 난 더 이상 들어갈 용기를 내지 못하고 문 앞에서 손을 더듬어 형광등 스위치를 찾았다.
딸깍!
천규의 얼굴이 밝은 빛과 함께 내 눈앞에 드러났다. 난 온몸이 얼어붙은 채로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흰자위가 온통 시벌겋게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마치 자신의 공포감을 그대로 전하려는 듯 부릅뜨고 날 쳐다보고 있다. 틔어나온 광대뼈로 인해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도저히 천규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한 형상을 하고 있었고, 턱뼈가 빠져 벌어진 입에선 아직도 검붉은 핏덩이가 터져 나오며 그의 오른뺨 밑에 놓인 수화기를 흥건히 적시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부러 꺾어 놓은 것처럼 심하게 비틀린 그의 두 팔...난 너무도 끔찍한 그의 모습에 다리의 힘이 빠져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엔 관절의 반대 방향으로 꺾여 있는 그의 두 다리가 보인다. 나의 이빨이 공포감으로 딱딱거리며 부딪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 천규의 신체에서 온전한 부분은 컴퓨터 키보드 위에 놓여 있는 두 손뿐, 어디 하나 제대로 되어 있는 부분이 없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공포감 떄문에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는 지금의 상황...난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아무리 질러도 나오지않는 목소리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바닥을 짚은 패로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던 손이 미끄러지며 문방지에 어깨를 부딪혔을 때, 그제서야 막혀 있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누...누가 좀 도와줘요. 제발 좀 도와 달라고요. 빌어먹을...사람 좀 살리란 말이야!!!!"
한번 나오기 시작한 나의 목소리가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댄다. 나의 비명소리를 들은 것인지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난 공포감으로 흔미해지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들도 방안의 광경을 보는 순간 모두 기겁을 한다. 여자들은 비명을 질렀고, 남자들은 그 끔찍한 광경에서 눈을 돌려버렸다.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고 있는 나를 부축해 방에서 나오게 했다. 눈을 감고 싶었다. 천규의 시뻘건 눈에서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몸은 엄청난 공포감으로 이미 내 의지를 벗어나 버린것만 같았다.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신체의 모든 기관이 멋대로 행동하고 있다.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
'정신차려...제발 정신차려...이대로는 안돼. 이대로는 안된다고...'
경찰들은 분명 조사를 목적으로 천규를 데려갈 것이다. 그렇게되면 천규의 악마와도 같은 모습이 머리속에 각인된 채 그를 다시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천규의 모습을 찾아야만 했다. 저 끔찍한 시체의 모습에서 예전에 장난기 많았던 천규의 본래 모습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는 평생 이 공포를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선 나는 방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사람들이 나를 막았지만, 그들을 뿌리치고 다시 한번 천규를 자세히 보기 위해 비틀거리며 그에게로 갔다. 여전히 천규의 시뻘건 눈이 나에게 무언가를 간절히 알리려는 듯이 바라보고 있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숨쉬는 것이 괴로울 정도로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난 눈을 똑바로 뜨고 그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찾을 수가 없어...천규의 모습을...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
피에 젖어 있는 수화기...너무 고통스러워서.. 살고 싶어서...만신창이가 되어가는 몸으로, 필사적으로 나에게 전화를 건듯한 그의 마지막 모습... 갑자기 나의 눈앞이 흐릿해 진다. 내가 울고 있나 보다. 난 고개를 들어 컴퓨터의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천규가 무언가를 쓰다만 글이 희미하게 보인다.
[난...아직....]
"천규아 도대체 누가 이런 잔인한 짓을 한 거야. 말 좀 해봐. 뭐라고 말 좀 해보란 말이야. 천규야아아아아!"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나의 팔을 누군가 붙잡았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경찰 같았다. 빌어먹을...이제 와서 뭘 하겠다는 거야? 언제나 모든 상황이 끝나면 나타나는 경찰들...그들이 못 견디게 미웠다. 그리고 그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도 천규를 구해내지 못한 내 자신이 미웠다.
난 도대체 지금 무슨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일까? 도대체.......
3.
"정말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까? 신기현 씨...신기현 씨?"
벌써 3시간 동안이나, 취조실이라고 불리는 이 어두운 곳에 갇혀 똑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듣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신기현 씨...힘드신 줄 알지만, 당신 친구가 죽었습니다. 범인을 잡기 위해서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실테지요?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까?"
커다란 덩치에 굵은 팔뚝을 가진 근육질의 사내가 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여전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쾅!
"제길....."
갑작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난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그의 부리부리한 눈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의 뒤로 약산 마른 채형에 머리를 뒤로 묶어 넘긴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드디어 황기자 등장!! >_<) 그는 나의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이며 내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말했다.
"주 형! 완전히 맛이 갔어. 더 있어봤자 시간 낭비인 것 같아. 난 그만 가볼래."
"황 기자! 그래도 최초의 목격자야. 무슨 단서라도 찾아야 할 거 아니야!"
"단서는 얼어죽을...주 형은 지금 인형한테 말을 시키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황 기자라고 불린 남자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에게 질문을 하던 사람은 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더니 한숨과 함께 말한다.
"무언가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강력계 주민성 형사를 찾아 주십시오. 너무 오랜 시간을 잡아둔 것 같아 미안하군요. 이젠 나가셔도 좋습니다."
그가 취조실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밝은 빛이 들어오며 나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망막이 그 빛에 적응하기 시작할 때. 나의 눈에 너무도 반가운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형....!"
3시간 만에 처음으로 나의 입이 열렸다. 형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묻는다.
"기현아...괜찮은 거니?"
난 형의 부축을 받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다.
"나...나 좀 집으로 데려다 줘."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지친 몸....이대로 그냥 쓰러져버리고 싶다.
******************************
몇 일 동안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잠이 들면 천규의 시뻘건 눈동자가 나를 짓누르고, 깨어있을 땐 그의 끔찍한 음성이 나의 고막을 찢어 놓았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 공포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버린 나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그것은 천규의 장례식이 오늘 있다는 통보였다.
지금...그곳으로 향하고 있는 나의 발걸음이 너무도 무겁다.
마음속을 파고드는 공포와는 또 다른 감정 하나...
'내가...조금만 빨랐더라면...그는 살 수 있었는지도 몰라.'
그의 죽음은 나의 잘못일 수도 있다는 죄책감이 이제는 나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천규의 장례식장에 도착한 나는 그의 주검 앞에 오열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슬퍼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나에게는 오히려 행복해 보인다. 그들은 단지 슬퍼하고만 있는 것이니까...미칠 것 같은 공포감이나 죄책감 따위가 없는 오직 슬픔 그 자페의 감정으로만 울고 이쓴 것이다. 그들이 부러웠다.
정말로...
안으로 들어섰을 때. 나의 눈에 천규의 사진이 보인다. 그 사진 위에 붙어있는 검정색의 띠...그것은 나에게 다시 한번 천규의 죽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애도를 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왔으니까...하지만...그럴 수 없었다. 그의 사진에 절을 함으로써 내 스스로가 그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난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가 없어서 밖으로 나와버렸다.
'믿기지 않아. 처뉵가 정말로 죽었단 말인가? 정말로?'
난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되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가 죽은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의 마음속에 공포감과 죄책감을 넘어선 호기심이 고개를 들고 있다. 알고 싶었다. 그의 죽음에 관한 비밀을...
그런 생각들 속에 빠져 멍하니 영안실 쪽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곳으로 들어가고 있는 지애가 보였다. 검정색 정장을 한 그녀의 모습...그리고 옷의 색깔 만큼이나 어두운 그녀의 표정...
그녀는 평상시에도 검정색 옷을 즐겨 입지만 지금은 그 의미가 다르다.
"지애......"
난 지금까지 그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규의 죽음으로 인해 가장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은 바로 지애일텐데...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하는 거지? 무슨 말로...'
잠시 후, 그녀가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지애가 고개를 내쪽으로 돌렸을 때, 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 슬픔이 가득하다. 한동안 나를 바라보기만하던 ㅡㄱ녀가 천천히 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할 때, 서클 선배들이 그녀의 주위로 몰려와 위로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지애는 더 이상 나에게 다가올 수가 없었다. 여전히 날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내가 그녀에게 다가가주길 간절히 바라는 눈빛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가는 대신 힘없이 뒤돌아서서 아예 병원 밖으로 나와버렸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다. 하지만...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어떤 말로도 그녀의 아픔을 위로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나를 바라보던 지애의 슬픈 눈동자를 생각한다. '미안해. 난 하 말이 없어, 지금 너를 위로할 수 있는 말이 생각나지 않아. 미안해. 정말로......'
어떻게 내 방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지칠 대로 지쳐버린 몸과 마음으로 쓰러지듯 침대 위에 누웠다.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
'그만해. 이제 그만 하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난 짐채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책상 앞에 앉아 자고 있는 키티를 깨웠다. 지금 나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키티밖에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녀가 맑은 시작 음을 내며 지애의 환한 미소를 보여준다.
'이젠 지애에게서 저런 미소를 다시는 볼 수 없겠지?'
슬퍼진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대화방에 가면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통신에 접속했다. 잠시 후, 초기화면이 뜨면서 메일이 왔다는 표시가 나타났다.
'편지? 나에게 편지를 보낼 사람이 없을텐데? 누구지?
'편지읽기' 버튼을 클릭했다.
[보낸이: 강천규
ID: HACKER 2048
날짜: 1999년 11월 13일 11시 30분
편지 제목: K ]
"뭐...뭐야?"
천규의 편지...난 놀란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11월 13일...? 그렇다면 천규가 죽기 전에 보냈다는 말인데...'
그의 편지에는 아무런 내용도 쓰여 있지 않았다. 단지 동봉 자료만을 포함하고 있을 뿐이다. 난 '자료 받기' 버튼을 클릭하고 진행 과정을 바라본다. 자료의 양이 많았던 것인지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어쩌면 초조하게 기다리는 마음 때문에 더욱 길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자료받기가 완료되었습니다.]
나는 곧바로 통신을 끄고 다운받은 자료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한글 문서 하나와 C 언어 소스파일 하나...각기 [MISSION 1], [MISSION 2] 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그 두개의 파일을 바라보며 난 생각에 잠겼다. 천규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 그 과정들을 항상 [MISSION 1]이라는 제목이 붙은 한글 파일을 클릭했다.
[99년 11월 1일...난 지금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있다.]
'일기?'
천규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 그는 지나간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며 현재에 충실하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어떤 프로젝트를 실행할 때 써내려가는 업무일지와 비슷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난 잔뜩 긴장한 상태로 다음 줄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무차별 대입법을 실행하고 이 웃기지도 않는 사이트에 들어가는 것을 성공했다. '첫번째 관문을 통과하신 것을 축하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나의 방문을 환영하는 메시지가 나왔다.]
[통신의 대화방을 이용한 게임과도 같은 이 사이트에 난 지금 놈을 잡기 위해 들어가고 있다.]
[이 사이트의....]
천규의 글은 중요한 말이 나올 것 같은 부분에서 끊겨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지워버린 것처럼 말이다. 한동안 공백이 계속되다 마지막에 가서야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이럴 수가...이건 엄청나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다.]
기대를 했던 만큼 커다란 실망감이 밀려왔다. 결국 그의 죽음에 관한 비밀은 단 한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난 한숨을 쉬며 한글파일의 창을 닫았다. 그리고 C 언어로 된 소스 파일을 바라본다. 그 파일 역시 한글파일처럼 손상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C 언어를 인식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그리고는 천규의 소스파일을 링크시켜 하나의 실행 파일이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오류 메세지가 뜨지 않았고, 성공적으로 실행파일 하나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도대체 이것이 무엇에 쓰이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그 정보가 담겨져 있을 법한 한글파일은 이미 망가진 상태고...무엇일까? 도대체 이것은 무엇에 쓰는 실행파일일까? 갑자기 그의 글 중 한가지의 대목이 생각났다.
[통신의 대화방을 이용한 게임과도 같은 이 사이트에 난 지금 놈을 잡기 위해 들어가고 있다.]
난 얼른 통신에 다시 접속하고는 대화방을 클릭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수많은 대화방이 즐비하게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지금 나의 생각과 연관되어 있을 만한 그런 방제는 보이지 않는다. 무작정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던 나는 한참 뒤에야 비로소 각기 다른 대화방의 종류마다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떤 종류의 대화방이라도 방이 만들어지면 번호가 붙게 마련이다. 그런데 연령별 대화방에서도. 취미별 대화방에서도, 그 밖에 내가 돌아다닌 다른 대화방 어느 곳에서도 10번 방은 보이지 않았다. 우연이라고 치기엔 너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천규의 소스파일로 만들어진 실행파일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혹시...저것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키티에게 심각한 독약일지도 모르는 그 실행파일에 마우스를 가져갔다. 만약 이것이 컴퓨터의 하드에 있는 모든 내용을 지워버리는, 아니면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물리적 피해를 주는 바이러스라면 그 파일을 실행시키는 것이 내 손으로 키티를 죽이는 결과를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걱정으로 그만두기엔 호기심이 너무도 강하게 나를 유혹했다, 결국 나는 그 호기심으로 그것을 클릭했고, 잠시 후 나타난 뜻밖의 결과에 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럴 수가....."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10번 방이 내 눈앞에 나타난다. 비록 만든 사람의 아이디도 성명도 그리고 방의 제목도 붙어 있지 않은 이상한 방이었지만 여태까지 없었던 10번 방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다른 정류의 대화방을 들어가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천규의 소스파일로 만들어진 이 실행파일...이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방을 보이도록 만들어주는 열쇠였던 것이다. 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방에 들어가기 위해 마우스를 클릭했다.
"빌어먹을....."
방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묻는 대화창만이 나의눈에 보인다. 답답했다. 저 곳으로 들어가면 금방이라도 천규의 죽음에 대한 비밀이 풀릴 것만 같았는데...이렇게 멍청하게 앉아만 있어야 하다니...
"맞아!"
난 그렇게 소리치며 [MISSION 1]이라는 한글파일을 마우스로 클릭했다. 그러면 그렇지...놀랍게도 천규의 한글파일에는 아까 없었던 글들이 나타나 있었다. 아주 또렷하게 말이다. 그의 일지는 손상된 것이 아니라 [MISSION 2]의 소스파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실행해야만 모든 내용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이트의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이디와 비밀 번호가 필요하다. 무차별 대입법과 같은 결과로 아이디는 'MURDER(살인자)'였고, 비밀 번호는 성경 속에서 악마를 상징하는 666이었다. 무차별 대입법으로 쉽게 뚫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이디가 사전에 명시되어 있는 단어였고, 비밀번호가 똑같이 배열된 간단한 숫자였기 때문이었다. 괜한 짓을 한 것 같군, 일부러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알 수 있었을텐데...자 이제부터 시작하자. 너와 나 누가 더 똑똑한지를...]
난 그것을 읽고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아이디 난에 [MURDER]를 써넣었고, 비밀번호 [666]을 쳤다. 그리고는 엔터를 자신있게 누른다.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천규의 일기장에 있는 글이 나타났다. 그것은 나에게 약간의 쾌감마저 느끼게 한다. 잠시 후 환영의 메시지가 사라지면서 동의를 구하는 말이 나왔다.
[지금부터는 당신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계속적인 진행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Y를 클릭하시고 아니라면 N을 클릭하십시오.]
난 덜컥 겁이 났다. 천규의 마지막 모습이 잠시 스치듯 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들어가지마. 기현아...들어가지마. 너도 죽어, 천규처럼 너도 죽게 된다고...기현아. 들어가지마."
환청이었을까? 누군가 나를 말리는 것 같은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무서웠지만 나의 손이 저절로 마우스를 향한다. 내 머리 속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천규의 죽음에 대한 강한 호기심...그 호기심이 공포를 이겨내고 있는 것이다.
알고 싶었다. 천규가 본 것이 무엇인지...그리고 천규의 죽음의 비밀을.....
떨리는 손을 마우스로 가져가 Y를 누르자, 갑자기 인터넷 브라우저가 작동을 하면서 검정색 밬탕에 시뻘건 글씨로 [MURDER] 라는 메인 타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밑으로 경고문과 서브 메뉴가 보인다.
[이 사이트를 접속하는 자여...공포심을 이겨낸 그대의 호기심에 감탄의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지나친 호기심은 당신에게 커다란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것을 각오한 마음가짐이라면 난 지금부터 당신의 그러한 호기심을 풀어주려고 한다. 가장 정확하고 확실한 방법에 의해서...하지만...명심하라. 호기심을 풀기 위한 대가가 있다는 것을...어쩌면 그대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는 위험한 대가가 있다는 말이다.
해커 고유명: MURDER, 해커 고유번호: 666}
끔찍하고도 음산한 느낌이 드는 경고문....
'[해커 고유명: MURDER, 해커 고유번호: 666]...이것이 천규를 죽인 그 미치광이의 정체인가?
난 경고문 밑에 다른 사이트와 연결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단축키를 바라보았다. 그 단축키에는 이런 제목이 붙어 있다.
[피살자들의 미스테리적 죽음의 원인]
난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그것을 마우스로 클릭했다. 사이트가 바뀌면서...잠시 후, 수많은 서브메뉴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럴 수가......"
난 내 눈앞에 펼쳐지는 서브메뉴의 제목인 사람들의 이름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케네디 대통령에서 제임스 딘, 마릴린 멀로, 게다가 박정희 대통령까지...여태껏 죽음의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모든 이름들이 나타나 있다. 이것이 만약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여 만든 것이라면...천규는 실로 세계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는 정보를 발견한 것이 되는 것이다. 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읽어가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놀라움 속에서 서브 메뉴의 맨 마지막까지 읽어 내려갔을 때. 난 읽기가 어려운 이상한 영어 이름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CHUN GYU]
'이게 뭐지? 천...기우? 천기우?'
난 영어를 한국식 발음으로 따라하다가 너무도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천규.......!
그렇다. 그 이상한 영어 문자는 바로 내 친구, 천규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의 이름이 이 사이트에 있다니..천규의 죽음에 대한 글이 있다니...그렇다면 지금 내가 이것을 열면 천규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알 수가 있다는 말인가? 나의 머리 속에 공포감과 호기심이 서로 교차하면서 나도 모르게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명심하라. 호기심을 풀기 위한 대가가 있다는 것을.....]
자꾸만 그 경고문이 생각난다. 그러나 난 알고 싶었다. 알아야만 했다. 왜 천규가 죽었는지를...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를....
난 마음을 가다듬고 천규의 이름을 마우스로 클릭했다. 화면이 바뀌면서 흐릿하세 무언가 배경화면이 뜨기 시작한다. 배경화면에 점점 더 뚜렷해지도 완전한 형상을 갖추었을 때, 난 앉아 있던 의자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주저앉고 말았다. 나의 입으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으아아아아!"
난 공포감으로 한동안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고, 눈을 감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너무도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쁜 새끼. 죽일놈...빌어먹을 자식!!!"
난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르는 욕설을 퍼부었다. 나의 컴퓨터에 나타난 그 사진은 바로 천규의 얼굴이었다. 그의 집에서 끔직하게 죽어있던 그 악마와도 같은 천규의 얼굴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시뻘건 눈이 모니터를 통해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때의 공포가 다시 한번 날 감싼다. 견딜 수가 없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컴퓨터를 꺼버리고 싶었지만 내 머리 속 호기심은그런 나의 행동을 막아버린다. 그리고 억지로 얼굴을 들어 모니터 속 천규의 얼굴을 바라보게 했다. 잠시 후, 천규의 끔찍한 얼굴을 배경으로 갑자기 일대일 대화창이 떴다. 그곳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당신은 천규님의 죽음을 알고 싶습니까?]
[만약 그것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시겠습니까?]
[지금부터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당신에게 천규님의 죽음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동의하시면 Y를 누르십시오]
공포감으로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데...나의 손이 멋대로 컴퓨터의 자판으로 올라가며 Y를 누르고야 만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공포는 그것을 막으려 했지만, 나의 호기심은 결국 Y 버튼을 눌러버리고 만 것이다.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당신은 천규님의 죽음에 대한 이유를 하나하나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럼 행운이 있기를....]
일대일 대화창이 사라지고 통신의 접속이 저절로 해지되었다.
나의 등은 온통 식은땀으로 젖고, 몸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도대체...도대체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만 거지?'
난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일어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천규의 시뻘건 눈이 모니터에서 아직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4.
지금 난 캠퍼스 벤치에 앉아 멍하니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다. 정신나간 사람처럼 그렇게 몇 시간 동안이나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살아있는지 조차 알 수가 없다. 시험 때문에 학교에 오기는 했지만, 거의 백지를 내다시피했다. 이름을 쓰는 것마저도 잊어버려서, 시험지를 걷어간 조교가 나를 더욱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왜 이렇게 힘이든지 모르겠다. 몸을 주체할 수가 없다. 머리 속에는 온통 날 바라보는 천규의 눈과 그 괴상한 사이트 생각뿐이었다.
괴로웠다. 견디기 힘들었다. 그렇게 힘들어하고있는 나의 귓가에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기현아......"
난 최면에 걸린 듯한 모습으로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분명 어디서 본 얼굴인데...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보았다
'지애.....?'
지애였다. 힘이들면 들수록 더욱 더 못 견디게 보고 싶었던 그녀...지애는 나의 옆으로 다가와 앉으며 묻는다.
"괜찮은 거니? 어디 아프기라도 한거야?"
그녀는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애가 날 걱정해 주는구나, 날...행복해야 하는데, 지애가 날 걱정해 주는 게 행복해야 하는데.....'
언제나 그녀가 천규 대신 나를 걱정해 주길 바랬던 나의 작은 소망...지금 그녀에게서 그렇게 바라돈 관심을 받고 있는데 전혀 행복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날 슬프게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더욱 힘들어질 뿐이다.
"얼굴이 창백해. 많이 힘드니?"
난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냥 입만 조금씩 벙긋거릴 뿐이다. 이런 나의 모습에 그녀는 입을 손으로 가리며 억지로 눈물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겨우 슬픔을 진정 시켰는지 입에서 손을 떼고는 나에게 말했다.
"많이 힘들거야. 천규와는 누구보다도 친했을 테니까. 너무 안돼 보여 너의 지금 모습...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
그녀가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그녀 자신인데. 지금 가장 힘든 사람은 내가아니라 지애, 그녀인데...그녀가 날 위로하고 있다.
"이젠...그만 힘들어 해. 천규도 그걸 바랄거야. 그렇지 기현아?"
난 겨우 손을 들어 그녀의 부드러운 뺨을 어루만졌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를 위로하려는 나의 마음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겠지. 그녀는 나의 이런 행동에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나의 손을 적신다.
"우....울지마.울지마...지애야. 넌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까 울지 말라고...."
그녀를 위로한다고 꺼낸 말이 고작 이런 것뿐이라니...말하기가 힘들었다. 지애는 겨우 울음을 그치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슬퍼하던 그녀의 표정이 걱정스러움으로 바뀌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나를...?'
지애는 나의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기현아...괜찮은 거니? 정말 괜찮은 거냐고!"
지애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따. 뭐가 괜찮다는 거지? 지애는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급하게 뛰어가버렸다.
'왜 그래? 지애야..어딜 가는 거야?'
난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갑자기빙 도는 느낌이 들면서 나의 눈에 시퍼런 하늘이 보였다. 아...하늘이 참 높다. 하늘이 높아.....너무 높아서 이렇게 어지러운 것인가? 이렇게 보니까 저 하늘 속으로 떨어져버릴 것만 같네....마치 내가 서 있는 땅이 하늘이고 저기 저 하늘은 바다 같아. 어지러워. 어지럽다고.....
"기현아!"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겨우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서클 회원 중 가장 덩치가 좋은 강석 선배가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우리 [HACKING FANATIC]의 회장이다. 큰 덩치와 터프한 생김새와는 달리 무척 자상하고 부드러운 남자......
인사해야 하는데...몸이 안 움직여. 내가 누워 있는 건가? 지금.....? 그런데 강석 선배는 왜 그렇게 놀란 눈으로 날 보면서 뛰어오는 거야?
그가 나에게로 다가와 허둥거리며 나를 일으켰다
왜 그래? 왜 그러는 거냐고?
그의 뒤로 지애의 모습도 보였다. 그녀는 내가 강석 선배의 등에 업히는 것을 도와주면서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들이 왜 이러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디론가 나를 업고 뛰어가는 강석선배....정문 앞 커다란 거울을 지나칠 때 선배의 등에 업힌 나의 모습이 보인다. 얼굴이 새하얗다.
'누구지? 저기 업혀 있는 사람...누구지? 얼굴이 하얘. 마치 죽은 사람처럼...그나저나 강석 선배는 왜 날 업고 뛰는 거야? 날 내려줘. 선배..날 내려달라고...!'
난 점점 정신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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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눈을 뜬 곳은 약 냄새가 진동하는 곳이었다. 누군가 내 옆에서 손을 꼭 잡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흐릿한 시야가 점점 또렷해진다.
"이제 좀 정신이 드니?"
지애의 목소리....
내가 누워 있는 곳의 사물들이 조금씩 확실해지고 그곳이 병원이라는 것까지 알았을 정도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지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내 옆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상스럽게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낀다.
"충격으로 인한 쇼크상태와 수면 부족, 그리고 과로에 의한 탈진상태였대...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했어."
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지애가 나를 막는다. 내가 이렇게 약해진 것일까? 지애의 가녀린 손 하나에도 나의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직 일어나면 안돼.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어."
내 모습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은 지애였는데...내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애를 슬프게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 병실로 들어왔고 지애는 그 사람을 보며 일어나 인사했다. 형이었다. 형은 나를 보며 피식 웃고는 말했다.
"이제 좀 살 만하냐?"
"형....."
"너 떄문에 아주 속상해 죽겠다. 회사 일도 제대로 못하고 24살이나 쳐 먹은 동생 뒷바라지나해야 한다니....."
"미안해."
"미안하면 빨리 정신차리고일어나란 말이야."
퉁명스럽게 말하긴 했지만 나를 무척 걱정하고 있는 표정이다. 형은 언제나 그랬다. 겉으론 무뚝뚝해 보여도 속마음은 무척이나 따뜻한 사람이다. 형이 지애를 보며 말한다.
"미안해요. 내가 할 일을 그쪽에 떠맡긴 것 같아서..."
"괜찮아요."
"기현이가 좀 약해요. 저래서 장가나 갈 수 있을런지...지애씨는 저런 남자 만나서 결혼하지 말아요. 나중에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닐테니까."
형은 그렇게 말하고 그녀를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지애도 약간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이전보다는 많이 안심하고 있는 듯했다.
**********************************
형이 퇴원 수속을 하고 있는 동안 나는 형의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에 입원을 한 지 일주일 만에 그 지겨웠던 병원 침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병원에 있는 동안 난 그렇게 괴롭지만은 않아다. 바로 지애 때문에...지애는 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를 찾아와 주었다. 그녀가 깎아주는 과일을 먹었고. 그녀의 부축을 받아 병원 안에 있는 쉼터에서 바람을 쐬었고, 그녀의 아름다운 음성을 통해서 학교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치 꿈만 같았다. 일정 시간 누워 있어야만 하는 병원의 규칙만 없다면 이렇게 평생동안 그녀의 간호를 받으며 살고 싶다는 멍청한 생각까지 할 정도로 그 일주일은 나에게 행복,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있을 때, 차의 백미러로 지애가 병원을 향해 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란제리 스타일의 검정색 원피스를 입고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손에는 꽃을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천사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난 그녀가 치마를 입은 모습을 오늘 처음 본다. 부드럽게 쭉 뻗은 그녀의 다리 선이 종아리를 지나 발목 부분에서 얇아진다. 왜 여태껏 치마를 입지 않았던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다리는 예뻤다. 난 차에서 내려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지애야!"
지애는 내가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로 뛰어왔다. 요 몇 일 동안 그녀에게서 지금처럼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 미소를 보는 것이 오늘이 처음인 것 같았더, 그녀는 내 앞으로 다가와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태원 축하해. 이젠 그런 식으로 나에게 관심 끌지마. 또 그랬다간 모른체해 버릴 테니까."
생긋 웃으며 꽃다발을 건네는 그녀의 모습이 눈부신 햇살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같다. 난 그녀에게서 꽃다발을 받아 들고는 웃음 지었다. 그때 퇴원 수속을 마친 형이 병원 밖으로 나오면 지애에게 말한다.
"오...제수씨가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 기현이를 위해 몸소 행차하셨군요."
난 형의 말에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형...애인 아니라니깐..."
"임마...그렇게 내숭 떨지 않아도 알 사람은 다 알아. 다들 예쁜 애인 둬서 부럽다고 난리인데너 혼자 아니라면 말하면 누가 믿어주냐? 그리고 아프다고 징징대다가도 제주씨 온다고 말하면 벌떡 일어나 세수부터 했으면서 아닌 척 하긴..."
"형!"
내가 당황하며 형의 입을 막자 지애가 웃음 지었다. 난 지애의 웃는 모습이 좋았다. 그녀의 하얀 치아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다. 형은 지애의 미소에 행복해하는 나를 보며 키득거리더니 차의 뒷문을 열고 말했다.
"자...타시죠. 오늘은 제가 아주 멋진 코스로 두 분을 모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형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묻자 형은 나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한다.
"임마...오늘 지애 씨가 저렇게 예쁘게 차려 입고 온 거 보면 모르겠냐? 오늘 니 퇴원 축하해주러 온 거라고...축하 파티겸해서 내가 근사한 데로 모셔주기로 했지. 그렇게 둔해서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래? 그런 사오정 같은 센스로는 내일 당장 지애씨를 다른 사람에게 뺏기고말 거다. 쯧쯧........"
형의 말에 난 얼굴이 달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와 나를 연인으로 취급하는 것이 좋았지만 지애가 혹 부담스러워하지나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난 지애를 바라보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표정에는 내가 우려하는 그런 마음이 나타나 있지는 않았다.
우리는 형의 차를 타고 한강의 전결이 보이는 호텔 카페로 향했다. 형은 그 카페의 창문 쪽 자리를 미리 예약해 놓았었다. 그 곳에서 우리는 정말로 멋진 저녁 시간을 가졌다. 지애도 무척 즐거워 보였고, 나 역시 지금 이 시간의 행복으로 그 동안의 공포와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형과 나는 지애를 데려다주고 나서 우리들의 집으로 향했다. 난 피곤했는지 잠깐 잠이 들었다가 사당동에 가까워졌을 무렵 깨어났다.
"깼어?"
"...응. 집에 다 온 건가?"
"조금만 더 가면 돼, 오늘 좀 피곤했겠구나."
"아니...너무 즐거웠어. 형 고마워."
형은 피식 웃으며 나를 보았다.
"짜식...그렇게 좋으냐?"
"뭐가?"
형은 더 이상 묻지 않고 혼자서 계속 웃고 있었다.
'아.....지애를 뜻하는 말이었구나......'
집에 가까워지고있을 때. 나의 눈에 커다란 광고용 전광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난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잠시후 나타난 문구에 깜짝 놀랐다.
[서울 때아닌 홍수로 온 도시가 물바다...480명이 죽고 103명이 행방불명...27일 밤, 10시 30분, 자세한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채널 14번을 고정하십시오.]
난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도로를 바라보았다. 홍수는 커녕 비가 온 흔적조차 없다. 난 운전을 하고 있는 형에게 물었다.
"형...오늘 27일 맞아?"
"응...오늘 27일이야."
"서울에 홍수 난 데 있어?"
형은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아직도 아프냐? 그런 헛소리를 다하고......."
"그럼 저기 광고판에....어......"
어느새 광고용 전광판에는 다른 내용의 선전 문구가 나오고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아닌데...분명히 봤는데......'
천규가 죽기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때도 광고용 전광판이 말도 안되는 문구로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었다. 누군가 실수를 했겠거니 하며 넘겨 버릴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그러기엔 너무도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쳐지나간다.
'그..그때도 저런 이상한 광고를 봤는데...왜 이렇게 기분이 오싹해지는 걸까?'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천규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다시금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내리지 않고 뭐해?"
형의 말에 난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집 앞이었다. 형은 잠시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더니 이마에 손을 짚었다.
"오늘 태원하자마자 너무 무리한 건가? 빨리 들어가서 쉬어야겠다. 또 다시 앞으로 내가 곤란해지니까!"
형은 그렇게 말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 그래...피곤해서 조그만 일에도 신경이 쓰이는 걸 거야...'
난 그렇게생각하며 차에서 내린 뒤 형을 도와 트렁크에서 짐을 꺼냈다. 그리고 집을 향해 뒤돌아서는 순간...들고 있던 가방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밀려드는 공포감으로 숨이 가빠지고 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분명 우리 집인데...지금 난 천규의 집 앞에서 느꼈던 그 음산한 기운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언제나 나에게 휴식을 제공하던 우리집이 지금은 마치 악마와도 같은 모습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다. 창문들이 징그러운 눈처럼 보이고 이층과 연결된 층계는 드러난 이빨처럼 느껴진다. 왜 이런 공포감이 우리 집에서 느껴지는 거지? 왜?
"기현아. 왜 그래? 다시 아픈 거야?"
"아...아니야."
형은 내가 떨어뜨린 가방을 들고 집의 대문을 열쇠로 열며 말했다.
"안되겠다. 기현이 너 빨리 들어가서 쉬어야겠어."
끼이익!
문을 열 때 나는 쉿소리가 몹시도 기분 나쁘게 들렸다. 형은 돌아서서 나를 바라 보며 빨리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빨리 들어와."
난 재촉하는 형을 따라 억지로 집안으로 들어갔다. 한기가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린다.
'도대체...왜...왜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일까? 왜...'
자꾸만 두려워졌다. 내 방이 있는 이층으로 올라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 공포감은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형은 거실에 가방을 내려놓고 내 방 쪽으로 가서 문 손잡이를 잡았다.
"안 돼. 형...열지 말라고..."
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형이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난 몸을 떨면서 형이 잡은 내 방의 문손잡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문을 열면 천규가 시뻘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기현아......"
난 긴장으로 가빠진 숨을 몰아쉬며 형을 바라보았다. 형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나에게 다가와 내 어깨를 잡으며 묻는다.
"괜찮은 거니? 기현아......"
형의 목소리가 나를 악몽에서 깨어나게 했다. 난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 ....으응...그래. 미안해 형...내가 잠시......."
형은 나를 데리고 방 쪽으로 와서 문을 열었다.
천규는 없었다. 내가...너무 예민해 있는 건가? 형은 나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면서 말한다.
"푹 자.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너무 무리했어."
그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았다.
난 눈을 뜬 채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누군가 지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나의 눈에 책상 위에 모니터가 보인다.
소름이 끼쳤다. 키티가 아니다. 언제나 나를 보면서 '어서 오세요'라고 반기던 키티가 아니다. 나의 키티는 저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지금은 저 흑빛의 모니터가 나를 뚫러지게 쳐다보며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왔니? 그럼 시작해야지...기다렸단 말이야. 자...시작해 보자고..."
흉측한 악마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나의 귀를 맴돌았다. 나에게서 키티를 빼앗아간 저 악마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도 모르게 침대에서 일어나 컴퓨터가 있는 책상으로 걸어가고 있다.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5.
'알고 싶어...알고 싶다고...'
호기심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만다. 어느새 나의 손이 컴퓨터의 부팅 스위치를 누르고 있었다
삐..........
부팅 음과 함께 컴퓨터의 하드가 돌며 초기프로그램들을 읽어 들이고 있다. 잠시 후, 시작 음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컴퓨터가 눈을 뜬다. 바탕화면에 자리잡고 있는 지애의 사진이 여전히 나를 보며 웃고 있지만, 더 이상 예전에 나를 반겨주던 키티가 아니었다. 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나의 컴퓨터인데....
난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여 통신에 접속했고, 천규의 소스에 의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실행시킨 뒤, 전에 보았던 'MUEDER' 라는 사이트로 접속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지금 시간 오후 10시 10분...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10번이라는 번호를 가진 제목 없는 방이 보인다. 마음을 가다듬ㄷ고 그것을 클릭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묻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런 메세지도 나오지 않고, 설명도 없었다. 오직 대화 창 하나만이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난 그 대화방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가 보았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지? 왜 반응이 없지? 분명 10번 방이 맞는데......'
하지만 내가 어리둥절해 있던 것도 잠시 ... 갑자기 일대일 대화창이 모니터에 떴다.
[이 방에는 아무런 자료도 없습니다. 메세지를 준수하십시오.]
메시지라고.....? 무슨 메시지...이봐..무슨 메시지를 말하는 거야?
[도대체 무슨 메시지를 보냈다는 거지?]
난 빠르게 키보드의 자판을 쳐나가면서 물었다.
[이 방에는 아무런 자료도 없습니다. 메시지를 준수하십시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이봐. 넌 누구지?]
[이 방에는 아무런 자료도 없습니다. 메시지를 준수하십시오.]
[넌...누구냐니까. 이 빌어먹을 자식아! 네가 천규를 죽였지.]
갑자기 일대일 대화창이 사라지며 내가 들어간 대화방도 없어져 버렸다. 난 멍하니 컴퓨터를 바라보았다.
'이런 제기랄...이렇게 되면 찾을 수가 없다고......'
방이 바뀐 것이다. 난감했다. 통신의 대화방은 사람들이 만들었다가 지워버리는 것을 반복하기 때문에 방 번호가 순차적으로 붙기는 하지만 연결되지 않고 띄엄띄엄 붙어 있게 마련이다.
'메시지라...메시지를 준수하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이지? 난 메시지를 받은 적이 없다고...'
잠시 후, 머리 속에 분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서울 때아닌 홍수로 온 도시가 물바다...480명이 죽고 103명이 행방불명...27일 밤, 10시 30분, 자세한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채널 14번을 고정하십시오.]
집으로 오기 전 광고 전광판에 나타났던 그 이상한 문구...난 시계를 보았다. 10시 25분...난 마른침을 삼키고는 통신의 대화방 중 아무거나 클릭해 들어가 보았다. 많은 번호의 방들 중 14번방이 보였다.
[여자가 필요해.(남 강퇴! 미시도 환영)]
통신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목의 대화방...
아직 'MURDER'라는 해커명을 가진 그 미치광이가 접속을 하지 않은 거겠지. 난 그것에 시선을 고정하고 30분이 되기를 기다렸다. 잠시후, 분침이 30분을 가리키자 그 방이 사라지면서 거짓말처럼 제목 없는 방이 나타난다. 만든이의 아이디도, 성명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14번이라는 방 번호만 주어져 있을 뿐이다. 이제부터 다른 사람들의 컴퓨터에는 이 이상한 방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천규의 소스파일을 실행시킨 나의 컴퓨터에만 보일 것이다.
'그렇구나...광고 전광판에 나타난 그 이상한 문구들은 바로 접속하는 날짜와 들어갈 방의 번호를 알리는 글이었어.'
광고용 전용판에 나타난 말도 안되는 그 엉뚱한 문구는 바로 천규를 죽인 그 빌어먹을 해커가 보낸 메시지 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내가 광고용 전광판에 나타난 문구를 신촌에서 보았을 때, 골목 어귀에서 나를 눈여겨보았던 사람이 내 생각대로 천규였단 말인가.......?
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것을 클릭했다. 저번처럼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묻는 창이 뜬다.
[MURDER], [666]
난 순식간에 그것들을 쳐 넣고는 엔터를 눌렀다.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환영의 메시지와 함게 인터넷 브라우저가 작동하면서 빨간 글씨로 쓰여진 'MURDER'라는 제목의 인터넷 사이트가 나타났다. 제목 아래 버튼에 쓰여 있는 문구가 나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한다.
[피살자들의 미스테리적 죽음의 원인]
그것을 클릭하자 저번처럼 나타나는 서브메뉴들...나의 눈에 똑똑히 보인다. [CHUN GYU]라고 쓰여 있는 소제목이...
이제 그버튼을 누르기만 한다면 난 천규를 죽인 그 놈과 접속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누르기 전에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분명 이 사이트를 열면 두 번 다시 보기 싫은 천규의 끔찍한 얼굴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난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각오를 단단히 하고 나서 천천히 마우스를 그 위로 가져가 클릭했다. 무언가 흐릿하게 배경화면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젠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제길...놀라지 않을 거야. 절대로 놀라지 않을 거라고..사진일 뿐이야. 사진...'
난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 하지만 그 사진이 또렷해졌을 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니터에서 시선을 뗄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젠장할...!"
욕설이 터져 나왔다. 보고 싶지 않았다. 견딜 수가 없었다. 공포감으로 마우스를 잡고 있던 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하지만 봐야 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모니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천규의 시뻘건 눈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마치 무언가를 알리려는 것처럼...
잠시 후 일대일 대화창이 뜨고 글자들이 빠른 속도로 올라오고 있었다.
[이 대화방에선 단 10개의 질문만이 허용됩니다. 10개의 질문과 답변이 모두 끝나면, 이 사이트는 자동적으로 종료됨을 알려드립니다. 그럼 지금부터 당신의 질문을 받겠습니다.]
커서가 반짝거리며 나의 타이핑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손이 떨려서 글을 치기가 힘들었다.
'진정하자. 진정해.'
난 마음을 가다듬고 첫번 째 질문을 써나갔다.
[넌 누구지?]
[저에 대한 질문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는 오직 강천규님의 죽음을 밝혀내는 사이트일 뿐입니다. 9개의 질문이 남았습니다.]
[너에 대한 질문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질문의 정의가 모호합니다. 8개의 질문이 남았습니다.]
[8개라니..넌 대답도 하지 않았잖아. 도대체 무슨 뜻이야?]
[10개의 질문이란 당신의 텍스트 문자 끝에 '?'표를 붙였을 때 간주하는 것입니다. 저의 대답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10개의 물음표만을 붙일 수 있는 것이 허락되는 것입니다. '?'를 붙이지 않거나 질문의 정의가 모호한 경우 당신의 질문은 무시된다는 것을 주의하십시오. 7개의 질문이 남았습니다.]
'이...이런........'
난 흥분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머리 속으로 질문을 생각했다. 잠시후 눈을 뜨고 빠르게 자판을 두드렸다.
[천규는 살해당한 것인가?]
[처음엔 아니었습니다. 6개의 질문이 남았습니다.]
[빌어먹을 그 따위 대답이 어디 있어?]
[질문의 정의가 모호합니다. 5개의 질문이 남았습니다.]
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새끼...나를 놀리고 있어.'
난 흥분을 겨우 가라앉히고는 다음 질문을 했다.
[천규는 무엇을 알려고 했던 것인가?]
[시기의 정의가 모호합니다. 4개의 질문이 남았습니다.]
[알았다고...빌어먹을...그래...다시 묻자. 천규가 이 사이트에 들어왔을 때 무엇을 알려고 한 것이지?]
[의문사한 김이슬님에 대한 진실이었습니다. 3개의 질문이 남았습니다.]
'김이슬?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김이슬?'
[천규는 김이슬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었는가?]
[ 그렇습니다. 2개의 질문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천규가 죽은 것인가?]
[시기에 대한 정의가 모호합니다. 1개의 질문이 남았습니다.]
[제길...그렇다면 천규는 언제 죽은 것인가?]
아차...난 또 쓸데없는 질문으로 마지막 남은 기회를 날려 버렸다. 시기에 대한 정의가 모호하다는 대답에 나도 모르게 언제 죽은 것인가라는 허망한 질문을 쓰고 만 것이다.
[잠깐 내 질문은....]
[정확히 11월 16일 새벽 0시 30분입니다. 모든 질문이 종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잠깐...잠깐 기다려.....!]
대화창이 사라져버리고 내가 종료버튼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통신의 접속이 해지되었다. 그 징그러웠던 배경화면도 사라져버렸다. 나의 컴퓨터는 끔찍한 악마의 모습에서 다시금 지애의 환한 미소를 배경으로가득 담고 있는 키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허무감이 밀려온다. 결국 이 미치광이 해커의 정체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아낸 것이 없다. 그것뿐 아니라 천규의 죽음에 대한 비밀도 풀지 못했다. 너무 긴장을 한 탓이었으리라...난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한숨과 함께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입에 문 담배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16일 새벽 0시 30분?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그의 죽음을 목격한 것이 분명 14일 새벽이었는데...16일날 죽었다니...도대체 무슨 말이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를 놀리는 건가? 그 빌어먹을 자식이 지금 나를 가지고 놀고 있는 거냐고.....!
갑자기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난 책상위에 놓여 있는 키보드를 들어 땅바닥에 집어 던졌다.
"도대체가 말이 안 되는 거 투성이야. 내가 미친 것일까? 내가 미친거냐고...으아아아아!!!!"
난 소리를 질렀다. 형이 나의 비명소리에 놀란 것인지 내 방문을 열고 뛰어들어왔다.
"기현아...왜 그래? 기현아...!"
난 땅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쥐었다. 울고 싶었다. 하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나의 모든 감정은 오직 공포라는 것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았다. 천규를 잃은 슬픔은 공포감 때문에 사라져 버린지 오래다. 내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오로지 공포...공포 뿐이었다.
6.
나도 모르게 또 잠이 들었나 보다. 어슴푸레 눈을 뜬 나의 시야에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왜 저렇게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보이는 것이지?'
지하절 안의 사람들의 표정은 나에게 몹시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신문을 보고 있는 사람도,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도...모두가 마치 죽은 사람들처럼 핏기 하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정말로 이상했다. 아마도 나의 심리적 상태가 너무도 우울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감정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이되어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난 그들의 표정이 어떻게 보이든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나에게 일어난 상황만 해도 너무 복잡해서 머리가 부서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단지 밀려오는 피곤으로 더 잠을 자고 싶을 뿐이다. 내가 내릴 사당 역에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기에 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러 했다. 그때, 안내 방송이 들린다.
"다음 역은 사당, 사당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뭐야? 사당 역이었잖아...쳇.'
난 거의 신경질적으로 눈을 떴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내리기 위해 서 있는 문 쪽으로 갔다. 더 자고 싶었는데...난 뻐근한 목을 두드리며 문이 열리길 기다리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사당역은 오른쪽에서 내리는데...왜 다들 왼쪽 문에 서 있는 거야?'
난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혼자서 오른쪽 문으로 갔다. 여전히 사람들은 왼쪽 문에 서서 그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열차가 역에 도착했고,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내가 서 있는 오른쪽 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있는 왼쪽 문이 열리고 있었다. 난 당황하며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내리면 안 돼요. 사당역은 오른쪽 문이라고요. 이것 봐요, 내리면 안된다니까요."
사람들은 내 소리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열려 있는 왼쪽 문으로 내리고 있다.
"내리지 말아요. 위험해요."
나 혼자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무도 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난 이해할 수 없는 듯한 이 상황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말한다.
"내가 잘못 안 거야. 사당 역은 왼쪽이야!"
소름끼치는 목소리...난 돌아볼 염두가 나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 내가 두 번 다시 듣기 싫었던 죽기 직전 천규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온몸이 굳어버린 듯이 서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에 귀에 다시금 그 금찍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내가 죽어서 좋지? 그럴거야. 지애를 좋아하고 있었으니까...다른 놈들도 너랑 같은 생각이겠지. 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난 네가 제일 가증스러워...난 너의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난 그래도 너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데...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것이지?"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다고!"
소리를 지르며 돌아섰을 때, 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천규가...천규가 지하철의 한쪽 구석에서, 의자에 앉은 채로 날 보고 있다. 시뻘건 눈. 튀어나온 광대뼈, 빠져서 벌어진 턱...그리고 뒤틀린 팔과 반대로 꺾인 다리의 관절...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엉금엉금 뒷걸음질쳐서 전철 밖으로 간신히 빠져 나왔다.
일어설 힘이 하나도 없었다. 난 기다시피 앞으로 나가면서 출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사...사람 살려! 사람 살려요!"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무시한 채로 걸어가고 있다. 난 손을 허우적거리며 계속해서 비명을 질렀고, 잠시 후 누군가가 나의 손을 잡는 것을 느꼈다. 난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으아아악!!!"
나의 손을 잡아 준 사람은 바로 천규였다. 턱이 빠져 너덜거리는 천규의 얼굴...그가 시뻘건 눈으로 날 쳐다보며 웃고 있다. 난 그의 손을 뿌리치며 뒤돌아보았다. 끔찍한 천규의 얼굴을 한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노려보며 지나간다. 난 견딜 수 없는 공포감으로 있는 힘을 다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난 벌떡 일어났다. 식은땀이 비오듯 한다. 난 호흡 곤란이 올 정도로 거칠게 숨을 몰아 쉬며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하철 역도 아니었고. 천규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 기현이 형...괜찮아?"
누군가 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난 흠칫 놀라며 뒤돌아보았다. 편입할 때 수강신청을 도와주었던 우리 과의 과대표가 날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꿈이었던가?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생생했다. 수업을 하던 교수가 나에게로 다가오며 말한다.
"괜찮은가? 안 되겠군. 어디 가서 휴식이라도 취하게..."
교수는 식은땀으로 온통 젖어 있는 나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는 그렇게 말했다. 난 과대표의 부축을 받으며 강의실 밖으로 나왔다. 그는 선선한 바람이 부는 현관 앞, 나무 그늘이 있는 곳으로 날 데려갔고. 자판기에서 캔 콜라를 뽑아 내게 주었다.
"괜찮겠어?"
난 그가 건네는 차가운 캠 콜라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이젠 괜찮으니까 수업 들으러 가. 미안해. 나 때문에....."
"정말 괜찮겠어?"
난 힘없이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는 힘내라는 듯이 나의 손을 한번 꽉 잡아주고는 강의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이 멀어져간다. 그가 준 콜라를 목 뒤로 가져가자 차가운 캔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몇 일 동안을 잠을 설펴서인지 몸이 너무도 힘들었다. 가을 바람이 억새 잎을 흔들어 내는 특이한 소리에 난 잠시 주위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나의 지금 상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듯 캠퍼스의 가울 풍경은 평온해 보였다. 한숨이 나왔다. 지금 나의 모습이 한심스러운 것이다. 천규의 망상에 사로 잡혀 자꾸만 이상해지는 내 자신의 행동에 화가 났다. 괴로운 마음을 어느정도 진정시킨 후,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서클실을 향해 걸어갔다.
서클실이 있는 학생회관 건물로 온 나는 때마침 나오고 있는 [HACKING FANATIC]의 회장인 강석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보며 반가운 표정으로 말한다.
"와...퇴원했구나. 기현아...걱정 많이 했어. 이제 좀 괜찮은거니?"
내가 쓰러졌을 떄, 나를 업고 병원까지 뛰어가 주었던 그 선배에게 난 아직까지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다. 난 거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말했다.
"저번에 고마웠어요."
"임마. 그런 거 가지고 고맙다고 하는 거 아니야."
그가 나의 어깨를 툭 치며 웃음 지어 보인다.
"서클실 가는 중이니?"
"예...형은 어디 가세요?"
"잠깐 친구에게 뭐 좀 전해 주려고...참 서클실에 아무도 없으니까 네가 좀...지키고 있어라."
그는 나에게 서클실의 열쇠를 쥐어주고는 경상 관 건물을 향해 뛰어갔다. 난 학생회관 건물 내에 있는 서클실로 가서 좌물쇠를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좌물쇠를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허름한 쇼파 위에 드러누었다.
'이렇게 여기 누워 있으면 책상 때문에 가려져서 내가 안 보이거든....! 히히히 그럼 말이야...가끔 가다가 선배들이 하는 후배 욕이라던가. 놀러온 여자친구와의 러브신이라던가, 그 밖의 어마어마한 선배들의 비리를 모두 다 듣고 목격할 수 있게 되지...킥킥킥..너, 선배들이 왜 나한테 쩔쩔매는 줄 알아? 그게 다 이렇게 숨어서 그들의 비밀들을 모두 알아냈기 때문이야. 하하하...정보의 전쟁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게 아니겠어? 해킹? 그거 별거 아니야. 이런 게 바로 해킹의 가장 초보적인 단계라고...남의 얘기 몰래 엿듣는 거...우하하하!'
이 쇼파에 앉아 장난스럽게 말하던 천규의 모습이 생각났다.
난 천규를 좋아했다. 어쩔 땐 동생처럼 날 보살펴 주기까지 했던 그에게서 항상 고마움과 편안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의 장난기 많은 미소를 생각하며 눈을 감는다. 그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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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좀 가만히 내버려둬요!"
갑작스런 큰 소리에 잠에서 깼다. 쇼파에 누워 있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지애인 것을 알고 일어서려 했지만, 다음에 들리는 어떤 남자의 목소리에 그대로 숨을 죽인 채 누워 버렸다.
"이제 그만 좀 잊어버려, 천규는 죽었다고...언제까지 그렇게 정신나간 사람처럼 살거야.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고...산 사람이라도 행복하게 살아야 할 거 아니야."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다.
"내가 힘들어하든 말든 선배가 무슨 상관이예요!"
"지애야, 난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제발 그만 하라고...그러다간 너마저 쓰러져."
"내 걱정하지 말고 현준 선배나 잘 하세요. 그리고 이젠 그만 좀 괴롭혀요. 천규의 일로 힘든 건 나예요. 힘들어하든 말든 그건 내 의지라고요. 내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 알기나 해요? 그러니까 나 좀 그냥 내버려 두라고요."
현준 선배? 한현준 선배?
키가 유난히 큰 한현준이라는 이름을 가진 서클 선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와는 별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친분은 없다. 단지 그가 우리 서클의 선배라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HSCKING FANATIC]의 모든 선배가 천규를 좋아하지만 유독 그 선배만은 천규를 꺼려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천규와 자주 다니는 나에게도 별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곤 했다.
그는 서클실에도 잘 나타나지 않았고, 어쩌다가 천규와 만나기라도 하면 먼저 자리를 피해버리곤 했다. 내가 그 이유를 천규에게 물을 때마다 천규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곤 했다.
지애와 현준 선배는 내가 이곳에 누워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계속해서 말다툼을 했다.
"지애야! 내 마음 알잖아. 난 너를 사랑한다고..네가 힘들면 난 견딜 수가 없어."
"나를 사랑한다고요? 사랑? 선배...사랑이 뭔지나 알아요? 그게 뭔지 알기나 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지애의 음성이 저토록 차갑게 들리는 것은 처음이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을 때 차갑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누군가를 향해 저런 식으로 차갑게 말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그런 소리라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난 나가보겠어요."
"지애야!"
현준의 목소리가 다급해 졌다.
"이 손 놔요. 놓으란 말이예요. 귀찮아 죽겠어. 제발 놓으란 말이야!!"
쫘악!
난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 지애를 때린 것 같았다.
지애를...지애를 때리다니...
"귀찮다고? 지금 귀찮다고 했어? 내...내가 너에게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데...지금 귀찮다고 했냐고...빌어먹을 천규. 그 자식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넌...넌 내 사람이나 다름 없었어. 네가 너에게 얼마나 잘 해주었는데..그런데...귀찮다고? 내가 귀찮다고?
그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심하게 떨리고 있다.
"이젠 더 이상 나도 너에게 당하고만 있지 않겠어. 난 이제 내 거라고....! 네가 싫다면 힘으로라도 널 차지하고 말 거야. 천규도 없는 판에 너를 또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수 없어. 알겠어? 넌 나를 벗어날 수 없다고.....!"
콰당탕!
난 앞의 책상을 걷어차고 쇼파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나의 모습에 지애도 현준도 놀라며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난 이를 악물고 그 선배를 노려보며 다가간다. 주먹을 쥔 나의 손에 분노로 떨리고 있었고, 잔뜩 힘을 주고 있는지라 힘줄이 튀어나와 보였다. 현준은 자신에게로 다가가는 나의 모습을 보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너...넌 기...기현!"
"개....새.....끼...!"
난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가 무얼 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강석 선배가 뛰어 들어와 나를 붙잡았고, 그와 같이 들어오던 다른 선배들도 나를 현준에게서 떼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 것인지 나를 말리는 선배들이 나의 몸부림에 나가 떨어졌다. 뒤에서 나를 잡고 있던 강석 선배가 나의 얼굴을 주먹으로 힘껏 가격하고서야 난 내 정신으로 돌아왔다. 나의 눈앞에 얼굴이 엉망이 된 현준 선배가 보였다. 내 주먹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난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몇 선배들이 나를 보며 한숨을 쉬었고, 강석 선배는 고개를 저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한쪽 구석에 지애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머해. 빨리 현준이 데리고 병원으로 가!"
강석 선배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소리치고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발...제발...정신 좀 차려! 제발..정신 좀 차리라고...!"
난 소파로 가서 앉은 뒤. 발로 차 뒤집힌 철제 책상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강석 선배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친다.
"이젠 제발 모두 정신 좀 차리라고...천규가 이꼴 보면 참 좋아하겠다. 계속 이렇게 나가면 해커 동아리가 뭐가 다 박살이야. 박살......!"
그는 담배연기를 빨아들여 가슴 깊숙이 들어마신 후 한숨과 함께 연기를 내뱉었다. 그리고는 혼잣말하듯 말했다.
"3년 전과 똑같아...제기랄....아직도 그대로야. 아직도...빌어먹을 천규 자식!"
난 그가왜 처뉵를 욕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의 마음이 조금씩 진정돼 가고 있다.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 앉고 주위 상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줄곧 시선을 두고 있던 철제 책상의 밑바닥 부분에 조그맣게 쓰여진 글이 보였다. 아주 조그맣게 쓰여 있었지만, 나의 눈에는 너무도 또렷하게 보였다
천규...그리고 하트모양의 기호 다음에...이슬...난 놀라운 마음으로 한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강석 선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석 선배가 날 본다. 나는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김이슬이 누굽니까....?"
강석 선배가 나의 질문에 입에 문 담배를 떨어뜨렸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그를 향해 다시 한번 소리쳤다.
"김이슬이 누굽니까? 김이슬이 누구냐고요?"
선배는 당황해하며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
"너...이슬이를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아는 거야? 천규한테 들은 거야?"
어제 [MURDER] 사이트에서 천규의 죽음에 대해 묻던 중 알게 된 김이슬이란 이름...그녀는 이곳 [HACKING FANATIC]의 일원이었던 것일까? 이제 조금씩 무언가가 잡혀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7.
난 의자에 앉아 있는 지애에게 말했다.
"지애야. 강석 선배와 할 얘기가 있는데...나가줄 수 있겠니?"
지애는 나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굳어 있는 내 표정을 보고는 말없이 서클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강석 선배는 넘어져 있는 책상을 일으켜 세우고는 그것에 기대어 서서 잠시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슬이는 우리 서클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해커였어. 천규가 우리 서클에 들어오기 전만 해도..벌써 3년전 이야기구나......"
강석 선배는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며 회상에 잠기 듯.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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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좋은 점심!"
강석은 서클실로 들어가며 시원스럽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안에는 무언가를 읽고 있는 현준만이 있을 뿐이다.
"너밖에 없냐? 이슬이 꼬봉!"
강석은 현준의 등을 툭 치면서 피식 웃었다. 현준은 '이슬이 꼬봉'이라는 그의 말에 인상을 찌푸린다. 탄탄하고 근육질인 강석의 체격에 비하여. 키만 멀쑥하게 큰 현준은 서클실 사람들에게 '이슬이 꼬봉'이라고 불린다. 성격이 별로 사교적이지 못하고 까다롭게 굴었지만 이슬이에게만은 달랐다. 언제나 그녀의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며 그녀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했다. 현준의 그런 행동들은 가끔 다른 이가 미간을 찌푸릴 정도로 지나칠 떄도 있었다. 그래서 '이슬이 꼬봉'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다.
이슬과 강석. 그리고 현준...이 세명은 같은 나이. 같은 학년, 같은 과의 동기다.
"뭐 보고 있냐?"
"학사장교 모집요강!"
"학사장교? 아...그렇지 군대 가야 하는 구나. 그런데 학사장교로 가게?"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임마. 학교까지 다니면서 충성 외쳐야겠냐? 나처럼 그냥 기다리다가 보병으로 끌려가자고......"
현준은 여전히 짜증스러게 강석을 보며 말했다.
"내가 왜 학사장교 지원하려는지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야?"
"아...그렇지 군대에 가면 이슬이를 못 보는구나. 음...역시 넌 꼬봉 기질을 타고난 것 같아."
"자꾸 꼬봉 꼬봉 할래?"
강석은 킥킥 거리며 웃고는 모집요강을 열심히 읽고 있는 현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강석은 현준이 이슬에게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그가 안 돼 보이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슬이는 현준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항상 친구 이상의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다. 이슬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현준의 그런 애절한 마음도 어느 정도 위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말없이 현준을 지켜보던 강석은 누군가 서클실로 들어오자 시선을 돌렸다. 소매에 손을 가릴 정도로 커다란 남방을 걸쳐 입은 여인이 보인다.
김이슬.........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 화장슬 전혀 하지 않은 순수하고도 깨끗한 피부, 세상 풍경을 모두 담을 수도 있을 것 같은 맑은 눈빛...그녀는 자신의 이름처럼 정말로 이슬같은 여인이었다.
"강석아...뭘 보고만 있어 좀 도와주지 않고 빨리,.."
그녀는 몇 권의 책을 무거운 듯이 들고 있었다. 강석은 그녀에게서 책을 받아들려는 순간, 어느새 현준이 책으로부터 그녀의 손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이런 거 가져올 일 있으면 말을 하지. 왜 바보같이 혼자 고생을 하니?"
강석은 현준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팔을 마구 비비며 말한다.
"아우...닭살 돋아서 미치겠네."
이슬은 강석의 행동에 웃음 지으며 책상 위에 자신의 가방을 벗어 놓았다.
"복구는 다 한 거니?"
이슬의 뜬금 없는 말에 강석과 현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보았다.
"복구라니?"
강석이 되묻자 이슬은 한굼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컴퓨터로 가서 부팅 스위취를 누르며 의자에 앉는다. 그녀의 표정이 약간 심각한 것으로 보아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멀뚱거리며 이슬이 앉은 의자 뒤에 서서 컴퓨터의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뭐야? 도대체 누가 이따위 짓을 한거야?"
현준이 약간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운영체제만을 남겨두고 하드의 모든 자료가 지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도 깨끗하게......
"어젯밤 누군가 우리 컴퓨터로 침입해서 이렇게 만들어 놓고 사라져 버렸어. 다른 선배들과 몇 시간동안 이 사람을 잡으려고 난리였지만, 그를 잡는 것은 불가능했지. 너희들은 그 난리통에 도대체 어디 가 있었던 거야?"
이슬이 핀잔을 주듯이 마하자 강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있어봤자 도움도 못 됐겠네. 너도 손대지 못한 거 보면........."
이슬은 컴퓨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도대체 누굴까? 천재적이었는데...처음엔 모두들 이 사람의 행동에 화를 내다가 나중엔 감탄할 수 밖에 없었어. 그를 잡기 위해 접속하는 컴퓨터마다 모두 이렇게 만들어버렸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아니? 나 뿐 아니라 선배들 네 명 모두가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그의 엄청난 실력에 모두 기가 질려서 지워진 자료를 복구할 마음도 먹지 못하고 그냥 허탈하게 집으로 가버렸지. 정말...대단했다니깐....."
그녀의 표정은 이상할 만큼 흥분된 모습이었다. 해킹당한 데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정체에 더욱 관심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녀의 말 속에는 그를 동경하는 듯한 마음마저 나타나 있다. 현준은 그녀의 그런 모습에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나쁜 놈이잖아. 우리의 자료를 모두 망쳐버렸으니..."
현준의 말투가 약간 퉁명스러워졌다. 이슬이 저토록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혹시 이기주가 아닐까?"
"이기주라고? 설마..."
이기주...
청와대 극비 문서를 해킹하여 통신상에 퍼뜨렸다가 잡혀 들어간 악명 높은 해커......
네티즌 중에 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만큼 전설적인 인물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해커다.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진 해커는 이기주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기주는 잡혔지요, 그가 정말 전설적인 해커라면 절대로 잡혀서는 안되는 거 아닌가요?"
문 쪽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
현준과 강석, 이슬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문 앞에는 스포츠형 머리를 한 남자가 장난기 가득 넘치는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자료를 망치다니요. 전 남의 자료를 망쳐버리는 그런 비신사적인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그는 현준을 향해 그렇게 말하고는 안으로 성큼 성큼 들어와 이슬에게 다가오더니, 그녀가 앉은 의자를 옆으로 쑥 밀고는 허리를 굽혀 키보드를 빠르게 치기 시작했다.
모두들 이 낯선 남자의 출현에 어리둥절해 있었다. 잠시 후, 그 남자는 몸을 일으켜 이슬의 의자를 다시 컴퓨터 앞으로 잡아당겨 놓고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자...이제 엔터를 쳐보세요."
이슬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자판의 엔터키에 손을 가지고 가서 가만히 눌렀다.
"와아........"
강석이 탄성을 지르며 모니터를 바라본다. 이슬도 감탄스러운 눈빛으로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워져버린 줄로만 알고 있었던 컴퓨터의 모든 자료가 다시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이들에게 그 의문에 남자는 팔짱을 끼며 설명을 시작했다.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요. 중요자료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지 못하도록 하는 기존의 보안 프로그램을 약간 변형시켜 만든 것 이니까. 물론 프로그램 자체는 바이러스가 아니니까 검사를 해도 나타나지 않아요. 하지만 자료는 보이지가 않지요. 마치 일부러 지워버린 것처럼...또한 보이지 않도록 숨겨버린 자료의 용량은 하드디스크의 정보에 빈 상태로 나타나니까 완벽하게 지워진 것처럼 생각되겠지요? 원인을 모르는 바이러스로 자료의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사람들이 하게 되는 행동은?
"포맷을 시키거나, 좀 더 확실한 방법으로 바이러스를 없애기 위해 아예 로우 포맷을 시킨다."
이슬이 흥분을 하여 그렇게 대답했다.
"딩동댕! 잘 맞추셨습니다. 스스로가 지워버린 하드의 자료들...고로 난 양심의 가책을 전혀 받을 필요가 없답니다. 하하하!"
이슬과 강석이 놀라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동시에 물었다.
"누구세요?"
"저요?"
그는 싱긋 웃으며 말한다.
"어제 저랑 모두 한판 붙었잖아요. 5:0 완봉승! 그런데 세번째 저와 접속하여 붙으신 분이 도대체 누군가요? 정말 실력이 장난이 아니던데...하마터면 걸려들 뻔했다니까요."
"그...그럼...그쪽이...어제...."
이슬은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96학번 새내기. 강쳔규라고 합니다. 어제 정말 재미있지 않았어요? 하하하하!"
시원스럽게 웃는 천규의 모습...한동안 그를 멍하게 바라보기만 하던 이슬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기 시작했다. 강석도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자 소리내어 웃으며 말한다.
"이거...디게 건방진 후배님이 들어오신 것 같은데..하하!"
그들은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현준이 한 명만을 빼고..현준은 그에 대한 이슬의 각별한 호기심이 무척이나 신경에 거슬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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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규는 이슬이와 급속도로 가까워졌지. 그때부터 가슴 아픈 사랑을 시작한 것은 현준이었고......"
"그래서 현준 선배가 이슬이라는 사람을 죽인겁니까?"
"무슨 말이야?"
"선배가 더 잘 알잖아요."
강석 선배가 놀란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처뉵가 그런 말을 했어? 현준이가 이슬이를 죽였을 거라고?"
난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야. 현준이는 개미새끼 한마리 죽이지 못해. 성격이 까다롭고 어둡긴 하지만, 그런 짓을 벌일 만큼 무모한 놈은 아니라고......."
"그럼 이슬이라는 사람이 죽은 이유가 뭡니까?"
"이슬이는 죽지 않았어. 그녀는 행방불명되었을 뿐이야."
"찾지 못했다면 죽었다는 거 아닌가요?"
"........"
"죽었든, 행방불명됐든, 어쨋거나 그녀에 대해 말해주세요.선배가 아는 것 모두를 말해달라고요."
강석 선배는 나를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세 대째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난 그의 다음 이야기를 빨리 듣고 싶었다. 하지만 기다렸다. 여기까지 알게된 이상 그는 다음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강석 선배는 한숨과 함께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면서 말을 시작했다.
"이슬이는 천규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어. 천규는 2살이나 어린 연하의 남자였지만, 그의 웃음과 순수...무엇보다도 자신의 실력을 뛰어넘는 천재적인 해킹 솜씨...사랑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거야. 천규를 직접 만나기도 전에 그녀는 동경하고 있었으니까...동경이 사랑으로 변하는 것은 아마 시간 문제였을거야.
"그때부터...현준의 외사랑은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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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그런 적 없었잖아. 나한테도 아직은 누군가를 좋아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말했었고.....!"
애타는 현준의 마음을 모른 채 이슬은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맞아...누군가를 좋아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지. 난 컴퓨터에 거의 광적으로 빠져 있었으니까...그런데...."
그녀는 약간 망설이다가 수줍은 듯이 말을 이었다.
"그를 보고만 있어도 행복을 느끼게 돼. 나 이런 느낌 처음이야. 가슴이 막 두근거리고, 천규의 손을 잡고 싶고, 그를 꼬옥 안아보고 싶어. 이런게...사랑이라는 걸까? 현준아...이런 게 사랑이라는 거니?"
현준은 할 말이 없었다. 지금 이슬은 그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 으로도 행복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왜...도대체 왜 그자식인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그 놈인 거냐고...왜...?"
"하지만...넌 아직 천규가 어떤 놈인지도 모르잖아. 우리 서클에 들어온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고...사랑이란 건,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네가 상처받을지도 몰라, 난 네가 슬퍼하는 거 보고 싶지 않아."
그녀는 현준의 말에 동의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지. 하지만...그건 내 몫이야. 이제부터 내가 느끼는 슬픔과 아픔은 모두 내가 견뎌내야 할 일인 거야. 나도...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현준은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안타까운 마음이 얼굴 표정에 역력히 나타났다. 몸에 힘이 빠져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이슬은 현준의 마음을 이제야 안 것일까?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로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현준아...네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나에게 친구로 남아 줄수는 없겠니?"
"친구로? 친구로 남아달라고? 여태 그랬던 것처럼...친구로?"
현준은 더 이상 슬픔을 감출 수가 없었는지 이슬이를 향해 울부짖듯이 말했다.
"네가 나를 사랑으로 대하지 않았어도 난 슬프지 않았어. 오직 친구로만 대했어도 행복했었다고...왠지 알아? 너의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나에게 희망을 주었던 것이라고.....!
그래서 이제껏 너의 친구로 있으면서도 견딜 수가 있었던 거야. 언젠가는 나의 마음을 알아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이 현실로 바뀌기를 손꼽아 기다리면서 언젠가는...그래 언젠가는 너에 대한 사랑이 이루어질 거라는 생각으로 행복했는데...그런데 그 작은 희망마저도 사라져버린 지금...나보고, 나보고 너의 옆에서 계속해서 친구로 있어 달라고? 이슬이 넌, 그토록 잔인한 여자였니? 지금 내 마음이 어떤지 알기나 하면서 그렇게 말을 하는 거냐고? 관심이 있기나 하는 거니? 지금 내 마음이 어떤지에 대해서......?"
"현준아........."
현준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버리고는 뒤돌아서서 뛰어가 버렸다. 이슬은 그가 사라져 간 방향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미안해...현준아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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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준은 그 다음부터 서클실에서도 학교에서도 볼 수가 없었어. 이슬은 현준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한동안 우울했지만, 천규에게 느끼는 사랑으로 그런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지. 천규도 이슬을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둘은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고. 우리들도 그들의 사랑을 축복해 주었단다.
시간이 지날수록 현준의 존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속에서마저 지워지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준이는 오로지 이슬이뿐이었으니까...그는 혼자였던 거야.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그는 혼자였던 거라고......"
강석 선배의 이야기에 난 현준 선배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천규에게 빼앗긴 사랑...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마저 기억되지 않는 존재의 외로움...누구나 그 고통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현준선배의 아픔을....
"현준이 휴학했다는 소식이 있을 때쯤. 이슬의 행동이 이상해지기 시작했어."
"이상해지다니요?"
"마치 무언가에 빠져 정신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기 시작했어. 서클실에는 아예 나오지도 않았고, 학교마저 빠지기 시작했지. 단 한번도 학교를 빠진 적이 없었던 애가........"
난 강석 선배의 말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한달 정도 뒤였던가? 그날도 수업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듯이 학교를 나가던 이슬을 붙잡고 난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그렇게 바쁜 거냐고 물었어.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조금만 기다려보라는 말을..."
"그래서...그래서 어떻게 되었지요?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요?"
난 흥분을 하며 소리쳤다. 나를 바라보던 강석 선배의 눈이 무척 슬퍼보인다. 잠시 후. 강석 선배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게 이슬을 보았던 마지막 모습이야. 아무도...그 이후로 아무도...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그녀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어. 아무도............"
김이슬이란 여인 역시. 천규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갔다는 것인가? 아니다. 김이슬이 당한 일을 천규가 당했다는 표현이 시기상으로 더 옳았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끔찍한 일들은 이미3년 전부터 시작 된것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럼 나와 천규 그리고 이슬이라는 선배뿐 아니라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이 더 있을수도 있다는 이야기잖아. 그 빌어먹을 사이트로 여태까지 사라져간 해커들이 천규와 이슬 선배만이 아니라는 얘기냐고...그럼...그럼 나 역시. 천규나 이슬 선배처럼......
두려운 생각에 머리칼이 곤두섰다. [MUEDER]라는 사이트의 그 미치광이 해커...그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8.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서클실로 나와 집으로 가고 있는 나의 마음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난 도대체 무슨 일에 빠져들게 된 것일까?
강석 선배의 말로는 이슬이라는 여자가 행방불명된 후, 천규는 한동안 많은 반황을 했다고 한다. 그 무렵 현준 선배는 학군단이 아닌 보통 군대에 입대를 했고, 천규도 4개월 뒤 해병대에 지원입대 신청서를 내고 군대로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군대는 그들의 아픈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는 시간을 제공했을 것이다. 한명은 시련의 상처를, 또 한 명은 사랑하는 사람을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잃게 된 고통을...
그들은 그러한 의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단 한 번도 휴가를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난 그들의 슬픔과 아픔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런 생각들 속에 빠져 터벅터벅 걷고 있을 때, 학교 정문 앞에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지애의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숙인 채,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넘기는 그녀의 행동이 왠지 너무도 우울해 보인다. 아까 내가 지애 앞에서 보인 그 광적인 행동 때문에 놀라지는 않았을까? 내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멈춰서자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난 힘겨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한다.
"아까...나 때문에 많이 놀랐지. 미안해. 나도 모르게 이성을 잃고 그만...."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싶다가 입술을 꼭 다물었다.
우리는 말없이 학교정문을 뒤로하고 걷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그녀와 걷고 있는 나의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까 흥분으로 이성을 잃고 현준 선배를 폭행했던 것이 단지 천규에 대한 의리 감정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내 스스로가 느껴서일까? 사랑하는 마음을 친구라는 이름으로 위장하고 있었던 나의 모습을 그녀에게 들켜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난 현준 선배에게 분노를 보일 자격이 없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 역시 그와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점점 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 옆에 걷고 있는 그녀의 표정에도 약간의 어색한 감정이 보인다. 오늘 이대로 헤어져버리면 앞으로그녀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시킬 수 있는 무슨 말이라도.......
"저...저기,....."
"기현아...난......."
우리는 동시에 말을 하며 잠시 동안의 어색한 침묵을 깼다.
"먼저 말해."
"아...아니야. 기현이 너부터 말해."
다시금 침묵이 흐른다. 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무슨 말인가를 꺼내면 횡설수설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지애가 먼저 고개를 숙인 채로 조심스럽게 말한다.
"우리...술 한잔 마시지 않을래?"
안도의 한숨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그녀의 제안이 너무도 다행스러웠던 것이다.
"싫은 거니?"
"아...아니야. 난 ...그게 아니라."
그녀의 질문에 난 당황하여 손을 저었다.
"그럼?"
난 마음을 가다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의 바보 같은 나의 행동이 갑자기 우습게 느껴졌다. 지애는 지금 내 앞에 언제나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데...왜 그렇게 혼자 어색새하고 있었던 거지? 난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고마워."
"...고맙다니?"
말 그대로 난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를 대해주는 그녀의 배려가 너무도 고마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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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애는 택시 안에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었다. 그녀의 취한 모습을 오늘 처음으로본다. 그녀 역시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 때문에 여태까지 그런 다신의 힘든 마음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겠지. 미안하다. 위안이 되어주지 못했던 것이..............
서초동에 도착한 나는 그녀를 부축하여 택시에서 내렸다. 언젠가 천규 대신 그녀를 바래다주었던 기억을 더듬어 찾아오긴 했는데...여기가 맞는 건가?
나의 팔에 겨우 몸을 지탱하고 서 있는 지애를 불렀다.
"지애야...지애야?"
그녀는 내가 부르는 소리에 희미하게 눈을 떴다.
"여기서 어떻게 가야 하니? 집에 전화를 걸면 실례겠지? 지금 11시인데........"
집으로 전화를 걸어 가족 중 누군가를 부르고 싶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한다.
"몰랐구나? 하긴...천규도 몰랐었지...사실 말이지...사실 말이지이...집에 전화해도 아무도 없어요오...."
취한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언제나 차가와 보였던 지애가 지금은 아기처럼 귀엽다. 그녀는 힘겹게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작은 열쇠 꾸러미를 하나 꺼내 나에게 흔들어 보였다.
"지애는 말이지요...혼자 살아요. 후훗...아무한테도 안갈쳐줬었는데...기현이한테 들켜버렸네에......"
지애는 그렇게 말하고 비틀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난 그녀를 따라가며 넘어지지 않도록 부축했다. 얼마쯤 지나서 원룸 오피스텔 건물 앞에 선 그녀가 나에게 말한다.
"여기가...우리집이랍니다. 309호...우리집...."
난 건물을 바라보았다. 신축 건물 같진 않았지만. 관리가 잘 되어서인지 무척 깨끗해 보였다. 어차피 혼자 산다면 왜 이렇게 학교에서 먼 곳에다 집을 얻은 것일까? 학교 쪽에도 깨끗한 원룸은 많이 있는데..........
난 그녀에게 물었다.
"방까지 갈 수 있겠니?"
지애는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고, 난 그녀를 부축하던 손을 가만히 놓았다. 약간 비틀거리던 그녀는 곧 중심을 잡고 혼자 서면서 나를 향해 미소 지어 보이며 말한다.
"거봐....지애 술 안 취했지?"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안 취했어. 이제 올라가 봐. 조심해야 해."
"으응...지애는 조심해요. 언제나 조......"
그녀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난 얼른 손을 뻗어 그녀가 쓰러지지 않도록 부축했다. 지애는 눈을 감은 채로 힘들게 숨을 쉬고 있다. 난 그녀가 손에 꼭 쥐고 있는 열쇠를 가만히 빼내고는 그녀를 안다시피해서 일으켰다.
"309호라........"
난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 그녀가 말한 309호 문을 열쇠로 열었다. 안으로 들어와 불을 켜고 잠시 방안을 둘러본다.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그녀의 방...지애의 성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컴퓨터에 먼지 하나 묻어있지않을 만큼 청소가 잘 되어 있었고, 침대의 시트 역시 가지런했다.
벽에는 나의 컴퓨터 배경화면에도 자리잡고 있는 그녀의 미소를 잠은 사진이 커다란 액자에 걸려 있고, 책장에는 해킹에 관한 수많은 서적들이 꽂혀 있었다. 가구들이 무척 잘 배열돼 있는 그녀의 방에ㄴ서 난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컴퓨터를 비롯해서 책상과 오디오, tv, 옷걸이, 하다못해 커피잔까지도 모두 검정색 개통이라는 것...그녀가 검정색을 좋아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좋아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지애를 침대에 눕힌 뒤, 밝은 빛으로 잠이 깨지 않도록 침대 옆의 스탠드를 켜고 형광등 불은 껐다.
그리고 나서 잠시동안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긴 머리칼이 하얀 시트위에 흐트러져 있는 그녀의 모습이 슬픔을 느끼게 했다.
많이 힘들지? 지애야.........
애처로웠다. 그녀가 혼자서 마음 아파하고 있는 모습이...
난 고개를 돌려 책상 위의 컴퓨터로 시선을 옮겼다. 지애의 컴퓨터가 낯선 남자의 방문을 꺼리는 것처럼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지애한테 이상한 짓이라도 할까봐 그렇게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거니? 이봐. 나 나쁜 사람 아니니까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
컴퓨터는 여전히 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난 지애가 그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항상 쓰다듬어 주었을 컴퓨터의 키보드를 가만히 만져보았다. 지애도 이 컴퓨터를 다정한 친구처럼 느끼는 것이겠지?
'넌...누구보다도 행운아구나......항상 지애의 곁에 있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던 나는 컴퓨터의 본체 옆에 놓여 있는 네모난 검은색 케이스를 발견했다. 무심코 그것을 들어 뚜껑을 열어본다.
'목설이?"
투명한 수정으로 되어 있는 갸름한 마름모 모양을 한 보석 목걸이였다. 보석의 중심부분에는 복잡한 무늬를 가진 반지 형태의 금빛 링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보석을 통과하는 온줄이 목에 걸수 있도록 길게 드리워져 있다. 난 지애가 이것을 차고 있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없다. 하지만 분명히 이런 고급스런 케이스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녀에게 어떤 커다란 의미가 있는 물건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케이스 뚜껑을 닫고는 다시금 원래 있던 자리에 가만히 놓아두었다.
그때 지애가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 뒤돌아보았다. 잠결에 답답해서였는지 스스로가 풀어헤친 웃옷 사이로 검은색 속옷이 드러나 보이고, 그것에 감싸인 그녀의 부드러운 윗가슴이 나의 눈에 들어온다.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충동이 나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다.
난 고개를 저으며 도망치듯이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왔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인 후 현관문에 몸을 기댔다. 눈을 감고 폐 속에 깊숙이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한숨과 함께 내보낸다.
미안했다. 순간적이나마 그녀에게 이상한 생각을 가졌던 것이...잠시 그렇게 서 있던 나는 건물을 빠져나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사당동 쪽으로 향했다. 너도 똑같은 놈이야. 너도......
"저기서 세워주세요."
돈을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린 후, 한동안 전광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집 앞까지 택시를 타고 갈 수도 있었는데 왜 여기서 내린 거지? 내가 그 미치광이 해커의 메시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일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호기심으로 메세지를 기다리는 나의 이중적인 마음을...난 한숨을 쉬고는 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때...보인다. 또 다시 말도 안되는 그 문구들이.....
[기독교와 불교의 통합교인 기불교...국가 종교로 책정...자세한 정보는 28일 밤 11시 30분...43번 채널을 고정하세요.]
난 얼른 시계를 보았다. 빌어먹을...11시 35분이잖아...난 미친 듯이 집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물어볼 것이 너무도 많단 말이야. 기다려...조금만 기다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