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9. 다음은 어느 인물의 연보이다. (라)에서 (마)시기 사이의 저술로 옳지 않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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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22세(1363년) 봄에 충주목의 사록에 임명됨
(나) 30세(1371년) 신돈이 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개경으로 돌아옴
(다) 33세(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친원파 권신 이인임의 미움을 삼
(라) 34세(1375년) 명을 협공하기 위해 입국한 북원 사신의 목을 베겠다고 저항해
전라도 나주로 귀양 감
(마) 42세(1383년) 함경도 함주막을 찾아가 이성계를 만나 혁명을 결의하고 김포로 돌아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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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심문천답 ② 금남잡영 ③ 금남잡제 ④ 불씨잡변
정답: ④
* 조선 건국을 주도한 급진파 사대부 정도전(1342~1398)
조선 왕조 개창의 1등 공신 중의 하나가 급진파 사대부의 대표인 정도전이다. 고려 말 공민왕 대에 이색을 중심으로 학문적 유대관계를 통해 교유해온 인물(신진사대부)들 중 하나로 신돈 정권기 개혁정치에 참여하여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돈의 실각과 공민왕의 시해 이후 우왕 대의 이인임 권문세족 정권에 의해 크게 탄압을 받아 나주 회진 거평 부곡에 귀양을 갔다(1375~1377). 이 때에 불교의 인과응보에 대한 유교적 비판과 변호의 내용을 마음(心)이 묻고 하늘(天)이 답하는 형식으로 간략하게 해명한 글인 <심문천답>과 시문을 모은 <금남잡영>과 <금남잡제>을 저술하였다.
9년 간의 유배와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1383년 결국 신흥 무인세력인 이성계와 만나 제휴하였다. 이후 이인임 권문세족 정권과 위화도회군 이후에는 최영 세력을 몰아내고 신진사대부들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고려왕조를 지속하려는 온건파 사대부들과 갈등 속에서 그는 역성혁명의 입장을 주도하며 결국 조선 건국에 앞장섰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초창기의 문물 제도를 갖추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태조 때(1394) 교통과 국방의 중심지인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도성을 쌓고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 종묘, 사직, 관아, 학교, 시장, 도로 등을 건설하여 도읍의 기틀을 다졌는데 이 때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의 기지를 결정하고 궁·문의 모든 칭호를 정했다
또한 유교적 통치 규범을 성문화하기 위한 법전의 편찬에 힘써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을 편찬하였고, 민본적 통치 규범을 마련하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또, 유가의 입장에서 불가와 도가를 비판하고 유가의 우수함을 찬양한 글인 심기리편(1394)과. 역시 유학의 입장에서 불교의 진리를 논파하고 배척을 주장한 불씨잡변(1394)을 통하여 불교를 비판하였으며,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그러나 명과의 갈등(표전문 사건의 당사자) 속에 요동정벌을 추진하고 세자 방석을 후원하다가, 1차 왕자의 난(1398)에서 이방원에 의해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