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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청탁과 부탁의 고찰 우리 선조들의 역사를 고찰해 볼 때 분경금지(奔競禁止)라는 말이 있다. 분경이란 분추경리(奔趨競利) 즉ꡐ분주하게 다니면서 이권을 경쟁한다ꡑ의 줄임말로, 벼슬을 따기 위해 권력자의 집에 드나들며 엽관(獵官)운동(관직사냥운동으로 온갖 방법으로 관직을 얻으려고 벌이는 운동)을 하는 행위로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이란 이를 금지하는 법이다. 엽관주의는 소수의 간부에 의한 정당의 과두적 지배를 촉진하여 공직의 사유화를 야기함으로써 매관매직이나 뇌물수수 등의 정치적, 행정적 부패를 초래한다.
이미 고려시대에도 분경금지법이 있었다. 「고려사」 명종 5년 (1174년) 4월에 내린 왕의 교서에 의하면“요사이 분경이 극심하여 권력이 사사로운 집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다”고 개탄하고 있다. 이미 고려시대 중기에 들면 관료를 귀족화하는 추세에서 분경이 국가체계를 불안케 하는 요소로 인식되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왕마저도 청탁이 들어오면 뇌물을 받고 엽관행위를 하는 등 분경금지법은 있으나마나였다. 분경금지법이 강력히 실시된 것은 조선시대였다. 정종이 정권안정 차원에서 대소 관리가 사적으로 만나는 일 즉 사알(私謁)을 금지하는 교지를 처음으로 내렸다. 교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일을 상고하면 순임금이 용에게 명하기를 “짐은 참소(讒訴)하는 말이 착한 사람의 일을 중상하여 짐의 백성들을 놀라게 하는 것을 미워한다”고 하여 태평의 정치에 이르게 하였고, 기자가 무왕에게 고하기를 “백성은 음란한 붕당이 없고 벼슬아치는 서로 비부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하여 충후(忠厚)한 풍속을 이루었으니 수천 년이 내려와도 모두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태상왕(태조)께서 천지· 조종의 도움을 힘입어 조선 사직의 기업을 창조하시고 과인에 이르러 어렵고 큰일을 이어 지키니 어찌 모두 함께 새로워지는 교화를 도모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남은 풍속이 끊어지지 않아 사사로이 서로 비부하여 분경을 일삼아 모여 남을 참소하고 난(難)을 선동하는 자가 많도다. 지금부터 종실· 공후 대신과 개국· 정사공신에서 백료, 서사에 이르기까지 각기 자기 직책에 이바지하여 서로 사알하지 말고 만일 원통하고 억울하여 고소할 것이 있거든 각기 그 아문이나 공회처에서 뵙고 아뢰어 서로 은밀히 참소하고 헐뜯지 말라. 어기는 자는 헌사에서 규찰하여 모두 먼 지방에 귀양 보내어 종신토록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게 하리라. 무릇 족친 가운데 삼사촌(三四寸)과 각 절제사의 대소 군관은 이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말을 만들고 일을 일으키는 것이 있으면 죄가 같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맡은바 형조의 결사원(決事員)이면 비록 삼사촌과 소속 절제사의 처소에라도 문병과 조상(吊喪)을 제외하고는 또한 사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기는 자는 벌이 같을 것이다. 이후 태종이 강력히 시행했고, 예종은 세조의 승하로 빚어진 강력한 정치적 권위의 공백을 극복하고자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즉위와 더불어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선전관을 재상가(宰相家)에 보내어 불시에 분경(奔競)을 적발하도록 한 것이다. 1468년 10월 19일 예종은 당시 3정승과 이조· 병조판서, 왕의 종친가에 까지 불시 단속을 하여 왕의 사촌인 구성군을 비롯하여 원로대신 신숙주, 우의정 김질, 이조판서 등의 집에서 인사청탁을 하던 분경범들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예종은 정작 분경의 당사자들은 처벌하지 못하였다. 예종은 이들을 처벌하기는커녕 대간(臺諫)이 이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고 하여 대간들을 힐책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성종 때는 경국대전에 명문화했다.「경국대전」에는 상급관리의 집을 방문하여 엽관운동을 하는 자는 곤장 100대를 가하여 3,000리 밖으로 유배하였다고 한다. 장 100대면 사형에 가까운 징계이고, 유형 삼천리라면 사실상 조선 땅에서 살 수 없다는 형벌이었다. 그러나 분경금지법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왕족, 그 가운데서도 외척과 왕비족 견제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는 두고두고 조선왕조가 외척정치, 세도정치로 가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어 숙종 5년(1679) 11월 20일에는 뇌물을 바쳐 청탁하는 자를 무거운 법률로 다스리도록 했다. 사간원에서 “관절(關節-뇌물을 바쳐 청탁하는 일)의 폐단은 오늘날의 고질화된 병입니다. 편지로 청탁하기를 태연히 여기고 괴이쩍어 할 줄 모르니 지금부터 금단(禁斷)할 것을 거듭 밝혀 청탁한 자와 청탁을 들어준 자를 함께 중률(重律)로 다스리게 하소서”라고 건의하자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그 양상은 달랐을지라도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청탁이 심각한 문제가 되고는 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 뇌물이나 향응과 연결되었을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노골적인 뇌물, 향응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권력에 가깝다는 사실 자체 혹은 드러나지 않는 권력의 존재 자체가 아무런 의식 없이 청탁하게끔 만든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청탁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공정한 인사를 방해하며 나아가 인사의 흐름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은 일리 있는 말이라고 하겠다. 더구나 그것이 설령 부패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부정과 강한 친화성을 갖게 마련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정권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이다. 다음과 같은 선조(宣祖)의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사 하는 바가 크다고 해야 하겠다. “천공(天工-하늘이 백성을 다스리는 조화)을 사람들이 대신 하는 것이니 인군이 함께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인재뿐이다. 우리나라에는 해마다 천거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법이 있으나 많은 현자(賢者)가 등용되는 것은 보지 못하겠고 잡스러운 무리들만 많이 모이는데 초야에 어찌 유주지탄(遺珠之歎-마땅히 등용되어야 할 사람이 빠져 한탄함)이 없겠는가. 일명(一命-가장 낮은 관직)의 선비라도 모두 후일 생민을 다스릴 책임을 가진 자들이다. 처음 입사하는 사람을 신중하게 뽑지 않을 수 없으니 적임자를 얻어 재주에 따라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수령은 한 지방의 책임을 맡고 있어 생민의 휴척(休戚-기쁨과 근심, 걱정)이 달려 있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들의 청탁을 받아들여 적임자가 아닌 사람을 그 사이에 눌러 있게 할 수 있겠는가. 특별히 가려 차임(差任)하라(선조실록 39년 12월 15일). 그러나 분경금지의 범위는 현실적으로 축소 정비하기도 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유명무실해 지면서 급기야 매천 황현선생이 '매천야록'에서 통탄하듯이 고종대에 오면 왕실이 직접 벼슬을 팔아먹을 정도로 타락했다. 이에 조선왕조는 결국 망했다(출처 느티나무 2000년 12월호). 황현(黃玹 1855-1910)선생은 한말의 우국지사로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합병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분이다. 1910년 8월 일제에게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절명시 4편과 유서를 남기고 아편을 먹어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으며 선생은 이건창, 김택영과 함께 한말삼재(韓末三才)라고 불린다. 황매천 선생의 매천야록에서 나타난 조선말엽의 부패상황을 그의 역사관을 통하여 살펴보면서 마무리 한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그가 설정했던 가장 중요한 주제는 ꡐ망국ꡑ(亡國)이다. 누구 때문에, 왜 나라가 망했는지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한자의 어법을 십분 활용한 풍자와 비판은 그를 더욱 확고부동한 ꡐ역사가ꡑ로 만든다. 누가 나라를 망하게 했는가. 그가 우선 꼽는 사람은 왕과 명성황후 민씨였다. 매천은 이들의 무능과 부패를 망국의 첫 번째 요인으로 보고 있다. 그의 글을 본 현대 역사가들은ꡐ매천이 왕과 비를 저주했다ꡑ거나ꡐ일본보다 더 미워했다ꡑ는 등의 해석을 주저 없이 쓸 정도. 매천의 붓 끝은 무엇보다 이들의ꡐ인재등용ꡑ을 질타하고 있다. 무당이나 점술가 등을 요직에 배치했다는 사실은 매천이 조선을 ꡐ귀신나라ꡑ라고 부른 가장 중요한 이유다. ꡒ매천야록ꡓ은 무당 진령군(眞靈君)의 중용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ꡐ진령군이라는 무당이 충주에 피난가 있던 민비의 환궁일을 예언하여 중용되자 수령이나 병졸, 수사(水使)가 그의 손에서 나왔고 재상(宰相)들이 다투어 자매와 의자(義子․의붓아들)가 됐다. 그리고 한말에 법무대신까지 지낸 김해 출신의 이유인(李裕寅)은 궁핍한 무뢰배임에도 불구하고 귀신을 부릴 수 있다 하여 진령군의 추천을 받아 양주목사로 부임받기도 했다.ꡑ 그가 열거하고 있는 무당과 점술가의 중용 사례는 이 뿐만이 아니다.ꡐ점술가 안영중(安永重)은 현풍군수로, 거창 출신 차성충(車聖忠)은 요술을 부릴 줄 안다 하여 왕의 사랑을 받았다.ꡐ왕은 진령군이 죽자 상복을 입었던 그의 의붓아들 김사묵(金思黙)이 경무사(警務使)로 있을 때 탄핵을 받았으나 진령군을 생각해 그대로 유임시켰으며…ꡐ충주인 성강호(成康鎬)는 귀신을 알아볼 수 있다 하여 왕이 죽은 민비를 보게 하고 그리하여 그 집의 문은 성시(盛市)를 이뤘다ꡑ고 지적했다. 그는 또 고종을 가리켜ꡐ사사로운 일에 끌려 공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가 다만 그 일이 해결될 수 없을 만큼 착찹하게 된 후에야 적합한 인재를 기용하고는 했다ꡑ고 쓰고 있다. 그가 보기에 이것이 민란이 계속되는 이유였다. 민란이 끝난 후에도 그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없애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함흥민란, 북청민란, 제주민란 등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있다가 문제가 더 커지자 민란을 잠재울 인재를 구했다고 했다. 일단 고종이 최종적으로 등용했던 서정순(徐正淳)․이규원(李圭遠) 등은 적임자로 본 것이다. 그러나 ꡐ민란이 평정되면 그대로 방치했다ꡑ고 쓰고 있다. 발본색원하지 않고 임시방편의 처리만 함으로써 사회 혼란이 가속화됐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고종의 야합과 편협, 우유부단에 대한 지적도 날카롭다. 우선 그는ꡒ고종의 성품은 자신이 모든 일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남들과 영합하기를 좋아했다ꡓ고 말한다. 이건창이 충청감사 조병갑의 탐학(貪虐)을 조사해야 한다는 건의를 묵살한 후 그를 기피했으며 자신을 노론(老論)이라 하며 남인․북인․소론 등 3색을 노골적으로 천대함으로써 최고 통치자로서의 불편부당성을 망각하고 나아가 관료의 당파싸움을 부추기기까지 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각 대신들을 임명하고 1주일도 채 안돼 자리를 바꾸게 하는 등의 졸속행정으로ꡒ부하직원들이 공문서를 들고 갈 곳을 모르더라ꡓ는 탄식은 오늘날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고종이 뇌물을 좋아했다는 말도 곳곳에서 나타난다. ꡒ남정철(南廷哲)이 과거에 급제한 지 2년도 안되어 평안감사가 됐다. 왕가의 친척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 빨리 출세한 것은 근세에 없는 일이었다. 그는 감영(監營)에 있을 때 고종에게 계속 뇌물을 바쳤는데 고종은 그가 충성한다고 생각하고 영선사(領選使)로 임명해 톈진(天津)으로 보내면서 크게 기용할 뜻을 보였다. 그러나 민영준(閔泳駿)이 남정철과 교체된 후 작은 송아지가 수레를 끄는 조각을 황금으로 만들어 고종에게 바치자 고종은 얼굴빛이 바뀌며 남정철을 꾸짖었다. ꡐ남정철은 알고 보니 큰 도적놈이로구나, 관서(關西)에 이렇게 금이 많은데 혼자 독식했다는 말이냐?ꡑ이때부터 그에 대한 총애는 쇠퇴했고 대신 민영준이 날로 중용됐다.ꡓ(매천야록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