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트(FIAT)는 1899년 7월이탈리아 북서쪽 피에몬테(Piemonte) 주(州)의 주도(州
都)인 토리노(Torino)에서 ‘Società Anonima Fabbrica ItalianaAutomobili Torino’라
는 이름으로 창립되었다 (1906년에 ‘Fabbrica Italiana di AutomobiliTorino’로 개명
됨). 모든 사람들에게 피아트와 아녤리(Agnelli) 가문은 동일시 되고 있지만, 실제로
피아트는 아녤리 가족에 의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자동차에 매료된 한 사업가 그룹
에의해 태어났고, 죠반니 아녤리는 (Giovanni Agnelli,1866-1945)는 소주주로서 이
그룹에 합류하였다. 죠반니는 피에몬테의 중상층 계급의가정에서 태어났고, 군인
으로서 경력을 시작하였다가, 사업가로 진로를변경 하였다.
1900년에 Corso Dante (코르소 단테) 35번지에 12,000km2의 면적, 150명의 근로자
와 함께 피아트의첫번째 공장이 설립되었고, 같은 해에승용차 ‘Fiat 3 1/2 HP’ 30대
가 생산되었다. 1901년 피아트는 트럭, 자동차, 배의 엔진 등을 생산하면서 활동 범
위를 넓혔고, 1차세계대전 중 (1914-1918)에는 군용차량, 탱크, 잠수함과비행기의
엔진도 생산하였다. 1920년 죠반니 아녤리는 피아트의 회장이 되었고,같은 해에 미
국의 포드자동차 공장을 방문한 후, 가격을 낮추기 위해서는 시리즈 생산이 필요함
을확인하였다. 1923년 죠반니는 153,000km2 면적의 Lingotto (린고또) 공장을 설립
하였고, 값싼 소형 승용차를 생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저렴한 자동차 가격 때
문에많은 사람들이 피아트의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피아트는 파시스트(무솔리니를 당수로 한 이탈리아 국수당의 지지자)와좋은 관계를
유지하였고, 파시스트 지배 하에서 피아트는 번영하였는데 무솔리니 정부는 외제차
에게는 62%의 높은 관세를 적용하였고, 피아트 자동차 수출에 대해서는 세금을 면
제하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9년 피아트는 위기를 맞았고, 이태리 자동차
산업의 부활과 자동차 대량공급을위해, 1932년에는 ‘FIAT 508 Balilla’, 1936년에
는‘Topolino’(토뽈리노: 생쥐라는 뜻, 정식 모델명은 ‘Fiat 500’, 이 당시 세계에서가
장 작은 자동차)를 출시하였다.
또한 정부의 군수물자 주문이 피아트에게 위기 극복의 기회를 주었고,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1935년에는 피아트의 군수물자 생산은 기하급수적으로증가하
였고, 이 전쟁에서 얻은 이익은 무솔리니가 “파시스트 정부의 완벽한공장”이라고 정
의한 Mirafiori 공장 건설을 위해 사용되었다. 이 시기부터 죠반니의 의도대로 피아
트는 공식적으로 아녤리 가족의 소유가 되었으며, 1939년에 1,000,000km2 면적,
22,000명의 근로자와 함께, 2교대 근무의 토리노 Mirafiori (미라피오리) 공장이 건설
되었다.
에티오피아 전쟁과 마찬가지로 2차세계대전(1939-1945) 역시피아트에게 큰 이익을
남겨주었는데, 1940년 피아트의 거의 모든 활동은 군수물자 생산으로 바뀌었고 공
장에서는 비행기 엔진, 전투기, 트럭, 탱크가 생산되었으며, 1941년 첫 4개월간 피아
트 회사자산이50-60% 증가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1942년 영국, 미
국군이 토리노를폭격하였고 피아트의 시설들은 심하게 파손되었다. 1945년 죠반니
아녤리가 죽고 (그의 외아들 에도아르도 아녤리(Edoardo Agnelli, 1892-1935)가 비
행기 사고로 죽는다) 비토리오발렛따 (Vittorio Valletta, 1883-1967, ‘Professore (프
로페쏘레:교수)’라고 불림, 1939년부터 피아트 사장, 1946-1966 피아트 회장, 1966년
종신상원의원으로 임명)가 피아트의 회장이 되었다. 발렛따가 경영하는 동안 피아
트는 자동차, 버스, 트럭, 철도차량, 트랙터, 배와 비행기의 엔진, 비행기들을생산하
였고, 남부 이태리인들의 북쪽으로의 이민을 적극 권장하였으며, 2차세계대전 이후
의 경제붐을 이용하여 피아트를 이태리 자동차 회사 중 가장 큰 회사로 성장시킴으
로써 피아트가 국제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한 발판을마련하였다. 피아트는 이
시기에 많은사람들이 살 수 있는 저렴한 승용차, ‘경제 기적’의 상징인 ‘Nuova 500’,
‘FIAT 600’와 같이 유명한 자동차들을 출시하였다. 1957년에 피아트의 판매는 국내
총수입의2.5%를 차지하였으며 기계산업 생산의 35%를 차지하였고,1960년에는 전
세계 자동차 시장의 약 5%를 차지하는 5십만대이상의 자동차를 생산하였다.
발렛따를 이어 1966년부터 죠반니의 손자인 쟌니 아녤리(Gianni Agnelli, 1921-2003,
‘Avvocato’(아보카또:변호사)라고 불림, 1991년 종신상원의원으로 임명)가 피아트의
회장이 되었고, 쟌니는 피아트를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회사로 만들었으며, 유럽의
가장 큰 자동차회사로성장시켰다.
이러한 이유로 1966년부터 오늘날까지의 피아트의 역사는 쟌니 아녤리와는 떼어놓
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쟌니 아녤리가 죽은 후 (2003년 1월 사망), 쟌니 아녤리
의동생 움베르토 아녤리 (2004년 5월 사망)가 회장이 되었고, 지금은 Luca Cordero
di Montezemolo (루까 꼬르데로 디 몬떼쩨몰로, 1947년생, 1991년부터Ferrari의 회
장 겸 사장, 1997년부터 Maserati의회장겸 사장)가 2004년부터 피아트의 회장직을
맡고 있고, 아녤리 가의 상속자인 존 엘칸(John Jacob Philip Elkann, 1976년생, 뉴욕
태생, ‘Jaki’로 불림, 쟌니아녤리의 외손자)은 28세의 나이로 부회장에 임명되었다.
1900년에 30대의 자동차를 생산하던 피아트는 1960년대 말부터 다른 기업들을 인수
하거나 새로운 분야에 투자하기 시작하여, 현재는승용차(Ferrari, Lancia,
Autobianchi, Alfa Romeo, Maserati,Innocenti)외에 건설기계,·농업기계,·산업기계
의 기계류 생산에서부터(OM, Iveco) 에너지 개발, ·운수(Iveco,Irisbus), 금융(Toro
assicurazione), 출판(La Stampa, Corriere della Sera)에 이르기까지 사업을 다각화
하고 있다.
이태리의 근대화, 산업화, 자본주의화의 중심에 있었던 피아트의역사는 이태리 경
제, 산업발전의 역사와 동일시 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태리 국민들이 심
각한 경제 위기에 처했을 때도 아녤리집안은 이태리의 실질적인 왕족 가문이라는 말
을 들을 정도로 정치계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여러 방면에서 다른 기업들이
누리지 못하는 특권을누려왔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피아트는현재 부도의 위기에
처해있고, 다시 한번 이 위기 상황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고,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에 본격화
된 피아트 쇠퇴의 원인들 중 가장 중요한 원인은 사람들이 피아트의 차를 더 이상 사
지 않는다는것이다. 가난했던 시절에는 작고, 실용적이며, 값이 저렴한 피아트의
차를 사던 사람들은, 지금은 피아트의 차보다는 비싸지만 더 보기 좋고, 더 좋은 성
능의 차를 살수 있게 되었고, 애국심을 가지고 피아트의 자동차를 사던 시대는 지나
갔다. 또 한가지 원인은 피아트는 인도나 중국과 같은 잠재력있는 시장에 진출하지
못하였고, 제품연구와 기술개발에 충분한 투자를 하지 않는 방만한 경영을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