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조계종 원로의원에 추대되신 이두스님을 주석하고 계신 청주 관음사에서 만났다. 폐사지였던 관음사는 스님께서 수년간의 걸쳐 불사에 헌신하신 결과 청주의 포교중심도량으로서의 사격(寺格)이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이두스님은 원로가 앞장서 "종단과 후학들이 바른 방향으로 갈수 있도록 덕(德)과 행(行)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원로의 소임이 막중함을 강조하셨다. 병을 앓고 나신후 회복기에 들어선 스님께서는 최근 하루 한 끼만 먹는 일종식을 하고 계시다고 주위에서 귀띔한다. 그래서인지 본래 원만하고 부드러운 얼굴이 더욱더 해맑게 보였다.
*약력 ·1929년 강원도 김화 生 ·51년 금오스님을 은사로 출가 ·56년 동화사 강원 대교과 졸업 ·59년 성균관대 철학과 졸업 ·71년 갑사 주지 ·78년 법주사 주지 ·91년 방글라데시 치타공 팔리대 철학박사 ·2000년 8월 금오문도회 운영위원장으로 선출 ·2000년 10월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현재 청주 관음사에 주석 ·저서에 <금강경 공성(空性)의 연구> <금강경·원각경 강술> <운수방담> <산속에서 산을 보는 법> 등.
─불교는 세계최고의 역사학자, 과학자들까지 매료될 정도로 매우 과학적이고 심오한 종교임에도 오히려 일부 불자들은 그 가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부처님가르침을 믿고 실천하기보다는 어떤 신이한 일에 의존해 만사형통을 바라고, 내면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밖으로 허상을 좇기 일쑤입니다. 최근에 일어난 ‘우담바라 파문’이 이를 대변하지요. 어지럽고 시시비비가 얽혀있는 현실에 파사현정의 장군죽비로 경책을 해야할 불교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지요.
▲아직까지도 일반 사람들의 불교에 대한 인식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현실생활과 유리된 종교인 것처럼 되어 있고 기도나 하고 영험이나 생각하며 이론적 인식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종교라는 생각이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은 불교처럼 과학적이고 생활적이며 합리적인 종교가 없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됐을까요. 불교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인식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억불숭유정책의 조선왕조 5백년동안 불교는 역사참여의 의지를 완전히 박탈당한 채 은둔자처럼 지내왔습니다. 결국 역사의 현장에서 소외된 불교는 몰락의 일로에서 사람들의 눈에 비사회적 종교로 격하된 취급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됐지요. 그러나 가장 현실참여적이고 사회적인 종교가 불교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고 우리의 역사가 불교에 요구하는 사회적 책임을 수용할 수 있으려면 포교의 일선에 선 불교포교사나 신도들 각자의 자각과 노력이 각별히 요구됩니다. 특히 불자들이 부처님가르침을 바로 알고 바로 행해야 일반 사람들의 불교인식도 변합니다. 무조건 영험이 있는 곳에서 기도한다고 복을 내려주는 분이 부처님이 아닙니다.
─요즘 금감원 등 사회지도층의 비리와 부정부패로 서민들은 열심히 살 의욕을 잃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예전보다 훨씬 잘 살게 되었는데도 우리 사회의 부패지수는 도리어 심각해지고 사람들도 양심과 도덕을 지키기보다는 무슨 방법을 쓰든지 돈을 많이 벌어 잘 살아봐야겠다는 풍조가 만연돼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종교 백화점'이라 할 정도로 다종교사회이고 따라서 종교인들이 많은데 종교인들이 사표가 되어 사회를 정화시키는 '거름장치' 역할을 해야 할 텐데요.
▲우리가 이기적 욕심에 사로잡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리와 죄악을 저지르는 것은 인과를 믿는 양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단적으로 말할 수 있어요. 부처님께서는 비구가 둘 이상 같이 다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비구에게 법문하는 기회가 적어지는 것을 염려하고 또 되도록 많은 사람을 제도하라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저마다 법문함으로써 중생들에게 법문 듣는 기회를 더 많이 만들어 주어 진리를 널리 펴라는 것이지요. 따뜻하고 맑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은 불자들의 사명이며 책임이기도 합니다. 불자들도 그냥 절에 다니고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를 명확히 알고 내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무슨 수단을 쓰든, 무슨 잘못을 저지르든 돈을 많이 모아 권력을 잡아 살면 잘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빼앗긴 사람보다 뺏은 사람이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겠지요. 그러나 인과의 도리는 엄격합니다. 남의 것을 거저 얻거나 빼앗은 것은 주기 싫어도 언젠가는 반드시 되돌려주어야 하며 남에게 준 것이나 빼앗긴 것은 받지 않으려 해도 받게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삼세인과의 원리입니다. 원인에 따라 결과가 다른 것은 자명한 이치예요.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삶 하루하루를 허투루 살면 안됩니다. 근본 마음자리를 알고자 정진하며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노력한만큼 얻는것이 마음공부예요.
─불자로서 바른 종교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삼세 인과를 확신하고 연기법을 믿고 이해하는 지혜가 필요하겠습니다. ▲미국 링컨 대통령때 일화를 얘기해 볼까요. 한 친구가 한사람을 천거했습니다. 그런데 링컨은 친구가 소개한 사람의 얼굴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청을 거절했어요. 그러자 그 친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생각이 얼마나 건전하고 성실한 가에 따라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해야지, 다만 얼굴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사람을 쓰지 않기로 한 자네의 태도가 경솔하지 않은가"라고 나무랐어요. 링컨은 "자고로 마흔이 넘은 사람은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하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생각한 것이나 그사람 생활의 모든 것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나기 때문이네" 링컨의 이 말처럼 중년이 넘은 사람은 생활의 갈래대로 얼굴모습이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한평생 교육에 몸바친 사람이나 수행자의 얼굴, 정치가의 얼굴과 백수건달로 지낸 사람의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모두 다를 것은 자명하지요. 아무리 분장을 하고 표정을 꾸며도 그 차이는 금방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생활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없어지는게 아니라 그대로 마음안에 잠재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었더라도 좋지 않은 환경에서 계속해서 나쁜 생각을 하고 나쁜 짓을 한다면 그의 얼굴은 어느덧 악하게 변할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잠재의식속에 깃들어 있다가 그 사람의 성격을 만드는 것이 업의 실체예요. 운명을 지배한다는 힘을 일컬어 업과, 업보라고 합니다. 업과와 업보는 결코 한번 죽는 것으로 소멸되지 않아요. 업은 사람이 사망한 후에도 방향이나 형식을 바꾸어 새로운 업을 또하나 만들게 됩니다. 이러한 전환상태를 윤회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업보가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몇 세를 거쳐 공덕을 쌓으면 차츰 그 업보가 엷어지게 돼요. 그렇다고 업이 소멸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찮게 한 작은 과실도 업이 되어 우주간에 떠돌면서 사람의 여러 생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렇듯 업이 쉬지않고 계속 되는 것을 업업상인(業業相引)이라고 해요. 즉 하나의 행동이 다른 행동의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는 자업자득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장황하게 얘기하는 까닭은 그렇기에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잘 살펴서 진실한 언행, 선한 언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전체적으로 보아 이제 우리 국민의 지식수준과 사는 수준은 과거와는 비교가 안되게 높아졌고 모든 것을 보는 시각도 향상되었지만 너그러운 마음과 포용성있는 품성으로 사람들 사이의 틈을 메꾸어주는 덕(德)은 거꾸로 뒷걸음질 치는 것 같습니다. 비판의식은 국민 모두가 갖출 만큼 갖추었는데 다 자기는 제외시키고 남만을 탓하지요. 또 남을 용서하는데도 더 인색해졌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학력과 지식 수준은 정말 놀랄만치 높아졌어요. 많이 배운 사람들이 논리가 정연하고 비판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슬픈 일은 이들이 남에 대해선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자신들의 잘못은 전혀 보지 못하다는데 있어요. 설사 안다 해도 대부분 남의 탓으로 돌리지요. 살만한 세상이라는 것은 자기 잘못을 남앞에서 시인할 수 있고 또 남의 잘못은 용서해주는 심덕(心德)이 각자에게 있는 세상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혼란으로 봐야 할 정도로 갈등과 이기심, 불화가 많은데 이 또한 자기 잘못은 접어두고 남의 잘못만을 규탄하면서 자신의 목적과 주장을 관철하고자 하는데 그 원인이 있어요.
─사회가 이렇게 혼탁스럽기에 이러한 사회를 아름답게 창조해 나가는데 있어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심만큼 좋은 덕목은 없다고 봅니다. 인간이란 사회속에서 남과 더불어 어울리며 살지 않고서는 존재의의가 없지요. 앞으로는 세계적으로 여성의 역할이 점점 중요하다는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여성들이 갖고 있는 섬세함과 부드러움, 자비심 등이 이 사회를 보다 아름답고 평화롭게 한다는 전망이지요. 불교에서는 통칭 여성불자들을 ‘보살님’이라고 부르는데 의미가 각별한 칭호같습니다. ▲여성불자들을 통칭 보살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부르는 사람이나 그렇게 불리우는 사람들이나 대부분 보살의 위상과 실체를 잘 모르고 있는 듯 해요.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으레 그려려니 하며 받아들이지요. 그래서 보살이란 호칭은 그 본뜻과는 달리 어느덧 불교의 여성명사로 알려져 있어요. 보살은 스스로의 진리체득을 위한 끊임없이 정진하면서 타인을 위해 자기 헌신과 봉사를 생활화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예요. 즉 남녀의 구분이 아니라 생활의 가치에 구분을 둔 용어라고도 할 수 있지요. 부처님께서도 보살은 각유정(覺有情)이며, 대심중생(大心衆生)이라 하시며 불도에는 대심중생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다고 하셨어요. 보살행의 원만성취 없이는 성불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삶에 대한 반성없이 삼독심을 그대로 가슴에 품은 채 보살이라 불리우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보살님들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늘 돌아보고, 모범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보살님들만 제 위치에서 '보살'의 이름에 걸맞는 위상을 지니고자 노력해도 우리나라는 대번에 달라지고 이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보살은 불교를 이끌고 나가며 부처님의 은혜로 얻어지는 공덕을 중생에게 베푸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명심하세요. 보살적 인격이 많았던 시대에는 불교가 중흥했고 이념적으로 그 시대를 지도했을 뿐만 아니라 민중들 스스로 불교의 도덕적 가치를 절감했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보살없는 적막한 시대에는 불교내에서도 시비와 투쟁이 끊이지 않았고 민중들은 불교에 실망하고 식상하여 등을 돌렸습니다. 불교의 진리 즉 도를 깨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도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아끼고 돌보는 노력 또한 부지런히 하는 수행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진실로 보살로 불리워질 수 있는 겁니다. 보살은 불교적 인간의 행위요, 불교적 인간이 보살입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처럼 유일신을 모시는 종교가 아니고 자기형성의 종교라는 것은 다 알고 있지요. 자기에게 집착된 미망을 벗어나고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는 불성을 깨달음으로써 열반이라는 피안의 세계에 도달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불가피한 성불의 과정입니다. 성실한 보살의 생활없이 성불이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망상이라고 할 수 있지요. 끝없는 노력으로써 인간의 생활에 진선미를 다하며 인간을 창조하려는 길이 보살의 길이라는 것을 명심하세요.
자비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늘 과제이며 지향목표라 생각하세요. 자비의 바탕이 우리에게 있기는 하지만 중생이 관념만으로 자비를 실천할 수는 없어요. 자비는 우리의 망상과 번뇌, 잡념이 마음에서 사라진 경지에 이른 사람이 생명력 넘치는 훈기를 드러낼 때 비로소 자비를 베풀수 있으니 교만하거나 이기심에서는 자연히 나올 수가 없는 것이 자비입니다. 성불을 하자면 보살도의 수행이 전제조건이 돼야 합니다. 보살도 없는 성불은 원인 없는 결과와 같아요.
─어떻게 하면 중생들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천가지 만가지 생각을 굴리고 끊임없는 상념을 좇아 살아가기 바쁩니다. 우리 중생들의 마음은 항시 생각이 흘러 잠시도 멈추지 않습니다. 찰나찰나 마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하지요. 정처없이 흘러가는 그 마음이 모든 희로애락 길흉화복을 낳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우리가 받고 있는 고통은 모두 집착과 망상에서 나온 병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리고 나면 걱정할 일도, 미워할 일도, 싸울 일도 없어져요. 그러한 생각을 완전히 쉬어버리면 그 자리에 공공적적하고 불생불멸한 본래 마음자리가 드러납니다. 한 겨울이면 얼음이 꽁꽁 업니다. 그 언 것을 사람에게 집어던질 경우 사람이 다칠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그 얼음이, 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성질을 잃은 것은 아니지요. 봄이 와서 기온이 올라가면 그 얼음은 어김없이 물이 됩니다.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번뇌나 망상도 불심이 변한 것으로 볼 수 있어요. 마음을 모아 정진하여 번뇌업장을 해소하면 일체의 마음은 다시 불심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중생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을 넓게 쓰세요. 달마대사의 말에 "마음 마음 마음이여, 너그러울땐 법계를 덮지만 좁아지면 바늘끝도 용납않네" 라고 했습니다. 불자들의 신행생활이란 무한토록 마음을 잘 쓰는 용심(用心)의 생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인이나 현인이 되는 것이나 중생이나 마구니가 되는 것은 다 마음씀에 달려있는 것이니 마음을 잘 쓰는 지혜를 배워 실천에 옮기고 정진 또 정진 해야 할 것입니다. 대담=이경숙 부장
지난 10월 조계종 원로의원에 추대되신 이두스님을 주석하고 계신 청주 관음사에서 만났다. 폐사지였던 관음사는 스님께서 수년간의 걸쳐 불사에 헌신하신 결과 청주의 포교중심도량으로서의 사격(寺格)이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이두스님은 원로가 앞장서 "종단과 후학들이 바른 방향으로 갈수 있도록 덕(德)과 행(行)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원로의 소임이 막중함을 강조하셨다. 병을 앓고 나신후 회복기에 들어선 스님께서는 최근 하루 한 끼만 먹는 일종식을 하고 계시다고 주위에서 귀띔한다. 그래서인지 본래 원만하고 부드러운 얼굴이 더욱더 해맑게 보였다.
*약력 ·1929년 강원도 김화 生 ·51년 금오스님을 은사로 출가 ·56년 동화사 강원 대교과 졸업 ·59년 성균관대 철학과 졸업 ·71년 갑사 주지 ·78년 법주사 주지 ·91년 방글라데시 치타공 팔리대 철학박사 ·2000년 8월 금오문도회 운영위원장으로 선출 ·2000년 10월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현재 청주 관음사에 주석 ·저서에 <금강경 공성(空性)의 연구> <금강경·원각경 강술> <운수방담> <산속에서 산을 보는 법> 등.
─불교는 세계최고의 역사학자, 과학자들까지 매료될 정도로 매우 과학적이고 심오한 종교임에도 오히려 일부 불자들은 그 가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부처님가르침을 믿고 실천하기보다는 어떤 신이한 일에 의존해 만사형통을 바라고, 내면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밖으로 허상을 좇기 일쑤입니다. 최근에 일어난 ‘우담바라 파문’이 이를 대변하지요. 어지럽고 시시비비가 얽혀있는 현실에 파사현정의 장군죽비로 경책을 해야할 불교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지요.
▲아직까지도 일반 사람들의 불교에 대한 인식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현실생활과 유리된 종교인 것처럼 되어 있고 기도나 하고 영험이나 생각하며 이론적 인식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종교라는 생각이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은 불교처럼 과학적이고 생활적이며 합리적인 종교가 없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됐을까요. 불교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인식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억불숭유정책의 조선왕조 5백년동안 불교는 역사참여의 의지를 완전히 박탈당한 채 은둔자처럼 지내왔습니다. 결국 역사의 현장에서 소외된 불교는 몰락의 일로에서 사람들의 눈에 비사회적 종교로 격하된 취급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됐지요. 그러나 가장 현실참여적이고 사회적인 종교가 불교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고 우리의 역사가 불교에 요구하는 사회적 책임을 수용할 수 있으려면 포교의 일선에 선 불교포교사나 신도들 각자의 자각과 노력이 각별히 요구됩니다. 특히 불자들이 부처님가르침을 바로 알고 바로 행해야 일반 사람들의 불교인식도 변합니다. 무조건 영험이 있는 곳에서 기도한다고 복을 내려주는 분이 부처님이 아닙니다.
─요즘 금감원 등 사회지도층의 비리와 부정부패로 서민들은 열심히 살 의욕을 잃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예전보다 훨씬 잘 살게 되었는데도 우리 사회의 부패지수는 도리어 심각해지고 사람들도 양심과 도덕을 지키기보다는 무슨 방법을 쓰든지 돈을 많이 벌어 잘 살아봐야겠다는 풍조가 만연돼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종교 백화점'이라 할 정도로 다종교사회이고 따라서 종교인들이 많은데 종교인들이 사표가 되어 사회를 정화시키는 '거름장치' 역할을 해야 할 텐데요.
▲우리가 이기적 욕심에 사로잡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리와 죄악을 저지르는 것은 인과를 믿는 양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단적으로 말할 수 있어요. 부처님께서는 비구가 둘 이상 같이 다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비구에게 법문하는 기회가 적어지는 것을 염려하고 또 되도록 많은 사람을 제도하라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저마다 법문함으로써 중생들에게 법문 듣는 기회를 더 많이 만들어 주어 진리를 널리 펴라는 것이지요. 따뜻하고 맑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은 불자들의 사명이며 책임이기도 합니다. 불자들도 그냥 절에 다니고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를 명확히 알고 내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무슨 수단을 쓰든, 무슨 잘못을 저지르든 돈을 많이 모아 권력을 잡아 살면 잘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빼앗긴 사람보다 뺏은 사람이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겠지요. 그러나 인과의 도리는 엄격합니다. 남의 것을 거저 얻거나 빼앗은 것은 주기 싫어도 언젠가는 반드시 되돌려주어야 하며 남에게 준 것이나 빼앗긴 것은 받지 않으려 해도 받게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삼세인과의 원리입니다. 원인에 따라 결과가 다른 것은 자명한 이치예요.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삶 하루하루를 허투루 살면 안됩니다. 근본 마음자리를 알고자 정진하며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노력한만큼 얻는것이 마음공부예요.
─불자로서 바른 종교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삼세 인과를 확신하고 연기법을 믿고 이해하는 지혜가 필요하겠습니다. ▲미국 링컨 대통령때 일화를 얘기해 볼까요. 한 친구가 한사람을 천거했습니다. 그런데 링컨은 친구가 소개한 사람의 얼굴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청을 거절했어요. 그러자 그 친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생각이 얼마나 건전하고 성실한 가에 따라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해야지, 다만 얼굴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사람을 쓰지 않기로 한 자네의 태도가 경솔하지 않은가"라고 나무랐어요. 링컨은 "자고로 마흔이 넘은 사람은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하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생각한 것이나 그사람 생활의 모든 것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나기 때문이네" 링컨의 이 말처럼 중년이 넘은 사람은 생활의 갈래대로 얼굴모습이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한평생 교육에 몸바친 사람이나 수행자의 얼굴, 정치가의 얼굴과 백수건달로 지낸 사람의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모두 다를 것은 자명하지요. 아무리 분장을 하고 표정을 꾸며도 그 차이는 금방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생활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없어지는게 아니라 그대로 마음안에 잠재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었더라도 좋지 않은 환경에서 계속해서 나쁜 생각을 하고 나쁜 짓을 한다면 그의 얼굴은 어느덧 악하게 변할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잠재의식속에 깃들어 있다가 그 사람의 성격을 만드는 것이 업의 실체예요. 운명을 지배한다는 힘을 일컬어 업과, 업보라고 합니다. 업과와 업보는 결코 한번 죽는 것으로 소멸되지 않아요. 업은 사람이 사망한 후에도 방향이나 형식을 바꾸어 새로운 업을 또하나 만들게 됩니다. 이러한 전환상태를 윤회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업보가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몇 세를 거쳐 공덕을 쌓으면 차츰 그 업보가 엷어지게 돼요. 그렇다고 업이 소멸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찮게 한 작은 과실도 업이 되어 우주간에 떠돌면서 사람의 여러 생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렇듯 업이 쉬지않고 계속 되는 것을 업업상인(業業相引)이라고 해요. 즉 하나의 행동이 다른 행동의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는 자업자득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장황하게 얘기하는 까닭은 그렇기에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잘 살펴서 진실한 언행, 선한 언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전체적으로 보아 이제 우리 국민의 지식수준과 사는 수준은 과거와는 비교가 안되게 높아졌고 모든 것을 보는 시각도 향상되었지만 너그러운 마음과 포용성있는 품성으로 사람들 사이의 틈을 메꾸어주는 덕(德)은 거꾸로 뒷걸음질 치는 것 같습니다. 비판의식은 국민 모두가 갖출 만큼 갖추었는데 다 자기는 제외시키고 남만을 탓하지요. 또 남을 용서하는데도 더 인색해졌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학력과 지식 수준은 정말 놀랄만치 높아졌어요. 많이 배운 사람들이 논리가 정연하고 비판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슬픈 일은 이들이 남에 대해선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자신들의 잘못은 전혀 보지 못하다는데 있어요. 설사 안다 해도 대부분 남의 탓으로 돌리지요. 살만한 세상이라는 것은 자기 잘못을 남앞에서 시인할 수 있고 또 남의 잘못은 용서해주는 심덕(心德)이 각자에게 있는 세상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혼란으로 봐야 할 정도로 갈등과 이기심, 불화가 많은데 이 또한 자기 잘못은 접어두고 남의 잘못만을 규탄하면서 자신의 목적과 주장을 관철하고자 하는데 그 원인이 있어요.
─사회가 이렇게 혼탁스럽기에 이러한 사회를 아름답게 창조해 나가는데 있어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심만큼 좋은 덕목은 없다고 봅니다. 인간이란 사회속에서 남과 더불어 어울리며 살지 않고서는 존재의의가 없지요. 앞으로는 세계적으로 여성의 역할이 점점 중요하다는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여성들이 갖고 있는 섬세함과 부드러움, 자비심 등이 이 사회를 보다 아름답고 평화롭게 한다는 전망이지요. 불교에서는 통칭 여성불자들을 ‘보살님’이라고 부르는데 의미가 각별한 칭호같습니다. ▲여성불자들을 통칭 보살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부르는 사람이나 그렇게 불리우는 사람들이나 대부분 보살의 위상과 실체를 잘 모르고 있는 듯 해요.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으레 그려려니 하며 받아들이지요. 그래서 보살이란 호칭은 그 본뜻과는 달리 어느덧 불교의 여성명사로 알려져 있어요. 보살은 스스로의 진리체득을 위한 끊임없이 정진하면서 타인을 위해 자기 헌신과 봉사를 생활화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예요. 즉 남녀의 구분이 아니라 생활의 가치에 구분을 둔 용어라고도 할 수 있지요. 부처님께서도 보살은 각유정(覺有情)이며, 대심중생(大心衆生)이라 하시며 불도에는 대심중생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다고 하셨어요. 보살행의 원만성취 없이는 성불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삶에 대한 반성없이 삼독심을 그대로 가슴에 품은 채 보살이라 불리우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보살님들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늘 돌아보고, 모범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보살님들만 제 위치에서 '보살'의 이름에 걸맞는 위상을 지니고자 노력해도 우리나라는 대번에 달라지고 이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보살은 불교를 이끌고 나가며 부처님의 은혜로 얻어지는 공덕을 중생에게 베푸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명심하세요. 보살적 인격이 많았던 시대에는 불교가 중흥했고 이념적으로 그 시대를 지도했을 뿐만 아니라 민중들 스스로 불교의 도덕적 가치를 절감했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보살없는 적막한 시대에는 불교내에서도 시비와 투쟁이 끊이지 않았고 민중들은 불교에 실망하고 식상하여 등을 돌렸습니다. 불교의 진리 즉 도를 깨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도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아끼고 돌보는 노력 또한 부지런히 하는 수행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진실로 보살로 불리워질 수 있는 겁니다. 보살은 불교적 인간의 행위요, 불교적 인간이 보살입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처럼 유일신을 모시는 종교가 아니고 자기형성의 종교라는 것은 다 알고 있지요. 자기에게 집착된 미망을 벗어나고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는 불성을 깨달음으로써 열반이라는 피안의 세계에 도달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불가피한 성불의 과정입니다. 성실한 보살의 생활없이 성불이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망상이라고 할 수 있지요. 끝없는 노력으로써 인간의 생활에 진선미를 다하며 인간을 창조하려는 길이 보살의 길이라는 것을 명심하세요.
자비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늘 과제이며 지향목표라 생각하세요. 자비의 바탕이 우리에게 있기는 하지만 중생이 관념만으로 자비를 실천할 수는 없어요. 자비는 우리의 망상과 번뇌, 잡념이 마음에서 사라진 경지에 이른 사람이 생명력 넘치는 훈기를 드러낼 때 비로소 자비를 베풀수 있으니 교만하거나 이기심에서는 자연히 나올 수가 없는 것이 자비입니다. 성불을 하자면 보살도의 수행이 전제조건이 돼야 합니다. 보살도 없는 성불은 원인 없는 결과와 같아요.
─어떻게 하면 중생들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천가지 만가지 생각을 굴리고 끊임없는 상념을 좇아 살아가기 바쁩니다. 우리 중생들의 마음은 항시 생각이 흘러 잠시도 멈추지 않습니다. 찰나찰나 마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하지요. 정처없이 흘러가는 그 마음이 모든 희로애락 길흉화복을 낳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우리가 받고 있는 고통은 모두 집착과 망상에서 나온 병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리고 나면 걱정할 일도, 미워할 일도, 싸울 일도 없어져요. 그러한 생각을 완전히 쉬어버리면 그 자리에 공공적적하고 불생불멸한 본래 마음자리가 드러납니다. 한 겨울이면 얼음이 꽁꽁 업니다. 그 언 것을 사람에게 집어던질 경우 사람이 다칠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그 얼음이, 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성질을 잃은 것은 아니지요. 봄이 와서 기온이 올라가면 그 얼음은 어김없이 물이 됩니다.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번뇌나 망상도 불심이 변한 것으로 볼 수 있어요. 마음을 모아 정진하여 번뇌업장을 해소하면 일체의 마음은 다시 불심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중생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을 넓게 쓰세요. 달마대사의 말에 "마음 마음 마음이여, 너그러울땐 법계를 덮지만 좁아지면 바늘끝도 용납않네" 라고 했습니다. 불자들의 신행생활이란 무한토록 마음을 잘 쓰는 용심(用心)의 생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인이나 현인이 되는 것이나 중생이나 마구니가 되는 것은 다 마음씀에 달려있는 것이니 마음을 잘 쓰는 지혜를 배워 실천에 옮기고 정진 또 정진 해야 할 것입니다. 대담=이경숙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