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과 인천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로의 편입 단초
부산은 1876년2월3일 조일수호조규체결, 인천은 뒤이어1882년 제물포조약의 체결로, 산업혁명 이후 급속하게 발전한 산업화 문명과 어우러진 자본주의 세계 체제 또는 질서 속으로 편입된다. 부산은 조약 체결 직후 곧장 개항으로 이뤄진 반면 인천은 1883년 6월에야 정식 개항이 이뤄졌다.
한편 제1차 아편 전쟁은 중국의 아편 단속을 빌미로 하여 영국이 1840년에 일으킨 전쟁이다. 전쟁 발발 무렵 영국과 중국 사이에는 중국 신발의 인기로 인해 불공정한 무역이 계속되었다. 이미 우수한 옷감 제조 기술을 보유한 중국은 영국산 방직물을 수입할 필요가 없었다. 이에 따라 영국 상인들은 아편 무역을 통한 이윤 창출을 고안해냈다.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중국의 하층민들 사이에서 아편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청나라는 아편 단속으로 마약상들을 홍콩으로 쫓아냈다. 청나라의 아편 단속에 반발한 영국은 무역항을 확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1842년에 영국의 승리로 종결되었고, 영국 측은 난징조약 체결과 홍콩의 할양, 광둥 이외의 다섯 항구를 추가 개항토록 하는 성과를 얻어냈다.
아편전쟁의 여파로 구미열강들의 개방 파고는 높아졌다. 1853년 7월에 미국의 매슈 페리의 함대가 일본의 우라가 항에 입항(흑선내항, 黒船来航)하여 미국과의 수교를 요구하면서부터 일본은 군사·정치·경제 전체에 있어 긴밀하고 중요한 관계를 맺는 계기를 맞는다. 일본의 막부측에서는 갑작스러운 미국의 요구에 즉답하지 못하고 1854년까지 이를 유예하였다. 1854년 1월에 페리의 함대는 다시 돌아왔고 아직까지 대책을 세우지 못했던 막부는 결국 불평등한 미일수호통상조약를 조인하면서 문호를 개방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허약한 봉건막부체제가 무너지는 동시 명치유신정권(1868성립)은 급속한 근대화의 길로 내닫는다. 명치유신 정권은 국내적으로 안정, 대외적으로 열강들과 각축하면서, 일본이 미국에게 당했던 미일통상수호조약을 거꾸로 본받아 조일수호조약을 체결한다.
부산이나 인천은 이 시기, 지정학적으로 시련과 함께 개방의 격렬한 시험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부산은 지리적으로 남단에 위치하여 일본과 근접해 있었고 인천은 당시 수도인 한양의 보장중지(保障重地)였다는 점에서 상황은 유사하였다.
인천광역시 강화읍 관청리 615번지는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된 연무당(鍊武堂) 옛터이다. 연무당은 강화진무영 병정들을 훈련시키고 열병을 받던 곳이었다. 본래 진무영의 열무당(閱武堂)이 있었으나 낡고 비좁아 1870년에 서문안 시장을 헐고 연무당을 신축했던 것. 1876년 강화도조약이 최종 조인된 장소로 이곳에서 체결된 강화도조약에 의해 우리나라는 부산, 인천, 원산을 일본에게 개항하였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만 해도 왜관의 일본인은 86명이었는데 1878년 1,400명으로 불어난다.
1877년 동래부사 홍우창과 일본조계지관리관 콘도오와의 사이에 부산구조계조약(釜山口租界條約)협정으로 소위 일본전관거류지가 생겨나게 된다. 조계란 외국인이 그들의 거류지역내에 경찰 및 행정을 관리하는 조직을 둔 지역이다.
인천은 1883년 이후 일본인들에 의해 월미도가 개항장으로 선택된다. 이 지역은 조수간만의 차에도 불구하고 여러 섬들에 둘러싸여 상대적으로 풍랑이 거세지 않고, 간조 시에도 깊은 수심을 유지하는 수로가 있어 부두를 용이하게 축조할 수 있었다. 이 지역은 원래 인천군 다소면 해안지대 제물량 일대로, 인천군 관아가 설치되어 있던 인천읍내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은 부산의 경우 동래와 부산 북항의 부두가 상당히 떨어진 경우와 흡사하다.
인천 역시 개항이후 조계, 감리서, 해관의 설치가 구체화하면서 근대화로 치닫는다. 인천항의 조계는 1883년 9.30일에 조인된 인천구조계약서(仁川口租界約書)를 통해 설정되었고 뒤이어 청나라도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1884.4.2)을 체결하여 조계설정에 나섰고, 후에 미,영,독,러 등의 열강들도 각국 조계장정(租界章程)체결로 제물포에 각국 조계가 들어서게 된다. 그런데 동아시아 3국의 조계설정 과정에서 일본의 조계가 여러 나라가 함께 사용하는 공동조계적 성격이 강한 반면, 조선에 설정된 조계는 일본의 독점적 지위를 보장하는 전관조계로 설정되었다. 이는 일본의 조계가 주권 침해적 성격을 지녀 특별조계라는 별칭이 생겨날 정도였고 결국 조차지에 준하게 된다.
이리하여 대규모 선박이 접안하여 통상,거주 및 영업의 치외법권의 지위를 보장해 주는 개항장 조계의 확보를 통한 조선에 대한 경제적 수탈이 무차별적으로 이뤄지게 된다.
이러한 수탈에 대한 대안으로 마련된 것이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조선정부에 의한 부산,인천,원산에 설치된 감리서다. 감리서는 개항장에 설치되어 대외통상관계의 업무를 처리하던 기관으로 초기에는 해당지역의 부사가 감리를 겸하였으나 1892년에 이르러 외국 영사와의 교섭, 조계안의 일체 사무, 개항장에서의 상품수출입과 세액결정, 세금을 징수하는 관세 업무 등을 맡아하였다.
개항 당시 부산의 외교·통상 사무는 동래부사가 관장 처리하였고, 중앙정부에서는 변찰관을 파견하여 동래부사와 협의하여 외교업무 등을 처리하였다. 그 후 전문외교, 통상 사무를 위해 1883년 8월 19일에 부산에 감리를 두고, 동래부사가 겸하게 하였다. 당시 부산인구는 대략 1만명, 일본인이 80여명이었다. 1876년 우편국설치, 1883년 부산 해관(오늘의 세관), 전신전화국이 설치된다. 1890년(고종 27)에는 독립된 관서로서의 감리서(監理暑)를 설치하였으나, 1895년 5월 1일 폐지되었다가 이듬해 8월 7일 재차 설치(현 봉래초등 자리)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독점적인 지위를 갖게 된 일본은 동년 11월「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 설치, 내정을 실질적으로 관장하였다. 1906년 2월에 일본의 이사청 설치로 부산은 이사관이 부산의 일본영사와 동래감리와의 사이에 사무인계가 이루어졌다. 결과 영사관은 물론 감리제도가 폐지되고 일본전관거류지가 초량왜관이 있었던 용두산 일대 11만평에 설치되었다. 일본정부는 대륙침략의 전초기지로 부산항 매축·토목·철도·도로공사 등에도 주력하였다. 먼저 매축 및 부두공사시설을 시작하여 오늘날 중앙동 부근 바다의 매축을 1902년 7월 착공, 1905년 12월 준공을 보았고, 북빈 일대를 1902년 7월부터 1909년 8월까지 1, 2기에 걸쳐 41,374평을 매축하였다. 이외에 초량과 부산진 앞바다 37만평을 매축하였다. 부산이 오늘날의 용두산 일대 중심으로 근대화하는 획기적 상황을 맞는다.
산업혁명 자본주의 경제체제 구축 등 열강의 힘에 의한 지배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부산, 인천 공히 외세의 힘에 의해 굴욕적으로 개방화를 맞으면서 급격한 근대화의 길로 내닫는 운명을 겪는다.
부산 문화관광 해설사 허 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