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작가】
아! 명천 이문구님
조 주 행*
▥ 내 고향은 칠갑산과 매운 고추, 그리고 구기자로 유명한 청양이다. 청양하고도 화성면 화강리이다. 화강리라는 지역이 보령시하고 경계지역이라 행정구역상으로는 청양군이지만, 생활권은 보령시에 속한다. 관촌수필의 무대인 관촌리는 지금도 사촌형님이 살고 계시다. 그러기에 관촌수필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와 애정을 주는 작품이다.
관촌수필의 충청도사투리는 내 입에 밴 말이라, 이 소설을 읽으면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착각을 일으킨다. 마치 입담 좋은 고향 형님이 바로 옆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지 소설이 아니다. 사는 것이 적적하거나, 고향이 그리울 때 관촌수필을 꺼내 읽으면 바로 고향의 사랑방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든다.
잠시 눈을 감아본다. 그러면 고향산천이 눈에 어리고, 흙냄새와 담뱃진에 절어버린 골방의 등잔불 아래 졸음을 쫒으며 앉아 있는 내가 된다. 관촌수필은 나에게 최면을 유도하는 종소리와 같다. 몽유병 환자같이 고향으로 들어가는 종소리인 것이다. 활자들은 소리로 살아 날아오른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살아나서 방안 가득히 앉아 왁자지껄 떠드는 가운데 나도 한몫 끼어 “그건 그게 아닌겨, 제는 뭐도 모르는 것이 떠들긴”하면서 말장단을 맞추는 내가 된다.
▥ 읽고 읽었다. 고향 말이 그리워, 어린 시절이 그리워, 소리 내어 읽으면 고향 골방 흙벽에서 묵은 먼지가 말소리에 내려앉고, 사람들의 졸린 눈에 말소리가 힘을 잃어 갈쯤 되면, 종이로 만든 천장에서 쥐들은 달음질을 시작한다. 불도 시르 죽죽 까물까물 흔들린다. 이쯤 되면, 나는 그 골방에 혼자 남아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잠든 모습을 본다.
이문구님의 충청도사투리와 더불어, 이북사투리의 대가인 백석 시인의 시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도 소리 내어 읽어 본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대롱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우에 뜻 없는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도 않고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되새김질하는/ 것이었다 …
울었다. 웃었다. 하다, 도대체 이 분은, 이 분은 참말로 사람을 미치게 만드시네 “증말 환장하겠네” 하며, 뒷표지에서 고목나무를 깍고 있는 작가의 사진을 얼마나 들여다봤던가.
그 이후 이문구님의 소설을 찾아서 헌책방을 헤매고 돌아 다녔다. 보기만 하면 집에 있어도 사고 또 사고 샀다. 동시, 동화, 수필집, 소설집 등을 보이는 대로 사 모았다.
‘오늘도 걸었다. 오늘도 어지간히 걸었다. 오늘도 걷는 것이 일이었다.’라고 매월당 김시습은 쉰 고개에 이르러 말하였다. 이문구 선생님은 ‘오늘도 썼다. 오늘도 어지간히 썼다. 오늘도 쓰는 것이 일이었다.’라고 할 만큼 평생을 작가로서, 글을 생업으로 쓰신 분이시기에 직업 바꾸기를 젓가락질하듯 하는 세태에 머리 숙여지는 것이다.
▥ 사포곶(沙浦串)을 소설공간으로 하고 있는 「해벽」은 국토개발사업으로 고향마을을 잃어가는 토착민들의 가슴앓이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고향을 사랑하고, 누우면 바다 내음이, 바다소리가 들리는 작가에게 갯벌의 상실은 곧 고향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리라.
더욱이 숭산(崇山) 마루에는 미군부대가 자리하여 아이들조차 소풍 갈 공간을 내주게 된다. 성숙한 딸들이 유흥업소를 찾아 나서고, 아내가 미군에 의해 윤간당하는 대지는 이미 고향의 아늑함을 찾을 수 없다. 오서산 아래에 청라저수지가 축성되고, 간척공사로 생활의 터전을 잃은 사포곶 사람들은 간척지 사업의 노동자로 전락하게 된다.
이문구님에게 있어 고향을 파괴하는 국토개발이나, 미군기지의 배치는 아무 의미가 없다. 토착민들의 행복한 삶을 빼앗아 가는 외압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기에 고향을 지키고자, 고향에 둥지를 틀고 앉아 고향을 지키다, 옛고향이 그리워 여로에 오른 것은 아닐까..
▥ 묘하게도 나와 같은 병으로 고생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의 이 아픔을 알기에 더 그리워하였다. 인연은 닿지 않았다. 화강리 바로 옆 동네가 청라인데 거기에 내려와 계실 적에도 뵙지 못했다. 나는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이 분을 그리워한다. 이 분이 들려주는 고향얘기는 지금도 책만 펼치면 언제든지 들을 수 있다. 작고하셨다는 보도를 보고 문학잡지 “작가세계”에 실린 이문구 특집편의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보았다. 러시아 가서 찍은 사진이며, 문학상을 타고 찍은 사진, 가족사진 등을 본다. 인물도 훤칠하시다. 범상에 기인의 상이다. 저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주눅이 든다. 겸손해지고 싶다. 고향 형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기분이다. 아, 그러면 “편히 앉게” 하는 말이 곧 들릴 것 만 같다. “괜찮아유, 되-슈”하면서 오금쟁이를 슬쩍 펴는 나를 본다.
▥ 작고 후 각종 신문을 스크랩하면서 느낀 것은 한결같이 실천하는 문인이었고, 겸손하시었다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말보다는 몸으로 실천하셨다고 한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자리를 인계했던 전임자 신경림 시인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시절, “스스로 겁이 많다고 하면서도 일에는 항상 앞장섰던”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권위주의적 정권에 대항하기 위한 시위를 모의하는 저녁이면 “난 무서워서 안되겠다”고 꽁무니를 빼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이튿날 약속 장소에 나가보면 전날 밤 비분강개를 설토하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이씨 혼자 나와서 피켓을 만들고 있더라는 얘기다. “그래도 약속인데 안 나갈 순 없잔여”라고 말하며 미소 지었다고 한다. ≪북스 조선≫의 김광일 기자는 ‘상상력의 창’에서 그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겸손하신 분이었다. ‘줄반장 출신의 줄서기(학고재刊)란 산문집을 보면 스스로를 ‘줄반장 출신의 보통사람’이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반장이나 부반장 자리는 언감생심 쳐다도 못 보기 마련이었다. 그렇지만 줄반장은 줄이 몇 줄이건 줄마다 하나는 있는 자리인지라 줄반장 자리 하나는 아무 노력 없이도 저절로 차례가 돌아오곤 하였다.” 이처럼 넉넉한 해학으로 그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셨다.
“하늘에 저 구름도 나와 남남이 아니지”라고 한 매월당 김시습의 말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다. 구름이 되신 것인가. 아니면 지수화풍으로 흩어져 충청 땅 어디 메에 오늘도 걷고 계신 것일까. 유언으로 “당신 이름으로 어느 문학상도 만들지 말라”하셨다고 한다. 화장을 하셨다고 한다. 그 분다운 모습이시다.
나에게 고 이문구님은 고향의 말을 영원히 활자로 남겨주신 분이고, 삶의 굳고 정한 갈매나무 같은 분으로 남아 있다.
* 충남 청양 출생 / 법학박사과정 수료 / 수필가 / imjhc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