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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론
안도현 시의 시적 대상과 인간
김택중
1. 작가와 독자
문학은 무엇보다도 독자와의 관계가 다른 것에 우선한다. 독자는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받는 입장에서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작가의 독창성에 기인한다. 작가적인 상상력을 따라가는 독자의 반응 역시 작가가 의도적으로 드러낸 대상을 통해서 접근 하게 되는데 그의 체험과 경험의 함축적인 모습을 통해서이다.
한 작가의 작품 속에 내제되어 있는 경험과 체험을 재생하는 기능은 역시 독자의 체험과 결합하면서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문학과 독자와의 관계를 형성하는 작가의 역량은 독창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작가의 독창성은 단순하게 각각의 개별적인 차이로만 인식할 수는 없다. 문학은 객관성을 포함하고 있는 개성만이 독자에게 감정과 정서를 환기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작가의 개성을 만드는 독창성은 일반적인 관계를 떠나 대상의 실체를 정확하게 인식하는데 생명력을 갖으며 그러한 방법으로 ‘낯설게 하기’가 효과적으로 반영된다. 개성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특별한 작품은 시적 대상의 대응적인 관계에서 무의미한 충돌이 아니라 생동하는 힘을 갖게 된다. 시 작품의 단순한 것은 복잡성을 토대로 독자와 반응하며, 복잡한 것은 내적 구조의 심미적인 단순성을 획득하면서 특별한 작품으로 기억된다. 따라서 구조의 단순성과 복잡성 여부를 떠나, 독자에게 심미적 일관성을 지닌 채 다가오는 작품이야 말로 독자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문학의 창작기법에서 독창성을 대변하는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의 특징은 언의가 관습화되어 자동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들을 낯선 것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다. 즉 실용적인 것으로 인하여 자동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언어를 파괴하여 그 쓰임을 바꾸어 놓는 것이다. 이러한 시에서 효과는 시적 구성체의 모든 언어를 낯설게 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 일부의 핵심적인 실마리를 갖고 있는 부분에서 제시하게 될 때 그 효과는 기대할 수 있다. 작가의 개성적인 작품을 창작하는 데 친숙한 언어의 생소화가 작품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살펴보는 일은 시가 읽히는 중요한 요소를 고찰하는 것과 같다.
그러한 의미에서 안도현의 시는 독특한 개성이 있어 많은 독자들에게 호감을 준다. 첫째로 그의 시적 의미가 일반적인 난해성을 벗어난다는 것이다. 또 하나 그의 시는 쉽게 접할 수 있고 그의 시적인 의미에 독자들이 공감하는 것이다. 시 작품은 독자의 정서를 변화키고 감동하게 하는 시문학으로 전환되는 내적인 구성 법칙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일반 독자의 접근성을 용이하게 하는 내적인 심미성을 파악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안도현의 작품은 러시아형식주의에서 핵심적인 의미를 지니는 ‘낯설게 하기’의 전형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 제시되는 시적인 동기와 제재에 대한 시화의 개념을 정리 해보는 일은 그의 시를 파악하는 중요한 열쇠로 자리 한다.
2. ‘낯설게 하기’와 인간
언어는 단순한 의미의 기능을 초월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언어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대표적으로 언어의 소리인 음악성과 동적인 이미지가 그것이다. 형식주의 자들은 “한 작품의 통일성은 폐쇄된 대칭적인 합일체가 아니라 하나의 역동적 총합을 말하며, 문학작품의 형식은 동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라고 한다. 여기서 하나의 ‘역동적인 총합’과 ‘문학형식의 동적’인 것은 외적으로 시형식의 변화와 내적인 관점에서 의미를 포함한 이미지의 전환적인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소쩍새는 저녁이 되면
제 울음소리를 산 아래 마을까지 내려 보내
방문을 닫아 두어도 문틈으로 울음을 얇게, 얇게 저미어서 들이 밀어준다
머리맡에 쌓아두니 간곡한 울음의 시집이 백권이다
고맙기는 한데 나는 그에게 보내줄 게 변변찮다
내 근심 천근은 너무 무거워 산속으로 옮길 수도 없고
내 가진 시간의 밧줄은 턱없이 짧아서 그에게 닿지 못 할 것이다
-「전전긍긍」에서
시인에게 직관은 오랜 경험과 대상에 대한 각고의 관심에서 비롯된다. 일상에서 경험한 바가 시적 대상물과 신비적으로 결합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것을 떠올리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잠재되어 있던 것들을 단념하고 사고의 과정은 생략한 채 관심을 다른 것에 돌릴 때 불현듯 섬광처럼 갑자기 직각적인 통찰의 직관이 떠오르는 것이다.
안도현 시의 이미지 역시 동적인 관점에서 직관이 작용하고 있다. 소쩍새라는 시적 대상의 인식하는 방법은 동적인 모습으로 시인의 곁에 다가오는데 그것은 새의 이미지가 소리의 이미지로, 그것이 다시 인간 행위의 모습으로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시적 화자의 소쩍새의 시화과정에서의 변화는 의지를 표현하는 인간의 모습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소쩍새의 울음은 “산 아래 마을까지 내려 보내는” 인간의 동작과 행위의 자의적인 모습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시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자의적인 모습으로 전환하는 ‘낯설게 하기’의 전형적인 모습을 띤다. 소쩍새의 소리를 “문틈으로 울음을 얇게, 얇게 저미어서 들이 밀어 준다”는 이미 소리를 넘어서 시각화한 동시에 동작의 상태를 표현 하면서 소리를 초월하는 시적 의미로의 확산을 시도한다. 시적 화자의 주고받는 동작의 활동적인 모습은 소쩍새와 서로의 의미를 주고받는 것이다. 여기서 시적 대상이 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교감을 통해 대화가 이미 가능하며 행위적인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소쩍새의 소리를 “머리맡에 쌓아두니 간곡한 울음의 시집이 백 권이다”는 결국 시인과의 교감을 이루는 소쩍새 역시 시인으로 인식한다. 소쩍새는 시인이라는 축약된 모습으로 시적 자아와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소통하고 있다. 대상이 인간화로 전환하는 역동적인 모습은 언어의 습관적인 일상화를 파괴하면서 획득하는 의미의 전환이다. 화자가 주고받는 상상의 이미지는 심화과정에서 독백으로 드러난다. 즉 “그에게 보내줄 게 변변찮다/ 내 근심 천근은 너무 무거워 산속으로 옮길 수도” 없는 안타까움이 그의 시에서 드러낸다. 또 하나는 화자가 수많은 ‘근심’을 ‘무게’로 전환하면서 그 무거움 때문에 대상에 보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념의 ‘시간’을 밧줄로 환산 하면서 그 길이가 너무나 짧은 것이 문제이다. 시적 화자가 소쩍새에게 시집 백 권 불량을 받았어도 그는 대상에게 하나도 줄 수 없는 것이 소통의 문제로 자리 잡는다. 위에서 소통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이다. 소쩍새와 인간은 서로 교감하고 소통해야 하는 것이다.
사과나무에서 사과 꼭지를 따는 소리
가위로 탯줄을 자르는 소리
으앙, 하고 사과가 허공을 떼밀어내는 소리
처녀들이 사과를 받아서 두 손으로 닦은 뒤에
차곡차곡 궤짝에 담는다 사과가
코를 막고 한알씩 눈을 감았기 때문에
궤짝 속이 어두워진다
궤짝 바깥에는
둥근 잇몸 자국을 찍으며 처녀들이
사과를 한입 베어 무는 소리
사각사각 달이 환하게 뜨는 소리
그때 과수원으로 트럭이 오면
사과나무는 덜컹거리기 시작한다
-「덜컹거리는 사과나무」에서
위에서도 식물 역시 원초적인 인간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질서 짓는 중심에 놓여있다. 사과나무와 사과의 관계 역시 인간의 태어나면서 울음우는 소리를 탄생의 상황으로 재현해 놓고 있다. 사과나무는 어머니, 사과는 갓 태어난 아이로 “으앙, 하고 사과가 허공을 떼밀어내는 소리”는 어머니와 세계의 이중적인 의미의 전환을 시도한다. 사과는 울음을 울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해 발돋움 하는 현실 속의 아이로 탄생한다. 산모와 아이 그리고 아이를 받아내는 ‘처녀들이’ 산파 역할을 하고 있다. 시적 화자에 의하면 사과는 나무에 열리는 것을 따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며 세상을 향해서 나가는 것이다. 현실과 사과는 인간의 태어남과 동일시되면서 주체로 자리하고 중심에 놓인다. 따라서 사과가 곧 인간이며 그 행위 역시 인간과 동일한 행동을 한다. “코를 막고 한 알씩 눈을 감았기 때문에/ 궤짝 속이 어두워” 진다. 그것들은 ‘코를 막기도’ 하고 ‘눈을 감기도’ 하는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고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시인의 인간에 대한 집요한 천착은 시적 대상을 인식하면서 얻은 낯설음을 표현하고 있다. 사과나무와 사과, 사과를 받는 처녀들이 사과를 베어 무는 소리는 역시 ‘달을 뜨게’ 하는 소리와 동일시하면서 소리가 행위적인 동작으로 전환되고 있다. 사과나무도 인간이기 때문에 물음을 던질 수 있고 사유할 수 있는 상태이면서 “또 다른 사과나무의 옆구리를 찔러보는” 행위적인 인간이다.
그의 시에서는 자연현상의 하나인 눈보라 역시 인간이다. 그러므로 “눈보라는 떼쓰며 엉겨 붙듯이 미닫이 유리문을 두드리고” 있고 “시장 골목 선술집만 찾아다니며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을 가진 시적 대상의 어울림이 그의 시 속에서는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 특징이다.
3월도 스무닷새나 눈곱을 떼어냈는데
참말로 눈이 내리는 것입니다
도톰하게 입술 내밀고 있는 목련 꽃망울들한테
도대체 뜬금없이 달려들어 뭘 어쩌자는 것입니까?
꽃망울 속에 들어 있는 꽃들이
제 귓불을 만지며 앗 뜨거워, 뜨거워하며
난감해하는 모양 보자는 것 아닙니까?
자글자글한 햇빛이 끊는 봄의 냄비 뚜껑을
좀 열어보려다가
이거 신세 조지게 생겼습니다.
-「3월에 내리는 눈」전문
시적 화자에게는 뜻하지 않게 ‘3월에 내리는 눈’도 인간이며 ‘목련’ 역시 인간이다. 봄을 대표하는 3월은 "스무닷새나 눈곱을 떼어" 내고 있고, 목련이 “도톰하게 입술 내밀고”, “제 귓불을 만지며 앗 뜨거워, 뜨거워”하는 모습도 인간이다. 그러면서도 시적인 대상이 인식하고 있는 눈의 움직임 역시 질문의 대상에 되고 있다. 주체인 목련은 눈을 타자로 인식하고 있다. “도대체 뜬금없이 달려들어 뭘 어쩌자는 것입니까?”와 “난감해하는 모양 보자는 것 아닙니까?”라고 생각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는 “목련은 생각한다. 고로 목련은 존재 한다”로 전환된다. 결국 목련은 사유적인 존재의 실체와 맞닿아 있다. 그리고 목련은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넘어서 계절을 지배하는 초월자의 절대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즉 자연의 질서와 법을 넘어서 존재한다. 자연의 순환적인 시간을 인식하며 시적 대상은 “자글자글한 햇빛이 끊는 봄의 냄비 뚜껑을/ 좀 열어보려다가/ 이거 신세 조지게”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군산 가는 길에 벚꽃이 피었네
벚나무는 술에 취해 건달같이 걸어가네
꽃 핀 자리는 비명이지마는
꽃 진 자리는 화농인 것인데
어느 여자 가슴에 또 못을 박으려고-----
돈 떨어진 건달같이
봄날은 간네
-「벚나무는 건달같이」전문
인간인 시적 대상들의 움직임과 그들의 생각들이 독자에게 다가오는 것은 희로애락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의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생동감이 넘치는 인간의 모습을 띤 시적인 대상들이기 때문에 더욱더 관심의 대상이 된다. 위에서 인간이나 벚나무나 봄을 맞아 흥분되고 화농이 든다. 봄이 맞이하는 생물 역시 겨울의 온갖 풍상을 겪고 봄을 맞이하고 꽃을 피우는 것이다. 봄의 찬란한 계절에 인간의 감정이 어떻게 변화하고 삶의 의미가 어떤 과정에 놓이는가를 벚나무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주체할 수없는 감정과 만물을 깨우는 자연의 참모습이 인간화된 벚꽃나무를 통해 대리하고 있다. 인간처럼 시적 화자가 부려 쓰고 있는 벚나무는 술을 마셨다. 술의 지배적인 속성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성을 넘어서는 감정의 도취는 봄의 계절적인 요인과 맞아 떨어진다. 그것은 봄의 여성성과 부합되면서 상대적으로 남성의 이미지를 포함한 행위적인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벚나무는 아니마와 아니무스적인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어느 여자 가슴에 또 못을 박으려고…”, “떨어진 건달 같이/ 봄날은” 가는 것이다. 또 하나는 아니무스적인 여성을 드러낸다. “군산 가는 길에 벚꽃이” 피었고 “꽃 핀 자리는 비명이지마는/ 꽃 진 자리는 화농”이 드는 것이다. 인간정신의 심리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의 모습인 동시에 표현하는 봄의 이미지는 인간의 정서를 갖고 있는 초월적인 모습이다. 고정되고 정적인 이미지의 벚꽃이 인간이 되면서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분으로 봄을 맞이하고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고 있다.
시적인 대상이 자연물이든 자연현상이든 관계없이 시적 화자는 끊임없이 사적인 내밀 화를 통해 살아 움직인 역동적인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시적 화자의 내밀 화는 독자의 의식을 자극하고 독자의 관습적인 사유에 대하여 충격을 준다. 일상성을 비일상성으로 지각하는 행위를 통해 독자가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감정의 변화를 불러온다.
시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서 여러 가지의 목소리가 존재한다. 여기서 목소리의 의미는 비유적이며 동작을 포함한다.
마당가에 석류나무 한 그루를 심고 나서
나도 지구 위에다 나무 한 그루를 심었노라,
나는 좋아서 입을 다물 줄 몰랐지요
그때부터 내 몸은 근지럽기 시작했는데요,
나한테 보라는 듯이 석류나무도 제 몸을 마구 긁는 것이었어요
새잎을 피워 올리면서도 참지 못하고 몸을 긁는 통에
결국 주홍빛 진물까지 흐르더군요
그래요 석류꽃이 피어났던 거죠
나는 새털구름 같은 마룻장을 뜯어다가 여름내 마당에 평상을 깔고
눈알이 붉게 물들도록 실컷 꽃을 바라 보았지요
나는 정말 좋아서 입을 다물 수 없었어요
-「석류」에서
시의 인식은 언어의 변증적인 모습을 띠며 삶의 변증적인 요소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시는 어디까지나 인식하면서 이루어지는 형상의 이미지이다. 그 무엇인가를 다른 대상의 무엇인가로 교환하는 일이다. 시인이 시를 쓰는 힘은 대상에 대한 인식의 구체화이며 형상을 꾸며내는 일이다. 이러한 점은 상상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쉽게 보아 넘길 수 있는 일을 시인은 새롭게 보아내고 그 의미를 갖게 만드는 일이다. 시인의 창조성은 새롭게 보아낸 것의 구체적인 형식으로 꾸며내는 일이다. 블래이크가 눈을 통해서 보는 것이지, 눈을 가지고 보지는 않는다고 하는 말은 시인의 창조적인 능력을 잘 표현하는 것이다.
[석류]에서 시적 화자는 “마당가에 석류나무 한 그루를 심고 나서” 바라본다. 이것은 눈을 가지고 석류나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서 보는 것이다. 눈을 가지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시인은 상상력을 통해 스스로 볼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변용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보라는 듯이 “제 몸을 마구 긁는” 것이고 “결국 주홍빛 진물까지” 흐르는 것을 보는 것이다. 시적 화자가 석류나무를 심어 놓고서 세계를 자아화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다. 물론 여기서도 그의 시의 중심은 결국 대상을 인간으로 교환하는 시적인 능력을 보여 주고 있다. 시적 자아와 서로 교감을 하고 있다. 석류를 심고서 “그때부터 몸이 근지럽기 시작”하고 석류나무 역시 “잎을 피워 올리면서도 참지 못하고 몸을” 긁다가 “진홍빛 진물이 흐르고” 마침내 “석류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화자의 시적 구조화의 시도는 인간성을 포함한 이미지를 구체적인 「개벌에서 놀던 강」과 「깃발」에서도 구현되고 있다.
서해에 닿기 전에, 만경강과 동진강은
개벌에 이르러
진흙에다 몸을 문지르며 좀 놀았는데요
밤이 되면
물가에 알을 슬어 놓고는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도둑게들의 발자국소리를 다 듣고
손바닥만한 대합이 달빛을 한입에 넙죽 받아먹는 소리를 다 듣고
갯지렁이가 허리를 오므렸다 폈다 하면선 자기 삶을 밀고 나가는 소리를 다 듣고
-「개벌에서 놀던 강」 에서
깃발을 뜯어먹으려고
가까이 다가갔다가
바람은 깃발한테 붙잡혔다
깃발은 손아귀로 바람을 움켜쥐었다가 폈다 하면서
또 못된 짓 할래, 안 할래
자꾸 묻는다
-「깃발」전문
그의 시는 언제나 어떻게든 세계와 마주하고 있다. 시적 화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대상들의 관계는 인간과 세계 속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 모든 관계는 인간으로 인식하는데 따른 감정의 교환을 들 수 있는데, 시인의 상상력은 시적인 대상물 자체에 생명성을 부여하는데 있다. 이러한 것들이 물론 ‘낯설게 하기’ 수법 중의 하나라는 점은 이미 전술한 바 있다. 대상을 보는 관점은 가장 흔한 것들의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데 있다. 시적 화자는 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상대방을 인식하며 진술 한다. 강은 갯벌에 이르러 “진흙에다 몸을 문지르며 좀 놀았는데요”와 “바다하고 한 몸이 되었다는데요”에서 상대방을 의식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깃발에서도 “또 못된 짓 할래, 안 할래”하면서 타자를 인식 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엘리옷의 세 가지 목소리, 첫째 자신에게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 둘째 청중에게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 셋째 시인이 만들어낸 인물에게 시로써 말하게 하는 목소리인데, 이는 상상적인 인물이 상상적인 타자에게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의 목소리 중 안도현 시의 목소리는 세 번째 제시된 시적 화자가 타자를 상대로 해서 진술하고 있는 경우이다.
따라서 만경강과 동진강은 시적 화자를 대변하여 “진흙에다 몸을 문지르며” 놀고 “도둑게들의 발자국소리를 다 듣고”, “갯지렁이가 허리를 오므렸다 폈다 하면선 자기 삶을 밀고 나가는 소리를”다 듣는 인간이다. 시인의 내적인 의식의 흐름은 세계화의 구체적인 시각이 무생물과 생물, 인간과 동물을 모두 포함하여 인간의식을 통해서 삶의 양태를 드러낸다. 또 하나는 시적 화자의 퍼소나적인 요소이다. 인간은 언제나 그의 삶의 모습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개별화된 참모습을 드러내는데, 여기서 시인에 의해 제시되는 대상들은 자신의 모습을 대리하면서 자유롭게 표현한다. 시는 고도의 함축적이 것이지만 위의 시들에서 제시되는 말하고 듣고 생각하는 그 모든 시적인 대상물들은 작가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러한 인물들은 비록 사람의 형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감정을 지니고 있는 퍼소나적인 존재이다. 시적 화자는 강과 바람을 인간화를 통해서 부조리한 현실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자신이 문제시하는 것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3. 시적 대상과 인간
안도현 시인의 시적인 원형은 순수성이다. 그는 시적인 대상을 ‘낯설게 하기’의 방법을 도입하여 시를 창작하는데 그에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자연에 대한 인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의 순수성을 대변하는 것이 맑고 순수한,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서 이미지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에게 다가오는 인식의 정점에는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지 않으면서 자연의 오감을 터득하는 역동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소리이다. 소리 나지 않는 것을 소리 나는 것으로 전환하는 이미지의 전환이 그의 시에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소리를 접하는 시인의 인식은 인간의식을 포함한 의미를 지니며, 그의 의미를 읽어내는 탁월한 시적 자아가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의 행동에 늘 제약이 따르게 마련이다. 현대인들의 문명화된 복잡한 현실 생활 속에 건강한 활력을 불어 넣는 것은 그의 시적인 대상에 대한 건강한 시정신이 자리한다. 따라서 그의 시를 읽는 독자 역시 그의 시에 감염되어 건강한 정신을 환기한다. 그의 시는 독자들에게 맑고 담백한 청량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적 대상은 인간처럼 행동하고 사고하는 시의 인간이다. 그는 시를 통해 일상에 길들여져 있는 독자의 심금을 울리고 지루한 삶을 전환시킨다. 일상의 관습을 넘어서는 비일상적으로 그동안 가지지 못한 새로운 많은 것들을 지각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작은 눈으로 작은 세상을 크게 보기
- 전성태의 소설『여자 이발사』를 읽는 한 방법-
이혜경
“저는 이렇게 말했죠. 제가 생각하고 믿는 바에 따르면, 흙․공기․물 그리고 불, 이 모든 것은 혼돈 그 자체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하나의 큰 덩어리를 형성하는데 이는 마치 우유에서 치 즈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구더기들은 천사입니다.
…….”
- 카를로 진즈부르그『치즈와 구더기』중에서-
1.
세상을 어느 하나의 틀에 맞추어 분석하고 이해하던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하였을 것이다.
2.
전성태의 장편소설『여자 이발사』는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피해자 없는 범죄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음에도 지금의 세상에는 이러한 범죄의 유형이 분명 존재한다. 가령, ‘마약’과 관련한 범죄들이 그렇다. 자, 눈을 조금만 더 크게 떠보자.
‘가해국 출신의 피해자들. 나는 이분들의 삶의 처지와 조건을 지켜보면서 민족주의 문제를 고민했다.’(5쪽).
이 같은 작가의 말처럼 세상에는 ‘가해국 출신의 피해자들’도 엄연히 존재한다. 소설은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3.
작가도 말하고 있듯이 이는 ‘민족주의’와도 연관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게 다는 아니다. 여기에는 그 같은 거대 담론보다는 오히려 한 인간의 안타까운 일생으로 말미암은 민족주의 직전 단계로 회귀하는 작은 사연이 있을 뿐이다. 물론 거기에서 민족주의를 초들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작가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도 이것이었는지 모른다. 한 인간이 한 세상을 변화시키고, 또 제3자로 하여금 그것을 지켜보게끔 하는 일이란 결코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산물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아물지 않은 상처일 뿐으로 누구의 피부에도 얹혀질 수 있는 흔적이기에.
4.
제목이 “여자 이발사”이니 만큼 소설에는 여자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 여자는 조금은 특수한 면모를 띠고 있다.
우선은 일본인이다. 게다가 한국인의 아이를 가진 일본인이다. 문제는 그녀가 살아가는 땅이 한국이라는 데 있다. 아니, 이 사실이 곧바로 직접적인 문제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 시간적 배경이 현재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살던 시대는 현재보다는 조금은 앞선 시대였다.
그 시대는 외국인이건 아니건 여자에게는 가혹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제 세상은 변했다. 다양한 문화의 양산은 남자들로 하여금 무시로 미장원(소위 헤어 아트 숍이라는 이름의) 출입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지만, 아직도 여자가 순수한 의미로 머리를 단장하기 위해 고객의 입장에서 이발소를 출입하지는 않는다. 하기사, 이발소라는 곳을 이제 추억의 장소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니 이 또한 문화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세상은 아직 변하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쯤에서 이 소설의 졸가리를 대략이나마 부연해 정리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자, 한 여자가 등장한다. 그 여자의 이름은 ‘에이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인이다. 이 여인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서 한국인(조선인)과 만나 그의 아이를 가진 채 광복이(피해 당사자인 우리의 경우에 한정되기는 하지만) 되어 낯선 땅에 들어온다. 그런데 영원한 동반자가 될 것 같았던 그 조선인은 고국 땅을 밟자마자 내빼버린다. 이제 이 여인은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때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난다. 앞의 남자는 김태수이고, 뒤의 남자는 이진식이다.
소설은 바로 이 ‘이진식’이 여든 두서넛 살에 맞이하는 죽음으로 시작한다.
5.
바로 앞에서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난다’고 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에이코의 시각에서 보는 경우일 따름이고, 전체적인 서사에서 이진식은 이미 여러 차례 중요한 작중인물로 등장하곤 한다. 그건 김태수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진식과 김태수는 얽혀들기 마련이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일종의 양가성 같은 것인데 굳이 구분해 본다면 이진식은 조금 더 선한 쪽에, 김태수는 딱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그 반대편에 서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러한 대비도 오로지 에이코의 시선에 한정할 경우이다. 하지만 김태수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여기서 이 소설을 읽어내는 한 가지 방법이 배태될 수 있을 것이다. 적과 적이 아닌 자를 구별해 내는 기술(記述)은 흔히 역사의 기술성(技術性)에 붙여져 언제나 이를 들여다보는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마련인데, 이러한 방법론적 서술이 의도적으로 소설에 차용되었음을 눈치챌 수 있다.
물론, 역사가 사람에 의해 이끌어진다느니, 혹은 사건에 의해 이끌어진다느니 하는 해묵은 구분법이 여전히 유효한가에 대해서는 굳이 판단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설은 역사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역사와 소설을 한 묶음으로 살피게 된다면 또 다른 문제가 도출될 수도 있겠지만 분명 소설은 소설이고 역사는 역사일 뿐이다. 그럼에도 소설은 역사 그 자체를 주인공으로 삼을 수는 있을지언정 역사가 그러함은 어불성설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미 역사는 그 설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여자 이발사』를 역사소설의 범주에서 살피는 것보다는 차라리 역사와 인물이 대등한 위치에서 보이지 않게 소통하는 경우라고 전제하고 읽는다면 한결 그 불편함을 덜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소위 사관의 문제까지도 여기서 문제삼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미 작가는 소설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대고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것은 역으로 소설을 역사와 동일시하는 맥락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주 멀지 않은 비교적 가까운 역사일수록 더 조심스럽게 다룰 필요가 있다. 다행스럽게 ‘소설’이라는 보호막이 쳐져 있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깨져버릴 수도 있는 것이 그것이다. 역사란 그런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소설 속의 에이코는 스스로 역사 속의 주인공이기 이전에 역사를 재단하고 지켜보는 현재의 인물이기도 하다. 가까운 역사는 이렇게 여전히 진행중이다.
이런 에이코이니 해방 공간에서 그곳이 어디이든 운신하기가 수월치는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어린 아이와 함께였으니 그 상황을 짐작키 어렵지 않다.
에이코는 그래도 두 가지 재주가 있었다. 그것은 그나마 그의 삶을 지탱해 줄 수 있는 무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비록 전 과정을 마치지는 못했지만 게이샤 교육을 받아 사미센도 뜯을 줄 알았고, 가무도 제법 할 줄 알았던 것이 그 하나고, 나머지 하나는 바로 이발 기술이었다.
먼저 에이코는 경성의 큰 요릿집인 북청루의 아마이 마담을 소개받아 흔들리는 역사만큼이나 요동치는 정국의 주역들이었던 미국인들과 한국의 고관대작들 앞에서 기생 흉내를 내게 된다.
1946년 겨울을 나면서 북청루에 드나드는 손님이 바뀌었다. 일본인들이 모두 사라졌다. 모두 내지로 퇴각했다. 그 자리에 조선인 관리들과 사업가들이 채워졌다. 미국인들의 출입도 뜸해졌다. 에이코는 북청루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소임이 다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정을 찾는 조선인들이 묘하게도 에이코를 즐겨 찾았다. 그들은 심지어 일본 가요 부르기를 좋아해서 에이코는 자신이 조선 손님들을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했다. 어느덧 조선 욕도 할 만큼 조선말이 귀에 붙고 입에도 올랐다.(152-153쪽).
예나 지금이나 낯선 문화에의 동경은 사람들의 보편적 감성을 일으켜 세우는 자극제가 되기에 충분한 모양이다. 하긴 이러한 낯설음에의 동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주어진 능력을 넘어서는 무리한 모험을 감행하게도 했고, 무자비한 살육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게도 만드는 원동력이 되게 하기도 했다. 한 인간의 이러한 욕망으로 말미암아 역사의 흐름이 뒤바뀐 경우가 어디 하나 둘이던가. 바로 에이코의 비극도 이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사례는 흥미롭게도 거대한 물줄기에 의해 밖에서 안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닌, 연약한 의지에 의해 안에서 밖으로 탈출하고자 하는 역사의 새로움을 투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말이야 이렇지만 에이코가 느꼈을 몸의 여진은 무언가를 잡지 못하면 나락 같은 곳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는 절박한 상황을 상정하는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를 감지케 하는 또 하나의 기제가 바로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사미센이다. 이진식에게 선물했던 사미센이 우여곡절 끝에 다시 에이코의 손에 들어오면서 한동안 사라졌던 이진식이 재등장한다. 마치 일정한 역사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구세주처럼 말이다. 그는 적색 테러분자로 오인 받아 서울교도소에 있었다. 에이코와 이진식은 다시금 엮여진다. 하지만 감정선은 여기까지다.
그가 그녀의 마음 한 자리를 기웃거리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려고 애를 썼다. 김태수를 겪으며 상대적으로 그의 자리가 커진 거라고 자위했다. 물론 그는 신실한 사내였다. 그렇다고 자신의 운명이 그와 엮어진다는 게 잘 상상이 되지는 않았다. 외로우면 별별 생각이 다 드는데, 일테면 누구든 자신을 좋아하게 되면 그에게 모든 걸 바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생각이 깊어져 그 상대로 이씨가 떠오르면 그녀의 마음은 금방 배신을 했다. 그가 손을 내민다면, 그녀는 도망을 갈 것 같았다. 그를 돕는 이유는 단지 어려운 시절을 건너게 해준 그 은덕에 대한 보답일 뿐이었다. 더 이상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곤 했다.(158-159쪽).
이렇게 사람이 만들어 가는 역사는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사람에 의해 멀어진다.
6.
이 와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사건이 발생했고, 세상은 또 다시 바뀌고 있는 중이다. 인민군들이 교도소를 개방했고, 이진식은 풀려 나왔다.
부산으로 함께 피난을 간다. 에이코는 끊임없이 일본으로 되돌아갈 기회를 엿본다. 밀항선 브로커에게 사기를 당해 가진 돈을 날린다.
이 즈음에서 에이코가 가진 두 번 째 재주가 제재로 소용된다. 그녀는 밀항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도칼을 손에 쥔다. 어렸을 때부터 홀 아버지의 학대 속에 배운 기술이었다. 그것이 싫어서 게이샤가 되고자 했지만, 이제는 그리도 머나 먼 남의 땅의 처연한 신세일망정 이나마 유지시켜 줄 유일한 자산일 뿐이다. 그것이 스스로를 게이샤도 만들었다 이발사도 만들었다 했지만 그것은 어쩌지 못하는 역사의 아이러니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에이코는 그가 내주었던 밀항자금이 대남간첩의 공작금으로 쓰였다는 혐의를 받는다. 이진식은 거제도 포로 수용소로 갔고, 에이코는 유산을 했다.
전쟁이 끝나고 이진식이 석방되었다. 그와 에이코 모자는 다시 소설의 처음 부분에 등장했던(이진식의 시신이 발견되었던) 물머리로 향한다. 거기에서 에이코는 이발관을 차린다. 이발사가 일본 여자라는 소문은 사실이었고, 세상 인심은 이를 용납하지 못한다. 금세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고, 농사를 시작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당신이노 소가 이리 했으무니다.”
“뭐여? 우리는 그보다 더한 것도 당했다, 이년아!”
“당신이노 소가 나쁜 짓 했으무니다!”
- 중략 -
눈에 핏발이 선 사내는 팔을 걷어붙였다. 금방이라도 에이코의 머리채를 끌어잡을 태세로 그는 성큼 마당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왜 그랬을까. 정작 에이코의 머리채를 낚아챈 이는 이씨였다. 그는 여자가 땅바닥에 드러누워 쌕쌕, 소리로 죽어갈 때까지 발길질을 해댔던 것이다. 사람들이 무춤무춤 자리를 떴다. 소 임자도 고삐를 끌고 자리를 뜨고 없었다. 이씨는 자리에 붙박인 채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남들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자위하기에는 스스로도 용납되지 않은 구석이 많았다. 그에게는 분명 에이코에 대한 적의 같은 게 들끓고 있었다. 그 적의 이면에 자신의 피해의식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고 느껴지자 그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의 운명이 에이코에게 옭아져서 이렇게 산다 싶자 주먹에 살의마저 배어드는 느낌이었다. 정작 한판 설움을 토해낸 이는 그 자신이었다.(182-183쪽).
‘언젠가 소몰이 아이의 방심을 틈타 소 한 마리가 콩밭에 기어들어’(181쪽) 애써 경작한 콩밭을 망치게 되자 에이코는 소 고삐를 잡아 자신의 집으로 이끈다. 소 주인은 (감히 왜년이) 땅 주인 행세를 한다며 강력한 비수를 끌어들인다. ‘우리 심정’을 내세운 것이다. 여기서 ‘우리 심정’은 ‘소 고삐를 잡아 자신의 집으로 이끈’ 행위, 곧 처음으로 작은 역사의 주인이 되고자 했던 그녀를 좌절시키는 또 다른 역사를 대변한다. ‘애써 경작한 콩밭’과 그것을 ‘망친’ 행위 주체가 절묘하게 전도되고, 감정에 전이되며 ‘작은 눈’은 ‘작은 세계’에 머물지 않고 언젠가 더 큰 세상을 보게 될 수도 있다는 서사적 암시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암시는 대단히 모순적이다. 궁지에 몰린 에이코와 눈에 핏발이 선 사내의 대립이 엉뚱하게도 이진식에 의해 마무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 밑바닥에 깔려있는 사고는 이중적이다. 에이코에 대한 적의, 그 적의 이면에 자리잡은 피해의식이 동시에 표출되었지만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연민이 웅크리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 같은 연민이 ‘죽음으로 맞이하는 화해의 방식’이라는 그리 낯설지 않은 서사로 되살아나면서 역사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진식이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있던 바로 그 ‘사미센’으로(29쪽) 재확인된다.
그렇지만 이는 역으로 역사 쓰기와 문학 쓰기가 유사하다는 면을 보여주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역사도, 문학도 어느 정도는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발견하는 작업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역사에서는 한정된 사례조차도 동시대의 전형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을 확인시켜 준다. 그렇다고 주어진 상황에서 계량적이고 통계적인 방법에 의존하여 가장 빈도가 높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물음에서는 여전히 부정적이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이 ‘억압자의 문서고’에서 유래하여 단지 부분적이고 왜곡된 기록들만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어떤 다른 것의 잠재된 가능성의 범주를 정의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에서는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에이코를 통해, 그녀가 살던 세상을 통해 동시대는 물론 그 시대를 뛰어넘는 새로운 사실의 확인이라는 또 다른 가능성을 부여받는다면 이는 소설 속의 인물은 물론이거니와 소설이 갖는 역사적 존재 가치를 다시금 확인하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일면,『여자 이발사』에 내포된 듯한 이 같은 기치는 곧 현재를 가다듬고 보듬어 살필 수 있는 전거를 제공해 준다는 의미에서도 뚜렷한 발걸음을(그들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남겼다고 이를 수 있는 것이리라. 그런 까닭에 시대를 멀리 달리하여 서양의 한 농부에 의해 발현된 ‘나도 역사 속에 존재했었노라’는 ‘조용했던 외침’이 현재성을 갖는 것은 아닐지.
결국 에이코는 소박한 감정을 드러냈던 농부들의 곁을 떠나 뜨내기 인부들이 대부분인 물머리 염전으로 옮긴다. 그리고 마침내 에이코는 물머리 사람이 된다. 십 년을 그렇게 살다 서울에 올라와 다시 이발관을 차린다. 비로소 ‘여자’ 이발사가 된 것이다.
이 부분에서 소설은 역사와 혼재한다. 1990년까지 세운상가 한 귀퉁이에서 낡고 쓸쓸한 이발관을 운영했던 이 할머니 이발사는 일요일이면 종묘공원 노인들에게 무료 이발을 해주었고, 그러던 어느 날 곱게 차려입고 고향에 간다며 길을 나선다.
7.
우리는 흔히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일컬어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부른다. 이는 고스란히 이진식과 에이코라는 인물에게 대입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들과 이들의 주변 인물들은 현대의 한일 관계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엄동설한 혹한에도 온기라곤 전혀 없는 한 평 남짓한 골방에서 시련의 계절을 보내고 있는 지금의 외국인 노동자들의 생활이 심심찮게 언론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도 애써 무감각해 하는 우리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언젠가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이 지금의 시간도 ‘역사’라고 불리리라는 걸 우리는 잘 안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우리는 작은 역사를 들춰보아야 한다. 이러한 작은 역사로서 ‘미시사’는 인간 개개인의 모습이 사라져 버리는 거대 역사와는 다르다. 경계가 잘 지워진 지역 내에서 어떤 위기나 사건에 대처하는 사람들을 면밀히 탐색하는 미시적 접근을 통해 역사 속의 복잡 다단한 리얼리티를 더욱 명확하게 구현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가능성의 역사’, 딱딱하고 분석적인 것이 아닌 구체적 사건이나 전말을 말로 풀어 가는 듯한 ‘이야기로서의 역사’는 그래서 중요하다.
이들의 작은 실제 이야기를 통해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을 얻는다면 이보다 역사 속으로 들어가기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사소한 목소리에서 구체적인 현상을 규명하는 것이기에 역사적 조건은 실증을 반복하는데 절실한 도구가 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환기시키는 역사적 설정은 그렇게 이야기를 실증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의 삶’을 재구성하도록 해주는 이러한 방법은 오히려 허구로서의 소설에 더 많은 실재를 담보하게끔 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산다는 건 저주였다. 칠 년을 흘려보내며 에이코의 삶에서 명백해진 건 그 사실뿐이었다.(168쪽).
흔히 조선여자들을 독하다고 말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가장 조선 여자다운 삶을 살았는지 몰랐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막 불러대는 ‘쪽바리년’은 듣기에 따라 일본인들이 하던 ‘조센진’이라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이씨로서는 세월의 힘이 아니고는 그것을 당해낼 수 없으리라고 여겨졌다.(185쪽).
는 대목을 통해서 현재의 상처는 ‘아물지 않은 역사’를 아무리 투여해도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여자 이발사』에 등장하는 개개 인물들의 모습은 이렇듯 요즘의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거대한 모자이크 작품의 작은 부분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빠져서는 이룰 수 없는 작품이기에 바로 그 작은 부분이 소중하기는 거대작품과 매 한 가지다.
이제 간략히 사족을 덧붙이는 것으로 이 글을 맺도록 하자.‘가해국 출신의 피해자’이야기인『여자 이발사』는 그럼에도 정작 통쾌한 반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그것이 설령 가해자에 의한 것일 지라도, 또는 피해자에 의한 것일 지라도 이렇게 ‘국경을 넘는 일’은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은 눈으로 작은 세상을 크게 보는 일이란 결국 그 세상을 전부 보는 일이기도 하다.
문학의 확장과 현대의 신화
- 텔레비전 드라마의 가능성과 한계
오 연 희*
1. 신화의 현대적 의미
왜 신화인가? 오늘날 신화 서적의 증가와 신화에의 관심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과학과 합리성의 절대 신봉의 미망에서 이제 막 깨어난 현대인은 근대성이 억압해온 모든 것들을 다시금 사유하기 시작했고 그중 하나가 신화인 것이다. 신화를 유아적 미개적 의식의 잔재로 보든, 혹은 인류의 보편적인 의식의 한 유형으로 보든, 오늘날 신화적 상상력은 우리의 일상을 넓게 그리고 깊게 지배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범박하게 말해 신화란 개인보다 집단, 이성보다 감성, 합리적이기보다는 비합리적이고 신비한 이야기로 통칭되며, 특정 모티브가 반복된다는 특징을 갖는다.
21세기의 인간이 여전히 매번 뻔한 스토리에 매료당하고, [킹콩]처럼 줄거리를 다 아는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대중 서사에 다시금 눈물을 떨군다는 건 뭔가 부당해 보인다. 분석과 검증을 통해야만 그 정당성이 통용되는 과학의 시대에, 그런 과학적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우리를 매료시킨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가장 합리성을 강조했던 서양의 18세기가 일상적 삶의 차원에서는 가장 신화적인 시대였다는 유리 로뜨만의 지적은 고스란히 21세기에도 통용되는 말이 아닌가 한다. 전 국민이 매일 3시간씩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천만 관객이 같은 영화를 관람하는 시대, 매스컴이 만들어내는 영웅과 스타에 열광하는 시대, 그리고 무엇보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그리고 개인보다는 집단의 사고와 정서를 담고 있는 대중 서사가 전시대의 문학을 난쟁이로 만들어버린 시대, 이런 시대를 달리 무엇이라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인가.
신화는 인간의 정신사로 놓고 볼 때 덜 성숙하며 유아기나 청년기적 상태에 묶여 있는 것이기에 오늘날 원시사회와 다를 바 없는 신화형성 과정이 인식되는 것을 두고 인간 정신사의 퇴보쯤으로 치부하는 의견도 있지만, 문제는 신화에 바탕을 둔 이야기들이 항상 인간을 매료시켜 왔다는 점이다.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에서부터 신화를 차용한 다양한 텔레비전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익숙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되고 지속적으로 우리의 여가와 오락을 지배해왔다는 것은 뻔한 이야기가 뻔하기 때문에 가치 없다는 식의 비평을 식상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일쑤다.
오늘날 텔레비전 드라마는 구비문학의 개념을 확대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견된다. 지금까지 구비문학은 설화, 민요, 무가, 판소리, 민속극, 속담, 수수께끼 등으로 분류되어 왔다. 그런데 구비문학 개념이 텔레비전 드라마로까지 확대된다면 문학은 반드시 영상언어를 수용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할 것이다. 반면에 문학의 개념이 확대되면 텔레비전 드라마는 새로운 변화를 모색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구태의 인물과 서사구조에 식상한 현대인들이 차세대를 이끌 새로운 이야기를 갈망하는 것은 문학과 시대의 사명이기도 하다.
이에 본고에서는 오늘날 대표적인 대중서사인 텔레비전 드라마가 어떻게 신화를 계승한 구비전승의 문학적 전통 안에 자리매김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럼으로써 기존의 문학 개념을 어떻게 확장시켜 나갈 수 있는지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2. 텔레비전 드라마의 구비문학적 특성
기본적으로 신화는 구비문학의 형태로 전승된 서사이다. 그런데 오늘날 최첨단의 그릇에 신화를 담으려 하는 것이 바로 매스미디어이다. 그 중에서도 오늘날 가장 큰 대중적인 수용력을 지닌 매체는 누가뭐라해도 분명 텔레비전일 것이다. 텔레비전은 오늘날 흩어져 있는 대중을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로 만든 강력한 원동력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한국인의 하루 평균 시청 시간이 3시간을 넘는다는 보고서는 한국인의 문화생활에서 텔레비전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여실히 드러내준다.
이야기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어깨를 나란히 해왔다. 그것이 소설로 표현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근대적 문학장르로서의 소설은 출판이란 상업적 유통방식과 함께 거론되어야 할 것이지만, 사실 매체 자체에 대한 관심은 텔레비전이 등장한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이야기의 전 역사를 놓고 볼 때 소설은 출판 인쇄라는 문자 매체의 속성을 갖는 제한된 시대의 이야기 장르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전의 전역사적 시기에 인류는 구비전승의 서사를 향유해왔고, 오늘날 새로운 매체의 발명과 발전은 이전의 구비서사의 맥을 매스미디어를 통해 부활시켜 놓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매체의 출현은 이야기하기의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맥루한은 매체에 담긴 내용 이상으로 매체 자체가 중요하다고 본 대표적인 학자이다. 결국 매체가 갖는 특성은 그 내용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작용한다는 매체결정론으로 요약되는 맥루한의 미디어론에 따르면, 모든 미디어는 정세도를 기준으로 핫미디어와 쿨 미디어로 구분될 수 있다. 이때 정세도란 어떤 매체에 담긴 내용이 충실하고 체계적이냐 아니냐에 따른 것으로, 내용이 충실하고 체계적인 것을 정세도가 높다고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낮다고 한다. 정세도가 높은 것이 핫 미디어이고, 정세도가 낮은 것이 쿨 미디어이다. 가령 글은 말보다 핫 미디어이고, 영화는 텔레비전 드라마보다 핫 미디어이며, 출판은 텔레비전보다 핫 미디어이다. 텔레비전은 가장 쿨한 미디어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맥루한의 분석에 따르면 말의 시대에는 모든 사람이 비슷한 지식을 공유했기에 개인주의나 전문화가 없었다. 글의 시대가 되면서 감각의 중심이 눈으로 옮아갔는데, 눈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특성을 지니기에, 시각에 대한 중시는 인간을 소리, 신체적 접촉, 즉각적 반응에서 멀어지게 했고 또한 내성적, 이성적, 개인적이게 만들었다. 이성적 인간은 동시적이고 통시적 사유보다 순차적이고 선형적 사고에 익숙하며, 논리적 사고, 분류, 범주화를 선호한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전문화와 근대의 국가주의는 따라서 문자 매체 시대의 당연한 귀결이라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시각 하나로 묶여 있던 인간을 소리와 그림을 통해 해방시킨 매체가 바로 텔레비전이다. 텔레비전은 이전의 구전 서사의 특성을 고스란히 가지면서, 거기에 텔레비전 특유의 매체 특성을 부가한 매체로서, 이러한 매체 특성은 텔레비전 서사의 성격을 일정부분 결정짓는다. 즉 문자매체가 개인의 산물이라면, 텔레비전 매체는 제도와 집단의 산물이다. 한편의 소설이 소설가 개인의 창작물이라면, 텔레비전 드라마는 방송작가, 프로듀서, 카메라맨 그 누의 개인 산물도 아니며 궁극적으로 방송사, 나아가 방송제도의 산물이 되는 식이다.
구비전승의 문학은 신화에서 파생된 문학으로 결국은 신화로 귀결되는 단일한 성격을 갖는다. 신화의 시대가 지나 신들의 위력이 다하자, 신화의 주인공들은 신에서 영웅에게로 전승되었고, 이어 영웅이 그 위력을 잃으면 지역과 고을의 특별한 사연으로 세속화하여 인간 중심의 전설로 전해졌고 이러한 집단적이고 제한된 유형의 단순 서사는 오늘날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확대 재생산 되고 있다. 이렇듯 신화는 그 신성성은 사라졌지만, 오늘날 여전히 삶을 이야기로 꾸밀 수 있는 모티프를 제공하면서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텔레비전의 모든 프로그램은 시청자의 흥미를 자극하고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넘나들며 클라이맥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설화적 요소를 갖고 있다. 특히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형태만 바꿔 새롭게 들려주는 텔레비전 드라마는 현대 서사 중에서 이야기꾼으로서의 기능이 가장 왕성하다. 다양한 삶을 체험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설화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이미 사회에 존재하는 설화를 재구성해 전달하기도 하며, 그 주제와 서사구조는 집단 무의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또 하나의 전승문학이 되기도 한다. 요컨대 현대의 텔레비전 드라마는 바로 구전전승의 문학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는 가장 대중적인 서사 장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텔레비전 드라마의 구비문학적 특성을 애초의 신화와 관련하여 몇 가지 측면으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신화는 개인보다는 집단을 강조한다는 점과 관련하여, 오늘날의 텔레비전은 대중으로 흩어진 개인을 일시적이나마 텔레비전 앞에 불러세움으로써 공동체적 정체성을 부여하고 안정감을 누리도록 해주는 매체이다. 구비문학의 사상 정서는 기본적으로 나의 것, 우리의 것이란 성격을 갖는다. 드라마 역시 내 이야기, 우리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이야기를 소재로 감정이입을 일으키기 쉬운 대중의 정서에 호소하며, 흩어진 대중에게 공동체적 정체성을 부여해준다.
둘째 신화는 이성보다는 감성을 중요시한다는 점과 관련해서도 텔레비전은 논증적이거나 분석적이지 않은 대신 서사적이며, 환상적이고, 감성놀이가 주를 이루며 객관성을 거의 가장하지 않으므로, 대중에게 쉽게 파고든다. 이런 속성은 텔레비전 드라마를 속칭해서 일컫는 용어가 된 소우프 오페라라는 말을 음미해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즉 비누 드라마라는 별명은 혹자에 따르면 비누거품처럼 별 내용 없이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소비적 드라마라고 해서 그렇게 부르게 됐다고도 한다. 이런 소우프 오페라의 전형성은 그 내용이 한국화되는 과정에서 유교문화와 접목되어, 과거지향적이고 통속적인 인간상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런 드라마에 익숙해진 시청자는 익숙하지 않거나 어려운 소재, 과도하게 수준이 높은 드라마를 외면하는 경향이 생겨났는데, 이는 사회적으로 여성용드라마=통속극이란 평가를 가능케 해 왔다.
셋째, 그 내용면에서도 신화는 항상 제한된 패턴의 이야기를 반복한다는 점에서도 텔레비전 드라마는 신화의 속성을 고스란히 답습한다. 원시사회 신화는 내용상 다양하지만, 실제 기본구조는 이항대립에 근거해 있다. 우리편 대 상대편, 인간다운 대 비인간적인, 감성적인 대 냉혈적인, 문명적인 대 야만적인 등이 그것이다. 이런 논리는 현대 텔레비전의 수많은 드라마에 그대로 적용된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대립하는 인간관계를 기본구조로, 대립되는 두 가족으로 인해 고민하는 청춘남녀, 한 애정대상을 두고 대립하는 성격이 다른 두 주인공, 피를 나눈 형제지만 서로 다른 배경에서 자란 탓에 결코 화해할 수 없는 형제나 자매 등 설화의 모티프를 그대로 반복한다.
넷째, 신화는 말로 이루어지고, 구전에 적합하도록 단순하면서 잘 짜여진 구조를 지니는데 텔레비전 드라마 역시 전반적으로 글로 된 문학보다는 말로 된 문학에 가깝다. 대본 자체가 대사체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이 배우의 입을 통해 일상적이고 보편적 언어로 전달되므로 구술성에 가까운 장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구술적 장르 특유의 단순, 보편을 지향하게 마련이다.
이렇듯 오늘날의 텔레비전 드라마는 과거 신화에서 비롯된 구비전승의 문학적 속성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다. 그렇다면 구비전승의 서민예술이 그러했듯 텔레비전 드라마는 특정 시기 수용자 대중이 세상과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며 느끼는가 하는 것을 그 어느 문학보다 더 민감하게 반영하고 조응해갈 것이다.
3. 신화와 문학, 그 이분법을 넘어서
러시아의 기호학자 유리 로뜨만은 신화의식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라지거나 과학의 발전으로 극복된 대상이 아니라 인간에 고유한 인식 능력의 한 부분으로 역사의 시대에도 늘 상존해 왔다고 강조하면서 특정 시대의 문화를 이야기할 때 어떤 문화 유형이 보다 지배적인가, 그 문화에 대한 개인의 주관적 지향성이 어떠한가만 논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의 논의대로라만 우리 시대는 가히 신화지향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실제로 산업사회 이후 등장한 대중은 늘상 신화적인 결집체를 갈구해 왔다. 전통적 가치의 붕괴로 구심점을 잃은 대중은 때로는 독재자를 추종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하며, 현실적 삶에 있어서는 극도로 분화된 역할을 반복적으로 수행해 나가면서도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늘상 공동체적 정체성을 부여받기 원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과거 신화와 제의가 맡았던 역할을 이제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비디오 게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대중 서사의 매체들이 대신하고 있다. 신화에서 소설, 동화에서 컴퓨터 게임까지, 서사시에서 대중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문학과 오락은 인간의 불가능한 꿈, 결국은 절대의 추구로 요약될 수 있는 그런 것에 대한 욕망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태생을 같이 한다. 수많은 장애물을 통과하고 쫓고 쫓기는 과정을 거쳐, 결국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고 싶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반영하는 신화는 그리하여 21세기 문화 속에서도 여전히 그 생명을 영위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화적 이야기들의 공통 특성인 예측가능성이란 사람들을 고민하지 않게 하고 일상의 삶을 반성 없이 받아들이도록 한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지배이데올로기를 공고화하는 데 기여한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신화의 한정된 모티프와 뻔한 결말은 실제로 현대의 대중서사가 고스란히 채택하고 있는 전략이기도 하다. 시대의 아픔과 슬픔을 나누는 행위로서의 예술 가치가 많이 사라진 반면 오늘날의 대중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예측 가능한 예술을 즐기고 싶어 한다. 생활의 문제로 지친 이들은 대중 서사의 익숙함 속에서 일상적인 삶의 문제들을 해소하려 한다. 진짜 딜레마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을 제시하는 대중 서사들은 분명 삶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기를 거절하는 진지한 예술적 서사와는 구분된다. 오늘날 텔레비전으로 대표되는 대중서사가 이러한 신화적 한계를 극복하고 하나의 대안적인 서사로서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어찌 보면 문학과 신화를 대립시켜 설명하는 로뜨만의 논의는 소수의 취향으로 요약되는 문화와, 다수의 즐거움으로 요약되는 오락 사이의 간극을 지시하는 것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중 서사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예술일 수 있다면, 아니 예술이어야 한다면, 그러한 대중 서사는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또한 어떠할 수 있는지를 가늠해 보는 것은 이런 점에서 볼 때 21세기 문학의 정체성과 전망을 아우를 수 있는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90년 이후 새롭게 단장한 일련의 트렌디 드라마들은 내용과 형식적인 측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면모들을 대거 선보이고 있다. 일명 작가주의 드라마로도 불리는 이들 텔레비전 드라마들은 단순한 오락의 차원을 넘어 오늘날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어떻게 예술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허준]이나 [대장금], [파리의 연인]이나 [내이름은 김삼순]처럼 시청률 50프로를 넘나드는 성공한 드라마나 [태극기 휘날리며]로 대표되는 천만관객을 동원하는 대박 영화의 이면에는 시청률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을 소수의 매니아들을 거느리는 작가주의 드라마([네 멋대로 해라]나 [아일랜드] 혹은 [거짓말]이나 [상두야 학교가자] 등 특정 작가의 개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일련의 드라마들)와 영화(홍상수, 김기덕으로 대표되는 일명 작가주의 영화들)가 있다. 이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비롯한 대중 서사가 더 이상 문학연구자들에게 외면당할 수 없는 이유가 되기에 충분하다. 오늘날 엘리트 문화에서 민중문화로, 이성적 영역과 공적영역에서 비이성적 영역과 일상생활의 영역 쪽으로의 관심의 이동에는, 단순히 신화시대로의 퇴보로만 치부될 수 없는 우리 삶의 진정성이 담보되어 있다. 사천만이 텔레비전 앞에서 함께 울고 웃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지만, 다가올 세기가 혹자가 우려하는 바와 같은 파시즘의 시대, 즉 사방에서 극단적인 전체주의와 파벌주의, 무시무시한 폭력이 활개치는 시대가 될지, 아니면 우리 모두가 공동체의 효용성을 존중하는 체제 안에서 우리가 속한 일상적인 공동체들에 책임을 지면서 스스로를 통합해가는 그런 시대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하지만 그 갈림길의 기로에 텔레비전이란 막강한 매체의 위력이 어떤 당파성을 갖게 될 것인가가 중요해질 것이라는 점을 예측해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4. ‘대장금’의 신화화와 탈신화화의 전략
[대장금]은 그동안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수준을 뛰어넘는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며, 한류를 이끈 가장 성공한 드라마 중 하나이다. 이런 성공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영웅과 권력, 전쟁과 무술 등을 다루었던 남성적인 사극들이 가지지 못한 부분을 대장금은 친근감과 인간적인 측면에서 서술했다든가, 장금은 유교적인 전통의 여인이면서 동시에 현대적인 의지와 노력을 경주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보여주었다든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대장금]의 엄청난 성공의 배경에는 수년간 한국 연속극들이 쌓아온 이미지와 신뢰가 있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베이징의 대학생들 중 [겨울연가]를 보지않은 학생이 없을 정도였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해 준다. 중국인에게 한국 연속극은 믿을 수 있는 세련되고 재밌는 오락물로 인식되고 있고, 한마디로 연속극 부분에서 한류의 바람은 가히 폭발적이라 할 수 있다.
대장금은 대중서사가 독자에게 재미있다는 반응을 얻기 위해 궁극적으로 취해야 할 태도, 즉 뻔한 구도를 유지하면서도 나름의 개성과 스타일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는 전략을 구사하면서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허준]에서 이미 보인 도식성의 틀을 깨지 않으면서도 자기 나름의 차별화를 꾀하고 있는 [대장금]은 오늘날의 텔레비전 드라마와 같은 대중 서사가 어떤 방식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그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 좋은 사례이다.
조선시대 실존인물인 의녀 장금이란 인물에서 모티프를 따온 이 드라마는, 이미 대장금이란 한 여인이 우여곡절 끝에 조선시대 최초의 임금 주치의로 될 한 여자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임을 처음부터 분명히 한다. 따라서 시청자는 숱한 시련과 장애 속에서도 결국은 장금이 승리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 실록에 기록된 것은 장금이란 의녀가 공을 세워 상을 받은 것이 몇 번 있었고, 당시 중종이 내 병은 여의가 안다고 말한 적이 있다는 기록이 전부이다. 제작진은 이런 사료에 기반해 장금이 임금을 보살필 정도로 의술을 인정받은 대단한 의녀로 보고 스토리를 구성하여 일종의 현대판 성공담, 혹은 영웅담으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갔다.
한마디로 대장금은 수랏간 궁녀로 요리 실력을 인정받고 후에는 의녀로 의술까지 경지에 이른 성공한 여성이다. 기존의 대중 서사에서 보여지던 남성 뒤에서 음모를 꾸미거나 성적 매력을 이용해 권력을 탐하는 여성이 아니라 전문적인 실력을 가진 여성의 성공담인 것이다. 이는 90년대 이후 변화된 여성의 현실적인 위상을 반영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대중 서사의 신화 수용 전략이 신화를 현대적으로 어떻게 재해석하면서 이루어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주인공 장금은 어릴 때 아버지와 헤어지고 어머니와 사별한 후 10살에 입궁하여 스승인 한상궁의 지도와 스스로의 노력으로 궁중최고의 요리사가 되고자 실력을 쌓는다. 이 과정에서 대대로 최고상궁의 자리를 이어온 최상궁과 그 조카 금영과 경쟁관계에 놓이며, 최상궁이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 있음을 알게 된다. 결국 한상궁과 함께 최상궁 일파의 모함에 빠져 궁에서 쫒겨나 관비가 된 장금은 그곳에서 통이 크고 담대한 수의녀 장덕에게 의술을 배워 다시 입궁하게 된다. 입궁 후에도 의녀 선배인 열이를 비롯 최상궁 일당의 음모로 숱한 고비를 넘기며 최고 의녀가 되어 조선조 처음으로 임금의 주치의가 된다는 것이 대강의 내용이다.
한마디로 신분이 낮은 여성이 노력을 거듭해 성공한다는 류의 성공담, 혹은 영웅담의 뻔한 이야기는 한국의 구전설화 문학과 각종 대중 서사가 반복해온 도식적인 구도이다. 이 드라마가 한국의 여성우위 서사문학의 전통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기존의 논의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 드라마는 제복에 산다계 구전 설화와, 여성영웅신화, 탐색 신화 등과 상당부분 유사성이 발견된다. 가령 출생, 구출, 수학, 위기, 승리를 골자로 하는 영웅서사의 구조와, 여기에 여인발복 서사의 모티프를 그대로 채용하고 있음은 이미 기존 연구에서 밝혀진 바 있으며, 부분적으로도 바리데기나 아기장수설화의 모티프를 부분부분 차용해 오고 있음도 여러 논자들에 의해 이미 밝혀진 바 있다.
실제로 작품성이 있거나 지금까지 회자되는 인기 드라마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이 시대를 초월하여 대중들에게 익숙하고 친근한 설화에서 모티프를 따온 이야기들이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특히 발복 이야기는 세계적인 광포설화로서 1990년대 후반의 사회상과 관련하여 등장한 텔레비전에 대거 등장한 유형이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여성운동의 영향과 1990년대 후반부터 비롯된 경기침체현상이 맞물려 가부장의 권위를 거부한 여인이 자신의 능력으로 신분상승과 부를 이룬다는 발복형 서사는 대표적으로는 2000년대의 트렌디 드라마 등을 통해 동시대의 여성의 영웅화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한 표상이다.
최근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트렌디 드라마는 소극적인 신데렐라보다는 당당하게 제 몫을 챙기고 비록 신분상승의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과감하게 자기일을 선택하는 여성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들은 기존의 여성우위서사의 도식성에 시대의 옷을 입혀놓은 21세기형 여성영웅의 대중적인 욕망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기존의 상투적인 여성영웅화의 서사적 흐름 속에서, 이 드라마가 추구하는 새로움이란 무엇인가? 혹자는 그것을 세부적인 스타일, 한 장면의 대사 분위기, 미장센 등의 차이에서 찾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도식성의 틈새가 조금씩 균열되어 가고 있음을 대장금을 비롯한 최근의 트렌디 드라마들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신화의 현대적 변용이 기존 신화의 재해석이란 측면에서 미래 사회를 향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데로까지 나아가고 있다는 점, 우리가 늘상 부딪히는 일상의 갈등과 문제를 도식적인 서사의 틀을 변형시키면서까지 담아내려 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장금은 기본적인 영웅서사의 구조를 답습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존 신화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인간형을 제시한다. 기존 여성영웅의 모습이 남장한 여성의 모습으로 다분히 드세고 남성성에 가까운 영웅의 모습이었다면, 최근의 여성영웅의 모습은 여성성이 강조되고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포용성 있는 모성성을 지닌 새로운 여성적인 영웅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모](2003), [대장금](2003) 등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는데, 조선시대 여형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다모]나, 상궁이나 나인, 의녀 등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들을 대거 등장시킨 [대장금]은 모두 시청자의 눈높이에서 영웅의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일각에서는 다모나 대장금 같은 드라마가 뜨는 이유가 우리 시대의 주역이 바뀐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임금, 양반, 장군에서 여형사나 요리사가 주역으로 부상한 현실과 동궤를 이루는 것이라 해석하기도 하거니와, 오늘날 텔레비전은 우리 삶의 이모저모를 섬세하게 담아내면서 나아가 변모되는 현실의 모습을 조금 늦게, 혹은 조금 빠르게 담아냄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구성해내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플리터만 루이스같은 비평가는 일관성과 의미를 부여하는 위치에 있는 영화 관객과는 달리, 텔레비전 시청자의 분산된 위치가 의미를 생성하고 수용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데 주목한다. 가령 불이 켜 있는 경우가 많고, 사람들이 돌아다니거나 한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며, 무심코 보고, 다른 사람들과 더러 이야기도 하며, 심지어는 언제든 끄려고 작정하거나 다른 채널로 수시로 돌릴 수 있는 텔레비전 시청자의 위치가 등장인물과의 동일시나 서사에의 몰입을 방해하는 대신에, 장면들과의 수많은 부분적 동일시를 제공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이론은 오늘날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우리를 매료시키는 이유의 중요한 점을 포착할 수 있게 해준다. 가령, 시청자들이 매번 뻔한 드라마에 몰입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단순히 현대판 영웅 드라마나 신데렐라 드라마가 힘겨운 일상의 삶에서 난쟁이가 되어버린 자아의 대리 만족이거나 부나 신분상승의 욕망의 발현이어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일상성의 사소한 부분들에서의 다양한 재미들, 가령 일명 어록으로 불리는 대사가 주는 재미, 남녀 주인공들의 순화의 과정들, 드라마 배경의 자연적인 아름다움, 인테리어나 의상 같은 생활의 정보들, 남녀 배우의 육체의 아름다움 등이 그것이다.
요컨대 김삼순과 다모, 대장금 등 요사이 성공한 텔레비전 드라마의 면면을 살펴보면, 오늘날 대중의 눈높이에서 기존의 영웅설화를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인간의 모습, 사회의 모습, 나아가 인간관계의 모습을 모색하려는 문제의식을 다분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과, 그밖에 이들 드라마들이 텔레비전 드라마를 시청하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욕망들과 관심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우리 시대의 오락과 예술이 과연 명쾌하게 구분될 수 있을 것인가는 자못 문제적이지 않을 수 없다. 뻔한 공식에 새로운 인물 해석과 새로운 스타일의 옷을 입힘으로써 대중에게 익숙하면서도 신선하게 다가서는 텔레비전 드라마는 일상의 힘겨움과 갈등을 뻔한 결말을 통해 안이하게 해소시켜준다는 점에서 분명 근대 이후 문자 매체를 전제로 근대 문학이 추구해온 길과는 분명 뭔가 다른 길을 걷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구비전승의 문학이 단순히 말해지는 문학을 넘어 보고 듣는 문학의 형태로 이어진 것이라면, 또한 텔레비전 드라마를 그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면, 이같은 제반 요인들이 적극적인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임은 자명한 이치이다.
5. 대중서사의 가능성과 한계
오늘날 텔레비전 드라마는 구비문학의 개념을 확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구비문학은 설화, 민요, 무가, 판소리, 민속극, 속담, 수수께끼 등으로 분류되어 왔지만, 구비문학 개념이 텔레비전 드라마로까지 확대된다면 문학은 반드시 영상언어를 수용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할 것이고, 텔레비전이란 매체의 속성에 대한 연구가 더해져야 할 것이다. 굳이 맥루한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매체는 곧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문학의 개념이 확대되게 되면 이번에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새로운 변화를 모색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구태의 인물과 서사구조에 식상한 현대인들이 차세대를 이끌 새로운 이야기를 갈망하는 것은 문학과 시대의 사명이기도 하다. 이미 몇몇 드라마들이 이런 가능성을 보여준 바 있다. 95년 [모래시계], 2002년 [네 멋대로 해라], 2003년 [옥탑방 고양이]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보다 참신한 인물과 이야기를 찾아내는 일은 후세에 또 하나의 신화적 전형성을 남기는 일이 될 것이다.
기존의 가치들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현대사회에서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시청률 50프로이상까지 올린 대장금은 그간의 여성드라마가 보여주었던 편견을 깨고 여성의 영웅성을 보여주며 최근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현실 반영의 차원을 넘어 일정한 관점에서 현실을 구성해내는 역할을 함으로써 미래 사회의 모습, 나아가 우리 사회의 비전을 형성해나가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결국 영웅이란 특정 공동체에 있어야 할 그 무엇을 추구하고 탐색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국 신화의 현대적 모습이라 할 수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는 현대인의 위안과 오락의 서사이자, 또 한편으로는 흩어진 대중에게 공동체적 정체성을 부여해줄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매체이다. 그렇다면, 문학비평은 이러한 영역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미래가 디아스포라와 같은 그 어떤 공동체에도 속하길 거부하는 들뢰즈적인 의미에서의 소수집단이 될지, 일상적인 공동체와 그런 공동체의 효용을 존중하는 체제로 갈지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우리가 공동체에 책임을 지면서 우리 자신을 세계와 통합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면, 이때 신화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줄 것이다. 신화를 열망하지만 더 이상 신화적 삶을 살지 않는 현대인들이 역사의 공포를 감당해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신화적 상상력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말이다.
* 대전 출생,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충남대 교수, batur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