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 설
산서민가(山西民歌)- 2
이 대 영
▣ 이화원과 서태후
서울에서 신혼살림을 차린 나는 서태후가 되기 위한 행보를 시작했습니다. 학벌의 구색을 갖추기 위해 대학원에도 진학했고, 사회적 신분을 고려하여 몇몇 대학에 출강도 하기 시작했지요. 나의 당찬 포부란 시어머니가 운영하는 사단법인의 이사장직을 승계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어머니라 불렀던 그 여자는 한 마디로 돈으로 권력을 매수하고 그래서 얻은 요직으로 세상을 거들먹거리며 사는 여자였습니다. 나의 남편과는 전혀 피하나 섞이지 않았을 정도로 성품이며 외모 또한 다른 부류의 인간이었지요. 그 여자는 수시로 나에게 돈을 요구하곤 했습니다. 시아버지가 지닌 사회적 지위를 내세우며 위대한 가문에 입문한 며느리로서 당연히 몇 묶음의 수표를 세금으로 내놓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의 언행이었으니까요. 나는 이사장이라는 지위에 눈이 멀어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친정의 돈을 끌어 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권력을 승계하기 위한 무언의 투자와 이를 묵계로 용인하는 우리 둘만의 거래였지요. 그러한 노력으로 나는 재단의 이사라는 명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재력과 그럴듯한 명함이 세상을 참으로 편하게 살게 해준다는 것을 그 때부터 알게 되었지요. 고가의 미술재료를 사용한 덕분으로, 시간에 쫓겨 어설프게 손댄 그림들이 개인전을 통해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부르지도 않은 신문사며 잡지사 기자들이 인터뷰를 요청하기 시작했지요. 거마비 몇 푼이면 신문에 기사화 하는 것도 어렵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권력과 지위는 초대작가라는 호칭도 자연스럽게 붙게 만들었지요.
그렇게 수렴청정을 위해 한 발 한 발 내딛는 동안 부산에 있는 어머니와 배다른 동생들 간에 불협화음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두 모녀가 재산을 빼돌리고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올 만도 한 것이 재단에 기부하기 위해 나는 점점 많은 돈을 요구하게 되었고 어머니는 이를 위해 부산시 기장구에 있던 1만평의 갈대밭을 소문 없이 팔아버렸기 때문이지요.
그 넓은 땅, 내가 죽어 무덤을 써도 수 만 개를 쓰고도 남을 땅을 나는 젊은 날에 눈 한 번 꿈쩍 않고 없애버린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를 않았습니다. 내가 재단에 쏟은 모든 정열과 재정적 투자에도 불구하고 이사장직은 그의 친 딸에게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때, 나에게는 서태후가 용틀임을 쳤던 신유정변이 필요한 시기였지요. 시어머니에 대한 배신감과 주변 인물들로부터 느끼는 소외된 시선을 해소할만한 마땅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양무운동을 함께 이끌어 나갈 세력은 오직 부산에 있는 어머니뿐이었습니다. 하나 뿐인 언니마저도 우리 모녀의 행태에 환멸을 느꼈는지 교환교수로 떠나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출국하고 없었습니다. 나는 결국 시댁으로부터 분가하여 시어머니에 대한 배신감을 그의 아들. 즉 남편에게 복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사건건 나는 남편에게 불만을 털어 놓았고 가정불화의 원인이 곧 당신의 어머니임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에게 주지시키거나 상기시켰습니다. 그 결과는 이혼으로 이어졌고 나는 합의금으로 받은 돈으로 다시 허영의 시장에 나아가 서태후의 행세를 하기 시작했지요. 그야말로 돈을 물 쓰듯 했던 것입니다. 한 달에 적게는 천만 원, 많게는 일억 원까지 쓰기도 했으니까요. 귀족들만의 잔치를 위해 나는 좀 더 화려한 축제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강남에 고급레스토랑을 개업하기로 한 것이지요. 정말 대한민국에서 가장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디오니소스 제전을 열기 위해 나만의 유토피아 건설을 진행시킨 것이지요. 그래서 레스토랑 이름도 ‘이화원’으로 정했습니다. 한국에서의 작은 서태후라도 되어야 하겠다는 심리가 반영된 상호였겠지요. 인테리어도 이화원을 모방했습니다. 정문은 황제나 황후가 아니었기에 서태후가 한 번도 들어가지 못했다는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의 중간문을 모방했습니다. 그런 후 손님들이 들어오자마자 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중앙에 만수산을 위치시키고 불향각을 세운 후 궁등(宮燈)을 달아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지요. 그 주변에 곤명호도 만들었습니다. 호수를 중심으로 서태후의 산책로를 그대로 재현하여 장랑(長廊)을 배치하고 호수에 배도 띄워 놓으니 작은 이화원으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거기에 대희루가 필요했습니다. 석교로 이어지는 중앙무대에 대희루의 양식이 아닌 대리석으로 장식한 원형무대를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경극을 올리는 대신 피아노와 색소폰, 클라리넷, 플루트 등을 연주하게 하였습니다.
이화원이 개원하기 전날, 나는 부산의 한 사찰에 머물고 있는 어머니를 초대했습니다. 어머니는 이미 탤런트를 꿈꾸며 충무로를 휘젓거나 부산의 권력층과 교류하던 모습에서 완전히 멀어져 있는 듯 보였습니다. 비구니 의상을 한 어머니의 모습에서 나는 전혀 다른 여성의 모습을 보는 듯하여 낯설기까지 했습니다.
이화원이 개원하기 전날, 내가 어머니를 초대했던 것은 어머니와 나란히 오문을 통과하고픈 욕구가 강하게 일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입구를 오문 형태로 기획했던 것도 서태후의 한을 풀고자 했던 심층심리의 발현이었겠지요. 어머니는 그런 나의 의도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계셨습니다. 오히려 200여 평이 넘는 이 화려한 무대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기대와 우려로 가득차있는 듯 보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화원에 초대하지 않고 대희루에서 나는 어머니와 성찬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곤명호에 배를 띄워 낚시도 즐기고 장랑을 거닐었습니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에야 어머니는 서태후가 되어 있는 나의 마음을 간파하신 듯 했습니다. 단지, 어머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아직도 철이 덜 들었구나! 모두가 이 애미의 업보인가보다!”라며 혀를 끌끌 차셨습니다. 레스토랑을 차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의 사찰에 내려갔을 때 어머니는 이미 속세와 인연을 끊는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인연을 끊는 한 방법으로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남겨놓았던 달맞이 동산의 75평 아파트와 5층 빌라의 등기를 나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이 번 서울행이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머니 자신도 그것을 예고하려는 듯, 비구니의 의상 그대로 이화원을 찾은 듯 했습니다.
속세에서의 어머니와 마지막 성찬을 마친 이튿날, 이화원에서 나는 서태후가 되어 있었습니다. 유명배우와 탤런트, 국회의원, 재단 이사, 재계의 유명인사들의 내방과 그들이 보낸 화환으로 거리 전체가 떠들썩했습니다. 그 화환 중에는 시어머니가 보낸 것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재단이사들의 눈을 의식한 일종의 모양새 갖추기였겠지요. 나는 시어머니가 보내 준 화환을 일부러 맨 끝의 서열에 위치시키게 했습니다. 이화원에서 그들이 차지할 공간은 내 마음 속 어디에도 없었으니까요. 우아한 이화원의 잔치는 그렇게 시작하여 또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 덫
이화원의 생활에 나는 매우 만족했습니다. 처음으로 시작한 사업이기도 했지만, 내가 기획하고 내가 운영하는 사업이라는 점에서 더욱 매력을 느꼈던 게지요. 과거 시댁에서 이사장직에 왜 그리도 연연했는가에 대한 자성도 하게 되었습니다.
복장에 대해서도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중국 태후의 의상으로 손님 앞에 나설까도 생각했으나 너무 화려한 의상이고 취향에도 맞지 않아 생각을 바꿨습니다. 30여 명의 종업원들에게는 모두 자색의 중국 의상에 금색으로 허리띠를 하게하고 나는 검정색 계열의 정장을 주로 입었습니다.
대희루에는 호텔에서의 연주경력이 있고 인물이 출중한 프랑스 유학파출신인 밴드마스터를 고용하여 수준 있는 음악을 선보였습니다. 밴드마스터는 나보다 한 살 위로 깔끔한 용모와 무대매너로 많은 인기를 모으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잘 알고 있는 즉, 충무로시절에 친구로 지냈다는 어머니의 친구로부터 소개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게 5개월이 흘렀습니다. 특히 송년회 및 신년회 행사가 몰린 12월과 1월에는 손님을 받을 공간이 없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습니다. 그 동안 미국으로 떠난 언니와 암자로 들어 간 어머니와도 전혀 연락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너무 과식을 해 온 탓일까요? 나에게도 서태후를 끙끙 앓게 했던 이질병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일까요? 여름철에 접어들면서 손님들이 현저하게 줄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호화롭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지만 중국음식이라는 메뉴의 한계성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연예계에 종사하는 유명인들을 제외하곤 단체모임이라든가 개별 손님들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경영이 순탄치 못했습니다. 동절기에 벌어 놓은 수익금은 금방 동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종업원들의 동요였습니다. 이화원 운영의 지속성에 대한 믿음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우려 했던 일은 주방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주방을 책임지던 요리사 10여 명 중 6명이 자신의 가계를 개업하거나 다른 음식점으로 이직을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냉방기 사용으로 인한 전기세도 엄청난 부담이 되었지요. 그래서 내린 첫 번째 처방이 대희루에서 하던 연주회를 중단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희루에 궁등을 더 달게 하고 곤명호에 연등을 띄웠습니다. 하절기 휴가가 끝나고 찬 바람이 일면 좀 나아질까 하는 기대도 가졌지만 연말 회식손님은 전년도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사회 인사들과의 교류와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든 실내 인테리어 덕분으로 그 해 겨울은 경영난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는 더 큰 시련이 감지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화원의 운영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사업 경영이 없는 여자의 신분으로 큰 업소를 운영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지요. 팀제식 경영을 시도도 해 봤지만 평생직업으로 생각하지 않는 요식업계 종사자들의 속성상 그것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꿈꾸어왔던 이화원의 생활을 쉽사리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대희루에서 어머니와 성찬을 나누었던 일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잊기 위해 혼자 술을 먹는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지요. 또한 긴장감으로 손님을 맞던 자세에서 안면이 있는 인사들과 동석하여 술잔을 주고받는 자리도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손님을 더 유치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노력이었지요. 그러나 업소의 수익은 좀처럼 늘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업소를 유지하는 데는 당장 문제가 없겠지만 다가오는 하절기의 업소운영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일종의 외로움이 겹쳐 불면증 증세가 나타나더니 급기야 우울증의 증세로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정신과 치료를 받기에 이른 것이지요.
또 다른 악연의 시작이었을까요? 아니면 인생의 정점으로부터 추락하는 전조였을까요?
나의 외로움을 잡아당기며 다가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였느냐고요? 바로 밴드마스터였습니다. 그는 업소를 그만 둔 이후에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우리 가게에 들러 안부를 묻곤 했습니다. 사장과 고용원의 관계였던 사이에서 우리는 점차 가까운 연인 관계로 진전되어 갔습니다. 영업이 끝나는 12시 경에 그는 업소에 들렀고 종업원이 퇴근 한 후에 대희루에서 그와 술잔을 나누는 횟수가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의 신상에 관한 정보를 내가 이모라고 불렀던 어머니의 친구에게 들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구조조정과 아울러 직원들에게 그 이유를 소상하게 설명을 했기에 이화원의 자금난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신상에 관한 정보를 전혀 알고 있지 않았습니다.
30년 만에 온 무더위라는 기상청의 발표가 연일 9시 뉴스를 장식했습니다. 쓰나미로 동남아 휴양지로 유명한 몇몇 섬들에서 익사자가 발생하고, 강원도 설악산을 중심으로 쏟아진 폭우로 도로가 유실되고 지리산 대원사 계곡에서는 구조대원들이 밧줄을 던지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음습하고 지루한 장마가 이어지고 있었지요. 그 날도 아침나절에 잠깐 빛났던 햇살이 오후부터 흐려져 6시가 되어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산서민가를 틀어 놓고 포도주를 먹고 있을 때 밴드마스터가 들어왔습니다. 일상적인 대화와 술잔이 어느 정도 오가자 그는 뜻밖의 제의를 해왔습니다. 이화원에 투자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정도를 투자할 수 있느냐고 농담조로 묻자,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5억원을 이야기했습니다.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는 나로서는 냉큼 받아 써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의 진심을 파악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믿고 나에게 투자를 하겠느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나의 인격을 믿고 투자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썩 기분 나쁘지 않은 답변이었지요. 언제 투자를 할 것이냐고 물었더니 당장 내일이라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농담조로 내일 돈을 가지고 와서 이야기하자며 웃어 넘겼습니다.
이튿날은 10시경에 업소에 도착 했습니다. 연예계의 몇몇 지인들이 점심때 들리기로 해서 평소보다 한 시간 가량 일찍 움직인 것이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밴드마스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 수표 한 장을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정확하게 5억 원짜리 수표였습니다. 그래서 정색을 하며 어떤 조건이면 되겠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총 수익금의 20%와 매장을 관리할 수 있는 영업상무의 직함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총수익금이 은행에 5억을 넣어 받는 이자액도 되지 않을 거라고 말했더니 그는 돈을 벌려고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대희루에서 연주를 하지 못하고 뚜렷한 일자리가 없는 상황에서 나를 도우며 일도 배우면 일석이조가 아니겠느냐는 것이었지요.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간단한 계약서를 작성하고 이튿날부터 그가 매장을 관리하는 것으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종업원의 월급을 주기 위해 빌린 돈 5천만 원과 주류협회에 지불할 잔금 2천만 원을 갚아 숨통을 틀 수 있었습니다.
이화루에서 서태후의 꿈을 꾸었던 것은 망상이었을까요? 온갖 노력애도 불구하고 대형업소의 관리비 및 인건비를 지불하기에는 수입이 형편없었습니다. 연예인 공연도 해 보고, 디너쇼도 몇 차례 해봤지만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부동산시장에 가계를 내놓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까지 몰리게 되었습니다. 업소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기웃거리기 시작하자 밴드마스터의 경영에 대한 간섭도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5억에 대한 상환을 요구하며 경영권을 들먹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어느덧 밴드마스터에 길들여져 가고 있었습니다. 4개월 여 동안의 그와의 동업은 그와 늘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가 이혼남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 일종의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사람의 정이란 것이 그런 것일까요? 항상 곁에 있고 무언가를 도와주려는 사람이 있을 때 여자는 그를 타인으로 생각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 사람이 남자일 때 그 결과는 사랑 아니면 불륜으로 전개되기 마련이지요. 나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어느새 나의 애인이며 남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애인이라기보다는 나를 점차 자신의 종속물로 길들여가고 있었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경영난에 나는 밴드마스터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가게도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헐값에 넘기고 말았습니다. 아니, 밴드마스터에 의해 사업장을 강탈당한 셈이지요. 사업장뿐만 아니라 내 삶의 모든 것을 잃고 만 것이지요. 결국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땅에서, 짐승 같은 남자에게 사육 당하는 힘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 파주에서의 생활
그 해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내 삶의 기억에서 두 번째 잔인한 시간들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벌레들의 소음과 자지러지게 울어대던 매미들의 죽음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따라 나도 함께 울먹이다가는 결국 정신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숨 막히는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기도원의 뒷산에 올라 찬송가를 부르며 울부짖고, 이 땅의 평화를 위해 기도문을 외우던 수천 명의 행렬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신앙심으로 에덴동산의 복원을 외치던 그들조차 나를 구원하지는 못했습니다. 인근 군부대 사격장에서는 하루도 쉬지 않고 총성과 지뢰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조국을 지키는 그들 또한 목숨이 붙어 있음에 혐오감을 느끼는 나의 의식을 단절시키지는 못했습니다.
한 밤중에 그의 차에 실려 세 시간 넘게 북쪽으로 달려온 것이 경기도 파주에 있는 한 시골 마을 근처의 별장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경기도 금촌읍에서 20여 분 거리에 있는 오산리 기도원 인근 지역이었습니다.
밴드마스터에게 이화원의 임대운영 계약서와 인감도장을 강제로 빼앗기고 오산리에 와서 인간사육을 당하게 된 것이지요. 별장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늘 하던 대로 나를 침대에 눕히고 성욕을 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길 들은 꽃뱀처럼 공포 속에서도 신음을 토해내기 시작했습니다. 길들여진 육체의 반응을 제어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일순간, 나는 그의 성적 노예가 되어 깊은 바다를 유영하는 한 마리의 인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인어가 바다가 아닌 육지에 있다는 것을 의식한 순간 나는 또다시 경직되어 부르르 떨며 절규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로소 그 남자는 나에게서 내려와 욕설을 퍼 부우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지요. 매캐한 냄새가 오래 비워 둔 방안을 소독하기 시작했습니다. 담배연기로 거실에 가득 찬 세균들을 소독할 때까지 담배를 피워대던 그도 답답했는지 창문을 열었습니다. 연기와 살 냄새와 증오가 섞여 창밖으로 빨려나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물질의 내방에 놀랐는지 여치와 귀뚜라미, 그리고 몸을 뒤척이는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이자 소리가 점점 커져 나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도 무엇에 놀란 듯 따라 일어서며 나의 움직임을 주시하기 시작했지요. 나는 질 나쁜 사내에게 결려든 포획물임을 의식하고 이내 침대에 엎어져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공포와 나 자신에 대한 저주의 육체적 반응이기도 했지요. 그 남자는 마을 입구 구멍가게에서 사 온 캔 맥주를 들이키며 텔레비전을 켰습니다. 9시 뉴스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뉴스 어느 부분에도 여자가 납치당했다는 음성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화원이 어머니 친구의 손에 넘어갔다는 기사도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를 납치한 밴드마스터가 그 여자의 친척이라는 보도도 들리지 않았지요. 한 마디로 나는 전 재산과 내 영육을 고스란히 빼앗긴 채 오산리 기도원 아래에 갇혀버린 서태후가 된 것입니다.
일주일을 나는 그곳에서 외출이 허락되지 않은 채 그의 감시망 속에 있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라곤 그가 해 주는 밥을 먹고, TV를 보고, 그의 섹스파트너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다시 유년기의 생채기에 더 심한 흠집을 내고 있었습니다. 기억상실증에 실어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나는 양순한 그 남자의 시녀가 되어 그가 짜준 일과표대로 행동하고 문밖을 나가는 것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한 달 쯤 지난 후로는 아예 그 남자는 나를 감시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나의 유일한 의식은 오산리 기도원 근처에 있는 백마부대 사격장으로부터 들려오는 총소리에 놀라 이불 속으로 기어드는 것과, 산정에 올라 찬송가를 부르며 울부짖는 신도들의 목소리를 따라 흉내 내거나 기도문을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간혹, 산정에서 쏘아 올려진 군부대의 고지탈환 야광신호에 환호하기도 하고 이화원과 서태후라는 용어를 반복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이런 나의 행태와 시들어가는 몰골을 지켜보며 그 남자는 나로부터, 나는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방문을 잠그지 않고도 서울을 오르락내리락 했으며, 강제로 나에게 성행위를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나는 파주에서 짐승 같은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본능이란 것이 있는 것일까요? 밤하늘에 선명하게 북두칠성이 그려지고 보름달이 뜬 날, 기도원에서 나온 사람들이 산정으로 줄을 지어 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따라 새로운 에덴동산을 찾아 떠나는 군중의 행렬이었을까요? 아니면 노아의 방주를 연상하게 하는 세태의 역겨움을 피해 산정을 오르는 신도들의 행렬이었을까요? 나는 그 대열을 발견한 순간부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는 조바심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나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던 겁니다. 나는 무려 삼 개월 만에 대문을 나서 산정을 향하고 있는 신도들을 따라 나서고 있었지요.
그 길은 군부대 철조망을 따라 이어져 있었습니다. 철조망의 양 좌우는 군인들이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벌목을 해 놓았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철조망의 중간 중간에는 외부사람의 침입을 확인하려는 듯 자갈들이 물려있고 간간히 초소 이곳저곳에서 암호를 서로 확인하는 나지막한 음성도 들려왔습니다.
금빛 달빛, 실로 오랜만에 보는 포근한 빛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달맞이 공원에서 청사포 바다를 바라보며 큰절을 올릴 때, 금빛 달빛은 어머니의 등줄기를 따라 얼룩지곤 했었지요. 문득 나는 어머니의 존재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내게도 가족이 있었다는 것을 새삼 의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제목을 알지 못하는 찬송가를 부르며 나는 무리를 따라잡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산정은 이외로 수십 명이 모여 집회를 열 수 있는 평지가 있었습니다. 그 평지는 잔디로 덮여 있어 앉아서 기도를 드리기에 아주 편안한 지역이었습니다.
발밑으로는 오산리 기도원 건물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들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국에서 온 관광버스차량들이 주차장을 가득 메워 마치 고속버스터미널을 연상하게 하는 야경이었습니다. 그리고 반대편으로는 정문초소를 시작으로 막사에서 흘러나오는 주홍빛 전등이 군부대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목사인 듯한 사람을 중앙으로 하여 그들은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그들을 따라 기도를 올리고 그들을 따라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울기도하다가 웃기도 하고 땅을 치며 통곡도 했습니다. 나의 내부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갑갑한 그 무엇을 풀어 헤치고 나니 마음이 평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마친 그들이 하산준비를 시작했을 때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점점 이어져 탄식이 쏟아져 나오고 누군가가 나를 일으켜 세우고 있음을 의식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목사인 듯한 사람으로부터 구원의 손길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다시 사람이 사는 세계로 걸어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친 듯이 흐느끼는 낮선 이방인, 헝클어진 머리에 화장을 하지 않은 창백한 얼굴, 닳아 헤진 추리닝에 실어증까지 앓고 있는 나를 발견한 그들은 사마리아의 여인에게 했던 것처럼 나에게도 말을 걸어왔던 것입니다. 게다가 신발까지 신지 않아 산정을 오르는 동안 생긴 상처는 그들을 경악하게 했던 모양입니다.
버려진 한 마리의 양을 구원하기라도 하듯 많은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 나는 실어증을 딛고 다시 경찰서를 중간지로 하여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