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닐라,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섬나라!
이 대 영
▣ 납치당하는 꿈
아시아 대륙의 남동해안에 위치하여 인구 1억 명이 살아가는 섬나라, 타갈로그어(Tagalog)와 영어를 사용하며 인구의 80% 이상이 로마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는 미지의 나라로 떠난다. 낮 기온이 35도를 오르내리는 한국의 무더위를 피할 수 있다는 즐거움과 함께 베트남, 캄보디아에 이어 인접국인 필리핀을 방문함으로써 동남아문화를 비교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앞섰다.
인천공항은 여전히 무언가를 추구하고,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해외 단기언어연수와 인턴십 과정을 거치기 위해 또는, 봉사활동을 떠나려는 대학생들이 이곳저곳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또 어떤 이는 보따리 무역을 하는지 짐꾸러미를 저울에 달아 배송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항상 그렇지만 공항은 사람들을 설레게 하고 다소 두렵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티켓팅을 하고, 가방을 부치고, 비행기 좌석에 앉기까지 얼마나 번거롭고 신경을 써야하는 지를 경험자들은 알 수 있다. 특히,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아침 비행기를 타려면 새벽에 집을 나와 인천공항에 도착하기까지 그 피곤함을 설명하기에는 긴 시간을 요한다.
우선 환전을 위해 은행에 들렀다. 베트남이나 캄보디아는 달러가 통용되지만 필리핀은 현지에서 ‘동’이라는 화폐를 사용한다고 한다.
환전을 하면서 문득 총기를 연상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마도 언론매체를 통해 간간히 들려오는 소말리아 해적선과 납치사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필리핀은 개인이 무기를 휴대하는 것을 허용하는 국가라서 치안이 불안하며 신변안전에 유의해야 한다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은 터라 출국에 앞서 약간의 긴장감이 남아 있기도 했다.
설마 납치야 당할까마는, 혹여 한국남성을 좋아하는 필리핀 미모의 여인에게 납치당해 귀국이 늦어질 수도 있으리라… 이제, 7천 여 개의 섬으로 구성되고 172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필리핀 마닐라를 향하여 떠난다.
▣ 마닐라 거리
마닐라 공항은 ‘가족’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였다. 어느 공항이나 가족을 기다리거나 혹은 단체 내방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출구 입구에서 기다리는 것은 상례이지만 공항 주차장에 가족 전체가 모여 있는 것은 특이했다. 특히, 승합차량에서 밥을 먹어가며 영접하거나 송별하는 문화는 이 나라 특유의 풍경이기도 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필리핀에는 해외에 나가 일하고 있는 노동자가 많다. 약 1,100만 명의 해외노동자들이 땀내 절은 월급봉투를 가족에게 보내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벌어들이는 외화는 곧 필리핀 경제의 주요 수입원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필리핀인 노동자는 물론, 미국 혹은 유럽사회에서 전문직에 종사하는 해외노동자들이 많다고 한다. 특히 의사 면허증을 가지고 있는 남성들이 미국에 진출하여 간호사로 활동하며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는 이야기는 인상적이다. 그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가족의 생계는 물론 친족의 경제에 까지 도움을 주는 것이기에 노동자들의 출구인 공항이 가족구성원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고 있음을 공감할 수 있었다. 필리핀인들의 친족 정신은 말레이족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며, 긴밀한 가족 관계는 중국인으로부터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가족애와 16세기 기독교를 전파한 스페인 사람들로부터 물려받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경건한 신앙심이 필리핀 사람들의 정신적 초석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본다.
▲지프니(Jeepney) ▲ 트라이시클(Tricycle)
공항을 빠져나와 도심가로 접어들자 다양한 차들로 북적인다. 자전거가 주류를 형성하던 베트남이나 한산한 거리풍경의 캄보디아에 비해 마닐라 시내는 다양한 이동수단으로 복잡했다. 필리핀의 명물인 지프니(Jeepney), 이지라이더(Easy Rider),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 트라이시클(Tricycle)이 승용차와 버스에 섞여 운행되고 있었다. 교통신호등이나 건널목을 활용하기 보다는 유턴 도로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래서 행인들은 건널목이나 육교를 이용하기 보다는 무단 횡단을 하곤 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자전거나 오토바이의 수는 적었다. 차량의 증가로 마닐라 시내는 차량 5부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빈부의 격차가 심한 시민의 특성상 부유층은 가구당 3~4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어서 이 제도의 시행은 부유층에게 의미가 없어 보였다.
거리에서 느낀 또 하나의 사실은 교통경찰관이 정복을 입고 너무나 열심히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밤늦게, 혹은 새벽에, 또는 비 오는 날에도 그들은 거리 곳곳에서 충실히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얼마 후에,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 이유가 그들이 부수입을 올리기 위한 목적이었음을 알았을 때 웃음이 나왔다. 우리나라에서도 고속도로 순찰업무를 하면서 일 년에 집 한 채 마련하지 못하면 바보라던 말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의 그 수준이었다.
순간, 캄보디아에서 10여 명의 경찰들이 비포장도로를 점령하고 무작정 차를 정차시키고는 교통범칙금(?)을 받아내던 장면이 머리에 떠올랐다. 경찰들이 한 쪽에서는 민가에서 나와 돌아다니는 닭을 쫒고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책상 위에 마치 수금 할 가방을 올려놓은 듯 큰 가방을 놓고 즉석에서 영수증을 발행하던 씁쓸한 광경 말이다.
▲ 홈스테이 건물 ▲트라이시클 이용하는 주민
‘빌리지’로 명명되는 마을의 초입에는 아파트 수위처럼 경비소가 있었으며 빌라형태의 빌리지에는 총으로 무장한 경비원들이 길목을 차단하고 서 있었다. 이들은 마을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검색하고 밤에는 마을의 골목에서 두건을 쓰고 잠복근무를 하기도 하며 순찰을 한다고 한다. 병원, 은행, 백화점이나 가게 등에서는 사설 경비원들이 보초를 서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백화점을 비롯하여 상가 건물의 출입구에선 언제나 총기 소지 여부를 확인하며, 어느 곳에서나 총을 소지하고 있는 사설경비원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아무튼 Fisher, Security 등 안전 요원을 뜻하는 단어를 새긴 무장복을 착용한 경비원들이 곳곳에 있다는 사실은 다소 위안을 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을 조성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건물형태는 스페인풍의 가옥이 많아 보였으며 최근에 지은 건물들은 우리와 다를 것이 없는 고층아파트와 빌라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빈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은 함석지붕을 덕지덕지 이어놓은 풍경에, 어두컴컴한 작은 공간에서 살아 움직이는 눈동자들이 있어 가슴을 짠하게 해 주었다. 우기에 비라도 연일 내릴라 치면 방안에서 들어야 하는 소음공해도 대단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와중에도 사람들은 자식을 낳아 기르고, 개와 고양이들은 먹을 것을 찾아 골목을 헤매고 있었다.
마닐라 시내를 본 첫 인상은 한 마디로 사람이 살만한 곳이라는 것이다. 위정자들만 아니었으면 오히려 그들이 우리 보다 더 잘 살았을 것이라는 추정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실감하게 했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어느 한 도시, 혹은 지방의 큰 읍 규모의 도심을 보는 듯한 느낌, 그것이 마닐라 시내를 대하는 첫 느낌이었다.
▣ 풍부한 해산물, 다양한 요리
필리핀 군도의 섬들은 환태평양화산대에 속해 있어 아름다운 산과 호수가 많다. 무엇보다 베트남이나 필리핀 여행에서 경험했던 풍부한 해산물과 열대과일에 대한 나의 기대감은 필리핀으로 이어져 재래시장을 찾게 만들었다.
첫 번째 찾은 시장은 캐존 시티(Quezon City)의 캐피톨 홈즈(Capitol Homes) 입구에 자리한 에버 코데스코(Ever Cotesco) 쇼핑몰이었다. 마닐라에서 처음 찾아 가는 곳이라 약간은 긴장감을 주기도 한 이곳은 한국에서의 슈퍼마켓과 유사했다. 식료품은 물론 전자, 의류, 주방용품, 환전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을 구비하고 있었다. 나는 유독 생선매장을 살폈는데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실망감을 주었다. 마치 중국산 붕어와 닮은 줄돔 종류의 생선과 잡어 같은 생선이 몇 종류 있을 뿐, 우리나라의 생선가게보다도 빈약했으며 열대과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장에 진열된 여러 가지 물건들은 시민들이 사용하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양질을 갖추고 있었다. 약간의 달러를 페소(Peso)로 환전한 후 나는 필리핀 맥주 산미겔(San Miguel) 몇 병과 마른안주를 사 가지고 트라이시클을 이용하여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은 후에도 야시장에 대한 궁금 중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뭉친 근육도 풀어줄 겸 마사지를 위해 집을 나와 다시 쇼핑몰 맞은편에 자리한 건물로 들어섰다. 식당, 술집, 치킨가게 등 각종 편의시설이 있어 인근 주민들이 이용하기에 편리한 현대식 가게들이 2층 건물에 자리하고 있었다.
▲에버 코데스코(Ever Cotesco) 쇼핑몰 ▲ 고치구이
▲곤계란 ▲바나나 상인
태국마사지를 전문으로 하는 이 집에는 여러 종업원이 있는 듯했다. 여종업원들은 중국과는 다르게 다소 나이가 든 미혼여성들인 듯 했다. 나는 오일마사지를 주문하고 약간은 긴장된 마음으로 기다렸다. 종업원은 큰 대야를 들고 와 발을 씻겨 주더니 실내로 안내했다. 마사지실은 커튼으로 가려진 서 너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희미한 조명으로 어두웠다. 마사지는 비교적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발로부터 머리까지 그리고 허리꺾기, 다리, 팔 꺾기에 이르기까지 전혀 돈이 아깝지 않은 마사지였다. 마사지 후에는 녹차까지 주는 친절함도 있었다. 시원하고 개운한 느낌을 안고 쇼핑몰 측면에 위치한 야시장으로 향했다. 열다섯 명 정도의 상인들이 벌인 좌판 근처에는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물건을 흥정하고 있었다. 우선 꼬치구이가 먹고 싶었다. 돼지고기 머리, 콩팥, 내장, 살코기 등이 긴 나무에 꿰어져 놓여 있었다. 그럴싸해 보이는 고기를 골라 주문을 했더니 함박 웃는 아주머니의 얼굴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잘 익은 고기를 입에 먹는 순간 뭉클한 느낌이 느껴졌다. 아뿔싸! 돼지머리 고기였다. 시식에 실패한 나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곤계란을 다섯 개 골랐다. 한국에서도 먹지 않았던 음식이나 이곳에서 새로운 체험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든 야채를 팔고 있는 상인에게 사진 촬영을 청하자 흔쾌히 응해준다. 더욱이 그 옆에 자리 잡은 상인마저 사진촬영을 원해 즐거운 시간의 연속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주유소 근처에서 꽃을 팔고 있는 두 어린이를 만났다. 오누이냐고 물으니 친구라고 했다. 필리핀의 국화(國花)인 쌈빠기따(Sampaguita)를 팔고 있는 이들에게서 꽃을 사자 세계를 얻은 듯한 미소를 내게 보여준다. 그리고 나를 큰 길까지 배웅하는 그들의 앞길에서 필리핀의 희망을 보았다. 정차된 차들의 유리창을 닦아주고, 꽃을 팔고, 구걸을 하고, 쉬지 않고 무엇인가를 하면서 보여주는 그들의 얼굴 가득한 미소에서 나는 필리핀의 밝은 미래를 감지할 수 있었다.
연일 내리는 비로 몇몇 도로는 비에 침수되었다고 한다. 근 10일째 내리는 비이다. 그럼에도 나는 쿠바오(Cubao)에 있는 화머스 마켓(Farmer's Market)을 찾았다. 농산물과 수산물이 시장 가득 진열된 마치 한국의 농수산물 시장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입을 벌리고 말았다.
▲정육점 ▲과일가게
▲생선가게 ▲야채가게
▲참치와 대게 요리 ▲황제의 식탁
길게 이어진 정육점의 살코기들과 그 맞은편에 진열된 다양한 바다 생선과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도로변에서 보던 열대과일들이 풍성하게 진열되어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가격이 비싸 먹기 어려운 참치와 대게, 다금바리, 메기 등이 널려 있었다. 더욱 좋은 것은 인근 시장에 구입한 생선을 들고 가 요리 값을 주고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거리에서 볼 수 없었던 싱싱한 야채들도 가게를 가득 메우고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먹을 것이 풍족한 나라에 내가 서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참치 생선회와 구이, 칠레 소스를 곁들인 대게 요리의 맛은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만약 마닐라를 다시 올 기회가 된다면 나는 지체하지 않고 참치와 대게 요리를 먹으러 쿠바오로 달려올 것이다.
▣ 민도로 섬, 나의 친구 게이들
필리핀의 루손 섬 서남쪽에 있는 푸에르토 갈레라의 민도로(Mindoro) 섬으로 가는 길은 분주했다. 1박 2일 일정으로 버스를 이용하여 우선 바탕가스 항구(Batangas Pier)로 가서 화이트 비치(White Beach)까지 한 시간 정도를 더 가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둠을 헤치며 바기오의 JAM터미널로 향했다. 4시 30분에 첫차가 있기 때문이다. 바탕가스로 가는 새벽 버스는 여러 대 기다리고 있었다. 각각의 버스에는 차장 비슷한 이들이 있어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으며 인원이 차면 곧 바로 떠나는 시스템이었다.
바탕가스 항구로 가는 내내 나는 잠에 취해 있었다. 밖은 어둑어둑한데다 비까지 내리고 있어 피곤한 눈을 사로잡을만한 사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잠을 편히 잔 것도 아니었다.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어 으스스한 한기로 추위를 견뎌야 했다. 버스에 탄 한국인 모두는 미처 준비를 못한 탓에 추위에 떨어야 했다. 나는 다행이 비닐우의를 갖고 있어 그것을 온 몸에 감고 겨우 참을 청할 수 있었다.
바탕가스 항구에는 질척질척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배는 출항한다고 한다. 다만 풍랑이 있어 섬에서 돌아오는 배가 늦어지고 있다는 안내방송이 반복되고 있었다. 페리 터미널에서 졸기도 하고 서성거리고도 하던 나는 20여 분 늦게 우리는 승선할 수 있었다. 여객선은 60여 명 정원 정도로 작은 배였지만 선장을 비롯하여 보조요원이 일곱 명이 있어 나를 안심시켰다. 캄보디아의 시아누크빌(Shianouk Vile)로 갈 때 승선한 목선이 뒤집힐까봐 파도로 넋을 잃은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유람선은 배 옆구리에 물에 빠져도 붙잡을 수 있는 사다리 같은 장치도 해 놓았으며 구명조끼도 비치되어 있었다.
파도와 바람은 예사롭지 않다. 배에 늦게 승선한 우리는 선수에서 고스란히 물바가지를 몸으로 막아서야 했다. 우리 보다 앞에 자리 잡은 프랑스인 일행은 물에 빠진 생쥐 모양으로 야릇한 표정으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나의 우의는 요긴하게 이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안전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 몇몇 필리핀인들은 나를 재미있는 모습으로 쳐다보는 이도 있었다. 그들은 이미 선미에 자리를 잡으면 물바가지 세례를 받는 다는 사실을 알고 선미 근처에 자리를 잡고 파도를 즐기고 있었다.
배는 화이트비치(White Beach)가 아닌 사방비치(Sabang Beach) 항구로 향하고 있었다. 파도가 여의치 못해 선착지를 바꾼 것이다. 사방비치 해안이 눈에 들어오자 많은 이들이 배에서 일어나 감탄을 쏟아냈다. 옥색 바닷물과 야자수, 해변, 리조트 등이 어우러져 멋진 이국적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스쿠버다이버들의 액션은 그럴듯한 영하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 바탕가스에서의 승선 ▲ 사방비치에서의 하선
▲ 화이트비치 리조트 ▲ 화이트비치
미니버스를 타고 도착한 화이트비치 리조트는 백색페인트로 도색된 2층으로 된 현대식 건물이었다. 방 안에는 침대와 욕실, TV, 에어컨이 구비되어 있었다. 객실을 나올 때, 뚱뚱한 두 명의 여인이 마사지를 권했다. 얼마냐고 물으니 250페소라고 한다. 저녁에 하기로 하고 나는 화이트 비치 해변으로 나아갔다. 가랑비가 해안을 뒤덮고 있었고 썰물로 모래사장은 인도 가에 체면치레하는 듯 살짝 드러나 있었다. 수작업으로 만든 목걸이와 팔찌 등을 파는 상인들이 호객행위를 하기 위해 나에게로 달려들었지만 별 소득 없이 그들은 돌아서야 했다. 화이트비치 끝자락에서 돌아오는 중간지점에서 나는 나에게로 다가오는 한 여성을 직감했다. 그는 비치 인도에 늘어서 자리하고 있는 맥주바에 근무하는 여성이었다. 외모는 여성이었지만 목소리는 남성이어서 다소 게이gay)가 아닌가 하고 의심이 갔지만 그의 친절한 접근에 우리는 통성명을 하고 맥주가격을 확인한 뒤 저녁에 만나기로 약속 했다. 그러나 그와의 만남은 저녁까지 가지 않았다. 숙소에 들어 온 나는 이내 집을 챙겨 주점으로 향했다. 질척거리는 날씨와 분위기가 나를 숙소에서 바다로 밀어냈기 때문이다.
해변을 걸어가다 나는 여러 술집의 동정을 살폈다. 혹여 필리핀에서 이국적 이미지를 가진 아가씨와 대화를 하며 맥주를 마실 수 있는 행운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나는 이 해변에서 이국적이거나 분위기 있는 여인을 발견할 수 없었다. 마사지를 권하는 아주머니들도 한결같이 뚱뚱한 원주민의 모습이었으며 술집에 종사하는 여자들 또한 게이뿐이었다. 나는 좀 전에 만났던 여인이 있는 술집에 들렀다. 이미 미국인과 필리핀 남성이 게이 두 명과 어울려 떠들며 술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산미겔(San Miguel) 맥주 두 병과 망고 안주를 주문한 후 빗줄기 사이로 보이는 옥색 바다에 취해 있었다. 맞은편에서 술을 마시던 여인이 내게 다가왔다. 그는 마닐라 출신의 게이로 얼굴은 밉상은 아니었으나 목소리에서 다소 거부감을 갖게 했다. 그녀는 영국인이 운영하는 이곳 바에서 다른 여섯 명의 동료와 일하고 있으며 배구를 좋아한다고 했다. 얼굴이 작고 몸매가 날씬한 게이는 목소리가 굵직하여 거부감을 일으켰으며 글래머유형의 좋은 몸을 가지고 있는 게이는 엉덩이 라인이 남성의 골반뼈를 드러내고 있어 어울리지 어색함을 보였다. 그들은 음악을 즐기고 자연과 사람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내밀하게 쌓여 있는 감당할 수 없는 고민을 이 대자연 속에서 풀어내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었다.
마사지 아줌마와 함께 나는 숙소로 돌아왔다. 그녀는 마흔 일곱이라고 했으며 남편은 요트의 보조선원이라고 했다. 아이는 일곱을 두었는데 돈이 없어서 제대로 학교를 보내지 못했노라고 했다. 마사지는 캐존시티의 태국마사지보다는 못하였지만 오일은 듬뿍 발라 주었다.
그녀의 두둑한 손길에서 그의 살아 온 이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 일곱을 양육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내일도 마사지를 받을 손님을 찾아 나설 것이며 세월과 함께 아귀힘이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고서야 그는 일을 그만두게 될 것이리라.
▲ 스노클링 인도선 ▲ 스노클링
▲ 스노클링 보조선 ▲ 성게
▲ 어부 ▲ 소라 상인
이튿날, 옥빛 물살을 헤치고 스노클링을 하러갔다. 한 배에 네 명의 선원이 승선하는 것에 우선 안심이 되었다. 학생들은 처음에 구명조끼의 부력으로 나타나는 몸의 불균형에 애를 먹었지만 이내 요령을 터득하고 바다세상의 신기함에 매료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몇 번의 시도 끝에 몸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개헤엄으로 다시 배로 돌아오고 말았다. 늘어 난 체중에 수영하는 데에도 힘이 들어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한 시간 정도가 흐르는 동안 나는 선원들과 잡담을 나누고 사진도 찍으며 주변의 풍광을 감상했다. 또한, 곁에 늙은 어부가 한 명 있어 그의 생김새나 낚시 행위가 나의 호기심을 끓었다. 바다에는 고기가 거의 없다고 한다. 수자원보호가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다. 스노클링을 마친 학생들과 함께 인근 해변에 도착한 나는 성게와 야자수열매를 주문했다. 성게는 마치 밤송이에 표범 가죽을 입힌 형상이었는데 생각보다 내용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색적인 체험이라 학생 모두는 즐거운 표정으로 바다의 정취를 즐기고 있었다.
▲ 닭고기 바비큐 ▲ 화이트비치의 자유
민도로섬을 떠나기 직전, 우리는 식당에서 닭고기 바비큐 요리를 즐겼다. 매콤한 소스와 기름기가 제거된 고기의 담백한 맛에 우리는 이야기를 줄여 나갔다. 맞은편에서 어제 안마를 해 준 아줌마가 아는 체를 하며 안마를 해주겠다고 제안한다. 나는 시간이 없다고 한 뒤 가벼운 미소를 던져주었다. 화이트비치의 파도소리가 여인의 눈웃음 속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마닐라
공항으로 가는 길은 번잡했다. 지루하게 내리던 비가 오늘은 국지성 호우로 바뀌며 마닐라 시가를 잠식해 오고 있었다. 지형에 따라 한 개 차선이 비에 잠겨 차량운행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낮은 지형에는 주로 빈민가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미 몇 곳은 침수되어 피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덕지덕지 함석지붕으로 이어놓은 빈민가의 정경은 쏟아지는 빗소리가 그들의 마음을 더욱 놀라게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의 한 도시를 연상시키는 이스트 우드(Eastwood City)와 거지촌을 방불케 하는 빈민가옥이 공존하는 마닐라, 21세기 학문의 전당인 넓은 대학 캠퍼스와 캠퍼스 내에 무허가 판자촌이 공존하는 이해하지 못할 나라, 민중항쟁으로 대통령이었던 마르코스를 축출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의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체되어 있는 나라, 동양의 문화와 서양의 문화가 혼재하는 나라, 초등 교육과 중학교 과정이 의무 교육제이며 문맹률 10%를 자랑하며 자존심을 지키는 나라이면서도 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이들이 많은 나라, 아시아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유일한 로마 가톨릭 국가인 나라, 고급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즐기는 사람들과 그 음식을 남기면 벌떼처럼 대들어 그 음식을 챙겨가는 사람이 있는 가난이 철철 넘치는 나라…
하지만 우리는 ‘빵’ 보다는 ‘쌀’을 주식으로 하는 국가들에 애착을 갖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피와 뼈 속에는 쌀의 기운과 문화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6.25전쟁 때 자유 수호를 위해 군인을 파병하고 한국이 식량난에 허덕일 때 안남미(安南米)를 지원해 준 나라, 국내 건설현장에서 또는 다문화가정에서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사람, 그들이 곧 필리핀 또는 필리핀 사람들이다.
나는 공항에서 가족을 배웅하고 환송하며 주차장 한 귀퉁이에서 온 가족이 나누어 먹는 디노라도(Dinorado)를 통해 필리핀의 미래를 읽는다. 15년 만에 찾은 북경의 거리가 오토바이에서 차량의 물결로 바뀌었듯이 먼 훗날 내가 마닐라를 찾았을 때,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