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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이 설계한 나라, 호주
이 대 영
▣ 오랜 기다림
오랜 기다림의 결과였다. 나 같은 서민에게 해외여행의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직장에서 지원하는 해외연수프로그램을 통해 유럽여행을 가고자 했으나 형평성을 고려하여 몇 년 동안 제외되곤 했다. 이유는 학생들과 중국 북경과 북한의 금강산 여행 등을 다녀왔기 때문이었다. 두 번의 여행이라야 합쳐서 4박 6일 밖에 되지 않았지만 외부에서 볼 때는 해외연수프로그램으로 대치할만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방학 때 마다 학생들과 함께 제주도를 비롯하여 국내 여행지를 10년 이상을 다녔으니 나도 할 말이 없기는 하다.
여행지는 미국, 동남아, 호주 중 한 노선을 선택할 수 있었다. 마음이야 미국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아내와 동행할 생각으로 호주여행을 선택했다. 그러나 아내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동행하기를 거절했다. 당신과 다니면 재미없다는 말과 함께.
인천공항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긴장하게 된다. 티켓팅 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살피기도 하며 다른 사람들의 의상도 관찰하고 검색대로 향하는 출구도 재확인 한다. 또한 가방에 잘 들어 있는 여권과 비행기 표도 몇 번을 확인하곤 한다. 검색대를 통과하기 전에 혹여 경고음이 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기도 하고, 동전을 주머니에서 꺼내 놓을까, 벨트를 풀어 놓을까도 고민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화장실에 들른 뒤 비행기 좌석에 앉아야만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출입국 신고서와 세관신고서를 작성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돋보기를 써도 잘 보이지 않을뿐더러 외국어로 되어 있어 아리송한 부분들도 있다.
촌놈티를 여전히 떨쳐버리지 못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나는 눈을 지그시 감다가 웃어버리고 말았다. 일행 중 한 명이 기내에 들어오기 전, 소주 두 병을 승무원에게 빼앗기는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제 10시간 가량을 버텨야 한다. 아무래도 알코올로 시간을 달래야 할 것 같다.
▣ 페더데일 야생 공원과 블루마운틴
▲ 스템포드 그랜드 노스 라이드 호텔
새벽에 도착하여 몇 시간 쉬지도 못하고 아침 여행이 시작되었다. 기내에서 오랫동안 있어서인지 다리도 아프고 어깨도 뻐근하며 입술도 말라붙는 느낌이다. 하지만 지상의 낙원이라는 이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들떠 있었다. 아침에서야 우리가 머물고 있는 스템포드 그랜드 노스 라이드(Stamford Grand North Ryde) 호텔을 둘러 볼 수 있었다. 시내에서 25분 거리에 있는 호텔로 시드니 북서쪽에 위치하여 250여 개의 객실을 가지고 있었다. 호텔이라기보다는 수영장이 정원처럼 잘 꾸며진 아담한 리조트의 분위기가 나는 시설이었다.
우리 일행은 ‘머레이(MURRAYS)' 버스에 탑승했다. 머레이는 머레이강과 머레이 계곡 등과 같은 아름다운 자연과 포도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차장 밖으로 보이는 시드니는 거리를 오가는 이색인종을 제외하고는 큰 인상을 주지 못했다. 아직은 시내 투어를 하지 않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시드니는 세계 3대 미항 중의 하나라고 하니 오페라 하우스와 함께 나중에 천천히 살펴 볼 일이다.
한국인 현지 가이드는 40대 후반의 남자로서 다소 겉늙어 보였다. 그는 고등학교 때 호주로 유학을 와서 이곳에 정착을 했으며 몇 달 전까지 사설경비업체를 운영했으나 쫄딱 망하고 현재는 여행 가이드 일을 하고 있노라고 했다. 그는 호주의 사학자처럼 호주와 뉴질랜드의 역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시드니에 이르기까지 소개를 유창하게 이어갔다.
시드니는 '로드 시드니(Lord Sydney)'라는 인물명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호주는 현재 영어가 공용어이지만 영어를 가정에서 쓰는 비율은 75%로 다문화 국가이다. 400개 이상의 언어가 공존한다고 하니 새삼 세종대왕에 대한 존경심이 더해진다. 쿡 선장에 의해 호주탐험이 본격화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영국 죄수들의 유형지에서 오늘날의 호주로 발전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1787년 호송 책임을 맡았던 예비역 대령 필립이 이끄는 두 척의 군함의 감시를 받으며 9척의 배에 짐짝처럼 실렸었던 750여명의 죄수들(여자 153명, 어린이 11명 포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망망대해는 곧 그들의 무덤이며, 파도소리는 그들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상여의 요령소리로 들리지 않았을까?
그나저나 호주와 동일한 죄수들의 후손인 뉴질랜드인들이 자기들의 조상은 다행이도 호주에 수형된 최악질의 죄수들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위안을 삼는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1851년, 시드니 서쪽 블루마운틴즈 넘어의 바서스트 거리에서 금광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현재의 호주는 어떤 나라가 되었을까도 상상해 본다.
우리의 첫 번째 여행지는 동물원이었다. 시드니 인근에는 동물원이 네 곳이 있다. 타롱가 동물원(Taronga Zoo), 시드니 와일드 라이프(Sydney Wildlife), 페더데일 야생 공원(Featherdale Wildlife Park), 코알라 파크(Koala Park) 등이 그것이다. 우리의 첫 방문지는 페더데일 야생 공원(Featherdale Wildlife Park)이었다. 시내에서 약 40분 거리에 있는 블랙타운(Blacktown) 부근에 잇는 민간인이 운영하는 동물원으로 자연에서 서식하고 있는 캥거루, 코알라, 왈라비, 에뮤, 이구아나 등 2천여 마리의 호주산 야생동물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전형적인 동물원인 타롱가(Taronga Zoo)와는 다르게 관람객들이 직접 캥거루나 에뮤 등과 어울릴 있는 말 그대로 공원이었다.
캥거루와 타조는 ‘끊임없는 전진’을 의미하는 호주의 상징동물로 천혜의 자연 속에서 50여종이 있다고 한다. 호랑이와 사자와 같은 맹금류가 없는 섬에서 호주 특유의 유대류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로서는 큰 자원인 셈이다. 코알라는 나무 위에서 종일 잠만 자는 듯했는데, 코알라는 원주민 언어로 ‘물을 마시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실제로 코알라는 물을 마시는 대신 50%의 수분을 함유하고 있는 유칼립투스(Eucalyptus) 나무를 주식으로 한다. 코알라는 하루 18시간 정도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는데, 이는 유칼립투스 나뭇잎에 함유된 알코올 성분 때문이란다. 코알라가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며 속으로 웃고 말았다. 코알라는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으며 캥거루와 타조는 좋은 놀이 상대가 되어 주었다. 이구아나, 악어, 뱀 등은 역시 혐오의 대상이었으며 앵무새나 닭은 아름다운 깃털로 사랑을 받았다. 동물원을 둘러보고 나오는 입구에 기념품을 파는 상점이 있었는데 내가 원하는 호주 특유의 인형은 없었다. 역사가 이백년 밖에 안 되며 원주민을 박해하는 나라에 무슨 전통공예품이 있겠는가.
▲ 블루마운틴
다음 코스는 호주의 그랜드캐년이라 불리는 블루마운틴이었다. 시드니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었다. 이곳은 지난 2000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된 해발 1,100m의 고원이다. ‘블루 마운틴’이라는 이름은 ‘살아 숨 쉬는 푸른빛을 발산하는 산’이라는 뜻을 지닌다. 블루마운틴에는 유칼립투스 나무가 많이 서식하고 있어 이 나무가 공기 중으로 뿜어내는 성분이 햇빛과 만나면 푸른색을 띄는 특성 때문에 블루마운틴(Blue Mountain)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첫 눈에 들어오는 블루 마운틴의 정경은 가히 탄성을 자아낼 만큼 아름답다. 특히‘세 자매 봉’은 그림을 그려놓은 듯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블루 마운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에코포인트'에는 연간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방문할 만큼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에코포인트에서는 블루 마운틴의 상징인 '세 자매 바위'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데, 여러 가지 유래가 내려오는 이 바위는 원래는 일곱 자매였는데 오랜 침식작용으로 지금은 세 개의 바위만이 남았다고 한다.
에코포인트에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한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 ‘시닉 레일웨이(Scenic Railway)’를 타기 위해 이동했다. 250m의 수직 절벽을 52도 각도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시닉 레일웨이'는 세계에서 가장 경사진 열차로 기네스북에도 올라있다고 한다. 1880년대에는 석탄과 광부들을 운반하는 열차였지만 지금은 블루마운틴의 명물로 자리하고 있었다.
타고 내려가다가 혹 뒤집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질 정도로 경사가 심했으며 덜거덕거리는 소리 또한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수직으로 떨어지듯 내려간 후, 열차에서 내릴 때는 사고 없이 내린 것이 고맙기만 했다.
블루마운틴은 방문자들을 위한 산책로가 나무 데크(deck)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약간 미끄러운 느낌도 있었지만 원시림을 연상시키는 울창한 삼림과 벼락을 맞은 고목도 있어 즐거운 산책시간이 될 수 있었다. 산책로 중간에는 광산입구와 그에 대한 설명, 작업도구 등이 볼거리를 제공했다. 올라 올 때는 1분 남짓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오면서 또 다른 느낌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산장에서 가볍게 점심을 한 후 일행은 석회동굴로 이루어진 제놀란 동굴(Jenolan Caves)을 둘러 본 후 숙소로 돌아왔다. 긴장되면서도 피곤한 하루였지만 무언가를 가슴에 품고 깊게 잠들 수 있는 하루였다.
▣ 와이너리 포도농장, 포트스테판의 모래사막, 넬슨 베이에서의 돌고래 탐험
여행 2일째의 일정은 포트스테판(Port Stephens)을 거쳐 넬슨 베이 (Nelson Bay)로 돌어오는 코스였다. 시드니 시티에서 북쪽으로 250km 거리에 있는 포트스테판은 3시간 거리에 있었다. 다소 먼 거리였지만 한국여행과는 달리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오는 여행이라 즐겁기만 했다.
포트스테판으로 가는 길목에 와이너리(winery) 농장에 들러 점심을 해결했다. 농장 진입로에서 나는 이곳이 단순한 시골 도로 옆에 위치한 작은 음식점 정도로 생각했다. 그만 큼 규모나 시설 면에서 그리 크지 않은 전원풍의 농장이었다. 오히려 영동의 와인코리가가 낳은 듯싶었다. 포도주를 가볍게 시음을 한 후 우리는 비프스테이크로 점심을 먹고 농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한국의 포도나무에 비해 농장 규모나 나무의 크기도 그리 우리의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헌터밸리(Hunter Valley)는 포도농장으로 유명한 남부 프랑스의 기후,지질, 지형과 흡사하여 그 지역에서 이민 온 유럽인들이 대규모의 와인농장지대를 이루어 세계의 최대 와인 생산국인 호주의 와인 메카로 유명한 곳이다. 아마도 우리가 헌터밸리가든(Hunter Valley Garden)이나 이곳의 큰 농장에 오지 않은 이유에서인 듯하다.
▲ 와이너리 농장 ▲ 포트스테판
포트스테판은 일종의 모래 사구였다. 탐방객들에게 배타적이었던 주민들도 이제는 일자리와 수익창출로 외국인들을 즐겨 맞이한다 하니 부담이 한결 덜했다. 마치 모래사막과 같이 고운 모래로 낮고 높은 구릉을 형성하고 있는 이곳은 이국적 정취를 더했다. 특히 관광객을 태우고 10여 마리의 낙타가 긴 행렬을 이루며 모래 위를 걷는 풍경은 여지없는 모래사막 위의 정경이었다.
4륜구동의 지프차와 타이어와 차체가 간극이 있는 봉고형 미니버스는 모래 위를 달릴 수 있도록 고안된 이동수단이었다. 우리는 미니버스를 타고 300여 미터를 이동하여 모래썰매를 탈 수 있는 곳으로 갔다. 70도 정도의 경사면을 따라 막상 구릉에 올라 아래를 보니 절벽과 같아서 쉽게 보드에 몸을 싣지 못했다. 머뭇거리던 어린 새가 조심스럽게 초기 비행을 하듯 우리는 하나 둘 씩 보드를 타고 밑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울려 나오는 함성 소리는 인간이 가장 희열을 느낄 때 나오는 탄성소리였다. 지칠 때까지 구릉을 오르내리던 우리는 해안선을 따라 진입로로 되돌아 왔다. 광활하게 펼쳐진 남태평양의 시원한 정경에 나는 바다 속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쪽빛 바다에 흠뻑 취한 채, 나는 한동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 넬슨 베이 항구 ▲ 돌고래
넬슨 베이는 아담한 항구도시였다. 스쿠버다이빙, 카악, 보트, 쿠르즈 등 레저스포츠를 즐기고 돌핀크루즈(Dolphin Cruises)의 명소였다. 우리는 모터보트를 타고 돌고래를 찾아 나섰다. 어울리지 않는 비유이지만 나는 마치 소설 백경에 나오는 모비딕 선장이나 된 듯 선글라스를 걸치고 도도하게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막상 돌고래를 발견했어도 그리 흥분된다거나 큰 기쁨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것은 아마도 돌고래가 우리의 눈에 아주 익숙한 포유류라 그런 듯싶었다. 오히려 배 위에서 마시는 소주맛과 시원한 바닷바람이 나를 즐겁게 해 주었다. 그렇게 오십이 넘은 중년의 사내는 모래구릉에서 뒹굴고 돌고래를 찾아 나서며 헌터 벨리의 포도송이가 익어가듯 숙성되고 있었다.
▣ 본다이 비치, 오페라하우스, 수족관, 선상투어
지난 밤의 흥취로 속이 알싸하다. 낯선 땅에서 마시는 생맥주에, 아니 술 마시는 분위기에 취해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총무를 보는 아우의 만류가 아니었으면 나는 레스토랑이 문을 닫을 때까지 흥취를 즐겼을 것이다. 그 덕분에 머리가 띵하다.
호텔을 나와 주점을 찾아도, 술을 파는 곳을 찾아도 모두 가게는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호텔에서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서부영화에서 보는 술집 공간이 우리를 맞아했다. 한 쪽은 경매에 열을 올리고 바텐더를 중심으로 좌우로 위치한 테이블 가에 원주민들이 술을 즐기고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안주접시는 없고 맥주병만 덩그러니 놓인 것이 몇 시간째 이야기만 이어가는 모양새다. 그러니 연신 생맥주잔을 바꾸어 나르는 한국인 여행객들이 그들에게 반갑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이 우리의 첫 방문지는 본다이 비치(Bondi Beach)였다. 시드니 남부에서 가장 유명한 해변 휴양지로 1km의 백사장이 이어지고 있었다. 본다이는 원주민어로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라는 말로 우리가 도착했을 때도 약간의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여행코스로 잡힌 곳이라 오기는 했지만 아침에 바라보는 해변이야 썰렁하기 밖에 더하겠는가? 시드니 최고의 해변이라는 평가에 미치지 못하는 인상이었다. 늘씬한 몸매에 몸에 꽉 조이는 스타킹을 입고 조깅을 하는 백인 호주 아가씨가 바다보다 더 아름답게 보인 것은 지난밤의 술기운이 남아 있는 탓일까? 아무튼 시원한 바람에 다소나마 머리를 식힌 후 시내투어를 시작했다.
▲ 선상에서 바라본 오페라하우스
▲ 본다이 비치 ▲ 시드니 수족관
오페라 하우스, 각종 달력이나 화보에 호주의 상징물로 등장하는 오페라 하우스에 대한 기대감은 컸다. 과연 세계 3대 미항이라는 시드니 해안과 어우러지는 오페라하우스의 외관은 아름다웠다. 커팅 된 오렌지 조각에서 그 디자인이 유래 되었다는 시드니항의 오페라 하우스는 1959년에 착공을 시작하여 14년간의 공사를 거쳐 1973년에 완성 되었다고 한다. 총 공사비 1억 200만 달러를 들여 건설된 오페라하우스는 106만 5000장의 타일을 요트모양으로 만든 지붕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건축물은 1957년 정부에서 개최하는 국제 공모전에서 32개국 232점의 경쟁을 물리치고 선발된 덴마크의 건축가 요른 우츤(Joern Utzo)의 디자인 작품이다. 내부는 콘서트홀을 중심으로 4개의 커다란 홀로 나뉘어져 있다. 먼저 15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오페라 극장을 비롯하여 2,900명이 들어설 수 있는 콘서트홀이 있고, 544석의 드라마 극장, 288석의 스튜디오, 400석의 연극무대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건축디자인 기술이 발전해서인지 내부시설은 솔직히 한국의 콘서트홀과 비교해 여러모로 부족한 부분들이 발견되었다. 그럼에도 오페라하우스는 1년 내내 세계적 예술가들이 모여 음악회, 가극 등의 공연이 열린다고 하니 그저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버 브리지를 바라보며 커피 한 잔을 마신 후 나는 수족관으로 이동했다. 이동 수단은 시드니의 명물인 모노레일이었다. 그러나 이 모노레일은 현재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없다. 1988년 첫 운행을 시작한 이래 달링 하버(Darling Harbour)와 조지 스트리트(George Street) 등 시드니 시내 중심부 3.6㎞ 구간을 순환하며 많은 관광객을 모았던 모노레일이 2013년 6월 30일, 마지막 운행을 마치고 철거작업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사우스 웨일스(NSW) 주정부는 모노레일을 철거한 자리에 경전철과 새로운 컨벤션 센터를 신축할 예정이라고 한다.
원을 도는 듯한 기분으로 모노레일에서 내린 나는 수족관으로 향했다. 달링 하버에 위치하여 호주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시드니 수족관은 근해에 서식하는 650여 종류의 1만 1000여 마리의 해양 동물을 모아 놓아 마치 바다 속에 있는 느낌을 갖게 한다.
시드니 수족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수심 10m에 길이 145m의 수중 터널이다. 사방이 투명 아크릴로 만든 터널을 따라 가면서 우리는 상어와 각종 신비한 물고기, 먹이를 주는 다이버를 만날 수 있다.
▲ 시드니항
수족관을 나와 거리를 따라 걷노라면 시드니가 참으로 쾌적한 도시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청정해역과 쾌적한 공기, 청명한 하늘,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환경이다. 우리는 일정에 따라 시드니 항만을 유람하는 크루즈선에 몸을 실었다. 선착장을 출발한 유람선은 하버 브리지를 통과하여 오페라하우ㅛㅡ 앞을 유유히 지나간다. 나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가며 시드니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담기보다는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만큼 렌즈 속에서 각도에 따라 아름답게 다가오는 오페라하우스와 항만의 정경은 아름답게 다가왔다.
하버 브리지 (Sydney Harbour Bridge)는 총 길이가 1,149m로 1923년에 착공을 시작하여 1932년에 개통 된 다리이다. 아치교 특유의 디자인 때문에 시민들에게 옷걸이(The Coat Hanger)라는 애칭으로 불린다는 이 다리 역시 오페라하우스와 어울리는 시드니의 상징물이었다. 때마침 선상 식사시간이라 뷔페음식에 포도주를 곁들이며 유람을 즐겼다. 일행 중, 한 부부는 고추장이 없으면 못산다며 1층에 있는 한식뷔페로 향하기도 했다. 고추장이나 김치를 잠시 잊어버려도 될 공간이었지만 그들 부부에게는 여전히 한국인의 피가 펄펄 끓고 있는 듯했다. 오페라하우스를 바라보며 한 잔의 와인을 마시는 이 순간만큼은 황제가 된 기분이었다. 더욱이 바다 한가운데 솟아오른 작은 섬, 핀치가트 섬(Pinchgut Island)은 슬픈 인간의 이야기를 간직한 채 고요히 자리하고 있었다. 데니슨 성채((Fort Denison)'라고 부르는 이곳은 식민지 시대에 반항적인 죄수들의 수용소라고 한다. 당시 이 부근의 바다에는 상어가 많아 죄수들이 탈출할 엄두를 낼 수 없었기에 유형지의 적소로 선택되었을 것이다. 1857년 이후에는 포대를 설치해 견고한 요새로 만들어 시드니만을 지키는 역할도 했다고 한다. 포트 데니슨의 이름은 당시 총독이었던 데니슨 제독의 이름을 딴 것이며 현재는 역사적 기념물로서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들른 미시즈 매쿼리스 포인트(Mrs. Macquarie's Point)는 '매콰리 부인의 의자(Lady Macquarie's Chair)'라는 별칭을 가진 곳으로 호주의 유형식민지 시대 매쿼리 총독의 부인이 항해에 나간 남편을 그 장소에 앉아서 기다렸다는 일화를 가진 관광명소이다. 어찌 보면 한국의 망부석 설화와 맥이 닿아 있기도 하다. 미시즈 매쿼리스 포인트는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 브리지를 바라보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붐볐다. 이 포인트는 나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기에 나는 산책로를 따라 공원을 관람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 시드니타워 야경
저녁에는 야경을 보기 위해 시드니 타워(Sydney Tower)에 올랐다. 1981년에 완공한 이 건물은 시장에서 전망대 까지는 250m 거리로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때는 한 참을 내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360⁰ 유리벽으로 구성된 전망대는 하버 브리지와 오페라 하우스, 다링 하버, 올림픽광장, 하이드 파크 등 시내 전역을 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시드니는 역시 아름다운 항만과 이와 조화된 건축물이 조합된 아름다운 도시라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시설을 보완 중인지 1층 출입구에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너무 허접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었다.
▣ 갭팍(Gap park)
지난 밤에 호텔에서 먹은 술 때문인지 아니면, 여독 때문인지 주당들은 벌써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약간은 쌀쌀 한 기운을 헤치며 우리는 더들리 페이지(Dudley page)로 향했다.
더들리 페이지(Dudley page)는 시드니 동부지역에 위치한 지역으로 시드니 시내가 한눈에 보이고 남태평양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주택지로 최고의 부촌이라 했다. 그래서 나는 멋진 정원이 있고 수영장과 넓은 잔디정원이 3층집 건물을 연상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집들은 그리 넓지 않고 붉은 기와지붕의 단층집이 대부분이었다. 붉은 벽돌로 집을 지을 때는 정부보조금이 나오며 집 근처의 나무 하나도 국가소유물로 관할기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설명도 들었다. 이를테면 엄격하게 관리되는 한국의 그린벨트 지역인 것 같았다. 이곳의 전망이 혼자보기가 아까워 100년간 개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국가에 무상기증한 땅이라 하니 참으로 존경할 만한 분인 듯했다. 나는 인근 주택가를 유심히 살핀 결과 그리 부촌이라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오히려 주변 풍경 자체가 헤아릴 수 없는 자연의 풍요로움을 주고 있는 공간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초록 잔디로 이어진 완만한 구릉지에서 바라 본 시드니 풍경은 역시 아름다웠다. 하버 브리지와 시드니 타워, 오페라 하우스 등 한 마디로 시드니의 전망대였다.
▲ 더들리 페이지
우리는 간단한 기념사진촬영을 한 후 갭팍(Gap Park)으로 향했다. 영화 <빠삐용(Papillon)>의 촬영지라는 가이드의 설명에 나의 귀는 쫑긋 솟아오르고 있었다. 빠삐용이 바나나껍질로 만든 탈출용 포대자루를 안고 절벽을 뛰어 내리던 장면이 생생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영화 빠삐용을 보고 수업시간에 우리에게 소개해 주신 분은 중학교 가사선생님이셨다. 미혼이었던 여선생님은 자기가 만든 옷을 하루에 한두 번씩 바꿔 입는 것으로도 유명했지만 실감나는 연기와 입담으로 항상 학생들에게 흥미를 자아내게 했다. 어떤 때에는 점심시간에 인근에 있는 하숙집으로 가서 아침에 입었던 옷을 갈아입고 오는 날도 있었다. 남녀학생을 불문하고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생님이셨다. 그 선생님은 여학생에게는 가사를, 남학생에게는 기술과목을 지도하셨다. 나도 그 선생님을 좋아했던지 기술과목을 열심히 공부하여 학년 최고 점수를 얻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집 뒤 산언덕마루에서 열심히 시험과목을 암기한 덕분에 평균이 10여점 올라 담임선생님이 다른 반에 가서 내 자랑을 하셨던 것도 생각난다. 3학년 2학기 무렵 여선생님은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시게 되었다. 교실에 모여 이임사를 듣는 동안 전교생은 울음바다 속에 있었다. 그 바다가 시드니에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40여 년 동안 삶에 묻혀 있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하는 곳이 이곳 갭팍이 될 줄은 몰랐다.
해안가를 따라 펼쳐진 절벽의 풍경은 달력에서 나오는 유렵의 풍경 한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100m 높이로 깎아지른 수직 절벽은 영국의 속령이었던 유배지 시절에 자살 명소였다고 한다.
갭팍(Gap park)은 더들리 페이지에서 조금 내려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절벽틈새로 보이는 바다경치가 아름답다고 하여 갭팍이라는 이름이 부쳐졌다고 한다. 갭팝에 오르기 전에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리 저리 날고 있는 아름다운 앵무새였다. 한국에서 동물원이나 개인집 새장에나 있을법한 앵무새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며 나무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한 마디로 신기한 광경이었다. 일행 중에 그와 똑 같은 앵무새를 길러본 경험이 있다는 사람도 있었다.
▲ 갭팍
언덕길을 따라 공원으로 오르자 확 트인 남태평양이 눈앞에 전개된다. 탁 트인 전경에 가슴마저 열리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100여 미터의 깎아지른 절벽과 길게 이어지는 단애가 이국적 정취를 물씬 자아낸다. 하얀 등대 아래에서 포카리스웨이트 광고도 찍었다는데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일이다.
공원을 내려오는 발걸음은 바빴다. 이제 점심을 먹고 뉴질랜드로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앵무새가 노닐던 경사진 공원을 따라 내려가다보니 요트들이 옹기종기 모여 평화를 지어내고 있었다.
▣ 시드니를 떠나며
이제, 신이 설계한 나라, 호주를 떠난다. 풍광이 좋아 안경점이 필요 없는 나라, 자가용 대신 요트를 선호하고 운동장 어디에서나 럭비를 즐기는 사람들, 집 밖에 나가면 너른 공원과 고령의 수목이 그늘을 만드는 나라, 이제 호주는 과거 유형지의 아픔을 딛고 천혜의 땅으로 관광객을 모으고 있다. 이제 호주는 백인과 원주민들만이 사는 나라가 아니다. 다수의 폴리네시안들이 시드니를 이끌어가고 수많은 해외 어학연수생들이 이 나라에서 수학하고 있다. 그러나 간간히 백호주의, 혹은 자기불만의 표출로 외국인들에 대한 폭력사건이 발생한다는 좋지 않은 소식도 들려온다. 백인우월주의 내지 영연방에 속해 있다는 자긍심으로 살아가던 시대가 지난 지는 이미 오래이다. 상호협력과 공생을 모색하는 글로벌시대에 이제 호주도 강한 의식의 변화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자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의식이기 때문이다. 호주를 다시 여행한다면 시드니에 오고 싶은 생각은 없다. 왜그런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한국에 돌아가면 나는 영화 <빠삐용>부터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중학교 시절을 되짚어보고 갭팍을 회상하며 나는 행복하게 미소 지을 것이다. 호텔로 걸어가는 내 발걸음이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