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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가마솥, 백두산 외륜봉(白頭山 外輪峰)
등정(登頂)과 역사반추(歷史反芻)
農 溪 鄭 奉 永
민족의 영산 백두산 기행일: 2004.8.4~8.8
창원에 살면서 2개의 산악회(창원A산악회, 불모산악회)를 창립하고 청산을 좋아하는 삶의 철학 때문에, 요즘도 계속 자연을 가까이하고 있던 차, 서울의 트레킹전문여행사인 백두산 닷컴의 백두산천지 외륜 트레킹의 4박5일 일정의 여행정보(중앙일보, 국민일보)가 번쩍 눈에 들어왔다. 가야지, 가야지, 북파의 천문봉 반짝 관광이 아니고 외륜봉 테두리등정이라면…
민족의 영산에 올라 둘레 산등성이를 직접 밟아보고 싶었다.
무릇, 대개의 사람들이 아동기엔 어리다고, 청․소년기엔 공부와 숙제로 핑계대고, 청․장년기엔'바빠, 바빠'직장, 사업 돈벌이로 사유(事由)를 대고, 앞으로는 늙어져서 장․노년층에 이르면 관절염 등 늙었다고 이유(理由)를 댈텐데… 핑계, 까닭, 사유, 이유, 연고, 연유를 다 접어버리고 여유(餘裕)를 만들어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경제적, 정신적, 물질적, 시간적 여유를 모두 만들기란 어려운 일이겠지만 백두산 외륜봉 등정에는 만사 제쳐두고 참가한 것이다.
매주 수요일(6월30일부터 9월1일까지 10회)출발해 4박5일 일정으로 일요일 돌아오는 것 중 우기가 끝나는 8월4일~8일을 선택했다. 6~7월의 장마가 끝나고 8월의 땡볕이 개시되기 때문이다. 보도에서 접하는 백두산의 변화무쌍한 기후로 볼 때 계곡이나 바다의 본격 피서가 개시되는 시점에 백두산 연봉도 천지에 발을 담그고서 한가하게 태양과 친구가 될 것이란 생각에서다.
산악회원 몇몇 분에게 같이 가 볼 것을 타진하였으나 별 무반응이었다. 여행의 결정에는 떠나는 목적과 과감성이 있어야 하는데 많은 이유와 사유들 때문에 더 이야기하고 더 듣기가 싫어졌다. 부득이 지난해 러시아 중앙시베리아 바이칼호 여행을 같이 약속했다가 앞 뒤 따로 국밥으로 출발하게 된 이창형 동기생에게 연락해 보기로 하였다. 단김에 OK였다.
지난 여름 바이칼여행 일정에서는 동기생의 장인어른께서 출발 이틀 전에 갑자기 별세하는 바람에 같이 가지 못하고 나 홀로 팀에 참가하였는데, 이번에는 인천공항에서 만나 같이 출발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당시 이창형 동기생은 여름방학을 기하여 대학생인 둘째, 셋째 딸을 대동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원래 출발보다 2회차 연기하여 바이칼에 나와는 별도로 다녀온 바 있어 늘 미안한 마음이 빚으로 남아있었는데 한없이 반가웠다.
이창형 동기생은 출신학교는 다르지만 ROTC 10기생으로 그가 90년대 후반 창원의 직장생활 중 창원에 거주하는 나와 알게 된 친구다. 그는 직장 은퇴 후 현재는 서울의 집으로 돌아가 살고 있는데 간혹 연락을 하며 지낸다. 여정은 인천-장춘(길림성 성도)간은 중국민항기 국제선으로, 장춘-연길(조선족 자치주 주도)은 중국민항기 국내선으로 오후 늦게 도착하여 당일 밤늦게 백두산 주변의 도시인 이도백하의 신달호텔에 도착하는 일정이다.
중국내 조선족이 대표적으로 많이 사는 곳은 연변 조선족 자치주로 연길, 용정, 화룡, 안도, 도문, 왕청, 훈춘 등으로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두만강 지류인 옛 동간도와 목단강(중국명, 무단장)유역인 북간도에 많이 살고 있다. 여행에 참고하기 위하여'길림성 여유 교통도'란 지도 2종류를 샀는데, 상기 7개 도시가 속한'연변조선족자치주'란 표기는 지도에는 삭제되어 없어졌고, 북한의 혜산시와 압록강 상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우리나라의 읍면 규모인'장백 조선족 자치현'만 생색으로 표기된 지도였다.
중국의'동북공정'에 따른 지침이 교통지도에도 반영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장백 조선족자치현은 백두산에서 정남쪽의 조․중 국경선으로 압록강수계가 북한의 양강도(구, 함경남도)쪽으로 밀고 들어온 지형에 위치하고 있다.'동북공정'은 만약의 사태에 따른 북한의 붕괴와 탈북사태로 인한 난민유입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변경 불안을 안정시키고, 나아가 조선족 소수민족의 북한지역까지의 영향력 혹은 영역확대를 도모하려는 의도로 파악되고 있다
중국의'동북공정'에 따른 고구려(高句麗), 발해(渤海)가 중국의 속국,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하는 역사왜곡에 대하여 대한민국의 한 시민으로 백두산기행에 앞서 국내 사학자들의 반론에서 아직 한 번도 거론된 적이 없는 나의 이색적 정면비판 한마디를 중국정부에 고한다. 내용은 이렇다! 중국은 역사 이래로 중국의 한족(漢族)이 건국했거나, 북방유목민이 나라를 세워 한족을 지배하면서 중국화 되었을 경우를 통틀어 중국(中國)이라 한다.
중국은 역사이래 국호를 한문외자(一字)로 국호를 사용했다. 열거하면, 은(殷), 주(周), 진(秦), 한(漢), 신(新), 위(魏), 촉(蜀), 오(吳), 진(晋), 수(隋), 당(唐), 요(遼), 송(宋), 금(金), 원(元), 명(明), 청(淸), 중(中)등으로 사용하였고, 춘추․전국시대, 5호16국시대, 북조․남조시대를 통틀어 수많은 소국(小國)들도 한자(一字)앞에 나라가 일어난 시기를 표시하는 전․후(前․後)를 붙이거나, 건국한 지역 위치를 구별하기 위한 동․서․남․북(東․西․南․北)을 앞에 표시했을 뿐 한글자의 국호를 사용하는 항렬과 같은 특징적 관행이 있어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고대국가에서 현대국가에 이르기까지 외자(一字)를 사용하지 않는다. 조선(古朝鮮), 부여(夫餘),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 고구려(高句麗), 신라(新羅), 백제(百濟), 가야(伽耶), 가락(駕洛), 대가야(大伽耶), 발해(渤海), 태봉(泰封), 후백제(後百濟), 고려(高麗), 조선(朝鮮), 대한(大韓) 이런 식으로 엄연히 중국과 글자 수가 다른 국호다. 위의 국호명칭 대비에서 보듯이 한민족의 자주적 주권국가인 고구려, 발해를'중국역사의 일부, 중국의 변방의 역사, 중국의 속국․지방정권'이었다는 주장은 맞지 않다. 국호의 작명방식이 다르다.
어떻게 '고구려, 발해가 중국역사'란 말인가?! 중국의 저의는 동북3성(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소수민족인 조선족, 몽고족, 만족 중 미래 통일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둥베이 3성내 조선족의 국경안정을 위한 고도의 역사 껴안기 정책이다. 만주 집안(輯安, 고구려 국내성)의 찬란한 고구려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됨으로서 한국관광객의 급증에 의한 현장학습으로, 한국사(조선사)의 중국내의 만주지역확산을 방어하고, 중국식 소수민족(한족을 비롯한 56개 민족) 역사편입으로 넓은 영토를 수호․고착․보전하려는 것이'동북공정'의 저의이다. 중국이 가장 고심하는 것이 55개 소수민족과 대만문제다. 특히 미국을 기대는 대만을 두고 고민한다.
다시 본론으로, 우리는 저녁7시쯤 늦게 백두산기행의 들머리인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연길공항에서 대기 중인 조선족 가이드 이만송(李万松)을 만났다. 그는 연변 해외여유 유한공사 소속으로 정규 4년제 대학을 나온 수재로 연변에서 이도백하에 도착할 때까지 3시간 30분 소요시간 내내 신나고 열심히 설명했다. 여행이란 아는 것만큼 보이므로 나의 준비한 기초실력 질문이 한몫 한 셈이다.
긴 여정에다 저녁 식사 후 차를 타서 그런지 열심히 설명하는 이만송의 명강의(?)를 아랑곳하지 않고 자장가 삼아 졸고 있는 분을 깨우기 위하여 이런 질문을 던졌다. '컴컴한 야밤에 백두산 산록 공로를 계속 달리는데 혹시 백두산 호랑이가 발견된 적이 있는지?''백두산에 6~7마리 정도가 있습니다.'뒤로 돌아보니 모두 잠이 깨어 있었다. 호랑이 이야기가 계속되고 야밤에 우리를 태운 외줄기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만이 달리고 있었다.
밤늦게 도착한 이도백하는 우리나라의 지리산 아래 산청군 소재지 정도의 크기로 도심에 늘 푸른 솔밭(美人松)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백두산의 북쪽 산록에는 5개의 송화강 지류가 있는데 서쪽에서 동쪽으로 번호를 매기기를 일도백하, 이도백하(江 이도백하는 천지, 승사하, 장백폭포의 하류임), 삼도백하, 사도백하, 오도백하라 부르는데 지리산의 남강 지류인 덕천강, 임천강, 경호강, 지류정도로 짐작하면 된다. 현 소재지 이도백하(二道白河)는 5개 지류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지명으로 중국령에서 백두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우리나라의 모텔급이 여러개 있는 소도읍이다.
다음날 이도백하의 신달호텔에서 6시에 기상 조식후 서백두로 이동하기 위하여 전세버스에 올랐다. 연길에서 이도백하로 이동하며 타고 왔던 현대자동차에서 만든 중고수입차다. 이도백하와 서백두까지의 도로명은'여유배파공로'라는 도로다. 비포장도로로 백두산 외륜봉을 남쪽(진행방향의 좌측)에 두고서 북쪽의 이도백하에서 백두산 서쪽으로 가는 도로이다. 서백두를 중국에서는'시파(西坡)'라 부른다. 비포장도로로 노면이 좋지 않으므로 3시간 30분이 소요된다. 도로의 해발은 1,000m내외지만 이깔나무 등의 숲이 좌우에 가려 백두산은 보이지 않는다. 백두산록에 들어왔는데 백두산을 보지 못하고 있다.
진행방향의 왼쪽인 남쪽방향은 백두산지역이므로 우리의 국립공원 관리공단에 해당하는'지린성 창바이산 국가급 자연보호구 여유국'에서 산림을 보호하기 때문에 산림은 손댈 수 없고, 진행방향의 오른쪽인 북쪽방향의 산림지대에는 장뇌인삼을 대대적으로 재배하기 위하여 1㎞마다 가로세로 500m이상의 정사각형 경작지를 허가하여 중국인들이 한 가구씩 입주하여 벌목 후 밭을 일구고 있었다.
1㎞마다 산림도로를 따라 띠를 두고서 약500m길이의 정사각형 장뇌인삼밭이 허가되는 것이다. 현재 완전 조성된 곳도 여럿 있었다. 한국관광객을 상대로 한 중국인의 대대적이고 계획적인 대단위 장뇌인삼재배를 시도하고 있었다. 장뇌인삼 개간 밭은 수천년동안 낙엽만 쌓인 부엽토지대로 수십년동안 비료 없이 재배할 수 있다. 중간의 휴식시간에 차를 세워 확인해 보니 땅이 낙엽으로 푹신푹신했다.
백두산의 북쪽지역은 해발은 높되 구릉지대(완만한 경사지)로 준평원에 가깝다. 계속 달려 도착하는 곳이 서파다. 백두산'서파(西坡)',서파란 우리말로'서쪽언덕'이다. 서파산문(西坡山門)인근에 있는 백운장산장에 들러 방을 정했다. 예약은 되어 있었지만 좋은 방을 선점하려면 들러야한다는 것이다.'백운장산장'은'지린장백 국가급 자연보호구 여유국 산림공사의 옛 서파관리소'장소로 서파를 개방하면서 산장으로 개조한 것으로 이름 그대로 산장이다. 우리말고도 저녁에 한국의 몇개팀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나중에 우리보다 늦게 서울에서 온 여행사 1개팀을 만났다.
서파 트레킹에 나섰다. 중국정부에서 서파 코스의 도로포장이 지난해 이루어졌고, 올해에는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도로의 갓길을 자연석으로 우리나라의 농업용 저수지 내면 자연석처럼 비스듬히 견고하게 쌓고 있었다. 중국에는 인구가 많아서인지 돌작업도 모두 수작업이다. 일류관광지를 만들기 위하여 중국정부에서 작심한 듯싶다. 우리나라의 사태방지용 잔디보다 자연스럽지는 않았으나 만리장성을 쌓은 민족인지라 중국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의 갓길언덕은 모두 돌작업으로 마무리하고 있었다. 현장마다 수백명을 동원하여 일하고 있었다. 인건비가 싸기 때문이다.
금강대협곡에 도착하여 중국인 천막식당에서 가지고 간 도시락과 현지 특미식을 곁들여 먹었는데 중국인 2가구가 벌써 구색을 갖추고서 상술을 발휘하고 있었다. 천막식당은 앞으로 우리나라의 국립공원입구 식당처럼 진을 치며 계속 늘어날 것 같다. 조선족 1가구도 들어왔으면 하고 기대해본다. 이왕이면 조선족을 도와주는 것이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백두산을 찾는 인구는 20여만명, 이 가운데 7만명이 한국인이다. 최근 들어 중국정부가 서백두지역에 눈을 크게 떴다. 장백산은 중국변경의 무관심산에서 10대 명산으로 서열상 중국의 오악(五嶽)인 동악․태산, 서악․화산, 북악․황산, 남악․형산, 중악․숭산을 제낄 것이다. 백두산은 분명'하늘세발 솥'처럼 하도 볼 것이 많아서…'하늘가마솥'은 대한민국 최초로 내가 백두산 등정 중 지은 별칭이다. 계속 그렇게 별명을 불러주길 소원, 소망해 본다.
백두산 서파의 금강협곡지역에는 중국인 관광객이 80%이상을 차지했다. 한국인이 중국인으로 하여금 백두산 관광에서만은 크게 눈뜨게 하고 자극을 준 계기가 된 것이다. 한국의 남단 창원에 사는 나도 갔으니 말이다. 현재 백두산을 동북3성(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의 최고 명산이 된 것이다. 나중에 여정으로 남아있는 장백폭포, 천지의 달문도 마찬가지다.
중국인들은 우리들처럼 외륜봉 등정을 하지 않는다. 백두산의 서파, 북파에 오르되 천지만 보고 곧장 내려가는 정도이다. 대륙국가인 중국에서는 우리들처럼 연봉(連峰)의 자연을 관조, 감탄, 통리(通理)하고, 천지 외륜봉 전부를 밟으며 걷지는 않는다. 우리는 삼천리 금수강산의 좁은 국토에서 살아서일까? 고래로 우리는 산 전체를 풍수지리, 약초를 캐는 등 뒤지는 성격이 있다.
우리나라의 각 도시마다의 수많은 산악회에서 주관하는 등산 붐은 세계의 어느 나라에도 찾아 볼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 뿌리를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는 신라의 화랑이나, 고려․조선 1,000년을 통하여 정신적으로 가장 큰 지배를 한 풍수지리학에서 찾을 수는 있지만 한국이 IMF의 경제적 고통 때 얻은 국민적 정신자산이라 할 수 있다.
정부의 예산지원은 아무 것도 없다. 국민의 자생적 생활체육이라 정부의 국민체육예산은 한 푼의 지원도 없다. 정말 위대한 산악회다. 수백억씩 말아먹고 꿀떡 삼켰던 해방이후 수백 개의 명멸했던 정당보다 낫다. 한국의 정당이름은 피고 지는 백두산의 들꽃이름보다 많았다. 한국의 들꽃박사(한국야생화연구소 연구원)는 들꽃이름을 모두 외우는데 값어치 없이 명멸했던 정당이름을 외우는 정치학박사는 국내에 아무도 없다. 이야기가 한참 옆으로 빠졌다.
서파에서 찾은 곳은 금강대협곡이다. 1998년 백두산 서파에 불이 났다. 그 불을 끄러 나왔다가 우연히 찾아냈다. 수만년 영겁의 세월동안 숨어있었다. 계곡의 크기는 길이가 15㎞, 골의 깊이는 70~100m, 넓이는 100~200m로 V자 형상의 대협곡이다. 절벽아래 협곡에는 계곡물이 흐른다. 외륜봉 상류의 어딘가에 천지의 지하수가 산허리에서 새어나와 발원되어 만주 송화강의 지류를 이룬다.
백두산 남파(南坡) 중국발음인'난파'에도 금강대협곡보다 규모가 2배나 큰 압록대협곡이 있다. 압록대협곡은 중국, 북한의 국경선에 위치하고 있다. 협곡은 양안에 커튼처럼 주름진 형상의 화산암 절벽이라고 보면 된다. 중국정부에서 난파도 현재는 비포장도로이지만 앞으로는 이곳도 도로 포장하여 관광지화 할 예정이라 한다.
남파코스는 우리의 여정에 빠져 있었으나 백두산지역 현황 파악을 위하여 참고적으로 기술한다. 백두산 천지를 기준으로 남파, 서파, 북파는 중국령이고 동파만 북한령이다. 북한에서 조․중 국경 협상때 천지를 중하게 여겼는지 남파의 외륜봉은 중국령이고, 남파의 안쪽 천지는 북한령이다.
천지는 외륜봉의 깎아지른 절벽 단애속에 들어있으므로 천지물의 유일한 출구인 달문 외에는 사람의 접근이 쉽지 않다. 지도를 전문적으로 읽는 등산인으로서 천지물은 달문으로 빠져나가 송화강으로 흐르는 것, 차라리 천지 안쪽의 남파, 서파를 포기하고 백두산 외륜봉 남파, 서파를 차지하여 국경선을 확정지어야 하는데 크게 잘못하였다.
백두산의 서파 외륜봉을 직접 오르면서 발자국마다 통한… 통한… 으로 남았다. 6.25때 중국 인민군이 북한을 도와 1962년 조․중 변계조약때 약자의 입장에 있었다할지라도 중국은 대륙을 영토로 가지고 있는 국가로서 당시 변방의 백두산을 중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으므로 빡빡하고 단단한 외교협상으로 백두산 외륜봉(남파, 서파, 북파)전부를 가져올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현재 별 중요하지 않은 천지는 6:4로 북한이 많게 국경을 획정하고 있다. 하지만 천지물은 달문을 통하여 만주 송화강으로 흐르고 압록강, 두만강의 직접적 수계는 아니다.
다음 여정은 제자하(梯子河)로 이동했다. 제자하는 백두산이 화산활동을 할 때 땅이 갈라지고 째진 절벽 협곡속으로 지하수가 흘러서 먼저 본 금강대협곡 아래쪽 계곡으로 흐르는 곳이다. 2개를 통틀어 쌍제자하 라고도 하고 각각 대제자하, 소제자하 라고 한다. 금강대협곡처럼 화산단층으로 아주 작은 소협곡이라 보면 된다.
소제자하는 1~3m폭으로 깊이는 20m내외이다. 대제자하는 5~10m폭으로 깊이는 30m내외로서 지하수가 많이 흐른다. 백두산천지의 지하수가 외륜봉 산허리로 연결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주위에 목격자가 없으면 사람도 빠지면 죽거나 밧줄이 없으면 올라오지 못한다 한다. 얼마 전에는 지나가던 노루가 빠져 죽어있었는데 중국인이 건져갔는지 없어졌다고 한다.
백두산에서 발견되는 기이한 지형이었다. 이곳에도 중국인 1가구가 움막을 치고 장사하고 있었다. 중국인도 이곳의 신기한 지형을 보기 위하여 많이 온다.
나무판 표지에는'梯子河, The Tizi River'로 아무런 설명 없이 이렇게 적혀있었다. 한문으로는'아들이 사다리 타고 나오는 내'영어로는 '흥분의 내'(The Tizzy River의 오기?)등의 표기로 볼 때 출산과 관련 있는 여성 외음부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 째진 좁은 협곡은 햇빛도 잘 들어가지 않았고 굴처럼 어두컴컴한 깊은 지하에 물이 흘렀다. 신기하여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그 때 구름장에 덮여 있던 백두산 외륜봉이 선명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처음 보는 백두산 원경이다. 뭉게구름을 벗어 던진 산악은 듣던 대로 장엄하다. 산세가 외경스럽다. 왜 우리민족이'백두산, 백두산'하는지 뭔가 정기(精氣)같은 것이 느껴져 왔다. 전나무군락, 사스래나무군락, 이깔나무(잎갈나무․낙엽송)군락을 지나 고산초원 너머 저 멀리 외륜봉의 남파는 하얀부석(화산석)으로 덮여 있어 처음에는 겨울의 흰 눈으로 착각했다.
1년 중 10월~5월 사이에는 눈을 머리에 이고 있는 이유도 있겠으나, 하얗게 보이는 부석의 천지 외륜봉으로 인하여 백두산(白頭山)의 유래가 된 것이니라. 구름을 벗어던진 산세는 장엄함에 수려함을 겸전했다. 민족의 영산이요, 한반도로 뻗은 백두대간의 태조산(太祖山)이다. 민족정기(民族精氣)가 윤곽으로 발현되는 산록이다.
애국가에서 백두산을 찬양한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 뭉게구름 사이의 백두산 외륜봉을 배경으로 수십장의 셔터를 눌러댔다.
고산초원, 고산화원의 트레킹에 나섰다. 꽃이 피면 고산화원이요, 꽃이 지면 고산초원이다. 수목성장한계선에 도달하면 강풍과 눈비의 혹독한 기후에 의하여 나무는 군락으로 자생하고 그 사이사이 고산초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해발고도가 낮은 고산습지에도 들꽃천지를 이루고 있다. 들꽃이름을 몇 개 열거하면 금매화군락, 담자리꽃나무군락, 노랑만병초군락, 보랏빛붓꽃, 노란빛큰원추리, 산용담, 개불알꽃, 연보랏빛 구름국화, 하늘매발톱꽃, 두메양귀비꽃, 주황빛날개하늘나리, 달구지풀, 환호초, 화살곰취, 하늘나리, 털쥐손이, 씨범꼬리, 층층이풀, 자주방망이, 린네풀꽃, 자주종덩굴꽃, 바이칼꿩의 다리꽃(산꿩의 다리꽃)등 1,800여종이 넘는 들꽃이 있다지만 이만 적어본다.
이정도의 이름으로는 한국정당사에서 명멸했던 정당이름보다는 적게 적고 말았다. 옛 선인이 백화난만(百花爛漫)이란 이를 두고 일컬었던가, 온갖 꽃이 피어서 아름답게 흐드러져 있었다. 아~ 나는 행복하다. 이곳에 왔노라! 보았노라! 수백종의 야생화 중 이름이 빠졌다면 생긴 모양대로 작명하고 싶었지만 야생화식물도본으로 대조할 수도 없는 여행이므로 그냥, 이렇게 생긴 야생화, 저렇게 생긴 고산화 할뿐이다. 꽃군락을 쳐다보며 대화하고 쳐다보면 되는 것이다. 학교 교장선생님이 운동장에서 전교생의 개념에서 아이 이름 모르고 대화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백두산의 숲을 이야기하련다. 어느 누가, 백두산에 와서 사륜구동 지프차로 천문봉에 오르고 천지만 찾는 이는 ‘바보’라 했다. 유행가 가사처럼 ‘백두산 몰라주는 당신은 바보다'백두의 외륜봉에서 내려다 본 구릉의 초원지대 아래로 지평선까지 수백 ㎞와 이어진 거대한 초록빛의 백두임해(白頭林海), 광대한 숲의 바다다. 장대한 숲의 천리수해(千里樹海)다, 한반도의 북한지역을 뺀 남한지역의 산세와 산악의 특징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백두산의 고원과 산악이 남쪽 반도의 산과는 아주 달랐다. 지리산의 천왕봉까지는 산림이 있고, 한라산에는 백록담까지 관목이 자라지만 백두산은 수목생장 한계선이 있는 고산으로 반도의 산과는 판이하게 생겼다.
해발 2,000m의 광대한 용암대지 위에'하늘가마솥바위(천정암․天鼎巖)'를 하나 올려놓은 형상이다. 백두산은 다르다, 경외의 산이다. 망극의 산이다. 명산(名山)은 선사시대, 역사시대를 거치면서 이름이 많기 마련인데 천하의 으뜸산인 백두산으로서 유구한 역사 속에 당연한 일이다.
만주족을 비롯한 중국쪽은 시대에 따라 불함산(不咸山), 단단대령(單單大嶺), 개마대산(蓋馬大山), 도태산(徒太山), 태백산(太白山), 태황산(太皇山), 노백산(老白山), 영응산(靈應山), 백산(白山), 과륵민산연아림(果勒敏珊延阿林), 장백산(長白山)으로 불렀고, 우리나라 쪽에서는 태백산(太白山), 백두산(白頭山)으로만 사용했다. 나는 이번 등정을 통하여 느낀 바 대로 ‘하늘가마솥산’, ‘천정암산(天鼎巖山)’,‘음양오행(陰陽五行)의 山’ 이름 3개를 헌상하였다.
왕지(王池, 만주어:포륵호리지, 布勒湖哩池, 옛 사료에서 찾음)로 이동했다. 해발 1,000m내외의 높이에 있는 자연못이다. 작은 분화구 연못이다. 백두산 북파에는 소천지(小天池)분화구 연못이 또 있다. 후금에서 청을 세운 누루하치 조상의 탄생설화가 있는 산록호수이다. 누루하치는 건주좌위여진의 추장 출신으로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을 통합하여 후금을 세웠고, 그의 아들 태종은 나중에 명의 북경(순천부)으로 밀고 들어가 명을 멸하고 청을 건국하게 되는데 누루하치는 초대 황제다. 곧 청의 태조다.
내용은 선녀가 물놀이하러 내려왔다가 하계의 남자를 만나 낳은 남자아이가 훗날 누루하치의 선조 애신각라(愛新覺羅)가 되었다는 줄거리이다. 선녀와 나무꾼의 이야기와 유사한데 1,600여년 앞선 고구려 동명왕(고주몽:高朱蒙)개국설화도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에게서 태어난 아들인 것처럼 고구려의 개국설화를 모방한 것처럼 유사하다. 고구려 시조 주몽(동명왕)의 설화가 후세 후금의 태조 누루하치의 조상 설화의 모태가 된 것이다.
누루하치가 죽은 이듬해(1,627년) 여덟째아들 태종(皇太極․홍타이지)은 정묘호란을 일으켜 파죽지세로 평양을 거쳐 황주에 이르렀으나 후금과의 주화론이 채택되어 조선 후금간에'형제의 맹약'을 맺고 철군했다. 홍타이지도 여진족과 조선족은 고구려에서부터 뿌리가 같은 민족이라는 역사관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조선이 ‘형제의 맹약’을 지키지 않자 또 쳐들어 왔다. 병자호란이다.
현재 만주족은 랴오닝성(요녕성) 지린성(길림성)에 만족자치현으로 다수 남아있으나 만주어를 잊어버리고 중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소수민족이 되고 말았다. '형제의 맹약'에서 보듯이 만주족(古名․여진, 숙신)혈통적으로 우리민족과 가장 가까운 민족으로 중국화되어 조국도 없어졌다.
만주에 금(金 1115~1234)을 건국하고 근세에는 후금, 청(淸 1616~1911)으로 건국했으나 민족의 주류가 중국민족으로 편입되어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쉽다. 문자와 언어까지 잊어버렸으므로 이스라엘처럼 건국도 어렵게 되었다. 만주족은 백두산을 우리민족처럼 민족의 발상지, 민족의 영산으로 섬긴다. 여하튼 만주족은 중국 대륙을 차지한 뒤 지배민족이 되어 베이징(北京)으로 대부분 이동했으므로 백두산 일대를 금봉지(禁封地)로 선포하고 만주족을 제외하고는 출입을 금했다. 백두산 산행(山行)으로 돌아가자.
도로에서 왕지로 가는 트레킹 길은 고산초원지대이다. 들꽃으로 뒤덮인 평원으로 야생화 군락지 사이로 난 꽃길을 30분정도 걸어야 나타난다. 이곳에도 이름 모를 꽃들이 무려 1,400여종이나 된다고 한다.
연못의 둘레는 약500m, 평균수심 2.5m의 왕지는 노루, 사슴 등 백두산에 서식하는 동물 등이 물을 먹는 곳으로 많을 땐 수십마리의 사슴이 몰려들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백운장산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백두산 산록에서 내려오는 계곡에서 발을 씻고 가져 온 연변수박을 물에 담갔다가 먹었는데 어찌나 차가운지 얼음물 같아 수박이 금방 차가워졌다. 다음날 새벽 3시에 기상하여 3시 30분에 출발했다. 원래는 3시 반에 기상하여 4시에 출발하기로 하였는데 365일 중 오늘 하루쯤은 백두산 외륜봉 종주를 위하여 잠을 희생하자고 30분 당긴 것이다. 너무 심하다고 불평하는 이도 잠재웠다.
컵 라면을 1개씩 먹고서 아침, 점심도시락 2개씩과 조선오이를 3개씩 받았는데 남은 것은 전부 내 배낭에 다 집어넣었다. 지난밤 저녁 식사 때 남은 중국술 1병도 넣었는데 배낭이 무거웠다. 한국에서 가져간 구운 김 20여개도 전부 넣었다. 구운 김은 땀을 많이 흘린 뒤의 염분섭취로 지참한 것이다.
어제 트레킹 중에 여러 번 사양했으나 어쩔 수 없이 팀의 회장겸 산행대장에 추대되었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내가 고생해야지, 하늘에 별이 총총 빛나고 특히 샛별이 크고 유난히 밝았다. 일진이 좋을 것 같은 예감이 왔다.
전용버스는 1~2단 기어로 해발 2,400~2,500m지점을 향하여 S자형으로 오른다. 날이 새고 있다. 그런데 새벽 안개가 자욱하다. 수목생장 한계선을 통과한다.
해발고도 2,000m 지점이다. 산능선의 강풍지역에는 1,800~1,900m인데도 나무가 없고, 바람이 적은 계곡 쪽에는 2,300m 이상에도 나무군락이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었다. 나무의 생장한계점에 분포하는 나무모양은 인생과 역사에 있어 좋은 교훈이 된다, 친일과거사문제도 백두산 자연을 참고하길… 국권상실의 시대에 주권을 잃고서 살아가기 위하여 친일했다면 생장한계점의 수목과 무어가 다르겠는가. 선의의 친일은 악의의 친일과 구분하면 될 것이다. 광복 후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애국열사․지사와 그 후손을 제대로 대접, 대우했는지가 중요하다.
조선시대의 개국이나 임란공신의 후손처럼 예우를 못한 해방 후 실책을 반성해야 한다. 건국을 위하여 모든 죄는 포용하고 공과 상만 반듯하게 현창하면 역사는 바로 서게 되며, 민족의 정통성과 정체성은 살아 유유히 맥을 이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광복 후'항일 독립애국열사 녹권'같은 것을 만들지 못했다. 나라가 사상, 이념으로 남북으로 쪼개져 있고, 지역구도로 경상도니 전라도니 하더니, 행정수도로 충청도니 하는 마당에 더하여 60여년 이전의 ‘친일과거사’로 더 쪼개자는 건지, 그 예산으로 ‘항일독립공훈사’라도 제대로 규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잘한 것, 좋은 것도 제대로 들추어 내지 못하면서 나쁜 것 들추어내어 무엇에 쓰겠다는 건지….
나의 조부님은 1919년 당시 42세로 유가(儒家)의 풍도(風度)가 있는 농민(農坡 鄭道益)으로 향리 근북장터의 만세운동에 참가한 어른으로 친일하고는 아주 먼 집안이지만 후손들까지 더 쪼개어서는 미래의 조국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충청도 행정수도’니 하는 것도 그렇다. 미래의 통일한국을 내다보며 휴전선 임진강유역에 임진강시(일명, 통일시) 행정수도 건설계획이라도 발표하여 남북인에게 희망과 통합의 상징적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3부 중 국회의사당을 그 곳에 갖다 놓는다면…
수도 서울하고 가깝기도 하고….
임란공신의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卷)의 예를 들어보자. 이 녹권은 조선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문․무신들에게 공신녹권을 준 사적을 적은 책으로 1605년(선조38년)간행하였다. 책머리에 신흠(申欽)이 선조의 전교(임금의 명령)를 받들어 하달한 전지(상벌에 관한 왕의 뜻을 그 맡은 관아에 전하는 일)가 있다. 공신을 3등으로 나누어 유성룡(柳成龍)등 6천여명에 대한 수상자의 관직․성명을 기록하고, 각 등의 공신에게 벼슬을 올려주었다.
나는 이 책을 잘 안다. 나의 13대조인 수재공(壽齋公) 정구룡(鄭九龍)께서 토왜대장(討倭大將) 정기룡(鄭起龍)의 휘하에서 싸움마다 최선봉장이 되어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왜란말기인 1598년 음9. 28. 토적 중 적탄에 맞아 장렬히 순절하여, 선무원종 일등공신에 추증된 바, 후손이 복호(공신의 자손에게 호역을 면제하던 일)의 명과 함께 받은 책으로 녹권마다 제호아래 공훈자의 벼슬과 이름(主簿 鄭九龍, 僉正으로 증직)을 각각 등재, 인쇄하는 예우가 있었고, 책의 본문에도 공동으로 6천여명이 1.2.3.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
녹권 간행 399년이 지난 지금도 문중에서 보물처럼 자랑스럽게 보관하고 있는데, 문중의 사료에 의하면 임란공신의 종손은 임란244년 후인 1842(조선 헌종8년)까지도 관할 현감에게 호역(부역)을 면제하라는 암행어사의 교지 고문서가 현재 남아있다. 조선왕조가 519년 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정체성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중국의 경우,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 진(秦)는 14년, 수(隋)나라는 37년, 당(唐)은 289년, 요(遼)209년, 송(宋)319년, 금(金)119년, 원(元)107년, 명(明)276년, 청(淸)295년으로 길어봤자 300년이 내로 왕조의 쇠퇴와 함께 멸망․교체되었다.
친일과거사진상규명 관계로 너무 길어졌다. 백두산 고산지대의 수목은 해발고도에 따라 달라진다. 사스래나무가 원래 위로 크는 나무인데 옆으로만 가지가 벌어지는 수형이다. 산 아래 사스래나무와는 분명 기형적이다. 그러나 고산의 기후로 볼 때 이곳의 사스래나무는 지극히 정상이다. 땅바닥을 기며 살아가는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버스가 백두산 서파 주차장에 도착했다. 새벽안개는 자욱하고 한여름인데도 쌀쌀한 가을 날씨처럼 차가웠다. 중국정부에서 관광지 상술을 염두에 두고 계획적으로 시도한 서파의 도로며, 주차장이다.
압록강 발원지 지류를 오른쪽(동쪽)으로 끼고 오르는 백두산 남파는 아직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단계적으로 개방한다고 한다. 현재는 비포장도로로 향후 관광명소로 개방계획이 되어 있다. 북한과의 국경 옆으로 도로를 내어 백두산에 오르는 것이 남파코스다. 남파에도'지린장백 국가급 자연보호구 여유국 산림여유공사'의 남파관리소가 있다. 우리의'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 남부출장소'식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백두산의 남파, 서파의 외륜봉을 경계로 바깥 산록은 중국령이고, 천지쪽 절벽과 천지방향은 북한령이다. 남파의 제비봉, 관면봉과 서파 와호봉의 천지쪽은 북한령이고, 바깥 산록은 중국령이 된다. 중국령은 도로를 낼 수 있는데 북한령은 도로를 낼 수 없다. 천지안쪽은 수백길 절벽이어서 도로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국경선 획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조․중 변계조약때 백두산 지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약 당시 백두산은 중국의 변경 땅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았으리라 본다. 외교협상을 잘했으면 최소한 달문과 장백폭포가 있는 북파를 빼더라도 백두산의 남파, 서파는 가져올 수 있었을 것이다.
주차장에서 와호봉과 청석봉(일명, 로호배) 사이에 있는 조․중 5호 경계비까지 30~40분간 1,300여 계단을 오른다. 중국정부에서 수작업으로 돌계단을 만들었는데 산시성의 화산, 산둥성의 태산의 돌계단 방식인데, 중국의 풍부한 인력만이 만들 수 있는 계단이다. 5호 경계비에 도착했다. 북파의 지암봉(백암봉 남쪽)에 있는 6호경계비와 천지를 일직선으로 국경을 가른다. 천지 못 물은 북한쪽이 6:4로 많으나 백두산 외륜봉과 그에 딸린 산록은 7:3으로 북한이 적다.
백두산 지리에 밝지 못하여 그렇게 되었지만 너무 속이 상한다. 홧김에 국경선의 녹슨 철사줄을 북한쪽에서 중국쪽으로 60㎝가량 밀어보았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5호 경계비를 뽑아서 옮기지 않는 한… 아아! 수천년동안 신앙의 대상이 되어 온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잃다니! 조․중 변계조약 당시에는 백두산 관광러시를 예견하지 못해서일까?
5m앞도 분간이 안 되는 짙은 안개, 절벽아래에 천지가 있다지만 보이지 않는다, 조선족 청년 사진사는 벌써 생업을 위하여 먼저 와 있었다. 3만원에 사진을 모두 찍어주고 필름을 돌려주는 방법으로 천지 외륜봉 등정을 하지 않고 여기서 머물다 돌아가는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한다. 광각렌즈로 찍어야 천지가 둥글게 오물어들어 다 나온다고 한다.
안개 때문에 하늘가마솥 봉우리에서 보는 일출도 허사였다. 조선족 사진사더러 어깨를 쳐주며 통성명하며 나는 한국의 바다남쪽 창원에서 왔는데 백두에서 동포를 만나니 반갑다고 악수를 청했다. 자기도 할아버지가 경상북도 청송이라 했다. 그것도 먼동이 트기 전에 백두 산정에서 첫인사로 만났으니 불교에서 말하는 좋은 인연이었다.
중국의 조선족은 대개가 시조가 난 땅(고향)까지 중하게 여긴다. 통성명으로 성씨의 관향(본관)까지도 똑똑하게 말하여 들었는데, 메모하지 못한 탓도 있겠으나 나는 백두산 먼동의 안개비경에 도취되어 들떠 있었으므로 이름은 물론 성씨마저 기억할 수가 없다. 조선족 청년아, 미안, 미안하다! 지금 고국 한국에는 성씨의 시조 이름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수두룩한데….
외륜봉 등정이 시작되었다. 산행코스는 5호경계비→마천우(2,564m)→청석봉(2,662m)→장대한 고원지대→한허계곡→깔닥고개→백운봉(2,737m 중국령 최고봉)→녹명봉(지반봉)→용문봉(차일봉)→급경사 낙석지대→천지, 달문→터널식 등산로(등천지장랑)→장백폭포→장백산 국제호텔→다음날새벽 북파, 중국기상관측소 앞 철백봉(2,550m)→천문봉(2,670m) 북파6호경계비 일정이었다.
참가인원은 전국구로 25명이다. 가이드 이만송이'팔도산악회'로 하자고 했다. 작명이 그럴듯하여 모두 찬동했다. 백두산닷컴의 김원수까지 26명이나 김원수과장은 지난번에 종주를 했다기에 하산지점인 달문에 대기해야 함으로 빠지고, 가이드 이만송과 조선족 전문산악가이드 1명이 추가 합류하여 총 27명이 일렬종대로 진행했는데 여성 5명 모두도 참가하였다.
쓰일 것 같아 미리 준비했던 호루라기가 회장겸 산행대장으로서 큰 몫을 할 수 있었다. 후미에 뒤쳐지는 이, 선두에서 빨리 진행하는 사람을 통제할 수 있었다. 나무가 없는 고산초원으로 앞뒤가 보이므로 숲이 우거진 한국의 등산로보다 통제가 수월했다. 새벽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앞에 가던 이가 물어왔다. “저것 천지 아니가?”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 천지가 나타났다! 천지!' 모두들 천지를 환호했다.
안개구름 사이로 천지가 치마를 벌리고 속살을 드러냈다. 기암괴석, 기화요초, 저 너머 황홀한 선경이 나타났다. 운해의 구름바다는 축제풍선처럼 떠오르고 백두의 외륜봉은 청학봉, 백학봉이 되어 불현듯 나타나고, 이 비경 볼라, 저 절경 볼라, 갈피를 못 잡겠다. 불난 집 아낙네의 당황 그 자체다. 안개는 띠구름의 비단폭이 되어 지나가고, 절반은 안개구름이요, 그 사이 반은 햇빛이다. 어느새 36판 필름이 동나 갈아 끼우는데 비경의 찰나가 아깝다. 이때는 디지털카메라가 좋은데…. 지리산에도 비경이 있고, 한라산에도 절경이 있다. 하늘가마솥 천지는 만주와 한반도의 웅혼한 기상이 엉켜 모이고 우뚝 일어난 산이다.
우리나라의 명산대천을 두루 유랑, 유람한 대표적 고승은 통일 신라의 의상대사와 신라말의 도선 대선사이고, 대유학자는 신라말 고운(해운, 문창후)최치원이다. 시대를 역류하여 옛사람 세분을 동행하여 모시고 이곳 백두산에 같이 섰다면 이 순간을 어떻게 감탄, 표현했을까? 궁금하다, 듣고 싶다, 고려의 백운산인 인중룡(人中龍)이규보와 동안거사 이승휴는, 조선의 도통한 지리학자 여암 신경준과 고산자 김정호는 무엇이라 한마디 했을까!
'아~ 백두산! 아~ 천지!' 나는 이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 순간 나는 여기 천하의 으뜸산 백두산에서 천지를 보며 서있다. 이 순간을 기억하자, 여기 있었음을 길이 간직하자, 나는 여기 와서 천지와 외륜봉을 조망한다. 이 순간들이 내 인생의 금싸라기 시간이다.
안개구름은 그늘을 드리우며 지나가고 천지의 전망은 장쾌했다. 원래 한허계곡의 바람 없는 산골짜기 물가에서 아침식사를 하기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천지를 관망하는 청석봉과 백운봉 사이의 둔부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펼쳤다. 고원초원은 융단처럼 푹신하다. 준비한 술을 등산컵에 부어 대표로 깎아 세운 듯 한 절벽아래 천지와 동남쪽에 있는 최고봉 장군봉(일명, 백두봉, 병사봉)을 향하여 재배하니 대구에서 온 김조민씨(부인, 대학생아들 대동 참석)가 삼배를 요청하기에 말이 맞는 것 같아 순간적으로 수정하여 일배를 더하였다.
그는 옆에서'부처님에게도 삼배를 하는데… 백두산에서는… '했다. 구름이 걷히고 날씨가 화창하게 개니 자연이 우주이고 바로 신령이란 생각이 들었다. '백두의 신령이 우리 일행을 박대하지 않고 아침식사를 여기서 할 수 있도록 해 준 배려에 감사하며, 좋은 산행을 위하여 술 한 잔을 올리니, 정결하고 공경한 마음을 귀히 여기시어 부디 흠향하소서….'
술을 다시 부어놓고 동기생이자 친구인 이창형에게 재배 혹은 삼배하기를 부탁하였다. 내가 별나게 보였는지 종교적 신념 때문인지 손을 좌우로 흔들며 사양했다. 성실한 크리스찬이므로 더는 강요하지 않기로 했지만 한마디 했다. '하늘아래 대자연이 그리스도 보담 낮지는 않을 텐데….' 하고 다른 참가자들에게도 권했으나 이창형의 사양으로 김이 빠졌는지 회장님이 대표로 했으니 되었다고 하면서 극구 사양하기만 하여 그만두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래가 드문'신앙천국'이라는 말이 있듯이 나 말고는 모두들 종교를 갖고 있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나는 자랑스러운 징표로 절하는 사진 2매를 보관하고 있다.
가이드 이만송이 나에게 치하하기를'지난 5회차 산행은 모두 비바람과 구름에 가려 천지전체를 본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번 팀이 상봉에 오르자 안개구름이 걷히며 날씨가 맑게 개었으니 기이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여기 오신 분 중에서 삼대 적선한 분이 많아서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무심결에 말했지만 6.25피난 이듬해(1951, 74세)에 작고하신 조부님, 손자의 전방 군복무 중에 운명하시면서 유독 나를 찾으셨다는 조모님(1973, 93세), 살아계실 적 애일(愛日)의 간절한 마음을 늦춘 적이 없었던 부모님(母1993, 82세, 父1995, 84세)을 백두산에서 뿌리를 떠올리며'나는 어디로부터 어디서 왔는가?'라며'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하며 세 번이나 되뇌었다. 새삼스레 10여년전 옛사람이 된 부모님을 생각하며 “아버지!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이곳 민족의 시원지, 근원지 백두산에서…. 이곳 민족의 시원지, 근원지 백두산에서….
맑은 하늘에 거울같이 반짝이는 천지를 내려 보며 아침 도시락을 먹는 광경은 신선의 식탁이 아니고 무엇이랴, 국가원수의 호텔 헤드테이블 국빈식사도 이만한 기분을 낼 수 있을까, 이창형 동기생은 새벽에 컵라면을 먹어 별 생각이 없다며 도시락을 수고한다며 가이드 2명에게 추가로 먹게 주어버리고 지참한 사과, 오이 몇 개로 식사를 때운다.
청석봉에서 백운봉으로는 바로 등산로가 연결되지 않는다. 600~700m절벽이 있어 한허계곡으로 내려가서 다시 깔닥고개로 올라 백운봉 서쪽의 완만한 능선을 다시 타야 한다. 한허계곡으로 내려가는 고산초원은 융단처럼 푹신푹신하다, 스펀지를 밟는 것처럼 쿠션이 있어서 좋다. 이곳도 야생화 천지이다. 한허계곡 상류 절벽 틈에서 100m이상의 가늘고 긴 외줄기 폭포가 흐르고 있다. 백두산 외륜봉의 지하수가 산허리에서 분출, 발원되고 있는 것이다. 너무 기이하여 사진을 찍었다. 한허계곡에서 지참했던 오이를 끄집어내어 재차 씻었다. 플라스틱 팩에 물도 채웠다. 물이 얼음물처럼 차갑다.
깔닥고개에서는 일렬종대의 전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하여 맨 선두에 섰다. 백두 산록에 걸어오는 모습이 고산초원과 함께 한 폭의 그림이다. 같은 휴화산이어서 한라산의 오름처럼 산록이 곡선을 유지하며 아름답다. 저 멀리 백두의 진짜 모습인 광활한 수림지대까지 관망한다. 깔닥고개에서 올라서서 20분간 휴식, 지참했던 오이를 풀어서 대접했다.
2명당 1개가 돌아가고도 남았다. 최초에 3개씩 넣는 자기들 것은 다 먹고 없었다. 오이는 목마를 때 제격이기에 지금 내놓는 것이다. 많이 메고 온 보람이 있었다. 구운 김 20여개도 모두 나누었다. 염분섭취로는 제격이다. 가장 필요로 할 때 내어놓아야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기쁘다. 이것으로 회장 노릇을 톡톡 한 셈이다.
중국령에서의 최고봉인 백운봉(2,737m)은 동쪽은 천지로 천길 절벽이고, 남쪽 역시 한허계곡으로 절벽이다. 서쪽은 낙석이 많은 급경사로 위험하여 오를 수 없고 북쪽만이 유일하게 오를 수 있는데, 주력이 뒤지는 일부는 점심식사 지점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희망자만 절반의 인원이 올랐다. 정상엔 아무런 표지석도 없었고, 한국인만 찾지 중국인은 우리처럼 외륜봉 등산을 않으므로 오르는 이가 없다.
3면이 모두 천길 절벽으로 둘러 싸여 있는 정상인데도 여자의 둔부처럼 생겨 지리산의 반야봉(여자의 히프모양)을 연상하면 된다. 100여명이 족히 편하게 설 수 있는 둔덕이 있었다. 정상에 항상 구름을 머리에 이고 있어 백운봉(白雲峰)이라 불렀는데 이름 그대로 맑은 날씨였는데도 갑자기 안개구름이 몰려와 자욱한 안개로 천지가 일순간에 숨어버렸다.
단군의 자손이 새벽3시에 기상하여 찾아 온 미더움 때문인지 북한령의 장군봉(백두산 외륜봉 전체의 宗主山으로 현재 북한이 외부에 개방하지 않고 있음)을 제끼고 제2의 봉우리를 찾아주었다는 내리사랑 때문인지 백운봉은 안개미풍으로 하여금 모두의 볼에 살짝 스킨하고 있었다. 안개만 삽시간에 들어왔다 뿐이지 기후는 안방처럼 평온하고 태평했다. 이 천지(天地)의 자연 조화는 직접 정상에 서 보지 않은 이는 알 수 없다. 체험하지 않은 이가 어떻게 알겠는가.
누군가의 3대 적선으로 비바람과 돌풍을 일으키지 않고 이렇게 평온하니 감사하고 감사했다. 백운봉 천지쪽 남쪽등성이에도 외륜봉의 낮은 산록과 마찬가지로 야생화가 바위틈새에 피어 있었다. 꽃대는 땅에 붙은 듯이 짤막했다. 볼펜길이 절반정도 된다. '작은 꽃 너도 제 구실을 똑똑히 하고 있구나! 이 바위틈 속에서….'올라오지 않은 이에 주려고 화산석 10여개를 주었다.
“뭐 하려고 돌을 줍습니까?''백두산 백운봉 등정 기념으로 가져가려고.'이창형 동기생도 따라 주었는데 친구의 것이 좋아 욕심을 내며 호기심을 가졌더니 나에게 선뜻 주었다.'정형, 좋으면 가져가.'돌이 좀 크고 무거웠다. 내가 가진 돌 중 예쁜 것과 교환하였다. 배낭에 넣었는데 점심때 도시락과 함께 꺼내면서 다시 담는 것을 깜박 잊어 그곳에 두고 온 것이다. 하산 후 저녁에 호텔에서 배낭을 뒤졌으나 없었다.
백운봉 정상의 돌은 화산 폭발시에 기러기나 고니 보다 높이 날아 낙하된 돌이기에 좀 의미있는 화산석이다. 어쩜 두고 온 게 돌 하나라도 자연보호차원에서 잘 된 것이지만 선물 받은 입장으로서 못내 아까웠다. 그 돌은 경남 의령의 남강가에 있는 솥바위(鼎巖)처럼 생겨서 천지의 테두리봉, 둘레봉의 별칭을 명명하는데 두 번이나 재확인하게 한 영감(靈感)을 얻은 돌이었다.
백두산을 '천정암산(天鼎巖山)''하늘 가마솥 산'으로 작명한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백두산을 첫 대면하면서 부르기는 했으나 새로운 일명(一名)으로 작심한 것은 백운봉 정상의 이 돌 때문이었다. 꼭대기 이 돌에서 계시를 받는 것 같이 신묘(神妙)한 생각이 들었다. 그 잊어버린 돌은 다음 기회에 백두를 찾는다면 백운봉과 녹명봉 사이의 점심 식사한 지점의 둔덕을 기억하고 있으므로 찾아 볼 작정이다. 10여개의 돌은 백운봉 미답의 참가자들에게 기념으로 나누었다.
지쳐서 백운봉 정상을 포기했지만 막상 갔다 온 팀을 보면 궁금하고, 아쉽고 부러운 것이 인지상정, 이 작은 돌로 메워준 것이다.
점심식사 때 아침 산정식사 후 남은 술병을 꺼냈다. 대구, 부산, 전주에서 온 젊은이들이 아침에 천지 신령께 잔을 드리지 못해서 후회스러워 절하고 싶다며 요청하기에 한 컵 부어 고산초원 위에 놓으며 한마디했다. '아침에 멍석 깔아 놓았을 시에는 모두들 사양하더니.''기념으로 사진을 남기지 못해서요.'대답이다. 백두산 신령은 뒤고 사진이 목적이다.
어쨌거나 젊은이들의 뜻이 좋고 점심 산정식사 전 좋은 날씨에 또 보답하기 위하여 잔에 술을 부었다. 가이드 이만송이 사진촬영을 제지했다.'절은 아무리 해도 좋은데 천지를 향하여 절하는 장면 사진촬영은 금지입니다.'연변해외여유유한공사 지침이 천지에서 절하는 장면촬영, 애국가 봉창, 태극기를 흔드는 경우 등은 금지하고 있고, 특히 절하는 장면이 인터넷 동영상에 뜨면 중국 당국으로부터 문책 당한다고 하면서 극구 만류하였다. '아침에 회장님이 대표적으로 절하는 사진은 어쩔 수 없이 묵인하였다.'는 대답이다.
365일 사계절동안 백두산의 변화무쌍한 기후에 대하여 논한다. 지리산(1915m)연봉이 한반도 남단을 동서로 길게 가로막고 있어 여름 태풍의 진로를 경상도 우편과 대한해협 쪽이나 전라도 좌편과 황해 쪽으로 방향을 틀게 하거나 직통으로 맞으면 많은 구름이 걸려 엄청난 폭우를 가져오듯이 사계절 중 여름, 겨울에는 기후의 변화가 많다. 백두산(2,744m)의 장백산맥은 북한의 마천령산맥과 함경산맥의 정점에 위치하여 동해와 둥베이평원(만주평원)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사계절 모두 기후의 변화가 무쌍하다. 특히 동해의 해양기후를 바다 가까이서 높은 산악이 차단하고 있어 여름에는 연평균 강수량이 1,340.4㎜로 많고 연 강수일수는 약 209일로 6~8월내내 구름에 덮여 있다.
겨울에는 대륙성기후인 만주벌의 강추위와 동해의 해양기후가 장백산맥에 부딪혀 눈바람이 몰아친다. 우리보다 앞서 5회차 실시의 백두산 등정에서 표현한 먹장 같은 안개, 칼바람, 강풍, 폭풍, 돌풍, 회오리바람, 돌개바람, 폭우, 우박을 맞았다는 표현들이 백두산의 지형특성상 사계절 내내 있는 현상이다. 특히 머리에 천지를 이고 있으므로 천지내부에서 솟아오르는 냉기류와 외륜봉에 부닥치는 기류가 합쳐져 고층건물의 환기팔랑개비(통풍기․벤틸레이터)처럼 기류가 회전하면서 변화무쌍함이 일어나는 특이한 지형이다.
조선시대 탁영 김일손(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연산군 때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35세의 짧은 생을 마감)은 26세 때 동문수학의 일두 정여창 등과 두류산(지리산의 古名)을 유람하고 천왕봉에서 이렇게 썼다. “돌무더기에 기대어 사방을 둘러보니 외람되게도 마음과 정신이 모두 늠름하고 몸은 아득한 태초에 있는 듯하여 회포가 천지(天地)와 함께 흘러가는 듯하였다.” 나 역시 백두산의 백운봉에 오르니 마음과 정신이 멀쩡하고 당당한데 몸은 아득한 태초에 있는 듯하여 회포가 천지(天池)와 함께 흘러가는 듯하였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머리(頭)와 끝(足)에서의 체험이 시대는 다르나 일치함은 웬일일까?
천지를 끼고 13시간의 산행, 15㎞의 백두산 순례는 계속되었다. 우리는 중국 땅을 밟고 있다. 나머지 북한령을 밟아야 천지의 둘레가 완성된다. 백운봉 북쪽 둔덕에서 녹명봉(일명, 지반봉)을 돌고 용문봉(일명, 차일봉)을 향한다. 어떤 지도에는 금병봉, 관일봉 표기도 있다. 봉우리 지명이 겹치는 것은 중국식 호칭과 북한식 명칭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봉우리 개수도 많아 중국과 북한이 통일안을 내면 위의 이름 모두를 누락 없이 대입할 수 있다. 백두산에는 크고 작은 해발 2,500m이상인 봉우리만도 16개이며 시대에 따라 봉우리명칭이 달랐다.
백두산 천지는 여러 차례의 화산 폭발과 함락에 의하여 이루어진 칼데라호(caldera湖)이다. 수면의 해발고도는 2,189m로 전 세계 화산호 중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최고봉인 장군봉의 높이는 남한에서는 2,744m, 북한에서는 2,749.2m로 표기하여 약5m의 차이가 나는데 남한에서 사용하는 일제시대 때 측량수치보다 북한 측량이 현대의 지적측량일 것으로 보아 북한 것이 맞을 것 같다. 산의 표고는 정상의 측량기준점에 따라 산의 높이가 달라진다. 남한에도 측량 정점이 잘못되어 최고봉의 표고가 틀린 것이 많이 발견된다. 백두산의 전체개요는 지면관계로 생략한다.
만년설지대도 통과하고, 푹신거리는 이끼밭도 지나고 야생화 꽃사태가 난 산구릉도 넘었다. 지나는 외륜봉마다 산등성이 저 아래 만주벌판을 쳐다보니 초원으로 감싼 산비탈, 산기슭마다 경관이 다르게 펼쳐진다. 산악마다 발자국마다 새로운 경관이 펼쳐진다. 13시간종주의 힘든 시간을 마취라도 된 듯 잊어버리고 걷는 것이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 했거늘,'백두산은 마취경(痲醉景)'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남해 보광산(普光山)을 비단으로 산을 감싼 형상이라 하여 금산(錦山)이라 개명했다. 백두의 고산초원은 청색비단폭을 드리운 형상이다. 어느 인공적 잔디 골프장도 백두의 초원을 흉내 낼 수 없을 것이다. 낮게 드리운 안개구름 사이의 햇빛으로 인하여 초원의 음양(陰陽)이 조화를 이뤄 형형색색이다. 아무리 보아도 지루함이 없는 새로움의 전개다. 백두산은'음양오행(陰陽五行)의 산'이다.
음(陰), 양(陽),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 중 어느 것 하나 빠진 것이 없구나! 히말라야 산맥의 세계최고봉 에베레스트산(8,848m)에는 목(木)과 화(火)가 없다. 옛 선인들은 외륜봉 전체를 다 밟아보지 않아서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백두산 와륜봉 순례중 지구상에서 유일한 ‘음양오행의 산’임을 최초로 만천하에 알리게 된 것이다. 감여가(堪輿家․풍수지리에 관한 학문을 공부한 사람), 역학․역술인, 무속인은 모두 백두산의 외륜봉을 체험 등정후 영험(靈驗)을 얻고 원(院)이나 업(業)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권유해 본다.
드디어 천지의 달문(천지의 물이 빠져나가는 유일한 출구)이 내려다 보이는 봉우리에 도착했다. 모두들 일순간 종주를 마쳤다는 기분에 감격하여 팔을 한일자로 벌리고 '아! 달문이다, 다 왔다! '를 외쳤다. 이곳에서 원래 하산코스는 완만하고 산길이 좋은 소천지 쪽으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날씨가 쾌청하고 바람이 없으므로 코스를 변경하여 천지의 달문으로 내려가는 급경사 낙석 루트를 택하였다.
이 코스는 오늘처럼 날씨가 좋지 않으면 내려갈 수 없는 매우 위험한 협곡코스로 잘못하면 낙석 사고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한다. 이때 호루라기가 또 필요했다. 운동신경이 둔한 사람, 여자와 산행초보자를 앞세우고 유경험자는 뒤로 빠지게 했다. 흔들리는 바위는 절대 밟지 말고 천천히 몸의 균형을 유지하며 3m이상의 간격을 두도록 했다. 이곳은 낙석(구르는 돌)을 잘못 밟아 앞에 가는 사람이 죽거나 크게 다친다는 것이다. 가이드와 함께 통제 후 후미에 내려갔는데 실제 매우 위험했다. '두꺼비 구르는 바위에 납작 치이는(깔리는)코스'라는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달문이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급경사 낙석지대는 수만년전 백두산 지질시대에 여러 차례 화산 폭발이 있은 후 외륜봉의 많은 강수량과 지하수에 의한 호수면 해발고도가 한계수위에 달한 후 금강대협곡, 압록대협곡처럼 장백폭포 아래의 대협곡과 연결되는 외륜봉 산악의 가장 약하고 낮은 부위가 무너지고 터져서 달문이 되고, 달문에서 1,250m승사하(乘槎河:비스듬히 깎아진 오르는 계곡물)아래로 68m높이의 장백폭포와 연결된 것이다. 장백폭포 아래쪽은 대협곡이다. 달문에서 장백폭포까지의 구간은 산악이 무너지고 터진 곳이라 할 수 있다.
이 주장은 동양3국 최초의 현장체험조사로 위험한 낙석급경사 지역을 통과한 지질관찰에서 발견한 나의 새 발견이자 새 학설로 중국이나 남북한, 일본 어디에서도 연구 발표한 적이 없다. 발만 대도 구르는 크고 작은 낙석의 분포형태는 대홍수로 터진 인공의 댐이나 저수지 둑에서도 나타나지만, 지난해 지리산 칠선계곡 등의 대폭우 뒤 산록양안에서 낙석지대를 눈여겨봐 둔 바도 있어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지리산 계곡사태는 규모가 작을 뿐이나 지질적 구조는 같다. 한허계곡의 산악중간에서 발견한 100여m 길이의 가느다란 지하수 폭포와 장백폭포는 규모와 위치가 다를 뿐 최초에는 같은 천지 지하수 폭포였으나 달문 협곡은 외륜봉 중 연약지반이 무너져 터져 연결된 것이다. 이 보고는 나의 백두산 외륜봉 등정에서 얻은 큰 소득이다.
달문지역 낙석지대를 통과하는 하산길은 구르기 쉬운 위험한 낙석을 일부 제거되어 있어 모두들 조심한 덕분으로 안전사고 없이 전원 내려왔다. 내려오는 중에 하산하는 등산로와 관계없는 낙석지대에서 바위 하나가 저절로 만류인력의 법칙에 의하여 소리내어 아래로 구르다가 다행히 큰 바위에 부딪혀 멈춰 섰다.
가이드 이만송이 그곳을 주시하며 갑자기 '돌 구른다, 돌 구른다! 조심, 조심!'안전을 위하여 소리쳐 모두들 놀라고 긴장했는데 지나고 나니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되었다. 등산로에는 어느 정도 낙석이 제거되어 길은 뚫려져 있으나, 불안정하게 겹겹이 쌓여진 바위들이 언제 눈사태처럼 무너질지 불안감을 주는 코스였다. 게다가 포개진 돌들은 대개가 모난 돌이 아니고 둥글게 생긴 것이 많았다.
장백폭포에서 천지의 달문으로 오르는 터널식 등산로(등천지장랑, 登天池長廊)는 낙석 때문에 관광객의 안전을 위하여 2003년 6월에 개통된 것이다. 우리가 내려온 낙석 지대에 500~600m 길이에 20m 높이의 백두산식 만리장성이 쌓여있다. 이것 또한 낙석 때문이다. 수많은 바위들이 자연적으로 굴러 옹성 담벽에 부딪쳐 있었다. 관광객이 이용하는 길은 반대쪽에 있어 안전하다. 이곳 옹벽은 장백폭포의 하단부까지 북쪽 절벽 비탈면에 1km가 넘는 계단으로 된 터널식 등산로와 연결된다. 낙석으로부터 관광객의 안전을 위한 것으로 중국정부에서 모두 인해전술 인력으로 지난해 만들었다고 한다.
낙석방지 성벽에서 천지의 달문까지는 약700~800m정도 떨어져 있다. 천지에 선두 도착하여 천지에 손을 담그는 것이 나의 희망이자 소망이다. 낙석지대 통과 후 선두와 후미를 집합시킨 후 출발하려는데 이창형 동기생이 급한 용무가 생겼다며 어디서 일을 봐야하는지 물어왔다. 백두산 외륜부 고산초원지대는 숲이 없어 가려주는 것이 아예 없으므로 여성참가자는 뒤쪽이나 앞쪽의 낮은 지대나 바위 후사면을 챙겨주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제는 남자의 급한 용무다. 아무리 살펴봐도 우리가 지나온 낙석방지 옹벽 뒤쪽밖에는 마땅한 곳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그의 등산배낭을 나에게 부탁해와 천지의 선착은 뒤로 미룬 채 달문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한참을 기다렸다. 친구가 떨어진 비닐우의 뭉치를 싸들고 있었다. 자연보호? '오늘 백두산에서 좋은 일하네.'했더니 설명인즉 '신성한 백두산 달문 주변에 오물을 남길 수 없어 마침 관광객이 바람에 찢겨져 버린 비닐우의가 있기에 방사 후 싸 가지고 왔어.' 라는 대답에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우리가 등산할 때 나무젓가락, 종이, 배설물 등 썩는 것은 낙엽 속에 묻고, 썩지 않는 병, 비닐팩 등 석유화학제품은 되가져오는 것은 상식이나 이건 너무나 예외였다. '눈비오면 썩는데 냄새나는 걸 뭐하러 싸 가지고 와?'하며 언쟁했지만 800m를 들고 올라와 달문 근처의 쓰레기투기장에 넣을 수 있었다.
신성한 백두산에서 일어난 감동적인 일이라서 기록을 남겨야 했다. 달문이 가까워질수록 많은 쓰레기가 투기, 방치되어 널려있었다. 한국인보다 중국인이 많이 버린다고 한다. 달문의 공용간이화장실도 남녀는 구분되어 있으나 앞이 튀어있고 매우 불결했다. 이창형 동기생은 천지를 첫 관망한 아침식사 때의 고유제에 크리스찬으로서 잔을 드리는 것을 사양했으나 백두산의 신성함에 그리스도교, 불교, 유교, 선교(仙敎), 무교(무신론), 구별, 구분 없이 전적으로 감동하고 찬동한 사건이어서 적는다.
백두의 외륜봉 절벽 위에서 천지를 내려 보다가 천지 물가에 섰다. 잠자는 듯이 평온한 날씨인데도 잔잔한 파도가 치고 있었다. 달문담(達門潭), 용왕담(龍王潭), 호수면이 맑디맑은 푸르름이다. 백두산이여! 천지여! 달문이여! 나 여기 왔노라! 나는 차가운 천지물에 두 손을 적시며 영겁(永劫)의 세월을 꿋꿋이 지켜온 천지와 손을 맞잡고 굳게 악수했다. 손을 담그니 냉장고 물처럼 차가워 손이 시리다. 오늘은 날씨가 좋은 탓인지 중국인 관광객이 장백폭포쪽에서 등천지장랑(터널식 계단)을 통하여 많이 올라왔다. 중국 아가씨들과 사진도 함께 찍었다.
천지의 면적은 9.17㎢, 둘레 14.4㎞, 최대너비 3.6㎞, 최대깊이 384m, 평균깊이 213.3m, 수면고도 2,257m, 2,189m기록도 있음, 평균수심 투시거리(물 맑음도) 16m, 호수의 평균수온은 2.2℃이다.천지는 빈영양호(貧營養湖)이므로 식물성부유생물, 작은 곤충류, 물속 이끼류가 살고 있으나 어류나 파충류는 서식하지 않는 호수였는데 북한에서 1986년 산천어를 방류하였는데, 현재는 많이 번식되어 물결 잔잔한 날 중국경비대 군인들이 경비용 고무보트로 산천어를 잡아 관광객에게 몰래 판다고 하여 시식하기로 하였다. 어떤 고기인가 궁금하여 살펴보니 관광객이 올라오기 전 아침에 잡았다는데 작은 그물망에 가득 들어있었다. 북한쪽에서는 천지자체가 천연기념물 351호이고, 산천어는 보호어종이므로 알면 외교상 곤란하다고도 했다.
가이드 이만송이 주선하여 여자분 5명은 제외하고 중국에서는 큰돈인 1만원씩(회장은 3만원)내어 초장에 찍어 술과 함께 시식했는데 빙어의 맛과 유사했다. 백두산 등정을 사고 없이 무사히 마친 단합대회로'팔도산악회'는 백두산이 좋아 만사를 제쳐두고 찾아 온 공통점이 있었으므로 13시간의 종주를 통하여 둘도 없는 형님, 아우가 될 수 있었다.
중국 인민군 국경경비대 소속의 군인들도 평화시에는 이렇게 경비할 일이 없으므로(어떤 이는 군기가 빠졌다고 하겠지만) 한가하게 산천어나 잡아서 파는 여유가 있어 좋고, 우리는 천하진미를 대접받아서 좋고… 천지의 산천어는 사람처럼 국경이 없는 고로 산천어의 실제주인은 입식한 북한이겠으나, 산천어의 중국령 천지쪽의 월경 탈북은 막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취기(중국 술은 모두 독주임)도 깰 겸 달문의 호반에 섰다. 천지 건너편의 북한령 남동쪽 외륜봉을 쳐다본다. 북파 외륜봉 종주시에는 4~6㎞ 시야로 인공 구조물체 건축물이 건너편 북한령에 설치되어 있음을 확인하여 무엇인가 궁금해 하였는데, 달문에서는 2~3㎞시야로 장군봉 아래 천지 못가의 북한초소 같은 건물이 확실하게 들어오고, 갈지자형 인공 구조물체는 북한령 장군봉에서 천지 못가로 내려오는 철계단이었다. 북한초소주변에는 북한경비병 같은 다수의 인원도 주위에 걸어 다니고 있었다. ‘백두산 천지 생태연구소’ 같은 것이 있다고 들었다.
북한령 외륜봉(장군봉)에서 천지로 내려오는 산줄기의 내리 뻗는 산악은 천년고목이 천지에 뿌리를 내리 박듯한 모습이다. 북한의 초소가 있는 곳은 굴곡이 져 있지만 초원으로 된 제법 넓은 평탄한 초원과 수면과 접하는 호반의 타원형 자갈밭도 보이고, 나머지 천지호반은 깎아 세운 듯한 절벽과 천지수면이 만날 뿐이다. 내가 현재 저곳 북한 동포의 땅에 서 있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중국령에 서 있다.
북한도 빨리 눈을 떠 백두산을 개방하면 관광수입을 올릴 수도 있을 텐데… 이웃나라 중국의 관광 상술을 빨리 배우지 못하는 건 굳게 빗장을 걸고 있는 김정일체제 때문인지… 관광은 굴뚝 없는 대공장이라 했던가, 건너편 북한천지는 반기듯이 우릴 빨리 오라고 손짓하는데도 건너 못가는 우리 심정은 한없이 안타까웠다. 이왕이면 북한을 통하여 들어오면 좋은데….
장백폭포 방향으로 하산했다. 아까 지나왔던 낙석방지 옹벽 밑을 지나 등천지장랑(반터널식 등산계단)을 통하여 68m높이의 장백폭포를 만났다. 거대한 폭음이 우렁차다. 물보라를 흩날려 서 있는 등천지장랑까지 젖어 있다. 칠색무지개속에서 백룡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 같다. 우리는 비룡폭포라 부르고 중국쪽 이름은 장백폭포다.
달문에서 흐르는 승사하(乘槎河), 우리식 나의 표현인'내리 쏟는 큰 내(急流大川)'가 장백폭포 앞에서 큰 바위 돌무더기를 만나 한줄기 물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쏟아진다. 찾는 이의 대부분은 폭포가 갈라진 것을 아쉬워한다. 북방의 모든 폭포는 겨울이면 물이 얼어 빙벽이 되어 자취를 감춘다. 비룡폭포만은 천지의 지하수이기 때문에 얼지 않고 계속 떨어져 겨울에도 비경을 볼 수 있다.
나는 비룡폭포(장백폭포)를 보면서 두줄기 폭포 중 큰 줄기는 한민족(조선족)을 상징하고 작은 줄기는 여진족(만주족)을 상징한다고 판단되어'형제민족폭포'라 명명했다. 상기에서도 기술한 왕지에도 언급했듯이 백두산을 우리민족과 여진족이 다함께 숭상했던 영산이다. 반만년 우리 역사속에서 살을 맞대고 살았던 민족이 여진족(만주족)이다.
부여를 빼고도 고구려 705년, 발해 228년, 도합 933년이다. 뿌리도 같고 피도 섞였다. 일본은 대한해협 건너지만 여진족은 압록강, 두만강 건너였다. 만주족은 우리 한민족과 형제민족이다. 똑같은 백두산 배달민족의 한갈래이다. 선사시대에는 언어의 족보가 같은 어족이다. 우랄알타이어계에서 분류되는 퉁구스어족으로 어순도 같다.
만주족은 역사상, 숙신(肅愼),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 만주족(滿洲族)의 이름으로 살면서 백두산북쪽, 목단강, 송화강 유역, 연해주, 두만강유역, 압록강유역에 살았고, 한때 일부가 함경도에도 살았던 민족으로 우리민족과 혈통이 가장 가까운 민족이다. 부여, 고구려, 발해시대에는 우리민족의 지배를 받는 국민의 일부였다.
만주족은 독자적으로 금․후금에서 청을 건국하기도 하였으나 중국 한족(漢族)의 높은 문화수준에 흡수, 동화되어 풍습, 언어까지 고유성을 잃고 말았지만, 현재는 만주에서 중국 언어를 사용하는 소수민족으로 10여개의 민족자치현을 가지고 중국내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조국도 없는 가엾은 민족이 되어 버렸다. 외국에 나가서도 떳떳하게'만주족계'라 하지 못하고'차이나'라고 해야 할 지경이 된 것이다. 우리 역사학자들은 만주족까지도 백두산민족의 범주에 넣어 연구영역을 넓혀나가야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만주족이 무통일 상태에서는 회유, 정벌의 양면정책을 써서 우리가 조공을 받는 입장이었고, 금, 청을 건국한 시대에는 중국을 등 뒤에 업고서 지배세력으로 대국행세를 했으므로 우리가 상국(上國)으로 섬겨 사대(事大)의 예(禮)를 갖추기를 강요한 민족이다. 어쨌거나 만주족은 우리민족과는 혈통상 가장 가까운 민족이었고, 언어의 뿌리도 같다. 고구려로 삼국통일이 되었다면 만주족은 우리민족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자기 민족언어를 잃고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였지만 우리 민족과는 인류의 족보상 지구상에서 가장 가까운 형제민족임을 밝혀두면서 백두산 장백폭포를'형제민족폭포'라 명명한 것이다. 이번 백두 여행에서 얻은 결과다. 만주어(여진어)가 현재 러시아 연해주와의 중국 접경지대 변경에 일부 남아있다고 하니 언어학자들은 만족 언어를 우수한 한글표기로 채록하여 비교, 연구하기를 권고한다. 뿌리가 같은 언어이므로 연구가치가 높다. 그렇다고 학자도 전문가도 아닌 기행자가 할 수는 없고…… 학자의 길을 걷는 대학원생이 있다면 여진어 연구로 박사학위를 따보라.
새로운 학설이지만 만주족은 이족(異族)이 아니고 동족(同族)임을 밝혀둔다. 고려시대 이후'이족, 변방오랑캐, 야인(野人)'이라 멸시하여 우리민족과 멀어져 촌수가 한참 먼(아주 먼) 중국의 족보를 단 것이다. 성씨의 씨족에도 족보를 연구하면 그런 경우가 허다하다. 중국은 55개 민족을 포용했는데 우리는 1개 민족도 포용하지 못했다. 순수배달민족은 오늘날에 와서는 자랑이 될 수 없다. 백두산․동이족(東荑族)은 우리 한민족이 주류이나 여진족도 포함되는 의미라고 본다. 고구려․발해를 빼고는 배달민족(倍達民族)만 고집했다. 우리의 민족역사는 동이족, 백두산족에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가이드 이만송이 산천어를 시식하고 남은 돈으로 최고수온 82℃에 삶은 계란을 사 가지고 하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장 13시간의 정력소모로 나는 3개까지 먹었다.(평상시 1개 이상 못 먹음.) 백두산지역은 온천군이 많다. 온천은 해발 1,756m이상 되는 곳에서 나타나는데 모두 30여 곳이 있고, 천지 호수 내에도 2개의 온천 분수구가 있고, 장백폭포 북쪽에 13개의 분수구가 있다.
외륜봉 종주 중에도 녹명봉과 용문봉 사이의 산록에도 온천 분수구가 육안으로 발견할 수 있었다. 전문가도 아닌데 어떻게 육안으로 발견했냐고요? 해답은 간단하다. 산록에는 모두 고산초원으로 덮여있는데 온천 분수가 있는 곳은 바위나 낙석지대도 아닌데 아예 풀이 없거나 더운물이 흘러 풀이 노랗게 말라있는 곳으로 500~1,500여 평의 상당한 넓이를 가진 것이 1개 발견되기도 했다. 노천온천인 것이다.
장백산 국제호텔로 내려가는 길목과 주차장에는 중국의 관광객과 한국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백두산지역은 해발이 높고 천지에서 발원하는 차가운 지하수 계곡으로 인하여 여름의 피서지로 적격이어서 중국인 피서인파가 자동차 붐과 더불어 매년 증가추세에 있었다. 우리나라도 80년대부터인가 자동차에 가족을 태우고 관광지에 가는 것이 가장의 최상 서비스였다. 아이들은 학교의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현재 중국이 그런 식이다.
중국인의 의식과 생활철학도 경제발전과 함께 변하고 있었다. 80년대 이전에는 자전거․손목시계․재봉틀, 90년대에는 TV․냉장고․세탁기, 2000년대에는 주택․중고차․보험에서 중국의 신흥부자들은 저택(고급APT)․신형차․돈과 여행이라고 한다. 상전벽해(桑田碧海)로 중국이 급변하고 있었다. 이 속도면 한국을 추월하기란 시간문제다. 한국은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특히 정치권, 여야정치지도자 모두지만 집권여당의 책임이 막중하다.
우리가 하산 후 투숙하는 곳은 '장백산국제여유빈관'이다. 우리말로'장백산국제호텔'이다. 현재는 재일동포인 박정인(朴正人)이란 사업가가 인수하여 총경리(사장)를 맡고 있다. 시설은 북파 백두산에서는 제일 나은 호텔이라 사장은 투숙객인 우리 팀에서도 백화점 출입구의 젊은 여사원들처럼 고개 숙여 인사한다. 나이가 드신 분으로'친절'이란 경영철학을 갖고 있었다. 명함도 1장 요청하여 받았다. '한국의 백두산관광이 매년 급증하고 있으므로 사업이 번창할 것입니다.'라고 화답해주었다. '감사합니다. 불편한 점이 없었는지요?'하며 친절이 절절이 몸에 배어있었다.
장백산 국제관광호텔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화강암비가 서있다. 내용은 “不登長白山 終生遺憾(부등장백산 종생유감) 鄧小平(등소평), 장백산 국제관광호텔은 중국 길림성 조선족자치주 안도현에 위치한 중일합자기업으로 1988년 5월18일에 준공 개업하였습니다. 호텔전신은 악화호텔이므로 1983년 8월에는 고 등소평 동지께서 투숙하였던 역사와 유서 있는 호텔입니다.'
중국의 등소평이 백두산에 오른 후'장백산에 오르지 않으면 평생(종생)유감이로다'라는 백두산 등정소감을 남겼다는 내용이다. 덩샤오핑(1904~1997)이 80세 때 노익장을 과시하며 백두산 천문봉(2,670m)과 달문을 등정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천문봉으로 오르는 도로와 달문으로 오르는 등산길이 지금처럼 좋지 않고 위험했는데도 말이다.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으로 대변되는 실용주의, 실사구시로 '중국인에게 꿈과 희망, 중국인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한'한국의 박정희격이다. 중국은 등소평을 존경하는데, 한국은 대통령 박정희를 존경하지 못하는 지독한 병에 걸려 있는 것이 문제다. 억시 잘하지도 못하면서 잘했던 박정희를 비판한다. 한국의 박정희는 덩샤오핑보다 13년 연하지만 산업을 일으켜 세운 업적은 19년(1961년~1980년) 앞섰다. 그런데 중국이 2~5년 간격으로 따라오면서 추월하려고 한다.
시간이 문제다. 누구 때문인가. 박정희의 좋은 점을 따라가지 못하고 비판만 했던 사람들 때문이다. 보통의 한국인인 내가 보는 박정희 평전(評傳)은 잘한 것이 9가지라면 못한 것은 1개의 비율뿐이라고 본다. 누가 뭐라고 하든… 해방이후 역대 정치지도자중 민중에게 가장 믿음이 가는 정치인을 들라고 하면, 1순위는 단연코 박정희라고 역사가는 기록하지 않을까. 5천년 우리 역사속에 18년 만에 빈곤으로부터 나라를 이만큼 일으켜 세운 제왕이나 정치지도자는 없었다.
비판자들이 입만 벌리면 ‘독재, 군사독재’ 운운 하는데 질곡의 보릿고개 가난으로부터 민생고(民生苦)를 해방시키자면 영명한 지도자의 강력한 리더십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목표는 있는데 의식에 눈을 뜨지 않아 따라오지는 않고, 이끌고는 가야하겠고…… 민주주의는 유아 걸음마 수준인데 비판자들은 먼저 산부터 오르자 하고… 그 시대 박정희라는 지도자가 없었다면 아마 배가 산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없다고 하지만, 1868년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911년 중국 손문의 신해혁명처럼 1884년(고종21년) 조선의 갑신정변 때에 박정희란 인물이 77년 일찍 태어나 김옥균을 대신했다면 조선의 개혁과 근대화는 박정희 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이고, 일제 36년이란 국권상실과 청․일간의 간도협약도 없었을 것이란 가설(假說)은 어떨까?
다음날 새벽5시에 기상, 5시 30분 지프차에 분승 나머지 북파의 최고봉인 천문봉(2,670m)에 오르기 위하여 출발하였다. 천문봉은 덩샤오핑이 올랐던 봉우리로 달문과 장백폭포의'내리쏟는 큰 내'(중국명, 승사하) 동쪽에 위치한 외륜봉으로 지프차가 백두산 천지기상관측소 주차장까지 올라간다. 주차장에서 천문봉까지는 40~50여m정도 거리이다.
1958년 기상관측소를 세운 때부터 기상대를 상징하여 천문봉(2,670m)이라 부른다. 이날의 날씨는 어제의 천지 외륜봉 종주시의 평온한 날씨와는 완전 정반대였다. 안개와 강풍이 몰아치기 시작하는데 땅콩만한 화산석이 나르고, 지프차 문을 열고 닫는데 3명이 붙어 바람 반대쪽의 문을 열었다. 40~50m 천문봉 후사면을 낮은 포복자세로 뽈뽈 기어서 올랐다.
군복무 후 30년만의 각개전투 산행이다. 사람이 서면 날리기 때문이다. 태풍보다 더 센 회오리폭풍이다. 오색영롱한 비취주옥이 박혀있는'천상은병풍'‘선녀화장대’ ‘수리바위’ ‘용각봉(여의주를 희롱하듯 외뿔용이 하늘에 머리를 쳐든 듯한 모양)'을 보기 위하여 납작 기어서 겨우 쳐다 볼 뿐이다. 천지 아래쪽에서 회오리치며 올라오는 강풍은 화산의 부석을 날리면서 독특한 통풍구 바람소리를 냈다. 소리가 유별나게 컸다.
이런 소리는 평생 처음이다. 쏴~ 쏴~, 천지 분지내의 안개구름이 하늘로 치솟더니 외륜봉 바깥으로 날려간다. 천지가 안개구름 밑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제 외륜봉 종주에서 내려다 본 천지와는 또 다른 비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창형과 맨 늦게 내려왔는데 이만송이 모두 내려와 한참 기다리고 있는데 어정거린다는 듯이 위험하다며 빨리 내려오라고 아래쪽에서 손과 팔을 연거푸 앞으로 당기며 신호를 보낸다.
날씨 때문에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천지를 품고 있는 민족의 영산을 뒤로한 채 하산하기로 했다. 우리는 어제 겪지 못한 미친바람(狂風), 칼바람까지 다 구경했다. 동쪽의 구름사이 아침 햇살을 안고 S자형 산악도로를 내려오는 천문봉 경관은 또 다른 비경이다. 조식 후 짐을 꾸려 북파의 백두산 산문을 통하여 '다음에 다시 오마.'굳게 약속하며 백두산을 뒤로하
며 하직했다.
백두산의 장백산국제관광호텔(장백산 국제여유빈관)에서 아침식사 때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유니버시티파크 소재․사업가 양성분야의 미 명문대학이라 함) 젊은 교수부부가 우리팀 옆에서 식사하고 있었는데 자기들도 백두산관광(천문봉, 장백폭포, 달문, 천지)코스를 마치고 연길시로 나가야 하는데 교통요금을 지불할테니 우리 차를 좀 이용하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가이드 이만송과 백두산닷컴의 김원수를 통하여 회장인 나에게 양해를 구해와 동행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에서 8년 동안 생활하면서 서울대학에서 동양역사학(東洋史)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미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재직중인데 부인(하얼빈 출신 만주족계 중국인으로 같은 하버드대학 출신동문으로 법학전공․그의 표현으로는 아주 재미없는 학문)과 함께 하얼빈의 처가를 방문하면서 부인과 함께 백두산을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수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뿐만 아니라 한국사를 포함한 동양사의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어 미국인에게서 되돌려 듣는 한국사 이야기에 깜짝깜짝 놀랄 뿐이었다. 체코계 이민2세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한국 유학 중 한국여자를 좋아하여 결혼하려고 하였는데 '서양인'이라 하여 여자의 부모가 극구 반대하여 결혼하지 못하고 똑같이 생긴 중국인(만주족계)하고 결혼했다는 고백도 했다. 자기 처를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나도 처음에 인사하면서 부인을 우리 해외동포인가 하여 착각했다. 부인은 가이드 이만송과 중국어로 대화했다.
지면관계로 교수와의 대화내용을 다 적을 수는 없고, 그가 말한 것 중 자기는'예로부터 남남북녀(南男北女)라 했지만 나는 한국을 좋아하지 김정일을 좋아하지 않는다.''장백산이라 부르지 않고 백두산이라 부른다. 백두산은 한국땅이다.''조선 숙종때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면서 청국(중국)과의 협상에서 조선관리(참판 겸 접반사 박권,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 군관 이의복, 조태상, 통역관 김경문, 김응헌을 지칭)가 비문의 표기를 잘못하여(명확한 지리표기 지칭)백두산과 동간도와 북간도를 잃게 되었다.
''조선관리가 백두산정계비를 운반하면서 압록․토문 두 강의 분수령인 산록(산정 동남방 약4㎞, 해발 2,200m를 지칭) 양쪽에 정계비를 각각 세워야 하는데 당시 관리들이 국토지리에 어둡고 태만하여 산 오르기를 싫어해 그렇게 되었다.'는 지적이었다. 신대륙을 개척한 후예인 서구인 동양사학자의 예리한 지적이었다.
그렇다, 미국인의 말이 맞다. 내가 먼저 토하고 싶었던 말을 그가 먼저 말해주었다. 정계비를 글자가 표기된 대로 토문강 지류에 갖다놓지 않고 두만강지류에 세우고 돌아와 버린 것이다. 관리들의 감독과 직무 소홀로 후세 국경선까지 분쟁에 휘말리게 하고, 그 잘못으로 이도백하, 토문강, 송화강 이동의 땅을 잃게 되었다. 그 땅이 동간도, 북간도, 연해주다. 백두산정계비를 장백폭포 아래 이도백하(二道白河)까지만 운반했어도 상황은 달라졌다. 토문강의 상류(소지류)는 백두산 천지로 통하는 이도백하․장백폭포․승사하․ 천지이고, 토문강의 하류는 송화강(쑹화강)․헤이룽강(아무르강)이다. 백두산정계비를 운반하면서의 청의 관리는 조선의 관리보다 더 산 오르기를 싫어했다.
게으른 청의 관리는 전화위복으로 근세의 국경획정에 되레 유리하게 되었다. 당시 청의 관리도 백두산 동쪽변방을 관심밖에 두고 있었으므로 옛 조선관리만 자각했다면 우리의 국토반경은 달라졌을 것이다. 즉 만주의 동간도, 북간도, 연해주까지 우리의 국토영역이 되는 것이다. 한말에 일제에 의하여 국권과 주권까지 상실한 마당에 우리의 강토를 제대로 찾기란 근원부터가 어려웠던게 사실이다. 이 점을 역사의 뼈아픈 교훈으로 반추하자. 동아시아의 국토지리에 어둡고 근대적 영토개념이 없었던 조선왕조와 아둔한 관리들을 이제와서 탓해본다.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송화강이 흑룡강(러시아명, 아무르강)으로 흐른다는 것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지리학자들은 조정에서 우대했어야 알지… 조선 숙종조는 물론 근세에도 여암 신경준 등 뛰어난 지리학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대우하고 상을 주기는 커녕, 고산자 김정호의 경우처럼 독학으로 지도제작에 힘쓰고, 전국 각지의 실지답사를 통하여 국가의 지원 없이 독력으로 정밀한 지도를 판각하여 대원군에게 올렸으나 나라의 기밀을 누설하는 것이라고 의심을 받아 감옥에 갇히고 옥사한 어처구니없는 역사도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팀은 이들 부부들을 연길시의 북한식 냉면집인 청향관까지 안내하여 식사를 함께 하며 우리나라의 민간외교를 대신한 후 헤어졌다. 주는 교통비와 식사비도 물론 거절했다. 그들은 너무 고맙다고 굳게 악수하며 헤어졌다. 한국사를 전공한 미국인교수, 여진족의 후예인 중국인 부인을 백두산 등정에서 만나 백두산 역사반추의 귀중한 대화가 되었다.
미국인은 서울 유학시절 한국여인이 좋았지만 할 수 없이 비슷한 중국여인을 만나 결혼했고, 중국인 부인은 본디 뿌리가 만주족계이므로 뭔가 당기는 것이 있어 우리들처럼 백두산 여름휴가를 오게 되었고, 또 우리일행과 만나 백두산에 산재한 관련 역사를 반추한 것이다. 연길로 가는 중에 타이어가 펑크 나는 바람에 3시간동안 같이 할 수 있었다. 우리 민족과 여진족(만족)은 뿌리가 같은 백두산족임을 또 발견한 것이다. 여진족 후예인 여교수는 하버드 법학박사다 뿐이지 우리의 이웃집 수수한 아줌마와 같이 정감이 갔다. 이만송이 통역도 해 주었지만 눈빛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인생의 세월은 10대에는 10㎞속도로, 20대에는 20㎞의 속도로, 30대에는 30㎞의 속도로 달리다가, 40대부터는 2배의 가속이 붙어 80㎞, 50대는 100㎞, 60대는 120㎞, 70대는 140㎞, 80대는 160㎞, 90대는 180㎞라고 한다. 속도가 붙으면 빨리 가기도 하지만 건강상의 위험도 항상 내재한다. 60~70세 이후부터는 내일을 알 수 없기에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 한다.
아~! 백두산, 백두산아! 외륜봉 등정은 내 인생(56세)에 가속이 붙고 있는 세월 속에 평생에 길이 남는 금싸라기 추억이 되었다. 감사, 감사할 뿐이다.
지면관계로 이도백하의 과일시장, 이도백하와 안도 사이의 북한 특산품판매소, 조선족토산품판매소(장백산유람 관광휴게소), 연길시의 북한식 냉면집 청향관(경리:李淑), 용정 가는 길의 조선족이 개척한 구릉산지 과수원, 용정시의 용정평야와 해란강과 용문교, 가곡 선구자의 가사에 나오는 비암산 기슭의 일송정, 지금은 일송은 베어 없어지고 전망대용 조그마한 정자만 보였다.
용정공원의 용정지명기원지정천(龍井地名起源之井泉)비와 용정(龍井), 용정공원에서 조선족노인들과의 대화, 거룡경천비(巨龍驚天碑 : 거제시와 용정시의 자매결연비), 대성중학옛터기념관(현, 용정중학), 서정시인 윤동주시비, 용정시 소재 동방웅담원(곰사육농장), 연길시의 13시간 종주 후의 지친 몸 회복을 위한 단체 발지압(명․청시대 중국의 위층 관리들이 즐겨 사용하던 중의학을 대중화, 관광 상품화 함),'만나서 반갑습니다,
고향의 봄, 우리의 소원' 칠갑산 등 눈물샘 노래로 대변되는 북한이 운영하는 평화휴가촌(중국명:화평가일촌․和平假日村․북한예술공연식당)등의 일정을 끝내고, 연길공항, 요녕성(랴오닝성) 성도인 심양(선양)의 쉐라톤호텔, 이튿날 심양시의 서탑지역 조선족집단거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시내관광, 인천공항도착, 일정이 이어졌으나 백두산 외륜봉 기행 내용이 아니므로 지면상 일정의 제목만 쓰고 '창상지변(滄桑之變), 창해상전(滄海桑田)이라 했던가. 중국이 거세게 변화하고 있다.'는 말만 적는다.
이번에도 집사람의 건강관계로 백두산 등정은 어려울 것 같아 같이 가지 못하여 여행 내내 마음에 걸리고 아팠다. 용정시의 옛 대성중학 옛터에는 현재 용정중학이 자리 잡고 있다. 우수한 인재를 수없이 배양한 조선민족교육의 요람에 옛 은진중학, 명신여자중학, 동흥중학, 광명중학, 대성중학, 광명여자중학의 연합기념비가 서 있고, 복원된 옛 대성중학기념관(용정시정부, 한국사회법인 해외 한민족연구소가 주선하고, (주)금성출판사 김락준 회장의 지원으로 건립했다는 복원기가 세워져 있음, 참 뜻있는 일을 한 기업가였다.) 안에는 수많은 인재와 항일독립열사를 배출한 간도의 조선민족교육의 요람임을 옛 자료전시를 통하여 보여 주고, 민족혼을 일깨우는 낭랑한 여교사의 설명도 듣는다. 모두 감명을 받아 방명록에 서명한 후 장학금 1만원씩도 기부했다.
윤동주 시인은 옛 은진중학 광명중학에서 공부한 일제시대 때의 항일 애국시인으로 일본 규슈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아까운 젊은 나이 29세로 옥사했다. 서정과 동경(憧憬)의 시로 민족의 애수와 이상․정열을 표현한 저항문학의 대표적 시인이었다. 그의 '서시(序詩)'시비(서울해외민족연구소, 동아일보사 敬竪)가 옛 대성중학 복원기념관 앞에 세워져 있는데, 평상시 시 한줄 못 외우는 나였지만 생명 존중의 애틋하고 여리고 가엾은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자연을 좋아하고 인간을 사랑해야지… 윤동주 시인의'서시'는 백두산 여행기의 결언으로 대신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첫댓글 백두산 외륜봉 종주는 11년 전인 2004년 8.4~8.8(4박5일) 간에 있었 습니다.
남파, 서파의 고산 초원에서 바라보는 민족의 영산은 가슴이 뛰고 벅찬 마음의 '장엄함' 그대로 였습니다.
상기 '하늘가마솥, 백두산 등정과 역사 반추' 여행기는 돌아와 본대로 느낀대로 두서없이 일사천리로 작성한 것으로 2004년 12월 발간의 '창원박물대 연합회'의 회지인 '창원박물 제6집'에 게재된 것을 찾아내어 등재합니다.
11년이 지난 지금도 사진을 보면 가슴 벅찬 당시 추억이 떠오릅니다~!
저 멀리 뭉게구름 속에 백두산 원경이 보입니다.
사진 가운데 청년은 등정을 안내한 조선족 동포 가이드 이만송입니다
백두산 외륜봉(북한 쪽 동파는 빼고) 종주 등정 구간에도 산악의 굴곡에 따라 오르막 코스로 '깔닥고개'가 수없이 있습니다. 그 중 제일 높은(큰) 깔다고개를 오르는 전경입니다.
외륜봉 등정 16km 내내 천지의 테두리 연봉 2000~2500m를 돌지만 3대 적선으로 날씨만 잘 만나면 행운 따봉으로 수목이 없는 고산 초원과 이끼밭을 걷는 쿠션도 좋아 남한의 산들과 다른 색다른 느낌의 산행입니다.
새벽 3시 30분에 기상 4시 스타트, 외륜봉 등정 중 천지가 천길 낭떠러지로 조망되는 편편한 초원 둔덕에서 점심, 식사에 앞서 민초는 국조 단군황검(민초는 왕검에서 '황검' 혹은 '제검'으로 달리 격상 존칭함)과 천지신명께 잔술을 올리며 삼배하는 장면입니다~!
백두산 외륜봉의 오르내리는 크고 작은 수십여 개의 깔딱고개의 선두에서 속도를 조절하는 1일 회장 겸 산행대장을 맡으며 팀에서 낙오자가 없도록 했습니다.
해발 1500~1800m를 넘어서면 수목은 없고 고산 초원만 전개됩니다.
외륜봉 종주 코스 중, 봉우리를 바깥으로 우회할 때는 서북쪽 외륜 산록과 만주벌을 전망하고, 사이 사이 중간에는 외륜에서 발아래 화산석 산비탈과 천지를 조망하기도 합니다.
천지는 정말 신령스런 장관으로 절로 탄성~!
천지의 조화를 맡은 신령이 만든 대자연에 감탄~!
백두산 외륜은 남파(파는 둔덕을 의미), 서파, 북파, 동파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파는 내륜(천지 방향으로 봉우리의 절벽과 급경사로 이루어진 안쪽 원형화구), 외륜 2개 모두 북한령이고,
서파와 북파는 내륜, 외륜 모두다 중국령입니다.
남파는 내륜, 외륜의 봉우리 분수령에서 내륜(내부, 원형화구)은 북한령이고 외륜(외부, 산록)은 중국령이라 보면 됩니다.
중국령 외륜봉 종주 서파 출발지에서 만나는 북한령 '조중 5호경계비'는 서파와 남파의 접경의 북한령 남파 내륜의 분수령 지점에 세워진 것입니다.
내륜쪽(천지쪽)에는 경계비 내면에 '조선 5, 1990(세운 연도)'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조중 5호 경계비 바같쪽 면에는 '중국 5, 1999'라 표기되어 있습니다.
남파와 서파의 경계지점 외륜봉의 5호 경계비는 분수령(물이 갈라지는)에서 천지 방향 안쪽 경사지는 북한령, 천지 반대 방향 산록은 중국령입니다.
백두산을 종주하면서 안개속에 분간을 못하여 어리둥절하는 경우가 많아 방향을 식별하기 어려우니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야 합니다.
5호 경계비 내륜의 천지쪽 급경사 지역 안쪽 낭떠러지 좁은 곳이 북한령으로 북한의 초소 같은 것은 없습니다.
천지 방향 안쪽은 좁은 공간으로 테두리따라 도로를 내기도 불가능하고 초소를 둘만한 장소가 못됩니다.
남파의 내부 북한령은 추락 지역으로 2015년 현황은~?
2004년 8월 백두산 외륜봉 등정 시 참고용으로 샀던 '길림성 여유 교통도'란 지도에 나오는 백두산 천지의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 지도입니다.
국경선이 남파의 옥설봉~와호봉~제운봉의 분수령 안쪽인 천지 쪽으로 구획되어 있습니다.
첨부 지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