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대칭으로 사유한다. 수평적 대칭에서 수직적 모형으로 갈아타야 한다. 선형적 사고에서 입체적 사고로 바꿔야 한다.
같은 층에서 안방과 건넌방의 대칭을 2층과 1층의 대칭으로 갈아타는 것이다. 남과 북의 수평대칭을 해양문명과 대륙문명의 입체적 모형으로 갈아타는 것이다.
대칭은 마주보고 교착된다. 갇혀버린다. 탈출구가 없다. 궁지에 몰린다. 사유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탈출방법은 마이너스다. 애초에 높은 차원에서 시작해야 단계적으로 층위를 낮출 수 있다. 낮은 차원에서 사유하므로 더 낮출 수 없어서 망한다. 질에서 시작하여 입자로, 힘으로, 운동으로, 량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선에서 시작하므로 점으로 막혀서 사유가 끝난다. 천하단위, 역사단위, 인류단위, 문명단위의 높은 단위에서 사유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려면 모형을 가져야 한다. 입체적 모형이 없으므로 상대방의 말에서 억지로 대칭을 조달하려고 한다. 그 경우 무조건 상대의 반대로 간다. 어깃장을 놓고, 안티를 걸고, 말대꾸를 한다. 본능적으로 '난 반댈세'를 시전하는게 안철수 행동이다. 조롱하고 야유하고 이죽거리는게 사유의 실패다.
중요한건 주도권이다. 내가 룰을 정하고 판을 짜서 능동적으로 게임을 설계하고 이끌어야 한다. 상대방이 나의 게임을 따라오게 만들어야 한다. 상대방이 내게 먼저 질문하게 만들어야 한다. 안철수식 트집잡기는 상대방의 해명을 요구할 뿐 상대가 안철수에게 질문하도록 유도하지 못하는게 실패다.
주도권은 선수를 두는데 있다. 상대방 말에 반박하면 후수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간다. 기 단계에서 출발해야 선수가 된다. 결 단계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후수가 된다. 후수가 되면 상대의 말을 받아칠 뿐 새로운 관점을 던지지 못한다. 잘해봤자 무승부다. 바둑을 두어도 그렇다. 손빼기를 잘해야 한다. 막히면 다른 곳에서 새로운 활로를 열어야 한다. 중앙에서 교착되면 귀로, 귀에서 교착되면 중앙으로 싸움터를 옮겨야 한다. 내가 유리한 지점으로 적을 살살 달고 와서 최후의 싸움판을 벌여야 한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다른 관점을 던지는 것이다. 무대에 올려져 있지 않은 새로운 게임을 던져야 한다. 상대방이 앞을 말하면 옆으로 화제를 돌려야 한다. 상대방이 옆을 말하면 위로 화제를 돌려야 한다. 상대가 호응하여 따라오게 만드는게 기술이다. 적절히 발빼기를 하고 다른 국면으로 옮겨가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 김어준이 잘 하는 역발상의 찌르기다. 보통은 그렇게 못한다. 상대가 무엇을 말하든 나는 반댈세 하고 받아친다. 핑퐁을 하듯이 말을 떠넘기는게 고작이다.
‘석가탑이 높다네.’ ‘아니 감은사 탑이 더 높은데?’ 말대꾸 하며 받아치는 사람은 '높이'라는 동사를 반박하지만 말을 꺼낸 사람은 사실 석가탑이라는 주어를 제시한 것이다. 높이는 문장의 수식이다. 다보탑의 화려함을 말하려고 미리 석가탑으로 밑밥을 던진 것이다. 상대가 높이로 꼬투리를 잡아 반박하면 다보탑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한다. 대화가 어긋나는 장면이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화를 내고 씩씩거리다가 사이가 틀어진다. 특별히 훈련하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 본의 아니게 말꼬리를 잡고 시비를 거는 결과로 된다. 그냥 감탄사만 날리고 리액션만 하려니 그것도 싱거운 일이다. 대칭에 잡혀 있는게 문제다. 상대를 이겨먹으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초딩일기와 같다. 일기의 첫 줄은 ‘나는 오늘’로 시작한다. 그게 필요없는 말이다. 일기는 내가 쓰는 것이고 날짜는 오늘 밖에 없다. 그런데 왜? 무의식적으로 일기를 검열하는 선생님과 나를 대칭시킨 것이다. 일기의 내용은 보나마나 무엇을 잘못하고 반성했다는 내용이다. 장난치다가 접시를 깨고 할머니께 혼나고 나서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반성했다는 뻔한 레파토리. 역시 대칭이다. 선생님과 나의 대칭을 유지하려고 하므로 일기가 자기소개가 된다. 선생님이 내게 말을 걸만한 근거를 만들어야 한다. 선생님이 일기를 읽어보고 ‘그래 네가 잘못했지만 반성한다고 하니 기특하군. 지켜보겠어.’ 이런 그림이 만들어진다. 뭔가 아귀가 맞아지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건 일기가 아니다. 그건 반성문이거나 보고서다. 그런데 이렇게 한다. 관측자와의 대칭을 끊어버려야 한다. 일기는 남에게 보여주는게 아니다.
사람과 대칭시키지 말고 객체 자체의 내재적인 질서에서 대칭을 찾아내야 한다. 산과 물의 대칭을 찾고 강아지와 병아리의 대칭을 찾아야 한다. 산이 높으므로 물이 깊은 것이며, 강아지가 즐거우므로 병아리도 신난 것이다. 이렇게 사건을 연결시켜 가야 일기를 쓸 수 있다. 포드시스템으로 대량생산한다. 방학 한 달치를 하루에 몰아 쓰고도 오후에 놀 시간이 남는다.
공연히 나를 사건에 개입시키려 하므로 잘못되고 만다. 무의식적으로 나를 개입시키는 것이 하지마라는 자기소개다. 누가 '난 짜장면이 좋아.' 하면 '아니 난 짬뽕이 좋던데.'로 반박한다. 조건반사로 튀어나온다. 누가 햄버거를 말하면 난 피자로 받는다. '햄버거에는 콜라가 어울리지.'로 음식 자체의 대칭을 찾아야 한다. 나와 상대의 대칭구도를 배제하기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사유하는 방법이다. 관점의 이동 기술이다.
주체와 객체의 사물대칭에서 사건 내부의 자체대칭으로 갈아타야 내가 게임을 주도할 수 있다. 더 높은 관점을 던져야 한다. 상대가 점을 이야기하면, 선을 던지고, 상대가 선에 매몰되면 면을 던지고, 상대가 면에 붙잡혀 있으면 입체를 던져야 한다. 부분이 아닌 전체에서, 결과가 아닌 원인에서, 단절이 아닌 연결에서 사유를 시작해야 한다. 대부분 토씨를 건드리고 말꼬리를 잡고 부분을 비틀어 자기 주장을 세우려고 한다. 일회성 반박으로 끝나고 스토리가 이어지지 않는다. 게임을 주도하지는 못한다.
정부가 코로나19에 대해서 어떤 발표를 하면 안철수처럼 '그게 아닌데.' 하고 받아칠게 아니라 한달 후, 6개월 후, 1년 후의 대책을 이야기해야 한다. 상대가 건드리지 않은 분야를 발굴하기다. 상대편이 진을 치고 있는 지점에 각을 세우지 말고 앞질러가서 새로운 전장을 선점해야 한다. 상대를 나의 구역으로 달고 와야 한다. 보통은 이런 걸로 수준을 들킨다.
글쓰기라도 마찬가지다. 오마이뉴스식 글쓰기가 천박하다. 맨 앞에는 주소와 숫자, 이름, 통계 따위를 쓴다. 조중동이나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하고 남의 말을 긁어와서 소개한다. 다음 밑줄 그어가며 한 마디씩 반박한다. 이게 일본식 칼럼 문장이다. 다른 어느 나라도 이렇게 안 한다. 일본과 일본을 베끼는 한국언론만 글을 이렇게 쓴다. 썩은 글이다. 맨 앞에 숫자나 주소 따위가 나와서 독자가 읽기 싫도록 만든다. 자기 주장을 못하고 상대와 대칭시켜서 말한다. 조중동 사설은 말할 것도 없다. 정부가 이랬다더라 하고 상대방 주장을 먼저 펼쳐놓고 주어는 놔두고 거기서 동사만 비튼다. 상대가 희다고 하면.. 아닌데? 내가 보기엔 검던데? 상대가 검다고 하면.. 아닌데? 내가 보기엔 희던데? 유치하기 짝이 없다. 진정한 글쓰기는 남의 말을 꼬집는게 아니다. 말은 주인이 있는데 거기 붙어먹는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부끄러운줄 알아야 한다. 대안 제시는 절대로 못하는 진중권서민식 꼬집기는 소인배의 글쓰기다.
좋은 칼럼쓰기는 요령이 있다. 맨 앞에 주소나 숫자, 이름, 통계 따위 딱딱한 것을 열거하면 좋지 않다. 남의 발표를 긁어오면 일본식 칼럼이다. 맨 앞에는 어떤 에피소드를 펼쳐야 한다. 흥미있는 이야기를 투척해야 한다. 정 안 되면 다 아는 삼국지 한 장면을 긁어와도 된다. 그 다음은 논하고 싶은 현안과 연결시킨다. 마지막에 자기 아이디어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담론에는 형식이 있다. 조건문을 먼저 쓰고 다음 반복문을 이어쓴다. 옛날 사람도 글쓰기 방법을 알았다. 주로 고문에서 긁어와서 춘추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는데 하고 밑밥을 깔고 난 다음 거기에 빗대어 시국을 논하고 마지막에 자기 의견을 덧붙인다. 동사나 토씨, 숫자 따위 부분에 매몰되면 안 되고 본질을 건드려야 한다. 그래야 다음 단계를 예측할 수 있다. 미래의 예측이 없는 죽은 글은 쓰지 말아야 한다. 기세가 없는 글, 방향성이 없는 글, 에너지가 없는 글은 죽은 글이다. 하나의 만남에서 또다른 만남으로 갈아탈 때 인간은 전율한다. 전율을 끌어내지 못하는 글은 죽은 글이다. 열린 글을 써야 한다. 더 큰 세계와의 만남을 제안하지 못하는 닫힌글은 죽은 글이다.
글쓰기란 예측의 툴을 제시하고 다음 단계를 예측해 보이는 것이다. 과거에 이랬으니 이번에도 이럴 것이다. 일본이 저랬으니 한국도 저럴 것이다. 이런 예측의 형식이 갖추어져야 담론이다. 그게 진부하면 안 되고 신선해야 한다. 진정한 글은 사실을 적시하는 것이 아니라 관점을 전파하는 것이다.
자기소개식 글쓰기를 극복하는 객관적인 글쓰기, 미래를 예측하는 글쓰기가 되어야 한다. 눈덩어리를 정상에 올려놓으면 저절로 굴러간다. 그런 글쓰기가 되어야 한다. 화자는 그저 덩어리를 정상에 올려놓을 뿐이다. 눈덩이는 자체 엔진에 의해 굴러간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비탈의 경사다. 당신도 어디서 숨은 비탈을 하나 찾아내면 글을 쓸 수 있다. 제 손으로 눈덩이를 굴리면 안 된다. 남의 희다는 것을 검다로 받아치고 남이 5라고 하는 것을 나는 10이라고 받아치는 것은 제 손으로 눈덩이를 굴리는 것이다. 사실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봤다는 것이다. 나를 기준으로 한 사실판단이 아니라 거꾸로 사실을 기준으로 한 자기소개다. 난 이런 사람이야. 난 5를 10으로 보는 사람이야. 난 흰 것을 검다고 말하는 사람이야. 난 항상 가재미 눈을 하고 세상을 삐딱하게 보지. 왜냐하면 마음이 비뚤어져 있거든. 그런 자기소개다.
화자가 개입하면 안 된다. 관측자를 배제해야 한다. 눈이 경사면을 따라 저절로 굴러가야 다음 단계가 예측된다. 그 예측은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니 천하에 이익이 된다. 그런 경사면을 하나 찾아서 제출하면 그 다음은 대칭만 살살 따라가도 문장이 된다. 지금 인터넷 경사도가 급경사인가? 스마트의 경사는 어떤가? 인공지능 경사는 확실한가? 오징어게임 흥행은 급발진인가? 가다가 철푸덕 주저앉는 것은 아닌가? 나만의 산비탈을 하나 찾아야 한다. 나만의 관점, 바라보는 위치 말이다. 그것은 관측대상 안에서 찾아야 한다. 경사도는 산에 있다. 나와 상관없이 산은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