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각성 운동을 이끈 두 거장의 대립 - 웨슬리 대 휫필드 -

 

J.D.월쉬

 

조지 휫필드는 1739년 영국을 떠날 때 복음주의 각성 운동의 지도자였고, 자신을 추종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존 웨슬리에게 맡겼다.


그는 1741년 초 영국으로 돌아간 뒤의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내 영적 자녀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나를 만나거나 내 설교를 듣거나 최소한의 지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속히 나를 멸하시리라는 협박 편지를 써 보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웨슬리는 지도자들을 분열시킨 두 가지 주제에 대해 설교하고 출판했다. 두 가지 주제란 예정(하나님이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작정하셨는가하는 문제)과 완전(현세에서 무죄하게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었다. 휫필드는 1741년 초에 찰스 웨슬리와 존 웨슬리를 만났으나, 공통된 기반을 찾을 수 없었다. 휫필드는 이렇게 썼다. “누구든 찰스 웨슬리와 내가 가능한 한 분열을 막아 달라고 울면서 기도했다는 소리를 들었다면 마음이 녹아내렸을 것이다.” 그 운동은 웨슬리 추종자들과 휫필드 추종자들 사이에 영구히 분열되었다. 필자는 휫필드와 웨슬리가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분쟁을 시작했으며 어떻게 관계가 변했는지를 설명하려고 한다.18세기 부흥 운동의 대지도자들인 조지 휫필드와 존 웨슬리의 관계는 칼로 무를 베듯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의 관계는 아주 다른 단계들을 거치면서 형성되었다.


차이/옥스퍼드의 감리교도틀(methodists)

휫필드는 1732년 서부 지방 사투리를 쓰는 소박한 시골 청년으로서 옥스퍼드 점브로크 대학에 들어갔다(그는 뒤에도 사투리를 버리지 못했다. 그의 설교에 관한 기록들은 그의 말에 '콧소리'가섞여 있고 ‘그리스도’(크라이스트)를 ‘크로이스트’라고 발음했다고 전한다). 휫필드는 여관의 선술집 출신으로서 대학에서도 부자 학생들의 시중을 들어 생활을 꾸려 갔다. “내 자질에 관해 말하자면 나는 가난한 술집 사환이었다”라고 그는 썼다. 휫필드는 옥스퍼드에 가기 전에 '신성클럽'에 관해 들었고, 옥스퍼드에서 찰스웨슬리로부터 친절히 조찬에 초대를 받은 즉시 그 단체에 가입했다. 옥스퍼드 시절 그의 다정한 조언자는 강인한 의지와 자제력을 지닌 존이 아니라 개방적이고 따뜻한 찰스였다.


휫필드는 유명한 기숙학교 출신이자 자신의 상급생인 웨슬리 형제에 관해서 “최상의 경의와 존경을 가지고” 말했다. 그는 큰 실의에 빠져 지낼 때 다른 사람의 소개로 존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고, 존의 “탁월한 조언과 감화”에 힘입어 “사단의 간계에서 건짐을 받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어느 정도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였다. 휫필드는 이렇게 썼다. “때로 웨슬리 선생은 나의 방문을 허락하고 내가 잘 알아듣도록 가르쳤다.”
휫필드는 존 웨슬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아버지”로 존경했고, 웨슬리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존경하는 선생님"이라고 썼다.

동반자/부흥 운동의 시작

1736년 존 웨슬리는 이제 막 성직 임명을 받은 휫필드가 멀리 조지아 주에 가 있는 동안 그를 옥스퍼드 감리교도의 감독으로 세웠다. 휫필드는 곧 “젊은 설교자”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사인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그를 에워쌌다. 그를 추켜 세우는 소책자들이 홍수를 이루었다. 제2의 종교개혁의 '첫별'로서 모세, 다윗, 위클리프에 비견되는 등 후한찬사를 받았다. 휫필드가 솔직히 고백했듯이, 명성은 그를 자만케 만들었다. 그는 1739년 어떤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두렵게도 성공은 나를 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내게 어울리는 겸손을 가지고 목사님과 그리스도의 다른 사역자들을 공손히 대하지 않았습니다. "휫필드가 전도에서 거둔 성공은 그를 가르친 웨슬리보다 훨씬 뛰어났으나, 그는 웨슬리에게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는 1739년 3월 웨슬리에게 “저는 신참에 불과합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잘 알고 계십니다”하고 말했다. 휫필드는 그 해에 웨슬리를 브리스틀에 와서 설교해 달라고 초청하기 전에 자신의 개종자들에게 말하기를, 자기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자기는 그분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고 했다.


그런데도 부흥 운동의 아주 중대한 국면에서 이 젊고 원기 왕성한 휫필드는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신중한 웨슬리를 끌고서 앞장서서 활동했다. 1739년 봄 휫필드는 야외 설교의 기념비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그가 처음 찾아간 곳은 브리스틀주변의 음울한 탄광이었고, 그 다음에는 런던 빈민가였다. 이를 계기로 감리교는 영국 국교회로부터 광활한 무교회 지역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제 휫필드는 미적거리는 웨슬리 형제의 등을 떠밀어 야외 설교자로서 자기를 따르게 했다. 1739년 전도가 크게 성공할 전망이 열리자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는 형제와 동역자로서 긴밀한 조화를 이루었다. 휫필드는 탁월한 웅변술로 개종자들을 얻을 때 웨슬리에게 그들을 조직하고 가르치는 일을 부탁했다.

불화/은혜에 관한 주제로 논쟁을 벌임

그러나 불과 몇 달 뒤 두 지도자는 심한논쟁에 들어갔다. 1740년경 유아기 감리교 운동은 돌이킬 수 없게 두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예정 쟁점이 그 운동에 문제를 일으킨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웨슬리 형제는 예정을 부정한 견고한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었지만, 그들이 이끈 부흥 운동은 청교도 칼빈주의가 큰 활기를 띠던 지역에서 열정적인 지지자를 얻어냈다. 처음에 휫필드는 예정론자가 아니었으나,1739년 여름 배를 타고 아메리카로 가는 동안 칼빈주의 저서들을 읽었다. 아메리카에 도착해 열정적인 칼빈주의자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그는 생각을 굳혔다. 휫필드가 떠나기 전에도 존 웨슬리는 칼빈주의 은혜론을 비판하기로 결심한 바 있었다. 1739년 3월 그는 열정적인 알미니우스주의적인 설교를 했을 뿐 아니라 같은 사상을 담은 「값없이 베푸신 은혜」(Free Grace)라는 제목의 책을 펴내기까지 했다. 이러한 조치로 큰 불화가 일어났다. 웨슬리는 하늘로부터 표적을 구하고 두 번 제비를 뽑은 뒤에 논쟁에 들어갔다. 존 웨슬리는 칼빈주의가 숙명주의를 퍼뜨리고 신자에게서 좀 더 거룩해지려는 열심을 빼앗아 가는 것을 우려했다. 찰스 웨슬리는 예정론(특히 하나님이 어떤 이들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다는 유기론)이 사랑의 하나님을 미움의 하나님으로 비치게 하는 것을 우려했다. “씨름하는 야곱”이라는 유명한 찬송에서 찰스는 “주님은 순수하고 보편적인 사랑입니다”라는 가사를 의도적으로 대문자로 표기했다. 존 웨슬리보다 쉽게 분노하는 편이었던 휫필드는 답변을 하기 전에 먼저 항변을 했다. 자기가 자신의 옛 조언자의 추종자가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그의 앞에 서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하나님이 나를 먼저 보내시고 나를 먼저 깨우치기를 기뻐하셨으므로, 나는 하나님이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아직 영혼을 양육하는 웨슬리의 능력을 인정했다. “내 일은 주로 심는 것인 듯하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물 주는 일을 시키셨다면 나는 그분의 이름을 찬양한다.”


그런데도 174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휫필드는 칼빈주의 은혜론을 변호하면서 웨슬리를 비판하는 글을 됐다. 웨슬리는 이에 분개하여 아메리카에서 「값없이 베푸신 은혜」를 펴냄으로써 논쟁에 기름을 끼얹었다. 휫필드는 런던 주물공장에 자리 잡은 웨슬리의 본부에 와서 설교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아주 단호하고 공격적인 자세로 ‘선택에 관한’ 절대 작정”을 설교함으로씨 회중을 분개케 하였으며, 옆 자리에 앉았던 찰스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1740년부터 부흥 운동은 평행선을 그으며 진행되었다. 웨슬리의 '연합신도회'(United Societies)는 잉글랜드와 웨일즈에서 일어난 '칼빈주의 감리회' 단체들의 성장에 의해 견제를 받았다. 런던에서는 휫필드의 추종자들이 웨슬리의 주물공장이 자리 잡은 거리에 교회를 세우고 웨슬리의 교회와 경쟁을 벌였다.

냉각기/서로의 차이를 인정함

1742년경에는 적대감이 식기 시작하고 있었다. 도량이 넓은 전도자 하웰 해리스(Howell Harris)는 두 진영을 재결합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으나,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이유 중에는 “두 진영 어디서고 상대방의 수장 -웨슬리 선생이나 휫필드 선생- 에게 복종할 마음이 없었다”는 점도 있었다. 실제로 두 사람의 추종자들은 지도자보다 더 당파적인 모습을 드러낸 때가 많았다. 두 지도자는 갈라서기 이전보다 가까워졌다. 휫필드는 온건한 칼빈주의자였다.


예정 교리 때문에 만민에게 은혜를 전하는 일이나 신자에게 거룩한 생활을 강조하는 일에 위축되지 않았다. 존 웨슬리는 한동안 일부 영혼들이 영생으로 선택되었을 수가 있다는 주장을 인정했다. 두 사람은 지나치게 서로를 배척하던 열기가 가라앉자 그런 쟁점들을 비본질적인 것들로 보게 되었다. 논쟁의 막바지에 휫필드는 다음과 같은 종교개혁자 존 브래드퍼드(John Bradford)의 말을 인용했다. "선택과 예정의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믿음과 회개의 문법학교에 들어가야 한다."


두 진영은 재결합하지는 않았으나, 두지도자는 적어도 화해했다. 이러한 '정서상의 유대감'은 조금씩 덜컹거리면서 계속되었으나, 휫필드가 죽을 때까지 중대한 단절은 없었다. 1755년 찰스 웨슬리는 행복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었다. “오시오, 나의 휫필드여!(투쟁이 지나갔기 때문)/처음 친구들이 결국 다시 친구가 되는군요.”


웨슬리 진영의 어떤 설교자는 두 사람의 관계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한' 사이라고 표현했다. 휫필드는 웨슬리의 신도회들에게 가서 설교하여 환영을 받았다. 웨슬리는 자신이 가장 아끼던 설교자 조셉 카운리(Joseph Cownley)를 휫필드의 교회로 보내 잠시 사역하도록 했다. 휫필드는 이미 웨슬리의 교회가 자리잡고 있는 지역에 칼빈파 예배당을 짓지 않았다. 웨슬리도 그렇게 했다. 휫필드는 웨슬리 형제가 다틀 때, 그중에서도 특히 존이 그레이스 머레이(Grace Murray)와 결혼하려하자 찰스가 반대하고 나섰을 때 중재자 역할을 했다.


서로 과거의 분열을 잊지 않은 상태에서도 우정은 계속되었다. 존 웨슬리는 1765년 「감리교 약사」(Short History of Methodism)을 쓰면서 휫필드와 칼빈주의자들이 부흥 운동에 "최초의 분열"을 일으켰다는 확신을 감추지 않았다. 휫필드는 1739년 이전의 목가적인 조화 - 모두가 “어린아이와 같았던 땅에 있는 하늘” - 가 웨슬리의 "값없이 주신 은혜"라는 설교로 깨졌다고 느꼈다.

상호 보완적인 은사

궁극적으로 굳었던 두 지도자의 관계를 풀어 준 것은 1749년 휫필드가 칼빈주의 감리교 신도회에 대한 공적 지도권을 포기한 것이었다. 이로써 그는 부흥 운동의 주된 조직가민 웨슬리에게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않았다.


휫필드는 분명히 목회자와 조직가로서는 적절치 못했으나, 자신의 주된 은사가 ‘여행 전도’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메리카를 왕복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은 웨슬리처럼 대교단을 감독할 수 없었음을 뜻한다. “순회 순례의 싫이 내가 선택한 삶이다”라고 그는 썼으며, 따라서 그는 자기가 발견한 길잃은 양들을 다른 목회자들에게 기꺼이 넘겨주었다.


대조적으로 웨슬리는 회심자들을 조직하고 신앙으로 양육했다. 그는 자기가 신도회를 세울 수 없던 곳에는 설교자를 보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새로운 회심자들에게 양육하도록 뒷받침하지 못하는 것은 “살인자에게 자녀들을 낳아 주는 것”과 같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휫필드의 회심자들이 제대로 영적 감독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달아올랐던 대각성 운동이 대부분 가라앉았다고 보았다.


휫필드와 웨슬리, 그리고 모라비아 교도들은 대부흥 운동의 창시 조부들로 인정받을 만하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두 사람의 은사가 서로를 보완해 주었다는 것이다. 휫필드는 이전의 어떤 전도자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세상에 퍼뜨리는 능력을 부여 받았다. 웨슬리에게는 알곡을 모아 저장하는 능력을 부여되었다. 휫필드는 자기가 죽던 해인 1770년에 찰스에게 "참으로 귀한 내 옛 친구여"라고 썼고, 웨슬리에게는 "존경하는 형제"라고 썼다. 그는 “몇 가지 교리에 관한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가 마음과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두 분과 델 수 없이 결합되었다는 증표로” 반지를 유물로 두 사람에게 주었다. 휫필드의 죽음에 부쳐서 찰스는 고귀한 만가를 썼다. 그리고 휫필드의 요청에 따라 그의 장례 설교는 과거 그의 정적이던 존 웨슬리가 했다.

웨슬리와 휫필드의 언쟁


값없이 주신 은혜에 관한 웨슬리의 글

여기 내놓는 내용이 예수 안에 있는 진리일 뿐 아니라,이 진리를 온 세상에 선포해야 할 의무가 내게 있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에, 나는 내가 사역 면에서 크게 존경하는 분들의 정조(sentiments)를 공개적으로 반대하게 되었습니다. 주 예수의 날에 나는 그분들의 발 밑에서야 발견될 것입니다. 우리 구원의 원천인 하나님의 은혜 또는 사랑은 모든 사람 안에서 자유로우며,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베풀어집니다. 이 진리에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에게만 값없이 베풀어지며, 그들은 소수의 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류의 더 큰 덩어리에 대해서 하나님은 죽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셨고, 따라서 은혜가 그들에게는 값없이 베풀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미워하시며, 따라서 그들이 나기 전에 영원히 죽도록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설의 선하신 뜻입니다."


이 교리는 복되신 우리 주님,"의인 예수 그리스도",“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독생자”를 위선자, 사람을 속인 자, 일말의 진실성도 없는 자로 보게 만듭니다. 이것이 예정론이라는 두려운 교리에 담긴 뚜렷한 신성모독입니다. 바로 이 점을 나는 중시합니다. 바로 이 점을 놓고 나는 모든 예정론 지지자들과 논쟁을 벌입니다. 여러분은 마귀보다 더 악하게, 더욱 거짓되게, 더욱 잔혹하게, 더욱 불의하게 하나님을 대변하는 셈입니다.
- 1739년 3월에 행한 설교에서 -

휫필드의 반론

요나는 니느웨에 죽도록 가기 싫어했지만, 나는 그보다 더 마지못한 심정으로 당신께 팬을 듭니다. 그러나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오류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실로 많은 이들이 잘못된 목회를 받아 왔습니다.


나는 바울이 베드로에게 그의 위전을 책망한 일을 기억하면서, 내가 너무 오랫동안 입을 다무는 죄를 범해 왔구나 하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존경하는 선생님, 당신이 큰 오류라고 여기는 이 점에서 내 생각을 말한다 할지라도 노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선생님이 이 교리에 대해서 신중하게 검토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히 비추어 내놓은 중요한 반론들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는 게 드러날 것입니다. 존경하는 선생님, 만약 당신이 설교에 이름을 밝혀 놓지 않았더라면 나는 당신이 설마 그런 궤변의 저자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경솔한 태도를 버리십시오! 전심으로 성경을 읽어 보십시오. 은혜의 언약을 공부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적 사유를 버리십시오. 때로 나는 당신이 자신의 면류관을 벗어서 어린양의 발 앞에 던지며, 과거에 행했던 방법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반대한 것에 대해 거룩한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달아오를 모습을 생각하고 쾌재를 부르곤 합니다.
-1740년 12월 31쪽 분량의 소책자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