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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박사 스크랩 바른 목회와 교회갱신, 한국장로교의 자화상과 미래 / 정성구 교수님
한아름 추천 0 조회 46 12.09.04 21: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바른 목회와 교회갱신, 한국장로교의 자화상과 미래, 정성구 교수님 | 정성구박사

진실 2010.06.07 19:24  http://blog.daum.net/kkho1105/7911

 

 

 

 

한국 장로교의 자화상과 미래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비판과 대안-



정 성구 교수

전 총신대학장?실천신학




  존경하는 동역자 여러분!

  저는 오늘 바른 목회를 실천하기 위한 귀한 모임에 부름을 받아 이 자리에 선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먼저 여기 모이신 주의 종들로 하여금 보다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존귀를 드립니다.  그리고 저를 여기 불러주신 예장바른목회 실천협의회 임원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동역자 여러분과 섬기는 교회 위에 우리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강연에 앞서서 제 개인적인 소감을 몇 마디 해 보겠습니다.  우선 강연청탁을 받은 후부터 지금 이 자리에 서기까지는 여러 가지 생각이 오고갔습니다.  첫째는 여러분들께서 정말 순수한 장로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지키고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셔서 주께서 맡겨주신 목장에서 바른 목회를 실천하시려는 그 뜨거운 열정에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격려를 보냅니다.

  여러분이 본래의 목회자의 자리로 되돌아가려는 몸짓에 주님께서 반드시 함께 하시며 성령께서 여러분들의 구체적인 걸음을 인도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둘째는 한국 장로교회의 자화상을 비판하려고 할 때, 먼저 부끄러운 생각이 앞섰습니다.  그것은 저와 같이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사실상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저희 같은 사람이 먼저 비판을 받아야 하리라고 봅니다.  셋째는 이 강연을 위해서 지난 8월 대회 때의 자료를 훑어  보았는데 그때 이미 한국교회의 문제점이 심각하게 다루어졌고 거기에 대한 대안도 충분히 제시되어있기 때문에, 제가 새삼 무슨 뽀쪽한 대답을 줄 수는 없겠구나 싶어서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있는 대로 한 사건에 대해서 두 세 사람의 증인이 필요하다고 했듯이, 오늘 저의 증언이 여러분의 바른 목회실천을 위한 촉진제가 되고 도전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이 강연을 하려고 합니다.

  협의회로부터 요청 받은 내용은 칼빈신학의 전통에서 조명한 한국교회의 자화상을 비판적 시각으로 검토하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라는 광범위한 주제였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개혁주의 신학과 한국장로교회의 과거, 현재, 미래를 논하라는 말로 이해하였습니다.  오늘 저의 강연은 보다 원리적이면서 현실적 문제를 쉽게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1.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위에 세워진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한국의 장로교회는 감사하게도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제가 감사하다고 말한 이유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이 가장 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개혁주의, 또는 개혁주의신학, 개혁주의 신앙등의 말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퍽 애매하게 쓰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여러분들 중에는 교회갱신(敎會更新)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2)

2) 鄭容燮의 “敎會更新의 神學”을 위시해서 기독교계의 신문 잡지등 거의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갱신”이란 용어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정치 일각에서도 “개혁”이란 용어를 쓰고 있다.

물론 교회는 갱신되기도 해야겠지만 사실은 교회개혁(敎會改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갱신이란 말은 영어에 Renew 또는 Renewal란 말의 번역이고 개혁은 Reformed 또는 Reform에서 나왔습니다.  갱신이란 낡은 것을 비리고 새롭게 고쳐나가는 것이라면 개혁은 “말씀을 따라서 개혁하는 것”(Reformed according to the Word of God)이란 독특한 뜻을 가진 말입니다.3)

3) I. John Hesselink, On Being Reformed Distingtive Characteristics and Common Misunderstandings,(Michigan: Servant Books, 1983).P.7.

무엇이든지 새롭게만 된다면 좋다는 사고방식은 적어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그 반대일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전통적이고 옛날 것이면 다 좋다는 발상도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문제삼아야 하리라고 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의 신앙의 내용이든, 교회의 제도이든지 간에 그것이 옛것이냐 새것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진리를 따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e Semper reformanda est)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로교회라도 나라마다 교파마다 독특한 입장이 있듯이 개혁주의란 말의 의미도 참으로 다양하다는 사실입니다.  일반적으로 개혁주의란 말은 칼빈주의란 의미와 동의어로 쓰고 있습니다.  실제로 칼빈주의(Calvinism) 또는 개혁주의 신앙(Reformed Faith)은 같은 신학체계로서 종교개혁운동을 통해서 재발견된 성경중심의 신학으로서, 마틴루터(Martin Luther), 쯔윙글리(Zwingli), 부쳐(Butzer)등이 기초를 놓은 위에 제2세대 개혁자인 요한칼빈(J. Calvin)이 보다 분명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교회에 부여한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4)

4) 칼빈도 슈라이엘 마하도 개혁주의란 말을 썼으나 서로가 뜻이 다르듯이, 신학자들도 쓰는 사람에 따라서 개혁주의란 말이 천차만별이다. 예컨대 흔히들 20세기의 최대의 신학자 Karl Barth를 가리켜서 개혁주의 신학자라고 찬양한다. 이에 반해서 C. Van Til박사는 Karl Barth야 말로 개혁주의 신앙의 가장 위태로운 적수라고 했다. 또 화란 K. Schilder박사는 Karl Barth는 개혁주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자라고 했다. W.C.C. 초대 의장이였던 W. A. Visseit Hooft는 개혁주의자였다. 한편 I. C. C. C의 초대의장이던 Karl McJntire도 개혁주의자였다. 그는 일생동안 Visseit Hooft의 노선을 비판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를 말한다고 다 개혁주의도 아니고 칼빈주의를 말한다고 모두다 칼빈주의자는 아니다. Ibid. pp.7-8.

우리는 개혁주의 하면 의례히 칼빈 또는 칼빈주의를 떠올리는 것은 칼빈이야말로 가장 성경을 조직적으로 체계화하여 신학을 수립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혁주의  또는 칼빈주의 신앙을 따른다고 할 때, 칼빈을 믿는다거나 칼빈주의를 따른다는 말보다, 칼빈이 깨달았던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칼빈이 그의 모든 신학체계를 그 스스로 창안해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어거스틴(St. Augustine)의 신학을 부흥시킨 것이며, 어거스틴의 신학은 결국 사도바울의 신학의 부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개혁주의 사상의 골격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기 전에, 개혁주의 신학이 어떻게 장로교회의 신학적 기초가 되어서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잠시 살피려고 합니다.

  개혁주의란 말은 종교개혁 후기에 발전된 교파나 교회들을 가르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560년 공식적으로 개혁주의란 말이 사용되었을 때 그 말의 뜻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또는 복음적(Evangelical)이란 말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여졌습니다.  특별히 칼빈이 세운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처음에는 루터가 세운 교회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590년 이후에 개혁주의와 루터주의가 구별되었습니다.5)

5) M. Eugene Osterhaven, The Spirit of the Reformed Tradition (Grand Rapido: Eerdmans, 1970)pp.171-176.

그 후에 유럽대륙에 정착된 칼빈주의적 교회들이 모두 개혁주의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면 불란서 개혁교회(Eglise Reformed), 독일 또는 독일어를 쓰는 스위스 개혁교회(Reformierte Kirche)그리고 화란의 개혁교회(Hervormde, Gereformeerde Kerken)들입니다.  그런데 오직 스코트렌드에서만은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의 토양 위에다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장로주의(Presbyterianism)는 대륙교회가 교리적 개혁을 강조하면서 개혁교회란 명칭을 썼듯이, 요한 낙스(John Knox)를 중심한 스코트렌드 교회는 로마교황정치에 반대하여 교회정치를 개혁하여 장로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결국 개혁교회나 장로교회나 모두가 칼빈주의 사상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의 기독교강요(Institute of Christian Religion, 1536)가 발표된 후 그의 개혁의 지도로 말미암아 유럽 각 나라에 개혁주의 사상이 뿌리를 내렸고, 그 열매로서 독일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The Heiderberg Catechism,1563), 화란의 벨직 신앙고백서(The Belgic Confession of faith, 1561) 스위스의 제2헬베틱 고백서(The Second Helbetic Confession, 1566) 화란의 돌트신경(The Canon of Dort, 1619),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8)등은 모두 칼빈의 개혁주의 사상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특히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영국서 이루어졌으나, 영국사람들은 장로교회를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영국의 청교도(Puritan)들도 칼빈의 사상을 기초로 했지만 장로교회를 정착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스코트렌트교회가 장로교회를 확실히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께서 잘 아시는 대로 17세기에 찬란하게 꽃피웠던 칼빈주의 곧 개혁주의 사상은 로마카토릭의 반동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에 의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핍박과 박해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극심한 환리 란과 박해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개혁주의 신앙을 버리고 로마카톨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와중에 남부 불란서에서 신앙을 지키던 휴그노파(Hugnote)성도들과 헝가리 개혁교회 성도들이 로마카톨릭 성도들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카톨릭 성도들은 이 두 개혁교회 성도들을 핍박하면서 욕설로서 “너희들은 칼빈 도당이다” 또는 “너희들은 칼빈주의자들이다”라고 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로부터 칼빈주의 또는 칼빈주의자란 말이 생겼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칼빈의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자를 칼빈주의자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구라파에 불어닥친 박해로 말미암아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고져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던 중에 영국의 청교도들이 162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고, 1628년에 화란 개혁교회 성도들이 미국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갔습니다.  이어서 독일개혁교회 성도들과 불란서의 휴그노파 성도들, 그리고 맨 나중에 스코트렌드 장로교회의 성도들은 1700년대를 전후해서 각각 미국 대륙으로 건너와서 신앙의 자유를 만끽하면서 미국을 개척했습니다.  물론 미국으로 건너온 이 개혁주의 성도들은 신앙과 삶의 방식은 여전히 모국의 것을 그대로 옮겨온 것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나 일세기가 못 가서 18세기에는 계몽주의 사상이 구라파와 미국을 휩쓰는 바람에, 영국의 청교도, 불란서 휴그노파 성도들, 스위스 독일개혁교회 성도들은 진작 자유주의 신앙으로 돌아서 버렸습니다.  특히 영국의 청교도들은 장로교회를 세우지 못하고 회중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본래의 칼빈의 신학과 신앙대로 따르려고 했던 교회는 스코트렌드 장로교회가 세운 미국의 장로교회와 화란의 개혁교회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들의 신앙도 약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런데 19세기 초에 구라파에서 스코트렌드 장로교 성도들과 화란개혁 교회 성도들 그리고 헝가리 개혁교회 성도들이 대거 이민 옴으로 말미암아 신앙의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때를 같이 하여 영국, 화란, 독일, 스위스 등에도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부흥운동이 있었고 이것이 미국에도 영양을 미쳤습니다.  다시 새 힘을 얻고 선교의 불이 붙은 화란개혁교회와 미국 남?북 장로교회중에 북장로교회의 선 교부 총무인 브라운(Dr. Brown)박사의 주도 하에 알렌과 언더우드, 마포삼열박사등을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하였으니 이것이 한국 장로교회가 이 땅에 뿌리내리게된 내력입니다.  제네바에서 시작된 개혁주의 사상이 스코트렌드의 요한낙스에 의해서 100년 동안 장로교회로 만들어지고 다시 미국에서 200년 동안 뿌리를 내리며 성장하다가 마침내 한국에 옮겨 심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10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는 위에서 개혁주의 사상의 태동에서부터 어떻게 장로교회가 형성되어서 한국까지 왔는가를 역사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간단히 말해보겠습니다.  개혁주의라고 할 때 앞서 말씀드린 대로 루터주의와는 달리 칼빈과 그의 후계자들의 신학과 신앙을 총체적으로 말할 때 사용합니다.  그래서 앞서 말 한대로 칼빈주의 신학 또는 칼빈신학이란 말로 서로 바꾸어 쓰기도 합니다.  그래서 칼빈의 신학적 교리들은 어거스틴 교리의 부흥이며, 어거스틴의 교리는 곧 사도바울의 교리의 부흥이었습니다. 칼빈은 바울과 어거스틴의 교리들을 조직적으로 현대를 위하여 표현한 첫 번의 사람이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에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이 그 본질적인 면에서는 개혁되었으나, 교회생활의 전면에서나 신앙의 모든 면에서 개혁이 미흡하였습니다.  그러나 칼빈에게 있어서는 좀더 철저하고 전체적인 개혁을 수립했습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앙이라고 할 때 그 말이 가지는 의미는 「완전히 개혁된 신앙」「전면적 개혁」또는 「총체적 신학 활동」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좀더 설명을 드리면, 종교개혁때 루터를 비롯해서, 여러 개혁자들의 모토 가운데는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의 기본적인 골격을 강조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이므로 칼빈이나 칼빈주의자들은 백퍼센트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의 관심은 그러한 기본적 교리를 관통하는 바탕이 무엇이며, 그런 기본적 내용을 주관하는 특징적인 기본원리가 무엇인가를 묻게 됩니다.  개혁주의는 어떤 교리, 어떤 진리이든지 간에 그 바닥에 흐르는 유기적이고 통일된 사상 체계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학만큼 밝고 명쾌한 교리체계가 없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갖지 못한 교회들은 몇 가지 기본적인 신앙의 골격을 강조하다가 균형을 잃어버리거나 결국 자율주의사상(自律主義思想)에 빠지고 말게 됩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유기적이고 통일된 사상체계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종교개혁시대부터 칼빈의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에다 초점을 둠으로서 다른 신학과 구별하였습니다.

  개혁신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쯔윙글리는 하나님의 의지를 신학의 중심사상으로 함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 후 쯔윙글리가 죽은 후 개혁주의 신학을 대성(大成)한 칼빈에게 하나님의 주권이 기본원리로 됨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개혁주의 신학의 골격이 예정론(豫定論)이라고 말해 분들이 있으나 실제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결과에서 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만유와 만사의 근원이 됩니다.  결국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다 세계와 인간과 우주를 보고저 하였습니다.6)

6) Institute Ⅲ.23.2., Ⅰ.6.8.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또한 구속 주이시며, 창조하신 만물을 다스리시며 섭리하시며 간섭하는 하나님이십니다.7)

7) Institute Ⅰ.16.2., Ⅰ.18:1, Ⅰ.17.5, Ⅱ.2.5.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에 밝히 드러난 대로 창조, 타락, 구속(救贖)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의 형상 (Imago Dei)대로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타락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 구속(救贖)받을 수 없음을 아시고 하나님의 단독사역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이 웅장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가슴은 감동과 확신으로 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사상 또는 하나님사상은 루터주의나 알미니안주의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져주시는 은총을 확신케 하여 줍니다.  예컨대 루터는 로마서 1:17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에서 “오직 믿음”(Sola Fide)의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오히려“오직 믿음”의 근거가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개혁주의는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할 이유를 로마서 11:36에서 찾습니다.  거기서 말씀하시기를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서 세세에 있으로다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만유와 만사의 근원이시며, 결국 하나님이 만유를 섭리하시며, 그가 홀로 구속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은 그에게만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Sola Fide)도, 오직 은혜(Sola Gratia)도, 오직 성경(Sola Scriptura)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살아야 하며,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혁주의는 교리적 구조에다 경건(敬虔)이란 살이 붙어서 생명의 약동을 하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냉냉한 교리적 조립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우주적인 하나님 앞에서 삶 전체(Totality of life)를 하나님께 동시에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신전의식(神前意識)이 모든 신학체계를 관통할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교회성장과 선교의 근거가 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저는 위에서 장로교회의 신학인 개혁주의 신학의 흐름과 핵심적인 특징들을 한 두 가지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가진 교회라고 할지라도 사분 오열되어 점점 교회의 색깔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신학은 인본주의(人本主義, Humanism)와 세속주의(世俗主義, Securalism)의 영향으로 심하게 오염되었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신학적 큰 흐름은 에큐메니칼신학입니다.  에큐메니칼신학의 핵심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신학입니다.  하나님의 선교라는 말은 좋지만 실제의 내용은 하나님보다는 인간성의 회복과 인권회복에 그 핵심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Text)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문제삼기보다 정황(Context)이 어떤가를 관심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정화야 신학함의 틀로 삼기 때문에 신학과 목회와 선교 모두를 종교현상학적으로, 문화인류학적으로, 또는  사회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의 교회는 생명 없는 미이라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장로교회가 자기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 무오의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붙들어야만 합니다.  그 말씀만이 신학과 신앙과 삶의 표준이 되는 줄 믿습니다.  많은 분들이 주장하기를 신학은 폭넓게 다 섭렵하고 자유주의적인 신학을 수용하면서, 개인의 신앙생활과 목회는 어디까지나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방향으로 하겠다고 합니다.  얼핏 들으면 굉장히 이상적인 말 같지만 그것은 가장 비논리적이요 비합리적입니다.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의 토양 위에다 종교현상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만들어낸 신학의 원리를 갖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깨닫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넌 센스 입니다.  우리는 사도적 신앙과 개혁자들이 눈물과 땀과 피를 바쳐 지켜온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라는데 까지 가고 하나님의 말씀이 멈추라는데 멈추는 하나님의 말씀중심의 신앙을 굳게 잡고, 천지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만드시며, 죄인들을 그리스도안에서 구속하시며, 역사의 열쇠를 잡으시고 만물을 다스리며 간섭하시는 그 하나님의 면전에 서서 이 시대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교회는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끊임없이 새로워지며 이 시대의 선교적 사명을 위해서 책임을 다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있어야 합니다.


  2. 한국 장로교회와 오늘의 현주소


  존경하는 동역자 여러분!

  저는 앞에서 장로교신학의 근본인 개혁주의  신학의 흐름과 특징을 잠깐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변하고 있는 신학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도대체 한국의 장로교회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으며 또 우리들의 자화상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교회는 지금 장로교회입니까? 우리교회는 참으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틀 위에 서 있는 것입니까? 정직하게 말하자면 오늘의 장로교회는 그 특성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장로교회에 가봐도 순복음 교회 같고, 감리교회도 장로교회 같고, 성결교회도 순복음 교회 같습니다.  설교의 내용도 예배의 방법도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우리는 다른 교파나 교회들이 다 틀렸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정말 우리의 모습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화상을 똑바로 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개혁을 위해서나 앞으로의 방향의 가닥을 잡는데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1984년 한국교회 선교백주년을 전후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10여 년간 한국교회의 모든 언론매체들은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심도 있게 다루었습니다.  모든 교계 신문들과 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보면 한결같이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매섭게 꼬집고 비판적 화살을 쏘았습니다.  또 그런 현실 비판적인 안목을 가질수록 기독교적 지성인의 대열에 끼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온갖 문제들이 해부되고 고발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고발과 비판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몇 가지로 크게 대별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의 물량주의에 대한 자기 반성입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를 지적할 때마다 교역자나 평신도나 할 것 없이 교회의 물량주의를 개탄하거나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목회자치고 교회의 숫자적 성장과 외형적 발전을 원하지 않는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는 물량주의를 목회와 삶의 목표로 삼을 때, 물량을 표준으로 해서 가치기준을 삼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비인간화가 일어나고, 성경적 진리가 물신주의(物神主義)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물량주의는 교회가 무슨 수단과 방법을 쓰든지 부흥만 된다는 생각을 만들게 했습니다.  목표가 정당하면 수단을 어떻게 해도 좋다는 논리는 반 기독교적 일뿐 아니라 비성경적 사고 방식이므로 사실은 기독교신앙의 가장 경계해야 할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물량주의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다 그럴만한 자극적 요소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은 1960년대 제3공화국의 경제개발 정책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당시의 지도자들은 우리들에게 5천년의 가난의 때를 벗고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그것은 잠자는 민족의 눈을 뜨게 하고 자포자기하던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안되면 되게 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무슨 수단을 사용하든 간에 좋다는 논리가 먹혀들고 물질, 곧 돈이면 안될 것이 없다는 생각들이 사회전반에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여기서부터 매우 현세적이고 물량주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강단의 메시지도 이 땅위에서 축복 받아 잘먹고 잘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메시지는 국민적 공감대와 딱 맞아 떨어져 교회의 숫자적 부흥의 신기원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복음입니까? 청중들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것은 차라리 목사가 하는 것보다 배우들이 더 잘할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피묻은 복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사도바울의 메시지는 들을 길이 없어 졌습니다.  결국 오늘의 교회의 문제는 변화하는 세상에 들러리를 서다가 자기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교회가 물량주의에서 허우적거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물량주의가 된 데는 서양의 신학적 영향도 크다고 봅니다.  특히 도날드 멕가브란(Donald A. McGavran)의 교회성장의 신학(Theology of Church growth)은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영향을 동시에 주었습니다.  긍정적인 영향이라 함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교회부흥과 성장의 열심을 불러일으키고 서로 경쟁적으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교회성장에 사력을 도해서 실제로 많은 부흥을 일으킨 점입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요소도 많습니다.  이른바 거룩한 실용주의(Consecrated Progmatism)가 보편화되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게 되었고 적극적 사고방식(ositive thinking)만 가지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사상이 팽배해졌습니다.  한편 벨까일(Johannes Verkuyl)박사의 지적처럼 교회성장학파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사이의 관계성이 모호하고 그들의 논리로 볼 때 큰 교회만이 교회이고 작은 교회는 마치 교회 축에도 못 드는 듯한 인식들이 늘어났습니다. 이런 대내외적인 요인들이 한국교회의 물량주의를 부채질하게 되었고, 이런 것들이 우리가 뛰어넘어야 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는 교회성장에 걸 맞는 교회의 성숙이 부족하다는 반성입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를 거론하는 사람마다 교회의 물량적이고 외형적인 발전에 버금가는 교회의 자기성숙이 부족하다는 말을 합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교회성장과 교회의 성숙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의 모델은 될 수 있어도 교회성숙의 모델은 될 수 없습니다.8)

8) J. Verkuyl, Imleiding in de Nieuwere Zendings-Werenschap,  (Kampen : J. H. Kok, 1957) p. 47.

다시 말씀드리면 한국교회는 성장과 성숙사이의 불균형의 문제가 앞으로 해결 되어야할 과제입니다.  즉 교인의 숫자는 늘어났으면서도 성경의 진리를 아는 일이라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가며,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가가 아직도 미숙한 자리에 놓여있습니다.  따라서 지나친 성장주도형의 목회방법이 가져온 문제점은 퍽 많습니다.  따라서 지나친 성장주도형의 목회방법이 가져온 문제점은 퍽 많습니다.  목회의 유익을 위한다고 어떤 방법이나 수단을 동원해도 좋다는 사고방식이 신학적인 자기 정리가 없이 무차별 침투해 버렸습니다.

  셋째는 사회악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기독교계의 신문이나 잡지들이 한국교회의 목회현실을 비판할 때마다, 그동안 교회는 개교회의 부흥과 성장에만 치우친 나머지 사회의 여러 분야에 대한 구조 악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버렸다는 지적들입니다.  그래서 심심찮게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를 놓고 열띤 논쟁도 벌여왔습니다.  사실 한국교회의 목회와 강단의 현실은 양극화 현상을 빚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사회의 구조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정치적 투쟁을 사회참여 방식으로 택하고 있습니다.  그에서 다른 쪽은 사회복음(Social gospel)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천국 복음만을 증거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서로가 논쟁을 한다는 자체가 개혁주의 사상을 모르는데서 나온 것입니다.  개혁주의 사상 곧 칼빈주의에서는 벌써 해결된 문제를 가지고 이것이냐 저것이냐?(this or that)를 따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혁주의사상을 이것과 저것(this and that))을 함께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主권)을 중심한 신학체계입니다.  창조주이시며 구속 주이신 하나님의 우주적이고 인격적인 존재 앞에는 세상의 그 무엇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영역에든지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Souvereigaiteit der Eigen Kring)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은 개인적인 동시에 우주적입니다. 

  넷째의 반성은 한국교회의 윤리적 타락, 탈현서적, 기복주의적 신앙의 형태에 대한 반성입니다.  사실 아니게 아니라 한국교회의 목회의 현장은 성장 드라이브형의 목회였기에 여러 가지 부정적인 요인도 배태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들도 사실 엄밀히 따져보면 목회자의 자질문제와 관련됩니다.  또 목회자가 어떤 형태의 목회이냐가 문제입니다.  한국에서 성장하는 교회는 모두 다 특색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대중집회를 통한 부흥운동, 어떤 교회는 성경공부를 통한 제자훈련이라던지, 영성개발을 통한 영성 운동 등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는 성도들의 자기중심적 이기주의 신앙을 충족시켜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어느 복음성가 표지를 보았더니 영어로「God is for me」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한 분이라는 것이겠지요.  이것이 한국교회의 목회의 철학이요 신앙의   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개혁주의자들의 목회철학과 신앙의 내용은「Iam for God」또는「We are for God」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인간 중심적인 목회에서 하나님 중심의 목회로 되돌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저는 위에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정리하면서 약간 나름대로 평가를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은 최근 수년동안 이런 류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귀가 아프도록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한국교회의 문제들도 따지고 보면 모두가 신학적인 문제이고 사상적인 문제로 귀결되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 장로교회와 목회자들이 진정으로 개혁되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가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제부터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과 신앙에 영향을 끼친 것이 무엇인가부터 말해야 겠습니다.

  우선 인본주의(人本主義, Humanism)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일찍이 벨카워 박사(G. C. Berkouwer)는 1947년 그의 한 연설문에서 20세기의 최대의 문제는 인본주의와 세속주의 문제라고 말했습니다.9)

9) G. C. Berkouwer, Calvinism in times of Crisis, (Grand Rapids:Baker Books, 1947), p. 73

그리고 최근에 카나 다의 역사신학 교수인 프람스마 박사(L. Praamsma)는 세속주의 무신론사상, 진화론과 혁명적 행동주의가 우리시대의 정신적 특징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상들의 바닥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것은 바로 인본주의 사상체계라고 말했습니다.10)

10) L. Praamsma, De Kerk Van Alle Tijchen, p. 264

확실히 현대교회가 아니 한국장로교회가 이 인본주의 사상체계에 대한 확실한 대응이 없이는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신학도 신앙도 인본주의 사상으로 물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상스런 것은 우리의 신학과 신앙세계에 독버섯처럼 퍼지고 있는 인본주의 사상에 대해서 아무리 말해도 문제의 심각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교육학자들이 호의적으로 받아왔기에 인본주의란 말에 대해서 별로 거부감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또 복음주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까지도 인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해서 신학이나 기독교 교육을 세워왔기 때문에 한번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인본주의 사상은 신학은 말할 것도 없고, 철학, 문학, 교육, 청치, 경제 등 삶의 전 영역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저는 특히 인본주의가 신학에 얼마나 깊이 침투하였는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본주의 사상의 아들들인 세속주의, 무신론주의, 진화론 사상을 신학함의 틀로 받아 드린 많은 신학자들은 개혁주의의, “창조”, “타락”, “구속”의 질서를 “생성”, “투쟁”, “해방”이란 다른 질서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인본주의는 인간의 타락 후부터 있어왔습니다만. 실제로는 몇몇 인본주의 학자들의 사상이 현대신학사상에 깊이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선 유대인 철학자로서 독일과 미국 등지에서 활동하던 블로흐(E. Bloch)를 들 수 있습니다.  블로흐는 정통 맑스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이른바 그는 신맑스주의자(Neo-Marxism)였습니다.  그는 무신론 였습니다만 그의 무신론적 인본주의사상의 이론체계를 정립하는데 신구약 성경을 사용한 것이 독특합니다.

  물론 불로흐는 토마쓰 뮨쳐(Thomas Munzer)나 포이엘바하(L. Feuerbach)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몰트만(Moltmann)이 말한 대로 한 손에 성경을 가진 맑스주의자 였습니다.  블로흐의 주장을 보면 이렇습니다.  천국은 텅텅 비어 있고 인간이 바로 신(神)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은 자유이며 인간 스스로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성경의 여러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으로부터 해방과 혁명의 사상을 찾아내었고, 예수는 바로 혁명가였고 혁명의 설교를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것은 블로흐의 사상을 단편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본주의 사상을 바탕에 깐 사이비 기독교인 블로흐는 전 세계 기독교 사상과 신학에 쓴 뿌리를 내렸습니다.  가령 최근 한국교회에서 말하는 민중신학이란 것도 순수한 한국적인 신학이라고 우기지만 실베로는 블로흐의 사상적인 틀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또 인본주의 사상이 기독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가운데는 독일출신 마르쿠제(H. Marcuse)를 들 수 있습니다.  그를 가르쳐서 학생 저항운동의 아버지, 현 사회를 철저하게 반대한 무리의 선지자 및 제사장이란 별난 칭호로 불렀습니다.  그는 특히 젊은이들이 혁명과 무정부 활동의 수단으로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주장하기를 대중들에게 기대를 갖지 말고 젊은 엘리트 학생들이 혁명적 열기를 가지고 선두에 설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한을 가진 실업자와 낙제생 특히 젊은 학생들의 혁명적 열기를 가지고 얼마든지 이상적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낙관주의자이며 철저한 인본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위의 두 사람의 사상은 오늘의 전 세계 걸출한 신학대가들의 신학이론에서 발전되었다는 기막힌 사실입니다.  이들의 사상들은 하나같이 인본주의란 온실에서 피어난 꽃들이란 사실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화란의 선교신학자 빌까일(J. Verkuy)박사의 지적처럼 우리는 지금 제2의 계몽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최근 30년을 전후해서 온 세계는 18세기와 19세기에 찬란하게 꽃피었던 인간의 자율주의(自律主義, Autonomous)와 합리주의 사상을 우상화하였던 계몽주의 사상이 부흥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바로 이 계몽주의 사상도 인본주의 사상입니다.  어떤 분은 인본주의가 무엇이 문제인가하고 항변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에 있어서 인본주의는 하나의 종교입니다.  인본주의는 거대한 종교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종교인구를 가진 것이 인본주의입니다.  인본주의는 기성종교에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모든 영역이 자율주의적인 인간을 왕의 자리에 세우고 발전시켜가고 있습니다.  1961년 미국의 연방 대법원은 한 판결문에서 인본주의를 하나의 종교로 인정했습니다.  1933년에는 인본주의 선언이 채택되었고 1973년 제2선언문이 채택되었습니다.  1933년 첫 번 선언문의 기초자료 서명자는 당시 인본주의 총 연합회 회장으로 있던 죤 듀이(John Dewey)였습니다.  어쨌든 하나의 종교로서의 인본주의는 15개항의 교리로 되었습니다.  거기서 인본주의는 진화론적 해석, 과학적 해석방법, 상대주의, 난간의 타고난 선(善)과 완전성을 믿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동역자 여러분!

  저는 한국교회의 자화상을 설명하다가 말고 좀 장황하게 인본주의의 문제점과 인본주의사상의 활동상황을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갖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적수가 되는 사상은 바로 인본주의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인본주의 사상은 우리의 신학교에서, 교회의 강단에서, 교육의 현장에서 성도들의 구체적인 삶에서 절대적인 사상체계로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이라고 모두가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성경을 연구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시각에서 보는가가 문제입니다.  인본주의 시각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논리를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인간의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상체계를 만들뿐입니다.  오늘 한국교회 목양의 문제점들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고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이 동원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서 강단의 세속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교회들의 강단은 하나님의 주권자 영광을 위한 위대한 선표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져 주시는 은총의 복음의 선포되는 대신 율법주의적인 도덕강연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개혁주의 목사들은 강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다시 되돌려 드려야 하리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왕권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뿐만 아니라 그의 만드신 모든 피조물과 모든 삶의 영역에 역사 하도록 뜨겁게 우리의 가슴을 불태우며 하나님께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양의 현장에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이래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것을 고치는 것을 개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가 인본주의 사상을 극복하고 신본주의적 신학과 신앙에로 돌아가야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장로교회의 비뚤어진 자화상도 다지고 보면 인본주의와 세속주의를 용납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앞으로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의 침투를 얼마나 뼈아프게 깨달으면서 참으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체계에 굳게 서는가가 오늘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3. 장로교회의 개혁과 그 대안


  존경하는 교회의 지도자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한국장로교의 금후의 나아갈 길에 대해서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이미 앞에서 장로교회의 역사적 흐름과 사상적 핵심을 말씀드렸고, 오늘의 교회의 해결해야 할 과제와 인본주의와 세속주의를 어떻게 막아 낼 것인가가 우리의 과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는 앞으로 우리교회가 당장 개혁되어야 할 문제를 몇 가지 제시해 보겠습니다.  그에 앞서서 한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미래의 교회와 세상은 점점 더 좋아 질 것이라는 낙관주의를 문제삼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물량적인 것이 충족되면 자연히 이 세상에 유토피아가 올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덩달아 이 세상에서 물질적 축복 받고 잘사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설교하고 노래하는 것은 모두가 낙관주의 사상입니다.  사실 물질이 많아지고 좋은 제도가 만들어지면 유토피아가 올 것이란 것은 인간의 죄를 보지 못한데서 나온 것입니다. 일찌기 공학자이면서 칼빈주의 철학자인 봔리센(H. Van Rissen)박사는 벌써 40년 전에 그의 걸작인 “미래의 사회”(De Maatschappeij der Toekomst)란 책에서 낙관주의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주장하기를 기술과 산업이 발전되는 것으로 인간이 변화되거나 행복이 오는 것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복음이라야 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제가 이 말을 꺼내는 것은 우리 교회의 개혁은 총회에서 제도적 개선을 하고, 뜻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오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이상적인 대안을 제시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낙관주의 사상이란 것입니다.  물론 그런 노력도 있어야겠지만 결국 교회의 지도자들인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통회하는 회개운동을 통해서 진정한 개혁은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왕권을 세워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전제를 바탕에 깔면서 우리 장로교회의 당면한 개혁의 과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신학교육의 개혁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흔히들 한국교회의 개혁을 말할 때, 기복신앙의 문제라느니, 물량주의가 문제라느니, 샤머니즘적 요소를 배제해야한다는 등 가시적이고 지엽적인 것을 주로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신학교육이 옳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교역자가 교역자다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신학교육이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고 할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한국교회의 신학교육은 내용과 질(質)에 있어야 부끄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왔음으로 많은 교역자가 필요했고 소명(召命)이 없는 급조된 직업 교역자가 양상 됨으로서, 교회는 점점 세속화되고 타락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적인 기독교에서 의식적인 기독교로 바뀌어졌습니다.  흡사 오늘날의 우리 장로교회의 모습은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걷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토록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가운데 부흥하고 성장하게 된 것을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를 구실로 해서 한없이 제멋대로 분리 분열되는 장로교회모습, 제마다 신학교를 만들어서 교역자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하기는 오늘 날 세계교회가 신학생들의 숫자가 감소하고 있는 추세에 있는데 유독히 한국에서만이 신학생과 신학교가 많아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십여 개의 정규신학대학 말고도 300여 개의 군소 신학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앞으로 남북통일이 되거나 중공에 전도의 문이 열리면 거기서 일할 수 있고 해외선교사로 파송할 수 있다고 강변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신학교육의 저질이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을 가져온 것이 명백합니다.  저는 반드시 이른바 군소 신학교니 무인가 신학교를 문제삼으려는 것이 아니고 神學이 없는( 神學 )을 문제삼으려고 합니다.  장로교회의 개혁주의 신학을 옳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신학교육을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뿐 아니라 목회현장에서 일어나는 실제(Praxis)를 마치 신학인 것처럼 우기는 일과 자기의 경험이 바로 성경인 듯이 말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교회가 세속화하고 타락하는데는 기본적인 공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모델(model)이 전통(Tradition)으로 만들어지고 이 전통이 오래되면 그것이 하나의 교리(Dogma)가 되어버립니다.  잘못된 모델이 전통이 되어 굳어지고 그것이 보편 타당한 교리가 될 때 교회는 성격에서 멀어지고 세속화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개의 신학교들이 신학적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 가르치고 있는 데다, 전혀 신학적 훈련을 받들만한 준비가 안된 사람들을 무책임하게 교역자를 양성해 내고 있습니다.  더욱이 못할 사실은 신학교를 정신수양 하는 곳 인줄 아는 사람도 있고 신학교를 학력 보충하는 데로 아는 사람도 있고, 평생교육차원의 신앙연장 교육쯤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신학교를 취미로 다니는 사람도 많습니다. 얼른 보기는 신학교가 많아서 좋고 신학생 많아서 좋은 듯 하지만, 바른 신학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한세대가 지난 후 한국교회는 겉잡을 수 없는 혼란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신앙과 경건이 결여된 신학교도 문제입니다.  우리 장로교단의 신학교의 교육지표가 경건과 학문의 조화를 부르짖고 있으나 이전에는 경건의 모양이라도 있었으나 이전에는 경건의 모양이라도 있었으나 실제로 최근의 경향은, 경건의 모양마저 없어져 가는 딱한 실정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칼빈은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우고 이 학교가 경건과 학문이 있는 학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경건이란 바로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의 삶입니다.  이런 신본주의적인 삶의 원리가 세워지니 수에 신학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신학이 단순히 이론에 그치는 학문이면 무용지물입니다.  신학은 언제나 교회의 현장과 목회의 현장을 감독하고 이끌어 가는 원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서 말 한대로 신학 없는 신앙(Geloof zonder Theologie)이나 신앙 없는 신학(Theologie zonder geloof)모두가 문제입니다.  결국 한국교회의 개혁의 현장은 신학교이어야 합니다.  신학지원자들이 철저한 소명(召命)없이 직업주의, 출세지향주의, 영웅주의, 인본주의 사상을 가진 체 신학교 교문을 나서는 것을 철저히 봉쇄해야 합니다.  신학이 없이 영웅주의 적이고 기업적으로 운영되는 신학교들은 하나님 앞에 양심에 따라서 결단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경건을 잃어버린 오늘의 모든 신학대학들은 교수와 학생 모두가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앞에서 살아가려는 애타는 몸부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신학교육의 정성화가 곧 바로 교회가 교회 되는 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개혁주의 신학도 수립하지 못하고 신학교 안에 인본주의적 자유주의가 들어오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경건마저 상실되어진다면 차라리 장로교회이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신학교가 바로 되어야 교회가 바로 됩니다.  우리는 평신도들의 사업주의, 기복신앙, 샤머니즘적 경향을 비판하고 나무라기 전에, 결국 교회의 개혁은 교역자에게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그래서 신학교가 바른 개혁주의 정신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수원지의 물이 깨끗해야 수돗물이 깨끗한 것처럼, 바른 개혁주의 신앙과 경건한 삶을 지닌 교역자를 배출해야 한국장로교회는 개혁도 되며 또한 갱신도 될 줄 믿습니다.

  둘째로 우리 장로교회의 개혁을 위한 대안으로서 현재 목회하고 계시는 목사님들이 강단을 개혁하는 일입니다.  우리자신부터 개혁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늘 상하고 있는 설교를 개혁하는 일입니다.  종교개혁은 중세 교회의 타락과 부패를 개혁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부패와 타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참된 의미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재발견이며, 강단의 재발견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개혁 운동도 하나님의 말씀대로의 설교를 통해서 되어집니다.  제가 한국장로교회를 개혁하려면 설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할 때 여러분들께서 이 말을 상식적인 의미로 생가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씀인가하면 우리의 신학이 개혁주의 신학을 견지한다면 우리의 강단의 설교도 개혁주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학은 칼빈을 말하는데 설교의 방법과 내용은 불트만적이요, 몰트만적이요, 바르트적이라는데 오늘의 문제가  있습니다.  최근의 설교학자 리스쳐 (Richard Lischer)말하기를 “설교는 신학의 최종 표현이다” (Preaching is the final expression‎!! of Theology)라고 했습니다.11)

11) R. Lischer, A Theology of Preaching, The Dynamics of the gospel, (Nashville; Abinfdon)홍성훈역 P. 27

개혁주의 신학을 말하면서 설교는 슈라이엘마하적인 방법으로 설교한다면 그의 신학이해는 이미 개혁주의가 아니라 슈라이엘마하적입니다.

  신학은 속일수가 있어도 설교는 속일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 설교자의 신앙고백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을 밝히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위대한 사역을 맡겼습니다.  그러므로 다우마 (J. Douma)목사의 지적같이 “설교없이는 구원 없다.”(zonder Prediking Geen Heil)라는 말은 옳습니다.12)

12) Johannes Calvijn, Precken, Het Gepredikte Woord Vertaald door DS. J. Douma en W. H. V. D. Vegt Deel I (Franeker: T. Wever, 195) P.3

그리고 설교는 성경을 읽고 그저 느끼는 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일찍이 칼빈이나 아브라함 카이퍼(A. Kuyer)등이 말한 대로 “설교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만나도록 해주는 것”(Prdeiking is Ontmoeting met God en zijn volk)이어야 합니다.13)

13) A. Kuyper, Encyclapaedie der Heilige Godgeleerdheid Deel Drie (Amstdrdam, 1894) p. 488

그런데 문제는 모두들 성경적인 설교를 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톰슨(William D. Thompson)교수의 말처럼 이 세상에 아무도 자기설교가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14)

14 W. D. Thompson, Preaching Biblically (Nashville:Abingdon, 1981). P.9

그러므로 설교에는 성경 관이 문제가 되고 신학 하는 방법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어떤 설교신학(Theologia Homiletica)을 갖는가에 따라서 설교도 결국은 신학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설교를 개혁하고 강단을 개혁한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저는 감히 여러분들에게, 지금까지의 예증적 설교 (Examplary Preaching)나 풍유적 설교 (Allegorical Preaching)를 가지고서는 장로교회의 개혁주의적인 설교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요즈음 한참 유행하는 강해 설교도 대단히 중요하고 추천할 만한 방법이지만 이것도 어떤 성경관과 어떤 신학적인 입장이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 질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풍유적설교의 대가인 오리겐(Origen)도 사실 따지고 보면 강해 설교가 였습니다.  그는 강해 설교자였으면서도 성경계시의 통일성과 단일성을 보지 못하고 성경에 나타난 모든 사건 사물들을 현상적으로 분류해서 거기서 자기 나름대로 뜻을 부여하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이런 형식은 오늘날 우리목사님들이 늘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이는 장로교회의 설교 또는 개혁주의 설교라고 하기는 곤란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여러분들에게 구속사적 강해 설교(救贖史的 講解設敎:Redemptive Historical Ezpository Prdaching)의 방법을 제안하고자 합니다.15)

15)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拙著, 改革主義 設敎學 救賣史的 講解 設敎를 中心으로-(총신대 출판부, 1991). 제 8장과 제 9장을 참고할 것


  저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모든 설교방법중에 강해 설교가 가장 안전하고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해 설교도 그가 가진 성경관과 신학적 입장에 따라서 얼마든지 비성경적이 될 수도 있고 인본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설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약점을 보완하고 개혁주의적인 입장대로 설교하려면 구속사적인 강해 설교 밖에 없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어찌 보면 이 말을 처음 듣는 분들에게는 대단히 낯설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설교는 최근의 발명품도 아니고 창작품도 아닙니다.  그것은 은 바로 예수님의 설교 방법이며, 사도들의 설교방법이며 16세기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의 설교방법이며, 금세기 신실한 개혁주의자들의 설교방법이란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사이를 구별해버리는 사람은 실존적인 설교는 할 수 있어도 구속사적인 설교를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강단은 거의 대개가 예증적 설교 곧 모형적 설교에 익숙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2000년 기독교역사중에 참으로 성경적인 신학 광을 발하다가 약 1200년 동안 로마 카톨릭의 의식적인 종교의 그늘에 묻혀 있다가 16세기에 개혁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거져주시는 은총의 진리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일세기가 못 가서 계몽주의의 화를 입고 대부분의 교회가 자유주의로 기울어졌습니다.  그러다 금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한번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 여기저기 일어났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신학적 정립도 옳게 안된 마당에 개혁주의적 설교인들 정립되었겠습니까? 그런데 교회가 참으로 교회 되기 위해서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증거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증적 설교나 풍유적 설교를 가지고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증적 설교는 성경에 나타난 인물의 성격이나 신앙의 내용을 모델로 해서 우리의 신앙의 원리를 발견하며 그것으로부터 어떤 깊은 진리를 발견하려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신앙의 모범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단편적 파편으로 성경의 모든 인물이나 사건을 실존적으로 종교 현상학적 심리학적으로 분석해서 어떤 귀한 교훈을 발견해 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성경을 성경대로 보는 태도가 아닙니다.  이런 방법은 마치 역사서나 문학작품에서 어떤 귀한 교훈을 얻으려는 태도와 비슷합니다.  이런 방식은 하나님의 구속 사를 일반역사로 바꾸어버리는 위험이 있습니다.  예컨대 아브라함을 주제로 설교하면서 아브라함 링컨의 예를 들어서 그것과 동일시하는데 태도입니다.  오늘날 우리 장로교회의 교역자들이 여기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설교함에 있어서 자기 주관과 자기 마음대로 설교하기에 교회의 혼란과 세속화가 왔습니다.

  구속사적 설교란 하나님 중심의 설교를 의미합니다.  예증적 설교가 성경에 나타난 인물이나 사물의 성격을 통해서 교훈을 얻고자 하는데 반해서, 구속사적 설교란 반대로 성경에 나타난 모든 역사적 인물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도구로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윗의 위대한 신앙의 어떻했는가를 묻는 것 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하시고저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먼저 묻습니다.  다니엘의 신앙이 이러이러한 점이 위대했으니 우리도 다니엘 같은 신앙을 가져야 된다는 식의 설교가 아니라 다니엘로 하여금 다니엘 되게 하시며 그러한 신앙을 지키도록 역사 하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그의 구속을 소리 높이 외치는 것이 구속사적 설교입니다.  모세의 신앙의 위대함과 그의 신발과 지팡이에서 교훈의 의미를 찾기 전에 모세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구속의 행위(Almighty acts of God)를 볼줄아는 시선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므로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풍랑을 잠잠케하신 예수그리스도는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구속주 하나님이신 것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속사적 설교는 성경 신학적인 설교이며 은총의 설교입니다.  구속사적 설교자는 성경은 단순히 교훈의 책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생들을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단독사역의 기록이란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설교자의 가슴은 언제나 확신으로 뛰고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게 됩니다.  구속사적 설교자의 가슴은 언제나 확신으로 뛰고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게 됩니다.  구속사적 설교는 성경을 점(點)으로 보지 않고 선(線)으로 보고져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구체적 역사 속에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시고 메시야가 오실 것을 선지자들을 통해서 수도 없이 말씀하시고 그들의 구체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구속주 하나님으로 계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메시야가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구속을 완성했습니다.  이 웅장한 메시지를 정거할 수 있는 설교는 구속사적 강해 설교 밖에는 달리 없습니다.  교역자들이 먼저 개혁해야겠고 그것은 곧 설교의 개혁이란 것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이제 결론을 내려야겠습니다.

  존경하는 선후배 동역자 여러분!

  저는 장시간동안 우리 장로교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주신 이 위대한 은혜와 축복을 잘 감당하고 오래 지속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대로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 모든 뜻있는 교역자들과 평신도들의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한국교회가 오늘날처럼 평온한 가운데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한때는 최근 수십 년 간뿐이었습니다.  그전에는 모진 환란과 핍박 가운데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환란과 핍박 중에서 신앙생활을 하기도 어렵지만 평안하고 부흥할 때 바른 신앙을 지키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늘 부패하기 쉽고,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쨌던 장로교회의 목사입니다.  우리는 어쨌든 요한칼빈과 그의 후학들이 이룩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유산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틈타, 선교활동의 확장을 틈타서 부실한 신학교육이 있었고 바른 교육을 받지 못한 교역자들의 양산으로 한국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교정(敎政)을 맡은 교회의 지도자들도 개혁주의 신앙에 충실하려는 몸짓 보다 이기적이고 파행적으로 세력확장에 여념이 없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의 잘못을 비판하는데만 머물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개혁되고 새로워져야 할 줄 믿습니다.  앞으로 밝아오는 2000년대는 희망과 꿈의 세계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인본주의사상과 세속주의 신앙이 커다란 공용처럼 우리의 갈 길을 가로막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골리앗 앞에 섰던 다윗처럼 세속적인 신학자들과 무신론적인 인본주의자들이 칼과 단 창으로 나온다고 할찌라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장중에 움직이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중심의 신앙이 결국은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2000년대를 바라보면서 목양의 현장에서 눈물과 땀을 바쳐 수고하시는 여러분들에게 사도바울이 고백한대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6) 한 것처럼 승리의 개가를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Soli Deo Gloria! -아멘-




바른 목회와 교회갱신, 한국장로교의 자화상과 미래, 정성구 교수님 글,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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