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년의 꿈
손 중 하*
주말 아침입니다.
지금은 마음속 어디쯤에서 어떤 씨앗이 돋아나고, 어떤 씨앗은 싹이 돋아 자라고 있고, 어떤 씨앗은 자라서 꽃을 피우고, 어떤 씨앗은 열매를 맺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왕에 뿌린 씨앗이라면 곱게 자라 충실한 열매를 맺었으면 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아침을 출발합니다.
요즘 어디를 가든 나뭇잎들이 곱게 물들어 눈을 즐겁게 합니다. 나 또한 그 나뭇잎처럼 곱게 물들 수 있다면 늙음도 축복으로 받아들일 텐데……
노을은 지는 것이 아니라 물드는 것처럼 나도 그러하리라 믿으며 살아 가려합니다. 물드는 일은 또 하나의 꿈을 갖는 일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가슴속에 사랑을 지니고 있어서 이웃에 품어내는 사람, 사회에 업적을 남기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은 그저 바쁘고 산만하게 살았지만 이제는 맛있는 음식을 먹듯이 그 미각을 느끼며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은 욕심이 스믈스믈 일어납니다.
그 욕심 때문일는지 요즘 젊은 시절에 짓고 싶어 했던 언덕위의 하얀 집을 지금 짓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지인들의 충고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 나이에 시골로 들어가려 하느냐. 집을 크게 짓지 마라. 문화생활은 어떻게 하려하느냐, 병원은 가깝느냐는” 등 갈등을 느끼게 하곤 합니다. 하지만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버리듯 그냥 지인들이 염려하는 것들은 버리고 시골 고향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어느새 젊음은 가고 한 가지를 더 가지려면 한 가지를 놓아야 하는 그런 나이가 되었으니까요.
내 능력에 너무 크고, 넓고 깊고 긴 것은 조금씩 버리고 가볍게 살아가려 합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 창으로 비쳐오는 달과 별을 보며 이제 내 집 같은 느낌이 드는 집에서 살고 싶습니다.
매일 매일을 첫 경험처럼 설렘을 가지고 살고 싶습니다. 이제는 길에서 길을 물어 길 따라 가는 삶이 아니라 길에서 마음을 물어 마음 따라 가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문득 ‘사랑을 위하여’라는 노래 가사가 떠오릅니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물안개 피는 강가에 서서 작은 미소로 너를 부르리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 싶다.
이 노랫말의 가사처럼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그 길을 택하고 싶습니다.
마음의 길을 가면서 더 큰 욕심이 생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럴 때마다 배터리가 다 되어 가끔씩 움직이는 시계의 시침처럼 느려지면서 서둘지 않는 삶을 배우고, 언제나 같은 하루가 아닌 매일 매일을 자연을 보며 멋진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살려합니다.
가끔씩은 내가 모르는 세상 밖에서 나를 유혹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불혹의 나이를 지났어도 지금도 혹을 버리지 못하는 걸 보면 그 욕심으로 하여금 나를 위험처럼 도사리고 있는 나락으로 떨어뜨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먼 길을 돌아온 것처럼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과 내가 가지지 않은 것들, 그리고 내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세상 밖으로 내딛는 하루하루가 햇살 드는 하루하루가 아닐는지요. 그 햇살 드는 하루의 삶속에서 이제는 부채를 갚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 합니다.
생각해 보면 내 삶은 베풀기 보다는 누군가가 베푸는 삶속에서 살아온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종종 들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하여 옷 한 벌 벗어 준적이 없으니 말입니다.
지금까지 감사함과 고마움으로 살면서 그것을 부채라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으니 사람으로 살면서 사람답지 못하게 산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제는 서서히 부채 갚는 일에 눈을 뜨고, 누군가의 발목을 잡는 일이 아닌 손을 잡아주는 일, 그것이 남은 날의 숙제라 생각하고 동녘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누구에겐가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 저녁놀처럼 누구에겐가 휴식을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앨빈 토플러는 ‘21세기는 삭힌 맛의 시대’라는 화두를 던졌지요. 그런데 우리의 삶의 양식은 더 오래 전부터 발효시켜 숙성에 뿌리를 두었으니 우리 삶 자체가 삭힌 맛으로 산 역사가 아닐는지요.
나도 이제 맛깔스런 숙성의 맛으로 살아가는 인생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마지막 인사말만은 ‘참 맛깔나게 잘 살았노라’라고 손짓하고 후회 없이 떠나는 인생이기를 조용히 기도해 봅니다.
충남 금산 출생, (전)대문초등학교 교장, 월간 ≪한울문학≫(2005) 등단, ‘한국농촌문학상’(2006) 수상, jhson1971@hanmail.net
아쿠아로빅을 하다
김 순 길*
요사이 나에게 소중한 벗이 하나 더 생겼다. 주간 7일중 월, 화, 목, 금 4일을 그와 더불어 즐긴다. 그 벗은 바로 ‘아쿠아로빅(aquarobics)’을 하기 위한 수영장에서의 물과의 만남이다. 나이가 들면서 거동이 불편하고, 온갖 삭신이 쑤시고 아프다보니 나를 보듬어 주고 너그러이 안아 주는 물이 이토록 고마운 벗이 될 줄이야!
광활한 거리를 세차게 활주하던 자동차도 견고한 쇠붙이로 만들어 졌건만 10년, 20년을 사용하면 하나, 둘, 부속품이 망가져 교체해야 한다. 하물며 80년을 줄곧 부려먹은 몸둥아리인데 오죽하랴! 오늘날까지 아무 탈 없이 버티어 준 것 만도 고마울 따름이다.
우리반 ‘아쿠아로빅’ 수강생들은 대부분이 50대, 60대의 전업주부들이다.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후, 비교적 여유 있는 경제 여건에 맞추어 자기 건강을 챙기며 즐긴다. 한 반 수강생이 100명이 넘는다. 그들 중에 80세를 넘긴 나는 가장 연령 많은 ‘왕 언니’가 되어 그들과 어울려 운동을 한다. 옆줄에 서서 운동하는 언니가 나에게 질문을 한다. “왕 언니는 어떻게 해서 저리도 반듯하고 곧곧하게 건강하신지요. 저는 70대이신 줄 알았어요. 저도 왕 언니 나이가 되었을 때 그렇게 건강할 수 있을까요?”라며 부러운 눈빛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특별히 몸 관리를 한 것은 없고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규칙적인 생활에 의자 생활을 오래 한 것이 몸이 펑퍼짐하게 퍼지지 않고 균형이 잡힌 것 같아요.”라고 답해 주었다.
물은 보드랍고 유연해서 좋다. 그래서 남자들은 순종적이고 나긋나긋한 여자들을 좋아하나 보다. 예전에 다친 허리가 아프고 무릎이 구부렸다 펴기가 불편할 때, 물속에 담그고 주무르면 시원하고 훨씬 유연해짐을 느끼면서 피부에 닿는 촉감이 감미롭게까지 느껴진다. 양팔을 뻗쳐 앞뒤로 돌리면 좀 더 유연해 지는 것 같다. 물속에서 50분간 운동하는 시간은 흥이 나고 즐겁다.
CD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선생님은 공중에 날 듯 높이 잘도 뛴다. 우리도 덩달아 뛰어 보지만 물장구만 칠뿐이다. “가야해~ 가야해~ 나는 가야해~, 순이 보러 가야해~” 여전히 흘러간 노래가 추억을 되새긴다. 순이는 이미 멀리 떠나 가 버렸고, 순이를 찾아갈 세월도 흘러갔건만, 마음속에 묻어둔 아쉬운 정은 지우지 못하나 보다. 노랫가락에 맞추어 신나게 팔, 다리를 뻗쳐 본다. 육중한 권투선수가 링 위에서 상대를 향하여 힘찬 펀치를 한 방 날리듯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팔을 힘껏 뻗쳐 한방 세차게 날려 보지만, 물은 ‘빙그르’ 하고 파문을 일으키며 저 멀리 달아난다. 한 발을 앞으로 올렸다가 옆으로 차기도 하고, 뒤로 힘껏 밀어 제쳐 봐도 물은 약간의 물방울만 튕길 뿐, 곧 사라져 비켜 간다. 물만이 허용되는 관용이다. 만약 사람이라면 어느 누가 발길에 걷어 채이고 뒤로 물러서겠는가? 성내지 않고 참고 견디어 주는 물이 좋다.
월요일엔 길이가 2m 가량 되고, 넓이가 7㎝ 정도 되는 스폰지로 된 기다란 봉을 가지고 운동하는 날이다. 봉을 두 다리 사이에 끼우면 부력에 의해 몸이 물 위에 뜬다. 마치 가마나 자전거를 탄듯하다. 페달 없는 자전거를 타고 두 발로 열심히 돌린다. 100번, 200번, 300번, 500번을 반복해서 돌리면서 관절 운동을 한다. 물속에서 두 발 자전거 타기 운동은 유산소 운동으로 무릎 아픈 곳을 비롯하여 관절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물은 포근한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엄마의 품처럼 아늑하면서 무한정의 인내와 포용성이 있어서 좋다. 그 뿐인가?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한 순간도 물 없이는 살 수 없다. 물은 생명의 은인이다. 금방 숨이 넘어가는 사람도 물 한 모금으로 생명을 되찾기도 한다. 그러기에 예부터 “행여 길 가던 나그네가 집에 들르면 냉수 한 모금이라도 주어서 보내라.”는 미담이 있다.
마음과 물질도 주라고 했던가? 우리 몸은 70%가 물로 되어 있다. 노년이 되면서 점점 수분이 빠져나가 수분 부족현상이 발생하는데, 물을 벗 삼아 가까이 함은 축복된 일이다.
인생은 한 번 왔다가는 다시 가야만 한다는 기정 사실 앞에,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랴! 아웅다웅 기 싸움은 접어두고, 쪼그라진 가슴을 펴고 물의 관용을 배워보자.
다행이 수영장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다. 20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제 발로 걸어 다닐 수 있는 한, 수영장에 가서 오늘보다 더 나아질 내일의 건강을 기대하며 물을 벗 삼아 더 가까이, 더 자주 만나면서 여생을 살아가련다.
매듭을 풀다
오늘은 여고 동창회 모임이 있는 날이다. 평소보다 옷도 더 예쁘게 차려 입고, 화장도 신경을 써서 몇 번 거울을 더 드려다 봤다. 나이는 들어가도, 곱고 아름다워지고 싶은 여자의 근성은 아직도 남아있나 보다.
1956년, 이 고장의 명문이라고 자부하는 ‘ㄷ’ 여고 15회 졸업생들의 모임이다. 졸업한 지 59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갔건만 모임은 꾸준히 지속되어 왔다. 늘 만나도 반갑고, 흉물 없이 가슴속 묻힌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전에 동창회 모임을 함께 했던 몇몇 친구는 이미 하늘나라로 가고 없다.
동창회 모임은 연중 매월 정기적으로 하되 가장 혹한이 심한 1월과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은 쉬기로 했다. 이번 8월도 예년처럼 거르기로 했다. 뜻밖에 친한 ‘ㅅ’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번 달에는 동창회를 안 하기로 했는데, 시간 있는 친구들은 만나서 점심이나 나누면서 담소를 나누자.”고 한다. “회비는 동창회 하고 연관이 되느냐?”고 묻자, “동창회하고 연관 시키면 안 된다”고 한다. 나는 저녁에 다른 모임도 있어 나가지 않겠다고 전했다.
9월, 동창회 모임에 나갔다. 동창 회비를 8월 모임에 나온 친구들은 9월분 회비만 내고, 참석 안한 친구들은 배로 내란다. 나는 그 말을 듣자, 신경이 곤두섰다. 8월은 원래 쉬기로 한 달이고, 8월 모임의 참석여부는 구속력 없는 자유의사에 따른 것이었는데, 회비에 결부시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이 다 그렇게 했으니 나도 그대로 따르라고 한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간 내가 살아온 삶은 공식적으로 반듯한 상자 안에서, 틀에 박힌 교육공무원 생활로 몸이 배어 있다. 오직,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 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이 진리이고 원칙이었다. 당장, 지구가 두 쪽이 나는 이변이 생겨도 진리는 하나뿐이었다. 나는 틀린 말에 순응할 수 없었다. 뜻밖의 일에 몹시 흥분되고 목청이 커졌다. 평소 약한 신경이 자극을 강하게 받았나 보다. 노인 특유의 옹고집이 치밀었다. 친구들이 원망스러웠다. 명문여고를 졸업했다고 자부하면서 그런 판단하나 제대로 내리지 못하다니……. 늙으면 판단력이 흐려진다고 하더니 너와 나를 가릴 것 없이 누가 옳은 판단을 하는지 분간 할 수 없었다. 동창회의 분위기는 금방 어색해졌다. 8월 모임에 참석한 친우와 불참한 친구가 두 갈래로 생각이 나뉘었다. 그날은 씁쓸 떨떨한 기분으로 헤어졌다.
11월 동창회 월례회는 동창회 친우들 중, 올해 팔순 된 친구 일곱 명이 회비를 내서 팔순 잔치를 한다고 한다. ‘ㅋ’호텔에서 1박 2일 동안 베푸는 잔치이다. 나도 올해 팔순이 된 사람 중 한 사람이다. 지난 달 회비관계로 떨떠름했던 기분이 남아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다. 또 그날 밤, 다른 교회모임과 중복되었다. “밤에 교회모임에 참석하고 다음날 아침부터 동창 모임에 참석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동창 팔순 잔치는 한 번 뿐이고, 교회 월례회는 다음 달도 있으니까……. 그간 나만이 옳다고 고집하던 꽁꽁 묶여진 생각의 매듭을 풀어 제치자라고 생각을 넓히니 예쁜 이해의 동산이 보였다. 그렇다, 여러 사람이 모이니 제각기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조금만, 붙잡힌 생각의 매듭을 풀면 화려한 꽃을 피우리라. 오늘 저녁부터 기쁘게 참석하자. 그간 친구들에게 베풀지 못한 사랑과 우정을 베풀자. 기회는 늘 오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니 행동의 변화가 왔다. 큰 도시락 두 개에 노인들이 먹기 좋은 물렁한 홍시 감을 가득 담았다. 작은 도시락 맨 밑 칸에는 생기를 얻어 늘 푸르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청포도를 담았다. 가운데 칸에는 아들이 오면 주려고 아꼈던 생대추로 채웠다. 맨 위 칸은 새콤달콤한 파인애플을, 다른 그릇에 홍삼캔디와 초콜릿도 챙겼다.
밤에는 무엇을 하고 놀까? 여러 사람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윷놀이가 좋았다. 상품으로 건강에 도움이 되는 수면 양말을 한 켤레씩 마련했다.
과일과 상품을 가득 싣고 호텔에 도착하니, 친구들이 함박웃음으로 맞이한다. 내가 조금만 생각의 각도를 바꾸어 계산, 셈이란 상자에 단단히 묶여진 매듭을 풀면 관용이란 넓은 사랑의 보자기가 기다린다. 그간 베풀지 못한 우정의 보물들을 사랑의 보자기에 싸서, 친구들에게도 나누어 주며 살아가야 하겠다.
※ 대전여고 졸업, 수도여자사범대학 영문과 수료, (전)중등학교 교장, ≪상상의 힘≫(2012) 수필부문 신인상,
흔들리는 생각들
김 기 태*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저자거리의 술 취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처럼 시끄럽다. 돌아가는 일들이 모두가 좋은 소식만 들려오는 것은 아니지만, 관심 있는 일들이 생길 때마다 생각들이 분분하다
정부에서 새로운 정책을 변경한다고 발표를 하면 이를 두고 생각들이 양분되는 경향이 많다. 정책을 발표하는 시기도 아리송할 때가 있지만 그에 따른 반응도 상식을 넘어갈 때가 많다. 문제는 새로운 정책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비상식적으로 몰고 가는데 지성이 춤을 춘다는 것이다.
한참을 듣다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혼란스러워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때로는 그들이 주장하는 일들이 맞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한국사 바로 잡기로 국정교과서를 만든다는데 세상이 요지경 속 같다. 잘못된 한국사를 바로 잡는다는데 이견이 있을 수 없겠지만 이것을 밀어붙이는 정부와 이를 반대하는 의견이 설득력이 없다는 점이다.
정부에서는 충분한 검토와 토의를 거쳐 세상에 정책을 내 놓아야 할 문제인데, 이를 가을에 불어오는 찬바람이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세상을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다.
야당에서는 이를 두고 목숨 걸고 반대를 한다. 좀 전의 반대 시위 방식에서 벗어나 피아노를 치고 시낭송을 하면서 세상을 유혹한다.
그들의 순수성을 모르겠지만 정치인으로 자기 잇속 챙기기 위한 술책이 많이 숨겨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모습과 행동을 보고 이 나라의 지성인이 춤을 춘다는 점이다.
일단, 반대하는 입장이 드센 것처럼 보도가 된다. 역사학회가 반대를 많이 하고, 일부 교단이 반대를 하고, 방송에서 그런 내용이 많이 보도된다. 종방에 나와 토론하는 패널들은 또 그렇지가 않다.
방송국의 방영시간을 봐도 반대 의견이 먼저 나오고 방영시간이 길다. 국정 교과서로 하자고 말하는 정부 의견은 방송에 나오는 비중이 그리 많지가 않다는 것을 느낀다.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받아 운영하는 방송국마저 그렇다.
종방은 너무 정부 측에 편향적이다. 공정방송에 대한 의지가 의심스러운 모습이다. 역사를 바로 써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겠다는데 무슨 문제가 그리 많은 지 알 수가 없다. 방송국에서부터 반대쪽으로 몰고 간다는 느낌이 드는데, 길거리에서 조사하는 반대 서명에도 사람이 모이는가 보다.
어느 정책에 있어 옳고 그름은 얼마든지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정확한 지식이나 정보 없이 사회적 동행에 편승하여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대표적인 것들이 많다.
전 정권에서 일어났던 소고기 수입 파동과 4대강 개발사업이 그 예라고 생각된다.
그동안 미국산 소고기가 들어와 우리나라 국민건강에 심각한 현상이 나타난 예는 없다고 본다. 아마 그 때 수입에 반대한 사람들이 지금은 수입소고기를 더 많이 이용할지도 모른다.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울시청 앞으로 나왔는지 기억할 것이다. 아기를 태운 유모차까지 끌고 나온 몰지각한 젊은 엄마도 있었다.
친구 아들의 결혼식장에 학교 동기들이 모였다. 식이 끝나고 함께 식사를 하는데 자연스럽게 당시 최대 화제인 수입소고기 이야기로 대화가 이어졌다. 그중에 한 친구가 반대 의견이 아주 강했다. 갑론을박으로 이어지며 주장이 굽히지를 않는데 그 친구가 마지막에 하는 말이 "친구들은 미국산 수입고기가 들어오면 그 고기를 사 먹을거야?"라고 했다. 그러자 "아니 그러면 당신은 안 사먹을 거야" 하고 다른 친구들이 반문을 했다. 지금 그 친구! 제일 많이 수입 소고기를 선호한다. 그 친구는 얼마나 수입소고기에 대하여 알고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친구였다.
4대강 개발사업도 그랬다. 그것은 이명박 정부가 연구 개발하여 시행한 정책이 아니다.
원래 정부 정책은 장기 기본계획이 세워져 있다. 그것을 대통령 판단으로 시기를 조절한 것뿐이다. 사업 시행과 소소한 시행과정을 혼돈하여 반대하는 무리들이 많았었다. 건설업에 오래 동안 종사한 나로서는 정책 결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을 한다. 다만 시행과정에 문제가 조금 있었을 뿐이다. 실적에 민감하여 자기 임기 안에 마무리 하려다 졸속 행정이 되었을 뿐이다. 이 두 가지 정책으로 인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임기동안 식물대통령이 될 정도로 국가 발전에 지대한 지장을 주었다.
4대강 공사 이후 홍수로 인해 강변 침수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 개발공사비의 상당부분을 강우피해 사전예방으로 만회가 되었을 것으로 판단이 된다. 이제는 가뭄으로 인해 4대강의 이용도가 우리의 관심사로 떠오른다.
4대강 개발을 반대했던 지자체 단체장들 중에서 가뭄이 극심한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에 4대강에서 물을 끌어 들여 공급해 줄 것을 강력하게 주장해서 이미 공사에 들어갔다. 이렇게 앞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정치인 중에는 많았다는 점이다..
과거로 올라가면 더 한심한 사례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새마을 사업이 그러했고 고속도로가 그랬었다. 자동차 공장 인허가 시에도 문제가 많았고, 월남 파병 시에도 국론이 흔들렸다. 돈 많은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라고 얼마나 많은 공격을 했는지 기억이 새롭다. 그 때 반대에 의해서 정책이 변경되었더라면 우리나라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소름 끼치는 일이다.
그동안 그런 정책에 생각을 달리하던 사람들 중에서 두 사람이 대통령을 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큰일을 할 것 같았던 그들이었지만 특별하게 한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젊었을 때는 그들이 와서 강연을 한다하면 만사를 제쳐두고 쫓아 다녔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현실성 없는 뜬 구름 잡는 이상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특히, 돈을 좋아해서 일을 벌이고 추진하는데 부정과 친구가 되어 가깝게 지냈다는 사실에 이제는 그들도 자신이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벌였던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결코 우리 주변 사람들과 다른 점이 없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정치인이야 자기의 잇속을 찾기 위한 술수도 있겠지만 많은 교육을 받은 국민들은 중심잡고 세상을 바로 봐야 할 것 같다. 오늘 날 이렇게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양극화로 몰고 가는 것도 그동안 켜켜이 쌓여온 잘못된 교육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모든 배움은 올곧게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터득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제대로 알고 올바르게 판단하여 자기의 의사 결정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잇속도 없이 정치인보다 더 흔들리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안타깝다.
사랑하는 준서에게
세상 나무들이 한 해의 흔적을 몸으로 보여주며 가을이 익어가는구나. 벼가 불을 만났다 해서 가을 추(秋)라는데, 그래서 가을을 수확의 계절이라고 하는가 보다. 이렇게 곡식과 과일이 붉게 익어가는 계절에 성인이 되어 어른으로서 새 출발하는 너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결혼은 그동안 부모가 키워 준 온실에서 벗어나 두 사람이 힘을 모아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가는 일이지. 아마 좋은 일도 있겠지만 힘들고 책임져야 하는 일들이 많이 찾아 올 거야. 그것을 모두 겪고 이겨내야 진정한 어른이 된단다.
여기에서 중요한 일이 있다면, 가장으로서 가정에서 중심을 잡고 잘 살아야 가족들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홀대를 받지 않고 산다는 점이다.
그동안 기분 따라 생활한 적도 있겠지. 좋아하는 일에 매달려 즐거움에 빠져 시간을 보낸 적도 있겠지. 그러나 가장은 가족을 생각하며 무엇이 내가 선택한 것 중에서 최선일까? 나보다는 가족이 우선 시 되는 삶의 정착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젊었을 때는 돈과 명예가 삶의 질을 좌우하는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이 아이를 달래는 과자부스러기로 생각이 들 때는 삶의 본질에 접근하게 된다. 올곧은 생각으로 행복을 일구어 가는 과정이 그것이 진정한 삶일 것이다.
새 출발하는 너에게 몇 가지 부탁을 하마.
세상에서 경쟁은 필수란다. 그 경쟁의 결과가 삶의 질을 좌우하기도 하지. 살아가며 경쟁에서 처지는 나를 느낄 때처럼 좌절을 맛보는 때도 없다. 먼저 가는 그들을 시기하고 질투를 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일거야. 그러나 한번 빨리 간다고 영원히 빨리 가는 것도 아니고, 한번 쳐진다고 영원히 쳐지는 것도 아니란다. 그저 도덕적인 가치관으로 무장하고 내 스타일로 묵묵히 자기 일을 성실히 수행하며 살아가는 모습도 필요하단다.
때로는 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앞서 가는 사람을 끌어내리거나 모함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것은 얼마 안 가서 들통이 나게 마련이다. 그 때는 모함한 내 자신이 초라해지고 그 응답은 당연히 나에게 돌아온다. 그래서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익에 현혹되어 상대를 폄하하지 마라. 한마디로 말한다면, 내가 어렵다고 남에게 민폐를 끼치면서 내 살길을 찾지 말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무시당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완벽하게 해나가는 능력을 길러 습관화시켜야 한다.
자식으로서 부부로서, 그리고 앞으로 태어 날 아이들의 부모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성실히 수행하고, 직장에서도 주어진 일의 처리능력 향상과 상하관계를 돈독히 유지하며, 사회적 교류도 내 삶의 한 축을 차지하는 일이니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모든 면에서 평균적으로 남보다 한 발자국만 앞서가면 되는 일이다.
먼저 알아차리고, 먼저 시행하는 것이 체질화 되어야 살아가는데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거든……
다음은, 네 삶에 중심이 되어 살아가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이 너의 색깔이 될 것이다. 누가 이렇게 한다고 누가 저렇게 한다고 시류에 휩쓸리어 몰려다니지 말고, 내가 계획을 세워 내 삶에 내가 중심이 되어 흔들리지 않고 살아야 한다.
서울로 가는 길이 한 가지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 교육에서도 그렇고 삶의 방식에서도 그렇고, 직장에서의 처세에서도 그렇다. 자기만의 색깔로 존심을 세워 살아가야 살아가는 맛이 난다고 생각을 한다.
세상 사람들은 돈 많은 재벌들을 부러워하며 모두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산골짜기 오두막집에서도 웃을 일은 생기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상황에서 또 다른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다.
행운을 나타내는 네 잎 클로버를 찾는다고 행복의 꽃말을 가진 세 잎 클로버를 밟고 다녀서는 안 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우선순위를 정하고 급하고 중요한 것부터 행동으로 이어져 그것을 이루어 갈 때, 너는 네가 생각한 것보다 더 높이 올라 갈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노력은 필수다. 가진 것이 적을수록 노력의 질과 양은 많아져야 한다. 그동안 이어져 온 가문의 부족한 면을 채우려면 한 세대의 희생도 있어야 한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해 살아간다면 세상에서 못 이룰 것도 없다. 과정과 순서를 잘 조율하여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한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는 ‘나’이다
자신을 알고, 자신을 키워, 나를 나답게 사는 것. 그것이 네가 앞으로 결혼 생활을 통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멋진 삶을 살아가기를……
준서 파이팅!
※ 충남 서천 판교 출생, 글지이, 부름새, 서각인, (전)계룡건설 토목본부장, 온동마을 촌장, 저서 『삶의 시방서』.
『소똥 위에 홍시』.『살아보니 어뗘』,『그려』등. blog.daum.net/ondong
나는 보름이 할머니
김 남 신*
보현이와 소현이는 남편과 나에게 있어, 세상에 둘 밖에 없는 외손녀들이다. 그들에게 2015년의 어린이날 선물은 ‘보름이’였다. 손녀들은 어릴 때부터 강아지를 갖고 싶어 했지만, 딸아이는 정서적으로는 좋을지 모르지만 어린 아기들에게는 좋지 않은 점이 더 많다며 질색을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딸아이가 조그마한 털 뭉치 같은 것을 조심스레 안고 가다 나하고 집 앞길에서 마주쳤다. 어제, 아이들과 유성에 있는 동물병원부터 은행동에 이르기까지 샅샅이 다녀보고 입양(?)한 강아지라고 했다.
강아지는 제 에미로부터 떨어진 지 2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제 오래비와 같이 병원에 있다가 사흘 전에 오래비가 먼저 입양되어 갔단다. 강아지의 몸무게는 500g이 채 되지 않았고 에미와 떨어지고, 또 며칠 전엔 오래비도 떨어졌으니 말을 하지 못하는 짐승이라 그 표현을 하지 못했을 뿐 충격이 컸었던가 보다. 게다가 차에 태워서 데려왔더니 멀미도 하는 것 같다. 환경도 낯선지 아침에는 자꾸 토하기까지 한다. 급기야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자꾸 쓰러져서 동네 동물병원에 데려가는 중이라고 했다.
다행히 보름이는 이틀에 한 번씩 세 번을 병원에 다녀온 후에는 한결 건강이 좋아졌다. 병원에 다니는 동안, 수의사로부터 예방주사를 놓는 시기, 보름이를 키우면서 주의해야 할 것 등등 여러 가지 조언도 많이 들었단다.
그러던 어느 날, 볼 일이 있어서 딸네 집에 올라갔더니 온 식구들이 큰 걱정거리라도 있는지 나를 보고도 말도 건네지 않고 뚱한 얼굴들이다. 영문을 몰라서 묻는 내게 지금‘보름이’에 대해서 가족회의 중이란다. 사위가 작년에 올 여름 휴가 때 가려고 예약해 놓은 하와이여행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보름이’를 맡길 곳이 마땅히 없단다. 또 거금(?)을 주고 산 ‘보름이’에게 앞으로도 매달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다는 얘기를 아는 사람으로부터 들었단다. 그래서 ‘보름이’를 잘 키워줄 사람만 있으면 그냥으로라도 주자는 딸아이의 말에 사위도, 손녀들도 고개만 떨구고는 말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걸 예상하지도 못하고 강아지를 쉽게 샀느냐?”고 딸애를 핀잔하고서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내가 돌봐줄 테니 우선 여행을 다녀온 후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했더니, 손녀들의 얼굴이 금세 환해진다.
그렇잖아도 나도 동네에 있는 동물병원 앞을 지날 때마다 “이제는 손녀들이 6학년, 2학년으로 많이 자랐으니 강아지를 한 마리 사다줄까?” 하며 생각만 하던 참이었다. 칠십이라는 적지 않은 세월을 살다보니 사람이나, 짐승이나 작은 물건까지도 다 ‘인연’이 있다는 것을 문득문득 깨달을 때가 많다.
‘보름이’ 일만 해도 그렇다. 제 에미로부터 일찍 떨어져서 그런지 건강상태도 썩 좋지 않은데다가 포메라니안이라는 종이어서 지금까지 본 강아지 중에서 제일 작고, 제일 비쌌단다. 그럼에도 손녀들은 ‘보름이’가 아니면 다른 강아지들은 싫다고 고집을 부렸단다. 이에 화가 난 딸아이는 없던 일로 하자며 손녀들을 윽박질러 집으로 데리고 왔단다. 그런데 현관문도 열기 전에 작은 손녀가 큰 소리로 울고, 큰 손녀는 좀 컸다고 제 감정을 억지로 참느라 울지만 않을 뿐 거의 울기 직전이었단다. 작은 손녀는 평소에 나이보다 늘 의젓하고 속 깊게 행동하고, 말도 정답게 해서 늘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아이였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사위가 딸애를 쳐다보며 달래듯이 “보현엄마, 그냥 사주자.”고 했단다. 일찍 점심을 먹고 지금까지 돌아다니다가 강아지를 사지도 못하고 시간을 보니, 어느덧 오후 8시가 되었더란다. 딸아이는 가게 문이 닫힐지도 모르겠다 싶어 집에 들어와서 동물병원 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갈 테니 기다려 주실 수 있느냐?”고 말하고는 목구멍에서 기어 나오 듯 “값도 좀 잘해주시면 안되겠느냐?”고 모기소리만 하게 했더니 “오셔서 얘기하시죠.”라며 끊더란다. 동물병원 원장도 손녀들의 간절한 바람을 담은 눈망울을 보더니 가상히 여겼음인지 파격적인 가격(?)이라며 일금 백삼십만 원만 내라고 해서 데려온 게 우리 ‘보름이’이다.
차안에서 번갈아 가며 강아지를 안아보며 좋아하던 손녀들이 집에 도착했을 때, 하늘엔 둥그런 보름달이 떠 있었단다. 큰 손녀는 보름달을 가리키며 “엄마, 이 강아지, 보름이라고 하자”고 했단다.
사람이 사랑을 하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더니, 손녀들에게는 저녁을 굶은 것도 잊은 채 강아지를 안고 쳐다본 하늘의 보름달은 달이 아니라 행복한 마음, 아니 온통 행복 그 자체였나 보다. 전에는 개를 키우는 사람들이 개에게 엄마, 아빠, 오빠나 언니라고 호칭하면 “아니 개가 무슨 사람인가? 자기가 ‘개엄마’, ‘개아빠’라는 거야? 개 키우는데 드는 돈으로 아프리카에서 굶주리는 아픈 아이들이나 쫌 돕지!” 하며 잔뜩 불평만 했던 나이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요사이 유행하는 말로 ‘지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했다던가? 내가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게 한 가지도 없다는 것을, 나는 새삼 또 깨달았다.
구두쇠인 나를 닮아 딸아이도 알뜰함을 약간 넘어 구두쇠 쪽에 가깝게 세상살이를 하는 것 같더니 ‘보름이’에게만은 그게 아니다. 심지어 제 딸들도 시간이 없거나 피곤하고 힘들어 할까봐 학원을 안 보내는 게 아니라, 학원비가 아깝다며 보내지 않는 과목도 있다. 그나마 손녀들에게 입히는 옷은 명품이 아닌 길거리 패션이지만, 그다지 보기 흉하게 입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제 옷은 어쩌면 그렇게 안 사 입는지 엄마인 내가 속상할 때가 많았다.
원래 구두쇠는 큰 것은 큰 것대로 아끼지만, 남에게 말하기조차 민망하리만치 10원, 20원처럼 아주 작은 것도 아낀다기보다 벌벌 떤다는 표현이 더 마땅할 듯하다. 그러나 큰 돈은 사람의 도리요, 작은 돈은 인정에 쓰이는 지라 어느 것이라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딸네와 위, 아랫집에 살지만 제 몸에 드는 것을 아끼는 딸이니 아버지와 엄마에게는 일부러라도 마음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보름이’가 오고 나서 “여보, 우리는 8번, 9번이네” 라고 남편에게 말하며 마주보고 웃었다.
SNS에서 어느 노인이 아들에게 “5번아, 6번은 간다.”라고 쪽지를 남기고 아들네 집을 나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제집 식구 넷에 보름이, 그리고 사돈어른 두 분, 그 다음이 우리내외니까.
아무튼 ‘보름이’는 집만 해도 벌써 세 채나 된다. 물론 500g이던 몸이 2kg으로 불어서 한 채를 더 사준 것 까지는 이해가 된다. 그런데 분홍 플라스틱으로 된 집을 구입한 지 며칠도 되지 않아 페브릭으로 된 집을 또 한 채 사다놓았다. 그런데 집만 세 채 있는 것이 아니다. 담장도 세 벌이나 된다. 어릴 때 쓰던 펜스는 몸집이 커지고 다리가 길어진 보름이가 쉽게 넘어 다녀 더 높은 담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우리 집에 맡길 때를 생각해서 제 집에 한 벌, 우리 집에 한 벌씩 사놓았다.
먹는 것은 또 어떤가? 체중이 너무 적어서 사료만으로는 안 되고 닭고기, 그 중에서도 닭가슴살만을 먹여야 한다며 하루에 너덧 번을 먹이더니 드디어 2kg으로 만들었다. 먹는 물도 ‘보름이’ 전용이라면서 사람도 먹기에 비싼 ‘에비앙’인가 뭔가를 먹이고, 요즘에는 보름이에게 간식을 먹여야 한다며 이것저것 사다 먹이더니, 며칠 전에는 수제간식이라며 잔뜩 사가지고 들어왔다. 아무튼 ‘보름이’를 담장 안에 가두면 “불쌍하다”며 잘 가둬두지도 않으면서 펜스를 두 벌씩 사질 않나? 수제간식이라며 이것저것 사다먹이지를 않나? ‘보름이’ 녀석에게 교육도 시키지 않아서 우리 집에 오면 꼭, 우리 부부가 덮고 자는 이불 위나 거실에 깔아놓은 요귀에다가 ‘쉬야’나 ‘응가’ 하기를 좋아한다. 그렇다고 그 집 식구들이 안 본다고 해서 ‘보름이’를 대놓고 구박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내 손녀, 손자들이 끔찍이 좋아하는 ‘보름이’를 그 까짓 오줌이나 똥을 좀 쌌다고 해서 구박할 수 없는 건 물론이고, 싫은 내색도 할 수 없다.
옛날 우리 아이들 키울 때처럼 손빨래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이불이나 요 껍데기를 벗겨서 세탁기에 넣고 돌리기만 하면 기계가 다 알아서 빨아주고, 헹궈주고, 짜주기까지 하는데 못 참을 일도 아니지 않는가? 또 제 식구들 없을 때면 가끔씩 우리 집에 데려와 돌봐줘서 그런지 나만 보면 안아달라고 애교를 떤다.
사실은 옛날 우리 집에서 기르던 ‘방울이’ 녀석에게 건듯하면 밥을 안줘서 굶기고, 차가운 돌계단 밑에 새끼를 낳은 것도 몰라 해산국도 제대로 못 먹여 방울이의 새끼들을 얼어 죽게 하는 악행(?)을 저지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개과천선하여 ‘방울이’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보름이’에게 잘해보리라 마음먹은 때문이다. 그래야 어느 분의 말씀처럼 하늘나라에 갈 날도 머지않았는데, 천당에 갈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지옥으로 가기는 싫다. 내가 뜨거운 한증막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지옥은 따끈한 것이 아니라 죽을 만큼 뜨겁다고 하지 않던가? 차라리 한 번에 ‘칵’ 하고 죽는다면 괜찮겠지만, 견디기 힘들만큼 계속 뜨거우면 그렇지 않아도 나이가 먹더니 매사에 참을성이 많이 없어졌는데 참지 못하고 몸부림을 칠 것이 아닌가? 이것은 ‘품위 있게 살고 싶다’는 내 좌우명에 어긋나는 일이니,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천당으로 가야 한다. 아니 꼭 가고 말 것이다.
오늘도 보름이는 이런 내 속내도 모르고 저희 집에 갔더니 현관문까지 쫒아 나와 안아달라고 앞발을 들어 올리며 성화를 해댄다.
“보름아~ 나를 너무 좋아하지마! 나도 이제는 너를 진짜 좋아하는 것 같애!”
품위 있는 늙은이로 살고 싶다
집 가까이에 있는 노은역에서 시내로 나가려고 전철을 탈 때면, 자리가 넉넉하게 비어 있을 때가 많다. 전철의 종점인 반석역이 두 정류장밖에 되지 않아서인 듯하다. 그러나 시내에서 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올 때는 거의 자리가 없다.
만원인 전철 안에서 앉아서 올 때는 누군가로부터 자리를 양보 받거나, 아니면 용케도 빨리 내리는 사람 앞에 서서 오다가 자리가 비면 앉는 경우다.
작년 가을부터 아프다 말다를 거듭하던 무릎이 올 봄부터 부쩍 심해져서 용문동에 있는 단골 한의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는 중이다. 그 날도 치료를 마치고 용문역에서 전철을 탓는데 마침 빈자리가 있어서 앉았다. 그리고는 시선 두기가 어색해 무심히 앞을 바라보니 맞은편에 앉은 아가씨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빈자리가 있으니까 앉으시면 되잖아요?”라며 앞에 서 있는 노인을 쳐다보며 아가씨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고 아가씨는 속상한 마음을 애써 참는 듯한 표정으로 같은 말을 연거푸 두 번이나 했다. 그제서야 노인은 자리에 앉더니 “내가 너한테 한 말이 틀렸어?”라고 했다.
큰소리는 아니었지만 이미 화가 나 있었고 나지막했지만 기분 나쁜 목소리로 다그치는 듯 하는 노인의 말이 내게까지 들려왔다. 아가씨는 좀 전보다는 더 역정이 난 목소리로 “아이, 자리에 앉았으면 됐잖아요?”라고 말하더니 휙- 일어나 문 쪽으로 가버렸다. 처음부터 본 게 아니라 어찌된 영문인지 속사정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한 이는 다른 사람이고, 그 옆에 앉아 있던 아가씨에게 “네가 자리를 양보 했어야 되지 않느냐?”며 실랑이가 있었나보다.
내가 머리염색을 하지 않고 백발이 된 후부터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마음이 편치 않았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전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자리가 없으면 자전거나 유모차를 갖고 타는 승객이나, 장애우들을 배려한 공간이 비어있는 곳이나 문 한 쪽 켠에 비껴서 서 있어도 그곳까지 와서 앉으라며 양보를 받는 횟수가 예전보다 많아져서이다.
자리를 양보 받고서도 나의 알량한 자존심이나 미안한 마음 때문에 끝까지 고집부리고 앉지 않는 것도 예의는 아닌듯하여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앉아서 오기는 하지만, 내릴 때까지 마음은 편치 못하다.
내가 머리염색을 하지 않는 건 천성이 타고나기를 게으르게 타고 난데다가 구두쇠인 까닭이다. 지금 내가 사는 동네의 미장원에 가서 염색을 하려고 하면 퍼머를 하는 값과 똑같은 돈을 내야 한다. 전에 살던 괴정동에 있는 미장원까지 가야 싸게 머리염색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괴정동까지 가려면 전철을 타고 가다가 유성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괴정동에서 내려서도 다시 10분쯤을 걸어야 한다. 아침 일찍 나서도 반나절을 훌쩍 넘기는 것은 예삿일이다. 그래서 집에서 혼자 염색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이것도 할 짓이 못된다. 염색을 하는 것도 번거로운데다 염색한 머리를 감고 나면 목욕탕 바닥이 온통 시꺼먼 먹물로 더럽혀져서 욕실 바닥 청소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든 뒤에 얼굴은 쭈글쭈글하고 머리까지 하얀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예순 다섯이라는 지금의 내 나이가 적은 나이도 아니고, 누구나 다 늙으면 머리가 희어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니 순리대로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대신, 전보다 더 열심히 화장을 하고 옷에도 신경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버스나 전철 속에서 어린학생들이나 젊은이에게 큰 소리로 호통을 쳐서 그네들을 속상하게 하면서까지 자리를 양보(?) 받아 앉는 노인들을 가끔 만난다. 그럴 때면 나도 일흔 살이나 된 같은 노인이라서 그런지 학생들이나 젊은이들에게 민망하고 부끄러울 때가 있다. 나이가 들면 서 있기가 힘들어 자리에 앉고 싶은 노인의 심정을 몰라서가 아니다. 대부분의 학생이나 젊은이들은 노인을 보면 기쁜 마음으로든, 마지못해서든 자리를 양보해준다.
오히려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가 살던 시대와 달라서 일에 시달리고, 배워야 할 것도 많아 시간이 없어서 연애도 못하고, 연애를 못하니 시집, 장가도 늦어지고 못가거나 안가는 사람도 많다지 않은가? 이래저래 우리나라의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젊은이들은 꼭 힘 안 들고 언제나 씩씩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노인을 보면 측은해서 도와주고 싶어 하고 알아서 양보도 할 텐데, 전철에 오르자마자 젊은이들 앞으로 찾아가서는 큰소리로 호통 치며 자리를 내놓으라고 하면 순식간에 예의범절도 모르는 후안무치의 인간으로 되어 버린다. 그뿐인가? 돈도 내지 않고 타면서, 돈을 내고 타는 젊은이들의 자리를 뺏어서는 꼭 변명처럼 “요즈음 젊은 것들은 싸가지가…… ”로 시작해서 주저리 말도 안 되거나, 하지 않는 게 더 좋을 듯한 말을 늘어놓는다. 누구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라도 전철 안처럼 비좁고 사람이 많은 공간에서 큰소리를 내며 소란을 피우는 모습이 당당해보이지 않고 품격마저 없어 보인다. 물론 가끔, 아주 가끔은 당돌함을 넘어 못되게 보이는 젊은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럴 때면 내손을 잡고 아침운동을 할 때마다 남편이 들려주던 당나라 시인 송지문(宋之問)의『유소사(有所思)』한 구절을 떠올린다.
寄言全盛紅顔子(기언전성홍안자)
젊은 그대에게 한 마디 이르노니
須憐半死白頭翁(수련반사백두옹)
모름지기 백발노인을 불쌍히 여겨라
此翁白頭眞可憐(차옹백두진가련)
이 노인의 백발이 참으로 가여운 것은
伊昔紅顔美少年(이석홍안미소년)
그도 옛날의 홍안의 미소년이었네라
싸가지가 있든 없든, 그네들은 우리의 미래가 아닌가? 될 수 있으면 그네들을 속상하게 만들지 말고 내 자손 귀애하는 어진 마음으로 품어주면 좋겠다. 인자하게 웃으면서 말이다. 젊은이는 노인을 측은하게 여기고, 노인은 젊은이를 어여삐 여겼으면 좋겠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내 등 뒤로, 오늘도 어김없이 하루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 서울 출생, <상상의 힘>(2012) 수필부문 신인상, mailto:wisemam@hanmail.net.
DMZ 병사들을 위한 아다지오
강 명 수*
65년 전, 전쟁사의 고전이 된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진 후, 6.25 전쟁은 극적인 전환기를 맞았다. 그러나 중국의 개입으로 1.4후퇴를 거치고,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치열한 전투를 치룬 전선에 통한의 3.8선이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탄생된 비무장지대는 한국 근대사에서 조국을 생각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특별한 곳이 아닌 땅 DMZ, 그러나 국군이 목숨으로 지킨 이 최전비방의 보루를 지금 젊은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 눈보라 치던 겨울철에 동부전선 펀치볼과 이듬해, 초록 풀잎이 무성한 여름철에 서부와 중부전선을 밟았다. 당시, 비무장지대에서 적을 막으려는 군인들을 향해 전쟁이라는 저주를 막기 위해 서 있는 병사들을 향해 길을 나섰다.
서부전선에서 중부전선 백마고지로
파주의 제 3땅굴을 들어 가 본 후 걸어간 경의선 철도를 개조해서 만든 자유의 다리에서는 외신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한국인 관광객을 인터뷰하고 있었다. 북한의 호전성과 핵 실험 등 만성적인 남북 대치관계로 AP, CNN 등 외신 기자들이 수시로 이곳에서 취재를 하는 곳이다.
서부전선이 있는 임진각 휴게소에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안보관광을 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압록강에서부터 1.4후퇴를 하며 전쟁에서 결국 승패를 내지 못한 당시 상황을 생각하니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서부전선에 이어 중부전선의 격전지였던 철원으로 향했다. 철원에 있는 제 2땅굴에 들어가 헬멧을 쓰고 고개를 숙이며 걷는 동안, 당시 미세한 폭음을 감지한 초병의 위대한 경계력에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그 초병이 발견하지 못했더라면’이라는 가정은, 분명히 혹독한 비극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또 하나의 가정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날, 그 병사의 빈틈없는 경계근무 이후 끈질긴 발굴과 그리고 북괴가 차단벽에 설치한 지뢰와 부비트랩에 산화한 젊은 우리 병사들의 장렬함은, 후방에서 있는 사람들의 알량한 애국심으로는 측량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하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자유를 위한 희생(WAR IN KOREAN)』이라는 책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당시, 뉴욕헤럴드 튜리분지의 30세 여성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 기자(Marguerite Higgins)는, 직접 한국전을 초기부터 취재하고 군인들과 함께 후퇴하면서 젊은 병사들의 용맹성과 때로는 미숙하고 겁에 질려 허겁지겁해 하는 모습을 보며, 세상은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이 달콤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세상을 지키려면 전쟁터에서 싸울 능력을 기르지 않으면 결국 비참한 경우를 겪는다는 교훈을 그녀는 뼈저리게 가르쳐 주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보여준 흥남철수와 공산치하에서 횡포를 당했던 북한 주민들의 피난길,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오지마전투와 버금가는 처절했던 ‘장진호 전투’는 중공군이 아군의 방어선을 뚫고 내려오는 처참한 과정의 시작이었다. 그 전투는 보랏빛 고원지대에서 포위된 미 해병대가 해병사상 최초로 후퇴한 참으로 고된 생과 사의 여정이었다.
2땅굴에서 나와 철원의 ‘백마고지’를 마주보는 전망대에 올랐다. 398m 높이 야산의 백마고지는 교착된 전선에서 휴전 시, 한 치라도 한계선을 더 차지하려는 군인들의 눈물겨운 애국심으로 6.25 전쟁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가 되어 버렸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무려 7차례나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격전 끝에, 김종오 장군이 이끄는 육군 제 9보병사단의 승리로 중요한 중부 요충지를 확보하였던 것이다. ‘백마고지 기념관’에 들러 총알로 구멍이 난 어느 무명 병사의 철모를 보고 전쟁의 상황을 가슴 저리며 그려보았다. 이어 허물어져 가는 역사의 증거물인 노동 당사를 가니, 으깨진 낡은 시멘트 벽 사이에서 자라고 있는 한 줄기 파란 풀을 보았다. 노동당사는 당시 인민군 철원 당사였는데 러시아 양식으로 고풍스러웠겠지만 전쟁의 상흔으로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다. 당시의 격랑 속에 얼마나 수많은 양민들과 국군들의 희생이 있었던가! 비록 이름 없는 풀일지언정, 그 생생한 초록빛은 그들의 넋을 위로하는 치유의 푸른 생명으로 가슴에 다가왔다.
돌아오는 길, 자동차의 라디오 FM방송에서 클래식 음악이 들린다.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바그너의 음악이었다. 휴전선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곳에서, 이런 음악을 듣게 된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전쟁의 폭력 속에 인간의 내적 갈등을 보여 주려 만든 영화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1979)>에서 프란시스 코플러(Francis Ford Coppola) 감독은 바그너의 음악극 <니벨룽의 반지(The Ring of the Nibelung)」의 전주곡인 ‘발퀴레의 기행(Ride of Valkyries)’을 삽입하였다. 어쩌면 전쟁으로 소용돌이치는 세상 속에서, 인간의 운명과 그 내재적 고통은, 신묘한 기행 외에는 다른 것으로 표현할 수 없기에, 코플라 감독은 바그너의 이 음악을 넣은 것이 아닐까 싶다.
동부 전선, 펀치볼 트레일을 걸으며
재를 넘어가는 곳마다 군부대가 많이 있어 최전방임을 실감했지만, 과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1951년 여름, 미 해병대 1사단과 국군해병 1연대 그리고 용맹스러운 프랑스군이 해안분지 확보에 중요한 모택동고지와 김일성고지를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점령하였다. 서양 화채그릇과 비슷한 지형이라 ‘펀치볼’이라 명명된 이곳은, 을지전망대를 올라가는 중간 언덕에서 확연히 볼 수 있었다. 마치, 한라산의 백록담과 비슷한 지형으로 오목하고 아담한 경치 좋은 이 마을은, 헬리콥터로 벌이는 공중 강습작전인 헬리본 작전을 처음으로 했던 곳이었다.
양구에서의 첫 날, 전동차로 깊숙이 내려가 제 4땅굴을 들어가 보았다. 마치 대단한 천연동굴을 관광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50년 북한 공산당의 전쟁 도발 이후, 70년대의 광기어린 땅굴 침략 이후 지금까지도, 북한은 끊임없는 적화야욕으로 이 땅을 진저리치게 침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오후에 트레킹을 하려 사무소를 찾아갔다. 민간통제구역으로 50여 년 만에 자연 생태관광 코스의 일환으로 제한적으로 개방된 펀치볼 트레일은 4개의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먼 맷재길과 만대벌판길, 평화의 숲길, 오유밭길로 한 코스 당 약 15km 정도 길이로 6∼7시간 정도 소요된다.
이 중, 이틀 동안 두 개의 코스를 트레킹 하였는데 안내를 해주시는 트래킹 가이드 분들의 노고에 고개가 숙여졌다. 무엇보다 해안지역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마을문화를 듣는 평안함과 함께, 곳곳에 아직도 지뢰매설지역으로 빨간색의 경고 팻말이 있어 긴장감도 들었다. 따라서 이 근처가 여전히 얼어붙은 삼팔선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곳 한 겨울의 자작나무숲이 마치 시베리아의 숲에 온 것 같은 그 특유의 자태를 보이며 드문드문 나타났다. 어쩌면 유령 같기도 한, 우수 어린 겨울나무, 자작나무의 피부는 푸른색보다 더욱 투명했다.
자작나무 숲을 얼마나 걸었을까. 어린 시절 막연히 꿈꾸었던 유량하고 무심하기도 한 그 징한 추억이 만대 벌판길에 칼로 잘라내듯 나에게 일격을 가했다. 그 일격은 철조망은 녹슬고 총칼은 빛난다는, 그러기에 싸워서 공을 세워 대장도 싫고 이등병 목숨 바쳐 고향을 지킨다는 노래를, 군대시절 수색의 한 대포 집에서 불렀던 아련한 향수마저 떠오르게 한다. 박수근 미술관과 소지섭 길이 있는 양구의 유명한 관광지 두타연 트레일 보다, 이곳 펀치볼 트래킹을 하며 느낀 감흥이 더 컷던 것은, 아마 이 전투가 벌어질 때 태어난 세대여서 그러하리라.
펀치볼을 떠나는 날, 가칠봉 능성에 위치한 을지전망대를 올라갔다. 그 곳은 군부대가 허가를 해준 대한민국 최고의 살아있는 안보관이었다. 그곳은 매서운 정적만이 감돌았다. DMZ는 침묵 그 자체였다. 피아간 소총으로도 관통할 수 있는 북한 초소와 실 거리로 불과 2km 남짓한 이곳에서, 우리의 깃발을 들고 있는 육군 제 12사단의 을지대대 병사들에게 국민들은 이런 말을 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당신들, 병사들을 위한 아다지오를 들려주고 싶다고……”
※ 대전 출생, <충청신문> 논설위원, 기행수필집 고마코의 설국에서 블랑세의 뉴올리언즈까지(2009),
내 마음속 보석
이 명 년*
지병인 천식의 악화로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아들이 병원에 들렀다. 혼자가 아니고 낯선 처자를 데리고 왔다. 아들에게 사귀는 여자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너무 뜻밖이라 놀랐다. 후배라고 인사를 시키는데, 한 눈에 아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아들의 표정에 예사 사이로 보이지 않고 좋아하는 모습이다. 내 승낙을 얻기 위해 첫 대면을 꾀했다는 것이 짐작되었다. 이때가 며느리와 나와의 첫 대면이었다.
무의식중에 인사는 받았는데 내 마음에 며느리 감으로는 별로 탐탁지 않았다. 외관상으로 보기에 몸이 너무 허약해보였다. 그 처자를 배웅하고 되돌아온 아들에게 “혹시 저애 몸이 아프다는 소리 안하던?” 하고 걱정스러워 물었다. “같은 방 후배로 2년이나 함께 일하고 있는데요. 몸이 아프다는 말은 못 들었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래 알았다.”고 하자 아들은 “종교는 엄마가 기도교인 아니면 승낙 하시겠어요.”라고 반문하기까지 한다.
“보통 까다롭지 않은 네 마음에 든다니, 어쩌면 낯선 처자 골라서 선보러 다니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별로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아들의 선택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고, 쉽게 승낙했다. 그렇다고 다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아들이 자기 인생의 동반자를 선택할 때 쉽게 결정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하여 아들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한편 내 마음의 10점에도 부합했다. 나도 7남매의 맏이로 해군 제대 후 직업도 없이 부모 밑에서 소일하는 남자를 일생을 같이 할 남편감으로 선택했다. 그때 주변 사람 모두가 반대했었다. 형제들은 나를 보고 고생이 눈앞에 훤하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생각을 꺾지 않았다.
그 어떤 조건보다도 정직하며, 삶의 올바른 가치관을 소유한 사람인가를 먼저 테스트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어렵고 힘든 삶이었지만, 스스로 선택한 결혼에 한 번도 후회 하지 않고, 서로 아끼고, 이해하고, 부족한 것은 채워가며 아름답게 가정을 가꾸어 왔다.
나는 내 아들의 아내로서 꼭 기독교인을 원했다. 100점 만점에 기독교인이면 50점, 같은 분야의 학문을 하면 30점, 내 점수는 10점, 100점 만점에 90점이면 만족하겠노라고 했다. 이런 조건이 갖추어진 배필을 만날 수 있기를 마음으로 늘 기도했다. 가정환경, 건강, 인물 그런 것은 따지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도의 응답이라 여기게 되어 아들과의 결혼을 흔쾌히 승낙했던 것이다.
혼인날을 정하고 신혼살림 꾸릴 집을 구하려고 며느릿감을 불렀을 때이다.
“저는 시부모님과 함께 살겠습니다.” 하는 처자의 말에 나는 깜짝 몰랐다. 요즘 어떤 며느리가 시부모를 모시고 살겠는가. 나 역시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우리 집은 삼대가 함께 살고 있었다. 시중들어야 할 어른만도 네 명이다. 애들 할아버지는 바깥출입은 하실 수 있었지만, 노환으로 누워계신 할머니는 대소변도 못 가리시는 처지였다. 시집살이 하겠다는 며느리의 마음이 고맙기는 했으나 견뎌낼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따로 분가해서 너희라도 편히 지내거라.”고 했다. 며느리 대답이 “가족이 같이 부대끼며 살아야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요.”라고 한다. 며느릿감은 막내로 사랑을 받으며 공부만 한 처자이다. 아무 불평 없이 시집살이를 견딜 수 있을까? 혹여 배우자의 같이 살아야 한다는 강요 때문은 아닌지 여러 가지로 염려가 되었다.
며느리가 함께 산다고 말은 그리하였어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때때로 시부모와 부닥치며 불평불만이 쌓이면 자연히 아무리 금슬이 좋은 부부도 부부갈등까지 이어질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자식과 부모 사이도 순간순간 미움이 싹트고 불화만 깊어질 것이다. 처음부터 분가 시킨 것만도 못한 상황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방을 차리는 것도 문제였다. 방은 다섯이라도 제일 큰방 순서로 노부모님, 그 다음은 우리부부가 사용했다. 신방을 차려야 할 방은 주방 옆에 위치해 있다. 그것도 가까스로 침대 하나만 달랑 놓을 수 있는 작은 방이었다. 새신부가 옷장하나 들여 놓을 수가 없다. 이런 방을 며느리가 보면 붙들어도 분가한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방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반응이 뜻밖이었다. 방을 본 며느리는 내 마음을 읽기나 한 듯 “어머니, 이것보다 더 작은 지하 셋방에서 어렵게 시작하는 사람도 많아요.”라고 한다. 그 대답에 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 마음에 자리를 차지한 며느리의 첫 번째 대답이었다.
결혼 예물에, 어머니께 드리는 선물이라며 내가 가장 재미있어 하는 탐정소설을 십여 권 들고 왔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며느리에게 결혼 예물로 탐정 소설을 받다니, 아들이 “우리엄마 탐정 소설만 있으면 좋아 한다.”고 조언한 것이다. 며느릿감은 내가 무안해 할 까봐 “어머니, 저도 탐정소설 좋아해요.”라고 한다. 내 마음과 조금 통할 것 같은 기분에 며느리를 다른 각도로 생각하게 되었다. 내 성격을 잘 아는 셋째 딸아이가 걱정이 되었던지 “엄마 며느리라 생각 말고 딸로 생각해, 그럼 같이 사는데 문제없어.”라고 한다.
결혼 십 여일 후의 일이다, 며느리는 난데없이 생각지도 않은 돈 봉투를 내밀었다. “무엇이냐?”고 물었다. “어느 회사에 논문이 당첨되었는데 상금이예요. 어머니 쓰세요!” 한다. 뜻밖의 일이다.
결혼 전 학위 과정을 밟고 있을 때, 어느 회사에 제출한 논문이 당첨되어 상금의 일부를 이제 받았단다. 내가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도로 건네주었다. 그러나 며느리는 막무가내로 내려놓았다. “친정 부모가 받아야 할 것을 내가 받는구나.” 하는 미안함과 참으로 시부모를 섬기고자 하는 갸륵한 마음에 고마움이 점철되었다. 그래서 “얼마는 친정 부모님께 갖다 드리라” 하고 나머지는 염치없이 받았다.
물질이 생겨서 기분이 좋다는 생각보다는 며느리의 행동 하나하나에 드러나는 꾸밈없는 모습이 믿음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결혼 후 첫 달, 아들의 월급 통장을 며느리에게 넘겨주었다. “어머니 제가 이 큰 살림을 어떻게 해요”라고 한다. 어머님이 맡으시고 용돈을 타 쓰겠다고 안 받는다. 그때부터 나는 며느리를 맞은 친구들 중 유일하게 아들, 며느리의 월급 수급자가 되었고 마음속에 늘 뿌듯함을 느끼며 살고 있다.
더욱이 나를 감동케 한 것은 며느리의 퇴근 후에 하는 행동들이었다. 집안일에 지친 나를 보며 “어머니 너무 피곤해 보이셔요, 쉬셔요.” 하고는 저는 쉴 틈도 없다. 거동을 못하시어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시는 시할머니의 오물을 다 치우기까지 한다. 제 아기도 길러보지 않은 갓 결혼한 새색시였다. 그런데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깨끗이 씻겨 드린다. “비위가 약하면 밥도 못 먹을 텐데” 하고 걱정하면 “어머니 이것도 교육이에요”라고 대답한다. 거기에서 나는 진정으로 며느리의 아름다운 마음을 읽는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사랑의 헌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손자가 태어 난 이후에도 며느리는 그러했다. 나는 환자인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방에 손자를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다. 오랜 세월 환자로 누워계신 곳이라 아무리 그 방을 깨끗이 한다고는 해도 불쾌한 냄새도 날뿐더러 며느리가 언짢아 할 것 같아서이다. 그러나 며느리는 퇴근만하면 아이를 안고 들어간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온종일 심심하셨을 거라면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아이를 안겨드리며 말동무를 해 드린다. 그러한 며느리의 모습을 보면서 그 곱고 갸륵한 마음 씀씀이를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누구나 외모를 먼저 보게 된다. 평소에는 말수가 적다. 외관상 보기에는 무척 쌀쌀하고 차가워 보인다. 그런데 말 한 마디 한 마디 건넬 때마다 속 깊게 따뜻이 말을 하고 행동한다. 행동은 내적인 모든 면을 드러내 보인다고 알고 있다.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진정으로 넉넉하고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가 아니면 무의식적 행동으로 드러날 것이다.
큰시누이의 아들인 조카의 성적이 부족할 때도 누구하나 도와주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스스로 조카를 매일 퇴근 후 불러 부족한 부분마다, 일일이 가르쳐 주었다. 바쁜 일상에 출퇴근의 피로가 많이 쌓여 힘들었을 터인데도 귀찮은 내색을 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며느리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이다. 고운 마음씨는 막내로 부모형제의 많은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는 증표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신앙의 사랑의 바탕 위에, 학교, 사회, 지식의 습득 과정에서 올바른 가치관을 소유하였음을 보았다. 행동과 마음의 일치로 삶의 자세가 분명하고 흐트러짐이 없다.
또 한편, 젊은 처자들이 거의 다 기피하는 힘든 시집살이를 선택했다. 그 용기는 일생을 같이 할 배우자를 믿고 신뢰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장차 남편이 될 아들의 의견을 따르고 결단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어렵고 힘든 며느리의 결단에 우리는 한 가족 구성원이 되었다. 서로가 부족함은 감싸 안아주고, 모자람은 채워주는 마음의 넉넉함이 있다. 지금까지 불평 없이 서로 아끼고, 소중히 하며, 함께 할 수 있었다고 자부한다. 한편, 며느리가 온 이후로 내 남편의 행동과 모습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남편은 무뚝뚝한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침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고, 직장에 다니는 며느리의 출근길을 도왔으며, 손자도 손수 돌보기 시작했다.
집안에 큰 일,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가족형제의 생각을 읽고, 행동으로 표현하는 며느리의 아름다운 마음 씀씀이를 읽는다. 하나하나가 이십여 년 세월 속에 갈고 다듬어져서, 내가 가장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며, 아끼는 내 마음의 보석이 되었다.
지난 날, 나의 시부모님께서 나를 귀이 여겨주시고 마음의 보석으로 아껴주셨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사회 첫 수업
“뭐? 아르바이트!”
깜짝 놀랐다.
대학교 1학년이 되었어도 아직 어린아이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어릿광대 노릇을 다 받아주었다. 그런데 방학동안 손자가 돈 벌이를 하겠다고 한다. 아빠와 노트북 값을 반반 지불하기로 약속하여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한다.
“일자리는 어느 곳이니”
며느리에게 물었다.
“서울 이예요”.
“왠 서울?”
“서울 ‘자이소’라는 떡 집에서 일하기로 했데요. 어머님이 함께 가셔야 할 것 같아요.”
며느리의 대답이다.
“제가 먼저 같이 가서 며칠 출근을 돕고 안정되면 그때 봐서 어머니와 교대해야 할 것 같아요.”
손자 밥해주는 일이야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런데도 그 말을 듣는 순간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워 졌다. 손자가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평소와 달리 할머니 말은 귀담아듣지도 않을뿐더러, 엉뚱하니 말에 트집만 잡으며 반항하기 일쑤이다. 그런데 서울에 가서도 서로 부닥치면 나와 손자 사이가 멀어져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지지 않을까하는 염려가 먼저 앞선다.
처음에는 며느리와 손자가 먼저 올라가 며칠 동안은 손자의 출근을 돕고, 출퇴근이 조금 익숙해지면 나와 교대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 서울 가셔야하겠어요”라고 한다. 며느리가 주말에 채마밭에 다녀오더니 몇 시간 쪼인 볕에 몸이 안 좋아 병원엘 가야한단다. 몸이 불편하다는데 거절할 수도 없어서 무거운 마음으로 손자와 함께 서울을 향해 집을 나섰다. 그런데 현관을 나서자 난데없이 손자가 다정스럽게 내 옆으로 다가온다. 아픈 무릎에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나를 옆에서 팔도 잡아준다. 내가 갖고 있는 짐도 자기가 들겠다고 빼앗아간다. 나는 손주의 모습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손주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나와 함께 살았다. 하나밖에 없다고 불면 나를까, 쥐면 꺼질까,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어른 넷이 이 세상에 우리에게만 있는 가장 귀한 손자로 여겼다. 어른들의 지나친 사랑의 잘못된 사고가 아이의 버릇을 잘못 가르친다는 아들, 며느리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들, 며느리의 말도, 주변 사람들의 말도 나는 묵살했다. 사랑을 심어야 훗날 사랑할 줄 안다는 생각에 잘못된 습관도, 그저 때가 되면 고치려니 덮어주고, 무조건 감싸 안아 주었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로, 밤이면 할머니가 외롭다고 곁을 떠나지 않던 마음이 부드럽고 사랑이 많은 손자였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진학 하고난 이후부터이다.
늦게 찾아온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어느 날부터인지 할머니가 눈 밖에 났나보다. 할머니의 말끝마다 못 마땅해 하며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학교에 다녀와서도 기분이 좋아 보일 때는 이야기도 잘 한다. 얼굴 표정이 굳어져서 들어오면. 학교 다녀왔다는 인사조차 없다. 방에 들어가면 방문도 걸어 잠그고 대꾸도 하지 않는다. 고등학교 생활에 누구나 한번은 겪어야 되는 대학입시라는 무거운 짐이 손자에게는 유달리 힘겨워 보였다.
오늘, 서울로 향하는 열차안의 손자의 모습은 반항심으로 가득 찬 불손한 모습의 손자가 아니고 가족들의 사랑을 몽땅 누리며 자라, 착하고 순박해 보이는 소년의 때를 갓 벗은 앳된 청년의 모습이다. 이제 대학교 1학년 첫여름 방학인데 손자가 아르바이트를 할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조차 안 했다. 더구나 집을 떠나 잠깐이지만, 서울에 일자리를 정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손자가 스스로 사회에 내 딛는 첫 걸음이다. 화원 안의 꽃같이 자라 험난한 세상에 잠깐이나마 자리를 옮기는 사회수업의 첫 관문이었다. 아무리 짧은 기간의 아르바이트라고 하지만 잘 견디어낼 수 있을까? 그것도 근무시간이 낮 시간이 아닌 오후 여덟시에 출근하여 아침 일곱 시에 퇴근하는 밤 시간이었다.
서울 이촌동 고모 집에서 문정동 일터까지는 버스로 한 시간 이십 분이나 소요된다고 한다. “며칠이나 견디어 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가득 찬 할미의 착잡한 심정을 무엇으로 표현하랴? 대학생이 된 손자를 아직도 믿지 못하고 서너 살 철없는 어린 아이를 물가에 내 놓고 불안에 떨며 안절부절 못하는 할미의 모습이다. 하루나 이틀 다니다 힘들다고 그만둔다면 아예 처음부터 가지 않는 것이 낫지 않을까? 온종일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이 손자가 일터에서 아무것도 못한다고 구박받고 쫓겨 오는 모습만 보인다.
그런데 뜻밖에도 왼 종일 염려했던 할미의 잘못된 판단을 깨우쳐 주기라도 하듯, 손자는 첫 출근을 잘 마치고 돌아왔다. 힘은 들어도 할 만하다면서 열심히 계약한 대로 한 달 일을 하겠다고 한다. 낮 시간을 잘 조절하여 잠을 충분히 자고, 스스로 일어나 준비하면 된다고 말한다.
손자는 어려서부터 남다르게 곤충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많은 호기심을 보였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아주 작은 좀벌레까지도 소홀히 하는 법이 없이 자세히 관찰하는 것을 소일로 삼았다. 또한, 곤충이나 작은 벌레까지도 하나하나 서식지의 분포나 먹이며 번식을 어떻게 하는지 세밀하게 관찰하고 종을 구분하며, 다른 것에는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없이 손자의 지금의 다른 행동들이 신기했다.
하루 사이에 변모된 손자의 태도가 낯설고 손자가 아닌 의젓한 낯선 청년이 눈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한편 대견스러워 보이며 제법 어른스러워 보인다. 이제는 다 자랐구나! 철없는 어린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삶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내 마음은 기쁨으로 소용돌이 쳤다.
서울에서의 출근 둘째 날이다. 손자가 그곳에서 만든 떡을 가져왔다. 일하는 곳 사장님이 보냈다고 한다. 손자는 사장님이 순진하고 착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곳이 바로 ‘자이소’란 떡집이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월매출을 일억 오천만원이나 올리는 박 씨 형제이다. 두 형제는 대학 졸업 후에 취직을 못해서 외삼촌 집 떡 방앗간에서 일을 하다 아이디어가 떠올라 창업을 했다고 한다.
대다수 사람들이 방앗간이나 떡집은 나이 드신 분들이 운영한다고 알고 있다. 그런 생각의 편견을 깬 이 시대에 걸맞은 떡집이다. 기존의 떡집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새로운 발상의 마케팅으로 홈페이지까지 운영 한다고 한다. 인터넷판매 사이트를 통해 주문을 받고, 밤새도록 떡을 만들어 아침에 전국에 배달을 한다. 일반 떡집과 달리 다양한 모양과 색다른 맛으로 맞춤형 제작을 통한 주문생산으로 그들은 성공한 것이다. 이곳 젊은 세대의 도전정신과 창의력에 놀라고 감탄을 보낸다.
한편, 한 달 계약기간의 아르바이트로 시작된 일터였으나 손자의 사회 현장의 첫 수업을 통하여 얻어진 수고의 떡을 맛보며 내 마음은 뿌듯하고 큰 기쁨으로 가득 채워졌다.
대학 첫 여름방학 기간 동안, 손자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하지만 훗날, 학업을 마치고 손자가 가고자 하는 자기선택의 길로 걸어갈 때, 이 경험이 하나의 자산이 되기를 마음속으로 염원해 본다.
삶의 이면
눈앞에 펼쳐진 황홀한 모습에 너무 놀라워 입이 딱 벌어졌다. 현실인가. 혹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광경은 아름답다 못해 장관이었다. 처음 본 날의 아름다움의 기억은 오랜 시간 잊지 못할 것 같다. 나는 눈이 부셔서 똑바로 바라 볼 수조차 없었다.
백설의 옷으로 치장하고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줄 알았다. 천사들이 푸른 무대 위에서 두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을 배경삼아 너울너울 춤을 춘다고 생각했다. 은빛의 찬란함은 차라리 눈이 부셨다.
“애들아 빨리 일어라 여기 좀 보아라.”
큰 소리로 아들과 며느리, 손주 등 온가족을 깨웠다. 동녘 하늘에 아침 해가 붉은 빛을 펼치며 떠오르자, 춤 사이사이 날개깃에 내리쬐는 햇빛이 은가루를 쏟아 놓은 듯하다. 찬란한 빛이 온 동내 사방팔방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그것은 마치 새날이 밝아 오고 있음을 알리는 듯했다. 어서어서 일어나라고, 날개깃소리로 천지를 깨운다고 생각했다. “즐거운 날 되세요!”라며 굽실굽실 인사도 한다.
평소에 나는 아침밥을 지으려 다섯 시 반에 일어난다. 주방에 들어가 싱크대 앞, 열려진 창밖을 바라볼 때였다. 아침이 서서히 밝아오면 흰 물체는 그제서야 백로로 보인다. 봄 어느 날 부터인지 백로 천여 마리가 무리를 이루어서 앞산을 뒤덮었다. 그 옆으로는 정사면체로 보이는 아파트 한 동이 서 있다. 백로와 어우러지듯이 아파트 벽면에 ‘자연’이라는 글자가 써져서 한층 조화를 이루고 있다.
주방에 들어서면 나의 하루는 백로의 날개 춤으로 즐거워진다. 눈은 시도 때도 없이 앞산을 바라보며 몇 마리일까? 수없이 헤아리다 놓치곤 한다. 한편, 아들과 손자는 그 아름다운 광경에 수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아예, 베란다에 사진기까지 설치하고 서 말이다. 나는 한낮에 먹이를 찾아 비행하는 백로의 모습을 바라본다. 질서 정연하게 하늘을 덮어 곡예를 하는 모습이다.
옛 노인들의 이야기에 백로에 관한 여러 해몽이 있었다. 백로가 무리를 지어 자기 집 논에 앉아 먹이를 주워 먹는 것을 보면 장차 자기가 의식주가 풍부해져서 큰 잔치를 베풀 일이 생기거나, 자기 세력권내에 종사하는 상인들과 큰 거래를 할 일이 있게 된다고 한다. 백로가 자기 품안이나 치마폭에 안기면 장차 귀하게 될 자식을 낳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백로는 그 털이 순백색이니 사람의 마음이 깨끗함을 나타내기에 족하다고 말했었다. 꿈에 나타나면 복을 얹혀 준다는 백로이다. 그래서 나는 백로가 아침마다 이 ‘궁동’을 축복으로 깨운다고 생각하며 즐거움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우리가족이 서울에서 처음 궁동으로 이사를 할 때이다. ‘궁동’이란 이름이 마음에 딱 들었다. 그냥 ‘궁동’하면 대궐이 있는 동네가 아닌가? 우리 집이 대궐 안에 있다고 생각하자, 너무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알고 보니 ‘궁’자가 집궁이 아니고 활궁(弓)인 궁동이었다.
지명의 내력을 알고 난 이후부터 나는 “이 동네가 그래서 학문의 전당이 되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학교를 오가는 활기 넘치는 학생들을 대할 때 마다 모두가 손자인 듯,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백로는 여름철새로서 긴 다리를 가지고 있으며, 날 때는 목을 S자로 굽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네 번째 발가락이 길어서 나뭇가지를 쉽게 잡을 수 있고, 편하게 휴식도 취한다. 백로는 집단으로 이동하여 나무에 둥지를 짓고 번식을 한다.
한여름이 거의 다 지나갈 무렵이었다. 슈퍼에 찬거리를 사러 나섰다가 우연히 길에서 백로가 내려앉는 산 바로 아래 사는 동네 분을 만났다. 그분은 원룸임대로 생활을 꾸리시는 분이었다. 그런데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어디 몸이 불편하셔요?”
“생활하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학생들이 다 나가고 빈 방이야요. 그래서 너무 속이 상해서요!”
“왜 나갔는데요?”
“백로 때문에 방을 보러 왔다가는 냄새에 머리를 흔들고 그냥들 돌아가요!”
“백로의 오물로 인해 너무 더럽고 냄새가 진동해서 코를 막고 다녀요. 그 뿐 아니고 아침마다 새끼들의 나르는 연습에, 괙괙 소리에 짜증이 나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요!”
집주인인 본인도 이사하고 싶은데, 누가 그런 곳에 이사 오겠느냐면서 눈물을 글썽인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너무 놀라고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그 휘황찬란한 아름다운 모습에 즐거워했던 것이 내 마음이었다. 백로의 아름다움 이면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추한 모습이 곁들여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삶의 이면에 감추어진 부조화의 현상을 읽는 듯했다. 내가 보고 느낀 황홀함 뒤에, 다른 누구에게는 엄청난 피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잠시, 내 자신을 돌아보았다.
“무심코 내뱉은 농담이 혹여, 가까운 이들의 마음속에 아픈 상처를 남기지는 않았을까?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고 즐겼던 많은 일들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프고 슬픈 일들은 아니었을까?”
이제부터는 삶의 이면들을 살펴보며 천천히 살아가야 하겠다.
※ 전북 여산 출생, 한밭대 문학창작과정 수료, 한국방송통신대학 국문학과 4, echlmn@hanmail.net
일석삼조의 일하기
조 영 숙*
삶은 태어나서 먹고, 놀고, 배우고, 일하고, 쉬고, 떠나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배움의 과정을 마치고 일해야 하는데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 중년들은 더 일할 수 있는 상황인데 구조조정이나 사업의 부진으로 일자리를 잃는다. 노후가 마련되지 않은 노인들도 일을 찾기는 마찬가지이다. 제한된 일자리를 놓고 세대 간의 갈등의 기미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일석삼조의 일을 할 수 있어 기쁨이 배가 되었다.
처제가 연구소를 운영한다. 연구소에서 지자체의 용역을 받아 시민 만족도 조사를 실시하는데 전화설문조사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이 일은 내게 세 가지 유익을 주었다. 첫째는 경제적 소득이다. 대부분 일을 하는 1차적 목적이 돈을 버는 것이다. 둘째, 이 일을 통해 처제의 일을 돕는 기능을 한다. 설문조사를 하게 되면 실제 조사를 하지 않고, 한 것처럼 조사자가 작성해도 사실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조사자를 완전 믿을 수 있으니 결국 처제의 일을 돕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셋째, 이 일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잘하는 일로 아내와 처제가 인정하는 바다. 특히 칭찬에 인색한 아내는 이 일을 할 때는 나를 존경한다는 말도 아끼지 않는다. 자신은 그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발주 지자체로부터 설문조사를 잘한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지난해 아르바이트로 설문조사를 시도했으나 며칠이 못되어 포기하고 설문지를 되돌려오는 사태를 빚었다. 전화설문조사는 몇 가지 어려움이 있다. 첫째, 전화로 설문조사를 시도할 때, 당사자는 조사자를 쉽게 믿어 주지 않는다. 둘째,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느냐?”는 등 조사에 비협조적이고 조사자에게 부정적인 발언을 하는 수가 있다. 셋째, 당사자가 시간을 잠시 내어 답변을 해주는 친절을 받기 어렵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변에 전화설문조사를 할 알바인력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처제와 아내는 나에게 이 일을 해줄 것을 간절히 요청했다. 사실 이번 가을에는 내가 꼭 듣고 싶은 ‘라이프 코칭 컨설턴트’ 과정에 등록해 수업에 충실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상황이 나만의 생각을 할 수 없어 가능한 빨리 전화설문조사를 마치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몰두하기로 했다. 전화 상담을 오래 해온 나는 상대가 비난을 하거나 화를 내도 이를 공감하고 이해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리고 거절하든지, 전화가 걸리지 않든지, 부정적인 상황에 접해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 받아들이며 계속 전화설문조사를 진행한다. 당사자가 이 조사에 답하도록 선택된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고 짧은 시간에 마칠 수 있음을 알려준다. 대부분의 조사자들이 이런 요령을 익히지 못하고, 힘든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한다. 상대가 자신의 인격에 대해 모독하거나 자신에 대해 화를 낸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내게 있어 전화설문조사는 경제적 소득을 올리고, 처제의 일을 돕고, 아내에게 인정받는 일석 삼조의 일인 것이다.
노년기를 앞둔 나는 앞으로 일을 하는데 일석 삼조의 원칙을 지키고 싶다. 첫째는 소득이다. 둘째는 봉사다. 셋째는 나의 즐거움이다. 일을 할 때 이 세 가지가 버무려진 일을 할 수 있다면 나를 고용하는 사람이나 기관은 적은 비용으로 나를 쓸 수 있고, 나는 봉사와 즐거움으로 일을 감당하므로 상호 ‘윈윈’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100세 시대를 바라보며 노인도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노후 준비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노인의 문제로 흔히 경제적 문제, 질병의 문제, 외로움의 문제, 할 일이 없음을 든다. 한 번에 할 일도, 경제의 문제도, 외로움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일하는 사람은 건강해 질 수 있다. 물론 건강해야 일을 하지만 말이다.
돈은 노인에게 필요하다. 자신이 즐겁게 봉사할 수 있는 영역을 발견할 수 있다면 노년의 일은 생업이 아니라 취미가 되고, 놀이가 되고,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시간제로 일하는 것이 노년에는 더 어울린다. 돈도 필요하지만 자유로운 시간도, 쉼도 필요하다. 정규직이 아니어도 좋다. 인생의 후반기, 너무 무겁지 않게 일을 대하고 싶다.
※ 강원도 강릉 출생,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대학원 수료, <글샘회> 동인, 양평문협회원, ysc1951@naver.com
아듀 4249
이 경 숙*
고향의 터미널 앞 좁은 도로는 늘 택시 기사들이 도열해서 도로의 한 쪽을 점령하고 있다. 차를 잠깐만이라도 주차하려 하면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질러댄다. 당신들이 이 도로의 주인이라도 되느냐고 싸우고 싶다가도, 먹고 사는 일이 걸린 사람들이다보니 그러려니 하고 돌아 나오곤 했다.
그 날은 서울 가는 언니의 짐이 많기도 해서, 조금 가까운 곳에 주차를 하고 짐을 내리려는데 여지없이 달려와서 빨리 차를 빼라고 삿대질이다. 짐이라도 내리고 뺀다는 나에게 눈을 부라리며 빨리 차를 빼라고 성화다. 도열한 택시 틈에 일반 차량이 끼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느냐고 하니까, 무슨 외계인을 바라보듯 경우 없는 아줌마 취급을 하며 안 된다고 난리다. 짐만 내리고 잠시 차를 저만치 도열한 택시 맨 앞으로 빼며 드는 생각이 “비싼 외제차를 운전하고 왔으면 저랬을까, 내가 예쁘고 젊은 아가씨였으면 저 남자들이 저리 퉁명할까” 하는 아줌마 자격지심 같은 게 슬며시 들어서 쓴 웃음이 났다.
그렇게 서울 가는 언니를 배웅하고 나서, 성화를 부리던 택시 기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틈을 지나 내 차에 올라서 시동을 거는데 걸리질 않는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무리 해도 안 되어 할 수 없이 보험회사에 도움을 청하고 기다렸다. 잠시 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서비스 차량이 왔다. 갑자기 서비스 차량이 ‘엥엥’ 거리며 내 차 곁으로 다가오니, 삼삼오오 서서 이야길 나누던 조금 전 택시 기사들이 슬금슬금 내 차 주위로 ‘무슨 일인가’ 하고 다가 왔다. 좁은 읍내의 기사들이라 서비스 기사랑 택시 기사와는 잘 아는 사이인 듯, 고객이 부르면 빨리빨리 총알처럼 튀어오지 행동이 그게 뭐냐며 농담들을 해댔다. 아까 주차 때문에 말씨름을 했던 터라 한껏 마음이 상해 있는데 그들 앞에서 시동마저 안 걸려 서비스를 부르니 기분이 영 엉망이다. 이런 똥차를 가지고 택시 앞을 가로 막았느냐고 비웃는 것 같아서 더욱 자존심이 상했다. 그들은 심심하던 차에 내 차를 죽 에워싸고 기사가 보닛을 열고 들여다보는 곁에서 자기들끼리 시동이 걸리지 않는 원인을 분석하며 진단을 하느라 입씨름들이다. 그 가운데서 여자 혼자인 나는 더욱 할 말이 없어서 쭈뼛거리며 서 있으려니 영 창피한 게 아니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기사는 시동을 걸어주면서, 차를 참 오래 탔다고 하며 집에 갈 때까지 시동을 끄지 말라고 당부한다. 알았다고 대답하고 창피해서 얼른 운전석에 오르려는 순간, 택시 기사들 중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며 혹시 누구 아니냐고 얼굴을 들이민다. 자세히 보니 중학교 동창생이다. 사십년이 넘어서 처음 만나는 동창생을 하필 거기서 그렇게 만날 건 뭐고, 왜 그 남자동창은 나를 알아보았는지도 원망스러워 내 이놈의 차를 집에 가는 즉시로 폐차를 시켜 버리겠다고 투덜거리며 집으로 왔다. 정말 자존심이 상하고 뭐 팔린다는 말은 이럴 때를 위해서 생겼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오래 전부터 녀석은 이런 저런 증상으로 나를 돌아봐 달라고 신호를 보냈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임시방편으로 정비기사에게 떠넘기고 모른 체 타고 다니길 15년이다. 한 번 물건을 사면 쉽게 버리지 못하는 성격에, 차도 한 번 구입하면 그저 수명이 다 할 때까지 타고 다니면서도, 기계치인 주인은 낡고 닳아서 헐떡이는 녀석과 소통이 없었다. 내 몸이 아프면 병원 가고, 약 먹고 하면서, 돈 들이기 아까워 나의 발이 되어 준 녀석의 비명은 듣지 못했나보다.
그 날 이후로, 녀석은 수시로 발걸음을 멈췄다. 할 수 없이 폐차시키기로 결정을 했다. 차 안에 있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면서 피붙이 하나 떠나보내듯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거꾸로 매달려 끌려가는 모습을 보니 왜 그리 마음이 애잔하고 미안한 지, 다시 가서 잡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시며 선물로 우리에게 온 나의 첫 차, 15년 동안 참 많은 일들이 그 바퀴 위에서 지나갔다. 초보 운전으로 한계령을 넘던 날의 위험천만했던 우리를 지켜 주었던 든든한 네 바퀴, 한 밤의 친정어머니 부고로 달려가던 슬픔의 바퀴, 아들 대학시험 날의 희망의 바퀴…… 우리 가족의 든든한 다리가 되어 주었던 녀석의 노고를 잊고 택시기사들 앞에서의 창피만 생각했던 주인은, 떠나는 녀석의 등 뒤에서 부끄러워졌다. 여행을 좋아하는 주인을 만나, 슬프나 즐거우나 달려가던 네 바퀴 위로 수많은 나날들을 함께 했다. 나를 위무해주고, 안전한 출퇴근길이 되어준 녀석은 이제 폐차장에 가서 또다시 장기 기증을 하게 될 것이라고 내게 마지막 노자 돈을 거꾸로 주고 갔다. 때로는 떠들썩하게 웃으며, 고삐를 당기면 달려가고, 사는 게 쓸쓸한 날 눈물 바람에 시동을 걸어도 언제나 묵묵히 나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던 나의 애마였다. “그대가 있으므로 지난 시간이 안전했다.”라는 감사를 떠나는 그의 뒷모습에 보내며, 언제나 기억하리라고 손때 묻은 열쇄를 고이 넣어 두었다. 시동을 걸면 부르릉 엔진에 영혼을 불어넣듯이 내 삶에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던 나의 애마였다.
4249여! 이젠 영원히 아듀~~
※ 충북 보은 출생, 계간 ≪수필춘추≫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상상의 힘≫ 작품상(2009), 한국농촌문학상(2014) 수상, asysook@hanmail.net
무량사 가는 길
이 흥 종*
예전부터, 한 번쯤 찾아 가보고 싶은 사찰이 있었다. 바로, 부여 만수산 기슭에 자리한 ‘무량사’이다. 그렇다고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했거나, 서둘러 가봐야겠다는 의무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린 매월당 ‘김시습’을 접한 것은 학창시절, 어느 수업시간에서였다. 그가 말년에, 무량사에서 거처하다 생애를 마쳤다는 사실은 ‘김시습’과 ‘무량사’와의 관계가 내게는 일종의 퍼즐처럼 느껴졌다. 그 생각은 내게 오랜 여운으로 남아, 한 번쯤은 가봐야겠다는 잠재의식으로 남은 듯하다.
한동안 무량사는 나의 기억에서 멀어져 망각의 탑을 쌓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작년 봄 여행길에, 잠시 사찰을 들를 기회를 갖게 되었다. 경내는 4월의 신록과 햇빛이 한창 어우러지는 중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의 미로를 더듬으며 무량사 경내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의 곁에는 친구 K가 동행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 사찰이 위치한 충남 부여군 외산면이 고향이었다. 나는 친구의 도움을 받으며 보물 제356호로 지정된 ‘극락전’을 둘러보고 ‘오층 석탑’과 ‘석등’을 차례로 보았다.
나는 예사롭지 않은 석등의 단아함을 뒤로하고, 예전부터 궁금해 했던 김시습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부속건물에 들어서자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누렇게 바랜 김시습의 영정(影幀) 한 점이 나를 맞이했다. 사찰 입구 한 켠에는 지방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김시습의 부도가 자리하고 있었지만, 김시습의 모습이나 당시의 행적을 가늠하기에는 처음부터 쉽지 않은 문제였다.
오랜 세월, 행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말없이 서 있는 부도와 빛바랜 영정 한 점이 호기심만으로 훌쩍 찾아온 불청객에게 무엇을 더 말해줄 수 있으랴. 시간을 거꾸로 돌리려던 생각을 접어두고, 나는 앞서가는 친구를 따라 다음 행선지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늘 궁금해 했던 무량사의 사찰 탐방은 30분짜리 단막극처럼 싱겁게 끝이 났다. 그것도 사전 준비나 예정에도 없는 1박 2일의 여행길에 잠깐 들른, 아쉬움만 남긴 답사 아닌 답사가 되고 말았다.
예기치 않게 무량사를 안내해 주었던 친구 k는 한 달 간의 일정으로 유럽 여행길에 오른다고 했다. 나는 그의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고, 기쁘게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그리고는 얼마 후, 친구로부터 문자 전송을 받았다. 귀국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를 만난 지, 벌써 한 달여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친구는 무사하게 여행 중이며 호사로운 눈요기를 하고 있다는 안부를 이따금씩 전해왔었다. 그리고 귀국하면 곧바로 만나자는 문자도 받았다.
계절은 어느덧 여름의 한 복판에 와 있었다. 폭염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더위에 지친 매미도 짜증나는 듯 최고조의 음으로 울어댔다. 왕매미의 울음이 신경질적으로 나를 자극하고 있을 때, 급하게 벨이 울리고 문자가 수신되었다. 더위에 지친 눈으로 문자를 확인하는 동안, 깨알 같은 글자들이 순서를 잃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어제 귀국하신 아버님께서 소천 하셨습니다.”
‘무량사’와 ‘김시습’의 관계를 궁금해 했던 나에게 마지막 동행을 해주었던 친구 k는 그렇게 내 곁을 떠났다.
지난 주말, 서해안을 찾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잠깐 틈을 내어 ‘무량사’에 들를 요량이었다. 여행길에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깥경치는 저물어 가는 가을을 불태우고 있었다. 모든 산들은 붉게 물들다 못해 벌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 가운데 지난해 세상을 떠난 친구 k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의 안내로 우연히 들렀던 뜻하지 않은 ‘무량사’ 방문은 생각만큼의 호기심을 다 채우지는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신록의 상쾌함과 친구 k의 자상한 안내가 큰 위로가 된 여행길 답사이기도 했다. 이제는 그리운 친구를 추억하며 내가 길잡이가 되어 ‘무량사’를 찾았다.
‘무량사’는 여전히 의젓하게 자리하며 마지막 가을을 붙잡아 두고 있었다. 해 묵은 감나무들은 노랗고 붉은 잎들을 떨구고, 빈 가지마다 붉은 열매를 가득 안고 있었다.
지난 해 4월, 친구 k와 동행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무량사’의 풍광이었다. 그것은 단지 계절의 탓만은 아닌 성 싶었다. 저 세상 사람이 된 친구의 허전한 자리는 이곳 ‘무량사’ 극락전과 석등, 그리고 오늘따라 유난히 높고 크게 보이는 오층 석탑이 메워주고 있었다. 쇠락한 ‘김시습의 영정’은 저물어가는 가을의 여린 바람에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세속과 이승을 떠나 한 줌 재로 남겨져 말없이 서 있는 부도(浮屠)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가르치고 있었다.
친구를 추억하며 다시 찾은 무량사는 오늘따라, 까닭 없는 빈 바람만 가슴에 넣어 준다. 붉게 익은 감처럼 환하게 웃던 친구 k가 그립다. 무량사로 가는 길은 늘 그럴 것만 같다. 무량사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 하늘에는 붉은 노을이 울먹이며 서성이고 있었다.
※ 충남 부여 출생,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수료, ≪아동문예≫ 동시부문 신인상 수상, 한국 아동문학회 회원,
황순원과 소나기를 만나다
이 완 형*
그 날 밤, 소년은 자리에 누워서도 같은 생각뿐이었다. 내일 소녀네가 이사하는 걸 가보나 어쩌나. 가면 소녀를 보게 될까 어떨까.
그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는가 하는데,
“허, 참 세상일도…….”
마을 갔던 아버지가 언제 돌아왔는지,
“윤 초시 댁도 말이 아니야, 그 많던 전답을 다 팔아 버리고, 대대로 살아오던 집마저 남의 손에 넘기더니, 또 악상까지 당하는 걸 보면…….”
남폿불 밑에서 바느질감을 안고 있던 어머니가,
“증손(曾孫)이라곤 계집애 그 애 하나뿐이었지요?”
“그렇지, 사내 애 둘 있던 건 어려서 잃어버리고…….”
“어쩌면 그렇게 자식복이 없을까.”
“글쎄 말이지. 이번 앤 꽤 여러 날 앓는 걸 약도 변변히 못써 봤다더군. 지금 같아서 윤 초시네도 대가 끊긴 셈이지…… 그런데 참, 이번 계집앤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
- 소설「소나기」중에서
오늘도 떠나야 한다.
문학기행이 주는 의미를 찾는다기보다는 책임감에 휘둘려 서둘러 집을 나선다. 말 못할 중압감이 다시 나를 짓누르기 시작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번 문학기행 만큼은 동행하는 사람들과 색다른 의미를 나눠야 한다는 중압감. 그것은 도대체 몇 년 동안이나 나를 잡아채는가.
나에게 문학기행은 다양한 제스처로 다가왔었다. 처음에는 무엇을 배우고, 어디에 어떤 것들이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그저 그곳에 가면 무엇인가 색다른 것을 만날 테고, 그러면 그것을 즐기면 그만이었다. 특히 낮선 곳에서 마주하는 사람들과의 반주는 나에게서 앗아갔던 삶의 의미를 되새겨 주어서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동행하는 사람들 틈에 있었을 때 가능했다. 점차 세월이 더해가면서 인솔자가 되고 다시 책임자가 되면서부터는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겹치면서 기행, 그것도 문학기행이라는 압박감이 만만치 않게 덮쳐왔다.
이번에 떠나기로 한 문학기행은 ‘황순원 문학관’이었다. 채 여름이 가시지 않은 10월의 날씨는 무덥지도, 서늘하지도 않은 채 옅은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늦는 것에 민감한 나는 오늘도 예상 시간보다 너무 일찍 와 버렸다. 아무도 없는 교회의 로비에서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뽑아 음미하면서, 오늘 만나야 할 황순원에 대해 조사해온 자료들을 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청아문예대학과 인연을 쌓은 지도 벌써 5년이 지나고 있었다. 우연히 동참하게 된 자리에서 강의를 맡게 되면서 붙여진 청아문예대학. 회원은 얼마 되지 않지만 늘 진지한 모습들에서 고마움과 자부심을 느꼈었다.
황순원
1921년 만 6세 때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만 8세 때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 소학교 시절 이미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이는 체증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었다. 술 얘기라면 여기서 미리 더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열두어 살 때부터 마신 소주를, 그는 일흔이 넘도록 마셨고, 그 뒤로 몸이 쇠하여서도 타계할 때까지 매일 ‘마주앙’을 마셨다…….
문학관에 가면 다 있을 텐데, 이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 아니다. 글로 쓰여진 황순원이나 사진에 담겨 있을 황순원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가 남긴 흔적들을 좇아 그가 우리에게 준 문학적 영혼을 찾아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청아문예대학에 다니는 의미를 좀 더 부각시키고 아로새기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저런 생각들이 수도 없이 교차한다.
일행들이 하나 둘 모이고 드디어 차는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출발하기도 전에 문제가 생겼다. 운전할 사람이 마땅치 않아서였다. 늘 그렇지만 버스를 대절해서 가면 운전기사의 눈치를 봐야한다. 이곳저곳을 마음대로 들리지도 못하고 돌아오는 시간에 얽매어 충분히 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가용 버스를 운행하게 되면 운전할 사람을 찾기가 만만치 않다. 계속해서 챙겨야 하고 안전에도 지속적으로 신경이 쓰여서다.
몇 번을 고심하면서 안절부절 하던 임원들은 방법을 찾았는지 시운전을 한다면서 주위를 한 바퀴 돈다. 차에 탑승해서 보니 여성 회원이 운전을 한단다. 일찍부터 운전을 한 터에다 1종 면허를 취득해서 25인승 버스를 운행할 자격은 되지만 실질적인 운전은 이번이 처음이란다. 말 못할 그놈의 중압감이 다시 나를 덮쳐왔다. 그저 동행하는 한 사람으로 가는 것이 얼마나 마음 편한 것인가를 새삼 느끼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기우가 돼버렸다. 처음 한다는 버스 운전이 이토록 매끄러울 수가 없었다. 정작 문제는 이놈의 버스였다. 중고를 산 것이라서 그런지, 소리하며 속도하며 좀처럼 목적지까지 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도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버스로서의 기능을 다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소리나 속도는 문제였지만 그래도 제 몫으로 그만하면 괜찮았다.
비좁은 25인승 버스에 가득 찬 회원들의 눈에는 늘 그랬던 것처럼 기대감에 차있는 듯했다. 저들에게 적어도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만큼은 꼭 전해주어야 할텐데……. 가슴이 꽉 메어 온다. 말할 수 없는 중압감이 또 나를 삼키기 시작했다.
황순원을 만나러 가는 길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빠져 나와서부터가 문제였다. 내비게이션도 이럴 때는 별 도움이 되질 않는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당도한 양평의 황순원 문학관 소나기마을은 생각보단 잘 갖춰져 있었다. 그의 대표적 소설이기도 한 소나기 체험 장소도 있고 해서 좀 다른 분위기를 끌어내주었다. 물론 여기서의 좀 다른 분위기라는 것이 전혀 색다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작가의 생애와 그의 작품들, 그리고 활동, 문우와의 관계, 가족, 사상…… 등을 나열해 놓은 것은 여느 문학관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우리나라 문학관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지만 말이다.
도대체 왜 저렇게 밖에 연출해내지 못하는 걸까. 소나기 마을이라면서 소설 소나기에 나오는 정서라든가 분위기라든가 애틋함이라든가 하는 것들은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처음 교과서를 펼치고 소나기를 접했을 때 다가왔던 설렘과 조마조마함과 간절함이 전혀 얹혀지질 않는다.
우리가 문학관을 찾아오는 것은 그가 자라온 과정이나 문인이 되어야만 했던 환경, 결혼이나 가족관계 만을 보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IT, 웹사이트, 스마트폰 등이 지배하는 현시대에서는 현지에 다녀오지 않아도 얼마든지 검색이 가능한 이미 별 의미 없는 자료가 된 지 오래다.
우리가 진정 느끼고 싶은 것은 그들만의 시혼, 문향이다. 깨알 같은 글씨로 별 관심 없는 이력들이 소개되고 해묵은 영상들을 들쳐보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영상으로 보는 것이 바쁜 현대인들의 정서에 맞고 아이들의 눈높이와 어울린다 할지라도, 문학관에 온 이상은 그들이 남긴 체취, 책 속의 정서를 감상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상과 책이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것들을 보고도 무엇인가를 담아내지 못한 못하는 현대인들의 병폐도 적지 않다. 사원에 가면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본다 해도 그것에 담겨 있는 예술적 가치나 전통적 의미, 한국적 미 따위는 이미 눈 밖에 난 지 오래이다. 문학관에 가서도 그러한 경향은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일단 뛰기부터 한다. 그곳에 들어온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빨리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한 성향은 외국에 가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일본의 전통문화를 견학하러 간 적이 있었다. 일반인들과 학생들이 서로 어울려 간 기행탐방이었는데, 오사카성이나 교토성을 막론하고 1시간 30분이라는 충분히 견학할 시간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속도는 채 20분도 안 될 정도로 빨랐다. 주루룩 뛰다시피 대중 훑어보고는 여지없이 자판기 앞에서 큰소리로 떠들어댄다. 이케하라 마모루가『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이라는 책이 왜 존재하는가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오지 않았으면 몰라도, 애써 시간을 내서 왔으면 적어도 한 번쯤은, 여기에 왜 왔는가를 생각해보는 여유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수도 없이 든다.
문학관에 와서 쫓기듯 쭉 훑어보고 나가는 것이 그토록 어렵게 찾아온 시간만큼도 값어치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또 다시 자성과 함께 중압감에 숨이 차진다. 어떻게 하면 생각을 다시 할 수 있게 기회를 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글 쓰는 것의 의미와 재미를 전달할 수 있는지 자책과 반성이 동시에 나를 짓누른다.
무거운 마음과 답답한 심정으로 문학관을 나와 버스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채 버스가 주차해 있는 곳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는다. 잰 걸음으로 내딛다가 이내 뛰어버린다. 옷이 젖지 않게 최대한 발을 재촉한다. 다행히 비를 많이 맞지 않고 버스에 도착했다. 허, 그런데 차 문이 잠겨있다. 하는 수없이 근처의 민가 처마로 냅다 뛰어들었다. 비는 좀처럼 그치질 않고 내렸다. 예사 소나기가 아닌 듯 사방을 무섭게 할퀴어 댔다. 몇 명이 들어서는 듯했는데 벌써 처마는 만원이다. 그들에게서 누구라 할 것 없이 “황순원 문학관에 오니 소나기가 오네.”가 지속적으로 나온다.
순간,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져 온다. 황순원 문학관 소나기 마을에서 만난 이 절묘한 인연 앞에 옷 젖는 것만 생각하고 마구 뛰던 모습이 생각나서다. 문학 깨나 한다고 늘 앞서서 말하고, 글을 써야 한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분위기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뒤돌아서면 말을 하던 내가 이 모양이라니.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오는데도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차마……
돌아오는 고속도로에서도 내내 그 생각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한다.
“여기까지 오면서 남들이 하는 행동만 뒤집어 봤지 정작 내 행동들은 그들에 비해 어땠는가. 저들에게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려는 것이 오히려 부질없진 않았는가. 그러면서 누군가에게 진정한 가치를 더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새겨본다.
빼앗긴 모국어로, 언제 발표할 수 있을 지 알 수 없는 소설을 혼자서 창작하고 있었던 한 고집스러운 작가 황순원의 모자 쓴 모습이 동영상처럼 지나간다. 그에게 ‘원응서’라는 문우가 없었다면 그리고 그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면 저 소나기는 어땠을까를 생각하면서……
※ 충남 보령 출생, 문학박사, 배재대 국문과 겸임교수, 소설 순수, 노래방 전설 등 다수, lwh8259@hanmail.net
유수(流水)같은 하루
오 월 석*
맑게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면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는다. 나는 인생을 흐르는 물처럼 살기를 희망한다. 대인관계, 직장생활, 사랑도 우정도 모두 강물처럼 그렇게 조용히 흘러갔으면 하고 생각했다.
내게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든든한 친구 같은 단어가 몇 개 있다. 어떠한 문제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고수(高手)’,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남에게 상처받지 않는 ‘내공(內攻)’, 모든 일을 물 흐르듯 부드럽게 대하는 태도 ‘유수(流水)’가 바로 그 친구들이다. 그 중에서 제일 자주 활용하는 친구가 ‘유수’이고 또 셋 중에서 가장 활용도가 높은 것도 ‘유수’이다. 자동차 운전도 유수와 같이 하는 것을 좋아해서 넓지만 막히는 사거리보다 좁지만 막힘없이 뚫리는 샛길을 선택하곤 한다. 매일 맞이하는 하루도 물 흘러가듯 했으면 좋겠다.
나의 하루는 정해진 순서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밥솥의 스위치를 누른 후 어제 입었던 옷가지들을 세탁기에 넣고 ‘시작’ 버튼을 누른다. 세탁기는 자동으로 물을 받아 돌리고 헹구고, 또 돌려서 나에게 충성을 다한다. 진정으로 나의 충직한 신하라 하겠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동네 빨래터에서 어머니께서 손빨래 하신 것을 손수레로 집까지 실어 나르는 것이 나와 남동생이 담당했던 일이었다. 건조대에서 하루 종일 말라 뻣뻣한 빨래를 개서 옷장에 넣고, 식탁 겸 책상에서 짧은 독서를 즐긴다. 7시에 만화를 틀어서 아이들을 깨우고 7시 30분에 아침식사를 한다. 큰 아들은 숟가락, 젓가락 담당이고 작은 아들은 물컵 담당이다. 밥은 매 끼니마다 정량을 해서 한 번에 다 먹어 치워 우리 집에는 잔밥이 없다. 큰 아들이 음식에 욕심이 많아 비만이 될까 걱정되어 정량 밥을 지어 먹은 것이 습관이 되었다. 아침식사가 끝나면 아이들은 “잘 먹었습니다.” 라는 말을 하며 자기가 먹은 빈 그릇을 설거지통에 넣는다. 음식이 맛있었는지 그렇지 않은 지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다. 음식이 맛있었으면 소리가 우렁차고, 소리가 작으면 맛이 별로라는 의미이다. 아이들이 양치를 하고 각자 옷을 갈아입고 학교 갈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서둘러 설거지를 한다. 설거지를 하며 나는 고무장갑을 사용하지 않는 버릇 때문에 고생했었다. 몇 년 전에 손끝이 갈라져 따끔거려서 무척이나 고생했었다. 주부습진은 일상생활에 꽤 불편함을 주었다. 어쩔 수 없이 그간 바르지 않던 핸드크림도 바르고, 남성화장품도 잊지 않고 사용했지만 설거지 습관을 고치지 않는 한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오기가 생겨서 여러 가지 설거지 방법을 연구했고 결과적으로 나만의 방법을 찾아냈다. 세제에 손이 노출되는 시간을 줄이는 방법이 효과가 있었다. 설거지의 양을 가늠해서 두세 번에 나누어 세제 묻은 수세미로 그릇을 씻고, 물로 헹구고를 반복하는 방식이다. 나의 노하우 덕인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주부습진을 모르고 산다.
8시 10분경, 아이들을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해 주면서 아이들의 얼굴에 로션을 발라주는데 아이들은 도망을 다니고, 나는 쫓아다니며 발라준다. 아이들은 아빠와 장난하는 시간으로 여겨 매일 이 일을 반복하고 있다. 정말 바쁠 때는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사소한 것에서 아빠의 권위를 찾는 것은 유치한 일이라 생각한다. 엘리베이터에 탄 아이들은 거수경례로 ‘태권’ 하면서 학교에 간다. 나도 ‘태권’으로 응수한다. 나도 웃고 아이들도 웃으면서 헤어진다. 이런 행동의 내면에는 정직을 추구하는 태권도 정신이 아이들을 바르게 이끌어 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집에 들어와 서둘러서 세탁기 안의 빨래를 건조대에 넌다. 윗옷과 바지는 천장에 붙어 있는 건조대에 널고 양말, 속옷, 수건 등의 작은 세탁물은 스탠드형 건조대에 넌다. 가끔 나를 당황하게 하는 일은 빨래 사이에서 걸레를 발견할 때이다. 세탁물들과 걸레가 같이 헹궈지는 상상을 하면 기분이 영 찝찝하다. 하지만 걸레도 예전에는 수건이었다고 합리화하며 마음을 진정시킨다. 어떤 때는, 세탁물을 너는 것을 잊어서 하루 이틀 숙성된 빨래를 건조시키기도 하는데, 적당한 시간이 지난 것은 오히려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잘 숙성된 김치처럼 잘 숙성된 빨래는 건조대에 너는 느낌이 나쁘지 않다. 물론 세탁 후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세탁물에서는 냄새가 나서 다시 세탁한 일도 있다.
출근 전, 입을 옷을 마련해 놓고 마지막으로 샤워를 한다. 거의 매일 두 번씩 하는데, 이런 습관이 생긴 것도 이유가 있다. 작은 아들이 자주 나를 끌어안고 냄새 맡으며 “나는 아빠냄새가 좋다.”고 한다. 나는 아들의 말에 탄력을 받아서 아침과 저녁에 샤워를 한다. 얼마 전에 고향에 가서 은행을 줍고 껍질을 벗기는 일을 하고 돌아왔는데 작은 아들이 나를 끌어안고 아빠 ‘쇠똥구리 같아’라고 하는 거다. 나한테 구린 냄새가 난다는 말을 초등학교 1학년 수준에서 표현한 말이 정말 재미있었다. 하루 종일 구린 냄새가 나는 은행열매를 추스르다 보니 냄새가 몸에 깊숙이 밴 모양이었다.
나는 샤워 젤을 듬뿍 발라서 한참을 씻었다. 아침에 20분 동안 나는 꽤 많은 일을 처리한다. 아이들을 학교 보내고 난 후, 나는 거의 날아다니면서 일을 처리한다. 집에 돌아온 아이들에게 깔끔한 이미지를 주고 싶고, 나도 돌아왔을 때 상큼한 느낌을 받기 위함이다.
점심식사는 시간을 기억해내는 실마리가 되어 일기를 쓰는 나에게 매우 중요하다. 누구와 식사를 했고, 무엇을 먹었는지를 알면 하루의 일이 실타래 풀리듯 생각난다. 일련의 일들이 퍼즐 맞추듯 맞춰질 때는 무척 기쁘다. 점심식사는 막대저울의 중심처럼 하루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직장에서의 일과는 시기에 따라서 비슷하게 반복되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새로운 일들도 툭툭 터지곤 한다. 16년 전 유학생이었던 내가 지금은 유학생들을 관리하고 지도하고 있다. 인생을 길게 보면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저녁에는 일반적으로 서둘러 집에 가는 편이다. 집에 도착하면 식탁에 초등학생용 알림장 두 권이 펼쳐져서 나의 서명을 기다린다. 아이들은 매일 저녁에 스스로 샤워를 하고 활동하기에 가장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학교 숙제를 마치고 나면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아직까지 텔레비전과 스마트폰의 노예로 살지 않아서 다행이다. 내가 언제까지 통제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저 현대문명이 배설해 놓은 디지털 기계에 의존해서 피상적으로 사는 것보다 주체적으로 생각하며 사는 아이들로 자라주기를 바랄 뿐이다. 숙제를 다 마친 큰 아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내고, 작은 아들은 각종 만화책이나 동물관련 책을 본다. 2개월 전부터 아이들이 책을 읽고서 자기의 생각을 쓰거나, 혹은 베껴 쓰더라도 감상문을 세 줄 이상 쓰면 한 권당 오백 원을 주고 있다. 무조건 지급했던 금요일 용돈 대신 독서와 연관시켜 돈을 주는 것이 한편 치사하기도 하고 비교육적일 수도 있으나 독서하는 습관을 키워주기 위한 나의 궁여지책이다. “실패하지 않은 사람은 새로운 것에 도전하지 않은 사람이다.”라고 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아이들을 바르게 키워보려고 새로운 방법에 도전해 보고 있다. 이렇게 산다고 해서 꼭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인생을 재미있고 보람차게 살고 싶다.
저녁 10시는 아이들이 꿈나라로 들어가는 시간이다. 나도 양치질을 하고 누우면 하루의 피로가 온몸으로 퍼져나가 움직이기가 싫다. 그래서 이런 날이면 방의 불을 끄고 누워서 내가 붓으로 어설프게 써 놓은 한자를 한 글자씩 플래시로 비춰가며 가르친다. 나름 재미있는 공부법에 빨려 들어온 아이들은 경쟁하듯 잘 따라 읽는다. 아이들이 두 번 정도 따라 읽고 나면 내가 한자를 한 글자씩 비춰가며 문제를 내고, 아이들이 맞추는 게임을 한다. 아이들이 서로 경쟁하는 모습이 귀엽고 재미있다. 맹자가 이야기 했던 ‘군자삼락(君子三樂)’중에서 세 번째인 후학을 가르치면서 즐거움을 누리 듯, 나도 아들들을 가르치며 행복을 느끼고 있다.
근래에, 큰 아들이 나에게 “아빠 요즘은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요.”라고 한다. 내 마음은 “아빠는 겁나게 빨리 지나간다.”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동화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면 나는 일어나서 수건에 물을 적셔 방바닥에 깔아 놓는다. 이런 식의 천연 가습기 활용으로 작년에는 아이들의 감기 방어율이 최고였다. 아이들은 두 번 정도 병원신세를 졌지만 미미한 수준이었다.
나는 요즘,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이라는 스마트폰 어플을 들으며 잠을 청한다. 수많은 사람들의 수 백 가지 사연들을 듣다보면 간접적으로 배우는 것이 많아 내가 인생의 고수가 되어간다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최근에 무림 고수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생겨난 무술 고수들의 삶과 그들의 일화 등을 소개한 책이었다. 소림권의 창시자 달마대사, 내가권의 시조 장삼봉, 팔괘장의 동해천, 당랑권을 창시한 왕랑, 불패의 사나이 미야모토 무사시, 유술의 최강자 다케다 소카쿠 등의 일생을 통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사실, 나도 어렸을 때 무술 고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합기도나 태권도장을 다니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반대하셔서 접었다. 공주는 작은 도시였고 실제로 90년 대 초반에는 소위 깡패라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작은 도시를 이등분하여 거지파와 금잔디파로 나뉘었다. 가끔씩 큰 패싸움이 있었다는 풍문도 떠돌았고 우리는 마음을 졸였다. 그리고 싸움 꽤나 잘한다는 고등학교 학생들을 스카우트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밤늦게 야간자습을 마치고 귀가 하다가 골목길에서 세 명의 불량학생을 만나서 곤욕을 치룰 뻔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손자병법의 ‘36계’ 줄행랑으로 위기를 모면했었다. 몇 초 뛴 것 같지도 않은 데 그 애들이 점으로 보였다. 초능력이 생겼던 걸까? 난 부모님께 말씀드려 중고자전거를 사서 타고 다니는 방법으로 그런 불량 청소년들과의 만남을 피했다. 그들도 달리는 자전거를 막고 돈을 빼앗고 괴롭히는 경우는 없었다.
나는 무림의 고수들에게 배우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다. 고수들은 바위같이 변하지 않는 인내심과 일반 사람들은 무모하다고 할 만큼 강한 투지로 자신을 강한 무기로 만들었다. 어떠한 사람에게도 주눅 들지 않았고 정신세계를 무서운 평정심으로 감싸서, 조금도 자신의 마음이 타인의 힘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았다. 세상 누구보다도 강하지만 함부로 칼을 뽑지 않았고 한 번 뽑으면 천하를 호령하였다. 온갖 어려움에 직면하여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한 태도로 일관했다. 나도 고수들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강함이 내재되어 있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웃음을 잃지 않는 삶, 많은 사람들과 정을 주고 받으며 배려하는 인생을 산다면 나도 고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삶의 하루하루가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 같았으면 좋겠다.
세심(洗心)
나는 한국의 전통이 살아 있는 예향의 도시 ‘전주’를 좋아한다. 20여 년 전부터 잘 정리된 전주천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그 속에서 물고기 떼가 헤엄쳐 다닌다.
조선 시대부터 자리를 지키며 전통문화의 정수를 뽐내고 있는 풍남문과 객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기전의 아름다운 풍경은 도시의 삶에 찌든 전주시민들은 물론 전국의 국민들을 끌어 모아 포근히 품어주고 있다. 100년 전에 중국인 기술자들의 힘을 빌려 지었다는 교동성당은 경기전 정문에서 불과 30미터 정도의 거리에서 서양건축물의 위용을 자랑하며 주위의 한옥들과 대비를 이루고 있다. 조선의 마지막 선비 강암 송성룡 선생의 제자들과 전주시가 공동 투자해서 지은 강암전시관도 전주가 문화의 도시임을 확인시켜 주는 장소이다. 전통한옥마을을 활용하여 전국의 사람들을 끌어 모아 성공한 도시라서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전주를 좋아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산 서홍식 선배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부터 전주에 터를 잡으시고 한국의 전통서예의 맥을 이어가기 위해서 불철주야 노력하신다. 하산 선배님을 뵈면 삶을 대하는 나의 노력이 부족함을 깨닫게 된다. 90년대 중반, 대한민국서도대전에서 2년 연속 우수상 수상, 서울의 유명한 갤러리의 초청으로 개인전을 개최할 정도의 실력을 인정받았고, 문하의 많은 제자들이 국전작가가 되었다. 현재는 전라북도 서도협회지부장을 맡으시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신다. 선배님은 대한민국 서예예술계에서 실력과 명성을 인정받으면서도 온 몸에 겸손과 배려가 베이신 분이다. 전주에 가서 선배님을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흙탕물 같았던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을 받는다. 후배라는 이유로 나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각 지방단위로 공모전이 있을 때마다 체본을 써주시는데, 곁에서 흰 화선지에 검은 글씨들이 박히는 모습을 보면 한편의 감동적인 영화를 본 것처럼 가슴이 찡해진다. 나도 열심히 하면 저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나는 호칭을 ‘선생님’이라고 했는데 ‘선배님’이 더 좋다고 하신다. 아무래도 ‘선배님’이라는 말이 둘 사이의 간극을 가깝게 해주는 것 같다. 예술가라는 직업에 외롭기도 하지만 선배님 주위에는 함께 하는 친구들이 많이 계신다. 대학시절에 만나서 20년 이상 서예라는 취미를 같이 하면서 변함없는 우정을 간직한 채 재미있게, 또 열심히 사는 선배님들을 뵈면 부럽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산 선배님께 어려운 부탁을 두 번 드렸다. 한 번은 도서관장이 되신 교수님께서 도서관 1층 현관에 학생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서예작품을 걸기를 희망하셔서 내가 어렵게 부탁을 드렸다. 작품을 무척 크게 써야 하는 것도 부담이었고, 서예를 업으로 하시는 분께 기증을 청한다는 것이 죄송했다. 나의 걱정과는 반대로 선배님은 흔쾌히 승낙하셨다. 나는 시간을 내어 도서관장님, 도서관직원들과 함께 전주 선배님의 고려서실을 방문하여 문구와 크기 등을 확정하고 돌아왔다. 선배님께서는 1주일의 시간을 달라는 말씀을 하시고 대전으로 향하는 방문단을 일일이 악수하며 배웅해 주셨다.
한밭대학교 도서관 1층 로비에 들어서면 한 눈에 보이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은 하산 서홍식 선배님이 기증해 주신 예서체로 쓴 작품이다. 나는 도서관에 갈 때마다 선배님의 작품을 감상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또 한 번은 2014년 아버지 칠순을 맞이하여 아버지께 감사의 마음을 특별하게 전하고 싶었다. 70년 동안 계룡산 자락 공주시 계룡면 화은리 향포에서 농사만 지으시며 묵묵히 착하게 살아오신 아버지에 대한 수필을 선배님께 보여드렸고 나의 깜짝 이벤트에 협조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선배님께 아버지의 ‘호(號)’를 지어 주시고 그 호를 넣어 작품을 써 달라고 청했다. 참으로 어려운 부탁이었는데 선배님은 머뭇거림도 없이 승낙하셨다. 도움을 청하고 얼마 후에 전주에서 연락이 왔다. 나는 서둘러서 전주로 달려갔다. 선배님은 먼저 내 수필 ‘나도 아버지처럼’을 읽고 아버지의 삶을 접하니 정말 훌륭하신 아버지를 두었다고 말씀해 주셨다. 아버지께서 동생들, 자식들, 조카들까지 넓은 마음으로 보살피셨으니 ‘해(海)’를 앞에 쓰고 아버지의 그늘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니 ‘정(亭)’을 넣어 ‘해정(海亭)’이라는 ‘號’를 지어 주셨다. 그리고 작품은 ‘해정(海亭)이라는 분이 맑게 사는 집’이란 의미의 ‘해정청거(海亭淸居)’란 작품을 써 주셨다. 나는 가보로 여기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작품을 받아와서 표구를 하였다. 식구들에게 비밀로 한 나는 아버지 생신 당일에 작품을 공개했다. 아버지께서도 무척 감동하셨고, 나도 자식 된 도리를 한 것 같아 기뻤다. 이는 모두 하산 선배님의 덕이었다. 선배님의 작품은 고향집 거실에 걸려 매번 나를 반기고 있다.
서예를 취미생활로 하며 자기개발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서예 재료가 비싸서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다. 비교적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작품을 보는 눈은 높아지는데 실력은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이상과 현실의 거리가 자꾸 멀어지는 느낌을 갖게 된다. 나는 몇 년간 공모전에서 여러 번 입상은 했지만 실력이 중급수준도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나를 선배님은 항상 격려해 주신다. 요즈음은 서예를 하는 사람이 줄어들어서 네가 꾸준히 연습을 한다면 중년의 나이가 될 때쯤이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선배님의 말씀은 틀린 말씀이 아닌 것을 나도 안다. 매번 시상식에 가면 수상자의 90% 이상이 60세 이상의 어르신들이다.
나와 서예와의 인연은 3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내가 5학년 겨울방학 때, 아버지께서는 나를 우리 동네에서 동북쪽으로 1.5㎞ 정도 떨어져 있는 여사울이라는 마을에 옛날에 서당을 하셨다는 훈장님 댁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알고 보니 그 집은 내 초등학교 친구의 집이었다. 훈장님께서는 원래 북한이 고향이셨는데 한국전쟁 때 돌아가지 못하시고, 이곳에서 가정을 다시 꾸리시고 사셨다. 한문은 북한에서 배우셨던 것 같다.
나와 친구는 매일 같이 한자공부를 했다. 친구는 사자소학을 배웠고 나는 천자문을 배웠다. 아침에 훈장님 안방에 들어가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몸을 좌우로 반동하면서 어제까지 배웠던 한자를 외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숙제 검사를 받고 새로운 글자를 배우면 오전 공부가 끝난다. 점심을 훈장님 식구들과 함께 먹고 나면 친구와 나는 돌담을 가지런히 쌓아 놓은 골목길을 망아지처럼 뛰어 다니며 놀았다. 딱지치기, 썰매타기, 연날리기, 텔레비전 안테나를 펴서 만든 부메랑을 던지며 놀았다. 두 시간 정도 신나게 놀고 오후 3시쯤 친구 집에 돌아가면 훈장님께서 신문지에 오늘 배운 한자를 써주셨고, 나는 보고 붓으로 베껴 쓰면서 외웠다. 훈장님께서는 60년대에 아이들을 가르치실 때는 호랑이처럼 무서우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간혹 내가 친구들과 놀다가 집에 늦게 들어가는 날에도 회초리를 들지 않으셨다. 붓글씨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이쪽 논두렁에서 저쪽 논두렁으로 이어 넘어가며 집으로 걸어갔다. 사선으로 걸어가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고 나는 무섭기도 했지만 그 길을 택했다. 바람이 쌩쌩 부는 허허벌판을 홀로 걸어갈 때는 등골이 오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려움은 양쪽 동네를 가로지르는 냇물을 건너가면 사라졌다.
땅거미가 질 때쯤이면 동네에서 집집마다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던 정경은 아름답고 포근했다. 어스름한 저녁, 맑고 깊은 물속에서는 메기가 밤 사냥을 하려는 듯 기지개를 펴고 있는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본 적도 있다. 나는 메기를 잡을 엄두도 못 냈고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한 겨울 수북이 쌓인 흰 눈을 뽀드득뽀드득 밟으며 걷는 기분은 최고였다.
집에 도착하면 할아버지 앞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그간 배운 천자문을 외웠다. 매일 새로운 한자를 배웠기 때문에 외워야 할 글자가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천지현황 하고 우주홍황 이라 일월영측 하고 진숙열장 이라......” 아버지는 소여물을 주시며 들으시고 어머니는 밥을 하시면서 아들의 천자문 읊는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하셨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나는 한자를 좋아하게 되었고 중학교 이후로 한자는 무조건 최고의 점수를 받았다. 그리고 전공을 선택할 때도 한자관련 전공을 택하여 중국어를 전공하였다. 대학교 1학년 때 ‘현암서예연수회’라는 서예동아리에 들어간 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붓을 들고 있다. 대략 18년 정도 된 것 같다.
중국 운남성(雲南省) 여강(麗江)에 사는 소수민족인 납서족(納西族)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마을의 냇물을 막아 동네에 물을 흐르게 하는 방법으로 거리를 깨끗하게 청소한다. 물청소의 역사가 수 백 년인지 수 천 년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동네를 깨끗하게 해주기도 하고 관광객들에게도 볼거리를 만들어 주고 있으니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주위 환경을 깨끗하게 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온 국민을 쓰나미처럼 덮쳐 부익부 빈익빈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답답한 현실을 알면서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 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법 또한 모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정신과 마음을 씻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몸의 혈관에 지방이 계속 쌓이고 쌓여 터져 뇌출혈이 생기듯,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쌓인 찌꺼기도 청소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울증과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그래서 정신과 마음도 정기적으로 청소를 해줘야 한다. 지능지수(IQ)와 감성지수(EQ)를 누르고 요즘은 인간관계지수(NQ)가 가장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어떠한 사람들을 만나서 무엇을 교류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나는 서예와 서예를 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마음을 씻으며 살고 있다.
겨울 꿈
새벽 3시 50분에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서둘러서 차를 몰아 동생이 사는 아파트에 주차를 하고 5분을 걸어가서 버스에 올랐다. 버스의 널찍한 의자에 앉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서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인천공항은 새벽 6시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사람들이 많았다. 5일에 한 번 있는 유성시장에 온 느낌이었다. 경기가 불황이라는 말을 누가 했던가? 다들 어렵다고 하면서도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정말 믿겨지지 않았다. 한참을 줄을 서서 공항검색대를 통과해야 했다. 면세점에서는 독특한 포장을 한 담배 한 보루를 샀다. 매번 출장 때 마다 이모님께 드리는 선물이다. 올해로 연세가 85세 되셨고 자식을 두 명 앞세우시면서 각종 스트레스로 담배를 배우셨다.
이모께서는 우리 동네에 먼저 시집오셔서 어머니를 중매하셨으니 내가 태어날 수 있도록 해주신 일등공신이시고 조카인 나를 40년 넘는 세월동안 변함없이 사랑해 주신다. 나는 단 한 번도 이모에게 꾸지람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무엇이든지 있으시면 주려고만 하시는 이모님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고 담배를 사 드리고 있다. 지난해 담배 값이 상승하면서 나의 선물 가치가 좀 더 높아졌다. 이번 중국출장 2박 3일 동안 하루에 한 번씩 비행기를 타야해서 긴장이 되었다. 일정이 어긋나면 여러 가지로 귀찮은 일이 많다. 내 걱정에 답하듯 비행기는 비를 몰고 다녔다. 목적지인 당산시에 도착하니 오후 3시가 되었다. 당산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 중 8백여 명이 유학설명회에 참석했다. 유학설명회를 하는 동안 움직임 없이 관심을 가져주는 학생들을 보며 보람을 느꼈다. 당산대학에서의 일정은 순조로 왔고 숙소도 마음에 들었다.
다음날 당산에서 북경으로 차로 이동하면서 마음을 졸여야 했다. 탑승시간은 다가오는데 길은 막히고 운전사는 북경시내에 들어가는 사람들만 검사받는 검문소로 잘못 진입하는 바람에 30분 이상을 허비했다. 북경 수도공항에 거의 다다를 즈음에 밖에 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시간에 쫒기는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더 여유 있게 아름다운 눈을 감상했을 것이다. 2015년 첫눈을 북경에서 볼 줄은 몰랐다. 도로변에 하얗게 쌓여 있는 눈을 보니 여러 사람이 떠올랐다. 고향에서는 부모님께서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필 것이고 아이들은 좋다고 뛰어다니겠지. 첫눈이 내리는 날 같이 따뜻한 아메리카노 커피를 마시자고 했던 사람도 생각이 났다.
북경 수도공항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른 비행기는 오후 2시경에 대련공항에 사뿐히 내려 앉았다. 비행기는 대련에도 비를 몰고 왔다. 대련에서의 출장일정도 순풍에 돛을 단 듯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우리학교 건축학과 졸업생과 연락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빼고는 모든 것이 좋았다.
마지막 날에도 어김없이 비가 내렸고 바람까지 세게 불었다. 호텔에서 대련공항으로 가는 택시는 벨보이의 도움으로 생각보다 쉽게 잡아탔다. 토요일이라서 도로도 막히지 않아서 여유 있게 공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바람이 자꾸 세게 불어댔다. 비행기 출발시간이 지연된다는 소리가 공항에 울려 퍼졌다. 설마 몇 시간 기다리면 되겠지 생각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출발시간이 1시간이 지나도 날씨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공항 밖에는 나무들의 허리가 비바람을 맞고 휘청거리고 있었다. 사태는 계속 악화되고 있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얼굴이 하얗고 키가 꾀나 작은 여자가 내 앞에서 카트를 밀고 지나갔다. 카트에는 큰 가방 한 개, 중간 크기 한 개가 실려 있었다. 게다가 노트북 가방에 배낭까지 메고 있는 것을 보니 멀리 출장을 가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검은 바탕에 흰색 하트모양이 그려진 가디건을 걸치고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얼굴은 희고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으며, 키는 작았고 커트한 머리는 짧았으나 세련된 모양으로 치켜 올라간 상태였다. 그녀가 한국에 가는 것은 항공사 직원에게 묻는 것을 우연히 듣고 알았다. 출발 시간이 2시간 이상 지체되자 차디찬 의자에 앉아 책 읽기도 힘들었다. 철재로 된 의자에서 한기가 엉덩이로 전해져 몸에 오싹했다. 결국 모니터에 오늘 서울인천행 비행기가 결항되었다는 안내 문구가 떴다. 출발시간은 내일 10시 10분이라고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공항 1층 짐 보관소에 가서 짐을 맡기려고 하는데 좀 전의 그 작은 여자도 짐을 맡기러 왔다. 나는 그녀의 짐이 많은 것을 보고 먼저 맡기라고 양보했다. 잠시 후에 나는 그녀에 이어 1박 2일 동안 40위안을 지불하고 짐가방을 맡겼다. 나는 오후 6시 30분에 건축학과 졸업생과 중산광장 근처의 꼬치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혹시나 하여 그녀에게 대련시내 중산광장에 가는 방법을 물었더니 본인도 거기에 가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단다. 나는 그 친구의 도움을 받아 지하철을 타고 중산광장으로 향했다. 지하철 옆자리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졸업생을 만나기로 한 장소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지하철에서 내려서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그 친구는 나를 꼬치집까지 안내해 주었다. 나는 정말 생각지도 않은 그 친구의 도움을 받아 쉽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는 커피숍에서 5시간 정도를 책을 읽으며 보낼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 친구의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나는 진정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수십 번 중국에 출장을 왔어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은 경우가 없었다. 뱃속이 허기져서 길가의 허름한 가게에 들어가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콩국물 한 잔과 전병 두 개를 시켜 먹으며 좀 전의 일을 생각해 보니 웃음이 났다. 저녁 먹을 것을 예상해서 전병을 다 먹지 않고 남겼다.
나는 자리를 옮겨 커피숍에 들어가서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커피를 받아들고 책을 펼쳤는데 커피숍의 조명이 어두워 눈이 아팠다. 그래도 시간을 보내기엔 독서가 최고였고 그렇다고 커피숍에서 눈을 붙인다는 것도 엄두가 안 났다. 머그컵에 커피가 반쯤 줄어들 때 쯤 누군가 나를 툭치는 것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30분 전에 나를 도와주었던 그녀와 그녀의 절친이 서 있는 것이다. 그녀의 절친은 연예인만큼이나 미인이었고 목소리도 중국판 청순가련형이었다. 긴 머리에 가죽재킷을 입고 검은 가죽 바지를 입고 있었다. 늘씬한 키에 어깨까지 늘어진 헤어스타일로 세련된 도시여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들이 나에게 시간 때우기가 지루할테니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람? 나는 순간, 두려운 마음도 있었으나 새로운 경험에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그래서 나는 순순히 그녀들을 따라 영화관으로 갔다. 나의 지루한 시간까지 채워주려는 이들의 속마음을 알고 싶었다. 우리들은 <证人 증인>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나를 당황하게 한 것은 영화 관람료와 팝콘을 그녀들이 사는 것이었다. 내가 내려고 했으나 그녀들의 의지는 확고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이 믿기지 않는 현실에 속으로 웃으며 영화를 보았다.
“살다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 구나”라고 생각하며 오늘의 특별한 경험을 기억하고자 그녀들과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그녀들도 좋다고 했다. 졸업생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2시간 정도 남았다. 나는 영화를 본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그녀들에게 고마웠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나와 함께 노래방에 가자는 것이었다. 나에게 졸업생의 전화번호를 묻더니 전화를 걸어서 노래방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홍차를 마시면서 노래를 불렀고, 두 여인은 모두 노래를 잘 불렀다. 내가 어렴풋하게 아는 중국 노래가사 몇 마디만 듣고도 노래를 찾아냈다. 나도 어설픈 중국 노래실력으로 그녀들의 정성에 답했다. 한국노래 중, 신나는 것을 듣고 싶다고 해서 잘 하지도 못하는 ‘강남스타일’을 불러줬다. 그녀들은 한국어를 한 마디도 못했기 때문에 나는 자신 있게 부를 수 있었다. 2시간이 지날 즈음에 졸업생이 사촌누나와 함께 노래방에 들어왔다. 처음에 들어와서 나를 보는 표정이 “선생님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거예요?” 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난 후, 졸업생은 함께 어울려 노래 부르며 즐거움으로 밤을 수 놓았다. 노래방 사용료도 그녀들이 계산했다. “이게 꿈은 아닐까?”하고 생각했지만, 이 상황은 분명한 현실이었다. 저녁은 대련에서 제일 유명한 꼬치집에서 양꼬치와 닭꼬치로 배를 채웠다. 우리들이 함께한 저녁시간은 차의 가속 폐달을 밟듯 빠르게 흘러갔고 저녁 11시쯤에 가게를 나와서 나는 호텔로, 그녀들은 어둠속으로 걸어갔고, 이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졸업생이 대접해 준 저녁식사는 맛과 분위기가 최고였다. 졸업생이 대학교에 다닐 때 나는 그 친구를 내 집에 초대해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다. 그러한 시간이 있었기에 서로 부담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비행기 결항이 내게 선사해준 아름다운 하루를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겨울을 맞아 떠난 중국출장에서 첫눈을 보았고, 생각지도 않은 선녀들이 둘이나 나타나서 나와 어울려 주었다. 아름다운 여인들, 졸업생 이룡, 그리고 그의 사촌누나와 함께 했던 시간이 마치 겨울 꿈을 꾼 것만 같았다.
나는 샤워를 한 후 침대에 누워서 그들과 찍었던 사진과 동영상을 보며 웃고 또 웃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 잠을 청했다. 나의 욕심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 충남 공주 출생, ≪상상의 힘≫(2012) 수필부문 신인상, 한국농촌문학상(2014) 수상, moon5865@hanbat.ac.kr
벌
김 연 우*
꿀이 주는 감촉과 식감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특히, 유년시절 이웃집에서 얻어 온 가래떡에 묻혀 먹던 벌꿀의 달콤함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미각으로 살아 있다. 어디 그뿐인가? 꿀벌의 모양새나 집단생활에 대한 호기심으로 벌집을 건드렸다가 화난 벌떼의 공격에 줄행랑을 치던 기억은 더없는 즐거움으로 남아 있다. 또한, 부어오른 얼굴들을 마주보며 깔깔대던, 그리고 장독대 위에 놓인 항아리를 열고 된장을 꺼내와 서로 발라주며 낄낄대던 정답던 친구들은 이제, 소중한 자산으로 내 삶의 위로가 되고 있다.
꿀이 주는 달콤함과 여전히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는 벌에 대한 호기심으로, 나는 양봉 전문가를 찾아 실습에 돌입했다. 솔직히 말하면, 양봉수업 보다 꿀 먹을 생각이 앞서 있었다.
첫째 날, 나는 편안한 추리닝 차림으로 벌통을 열었다. 아들이 입던 옷을 버린다기에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는데, 그날 벌침을 수도 없이 많이 쏘였다. 벌침은 옷 안으로 파고들어 기억 속에 숨어 있던 아픈 감각을 되살렸다. 얼굴에도 몇 방을 쏘여 퉁퉁 붓고 아파서 여러 날 고생을 했다.
며칠 후, 두 번 째로 벌통을 열었다. 이번에는 전날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단단히 복장을 하고 자신 있게 열었는데 그날 역시, 수도 없이 벌에 쏘였다. 특히 얼굴만도 세 방을 쏘여 엉망이 되었다. 꿀벌들은 면장갑을 낀 손조차도 무자비하게 쏘았다. 이놈들이 어떻게 파고드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며칠 후, 세 번 째로 벌통을 열던 날, 이번에는 집에 있던 고무장갑을 끼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장갑조차도 벌침에 뚫리고 말았다. 이 날은 얼굴 눈썹에도 두 방을 쏘여서 눈이 ‘왕팅이’가 되고 말았다. 벌만 만나고 오면 얼굴이 변해서 오니, 아내는 꿀이고 뭐고 가지 말라며 난리를 친다. 나도 마냥 당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급기야 전문가 아저씨를 찾아 대책을 여쭤보기에 이르렀다.
아저씨는 우선 벌에게 “내가 너희 주인이다.”라고 말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벌과 친해져야 하니 두렵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만 다루면 절대 쏘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네 번째 작업을 할 때가 되었다. 나는 아저씨가 가르쳐준 대로 벌들에게 주인임을 말하고 조심조심 다루었다. 그래서인지, 그 날은 한 방을 쏘이고 벌통을 덮었다. “그래 비법이 다 있어!” 하며 한 방 쏘인 것에 나는 만족하고 있었다. 나는 흡족해 하며 얼굴에 쓴 면포를 벗고 땀을 닦는데 벌 한 마리가 얼굴에 달라붙는 것이었다. 아마도 땀 냄새 때문인가 보았다. 나는 아저씨가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벌과 친해지려고 그를 자극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랬더니 얼굴 이리 저리를 돌다가 벌이 내 콧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한참을 견디다 못해 어쩔 수 없이 나는 콧바람을 불었다. 그랬더니 따끔한 고통이 머리를 휘젓고 지나갔다. 결국, 벌은 달아나고 독침만 남아 코에 통증이 밀려왔다. 코를 잡고 침을 빼려는 움직임에 다른 벌들까지도 덤벼들었다. 벌들은 눈썹과 관자놀이 그리고 뒤통수까지 내 얼굴을 집중적으로 쏘아댔다. 이 정도면 성형을 하지 않았어도 사람들이 나를 몰라볼거야…… 내일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데 큰일이었다.
다음날, 울퉁불퉁한 얼굴로 사람들을 만난 나는 그들에게 큰 웃음을 주었다. 꿀벌은 마누라 다루듯 살살 다루어야 한다는 그들의 조언이 그럴싸하게 들렸다. 또 다시 나는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기로 했다. “벌이 콧구멍에 들어가 쏘여서, 코가 이리 크게 되었네요!” 했더니, 아저씨가 내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귀 구멍으로는 안 들어가 다행이네. 귀에 들어가면 큰일나!” 하면서 하나하나씩 배우라고 하신다.
나는 요즘, 벌의 매력에 취해 벌 받으며 여왕벌을 모시고 살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처음으로 꿀을 따서 먹게 된 날, 그 맛은 어떻게 먹어도 꿀맛이었다. 그동안 나를 괴롭힌 모든 벌들을 흔쾌히 용서할 수 있었다. 다음에는 여왕벌만 먹는다는 ‘왕유’를 먹어 볼 생각이다. 그래서 요즘은 여왕벌과 친해지려 끊임없이 작업을 거는 중인데, 내 맘을 모르는지 여왕벌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 충남 논산 출생, 한밭대학교 시설과 재직, cy3173@daum.net
문화의 수용과 이질성
동녕(董宁)*
‘한류’란 중국에서 한국의 유행문화를 축약해 일컫는 말로서 1990년대 말부터 중국과 동남아 화교권에서 일기 시작한 한국 대중문화의 열기를 말한다. 1996년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중국에 수출되고 2년 뒤에는 가요 쪽으로 확대되면서 중국에서 한국문화의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본래 중국어로 같은 발음인 한류(寒流)는 시베리아에서 물아 치는 찬바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댄스음악과 드라마, 패션 열풍이 동아시아 여러 지역에 몰아쳐 본래의 의미를 바꾸고 이제는 새로운 의미의 한류(韩流)로 거듭나게 되었다. 2000년 이후에는 드라마, 가요, 영화 등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김치, 고추장, 라면, 가전제품, 화장품 등 한국 관련 제품의 이상적인 선호현상까지 나타났는데, 포괄적인 의미에서는 이러한 모든 현상을 가리켜 한류라고 한다.
사실 한류열풍 때문에 한국에 온 중국유학생이 많아지고 있지만, 대부분 제 2언어를 배우려고 온 중국유학생도 있다. 나 또한, 한류의 영향을 받고 제 2언어 능력을 갖고 싶어서 한국에 왔다. 중국이 한국과 같은 동북아시아 권역에 속해 있고, 아주 오래 전부터 교류를 통해 돈독한 관계를 다져왔던 중국과 한국은 수천 년이라는 긴 시간의 힘으로 인해 비교적 문화적 공통점이 많은 편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차이점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극히 다른 성격을 갖는 국민이 바로 한국 사람과 중국 사람이다. 나는 6년 동안의 한국생활을 통해서 중국과 한국의 문화 차이를 조금은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 사람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한국의 전통문화와 현대문화도 심층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러 번의 관찰을 통해 느낀 중한문화의 차이 중, 몇 개를 열거해 보겠다.
우선, 인지적 측면에서의 차이이다. 중국의 상징색은 빨강이다. 중국문화의 빨간색은 태양에서 근원한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 선조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하거나 무속의식을 행했을 때 본능적으로 태양을 숭배하였다. 세월이 흐르는 동시에 사람들은 태양이 비춰야만 만물이 생기발랄하다고 생각했는데, 태양의 색깔을 빨간색이라고 여기면서부터 빨간색을 숭배하게 된 것이 최초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사람은 빨간색이 길상(吉祥), 기쁨, 성공, 흥성 등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전통결혼식에서도 중국 사람이 빨간색을 선호하는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중국은 세뱃돈 봉부로 빨간색 봉투를 이용한다. 이런 봉투를 홍빠오(红包)라고 한다. 홍빠오는 한 해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자기 띠의 해에 불운을 면하자는 의미로 빨간색 허리띠를 사용하는 민간풍습도 있다. 올 해는 토끼의 해이기 때문에 많은 토끼띠 분들은 빨간색의 허리띠를 이용하며, 한해의 행운을 기원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 사람에게 빨간색은 혈액, 공포, 위험 그리고 경고 등과 같은 부정의 이미지가 강하다. 근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빨간색이 공산당의 색깔과 소비에트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6.25전쟁을 한국과 공산당의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이 전쟁은 한국인에게 헤아릴 수 없는 손해를 주었다. 그래서 많은 한국인은 공산당과 같은 적색이 완전히 비호감이다. 중국 사람들에게 빨간색은 공산당 혁명을 뜻하면서 이 색은 더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중국 사람들의 빨간색 사랑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중국과 달라 한국을 상징하는 색깔은 흰색이다. ‘백의민족’은 흰옷을 입고 흰색을 숭상한 오랜 전통에서 유래한 조선 민족의 별칭이다. 한국 사람은 흰색을 좋아하고 흰색이 순결과 고상함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흰옷을 입고 흰색을 숭상한 오랜 전통에서 유래한 것으로, 백민(白民)이라고도 한다. 이는 주로 소색(素色)의 무명으로 옷을 해 입는 서민층의 옷 짓는 풍속으로 인해 생겨난 말이다. 소색이 주는 단아함과 검소함, 그리고 소색을 늘 청결히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부지런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부지런하고 검소한 민족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전통문화 관점에서 흰색은 뜻이 완전히 다르다. 중국에서 흰색은 사망, 흉조를 상징한다. 옛날부터 누가 집에 가족이 죽으면, 집에 있는 다른 사람은 반드시 흰색 옷을 입고 ‘장례식(白事)’을 치른다. 흰색 장식물로 빈소를 마련해야 한다. 또한 20세기 초 중국민주혁명 때에 반동세력이 혁명 운동에 가한 ‘백색공포(白色恐怖)’를 상징하기도 한다.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에는 다소의 성격 차이가 존재한다. 세계 곳곳에서 한국 사람의 발이 닿는 곳이라면 ‘빨리 빨리’라는 말이 들릴 정도로 한국인의 성격은 급하기로 유명하다. 한국 사람은 빨리 걷고 빨리 운전하며, 건축도 빨리 건설한다. 그래서 경제발전 속도도 다른 나라에 비해 빠른 편이지만 한국인의 급한 성격 안에는 인내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상대에게 속마음을 들키기 쉽다는 단점이 발견된다.
반면에, 중국 사람은 '만만디'로 표현되는 느린 성격으로 유명하다. 어떤 일을 시작하더라도 "한 번 더 생각해 봅시다."라는 말을 먼저 하며, 일의 진행에 아무런 리스크가 없다고 판단될 때 실천한다. 중국 사람은 성급해 하지 않으며 속으로는 은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일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일을 처리하는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하다.
※ 中國 江蘇省 徐州市 出生, 한밭大學校大學院 經濟學科 碩士課程, ning901222@naver.com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차이
가원호(贾源浩)*
한국의 문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이질적인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그 특질들은 한국의 전통문화와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문화로 구분 된다. 한국의 미풍양속인 유교적인 예절과 불교의 사유체계 그리고 실천 강령 등은 원래 한국의 문화가 아니었다. 외국의 이질적인 문화가 한국 역사와 문화의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융합된 것이다.
중국인으로서 내가 본 한국은 외래문화 수용에 개방적이다. 어떤 외래문화도 이를 수용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어 보인다. 이것은 한국 사람이 문화적 자긍심이 강하고 외래문화를 토착문화에 용해시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반도지형과는 다르게, 중국은 수많은 나라와 국경을 마주하며 아시아 대륙 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중국 또한, 대다수 나라와 오랜 기간 경제문화 교류를 하면서 더 다원적인 외래문화를 받아들였다. 인도 불교문화의 수용은 한당(漢唐)시대의 거대한 문화적 사건이었다. 그것이 중국의 철학과 문학예술에 미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 시기의 중국 문화는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었기 때문에, 외래문화에 대해 관용적이고 주동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었다. 역사의 추이에 따라 청(清)대 말까지 중국은 장기간 관문을 닫고 쇄국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제국주의 나라의 침략을 당하는 동시에 태평천국(太平天国의 내란을 당했다. 그 후에 양무운동(洋务运动을 시작하여 ‘중체서용’이라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중체서용’이란 ‘중학위체(中学为体), 서학위용(西学为用)’의 약칭으로, 아편전쟁(鸦片战争) 이후 물밀듯이 밀려오는 서양문화에 대한 중국의 대응 논리라 할 수 있다.
중학은 유교와 그것에 기초한 봉건 예교를 가리키고, 서학은 과학기술, 정치 제도, 사상 의식의 순차적이고 층위적인 단계를 거치는 서양문화를 가리킨다. 그것은 중국의 전통을 본체로 삼되, 이전에는 업신여기던 서양의 정신적, 물질적 문화를 부분적으로 수용하겠다는 태도였다.
1966년부터의 문화대혁명은 중국 전통문화와 서양문화, 특히 미국문화를 철저히 부정했다. 지금,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한 지 30여 년이 되면서 중국의 젊은이들은 더 신속하게 서양문화를 수용했다. 외국의 영화, 음악 등 예술작품은 물론이고 외국 음식점, 맥도날드, KFC 등과 같은 연쇄점, 외국의 명품 브랜드 가계도 곳곳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은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이제 중국 정부가 외국문화 유입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자국문화시장의 보호, 그리고 문화적 위기의식은 외래 문화상품 도입의 제한으로 이어진다. 어렸을 때, 내가 TV에서 즐겨보던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한국드라마는 이제 드물게 방영된다. 이들은 인터넷으로만 볼 수 있다.
음식문화에서도 한국과 중국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국에서는 5천여 년 이상의 세월동안 조리법만도 40여 종이 넘게 발달했다. 하나의 국가가 건국되고 왕조가 구축되면서 새로운 풍습과 음식문화가 형성되곤 했다.
기본적인 조리법으로는 볶는 것, 튀기는 것, 조리는 것, 찌는 것을 들 수 있는데 튀긴 후 볶거나 찐 것을 다시 조리하는 등 요리법이 병용되는 경우가 많다. 같은 식품재료라도 요리법을 달리하여 내놓고, 백여 종의 향신료를 사용하여 다양한 맛이 서로 균형을 이루도록 한 것도 중국 요리의 한 특징이다. 중국의 영토가 광활하기 때문에 동서남북 각 지역마다 다른 기후적 특성을 지닌다. 서로 다른 자연환경은 다양한 식품재료를 생산 해 낼 수 있다. 역사와 지역적 특성에 따라 크게 산동요리(鲁菜), 사천요리(川菜), 강소요리(江浙菜), 광동요리(粤菜) 등 네 계통으로 나뉜다.
중국음식은 색, 맛, 향, 모양을 살리기 위해 엄격한 재료 선택, 정교한 칼질, 불의 가감, 양념 배합, 조리법 등 다섯 가지를 중시한다. 산동요리 중에서 고온에서 단시간 익혀먹는 복음요리가 많다. 맛이 짜면서도 담백하고 부드럽다.
사천요리는 주로 향신료를 많이 사용한다. 그 이유는 사천이 중국 내륙부에 위치해서 기후가 덥고 식품재료 부패가 쉽게 되어서이다. 사천요리의 맛은 대체로 매운맛, 신맛 등이 많다. 강소요리의 특징은 푹 삶고, 찌고, 굽고, 볶는 것이며 물고기를 조리함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조리 시 재료에 대한 요구가 엄격하며 비례를 따지고 색깔과 모양을 잘 조절한다. 특히 과일 조각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쓴다. 재료의 원천이 광범위하고 여러 가지인 광동 요리의 특징은 식물자원을 충분이 이용하여 인류에게 볶음요리를 제공한다.
한국 음식문화의 특징은 준비된 음식을 한 상에 모두 차려놓고 먹으며 밥이 주식이고, 부식으로 반찬을 곁들이며, 주식에 따라 반찬을 구성하여 균형 잡힌 한 끼 식사를 한다. 또한 국물이 있는 음식을 즐기며 반찬의 조리형태로는 찜, 전골, 구이, 전, 조림, 볶음, 편육, 숙채, 생채, 젓갈, 장아찌 등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김치, 장아찌, 장, 젓갈 등 발효식품을 많이 섭취하는 편이며, 식품 자체의 맛보다 조미료와 향신료를 써서 복합적인 맛을 즐긴다. 그리고 음식재료를 잘게 썰거나 다져서 한 입에 먹기 좋은 형태로 만들며 음양오행사상에 입각하여 오색재료나 오색고명을 사용한다.
오랜 세월 동안 이루어진 독특한 형태의 다양한 음식들이 사회구조와 외래문화의 영향으로 오늘날에 와서는 전통성을 잃어버린 것도 있고, 또한 잊혀진 것들이 너무 많은 반면에, 끈질긴 민족의 보수성으로 인해 현재까지 쌀을 주식으로 김치 등이 역사와 함께 유지되어 온 것이 한국 요리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 中國 河北省 唐山市 出生, 한밭大學校大學院 金融不動産學科 碩士課程, ning901222@naver.com
벌초하러 가는 길
이 대 영*
하늘이 맑다. 아니 맑다기보다 청아하다고 해야 하나? 삭막하기로 소문난 아파트 건물 틈새에도 이미 가을이 와 있다. 토요일도 일을 해야 한다며 투덜대는 아내를 차에 가둬두고 시장으로 들어선다. 좌판을 정리하는 분주한 움직임들이 햇살을 불러 모으고 있다. 나는 막걸리 세 병과 어포 두 장을 급히 사들고 승용차로 돌아 왔다. 흥겨운 음악을 들은 덕분인지 아내의 입가에 리듬이 넘쳐난다. 내 마누라 네 마누라 할 것 없이 여자들은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다는 것을 오늘도 확인하는 순간이다.
골목마다 차들이 주춤댄다. 산행 혹은 벌초를 하기 위한 사람들 때문이다. 신호등 앞에 길게 늘어선 차량을 피해 골목으로 접어들자 분뇨차가 덜덜 소리를 내며 길을 막고 있다. 퇴색한 탱크 같다. 푸른 색 탱크로 보아 4천 리터 용량은 될 듯하다. 탱크로 연결된 파이프와 진공 펌프의 위력에 눌려 후진을 거듭하여 백화점 뒤편으로 접어든다. 한 참을 지났는데도 아내의 손은 여전히 코를 쥐어짜고 있다.
백화점 뒷골목의 아침 풍경은 늘 널브러진 것들로 가득하다. 흔들려야 웃음을 찾을 수 있는 ‘우리’는 참 딱한 존재들이다. 날마다 앉아 있어야 하는 고정 의자가 부담스런 일상을 오늘도 이어가고 있다. 언어와 숫자를 꿰어 맞추다 보면 하루해가 저물고, 내일을 버티기 위해 밤새 몸을 흔들다 보면 모닝 벨에 놀라 거리로 내달려야 한다.
아내가 환기를 위해 차창 문을 내린다. 가발에 의치를 한 젊은이들 냄새가 차 안으로 쏟아진다. 성치 않은 무릎이 지나간 흔적들도 여기저기 남아 있다. 아내를 일터에 내려놓고 오디오 버튼을 누르자 요란하게 울리던 음악이 멈춘다. 혼자이다. 홀가분하다. 입에서 저절로 음표가 만들어진다. 뭐지, 이 기분?
시골집에 도착하기 5분 전, 예상했던 대로 휴대폰 벨소리가 울린다. 어머니이시다. 이미 아버님이 사촌들을 재촉하여 입산한 지 오래되었단다.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셋째 여동생 얼굴이 생각나 웃음이 나온다.
장례식장에서의 염습과정은 어느 곳에서나 숙연한 분위기이다. 시댁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장례식장에서의 ‘염습’ 과정 또한 엄숙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망자의 주위를 에워싼 유족들의 울음이 장례지도사의 안내에 따라 진정되었다.
“이제 고인이 이승에서의 생을 마치고 저승으로 떠나고자 하십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 평안히 가시라고 다 같이 묵념으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묵념!”
근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옆에 서 계시던 시어머니의 핸드폰소리가 힘차게 울려대는 게 아닌가! 그것도 “분위기 좋고 좋고, 느낌이 와요 와요!”라니. 시어머니의 사촌여동생이 장례식장의 위치를 묻고자 걸어 온 전화였다. 여동생은 시어머니의 행동을 관찰하랴 유족들의 눈치를 보랴 몹시도 당황했던 모양이었다. 시어머니 또한 이 예상치 못한 울림에 핸드폰 버튼을 이것저것 눌러댔지만 음악은 계속 이어졌다.
“준비는 됐어 됐어! 오메 좋은거~”
시어머니가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서야 상황이 진정되었지만 밖에서는 여전히 음악은 계속되고 있었다.
“폼도 좋구나 좋아~, 아싸 이쁜 내 사랑!”
유족들은 다행히 가족을 잃은 슬픔으로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망자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여동생 시어머니의 핸드폰에 저장되었던 유행가 100여 곡은 모두 삭제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이미 바깥마당에 나와 계셨다. 예전에 할머니가 서 계시던 그 위치, 그 자세로 대나무 바구니에 과일과 술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계셨다. 지체 없이 선산으로 차를 몰았다. 선산에는 고조부와 조부모, 숙부의 산소가 있다. 숙부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벌초에 참석하지 않던 사촌들도 자연스레 동참하게 되었다.
선산 입구에 들어서자 두 대의 예초기 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려댄다. 너무 늦게 온 미안함에 급히 서둘러 가려했지만 산길에 깔려 있는 알밤들이 발목을 붙잡았다. 풍우를 견뎌 낸 밤꽃이 이제는 얼굴을 붉히며 새색시처럼 누워있는 것이 신기했다. 알밤을 주우면서도 어머니께서는 연신 아버지가 역정을 내실까 봐 걱정하신다. 막걸리가 담긴 바구니에 알밤이 넘치자 욕심을 버리고 고갯마루로 올랐다. 발밑에서 사촌들이 풀을 깎고 아버지는 갈퀴로 이를 쓸어내리고 계셨다. 그동안, 봄에는 한식을 전후해서, 가을에는 추석 성묘를 전후해 벌초를 해왔다. 봉분에는 여전히 갈참나무가 자라고 그 밑에는 무성하게 자란 고사리과 식물들이 번식하여 작업과정이 쉽지 않은 듯 보였다.
술 한 잔 하라고 외치시는 어머니의 외침에 모두들 그늘로 모여 들었다. 사촌들도 이제는 젊은 티를 벗고 어엿한 가장의 자태가 묻어났다. 7부 능선에 위치한 할머니 산소는 여전히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할머니는 임종 직전에 시신을 화장해 줄 것을 원하셨지만 나는 선산에 묻어 드렸다. 후손들의 번거로운 장례절차까지 생각하시는 당신의 깊으신 속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후처로 가문에 들어오셔서 3남 1녀의 새어머니로 일가를 일으키신 분이다. 한량이셨던 할아버지를 내조하며 근면 절약한 끝에 초가삼간에서 옛 고을 원님의 집으로 삶터를 옮기기도 하셨다. 수줍음이 많던 나는 할머니 치맛바람의 힘으로 학생회 임원명부에서 누락되는 일이 없었다. 어린 시절, 개구리, 참새를 구워 먹이던 분도 할머님이셨으며,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객지 자취방에서 같이 생활하시던 분도 당신이셨다. 폐암의 고통으로 힘드실 때도 추한 몰골을 가족에게 보이지 않으려 원룸을 얻어 독립생활을 하셨다.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러 집에 들렀을 때, 나를 맞이한 것은 창문 틈에 끼여 가지런히 놓여 있는 흰 운동화였다. 당신이 입으시던 옷가지들도 하얀 보자기에 싸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화창한 봄빛을 따라 떠나셨던 할머니, 그 무덤 앞에 서면 매번 만감이 교차해 옴을 어찌할 수가 없다. 그럴 때마다 봉분 위로 솟은 잔디들만 내 손끝에서 고생하곤 한다.
오늘도, 승용차 트렁크 안은 어머니의 거친 손마디로 다듬어진 야채들로 가득 찬다. 양파, 고추, 애호박, 상추 등등. 아내에게 이 싱싱한 식물들을 갖다 주면 다음 날 아침에는 아마도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때론 냉장고에서 시들어 음식물 수거함으로 고스란히 이동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어머니의 정성과 아버지의 땀이 배어 있음을 알기에 주시는 모든 것을 고맙게 받아 온다.
자동차 백미러로 손을 흔드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들어온다. 거기에서 돌아가신 할머니의 모습도 읽는다. 그리고 미래에 또 그 자리에 서 있을 아내의 이미지를 그려본다.
어머니의 손은 참으로 위대하다.
영동으로 가는 길은 바쁘다
급하게 교재와 출석부를 챙겨 집을 나선다. 첫 시간부터 영동대학교에서 수업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제 과음한 탓인지 아침햇살이 유난히 눈부시다. 좁은 골목, 아파트와는 다르게 일반주택단지의 도로는 늘 주차문제로 시비가 끊이질 않는다. 아침마다 주민들이 얼굴을 붉히며 승용차를 향해 욕지기를 하는 곳도 원룸주택단지의 진풍경이다. 그러나 고함을 지르거나 경적을 울려 아침잠을 깨우거나 사람들을 불러 모으지는 않는다. 홀로 투덜대고,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다 보면 누구나 골목길을 빠져나올 수 있다. 암묵적 질서 속에 유지되는 골목의 평화는 간혹 불협화음으로 망가지기도 한다.
오늘이 그랬다. 문 앞에 세워진 자가용 앞에 폐차 직전의 승용차 한 대가 출구를 막고 있다. 옆집 아저씨의 차량은 아니었다. 그의 승용차는 검정색이기에 필요할 때면 임의롭게 서로 전화를 걸어 차를 빼고 넣고 하는 관계이다. 다행히 차내에 전화번호가 있어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반복해서 전화를 걸어도 수신이 되지 않는다. 낭패였다. 혹시나 하고 승용차 문을 열어 보지만 굳게 잠겨있다. 더욱이 똥차에 경보기까지 달아 놓아 심하게 울리기까지 한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역시 감감 무소식이다. 문을 두드려 경보기를 울려보지만 아침 소음에도 내다보는 사람이 없다. 급기야는 발로 문짝을 걷어찼다. 소음에 놀란 아내가 집에서 나온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손가락으로 앞 집 이층을 가리킨다. 시계를 본다. 8시가 가까워지고 있다.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다.
며칠 전에 이사 온 집이었다. 다행이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나는 무작정 이층 집 창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부스스한 모습의 한 청년이 반바지 차림으로 나왔다. 폭탄 맞은 머리 모양새가 어제 과음한 듯 했다. 차량을 가리키며 본인 차량이냐고 묻자, 그렇다고 한다. 풀빵같이 부어오른 얼굴을 보니 욕을 할 수도 없다. 상황을 인지한 젊은이가 황급히 달려가 승용차를 이동시킨다. 연신 죄송해하는 그에게 소리를 빽빽 질러대던 나는 차 안으로 들어가 넥타이부터 풀었다. 백미러를 통해 청년을 다독이는 아내의 모습이 들어온다. 이제는 뒤돌아 볼 여유조차 없다. 앞으로만 달려가야 한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동으로 가는 길은 늘 이렇게 크고 작은 일들로 바쁘다.
올갱이국의 뒷맛이 개운하다. 오전수업을 마치고 설계리 영동병원 앞 식당으로 차를 몰았다. 지끈거리던 두통은 가셨지만 여전히 입술은 까칠하여 냉수를 불러댔다. 지난주보다 가격이 오백 원 오른 것 외에, 올갱이국의 시원함은 여전했다.
오전수업은 쉽지 않았다. 허겁지겁 캠퍼스에 도착하여 강의실로 가는 중에 하필이면 총장님을 만났다. 독학으로 초등학교 교사에서 대학총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앞에 나는 경외감을 표하고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아마도 그 분은 아침 일찍 학교에 출근하여 캠퍼스를 점검하고 집무실로 가는 중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 대학에 강의를 올라치면 설립자의 창학이념을 되새기며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는 강의를 하려 노력해왔다.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평생의 번민이 쉬지 않고 정성을 모아 백마산 명경대에 배움의 주춧돌을 놓게 하였으니, 이상을 가진 학도들이 진리를 갈고 닦아 세상을 밝히는 한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가슴 뭉클한 글이다. 가난하여 장삿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던 배움을 향한 아픔이 얼마나 컸기에 이 백마산 기슭에 그 한을 풀어 놓았을까? 왜바지에 고무신을 신고 캠퍼스 이곳저곳을 살피는 설립자의 모습에서 학생들을 생각하는 깊은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오후 강의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나는 어미실길로 접어들었다. 조계종 말사인 ‘향엄사’로 가기위함이었다. 고즈넉한 산사에 가을이 무르익고 있었다. 청아한 목탁소리가 백마산에 깃든 새들의 귀를 간질이고 있다. 탱화를 중심으로 사찰 주변에는 감나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단풍든 감잎 사이로 까치에 혼쭐난 홍시감도 몇 개 보인다. 검은 피부에 싹을 틔워 노오란 꽃을 피워 올리고, 여름 내내 몸을 태워 저렇게 붉은 성장을 하기까지 얼마나 모진 신열을 견디었을까. 단풍들은 사람들에게 물을 것이다. “너는 언제 나처럼 뜨겁게 몸을 불사른 적이 있었느냐”고, “이 거룩한 성장의 결정체를 보며 단지 입맛을 다시고 있느냐?”고 말이다.
저승 가는 길, 이승의 이력이 묵직하려면 붉은 성장통 하나쯤은 거쳐야 한다는 소박한 진리를 산사에 와서 되새겨 본다. 그리고 비 갠 후, 콩당거리는 심장으로 새벽길을 걸어 이웃집 감나무 밑으로 숨어들던 어린 시절도 생각해 본다. 겁 많고 순진했던 유년의 심장을 나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가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지푸라기에 노오란 감꽃을 꿰어 넣으면서 자족했던 소박한 욕심이 지금은 너무 커지지 않았는가를 반성해 본다.
가을 햇볕을 양식 삼아, 붉은 감들은 여전히 소신공양 중이다. 아마도 그들은 첫 서리가 오기 전에 성불을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무에 설화가 피면, 할머니들은 곱게 말린 곶감을 밀가루 항아리에서 내어 손주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 그리고, 생강이나 잣을 넣은 수정과도 내어 줄 것이다.
뒹구는 나뭇잎에 얼굴을 묻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덧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서둘러 가야 오후 강의시간에 늦지 않을 것이다. 다행이 내 앞을 가리고 있는 똥차는 없었다.
영동으로 가는 길이나, 영동에서 영동으로 이동하는 길이나 바쁘기는 매 한가지이다.
※ 충남 공주 출생, 문학박사, 소설가, 한밭대 문학창작과정 지도교수, 저서 <한국전후 실존주의 소설연구>, <유폐된 자아의 소설연구> 등, 소설 <사마산>, <빈터> 외 다수, youngdaele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