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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 |
Ⅰ.사료 비그리스도계 사료 그리스도계 사료
Ⅲ.신앙의 그리스도 예수 부활 신앙 그리스도론적 존칭 | Ⅱ.역사의 예수 개관 활동배경 예수의 가르침 예수의 행적 예수 수난사 |
Ⅱ.역사의 예수
예수 수난사
예수는 오로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설파하고 체현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예수의 철저한 삶은 처절하게 막을 내렸다. 서기 70년경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의 최후 이야기를 채록하였다(마르 14-15장).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예수는 서기 30년 4월 6일 목요일 저녁 예루살렘 시내 어느 집 이층 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한 다음 올리브 산 기슭에 있는 겟세마니 숲으로 갔다(마르 14,22-26). 겟세마니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면서 외로이 기도하다가 제자 유다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밤중 내내 카야파 대사제의 저택에서 종교 재판을 받았다. 이튿날 아침 총독관저로 압송되어 빌라도 총독에게 심문을 받고 정오쯤에 국사범이라는 죄목으로 사형 언도를 받았다(요한 19,14). 곧 이어서 예루살렘 북쪽 성곽 밖에 있는 골고타 형장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오후 세 시경에 숨을 거두었다. 그분의 나이는 대략 36세. 그날 해가 지면서 해방절 겸 안식일이 시작되었기에(요한 18,28; 19,14.31)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라는 사람이 빌라도 총독의 허락을 받고 서둘러 장례를 치루었다. 이것이 마르코복음서 14-15장에 실린 수난사의 줄거리이다. 이제부터 예수님의 최후 사건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다(마르 14,32-42) : 예루살렘 성전 동쪽, 올리브 산 기슭에 있는 겟세마니에는 올리브 나무가 무성했고, 올리브기름을 짜는 집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겟세마니(기름틀)라고 불렀다. 예수는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고 “무서워 떨며 번민하시고 …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 되어 하느님 아빠께 간절한 기도를 바쳤다. “아빠, 아빠께서는 어떤 일이든 하실 수 있사오니,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대로 하지 마시고 아빠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
기도는 독백이 아니고 대화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느끼고 부르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렀다. “아빠”는 본디 어린 아가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자기 아버지를 부르고 가리키는 아가 말이다. 부자간의 관계가 무척 친밀한 경우에는 어린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아빠라는 호칭을 더러 사용 하는 경우가 있었다. 어쨌거나 정겨운 호칭이 틀림없다. 예수께서 머나먼 하느님, 두려운 하느님을 얼마나 가까운 하느님, 정겨운 하느님으로 느끼셨다면 아빠라고 부르셨을까?
예수님도 죽음을 두려워하셨다. 그러기에 죽음의 잔을 거두어 주십사고 전능하신 아빠께 매달리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이 환히 드러난다. 죽음의 독배를 생수인양 쭉 들이 킨 소크라테스와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이 철학자는 영혼불멸을 확신한 나머지 기꺼이 죽음을 맞아들였다(자크 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년작,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그러나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께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셨다, 피하고자 하셨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기로 작심하였다.
체포되시다(마르 14,43-52) : 예수는 30년 4월 6일 목요일 밤 겟세마니에서 기도하다가 최고의회에서 보낸 하인들에게 체포되었다. 피하려고 하였다면 캄캄한 밤이었으니 얼마든지 달아날 수 있었을 것이고, 해방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순례 온 군중 사이로 쉽게 잠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죽음으로 하느님 아빠께 돌려 드리는 것이 그분의 뜻이라고 확신하였기에 묵묵히 대사제 저택으로 붙들려 갔다. 그때 제자들은 모두 갈릴래아로 달아났고, 베드로는 대사제 저택까지 따라가서 최고의회의 심문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결국 스승을 부인하고 역시 갈릴래아로 도망쳤다.
카야파의 심문(마르 14,53-65) : 예수는 30년 4월 6일 목요일 밤부터 7일 금요일 새벽까지 대사제 카야파의 저택에서 심문을 받았다. 대제관의 저택 위치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시온 성문 앞에 있는 아르메니아 정교회 묘지로 추정된다. 대제관 측근들은 밤새 예수를 심문한 결과, 하느님을 모독한 중죄인으로 단정하고, 율법(레위 24,16; 민수 15,30)에 따라 사형에 처해 마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총독만이 사형 언도와 집행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7일 금요일 아침에 빌라도 총독 관저로 예수를 압송하였다(마르 15,1).
빌라도 재판(마르 15,1-15) : 빌라도는 26~36년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의 총독으로서 지중해변 카이사리아에 상주했다. 그런데 30년 4월 초순 해방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상경하여, 예루살렘 서부 언덕에 있던 헤로데 궁전에서 정무를 보았다. 마침 예수 사건을 심리하고 정오쯤에 사형 언도를 내렸다(요한 19,14).
대사제가 빌라도에게 예수를 넘기면서 고발한 죄목은 신성 모독 죄목이 아니고 정치적인 죄목이었다. 곧, 예수가 로마황제의 허락도 없이 ‘유대인의 임금’으로 자처했다는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가 정치와는 거리가 먼 분임을 간파했지만, 최고 의회의 사주로 조작된 민의에 밀려 사형 언도를 내리고 당일 사형 집행을 명했다. 총독의 눈에는 갈릴래아 출신 시골 청년의 운명쯤은 대수롭지 않았던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리시다(마르 15,21-32) : 4월 7일 정오가 지나 예수는 총독 관저인 헤로데 궁전에서 예루살렘 북쪽 성곽 밖에 있는 골고타(갈바리아) 형장으로 십자가를 지고 갔다. 기운이 떨어져 잘 걷지 못하자 로마군 형리들이 리비아 키레네 출신 시몬을 징발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도록 하였다.
형장에 이르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 전에, 로마 군인들은 예수를 마취시키려고 포도주에 몰약(아라비아산 향유)을 타서 마시도록 했으나 예수는 끝내 사양하였다. 맑은 정신으로 최후를 마치려고 하였던 것이다.
돌아가시고 묻히시다(마르 15,33-47) : 마르코복음서에 의하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모국어인 아람어로 딱 한 말씀만 하였다(15,34).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즉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말씀인데, 이 말씀만 떼어놓고 보면 절망적인 절규처럼 들릴 수도 있다. 프랑스 문호 앙드레 지드가 그런 해석을 내렸다. 그러나 저 임종게는 시편 구절(22,2)이라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시편 22편은 곤경에 처한 의인이 바치는 간구이다. 그러니 예수께서는 하늘과 땅 사이에 외롭게 매달려, 있는 힘을 다해서 시편 간구를 바치시고 숨을 거두셨다는 것이다.
4월 7일 금요일, 서산에 해가 지면서 안식일(토요일)겸 과월절(니산 15일)이 시작되므로(요한 19,31)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라는 최고의회 의원이 서둘러 예수의 장례를 치루었다. 이렇게 역사의 예수는 끝났다. 아니, 끝장났다. 그렇지만 불가사이하게도 예수 사건은 계속되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예수 부활 신앙으로! 예수 수난사를 깊이 연구하고 싶으면 졸고 “예수 수난사 연구” 《종교신학연구》제9집, 분도출판사 1996, 321-392쪽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