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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 관가정과 향단
향단에서 바라본 관가정
경주 양동마을 / 출처 영남일보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은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이에 단순히 '문화유산을 보호한다'라는 것에 반대하는 이는 없겠지만 실제로 문화유산 보호 체계를 만들고 적용하는 데에 있어서 관리의 주체와 권한, 책임 등의 이유로 다양한 가치판단이 존재합니다.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양동마을이 가치 훼손 위기에 놓였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양동마을의 풍경은 2021년 봄호로 발행된 월간한옥에서 담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라졌습니다. 한옥의 대표적인 미감이라고 할 수 있는 지붕이 천막, 비닐 등으로 덮여 있거나 이를 고정하기 위해 폐타이어가 함께 올라가 있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강판이나 슬레이트로 덮인 지붕의 모습도 보입니다.
문화재청은 2013년, 2017년 두 차례 양동마을 정비계획을 수립하면서 용도와 체목의 굵기, 칸수 등을 고려하여 각 건물을 한식 기와와 초가로 구분하여 지붕 형태를 정해두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주민들은 초가지붕의 현실적인 불편함을 호소하며 전통기와로 바꿔줄 것을 요구했으나, 문화재청은 원형이 사라지면 문화재로서 가치가 손실되기 때문에 원형보존을 위해 초가지붕을 전통기와로 바꿔줄 수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현재 경주 양동마을은 136세대, 209명이 거주하며 기와 100여 동, 초가 200여 동 등이 있습니다.)
실제 양동마을에 터전을 두고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해와 양동마을이 문화재로서 국가와 국민 그리고 후대에 걸친 공동의 자산이라는 이해가 충돌한 것입니다. 주민들의 불편도 이해가 되지만 문화재청의 입장도 이해가 되는 상황이죠. 앞선 일본의 사례에서 '문화재 보존 활용 지역 계획'은 해당 문화재 관리의 주체를 국가와 관광객에서 지역 주문들로 확장하기 위한 시도로 양동마을의 문제에도 대입해 볼 수 있는 사례입니다.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문화유산에 대해 국가와 관광객의 입장까지 살펴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옳고 그름을 쉽게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개인에게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공공에 대한 기여를 강제하기란 쉽지 않죠. 이러한 개인주의의 확산 아래에서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공동의 의식과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주체의식의 분배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당사자 개인과 국가뿐만 아니라 그 주변인, 나아가 지역과 사회의 참여와 논의가 필요합니다.
향단에서 바라본 관가정
경주 양동마을은 경주손씨와 여강이씨가 공존하는 동족마을이다. 경주손씨와 여강이씨 두 가문은 50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대대로 함께 양동마을에 살아왔다. 경주손씨는 손소(孫昭)와 손중돈(孫仲暾)과 같은 현달한 인물을 배출함으로써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후손들이 양동마을의 주류로써 세거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여강이씨는 손소의 외손으로 성리학자로써 문묘 18현으로 배향된 이언적(李彦迪)을 배출한 이후 후손들이 양동마을에서 대대로 세거하였다.
양동마을은 외손(外孫)마을이다. 17세기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결혼 형태는 여자가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처가로 장가를 가는 솔서혼(率婿婚)이었다. 남자는 결혼과 동시에 처향(妻鄕)으로 이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따라서 양동마을도 형성 초기에는 사위에서 사위로 이어지는 외손마을이었다.
양동마을의 경주손씨와 여강이씨 두 가문은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경쟁하였다. 양동마을의 손씨와 이씨 두 가문은 대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협력하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은밀한 갈등과 경쟁을 벌여왔다. 특히 마을 내에 세워지는 건축물은 가장 눈에 띄는 경쟁대상이었다.
건축물을 통한 두 집안 경쟁의 상징은 소종가인 관가정과 향단이다. 양동마을 어귀에서 바라본 두 집의 인상은 극히 대조적이다. 관가정은 향단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하지만 평지를 만들어 깊이 들어앉히고 높이도 낮추었을 뿐만 아니라 단순화하여 다른 집들과 그다지 구별되지 않는다. 특히 여름이 되면 집 앞의 나무들에 가려 더욱 숨어들게 된다. 반면 향단은 시선을 가리는 일절의 장애물 없이 눈에 바로 들어온다, 특히 3개의 박공면을 노출시킨 형태는 무척 강렬하게 시선을 집중시킨다. 이처럼 논리적이고 규범적인 관가정에 비해 향단은 개성적이고 파격적인 건축을 함으로써 자신의 색깔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관가정이 은둔형이라면 향단은 개방형이다.
대항해시대의 흔적, 침몰선박과 해저유물
월간한옥 뉴스레터 48호
역사와 문화적 맥락에 따른 문화유산 보호 방법
너무 유명해도 문제, 관광객도 과유불급,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과잉관광(Overtourism)
'보존'이 아닌 '활용'으로, 일본 문화재보호법의 변화
초가냐 기와냐 그것이 문제로다. 원형의 보존과 문화유산의 가치
* 지난 뉴스레터 #47 '문화재로 60년, 이제 국가유산으로'에서는 국내의 문화재보호법 관련 명칭과 분류체계 변경에 대한 소식을 다뤘습니다. 이번 뉴스레터를 읽기 전에 먼저 읽어보시면 좋습니다.초가냐 기와냐 원형의 보존과 문화유산의 가치
역사와 문화적 맥락에 따른 문화유산의 보호
뉴 홀랜드 연안의 영국 해군 연구선 HMS 엔데버, 사무엘 엣킨스, 1794년
2018년 7월, 러일전쟁 때 침몰한 러시아 군함 '드미트리 돈스코이 호'가 울릉도 앞바다에서 발견됐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이 침몰한 보물선의 추정 가치는 그 어마어마한 액수로 화제가 되었죠. 하지만 21세기에 발견한 이 보물섬 이야기는 사기극으로 판명되어 며칠 만에 허무하게 끝이 났습니다.
보물섬 이야기가 모두 허구는 아닙니다. 실제로 세계는 15~17세기 무렵 범선을 타고 바닷길을 횡단하며 신대륙 발견 등 향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대항해시대'를 겪었습니다. 지금이야 공동의 합의를 통해 나름의 평화를 유지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못했죠. 그 당시 바다는 제국주의의 무대로 경쟁을 넘어 전쟁 그 자체였습니다.
실제로 당시 많은 배들이 바다 위에서 난파되어 지금까지 바닷속 깊이 잠들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에 '대항해시대'를 주도했던 영국은 문화재보호법에서 '난파선보호지역'을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난파선이 있는 지역을 보호하며 난파선을 훼손하는 행위를 제한하거나 아예 출입을 금지하기도 합니다.
바다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문화유산을 수중문화유산이라 부릅니다. 보존상태가 양호한 경우가 많아 고고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만 동시에 그만큼 상업적 가치가 뛰어나기 때문에 발굴과 인양작업에 있어 법제화를 통한 제재와 보호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이죠.
너무 유명해도 문제, 관광객도 과유불급,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과잉관광(Overtourism)
베네치아의 오버투어리즘을 소재로 그린 그림 / 더 이코노미스트
이탈리아는 총 58건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입니다. 전 세계에서 드물게 문화유산에 대한 보호 의무를 헌법 제9조에 명시하고 있을 정도로 내부적으로도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도시 전체가 문화재로 등재된,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인 베니치아 석호는 코로나 이전부터 하루 10만 명가량의 많은 인파가 몰려 코로나 이전부터 '과잉관광(Overtourism)'이 도시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거주하는 주민들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불편은 점차 심해지고, 일부 관광객의 몰상식한 행동으로 문화유산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훼손되고 있습니다. 이에 현지 거주민들은 점차 줄어들고 있으며, 코로나 이후로 관광객이 더욱 증가하여 올해 7월부터 베네치아 방문객에게 3~10유로의 입장료를 부과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관광객을 태운 태형 유람선이 베네치아에 들어올 때마다 유적이 훼손되고 있어 입항을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하기도 했으며, 유네스코에서는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명단'에 등재를 권고하는 등의 조치가 검토되었습니다. 이에 이탈리아 정부는 정박 금지 결정을 내리는 등의 결단을 내렸고 명단 등재는 유보되었지만, 오버투어리즘과 인구감소 문제에 대한 대응은 여전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보호를 위한 노력과 함께 베네치아와 관광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지역 주민과 크루즈선 업계의 반발 또한 존재합니다.
'보존'이 아닌 '활용'으로, 일본 문화재보호법
일본 기후현 시라카와고 / 유네스코 문화유산
일본은 문화유산 자연유산, 무형문화유산 총 50건으로 이탈리아 못지않게 많은 수의 문화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으며, 일본 문화재보호법으로 규정한 문화재는 국보 1,130건을 포함하여 무려 약 15,000건에 이릅니다.
최근 2021년 4월, 일본은 새롭게 개정된 문화재보호법을 발표했습니다. 크게 두 가지 변화가 있었는데요.
☝️ 무형문화재의 '등록제도' 신설
기존에는 '등록'으로 관리할 수 없었던 무형문화재와 무형민속문화재에 대해 '등록제도'를 신설하였습니다. 생활양식의 변화와 저출생, 고령화 등의 문제로 미래 무형문화재의 보존과 활용에 있어 존속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무형문화재에도 유연한 보호조치인 등록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일본의 문화재보호법: 문화재를 '지정'과 '등록'으로 구분하여 관리하고 있다. 지정문화재는 역사, 예술, 학술상 가치가 높은 것으로 선정 과정과 보준 및 유지 기준이 매우 엄격하고 금전적 지원 기준이 까다로운 반면, 등록제도는 문화재 등록 및 보존 규제와 제약사항이 유연하며 금전적인 지원이 까다롭지 않은 편이다.
문화재 보존의 주체를 다양하게 하고, 완만한 기준 등록으로 더 다양한 분야의 문화재 보존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반응도 있는 반면, 지원금 문제에 대해서는 도구나 재료 지원과 관련된 지원금은 없어 결국 추가적으로 자비를 지출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부정적인 여론 또한 존재했습니다.
✌️ 문화재 관리의 주체를 확장하는 '문화재 보존 활용 지역 계획'
개별적인 문화재가 아니라 해당 문화재가 있는 지역과 공동체를 보존 대상으로 확대하여 활용, 관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문화재 관리의 주체를 국가와 관광객에서 지역 주민들로 확장하는 것이죠. 이는 개인이 소유한 문화재의 경우 일부 경제적인 지원이 있으나 관리 기준이 엄격하여 되레 문화재로 지정받는 것을 포기하는 이들이 많고, 이를 국가가 매입하여 관리하는 것도 쉽지 않으며 농촌에 있는 문화재 또한 유지 관리비, 세금 부담 등을 이유로 방치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변화입니다.
물론 민간에서 문화재 관리와 적극적인 활용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고 일부가 유지, 관리에 다시 쓰임으로서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다는 긍정적인 목적성이 있으나 한 편으론 무분별한 활용을 우려하는 시선도 존재합니다.
초가냐 기와냐 그것이 문제로다. 원형의 보존과 문화유산의 가치
경주 양동마을 / 출처 영남일보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은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이에 단순히 '문화유산을 보호한다'라는 것에 반대하는 이는 없겠지만 실제로 문화유산 보호 체계를 만들고 적용하는 데에 있어서 관리의 주체와 권한, 책임 등의 이유로 다양한 가치판단이 존재합니다.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양동마을이 가치 훼손 위기에 놓였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양동마을의 풍경은 2021년 봄호로 발행된 월간한옥에서 담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라졌습니다. 한옥의 대표적인 미감이라고 할 수 있는 지붕이 천막, 비닐 등으로 덮여 있거나 이를 고정하기 위해 폐타이어가 함께 올라가 있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강판이나 슬레이트로 덮인 지붕의 모습도 보입니다.
문화재청은 2013년, 2017년 두 차례 양동마을 정비계획을 수립하면서 용도와 체목의 굵기, 칸수 등을 고려하여 각 건물을 한식 기와와 초가로 구분하여 지붕 형태를 정해두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주민들은 초가지붕의 현실적인 불편함을 호소하며 전통기와로 바꿔줄 것을 요구했으나, 문화재청은 원형이 사라지면 문화재로서 가치가 손실되기 때문에 원형보존을 위해 초가지붕을 전통기와로 바꿔줄 수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현재 경주 양동마을은 136세대, 209명이 거주하며 기와 100여 동, 초가 200여 동 등이 있습니다.)
실제 양동마을에 터전을 두고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해와 양동마을이 문화재로서 국가와 국민 그리고 후대에 걸친 공동의 자산이라는 이해가 충돌한 것입니다. 주민들의 불편도 이해가 되지만 문화재청의 입장도 이해가 되는 상황이죠. 앞선 일본의 사례에서 '문화재 보존 활용 지역 계획'은 해당 문화재 관리의 주체를 국가와 관광객에서 지역 주문들로 확장하기 위한 시도로 양동마을의 문제에도 대입해 볼 수 있는 사례입니다.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문화유산에 대해 국가와 관광객의 입장까지 살펴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옳고 그름을 쉽게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개인에게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공공에 대한 기여를 강제하기란 쉽지 않죠. 이러한 개인주의의 확산 아래에서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공동의 의식과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주체의식의 분배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당사자 개인과 국가뿐만 아니라 그 주변인, 나아가 지역과 사회의 참여와 논의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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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택기행
<양동마을 관가정과 향단>
향단에서 바라본 관가정
경주 양동마을은 경주손씨와 여강이씨가 공존하는 동족마을이다. 경주손씨와 여강이씨 두 가문은 50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대대로 함께 양동마을에 살아왔다. 경주손씨는 손소(孫昭)와 손중돈(孫仲暾)과 같은 현달한 인물을 배출함으로써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후손들이 양동마을의 주류로써 세거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여강이씨는 손소의 외손으로 성리학자로써 문묘 18현으로 배향된 이언적(李彦迪)을 배출한 이후 후손들이 양동마을에서 대대로 세거하였다.
양동마을은 외손(外孫)마을이다. 17세기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결혼 형태는 여자가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처가로 장가를 가는 솔서혼(率婿婚)이었다. 남자는 결혼과 동시에 처향(妻鄕)으로 이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따라서 양동마을도 형성 초기에는 사위에서 사위로 이어지는 외손마을이었다.
양동마을의 경주손씨와 여강이씨 두 가문은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경쟁하였다. 양동마을의 손씨와 이씨 두 가문은 대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협력하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은밀한 갈등과 경쟁을 벌여왔다. 특히 마을 내에 세워지는 건축물은 가장 눈에 띄는 경쟁대상이었다.
건축물을 통한 두 집안 경쟁의 상징은 소종가인 관가정과 향단이다. 양동마을 어귀에서 바라본 두 집의 인상은 극히 대조적이다. 관가정은 향단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하지만 평지를 만들어 깊이 들어앉히고 높이도 낮추었을 뿐만 아니라 단순화하여 다른 집들과 그다지 구별되지 않는다. 특히 여름이 되면 집 앞의 나무들에 가려 더욱 숨어들게 된다. 반면 향단은 시선을 가리는 일절의 장애물 없이 눈에 바로 들어온다, 특히 3개의 박공면을 노출시킨 형태는 무척 강렬하게 시선을 집중시킨다. 이처럼 논리적이고 규범적인 관가정에 비해 향단은 개성적이고 파격적인 건축을 함으로써 자신의 색깔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관가정이 은둔형이라면 향단은 개방형이다.
관가정 전경과 안채
관가정(觀稼亭)은 400년간 양동마을 경주손씨 대종가의 역할을 하였다. 관가정은 물봉골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관가정은 우리나라 한옥이 가지는 아름다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절제의 미이다. 관가정은 대종가로서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사대부 집의 규모에도 못 미치는 크기이다. 그러나 극도의 경제적인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채는 사랑답게 사당은 사당답게 형태와 공간에서 독립성과 기능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그리고 구조면에서도 절제의 정신은 일관한다. 관가정은 기둥이 높지도 않지만 지붕틀의 경사도가 완만하여 더욱 층고를 낮추고 있다. 20도가 채 안되는 서까래의 물매는 보통 집의 절반정도이다. 밖으로 드러나는 형태를 최소로 절제하려는 의도이다.
둘째, 자연의 미이다. 관가정은 자연나무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자연의 미를 최대한 살리고 있다. 지붕틀의 경사도가 낮아서 대들보와 서까래 사이에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휘어진 대들보를 사용하였다. 위로 휘어진 대들보는 대공없이도 종도리를 걸어서 서까래의 하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미는 우연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극히 계산되고 인공적인 기법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다.
셋째, 차경의 미이다. 관가정은 안채와 사랑채 모두가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서쪽에 펼쳐진 안강평야에 대한 조망을 고려한 것이다. 그리고 안채에서 중문을 통해 양동마을의 조산인 남쪽의 호명산을 조망할 수 있도록 높이를 조정하였다. 따라서 관가정은 어귀 우뚝한 지형지세를 최대한 활용하여 주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배치한 아름다운 건축물로 자연과 교감하는 한국 건축의 내면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랑마당에 있는 향나무마저 다른 고택의 향나무와 달리 언덕위에 불어오는 바람에 적응하면서 언덕의 능선처럼 누워있다.
향단 전경과 사랑채
향단(香壇)은 이언적이 어머니를 위해 지은 집이다. 이언적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묘소를 개장(改葬)하고, 살아 계신 어머니를 위해 향단(香壇)을 지었다. 향단은 화려하고 위엄이 있는 관아 형식이다.
첫째, 향단은 사랑채와 안채는 물론이고 행랑채까지 모두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관가정이 사랑 누마루에만 4개의 원기둥을 사용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에 따라 원기둥은 하늘을 상징하며, 네모기둥은 땅을 의미한다. 따라서 원기둥은 하늘을 상징하는 궁궐, 관아, 누정, 사찰에 사용하고, 네모기둥은 민간주택에 사용한다. 조선시대에는 원기둥을 네모기둥에 비해 상위개념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가사(家舍) 규제를 통해서 원기둥을 일반 민간 건축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였음에도 향단은 건물의 격을 높이기 위해 원기둥을 채택하였다.
둘째, 향단은 화려하고 장식적이다. 향단은 기둥 위에 섬세하게 조각된 익공(翼工)을 달았으며, 대들보 위에는 공공건물에나 어울릴 복화반(覆花盤)과 포대공(包袋工)을 올렸다. 그리고 사랑채의 지붕도 궁궐이나 사찰의 중요 건물에만 사용하는 겹처마이다. 복화반(覆花盤), 포대공(包袋工), 겹처마 등은 당시 민간 살림집에서는 금기시되던 최고의 장식들이다. 그런데 향단이 이같은 부재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관아 양식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향단을 관아 양식으로 지은 것은 이언적(李彦迪)이 경상도 관찰사로써 관풍(觀風), 즉 민정(民政)을 시찰하는 과정에서 향단에 들렀기 때문이다. 관아 건축은 국왕을 상징하기 때문에 향단을 관아 형식으로 건축함으로써 가문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하였다.
셋째, 향단은 여성 중심적이다. 향단은 어머니가 거주하는 안사랑이 중심이다. 이언적의 어머니 경주손씨 부인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양동마을 여강이씨 뿐만 아니라 친정인 경주손씨 집안까지 관장하는 양동마을 최고의 어른이었다. 어머니를 위해 만든 안사랑을 중심으로 동쪽은 바깥사랑채가 있는 남자의 공간이며, 서쪽은 건넌방과 곳간이 배치되어 있는 여자의 공간이다. 그리고 북쪽에 부엌을 비롯한 생활공간이며, 남쪽은 행랑채이다. 이처럼 안사랑채는 집안의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안사랑채의 안방은 사방으로 문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문만 열면 안과 밖, 남녀의 모든 공간과 소통할 수 있다. 이는 관가정이 남성의 공간인 사랑채가 중심인 것과 대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