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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崔瑩, 1316~1388) 장군은 고려 말에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뛰어난 활동을 했던 무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최영 장군은 고려 개국공신 최준옹(崔俊邕)의 후손이다. 본관은 철원(鐵原)으로 이 곳은 고려시대에는 동주(東州)로 불렸다. 바로 궁예가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다. 최준옹의 증손으로 문종․선종대에 활동했던 최석(崔奭)은 평장사(平章事) 판이부사(判吏部事)를 지냈다. 그의 아들 문숙공(文淑公) 최유청(崔惟淸)은 의종 때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 판이부사(判兵部事)를 역임했으며 최영 장군의 5대조가 된다. 최유청은 8형제를 두었다.
이들 가운데 최당(崔讜)과 최선(崔詵) 계열이 정치적으로 현달하여 그 자손과 사위들이
중앙의 고위직에 포진하였다.
이에 비해 최영 장군의 직계 고조인 최양(崔讓)은 정 8품의 잡직서령에 머물렀으며, 최양의 아들인 최정소(崔貞紹)는 사서(史書)에서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최영 장군의 조부인 최옹(崔雍)은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한 후 해박한 학식을 바탕으로 당시 태손(太孫)인 충렬왕의 사부(師傅)로 발탁되었다.
최옹은 최원중(崔元中)과 최원직(崔元直) 등 아들 둘을 두었는데 최원중은 과거에 합격하여 상서(尙書)를 지냈고 최원직은 사헌규정(司憲糾正 ; 본래 어사대의 감찰어사이나 충렬왕 34년에 사헌규정으로 이름을 고쳤다. 정5품 내지 종6품의 품계)을 지냈다.
최영 장군은 최원직의 아들로 충숙왕 3년(1316)에 태어났다. 풍채가 괴위(魁偉)하고 기운이 장사였다. 16세 때 최원직이 세상을 떠났는데, “너는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汝見金如石]” 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 최영은 見金如石 네 글자를 큰 띠에 써서 평생 지니고 다녔다.
최영 장군은 문관 가문에 태어났으나 과거를 통해 입신하지 않고 무장의 길을 걸었다. 가세가 빈곤하여 과거를 준비하기 어려운 점도 그 이유 가운데의 하나였던 듯 하다. 고려 시대에는 귀족의 자제가 과거를 치지 않고 벼슬을 하려면 음서를 통해 문관이 되거나 정 8품의 산원으로 무관이 될 수 있었다.
최영은 처음 양광도 도순문사 휘하에 있으면서 왜구 퇴치에 공을 세웠다. 37세 되던 공민왕 원년(1352)에는 안우, 최원 등과 같이 조일신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 공로로 호군이 되었고 공민왕 3년에는 대호군으로 승진하였다.
공민왕 3년 원 승상 톡토의 요청에 따라 고려군이 홍건군을 토벌하러 원정을 갈 때 참전하여 장사성의 근거지 고우 공략시에 27회의 전투를 치렀다. 톡토가 기황후에 의해 실각된 후 고려군은 이듬해 회안로(淮安路)에서 홍건군의 공격을 방어했다. 홍건군이 병선 8천여 척을 동원하여 회수 부근에 있는 회안성(淮安城)을 포위 공격하자 최영은 선두에 서서 밤낮으로 전투를 치러 물리쳤다. 퇴각한 적이 다시 공격해 왔으나 여러 차례 창에 맞아 부상을 입으면서도 분전을 거듭하여 적을 모두 죽이거나 포로로 하였다.
공민왕 5년의 반원 개혁시에는 인당과 더불어 압록강을 넘어 역참 8개소를 격파하였다.
공민왕 6년에는 서해․평양․니성․강계 체복사(體覆使)가 되었고 이듬해 왜적이 병선 4백여 척으로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하자 매복 공격으로 격파하였다.
두 차례 홍건 군 침입시에도 이를 격퇴하는데 공을 세워 흥왕토적 일등공신, 수복경성 일등공신에 책록되었다. 또한 별도로 진충분의좌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 칭호도 받았다.
공민왕 13년 정월에는 최유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나 신돈이 집권하면서 계림윤(鷄林尹)으로 좌천되었고 이어 7월 훈작(勳爵)을 박탈당하고 유배 되었다.
공민왕 20년(1371) 신돈이 처형되자 6년 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문하찬성사로 정계에 복귀하였다.
공민왕 22년에는 군 강화책임을 맡은 육도도순찰사가 되어 지방을 돌며 군호(軍戶)를 작성하고, 병선을 제조하며, 장수와 수령들의 승진과 파직을 단행하였다.
공민왕 23년에는 경상도․전라도․양광도 도순문사가 되어 활동했으나 장수의 승급을 독단으로 처리했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한 달 만에 물러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은 곧 탄핵을 주도한 사헌부 대사헌 김속명(金續命) 등을 파직하고 최영에게 진충분의선위좌명정란공신(盡忠奮義宣威佐命靖定功臣) 칭호를 내렸다. 이해 7월 제주도 원정을 떠났고 그 사이 공민왕은 시해되었다.
우왕 대에 최영은 고려군 육성을 도맡아 했고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왜구 토벌 출정을 쉬지 않았다.
우왕 6년(1380) 우왕은 최영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는 교서를 내렸다. 이 교서는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지금 장수들 중에서 전투를 많이 하고 공이 큰 이는 오직 경(卿) 한 사람뿐이다. 더욱이 충성을 다하고 의를 떨쳐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하니 재상 가운데 참 재상이로다.
전(田)․민(民)으로 상을 내리는 것이 통례이나 경의 청백함은 천성에서 나온 것인지라 반드시 사양하여 받지 아니할 것이므로 다만 철권(鐵券)을 주되 옥으로 족자를 만들어 특별한 예를 보인다.
아! 공은 크고 상은 박한 것을 내가 계면쩍게 여긴다.
경이 혹 죄를 지어 그것이 아홉 번에 이르러도 처벌 안할 것이오, 열 번에 이르러도 안할 것이며 자손도 또한 그리 할 것이라. 후대의 임금과 신하들도 내 뜻을 체득하라.
군주가 공을 세운 신하에게는 토지와 노복을 하사하는 것이 상례이나 최영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부친의 유언을 언제나 잊지 않은 것이다. 이성계에게 참형 당할 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평생 동안 나쁜 짓 한 일이 없는데 다만 임견미와 염흥방을 죽인 것이 지나쳤다. 내가 탐욕한 마음이 있었다면 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풀도 나지 않을 것이다.
처형될 때 언사와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죽던 날 개경 사람들은 시장을 열지 않았으며 거리의 어린아이들이나 시골 부녀자나 할 것 없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시신이 길가에 놓여 있었는데 오고 가는 사람들이 모두 말에서 내렸다. 다음은『고려사』「최영 열전」에 나오는 사평(史評)이다.
최영은 성질이 강직하고 충실하며 청렴하였다. 전선에서 적과 대치하여 태연하였으며 화살이 빗발같이 지나가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군대를 지휘함에 있어서는 규율을 엄격히 하여 필승을 기하였으며 전사가 한 걸음만 물러서도 곧 목을 베었다. 그러기에 크고 작은 많은 전투에서 가는 곳마다 공이 있었으며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최영의 나이 16세 때 부친이 임종하면서 훈계하기를 “너는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 고 하였다. 최영은 이 말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재물에 마음을 두지 않았으며 거처하는 집이 초라하였으나 그 곳에 만족하고 살았다. 의복과 음식을 검소하게 하여 간혹 쌀독이 빌 때도 있었다. 남이 좋은 말을 타거나 좋은 의복을 입은 것을 보면 개나 돼지만큼도 여기지 않았다. 지위는 비록 재상과 장군을 겸하고 오래 동안 병권을 장악하였으나 뇌물과 청탁을 받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 그 청백함을 탄복하였다.
항상 대체(大體)를 견지하기에 노력하였으며 조그마한 문제에 구애되지 않았다. 종신토록 장군으로서 군대를 통솔하였으나 휘하 사졸로서 얼굴을 아는 자는 수십 인에 불과하였다.
전시 분망한 가운데도 이따금 시를 읊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어느 날 저녁에 여러 재상과 연구(聯句)를 지었는데 경부흥(慶復興)이 부르기를
하늘은 옛 하늘이지만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로다. 天是古天人不古
하니 최영이 대구(對句)를 놓아 말하기를
달은 명월이로되 재상들은 밝지 못하구나. 月爲明月相無明
이라고 하였다.
남이 불의한 것을 보면 매우 미워하여 통렬히 배격하였다. 당시 이인임, 임견미가 정방제조(政房提調)로 있으면서 권력을 마음대로 하였고 변안열 등이 마음이 맞아 권세를 부렸다. 어떤 이가 벼슬을 구하려 하자 최영은 “그대가 공상(工商)을 하면 벼슬은 저절로 얻을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은 정권을 잡은 자와 뇌물을 쓰는 무리를 나무라는 것이었다.
최영이 정방에 참여한 후부터는 반드시 공이 있거나 재능 있는 자를 골라 채용하였고 등용할 자격이 없으면 사정없이 물리쳤으며 재상들 가운데 영리를 꾀하거나 토지와 백성을 쟁취하는 자, 사정에 끌려 법과 풍기를 훼손하는 자는 모두 바로잡아 주려 하였다. 일찍이 이인임에게 말하기를 “나라가 여러 가지로 곤란한데 공(公)은 수상(首相)으로서 어찌 이를 우려하지 않고 가정 살림에만 마음을 두는가”하였다.
이인임은 아무 말도 못하였다.
언제나 도당(都堂)에 나가서는 정색하고 바른 말을 거리낌 없이 하였고 좌중에서 공명하는 자가 없으면 혼자서 탄식하곤 하였다. 언젠가 남에게 말하기를 “내가 나라 일에 대하여 밤새도록 생각하고 날이 새어 그것을 동료들에게 말하면 여러 재상들 중에서 나와 의견이 같은 자가 없으니 사직하고 은거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성질이 우직(愚直)하였으며 또 배운 바가 없어(無學) 일을 모두 자기 뜻대로 처리하였으며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기를 좋아하여 죄가 죽이기까지 할 것이 아닌 데도 많은 경우에
사형을 면하지 못하였다.
간대부(諫大夫) 윤소종(尹沼宗)이 최영을 평하기를 “공은 한 나라를 덮었고 죄는 천하에 가득하다”고 하였는데 세상에서 이를 명언이라 하였다. 시호는 무민(武愍 ; 이성계가 왕이 되어 내린 시호)이다. 아들 담(潭)은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고려사』는 조선 건국을 합리화하는 입장에서 저술된 것이다.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을 감행한 조민수는「간신 열전」에 들어 있다. 이외에도 이성계의 반대편에 선 많은 사람들이『고려사』「간신 열전」에 들어 있거나 악평을 받았다. 그럼에도 최영 장군을 마구 폄하하지는 못하고 대체로 긍정적인 서술을 하였다. 최영 장군은 장기간 군권을 장악하였고 최고 직위도 누렸다. 파헤치면 비리 혐의나 부정부패 혐의를 찾을 수 있음직 한데도『고려사』나『태조실록』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다.『고려사』를 보면 가능한 한 최영 장군의 허물을 잡아내려고 애쓴 흔적이 뚜렷하나 가만히 따져보면 칭찬하는 내용이 된다.
『고려사』에서 흠잡은 내용은 사람을 많이 죽였고 시세에 어두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인 자들은 백성을 해치는 탐관오리들이었다. 이에는 예외가 없어 우왕을 키운 유모인 장씨마저 우왕의 애원을 물리치고 죽였다. 권력자의 눈치나 보는 대한민국의 검찰을 보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는 토지나 조세 문제를 포함한 국가의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결벽증이라 할 정도로 공사의 구분이 철저하였다. 우왕 5년(1379)에 마경수(馬埛秀)라는 자가 그 아들과 함께 양민을 제멋대로 점탈 은닉한 일이 발각되어 투옥된 일이 있었다. 때마침 재변이 일어나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기 위해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이인임을 비롯한 여러 재상들이 마경수를 석방하려 하자 최영 장군은 “마경수는 양인을 노비로 삼은 것이 서른이나 되고 토지를 점탈한 것이 1백 경(頃)이며, 지방에서 저지른 위선적 행동을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어찌 감히 살기를 바라겠는가”하며 규정된 법을 따르도록 항의하였다. 끝내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켜 마경수는 곤장 107대를 맞고 두 아들과 같이 귀양가다가 도중에 죽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도당(都堂)에 나아가 모든 재상들에게 민의 재산을 강탈하고 토지를 겸병하는 해독을 역설하고 마침내 다 같이 금지할 것을 약속한 서약서를 작성하여 서명을 받아내기도 했다.
『고려사』에서 ‘배운 것이 없다[無學]’ 하였으나 이는 ‘전시 분망한 가운데도 이따금 시를 읊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는 서술과 모순 된다.『용재총화』에도 그의 청빈함과 문재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철성(鐵城) 최영은 그의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늘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見金如石)’ 고 가르쳤으므로 항상 이 네 글자를 큰 띠에 써서 평생 지니고 다녀 잊지 않았다.
그는 국정을 잡아 위의(威儀)를 나라 안팎에까지 떨쳤으나 남에게서 조금도 취하지 아니하여 겨우 먹고사는 정도였다. 당시의 재상들은 서로 초대하여 바둑으로 날을 보내면서 다투어 성찬을 차려 호사함에 힘썼으나 공(公)만은 손님을 초대하여 한낮이 지나도록 찬을 내놓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서야 기장과 쌀을 섞어 지은 밥에다 잡동사니 나물을 차렸지만 손님들은 배고픈 참이라 채반이라도 남김없이 먹고는 “철성 집 밥이 맛이 좋다” 하니,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도 용병하는 술책이오” 하였다.
태조(이성계)가 시중이 되었을 때에 연구(聯句)를 짖기를,
석자 칼끝으로 사직을 편하게 한다. 三尺劍頭安社稷
라고 하였더니 그때의 문사들이 모두 대구(對句)를 찾지 못하였다.
공(公)이 재빨리 한 가닥 채찍 끝으로 천하를 평정한다. 一條鞭末定乾坤
이라 하니 모든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慵齋叢話』券3)
최영 장군은 민의 어려운 처지를 감안하여 정책을 폈는데 다음은 그 실례이다.
서울의 물가가 폭등하여 상인들이 털끝만한 이득도 다투는 형편이었다. 최영은 이를 증오하여 일체 매매하는 물건은 우선 경시서(京市署)에서 가격을 사정하여 세를 받은 표식(稅印)이 있은 연후에 비로소 매매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표식이 없는 자는 쇠갈고리로 등심을 뽑아 죽인다고 공포하고 커다란 쇠갈고리를 시장에 내걸었다. 상인들은 이를 보고 벌벌 떨었다. 그러나 이 일(쇠갈고리로 죽이는 일)은 끝내 시행되지 못했다.
(『高麗史』, 券113,「崔瑩 列傳」)
상인들의 농간으로 물가가 폭등하자 이를 막는 강경 조치를 취한 내용이다. 상인들이 이러한 식으로 폭리를 취하면 민생고가 심해진다. 따라서 상인들에게 일정한 세금을 납부하게 하면서 일정한 가격으로 물품을 판매하게 한 조치였다.
시세에 어두웠다는 것은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초지일관했다는 말이 된다. 그에게 조금의 허물이 있어도 침소봉대하여 사정없는 비난을 받았을 상황임을 생각하면 어떤 인물이었는지 저절로 드러난다.
이것은 정치적 입장을 떠나 그가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최영은 이성계를 신뢰하여 그에 대한 모함이 있으면 적극 옹호하였다.
태조는 최영과 우정이 매우 돈독하였는데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점차로 성하니 사람들 중에서 신우에게 모함하고자 하는 자들이 있었다. 최영이 노하여 말하기를 “이공은 나라의 주춧돌이 되었으니 만약 하루아침에 위급하면 마땅히 누구를 시키겠는가”하였다. 매양 빈객을 연회하려 할 때 최영이 반드시 태조에게 이르기를 “나는 면찬(麵饌)을 준비할 것이니 공은 육찬(肉饌)을 준비하시오”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좋습니다”하였다.
(『太祖實錄』, 券1, 總書)
이인임 이외에도 이성계를 경계할 것을 권한 이들이 있었다. 왕조 시대에 모반죄는 ‘증거’가 있어야 걸리는 것이 아니라 심증만 있으면 충분하였다. 이는 모반죄의 성격상 명백한 증거를 찾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급속히 세력을 키우던 이성계가 무사했던 것은 최영 장군의 비호가 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세상에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들이 적지 않으니 그리 개탄할 일도 못된다.
변계량(卞季良)과 원천석(元天錫)이 시를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哭崔侍中瑩
위엄 떨쳐 나라 빛내던 수염이 성성한 모습 奪威光國鬚星星
말 배우는 거리의 아이도 모두 그 이름 알고 있네. 學語街童盡識名
한 조각 웅장한 마음 응당 죽지 않으리니 一片壯心應不死
천추에 영원토록 태산과 함께 나란하리라. 千秋永與太山橫
都統使崔公被刑三首
其一
밝은 거울이 빛을 잃고 기둥과 주춧돌이 무너지니 水鏡埋光柱石頹
사방의 백성과 만물이 모두 슬퍼하네. 四方民物盡悲哀
빛나는 공적은 마침내 썩는다 해도 赫然功業終歸朽
꿋꿋한 충성심은 죽어도 재가 되지 않으리. 確爾忠誠死不灰
그의 사실 역사책에 가득 실렸건만 紀事靑編曾滿帙
이미 이루어진 황토 무덤, 가련도 하구나. 可憐黃壞已成堆
생각하노니 멀고 먼 저승에 있어도 想應杳杳重泉下
눈을 도려내어 동문에 걸어도 분을 풀지 못하시겠지. 掛眼東門憤未開
其二
조정에 홀로 섰을 때 감히 덤빌 자 없었고 獨立朝端無敢干
오직 그 충의로 온갖 어려움 겪었네. 直將忠義試諸難
온 나라 백성들의 소망을 따라 爲從六道黔黎望
삼한의 사직을 편안케 하였네. 能致三韓社稷安
동열의 그 영웅(이성계)은 낯짝 새삼 두껍고 同列英雄顔更厚
죽지 않은 간사한 자들, 뼈가 오히려 서늘하리. 未亡邪侫骨猶寒
다시 어려운 때를 만나면 누가 계책을 내리오, 更逢亂日誰爲計
가소롭구나, 지금 사람들의 간교한 짓이. 可笑時人用事姦
其三
내 이제 부음 듣고 애도시 지으나 我今聞訃作哀詩
공을 위한 슬픔이 아니라 나라 위한 슬픔이라오. 不爲公悲爲國悲
하늘의 운수 통할지 막힐지 알기 어렵고, 天運難能知否泰
나라 터전이 편안할지 위태할지 정할 수 없구나. 邦基未可定安危
날카로운 칼날 이미 꺾이었으니 탄식한들 무엇하리, 銳鋒已折嗟何及
충성된 마음 항상 외롭다가 끝내 견디지 못했네. 忠膽常孤恨不支
홀로 산하를 대하여 이 노래 부르니 獨對山河歌此曲
흰구름 흐르는 물, 모두 슬퍼하네. 白雲流水摠噫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