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년 전진 왕 부견이 양양을 침공하자 도안(道安)과 제자들은 각기 길을 나누어 떠나게 되었다. 도안은 제자들과 헤어지기 전에 일일이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혜원(慧遠,334-416)도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나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혜원은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부족한 줄은 알았지만 스승의 외면을 받을 정도로 형편없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스승을 인연으로 불교에 귀의한 지 어느덧 25년이었다. 그는 원래 불교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여 13세에 외숙부를 따라 낙양(洛陽)에서 육경(六經)과 노장학(老莊學)을 배웠다. 공부가 깊어지자 당시의 명유(名儒)인 범선자(范宣子)에게 배우고자 했으나 전란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도안이 항산(恒山)에서 불법(佛法)을 가르친다는 명성을 듣고 찾아가 『반야경(般若經)』강의를 들었다. 강의를 듣는 순간 눈에서 비늘이 떨어진 듯한 깨달음을 얻었다. ‘유도(儒道) 등의 아홉 가지 유파는 모두가 쌀겨와 술지게미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탄식한 혜원은 동생 혜지(慧持)와 함께 머리를 깎았다. 혜원은 21살, 도안은 42세였다. 혜원이 밤낮으로 경전을 읽고 외우며 수행 정진하는 모습을 본 스승은 매우 흡족했다. 혜원은 24세부터 강의를 시작했다. 혜원은 실상(實相)을 묻는 손님에게 『장자(莊子)』의 내용을 인용하여 의혹을 풀어주었다. 이후부터 도안은 특별히 혜원에게만은 속가의 책을 허락해주었다. 도안은 혜원의 빼어난 근기와 수행력을 인정하여 ‘중국의 불교는 혜원에게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런 스승이 왜 자신에게는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으실까. 혜원이 다시 스승님께 꿇어 앉아 가르침을 청했다. 도안이 대답했다.
“그대와 같은 사람을 내가 어찌 근심할 일이 있겠는가?”
혜원은 스승과 헤어져 제자 수십 명과 함께 남쪽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형주(荊州)로 가서 상명사(上明寺)에서 주석하였다. 그 후 나부산(羅浮山)으로 가고자 심양(潯陽)에 이르렀는데 여산(廬山)의 봉우리가 맑고 고요해 용천정사(龍泉精舍)에서 머물렀다. 여산은 산세는 웅장한데 물과의 거리가 멀었다. 이에 혜원이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만약 이곳이 우리가 깃들어 머물만한 곳이라면 샘이 솟아오르게 해주시오’라고 하자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맑은 물이 솟아 나와 개울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용천정사를 용천사(龍泉寺)라 했다. 당시 사문 중에서 혜원과 친한 혜영(慧永)이란 스님이 있었다. 혜영은 자사(刺史) 환이(桓伊)에게 부탁해 비좁은 용천사 대신 여산 동쪽에 승방과 불전을 건립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절이 동림사(東林寺)였다. 동림사는 강서(江西)성 북부(北部) 여산의 서쪽 기슭에 있다. 동림사를 근거로 혜원의 사상이 남조(南朝)에 퍼져나가게 된다.
동림사가 완공되자 혜원은 경전 정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제자 법정(法淨)과 법령(法領)을 서역(西域)에 보내 범어 경전 원본을 찾아와 번역하게 했다. 391년에는 계빈국(罽賓國:현 가큐미르)출신 승가제바(僧伽堤婆)스님이 여러 경전에 박식하다는 소식을 듣고 심양에 온 그를 초청해 『아미담심론(阿毘曇心論)』과 『삼법도론(三法度論)』을 번역하게 했다. 혜원은 경전이 완성될 때마다 손수 서문을 짓고 종지를 표시하여 학자들에게 남겼다. 이번 역경 사업에는 80명의 승려와 강주(江州) 자사(刺史) 왕응지(王凝之), 서양(西陽) 태수 임고지(任固之) 등이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왕응지는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의 아들이다.
도를 구하는 혜원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401년에는 서역승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불법에 대해 의논했다. 불야다라(弗若多羅) 스님이 『십송률』의 범본을 외워 구마라집이 진(晋)나라 글로 번역했는데 3분의 이를 시작하면서 불야다라가 세상을 떠났다. 혜원이 항상 번역이 중단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 후 담마류지(曇摩流支)가 이 경을 외운다는 소리를 듣고 편지로 보내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게 했다. 그는 문구가 번다한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요점을 초록하여 20권의 책을 썼고, 『법성론(法性論)』도 지었다. 『고승전(高僧傳)』에 의하면 그의 저서는 10권 50여책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는 『홍명집(弘明集)』, 『광홍명집(廣弘明集)』,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에 단편적으로 산재되어 있을 뿐이다.
혜원이 주석한 동림사는 어느새 동진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많은 귀족들과 지식인들이 혜원을 찾아 동림사로 모여들었다. 유유민(劉遺民), 뇌차종(雷次宗), 주속지(周續之), 필영지(畢穎之), 종병(宗炳), 장채민(張菜民), 장계석(張季碩) 등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혜원에게 귀의했다. 귀의했다고는 하나 그들의 태도는 은둔적이고 비현실적이었다. 그들은 유가(儒家)의 도덕 같은 속박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청담(淸談)에 빠져 있었다. 정치에 대한 부정과 허무주의적인 사상에 젖어 세속을 벗어난 삶을 추구하며 살았다. 오랜 전란을 겪으면서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꺼려하는 데서 온 습관이었다. 이상향을 찾아나서는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 신과 인간의 사랑을 그린 고개지(顧愷之)의 「낙신부도(洛柛賦圖)」가 모두 이 시기에 등장한 작품이다. 노장사상에 젖어 죽림에서 세월을 보낸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출현은 청담사상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혜원의 결단이 필요했다. 이것이 백련사(白蓮社)가 출현하게 된 계기다. 402년 7월28일, 혜원은 승속의 제자 123명과 함께 반야대의 아미타불상앞에서 염불결사운동을 실행에 옮겼다. 백련사는 서방정토를 염원하며 염불 삼매를 닦은 최초의 염불결사로 불교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백련사는 청담에 빠진 귀족들의 은일적인 불교를 실천적인 신앙으로 바꾸었다. 결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죄를 참회하고 정토에 태어날 것을 염원하며 신행생활을 이어갔다. 이로써 여산의 동림사는 동진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 심주, ‘여산고도’, 중국 명, 1467년, 종이에 먹, 166.3×64.5cm, 대북고궁박물원.
에너지가 넘치는 산봉우리가 화면 전체를 꽉 채웠다. 심하게 주름 진 봉우리 사이로 안개같은 구름이 피어난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듯 피어나는 구름 위로 또다시 느닷없는 산봉우리다. 멈추어 있되 움직이는 산. 고요하되 꿈틀거리는 산. 심주(沈周,1427~1509)의 「여산고도(廬山高圖)」가 뿜어내는 기운이다. 누가 동양화의 특징을 여백이라 했던가. 「여산고도」에는 여백이 비집고 들어갈 여백이 없다. 필선은 꼼꼼하지만 산과 산의 연결부분은 확실하지 않다. 산의 내면에서 출렁거리는 동력에 따라 산주름이 겹치고 포개어지기를 거듭한다. 엎치락뒤치락이다. 암벽의 정상은 흰색으로 칠했다. 안개가 흐르는 듯하다. 암벽의 측면은 연하게 색을 넣었다. 세월의 풍화작용이 실감나는 절경이다. 여산이 그냥 여산이 아니다. 기암괴석으로 붙잡힌 마음을 차마 떨치고 갈 수 없기 때문에 여산이다. 돌아서는 선비의 발길이 수시로 주춤해진다. 한번 빼앗긴 마음은 쉽게 수습이 안된다. 명산의 절경을 만나면 가진 마음을 다 털어주는 것이 마땅하다.
기가 센 사람 옆에 있으면 피곤하듯 압도적인 산세를 바라보는 눈도 피곤하다. 그럴 때쯤 폭포가 눈에 들어온다. 수직으로 내리꽂는 흰색 폭포가 시원하다 못해 아플 정도다. 답답했던 심정이 뻥 뚫린다. 이백(李白, 701-762)이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에서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이라 표현했던 심정이 과장이 아님을 알겠다. 산과 바위로 꽉 막힌 구도에 비로소 여백이 생긴다. 여백은 빈 허공만이 아니다. 물도 여백이다. 맺혀있으면 풀어주고 닫혀 있으면 열어주는 실마리가 모두 여백이다. 폭포 때문에 여산의 격정은 분출되지 않고 균형을 이룬다. 동과 정, 강함과 부드러움이 비로소 조화를 이룬다. 아슬아슬하게 걸린 나무다리조차 여산의 절경을 위해 꼭 필요한 소품이다.
사람이 있었던가. 여산의 웅장함에 빼앗긴 마음을 거두려는데 부동자세로 서 있는 선비가 비로소 보인다. 폭포가 화면 아래로 쏟아져 내리기 직전에 발견한 사람이다. 눈여겨보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쳤을 법한 미미한 존재. 대자연 앞에 인간은 얼마나 자그마한 존재인가. 붙박이처럼 서 있는 선비는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여산의 한 모퉁이를 장식하는 작은 돌맹이 같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다. 장쾌하게 쏟아지는 폭포소리에 선비 또한 마음을 빼앗겼다. 눈은 건너편의 소나무에게 귀는 나무 사이로 울려 퍼지는 폭포소리에 빼앗겼다. 나부산으로 향하던 혜원이 여산에서 발걸음을 멈춘 심정이 이해되는 순간이다.
그림 상단에 전서(篆書)로 여산고(廬山高)라는 제목과 함께 장문의 시가 한 수 적혀 있다. 심주는 41세 때 스승 진관(陳寬)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여산고도」를 그렸다. 결국 스승의 고매한 인격을 여산에 빗대어 노래한 그림이다. 실제로 심주는 여산을 다녀온 적도 없었다. 마음속에 들어있는 웅장한 산의 모습을 그렸을 뿐이다.
심주는 「여산고도」뿐 아니라 「벽오청서도」도 그린 작가다. 강세황이 화보를 보고 방(倣)했다는 「벽오청서도」의 원작자다. 그런데 「여산고도」와 「벽오청서도」는 한 작가의 작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심주의 개성은 「벽오청서도」에 더 잘 드러나 있다. 반면 「여산고도」에는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의 한 사람인 왕몽(王蒙, 약 1308-1385)의 흔적이 짙게 배여 있다. 공간을 거의 남기지 않고 화면을 꽉 채운 구도와 우모준(牛毛皴)이 그러하다. 우모준은 소의 털같이 짧고 구불구불한 필선을 잇대어 바위 표면을 묘사하는 기법으로 왕몽의 ‘트레이드 마크’다.
심주는 오파(吳派)를 대표하는 문인화가다. 오파는 명나라 문화의 중심지인 소주(蘇州)를 중심으로 형성된 화파(畵派)로 소주의 옛 지명 오(吳)를 따라 오파라고 불렸다. 오파는 원말사대가의 화법을 바탕으로 개성 있고 문기 넘치는 고아한 문인화의 세계를 성취했다. 오파의 전통은 심주에게서 문징명(文徵明)과 그의 아들 문가(文嘉), 조카 문백인(文伯仁), 진순(陳淳), 육치(陸治), 전곡(錢谷)등이 계승하였다. 명대를 대표하던 오파는 명나라 후기까지 별다른 변화 없이 반복적인 화풍을 고집하다 힘을 잃게 된다. 모든 것이 제행무상이다. 그러나 오파가 추구했던 문인취향의 예술적 경지는 그림을 통해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후대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모든 것이 불생불멸이다.
혜원은 세상을 마칠 때까지 동림사에서 한 발자국도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손님이 찾아오면 절 앞에 있는 계곡 호계(虎溪)에서 작별인사를 했다. 그런데 딱 한 번의 예외가 있었다. 혜원이 유생(儒生)인 도연명(陶淵明,365-427)과 도사(道士)인 육수정(陸修靜,406∼477)을 배웅할 때였다. 혜원은 두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에 도취한 나머지 호계를 지나쳐 버렸는데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 사실을 알고 크게 웃었다고 전해진다. 유불선(儒佛仙)의 화합을 강조한 이 설화는 송대(宋代)의 석각(石恪)이 「호계삼소도(虎溪三笑圖)」라는 화제(畵題)로 처음 그린 이후 많은 화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세 사람의 생존년대를 살펴보면 역사적인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혜원이 평생을 여산에서 살다보니 생겨난 이야기일 뿐이다.
혜원은 당시 실권자인 환현(桓玄)이 여산 밖으로 나오라고 요구했음에도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혜원은 출가사문은 왕가에 경례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지어 정치권력에 대한 승가의 독립성을 주장했다. 환현은 그런 혜원을 공경하여 ‘진실로 태어나서 아직 보지 못한 인물이다’고 찬탄했다. 환현이 계행에 어긋난 사문들을 환속시킬 때 여산만은 제외하라고 지시한 것도 혜원에 대한 믿음과 존경심 때문이었다. 혜원은 외부의 정치상황과 상관없이 스스로 승단의 조례를 세우고 규제를 강화해 사문으로서의 본분을 지켜나갔다. 30여 년 동안 여산을 떠나지 않고 수행정진하던 혜원은 412년에 입적했다. 76세였다.
혜원이 중심이 된 백련사는 스님의 입적 후 지속적으로 유지되지는 못했다. 제행무상이다. 그러나 혜원스님이 시작한 신앙공동체는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까지 영향을 미쳤다.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백련사를 본받은 각종 결사가 이 땅에서 계속되었다. 여산이 명산이 된 것은 그곳에서 가르침을 행한 혜원이 있기 때문이다. 혜원이 곧 여산이다.